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7 11:37:47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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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Greatest Britons
※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
TOP 10
<rowcolor=#ffe> 1위 2위 3위 4위 5위
윈스턴 처칠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 다이애나 스펜서 찰스 다윈 윌리엄 셰익스피어
<rowcolor=#ffe> 6위 7위 8위 9위 10위
아이작 뉴턴 엘리자베스 1세 존 레논 호레이쇼 넬슨 올리버 크롬웰
11위~100위
<rowcolor=#ffe>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어니스트 섀클턴 제임스 쿡 로버트 베이든 파월 알프레드 대왕 아서 웰즐리
<rowcolor=#ffe>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마거릿 대처 마이클 크로포드 빅토리아 여왕 폴 매카트니 알렉산더 플레밍
<rowcolor=#ffe>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앨런 튜링 마이클 패러데이 오와인 글린두르 엘리자베스 2세 스티븐 호킹
<rowcolor=#ffe>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윌리엄 틴들 에멀린 팽크허스트 윌리엄 윌버포스 데이비드 보위 가이 포크스
<rowcolor=#ffe>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레오나르드 체셔 에릭 모어캠브 데이비드 베컴 토머스 페인 부디카
<rowcolor=#ffe>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스티브 레드그레이브 토머스 모어 윌리엄 블레이크 존 해리슨 헨리 8세
<rowcolor=#ffe>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찰스 디킨스 프랭크 휘틀 존 필 존 로지 베어드 어나이린 베번
<rowcolor=#ffe>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보이 조지 더글러스 베이더 윌리엄 월레스 프랜시스 드레이크 존 웨슬리
<rowcolor=#ffe>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아서 왕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로버트 스콧 이넉 파월
<rowcolor=#ffe>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클리프 리처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프레디 머큐리 줄리 앤드류스 에드워드 엘가
<rowcolor=#ffe>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조지 해리슨 데이비드 애튼버러 제임스 코널리 조지 스티븐슨
<rowcolor=#ffe>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찰리 채플린 토니 블레어 윌리엄 캑스턴 바비 무어 제인 오스틴
<rowcolor=#ffe>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윌리엄 부스 헨리 5세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로버트 1세 밥 겔도프 ( 아일랜드인)
<rowcolor=#ffe>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무명용사 로비 윌리엄스 에드워드 제너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찰스 배비지
<rowcolor=#ffe>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제프리 초서 리처드 3세 J. K. 롤링 제임스 와트 리처드 브랜슨
<rowcolor=#ffe>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보노 ( 아일랜드인) 존 라이든 버나드 로 몽고메리 도날드 캠벨 헨리 2세
<rowcolor=#ffe>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J. R. R. 톨킨 월터 롤리 에드워드 1세 반스 월리스
<rowcolor=#ffe>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리처드 버튼 토니 벤 데이비드 리빙스턴 팀 버너스리 마리 스톱스
출처
같이 보기: BBC 선정 최악의 영국인, 위대한 인물 시리즈 }}}}}}}}}
<colbgcolor=#000><colcolor=#fff>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Thomas Edward Lawrence
파일:Te_lawrence.jpg
별명 아라비아의 로렌스
Lawrence of Arabia
출생 1888년 8월 15일
웨일스 트레머독
사망 1935년 5월 19일 (향년 46세)
잉글랜드 도싯 주 보빙턴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직업 고고학자, 작가, 군인
학력 옥스퍼드 대학교 지저스 칼리지
서훈 바스 훈장
우수 복무 훈장
레지옹 도뇌르 훈장
무공 십자 훈장
군인 경력
복무 영국 육군
헤자즈 왕국
영국 공군
1914년 ~ 1918년
1923년 ~ 1935년
최종계급 육군 대령
공군 일병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 아랍 반란
- 다마스쿠스 함락
- 므깃도 전투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중동 탐사2.3. 종전 후
3. 매체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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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 고고학자, 작가, 군인.

정치, 학문, 문학, 예술, 운동, 전투 등 모든 분야에 천부적 재능을 보인 데다 도덕적으로도 흠잡을 데 없던 초인(超人)으로 유명하다. 영국 본국에서 '가장 낭만적인 영웅'이란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다. 아랍 민족의 독립을 위해 힘썼다.

