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0 22:20:56

7월 위기

파일:7월위기만평.jpg
당시 상황을 요약한 미국의 만평. 주요 당사국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쟁에 엮여들어가는 모습을 풍자했다.
세르비아: (오스트리아에게) 날 건드렸다가는 내가...

오스트리아: (세르비아에게)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가는 내가...

러시아: (오스트리아에게) 만약 그 꼬마 건드렸다가는 내가...

독일: (러시아에게) 내 친구 건들기만 해봐. 내가...

프랑스: (독일에게) 걔를 쳤다가는 내가...

영국: 어이, 거기 만약 너희들이...

1. 개요2. 과정
2.1.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2.2. 6월 29일2.3. 7월 5일2.4. 7월 6일2.5. 7월 7일2.6. 7월 13일2.7. 7월 23일2.8. 7월 25일2.9. 전쟁 발발
2.9.1. 오스트리아의 대세르비아 선전포고2.9.2. 러시아의 총동원령 선포2.9.3. 독일의 총동원령 선포
2.10. 8월: 연쇄반응
3. 결과4. 각국의 전쟁 책임에 관한 공방
4.1. 오스트리아-헝가리4.2. 세르비아4.3. 독일4.4. 러시아4.5. 프랑스4.6. 영국
5. 관련 자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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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July Crisis | 7월 위기

사라예보 사건이 터진 1914년 6월 28일 촉발되어, 강대국들의 연쇄적인 총동원령 선포로 동년 8월 초까지 유럽을 휩쓸었던 안보 위기. 1달이라는 긴 시간 동안 발칸의 문제가 점차 확대되다 끝내는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치달았다.

대놓고 전쟁을 원하다시피 한 2차 세계대전과 달리 1차 세계대전은 전쟁을 원했던 국가는 아무도 없었다. 당시 열강들의 군주들은 인척관계로 얽혀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주요 열강들 내부에서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후일 전범으로 매도당한 빌헬름 2세조차도 전쟁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다. 막바지에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자 열강 간 전면전쟁이 아닌 오스트리아-세르비아 간 전쟁, 못해도 오스트리아-러시아 간 전쟁에서 그치기 위해 일선의 외교관들을 중심으로 그야말로 처절한 전쟁회피 노력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대전은 발발했고, 그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1918년 종전 직후부터 다양한 논의들이 존재했다. 전후 협상국은 개전의 책임을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동맹국의 책임으로 돌렸으며, 50년대의 피셔 논쟁 또한 그랬다. 그러나 전후의 수정주의적 시각들은 꼭 동맹국만의 책임이 아닌, 당대 유럽 열강 공동의 책임임을 주장했다. 이들은 동맹국들뿐만 아니라 오헝 제국 내 과격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을 지원한 세르비아 왕국과 그 세르비아를 전면 비호하고 나선 러시아 제국 등의 책임도 강조한다. 이 기간 동안 벌어진 일들과 책임 공방은 직접적으로는 제1차 세계 대전에, 간접적으로는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에 영향을 미쳤다.

7월 위기의 책임논의는 아직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았으며, 꾸준히 국제정치학계와 역사학계에서 논쟁이 이어져 오고 있다. 동시에 각 국가 간의 국민감정 및 역사적 관계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어 그 평가는 더욱 조심스럽다. 나무위키의 본 문서 역시 개별 편집자의 호오와 지식의 양에 따라 문서의 서술 방식이 편향적일 수 있으므로 일독에 주의를 요한다. 가급적이라면 본 문서 최하단의 관련 자료 문단에 링크된 논문과 서적, 사이트들을 일독하여 본인이 직접 판단하는 것을 권한다.

2. 과정

2.1.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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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세르비아 왕국은 발칸 반도 서부, 특히 보스니아의 지배권을 두고 대립했다. 세르비아 왕국은 보스니아 내 남슬라브 과격 민족주의 단체인 단결 혹은 죽음을 지원했고, 이들은 오헝 제국의 추정상속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를 사라예보에서 암살한다.

2.2. 6월 29일

1914년 6월 28일 벌어진 사라예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세르비아 왕국에 초강경모드로 나설 것이라는 것이 국제외교가의 공통된 관측이었다. 자국의 추정상속인이 세르비아가 지원한 과격주의자 단체에게 암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오스트리아 제국은 세르비아에 대한 최후통첩에 한 달 가까운 시간을 소모한다. 의외의 사실이지만, 이중제국 내부에서도 전쟁에 반대하는 세력이 상당했다.

우선 오헝 제국의 외교를 담당하던 외무장관 레오폴트 폰 베르히톨트 백작은 이를 제국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더불어서 보스니아에 눈독을 들이며 영향력을 펼치려고 하는 세르비아가 제국에게 가장 큰 위협이라 여겼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참모총장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대장 또한 무력을 써서라도 세르비아를 제압해야 한다 주장하였다. 그동안 유화노선을 채택해 온 추정상속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마저 사라졌으니, 회첸도르프의 전쟁 불가피론은 의회를 휘어잡았다. 외무장관 베르히톨트, 회첸도르프 참모총장, 오스트리아 총리 카를 폰 슈튀르크 백작, 재무장관 레온 폰 빌린스키, 전쟁장관 알렉산더 폰 크로바틴 대장이 대표적인 예방전쟁을 주장한 인물들이었다. 사라예보에서 황태자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보스니아 총독도 강경파에 합류했다. 이 6인의 전쟁론자들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안그래도 빛이 바래가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광을 되찾고 세르비아의 싹을 잘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베르히톨트는 전쟁 불가피성을 인식하면서도 순서가 있다고 주장했으며, 일단 세르비아에 반오스트리아 조직을 해체하고 피격사건의 책임자를 축출할 것을 요구하는 게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선전포고는 그 다음이었다.

