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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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郭澄之생몰연도 불명.
동진의 인물. 자는 중정(仲靜). 병주 태원군(太原郡) 양곡현(陽曲縣) 출신.
2. 생애
어릴 적부터 생각에 재치가 있는데다, 눈치가 빠르고 행동이 민첩하여 홀로 두 사람분의 몫을 해냈다. 조정에 출사하여 상서랑을 지내던 중 보국장군 제갈장민이 곽징지를 불러 자의참군으로 삼으려 하자 거절하였고, 얼마 뒤에 남강상(南康相)으로 옮겨졌다.의희 6년(410년) 4월, 노순이 난을 일으키고 강주자사 하무기를 살해하니, 곽징지는 관할하던 지역을 버리고 수도 건강(建康)으로 겨우 도망쳐왔다. 이때 과거의 일로 앙심을 품고 있던 제갈장민은 조정에 상소를 올려 곽징지가 노순이 반란을 꾀하는 걸 알고도 눈감아주었다며 참할 것을 청했지만, 유유는 곽징지에게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고 상국 참군으로 삼았다. 이후 곽징지는 유유를 따라 북벌을 수행했고, 장안 공략전에도 참가하였다.
후진을 멸망시키고 북벌에 성공한 유유는 뒤이어 서쪽을 정벌할 뜻을 품었으나, 대부분의 부하들이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때 아무 말도 꺼내지 않던 곽징지가 서쪽을 바라보고 왕찬의 시 한 구절을 읊었다.
"남으로 내려와 패릉(霸陵)의 언덕을 오르고, 머리를 돌려 장안을 그리워 하노라."
유유는 그 뜻을 깨닫고 장안에 병력을 배치한 뒤, 군대를 돌려 남쪽으로 돌아갔다. 귀국한 후, 곽징지는 상국 종사중랑으로 옮겨졌고, 남풍후(南豐侯)에 봉해졌다. 그리고 재직 중에 세상을 떠났다.곽징지는 생전에 10권의 문집을 남겨 세상에 알렸다고 하는데, 위진남북조 시대의 여러 명사들의 일화와 그들에 대한 평가를 소개한 《곽자(郭子)》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전부 전란으로 멸실되어 남아있지 않다. 후대에 나온 일화집인 《 세설신어》가 명사들의 일화를 수록할 때 《곽자》의 내용을 많이 참조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