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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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郭汜생몰연도 미상
전조의 인물. 자는 자유(子遊). 병주(幷州) 상군(上郡) 출신.
2. 생애
현(縣)의 병졸을 지내던 아버지 곽사(郭士)는 무당과 함께 길을 가던 중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났다. 그때 무당이 말했다."저 여인은 귀인을 낳을 상이고, 그대 역시 귀인의 상을 타고 났으니, 서로를 받아들인다면 마땅히 그대의 가문은 흥하게 될 것이라네."
그리하여 곽사는 그 여인에게 바로 청혼하여 처로 맞아들였고, 둘 사이에서 아들 곽사(郭汜)를 태어났다.곽사는 장성하여서도 키가 7척도 안 되는 단신이었고, 얼굴 또한 무척 추하여 외모가 볼품없었다. 천성은 비록 순박했으나 말이 더디고 지혜도 없어 아버지처럼 현의 병졸 신분에 머물렀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런 처지에 분함을 느낀 곽사는 안평(安平)으로 유학을 가서 조공요(趙孔曜)를 스승으로 섬겼다. 조공요는 그를 보고 기뻐하며 말하길,
"지금 그대는 공작의 기골을 갖추고 있으니, 반드시 부귀를 누릴 수 있을 것이오."
이후 곽사는 조공요 밑에서 공부한 끝에 마침내 임관에 성공하여 전조의
유요를 섬겼고, 여러 현직을 두루 역임하다가 관직이 어느새 시중, 겸사도에 이르렀다.광초 2년(319년) 2월, 근준의 부하 근명(靳明)을 무찌른 석륵은 좌장사 왕수(王修)를 보내 유요에게 승전 보고를 올렸다. 이에 유요는 곽사를 보내 석륵을 태재, 영 대장군, 조왕(趙王)으로 삼고 경필(警驆)을 허하였다. 이때 왕수도 열후에 봉작되었는데, 왕수의 시종이었던 조평락(曹平樂)이 은밀히 유요를 알현하고 왕수가 온 것은 유요군의 허실을 살피기 위함이다라 고하였다. 이를 들은 유요는 재빨리 사람을 파견해 곽사로 하여금 다시 되돌아오게 하고, 저자에서 왕수를 참수하였다.
광초 3년(320년) 6월, 장수교위 윤차(尹車), 장수 해호(解虎)가 파족 추장 구서(句徐), 사팽(厙彭)과 반란을 모의하다 발각되었다. 유요는 먼저 윤차와 해호부터 참수한 후, 구서, 서팽을 비롯한 50명을 아방(阿房)에 가둬 죽였는데, 이때 파저족을 자극해선 안 된다며 반대하는 광록대부 유자원(游子遠)을 잡아 가뒀다. 과연 유자원의 예상대로 파족들이 다른 추장인 구거지(句渠知)를 중심으로 뭉치고 국호를 '대진(大秦)'으로 하여 반란을 일으키니, 저족, 강족, 갈족의 300,000여 무리도 호응하면서 관중은 큰 혼란에 빠졌다. 유자원이 옥중에서 다시 직언을 올리자 유요는 당장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곽사, 유아, 호연안 등이 말려 그만두고 오히려 사면시켜주었다. 이후 유자원을 거기대장군으로 삼아 반란을 토벌케 함으로써 4족의 난은 진압되었고, 파족의 구씨(句) 일족 5,000여 호가 유자원에 의해 멸족되면서 관중은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