초기에는 각료들의 반대가 적지 않았으나 시간이 흐름에도 세르비아가 발뺌하자 헝가리의 총리 티서 이슈트반 백작을 제외한 의회 모두가 찬성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그러자 슈튀르크 총리는 강경파와 온건파의 얘기를 종합해 “수사 상황을 좀더 지켜보고 결정하자”고 주장했다.[1] 한편 가장 중요한 군 통수권자이자 제국의 수장인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반대에 가까운 편이었다. 티서와 같은 의견이라서가 아니라, 혹시라도 전쟁이 일어난다면 슬라브인들을 전쟁에 동원해야 하고 그러려면 슬라브인들에게 많이 양보해야 하니 전쟁에 매우 부정적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기에는 황실의 후계자가 적국이 배후로 보이는 암살단에게 대낮에 저격을 당한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베르히톨트는 최후 통첩안을 작성하여 황제에게 전달하였지만 황제는 독일의 지지 없이는 전쟁을 할 생각이 없었다.

한편 베르히톨트가 가장 우려한 것은 세르비아와 전쟁을 벌이면 범슬라브주의를 주창하는 러시아가 개입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었다. 세르비아와 전쟁을 벌인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있겠지만 열강 중 하나인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도와 가세한다면 전쟁이 국지전에서 그치지 않고 최악의 경우 장기전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매우 높았으므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독일의 지지가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베르히톨트는 독일의 의중을 확인하기 위해 헝가리의 외무 보좌관 알렉산더 폰 호요스 백작(Alexander Graf von Hoyos)을 베를린에 보냈다.

2.3. 7월 5일

호요스는 베르히톨트가 작성하고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서명한 서한을 들고 베를린에 도착했고, 베를린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는 7월 5일 포츠담 궁을 찾아 빌헬름 2세와 오찬을 하면서 국서를 전달하고 황제의 의중을 물어보았다. 빌헬름 황제는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 침공계획에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면서 내각과 의논해 보겠다고 했다. 빌헬름 황제는 그날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 독일 제국 총리와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 참모총장 등을 불러 자신의 견해를 물어보았다. 총리와 군부는 황제의 생각에 모두 동의했다. 베트만 총리는 황제의 대답을 ‘백지 수표(blank cheque)’나 다름 없다고 보았다. 즉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벌이면 독일은 무조건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전면적인 오스트리아 지원을 약속한 빌헬름 2세는 3주 일정으로 뱃놀이하러 갔다. 독일 내부적으로 열강들이 발칸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 이유는 매우 간단했는데, 사라예보 사건의 여파가 아직 가시기 전이었고 삼국 협상의 일원인 영국 프랑스, 러시아마저 페르디난트 대공을 동정하고 세르비아가 명분을 제공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판단에는 "오헝 제국이 세르비아에 전쟁을 걸어온다 하더라도 정당성이 명확하므로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확전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빌헬름 황제의 낙관적인 판단이 바탕이 되었다.[2] 다만 독일의 지지에는 조건이 하나 있었는데 강경책을 쓰건 유화책을 쓰건 오스트리아가 확고한 결심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태의 직접 당사자는 오스트리아였으니 이 요구는 당연했다. 호요스는 이런 독일의 의사를 가지고 다음날인 7월 6일에 곧바로 빈으로 돌아왔다.

2.4. 7월 6일

제국의 해군 제독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는 휴가 중이었던지라, 폰 카펠 제독은 카이저와의 회담을 가졌다. 카이저는 러시아와 프랑스가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판단하여, 대전쟁으로의 위기 고조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의 판단을 카펠 제독에게 전달하였다. 카이저 빌헬름 2세는 카펠 제독과 함께 킬로 이동했고, 그 때문에 이날 포츠담에서는 군 당국 회의가 개최되지 않았다.[3]

2.5. 7월 7일

6월 24일에 러시아 외무부 장관 사조노프가 작성한 전보가 세르비아 당국에 입수되었다. 그는 러시아가 최근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오스트리아의 반세르비아 감정이 고조된 데에서 기인할 수 있는 모든 격앙된 문제 상황에 대해 세르비아에 조언(지원)을 제공하도록 강요되었다고 서술했다. 이것이 독립 보장을 약속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러시아의 세르비아 지원을 천명한 것임은 확실하다. [4]

7월 7일, 오스트리아는 제국 내각을 소집했다. 정부 쪽에서는 독일에 갔다 온 호요스를 비롯해 레오폴트 폰 베르히톨트 외무성 장관과 알렉산더 폰 크로바틴 전쟁성 장관, 레온 폰 빌린스키 재무장관, 카를 폰 슈튀르크 오스트리아 총리와 티서 이슈트반 헝가리 총리가 참석했고, 군부 쪽 인사로는 육군을 대표하는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참모총장, 해군 대표로는 전쟁성 해군부장 안톤 하우스 대장을 대신해 카를 카일러 폰 칼텐펠스(Karl Kailer von Kaltenfels, 1862-1917) 해군소장이 소집되었다. 여기서 각료들의 출신별, 민족별로 다른 정치적 입장 때문에 조율[5]에 또 10여 일을 보내 7월 19일에야 통첩문이 완성되었으며 실제로 세르비아 및 유럽 열강에 이 통첩이 통보된 것은 7월 23일이었다.

통첩문이 완성되고도 오스트리아가 통첩 발송을 지연시킨 건, 7월 15일[6]부터 프랑스 대통령 레몽 푸앵카레와 프랑스의 외무장관 겸 총리인 비비아니가 러시아 제국을 방문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러시아 영토에 있는 도중에 통첩을 발송한다면 러시아-프랑스 간의 공동대응이 논의될 시간과 여지를 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7] 푸앵카레와 비비아니는 7월 23일에 러시아 방문을 마치고 떠났으며 그로부터 몇 시간 뒤 세르비아에게 최후통첩이 발송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스트리아 군부에서 내각에 전쟁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다고 보고 [8]하면서 전쟁 준비를 할 시간을 벌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세르비아 왕국은 아래와 같은 사항을 실천에 옮긴다.
1.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한 증오심이나 경멸감을 조장하거나 그 영토의 보존에 반대하는 경향을 띤 일체의 출판물을 금지한다.
2. '인민의 방어'와 같이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반대하는 선전활동에 종사하는 모든 단체들을 즉시 해체하고 그 선전수단들을 몰수한다.
3.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반대하는 세르비아 내의 공공 교육 활동을 지체 없이 제거한다.
4.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반대하는 선전활동에 가담한 인물들을 군대 및 행정 조직 전체로부터 축출한다.
5.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의 영토 보존에 반대하는 전복 활동의 제거를 위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 대표의 세르비아 내 활동의 협조를 수락한다.
6. 6월 28일의 음모에 가담한 방조자들에 대한 사법절차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의 대리인들이 참여토록 한다.
7. 사라예보에서의 정부 조사단의 결과를 손상시킨 보야 탄코비치 및 밀란 치가노비치 두 사람의 관리를 지체없이 체포한다.
8.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국경을 넘는 무기 및 화약류의 불법거래를 방지하고 사라예보 사건 당시 무기 거래를 방치했거나 방조한 관리들을 처벌한다.
9. 6월 28일 범죄 이후로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한 적대적 발언을 자제하지 않았던 세르비아 고위 관리들의 정당화할 수 없는 발언에 대한 설명을 촉구한다.
10. 앞서 제시된 조치들의 집행에 대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에 지체 없이 보고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7월 25일(토요일) 저녁 6시까지 세르비아의 답변을 기대한다.