1962년 그의 일대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통해 사후에도 유명세를 얻었다.

2. 생애

2.1. 유년기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는 1888년 8월 16일 웨일스의 작은 소도시 트리머독에서 태어났다.

로렌스는 어릴 때부터 자기 단련에 미친 사람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피곤하면 눕는데, 이 로렌스는 철이 들 무렵부터 체력을 단련시키려고 굶었다. 자기가 먹을 걸 안 먹고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물 안 먹고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체력과 근력의 한계는 어디인지 끊임없이 시험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체구는 상당히 작아 키가 166cm에 불과했다고.[1]

사람들과의 신체적 접촉을 극도로 싫어했는데 사람을 만나면 악수를 하지 않으려고 반사적으로 두 손을 등 뒤로 숨기는 버릇이 있었다.

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로렌스가 섹스를 혐오하기도 했기에, 로렌스는 평생 결혼은 물론 여자와 교제했던 기록이 없었다. 이 때문에 무성애자라고 보는 시각도 많은편. 그러나 동성애자였다는 의견도 많다. 동성애를 형법으로 억압하던 영국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면 로렌스가 공개적으로 자신의 성적지향을 밝히는 것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는 점이 분명함을 고려해야하기에, 자신이 이성애자가 아닌 이상 자신의 사적 성생활을 타인에게 알리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2] 무엇보다도 그의 자서전에 "S.A."라고 이니셜이 적힌 인물에게 자신의 사랑을 헌정하는 시가 있는데, 이 인물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밝혀진바가 없으나, 많은 학자들이 로렌스와 함께 고고학 발굴지에서 함께 일하며 지냈던 살림 아흐메드(Selim Ahmed)라고 유추하고 있다.[3] 게다가 로렌스가 살림 아흐메드를 직접 찍은 사진도 현재까지 남아있으니... 다만 이를 '완벽'하게 뒷받침하는 것은 아니라, S.A가 아라비아 민족을 은유하는 것이니, 또 다른 인물이니 하는 가설들이 많다. 한면 로렌스는 자신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남성커플들을 많이 보았으며, 그들이 사랑스럽고 행복해보인다고 밝히기도 했다.[4] 또한 자신의 자서전 속에서도 로렌스는 동성애에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이 때문인지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동성 강간신이 나오기도 했는데 이는 영화적 창작이다.[5]

고등학교 시절부터 고고학 탐구에 재능을 발휘하고, 옥스퍼드 대학교의 사학과에 진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한다. 이후 첩보원 신분 겸 유프라테스 강에서 발굴 작업을 하던 대영박물관 원정대의 일원으로 특파되어, 1914년까지 메소포타미아, 소아시아, 그리스, 이집트 등지를 조사했다. 이 기간 동안 로렌스는 아랍인들의 문화 및 언어를 배웠다. 원래는 이렇게 고고학자가 될 예정이었다.

2.2. 중동 탐사

1914년 1월 로렌스는 영국군의 지원 아래 시나이 반도의 네게브 지방에 대한 고고학 탐사를 진행하였다. 물론 이는 순수한 고고학 탐사가 아니라 영국군에게도 중요한 탐사였는데 향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돌입시 오스만 군대가 이집트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나이 반도를 지나야해 시나이 반도는 이집트 방위에 있어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이후 로렌스는 바로 영국군에 입대하지는 않았으나, 같은 해 정보 장교로 임명되어 10월에 카이로에 있는 아랍 부서국으로 부임한다.

1915년이 되면서 아랍 민족주의 열풍이 불기 시작하여 아랍 반란의 기미가 점점 보이기 시작한다. 당시 영국은 이라크 에미르였던 샤리프 후세인과 접촉하게 되는데 후세인은 오스만 제국에 반기를 드는 대신 헤자즈,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포함한 아랍 국가에 대해 영국이 독립을 보장해줄 것을 요구하였다.[6] 10월이 되도록 영국이 답을 내놓지 않자, 후세인은 오스만 제국 편에 붙어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안그래도 갈리폴리 전역에서 곤욕을 치르고 있던 영국은 결국 헨리 맥마흔 경의 편지를 통해 신 아랍 국가의 독립을 보장해주기로 한다.[7] 이에 따라 로렌스는 1916년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파견되어, 아랍 반란을 지원하기 시작한다. 당시 영국은 1차 세계대전의 적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석유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아랍을 이용했고 아랍인들 역시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국의 도움을 받아들인 것이다.

