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군이
독소전쟁에서 처음 실전에 사용했던 대전차용 항공폭탄이다. 이 폭탄은 1발에 2.5 kg 정도로 작고 가벼운데, 탄체 내부에는 1.5 kg의
성형작약이 내장되어 있어서 60~70 mm 두께의 장갑판을 관통하는 위력이 있었다. PTAB 항공폭탄은 주로 지상 공격기
일류신
Il-2의 폭탄창에 직접 280발을 장착하거나 또는 1발에 48발이 수납된 집속폭탄을 4발 장착할 수 있었다. PTAB가 주로 명중하는 부위는
전차의 장갑이 얇은 차체나 포탑 상부, 그릴로 덮은 엔진실 상부 같은 곳이어서 당대의 어떠한
중전차라 하더라도 관통하기에 충분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제22중앙실험설계국(ЦКБ-22)에서 기술자로 근무하고 있던 이반 A. 라리오노프(Ива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Ларионов : 1906~1979)는 처음에 무게 10 kg의 좀 더 큰 탄체를 구상해
1942년에는 시제탄까지 만들었지만, 실험 결과 관통력이 필요 이상 크다는 것을 깨닫고 1/4 무게의 경량 폭탄을 설계하게 된다.
독소전이 한창이던
1943년 초에 Il-2를 장비한 공격기연대에 먼저 보급되었고, 같은 해
쿠르스크 전투에서 처음 쓰였다. PTAB 폭탄은 가볍고 작아서 단좌
전투기인
Yak-9에도 수십 발을 장착할 수 있었고, 특히 전투폭격기로 개량된 Yak-9B의 보조 무장으로 흔히 쓰였다. 뿐만 아니라, 구식화된 복엽 훈련기인 폴리카르포프
Po-2에도 장착할 수 있었다.
이처럼 여러 기종에서 흔히 쓰이게 되자 PTAB의 소모량은 순식간에 크게 늘어났다. 소련군의 기록에 따르면 1943년 말까지 무려 1,171,340발의 PTAB이 투하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 소모량은 더욱 늘어나서
1944년에는 5,024,822발까지 거의 5배나 폭증했으며
1945년 4월까지 3,242,701발, 모두 합쳐서 940만발의 PTAB가 독일군의 머리 위에 죽음의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1발 크기가 대략 페트병 크기인 PTAB 폭탄이 48발 내장된 PTAB-2.5-1.5(ПТАБ-2,5-1,5) 집속탄을 100 m 고도에서 떨어뜨리면 탄체가 흩어지면서 폭 15 m, 길이 200m의 면적을 커버했다. 종래대로라면 수평 폭격시 빠른 속도로 기동하고 있는 전차를 직격할 확률은 전통적으로 매우 낮았으나, 각 탄자가 확산되는 이 폭탄의 경우 대상을 타격하는 명중률은 극히 높았다. 장갑 관통력은 명중 시의 각도에 따라 최소한 60mm로 시작해 90도로 직격될 경우는 최대 100mm까지 다양했다, 이러한 관통력 덕분에 정면에서도 2차 대전 전차들에겐 위협적이었고, 항공 무장의 특성 상 안 그래도 장갑이 얇은 전차의 상부를 향해서 사용되니 적중만 한다면 굉장히 위력적이었다.
독일군이 자랑하던 중전차인
6호 전차 티거조차도 포탑의 지붕과 차체 상부 철판의 두께는 25mm에 지나지 않았고,
5호 전차 판터는 16~18mm에 불과했던 탓에 일단 명중되면 어디든 피해를 입히거나 전차 승무원을 살상할 능력이 있었다.
독일군의 전투 기록을 살펴봐도 이 신형 폭탄의 위력을 잘 알 수 있다.
무장친위대 제3 SS기갑사단 토텐코프는
쿠르스크 전역에서 하루에 270대의 전차와 각종 장갑차량을 잃은 사건도 있었다.[2] 이 전투에서 조사된 PTAB의 폭격 밀도는 2,000발 이상이 차량에 직접 명중해 피해를 입혔다고 기록하고 있다. PTAB의 매운 맛을 본 독일군은 기갑 부대의 제대 간, 차량 간 간격을 넓혀 그에 대응했다. 그것으로 공습의 피해는 줄일 수 있었지만, 그러나 제대 간 차량 간 거리가 적정한 간격 이상으로 벌어지면
전투효율 또한 줄어들어 소련 지상군 간의 전투에서는 손해를 보아야 했다. 물론 이동 중 혹은 집결지에 있을 때 공습을 당하면 이런 대응책도 불가능했겠지만.
이 무기를 만들어낸 이반 라리오노프는 1944년 1월에 그 공로를 당으로부터 인정받아 레닌 훈장을 받았고, 승전 후인
1946년에는 스탈린 상을 수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