이렇게 세르비아에 전달된 최후통첩은 세르비아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항이 담겨진 내용이었다. 반(反)오스트리아 교육의 금지, 사라예보 사건에 연루된 세르비아 관리들의 체포 및 심문, 오스트리아 관리가 직접 세르비아 영토에 들어가 수사에 참여할 것 등이 그것이었다. 오스트리아는 48시간 내에 통첩에 대한 답문을 요구했다. 이는 사실 오스트리아의 계략도 있었는데 오스트리아는 당시 세르비아 정부 수반들과 세르비아 주재 외교관들의 행적을 감시하고 있었고 세르비아 정부가 대답하기 어렵고 다른 나라와 외교적 협의가 어려운 타이밍에 최후통첩을 들이밀어 세르비아가 제대로 된 대처를 못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2.6. 7월 13일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독일 제국 대사 프리드리히 폰 푸르탈레스는 러시아 제국이 동맹국 프랑스로 하여금 3년의 의무 복무 기간을 도입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는 내용의 보고를 제국 수상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에게 전달했다.

그러면서 푸르탈레스가 건네받은(überreicht) 문서에는 러시아는 이미 (전쟁) 준비가 되어 있으며, 프랑스도 그러해야 하고, 이를 통해 군사력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즉, 러시아는 이미 전쟁을 할 생각이 있었고, 프랑스에 군사력 강화를 위한 3년의 의무 복무 기간을 도입하도록 압박해 유사시 러불동맹에 의거해 지원 받겠다는 뜻이다.[9]

2.7. 7월 23일

그런데 정작 이 최후통첩이 세르비아에 도착했을 때 세르비아 수상 니콜라 파시치는 지방 여행 중이어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베오그라드로 복귀하긴 했지만 너무 늦어서 이미 최후통첩 48시간 중 24시간을 날려먹었다.

거기다 외교적 조언 역할을 해줄 강대국 외교관들도 우연의 일치로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러시아 공사는 사망[10], 프랑스 공사는 병환으로 각각 공석 중이었으며 아예 후임자가 도착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이는 프랑스 대통령 레몽 푸앵카레가 러시아를 방문하는 중[11]이었기에 프랑스와 러시아의 대사 파견 일정이 지연됐기 때문이다. 두 나라의 세르비아 공사는 이미 전쟁이 터지고 난 1914년 8월 26일에나 도착했다. 그나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영국 공사마저도 병환으로 뭘 제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다.

이 때문에 유럽 열강의 권고는 상당히 늦게 세르비아에 전달되었는데, 영국과 프랑스는 한결같이 세르비아의 책임을 추궁하며 오스트리아가 제시한 조건을 수용하라는 입장으로 일관했다. 영국이 세르비아를 압박한 이유는 자국도 군주제 국가이기 때문이다. 즉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가면 자국 군주와 태자가 암살당할 때도 할 말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프랑스도 정체는 공화정이었지만 이때는 제정이 폐지된지 44년밖에 안된 시점이었다.[12] 안 그래도 비관론이 지배적이던 세르비아 내각은 결국 영프의 권고를 받아들여 오스트리아의 통첩을 전면적으로 수용하려 했다.

2.8. 7월 25일

러시아 대리대사인 쿠다체프는 이중제국에 대세르비아 최후통첩의 기한을 유예하달라는 전보를 보냈다. [13]

그런데 통첩시한을 몇 시간 남기고, 러시아 주재 세르비아 공사로부터 "러시아가 우릴 지원한다!"는 희소식과 함께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낭보가 베오그라드에 도착했다. 사실 오스트리아가 조금만 더 빨리 행동했어도 러시아가 이런 신속한 결단을 내리긴 어려웠겠지만, 최종적으로는 사라예보 사건 이후 약 1달여를 허비하는 동안 니콜라이 2세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궁중관료들은 독일의 개입 가능성을 과소평가하고 이참에 오스트리아를 조지자는 식으로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14] 이에 세르비아 내각은 일제히 궐기하여 대 오스트리아 강경론으로 전환했으나, 러시아가 지원한들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라는 제국을 상대로 딱히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최후통첩 중 오스트리아 관리의 자국 영토 진입을 거부하고 나머지를 수용하기로 하는 결정을 내리고 이를 오스트리아에 통보했다.[15]

하지만 백지수표를 내준 독일[16]을 등에 업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의 제안을 무시하고 세르비아의 외교공문 접수를 거부하는 동시에 국교를 단절했다.

한편 러시아에서는 전날인 24일에 오스트리아를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동원준비령이 발령되었고 25일부터 시행되었다. 사실 러시아는 이미 1912년 제1차 발칸전쟁에서도 오스트리아 인접 지역에서 즉흥적이고 시범적인 동원조치로 오스트리아를 압박하여 오스트리아의 전쟁 개입을 견제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와 내각대신들은 정확한 군사행정 기술에 대한 지식이 없었고, 동원과정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 당시 발령된 동원준비령은 전 해인 1913년 3월에 새로 도입된 절차였는데, 차르와 러시아 내각의 생각처럼 준비령-부분동원령-총동원령으로 격상되는 단계적 절차가 아니라 총동원령을 즉각 착수하는 절차였다. 즉 차르와 대신들은 단계적으로 압박수위를 높여가는 무력시위를 의도한 심산이었겠지만, 실제로는 차르와 대신들이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 하는 사이에 독일 국경을 포함한 러시아 서부 국경 전체에 병력이 배치되기 시작했다. 더욱이 총동원령이 실질적으로 착수된 상황이므로 이제는 한발 물러서 부분동원으로 번복을 하고 싶어도 동원계획상 혼선을 불러일으키는, 난처한 일이 될 터였다.