2.2.1. 1916년 아랍 반란

파일:사우디 로렌스 얀부.jpg

로렌스가 영국과의 보급을 위해 머물던 얀부의 저택

1916년 6월 아랍 반란이 일어나고 같은 해 10월 로렌스는 헤자즈로 파견된다. 그는 샤리프 후세인의 세 아들들과 면담을 하였는데 그중 파이살이 아랍 반란을 이끄는 데 적격자로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11월 연락 장교로 파견될 예정이었던 S.F. 뉴컴 대신 로렌스가 영국-아랍 간 연락 장교로서 임시로 파이살 왕자의 곁에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로렌스와 파이살은 메디나로부터 오스만이 아랍 반란군의 거점을 위협하지 않도록 하고, 시리아에서부터 메디나로 이어지는 철도에 대해서 지속적인 파괴공작을 벌였다.

당시 파이살 왕자와 로렌스가 세웠던 아랍 반란군의 전략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오스만 제국의 거점이었던 메디나를 지속적으로 위협하되, 점령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메디나는 메카 다음으로 중요한 이슬람의 두 번째 성지였고 당시 주둔 중이었던 오스만 군도 질병과 포위 속에 약체화되어있어 마음만 먹으면 점령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아랍 반란군이 메디나를 점령하지 않는 대신 시리아-메디나 간 철도를 지속적으로 파괴하고 다님으로써 오스만 제국은 메디나를 유지하기 위해 병력을 철도 복구 및 수비에 쓸 수밖에 없었고 이런 이유로 아랍 반란군의 거점에 대한 대대적인 공략이 불가능하였다. 둘째는 아랍 반란군의 진격 방향으로 남쪽으로부터 다마스쿠스를 향해 북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진격 전략은 영국과 프랑스 양국을 긴장시켰는데 당시 영프 양국은 사이크스-피코 협약을 통해 전후 중동 지역 분배에 대해 이야기를 마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아랍 반란군의 진격 방향은 시리아를 향해 북진으로 정해졌다.

이후 S.F. 뉴컴이 도착하였고 로렌스는 그에게 연락 장교 임무를 넘기고 떠날 준비를 하였으나 파이살 왕자가 나서서 계속 자신을 보좌하도록 강하게 요청하였고 결국 로렌스는 1918년 다마스쿠스 함락 때까지 파이살 왕자의 최측근으로서 전쟁을 수행한다.

2.2.2. 아카바 함락과 다마스쿠스 함락

1917년 로렌스는 아랍 반란군과 함께 홍해 근처 요충지였던 아카바 공략에 나선다. 로렌스와 아랍 반란군은 오스만 군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공격을 가했는데 그것은 바로 사막으로부터의 공격이었다. 프랑스가 방해할 것을 염려한 로렌스는 자신의 상관에게 구체적인 공격 계획을 보고하지 않았으며, 1917년 7월 6일 아카바 공략에 성공한다.

1918년, 오스만 제국에서 로렌스에 대한 현상금을 걸었는데 처음에는 5천 파운드였으나, 나중에는 2만 파운드까지 올라갔다.

로렌스는 다마스쿠스 함락에도 기여하였으나, 정작 다마스쿠스 함락 당시엔 그는 다른 곳에 있었으며 함락 몇 시간 이후에 다마스쿠스에 들어갔다. 다마스쿠스에서 그는 파이살 왕자가 아랍 독립국을 세우기 위한 행정 기반을 닦는 데 도움을 주었다.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한 시리아 아랍 왕국이 이후 탄생했지만 이 왕국은 사이크스-피코 밀약을 내세운 프랑스가 군대를 파견하여 다마스쿠스를 점령해버리는 바람에[8] 1920년 멸망하게 된다.
파일:FeisalPartyAtVersaillesCopy.jpg
파리 강화 회의 당시 파이살 1세 대표단[9]

로렌스는 전쟁 막바지에 자신의 상관들에게 아랍 독립국 건설에 대해 지속적으로 설득하였으나 영프 양국은 이전에 맺은 협약을 그대로 실천에 옮겼으며 결과적으로 로렌스가 바랐던 아랍의 진정한 독립을 박살내고 이들 지역[10]들을 위임통치령, 보호령이라는 이름 하에 사실상 영프의 식민지로 삼아버렸다. 그리고 이는 21세기, 바로 지금 이 순간까지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중동 분쟁의 단초를 제공한다. 물론 이러한 분쟁들의 원인을 제공한 영국 프랑스는 세계적인 비난 여론에도 신경도 안쓴 채 위선자 행세를 하고 있는 중이다.

2.3. 종전 후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으나 로렌스는 전쟁이 끝나자 고국인 영국으로 돌아가 신분과 이름을 숨기고 은거해버린다. 자신과 영국이 주도하였던 중동의 독립 운동이 결국 영국과 프랑스의 중동 지역에 대한 식민지 점령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아랍 각국의 이슬람교 수니파 시아파, 아랍인 쿠르드인 등 소수민족과의 갈등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빚은 데다, 전쟁 중 겪은 정신적 충격이 겹친 탓이었다.

그래서 그는 속세를 떠나 작가가 된다. 작가가 되어서 쓴 작품이 자신의 회고록인 지혜의 일곱 기둥이다. 그는 마음만 먹었다면 국회의원이나 저명한 정치인, 혹은 영화배우가 될 수도 있었으나, 세상의 관심으로부터 완전히 사라지기 위해, 30대의 나이에 영국 공군에 몰래 이등병으로 입대한다. 오래지 않아 공군 내 같은 부대 사람들은 이 중년의 이등병이 저 유명한 로렌스라는 걸 알아차렸지만 로렌스를 배려해 아는 척하지 않았다. 공군 입대 후 로렌스는 각종 진기한 이야기를 남긴다. 팔팔한 20대도 통과하기 어려운 특수 훈련을 최우수 성적으로 마치는가 하면, 이등병 신분으로 비행기 추락 사고의 수습을 지휘해 조종사를 살려내기도 하고, 자신의 정치적 인맥을 이용해 고통받는 사병들의 복지를 개선시켜 주려고 노력도 했다.

1935년 십 년간의 병역을 수행하고 만기 제대했으나, 바로 그 해 영불해협 근처 클라우즈힐에서 자신이 애용하던 오토바이[11]를 타다 사고로 사망했다. 이때가 그의 나이 47세였다. 그의 유해는 5월 21일 모턴 교회에 매장되었다

3. 매체

  • 배틀필드 1: 베두인들의 해방 전선 캠페인 주조연으로 등장한다.
  • 아라비아의 로렌스
  • 언차티드 3: 로렌스의 행적이 주 소재가 된다. 게임에서 네이트는 로렌스가 오토바이 사고로 죽은 것이 아니라 암살당했다고 주장한다.
  • 영 인디아나 존스: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의 TV 드라마 버전. 1차대전의 비중이 높은데 로렌스가 여기서 조연으로 심심찮게 나온다.
  • 케이의 리포트: 스트라이크 위치스의 공식 동인지로 거기에 등장한 적 있다.
  • 프로메테우스: "비결은 말이네 윌리엄 포터. 신경 안쓰면 되네, 아플거란걸.."라는 대사를 했다.
  • Hearts of Iron IV: 카이저라이히에서는 영국이 무너지고 세워진 사회주의 국가인 브리튼 연방에서 등장한다. 브리튼 연방이 독일 제국과 전쟁중이라면 제국의 후방에 침투해 공장에 사보타주를 하고 영웅적으로 돌아와 "게르마니아의 로렌스"라는 칭호를 얻고 4레벨 원수로 사용할 수 있다. 브리튼 연방에 전체주의인 오스왈드 모슬리[12]가 집권해 강압적인 통치를 일삼으면 로렌스가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다. 쿠데타 후에는 온건파에 권력을 넘길 수도 있고 로렌스가 국가 지도자가 되어서 독재를 할 수도 있지만 사회주의자들을 물리치고 캐나다로 피난한 왕실을 다시 불러와서 영국을 재건할 수도 있다.
  • Sabaton의 Seven Pillars of Wisdom