다만 여기에는 반론도 있다. 7월 25일에 사파리 백작이 베르히톨트에게 보낸 전보에 의하면, 니콜라이 2세의 외가인 덴마크의 대사가 러시아의 대동맹국 전선에 대한 동원령 지시가 사실인지를 문의한 내용이 있다. 러시아는 7월 24일부터 동원령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독일 제국까지 겨냥한 동원령 수준은 곧 총동원령이므로, 이는 러시아의 공식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17]

이 날 러시아의 동원준비 결정이 착오와 혼선 때문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전면전 위험까지 감수한 군사도발인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1차대전의 발발 원인과 책임소재의 상당분을 결정할 수도 있는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다음날인 26일, 독일 제국군 정보당국이 이 같은 러시아군의 움직임을 포착하면서 군사적 긴장이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2.9. 전쟁 발발

2.9.1. 오스트리아의 대세르비아 선전포고

결국 1914년 7월 28일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왕국에 전쟁을 선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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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빈,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 왕립정부는 주 베오그라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대사를 통해 1914년[18] 7월 23일 귀국에 통보한 요구에 대해 귀국이 만족스러운 회답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제국정부와 왕국정부는 스스로 권리와 이익을 보호하도록 강요받은 상태에 놓였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각국은 무기와 힘에 의지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정부는 세르비아 왕국 정부와 전쟁상태에 들어갔다는 것을 통보한다.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세르비아 왕국에 통보한 선전포고 전보. 세르비아에서 제출하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링크

2.9.2. 러시아의 총동원령 선포

그러자 러시아는 세르비아의 독립을 보호할 것을 선언하고 7월 31일 총동원령을 내렸다.

러시아는 애초 부분 동원령으로도 충분하다 여겼다. 특히 총동원령을 내리면 독일을 자극할 것이 명백하다는 것은 러시아 역시 잘 인식하고 있었다. 러시아 온건파는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접한 지역의 군관구에 한정[19]하여 동원령을 내리는 것으로 독일을 자극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군 수뇌부들은 부분 동원령을 내리면 오스트리아가 총동원령을 내릴텐데 그러면 빠르게 군사적인 대응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제 오스트리아는 러시아가 참전할 경우 세르비아 전선과 러시아 전선을 동시에 유지해야 하므로 병력면에서 열세에 놓일 수밖에 없었으니 러시아가 부분 동원령을 내리더라도 오스트리아로서는 총동원령 수준으로 대응해야 했던 게 사실이었다.

거기다 이 시기에는 산업의 발전과 철도의 등장으로 총력전이 가능해지면서 전쟁은 더 빠른 시간에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해야 하는 달리기 경쟁으로 바뀌어갔고 적들이 유리한 곳을 차지하기 전에 먼저 가야 한다는 생각이 당시 유럽의 군 수뇌부 모두를 지배했다. 결국 차르인 니콜라이 2세는 참모들의 설득을 받아들이고 총동원령을 내렸다.

사실 이 과정도 복잡했다. 니콜라이 2세는 날밤을 꼬박 새며 고민했고, 7월 30일부터 8월 1일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베를린 사이에서 니콜라이 2세와 빌헬름 2세간의 수많은 전보들이 오고 갔다. 두 황제는 필사적으로 독일-러시아 전쟁을 막으려 애썼고, 특히 니콜라이 2세는 어떻게든 빌헬름 2세에게 이번 군사행동은 어디까지나 오스트리아가 대상이라고 항변했으며 빌헬름 2세는 그에 따른 진정성을 보여달라고 요구했고, 때문에 니콜라이 2세는 7월 31일 오전에 일시적으로 총동원령을 취소한다. 그러자 러시아 군 수뇌부가 궁전으로 달려와 총동원령을 내리지 않을 경우 독일의 기습에 일패도지한다며 총동원령 취소를 철회할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몇 시간에 걸친 압박에 황제는 결국 다시 총동원령을 내렸다.

2.9.3. 독일의 총동원령 선포

러시아의 총동원령에 위협을 느낀 독일 제국은 뱃놀이 갔던 카이저가 허겁지겁 베를린으로 돌아오고, 독일 제국은 수많은 격론을 벌인다. 사실 이때만 하더라도 독일 제국이 바로 전쟁을 시작 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했다. 당시 독일은 사회주의에 기반한 노동계급 정당인 사회민주당이 의회 제1당이었는데, 이들은 전쟁은 지배 엘리트층의 투쟁에 노동계급이 일방적으로 희생되는 것이란 시각을 견지하고 있어 전쟁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의 보수파가 러시아의 공포를 이용하여 가까스로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면서 추는 순식간에 기울어진다.

결국 강경파의 주장대로 이런 때를 대비해 만들었던 슐리펜 계획을 발동시키고 8월 1일에는 총동원령을 내린다. 독일이 이렇게 강경하게 나올 수 있었던 건, 주 러시아 공사 및 독일 본국의 외무 관료들이 러일전쟁의 러시아의 추태를 [20] 보고 러시아는 함부로 전쟁을 하지 못하며 설령 전쟁해도 혁명이 일어나서 망한다는 식으로 호언장담을 했고 이를 빌헬름 2세 및 독일 수뇌부가 받아들였기 때문이다.[21]

한편 빌헬름 2세는 양면전쟁의 위험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기에 승리가 불확실한 슐리펜 계획 대신 영국이 보증하는 프랑스의 중립 약속을 받아낼 수 있는 쪽을 선택하여[22], 몰트케에게 "당장 서부로 가는 병력 다 동부로 돌려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러시아만 이기면 승리한다!" 라고 의기양양하게 외쳤으나 몰트케는 "폐하, 지금 병력동원 다 시작되고 철도 움직이는 중인데 여기서 병력 이동을 취소하고 동부로 옮기면 혼란에 빠져 재배치되다 자멸할 것입니다." 라면서 맞섰다. 빌헬름 2세는 그에게 " 그대의 걸출한 삼촌[23]이라면 나한테 다른 대답을 했을 것이다." 라고 비난하기까지 했으나[24], 결국 대 프랑스 개전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25]

2.10. 8월: 연쇄반응

결국 독일은 8월 1일에는 러시아에, 8월 3일에는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다. 하지만, 아직도 전쟁의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것을 자신의 몸을 집어넣어서라도 막아보려던 온건파들은 많았다. 당장 독일의 대 러시아 선전포고문을 전달하러 러시아 외상을 방문한 주러 독일공사는 선전포고문을 건네지도 않고 외무장관과 자신의 유대관계, 인간적 친분을 언급하며 사정하고, 또 사정하고, 고개를 조아리고 무릎을 끓으면서까지 총동원령을 취소해달라고 애걸복걸했다. 그럼에도 (총동원령을 취소할 권한이 없던) 외무장관이 그 요청을 거절하자 그제서야 선전포고문을 전달하며 '난 러시아가 너무 좋았다, 우리가 어찌하여 이런 관계가 되었느냐, 짐을 싸 귀국해야 하는데 도저히 짐을 쌀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며 울먹였다.

프랑스에 대해서는 빌헬름 2세와 외교부처 모두 삼국 동맹- 삼국 협상 간 대립이나 슐리펜 계획 때문이라도 선전포고는 피할 수 없다고 인식은 했지만, 적어도 마지막으로 협상은 해보자며 독일의 대 러시아 전쟁에 대해 프랑스가 중립을 지켜줄 수 있냐는 의사를, 그리고 영국에게도 독일-프랑스 사이를 중재해 줄 수 있냐는 의사를 타진했다.

프랑스에서도 사라예보 사건에는 세르비아에 책임이 있다고 보았으며, 러시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를 지원한 것이기 때문에 러시아와 동맹 관계라도 프랑스가 중립을 지키는 것은 매우 정당하고도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랑스는 군부 및 강경파들의 경우 1870년의 원한으로 이 제의를 묵살하자고 했고, 온건파들은 러불동맹을 파기했다가 프랑스가 외교적 신의를 깨트리고 다시 과거처럼 고립될 수 있다는 생각에 협상 주장을 꺼내지 못했다.[26] 더욱이 이 시기 프랑스 국내에는 컨트롤 타워가 부재했다. 러시아 순방 이후 푸앵카레 대통령과 비비아니 총리는 예정대로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를 순방했으나, 사태가 너무 심각해지면서 일정을 취소하고 부랴 부랴 귀국길에 올랐다. 대통령과 총리가 7월 29일 아침,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 전쟁까지는 한 발자국만이 남아있었다.

그렇다고 프랑스가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었다. 러시아가 동원령을 선포하기 전, 프랑스에서도 전쟁을 할 의사가 없다는 표시로 독일과의 국경지대에 있는 병력들을 10km 이상 후퇴시켰다. 그러나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선포하고 독일도 이에 맞대응하면서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결국 8월 4일에는 프랑스도 의회 만장일치로 독일과의 전쟁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독일군은 슐리펜 계획대로 벨기에를 침략하는데 사실 벨기에 침공 직전에도 빌헬름 2세는 다시 한 번 몰트케에게 "벨기에 공격하면 영국이 참전한다. 벨기에를 피해서 공격해라!" 라고 명령했으나 몰트케는 "안됩니다. 병력집결부터 기동, 전투까지 이미 계획이 짜여 있어서 벨기에를 넘어가지 않는다면 계획이 다 무너집니다." 라며 펄쩍 뛰어서 어쩔 수 없이 독일은 벨기에를 지나가게 된다.[27]

당시 영국은 느닷없는 발칸의 분쟁이 전 유럽을 휩쓰는 대규모의 전쟁으로 커지려고 하자 기가 질려서 직접적 참전을 꺼리는 중이었으나[28] 영국이 보증한 국제적인 벨기에 중립이 슐리펜 계획에 의한 독일의 침략으로 무시되면서 참전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 결국 독일에 맞서 참전하게 된다. 사실 영국 정부도 벨기에 침공 직후 바로 선전포고한 것은 아니고, 약 하루의 최후통첩을 날리며 통첩시간 내에 벨기에에서 철군할 것을 독일에 요구했으나, 독일은 답을 주지 않았다. 이때 영국의 통첩기준시각은 자정이었는데, 독일측 시간대로 자정이 되었음에도 아직 런던 표준시로는 자정이 아니라며 억지로 1시간을 더 기다리기도 하고,[29] 독일이 대영 선전포고를 했다는 오보에 낚여 준비된 선전포고문을 독일 공사관에 보냈다가 오보임이 확인되자 허겁지겁 회수하는 등 전쟁을 피하려고 정말 처절하게 노력했다.

또한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는 아닐 것 같던 일본 제국 칭다오 무너트린 거만 빼면 별로 싸운 건 없지만 영일동맹과 영국의 지원요구에 근거해서 8월 28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참전했다.

3. 결과

이로써 당시 주요 열강 국가 중 동떨어진 아메리카 대륙에서 혼자 놀고 있는 미국, 삼국 동맹을 깨고 중립을 선언해버린 이탈리아 왕국, 그리고 이탈리아, 오헝 제국과 함께 열강 중 말석을 차지하며 내부적 문제로 참전은 무리라고 평가받던 오스만 제국을 제외하고 모조리 대전에 참가하게 된다. 그러고 이 세 나라도 결국 시간 차이를 두고 참전하게 되면서 결국 모든 열강 국가들이 얽힌채 치고 박고 싸우는 대참사가 일어난다.