4. 기타

  • 아랍 쪽에서는 위의 내용은 모두 거짓이며 로렌스는 아랍 반란에서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 제기된다. 대표적인 것이 쉴레이만 무서가 지은 <아랍이 본 아라비아의 로렌스>. 또한 국방tv에서 방영했던 토크멘터리 전쟁史 40부 독립전쟁특집 세계편에서 이 로렌스에 대해 말하는데 로렌스 스스로도 자신히 한 일은 아랍인들을 지원하고 단순 연락장교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고 한다. 다만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부터가 누가봐도 과장이 섞여있는 내용이라 실제 역사를 파악할 목적이라면[13] 어차피 걸러서 봐야 한다. 로렌스가 스스로에게 내린 평도 겸손과 자조가 섞인 것이다. 아랍의 의견은 당시 언론에서 로렌스의 행적을 과장 보도하고 아랍 민족을 야만인으로 평하던 정서에 대한 반발이었다.
  • 현대 오토바이 헬멧의 창시자 격의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직접 발명한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이 오토바이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을 본 의사가 헬멧의 중요성을 깨닫고 개발하고 상용화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1] 다만 당시 영국 남성의 평균 신장이 170cm 정도인 점을 고려하면 엄청 작은 키는 아니다. [2] 이는 소도미법이 철폐되기 전 역사적 인물들 중 미혼이거나 자신의 사적 성생활 등이 공개되지 않은 인물들에게 늘 동성애자 의혹이 붙는 가장 큰 이유이다. [3] 살림 아흐메드는 1918년에 발진티푸스로 사망했다. [4] I've seen lots of man-and-man loves: very lovely and fortunate some of them were. [5] 게다가 해당 영화가 만들어진 시절도 여전히 동성애혐오가 강하던 시절이다. [6] 웃긴 건 영국은 2차대전에서도 이 짓을 똑같이 반복해 중동과 인도 등지에서 독립을 대가로 식민지 병력을 징병했고, 1차대전 당시 속은 적이 있는 팔레스타인의 아민 알후세이니 같은 양반은 아예 나치 독일에 협력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혐성은 어디 안가서 전쟁 막바지에 입 싹 닫을 뻔했다가 종전 직전 클레멘트 애틀리의 노동당 내각이 들어서는 바람에 다행히 대부분 독립에 성공했다. 만약 이때도 독립에 실패했으면 대영제국은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악의 제국이 되었을 것이다. 괜히 역덕들에게 혐성국이니, 나치보다 더한 놈이니 소리를 듣는게 아니다. [7] 아직 유럽에서의 전쟁이 한창이던 1916년, 영국과 프랑스는 일찌감치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통해 오스만 제국령 중동을 어떻게 갈라먹을지 선을 다 그어놨었다. 그리고 이 비밀스런 협정은 1917년 소련에 의해 세상에 폭로되는데, 러시아 제국도 당시 조약에 끼어들었기 때문에 이 정보가 그대로 소련에게 넘어가버렸기 때문이다. [8] 그래서 시리아는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영국에게 의존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이크스-피코 밀약에 의해 이미 1차대전 도중 선긋기는 끝나버렸고, 영국은 요르단과 이라크 지역의 지배권을 지키기 위해 프랑스의 시리아 침공을 막지 않고 묵인해줬다. [9]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루스탐 하이다르 이라크 왕국 경제 장관, 누리 알 사이드, 파이살 1세,
로사리오 피사니 프랑스군 대위(파이살 1세 뒤),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영국군 대령, 미확인 (파이살 1세의 노예로 추정), 타신 카드리 대위.)
[10] 시리아, 이라크, 요르단, 쿠웨이트, 레바논 [11] 사족으로 이 오토바이가 Brough superior SS100. 로렌스는 이 브랜드 오토바이를 8대나 가지고 있었고 마지막으로 탔던 건 런던의 제국 전쟁 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12] 실 역사에서는 영국 파시스트 연합을 이끌던 파시스트였으나 그 전에는 노동당 경력도 있는 철새 정치인이었다. 사실 당시 유럽에서 파시스트로 유명한 양반들 중 극좌 경력이 없었던 인물이 더 드물다. [13] 영화 자체는 명작이라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