개요에서 언급했듯 각국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전쟁을 막으려는 노력을 시도하긴 했지만, 높은 수준으로 산업화된 국가들은 이미 군주들이 일일이 통제하기는 어려운 수준으로 복잡해졌으며, 민족주의의 열풍은 군주들이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해 있었다.[30] 이미 군주들은 자신이 다스리는 국가를 제대로 제어할 수 없었고, 오히려 군주들의 어설픈 조치 때문에 내부에서의 모순과 문제점은 더욱 커졌다. 여기에 국가 간의 소통창구가 딱히 없었던 것도 다소 어처구니 없는 에스컬레이션에 부채질을 했고, 전후에는 이런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국제연맹, 국제연합 등의 기구가 설립되었다. 국제연합은 비록 전쟁을 막지는 못했지만, 국지적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번지는 것을 어느정도 막아주었다.

4. 각국의 전쟁 책임에 관한 공방

이하 항목들에서는 각국이 가진 전쟁 책임을 우선적으로 서술하며, 동시에 이에 대한 반론을 설명한다.

4.1. 오스트리아-헝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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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매파의 중심 인물,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총참모장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사라예보 사건의 직접적인 당사국이자, 전쟁 발발의 핵심적인 주체이기도 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역량은 후속 대처를 적절하게 진행하는 데 무리가 있었으며, 부적절한 대처를 연발함으로써 사태를 발칸의 문제에서 전 유럽의 문제로 확전시켰다는 비판은 피하기 힘들다.

세르비아는 19세기 말부터 이루어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발칸 동진 정책이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보스니아에 대한 행정권을 확보하였으며 1908년 세르비아인들이 다수 존재하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완전히 합병하였다.[31] 세르비아 역사가들은 오스트리아가 이 과정에서 남슬라브인들에 대한 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민족적 분열을 획책하였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에 반발하는 세르비아 왕국 정부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에 대해 고압적인 자세로 일관하였으며 이것이 결국 양국 충돌의 근원적인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남슬라브인 중 지극히 세르비아 중심적이라는 지적이 가능하나[32] 오헝제국-세르비아 관계에서의 충돌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는 적실성을 갖는다. 또한 세르비아는 파시치 총리와 세르비아 왕국정부가 페르디난트 대공 내외의 사라예보 방문의 위험을 사전에 경고하였다는 점에서 세르비아의 전쟁책임이 감경된다고 주장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책임 논의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관련된 모든 국가들 중 가장 확실하게 전쟁을 원했던 국가였다는 점이다. 물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계대전을 계획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세르비아와의 전쟁은 분명히 결의했으며 나아가 러시아와의 전쟁 역시 고려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자신들이 가진 역량을 과대평가하고 사라예보 사건을 기회로 삼아 발칸에서의 확장을 이어나가려 했다.

회첸도르프 참모총장을 필두로 크로바틴 전쟁장관 등의 강경파 각료들은 남슬라브인들을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세르비아를 완전히 멸망시켜 흡수하는 것만이 제국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라고 여겼다.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우는 러시아가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 명백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강경파들의 의견은 각료회의를 휩쓸었다. 이로써 암살 사건은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간 문제에서 러시아와의 문제로 번지게 된다.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를 완전히 멸망시키고자 한다는 속내는 그 어떤 주변국도, 독일의 빌헬름 2세마저도 모르는 것이었다.[33] 심지어는 제국 내부에서도 헝가리의 반발을 샀다. 또한 강경파의 의지와는 별개로 막상 제국의 군사력은 동부의 러시아와 남부의 세르비아를 동시에 상대할 만한 여력이 되지 않았다. 실제로 강경파조차 러시아를 상대하는 여력만큼은 안된다는걸 인정하여 독일을 끌어들인것이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자신들의 의지와 현실 사이의 딜레마로 긴 시간 동안 유예를 두었고, 그 기간 동안 발칸 문제와는 거리가 있는 독일을 연루시키고 말았다.

이 와중에 독일이 '백지 수표'로 대표되는 무한한 지원을 약속하자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대한 군사적인 대응을 무리하게 추진하였다. 온건파의 중심인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암살당한것이기에 강경파의 득세만 있던 상황이라 오스트리아는 유연한 외교적 대응을 고려하지 않았다. 가령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을 대부분 수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는 7월 25일 세르비아와의 응답을 거절한 후 관계를 단절함으로써 문제의 외교적 해결 의지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중제국 내에서 전쟁으로 치달아가는 내각 여론을 저지하려던 것은 티서 이슈트반으로 대표되는 헝가리 왕국 정부뿐이었으나 그뿐이었다. 티서 총리 역시 사라예보 사건으로 인한 강경파의 강력한 명분은 어찌할수 없기에 종국에는 설득당하여 전쟁에 찬성하였다. 이에 따라 국제적인 긴장은 해결될 기미 없이 점차 오르기 시작한다. 오스트리아는 사태를 중재하려던 독일 외교 당국의 노력을 무시한 대신 자신들을 지지하는 독일 군부의 의견만을 신뢰한 채 기존의 강경책을 그대로 추진하였으며 그 결과는 총동원령의 선포였다.

4.2. 세르비아

4.3.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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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국 수상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
독일 총참모장
헬무트 폰 몰트케

독일은 '백지 수표'로 대표되는 무한한 지원을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약속함으로써 긴장 상태를 더욱 악화시킨 장본인이며, 동시에 슐리펜 계획을 통해 발칸 문제와 관계없는 프랑스와 벨기에의 주권을 위협함으로써 전쟁을 세계대전으로 확대한 당사자라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전쟁 이전을 소급하자면 영국과의 불필요한 군비 경쟁을 유발함으로써 전 유럽에 긴장 상태를 불러왔다는 점 역시 주된 책임으로 꼽힌다. 독일의 전쟁 책임에 관한 논의는 지난 100년간 7월 위기 연구에 있어 가장 큰 화두였다. 간접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의 영향을 끼쳤을 정도이다.

우선 파리 강화 회의에서는 독일과 그 동맹국이 1차 세계대전의 1차적인 책임을 진다는 결론을 내렸다. 1919년 5월 당시 전범위원회는 1차 세계대전은 동맹국이 사전에 기획하고, 연합국이 제시한 모든 타협과 전쟁 회피 노력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고 간주했다. 이를 바탕으로 베르사유 조약 231조에서는 독일로 하여금 세계대전의 발발 책임을 지도록 하였다. 독일은 강압이라며 반발하고 이 조항에 대하여 수락을 거부하지만 6월 23일 휴전 조약이 종료되는 대로 포슈 원수의 연합군이 전쟁을 재개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은 결국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1320억 마르크라는 천문학적인 배상금과 함께 말이다.

그러나 종전 직후부터 곧바로 이에 대한 반박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독일 외무성은 1918년부터 전쟁 책임국을 설립하여 내부 문서를 종합하면서 231조의 개정에 대해 노력했고, 종전 이후로 그 임무는 독일 책임론을 반박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곧 얼마 지나지 않아 참전국 간의 적개심이 누그러지면서 다른 국가들에서도 독일 책임론을 비판하는 내용의 연구들을 내놓았다. 이를 처음으로 시작한 것은 미국이었다.

이를 모두 포괄하여 수정주의 관점이라고 한다. 이들은 독일이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나 전쟁을 기획하지는 않았다는 의견부터 연합국이 전쟁을 획책했다고 주장하는 사람까지 다양했다. 대표적인 연구자가 해리 반즈와 시드니 페이다. 특히 페이는 그는 1928년의 연구에서 3국 협상 측의 책임을 더 크게 보았다. 그리고 여기에 전 영국 총리 로이드 조지가 자서전에서 열강의 어느 정치인이건 전쟁을 원하진 않았다며 독일 책임론을 반박하며 이 수정주의 논의는 힘을 얻게 된다. 게다가 1920년대 소련에 대항하는 동맹으로서의 독일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수정주의 연구는 더욱 활발해졌다. 해리 반스의 경우 아예 연합국이 전쟁을 획책했다는 주장을 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때 반수정주의 이론이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하였으나, 주류는 아니었다.

2차 대전 이후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수정주의는 여전히 주류였고, 서독을 서방에 편입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시각은 여전히 유효했다. 공동의 역사 교과서 집필을 위해 모인 1951년의 독프의 사학자 회의 또한, 열강들 간의 이해관계 충돌이 1차 대전을 촉발시켰다는 입장의 르누뱅 교수와 리터 교수가 주도하였다. 그들은 1차 세계대전은 특정 국가가 의도한(unleash) 것이 아닌, 동맹의 의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터져 나온(break out) 것임을, 그리고 개전의 책임은 각국이 공동으로 져야 함을 합의한다. 하지만 이는 소위 '편안한 합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사실 이는 2차 대전 이후 전후복구 과정에서 있었던 졸속 역사청산 및 화해와도 무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때 1961년 함부르크 대학교의 프리츠 피셔 교수가 독일의 책임론을 주장하며 반수정주의 논의가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피셔 교수는 독일사의 존더베크(Sonderweg)논의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그는 독일 외교정책의 호전성이 1차대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기존의 반수정주의 저작물들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피셔는 당시 독일 수상 베트만홀베크가 비서 리즐러로 하여금 적게 한 그의 1914년 9월 9일자 비망록에서 근거를 찾았다. 속칭 9월 계획이라 불리는 이 계획안은 알자스 로렌부터 유럽 러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에 대한 영토 야욕이 있었다는 증거로 활용되었다. 피셔 교수는 독일 민간인들 또한 사회경제적 이유로 인해 전쟁을 원했으며, 그렇기에 독일은 군부와 민간이 합심하여 오스트리아 황태자의 죽음을 이용해 제국주의적인 확장 정책을 취했고 오스트리아에 백지 위임장을 내주어 전쟁으로 이끌었다는 주장을 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그 유명한 피셔 논쟁이다.

이에 비판자들이 우후죽순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독일 역사학계의 보수주의자들이 주된 세력이었다. 상술한 리터 교수 외에도 1972년 킬 대학교의 카를 디트리히 에르드만 교수는 리즐러의 일기를 편찬해 내놓으며 피셔 교수를 비판했다. 피셔의 주장은 단편적인 부분만 보고 내린 것일 뿐, 전체적인 리즐러의 일기에서 베트만홀베크는 호전적인 인물로 묘사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반박한 것이다. 피셔는 이를 조작이라며 반박했다. 이후의 재반박은 비망록에서의 베트만홀베크의 호전적인 모습의 이유를 설명했다. 즉, 비망록에서의 베트만홀베크의 호전성은 1914년의 영국의 러시아와의 해군교섭과, 이를 의심하는 독일에 대한 영국 의회의 발뺌으로 인한 배신감과 분노일 뿐이라고 반박하였다.

피셔의 독일인 동조자들은 주로 동독에 분포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에 기반한 동독 사학계는 자본주의 발전이 극에 달하여 열강이 충돌한 끝에 1차 대전이 발발하였다는 해석을 내놓았다는 점에서 독일의 팽창욕이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는 피셔의 의견과 일부 교집합이 있었기 때문. 한편으로 서독 내에서도 점차 동조자들이 늘어 갔으며, 피셔 역시 비판받은 점을 보충하여 자신의 논리를 재정립해 보수주의자들에게 다시 역공을 가하면서 논의는 새 국면을 맞이했다.

피셔는 발칸 전쟁 와중인 1912년 독일군부와 황제와의 회동 기록에서 몰트케 총참모장이 전쟁은 이를수록 좋다고 발언한 것에서 우선 근거를 찾았다. 그리고 그에게 동조하는 학자들은 당시 독일 사회가 경제적으로는 선두를 달렸을지언정 정치적으로는 지나치게 구시대적이었으며, 이러한 모순을 대외 팽창으로 해결하려 했다는 논리를 구축하였다. 이를 통해 피셔의 시각은 비판을 이겨내고 학계에 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가령 1990년대 아니카 몸바우어는 빌헬름 2세를 연구하였으며, 그가 독일이 러시아에게 군사적으로 추월당하기 전에 전쟁을 일으킬 의지가 있었다는 점을 꼬집기도 했다. 7월 위기 당시 전쟁을 막기 위한 노력과는 별개로 말이다.

한편으로는 지정학이나 전쟁 계획의 경직성에서 독일의 전쟁 책임을 찾는 이들도 있다. 지정학적인 이유를 주장하는 이들은 주로 독일에 분포한다. 유럽의 주요 강대국 사이, 특히 러시아와 프랑스라는 두 가상적국에게 둘러싸인 독일의 지정학적인 위치로 인해, 어떻게 보면 독일은 양면전쟁에 반강제적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러프의 양면 위협에서 촉박한 시간 내에 목표를 양자택일한 슐리펜 계획이 대표적인 근거다. 지정학적인 이유를 주장하는 이들은 독일의 전쟁 책임을 긍정하면서도 그 불가피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특징을 가진다.

마지막으로 독일 전쟁 계획의 경직성을 문제삼은 대표적인 이는 영국 사학자 A.J.P. 테일러다. 사실 그는 독일만 콕 집어 책임을 묻기보다는 당대 열강 다수가[34] 경직된 전쟁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꼬집는 것에 가깝지만 그 중 독일의 책임에 대해 서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슐리펜 계획의 입안자인 알프레트 폰 슐리펜 원수 자체가 야전 군인이라기보다는 전략학 교수에 가까웠다. 그런 그가 짠 계획은 지나치게 정교하였으며 벨기에의 중립에 대한 침해라는 아주 정치적인 이유를 그저 기술적으로 무시했다. 영국 사학자 존 키건은 전쟁이 '기차 시간표대로' 벌어졌다는 테일러의 주장을 지나쳤다고 지적하면서도 기차 시간표가 온 유럽 군부의 군사적 사고를 경직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정확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4.4. 러시아

파일:Sergei_Dmitrievich_Sazonov.jpg
러시아 외무장관 세르게이 사조노프

세르비아의 후견국을 자처한 러시아였으나, 정작 러시아는 그동안 세르비아에 상당히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1908년 러시아는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계가 다수 거주하는 보스니아를 공식적으로 합병하는 것을 무력하게 인정하였다. 그리고 이후에도 러시아는 발칸 슬라브 국가들 중 오스만의 이스탄불을 직접적으로 위협함으로써 러시아의 지중해 진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불가리아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심지어 2차 발칸 전쟁이 끝난 1913년에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압력을 가해 알바니아를 독립시킬 때조차도 러시아는 세르비아의 편을 들지 않았다. 이는 러일전쟁으로 인해 러시아의 군사력이 심각한 손상을 입었기 때문이었으나, 결과적으로 러시아가 세르비아의 후견국으로 세르비아의 수호에 실질적인 역할을 한 것이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프랑스와의 관계와 달리, 러시아와 세르비아 간에는 명시적인 동맹 관계조차 없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1914년 7월 위기 당시에는 전혀 다른 태도를 내비치면서 오스트리아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보인다. 이는 더 이상의 발칸에서의 이권 침해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결과였으며, 달리 말하면 러시아가 자국의 이득을 위해 사라예보 사건의 책임 관계가 명확한 오스트리아-세르비아 간 문제를 의도적으로 확대한 것이다. 러시아는 오-독 양국에 둘러싸인 자국의 부족한 군사적 능력을 보완하기 위해 발칸의 문제와는 상관없는 프랑스의 지원까지 받아내기로 레몽 푸앵카레와 협의했다는 점에서, 발칸 내부의 문제를 서유럽에까지 확장시킨 직접적인 원인은 러시아에 있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동원령은 그 단적인 예시이다. 실제로, 7월 24일의 러시아의 대 오스트리아 부분동원령은 전쟁의 1차적 당사자인 오스트리아의 동원령보다 빨랐다. 이는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 수용을 번복하게 만든 주된 원인이었다. 그리고 해당 동원령은 부분동원이라는 이름과 달리 독일 접경지역의 러시아군 군구들까지 동원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이를 감지한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의 동원령이 총동원령의 일환이라는 의심을 하게 되었으며, 이를 기점으로 각국의 동원령 선포가 연쇄적으로 벌어졌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 문제에 대해 타국의 개입 가능성을 열고 독일을 연루시켰다면, 러시아는 정당한 이유 없이 오스트리아와 같은 방식으로 프랑스를 끌어들인 것이다. 겉보기에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행동은 유사하지만, 러시아는 정당성의 측면에서 더 취약한데다 더 위험한 선택을 하였다. 러시아가 끌어들인 국가인 프랑스는 발칸 문제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국가였으며, 독일을, 더 나아가 벨기에와 영국을 확실히 전쟁에 개입시킬 위험이 컸다. 그리고 러시아는 그 와중에 동원령 선포를 통해 직접적인 연쇄 반응을 촉발했다.[35]

한편 공산권의 경우 전통적으로 1차 대전의 원인을 제국주의 전쟁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이 안에서 크게 세 가지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선 국제경제구조이론의 포크로프스키학파는 1914년의 러시아는 산업자본주의 국가로써 열강들과 같은 위치에 있었고, 따라서 러시아 또한 1차 대전에 공동 책임을 진다고 주장한다. 반면 반포크로프스키학파의 경우, 러시아는 영-프의 산업 자본에 예속된 반식민지 국가이므로 러시아의 전쟁 책임은 없다고 말한다.

2차 대전 이후로는 독일과 전후 독일을 봐주는 서방에 대한 증오로 인해 1차 대전 당시 독일의 침략성과 책임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기도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구조이론의 시각에서 자본주의의 불균형한 발전으로 촉발된 전쟁이기에 뒤떨어져 있던 러시아도 책임을 피할 순 없음을 주장했다는 특징이 있다.

4.5. 프랑스

4.6. 영국

5. 관련 자료들



[1] 물론 슈튀르크 또한 외교적 행동으로는 세르비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베르히톨트와 의견을 같이하였다.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으면 남부 슬라브 지방(보스니아)이 제국에서 이탈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2] 영국과 러시아는 군주제 국가였던 만큼 죽은 페르디난트 대공에게 더 동정적이었을 것이다. [3] 출처 : Die Deutschen Dokumente zum Kriegsausbruch [4] 출처 : Die auswärtige Politik Serbiens 1903-1914 [5] 상술한 헝가리의 개전 반대 문제, 이를 달래기 위한 세르비아 주권 유지 및 영토 획득 포기 문제 등이 있었다. [6] 사라예보 사태와는 관계 없이 몇 개월 전부터 이미 계획된 방문이었다. [7] 메테르니히의 후배들 다운 일 처리다는 평을 듣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론 악수가 되었다. 푸앵카레는 러시아를 떠나기 전 고별연설에서 외교적 수사로 러불관계의 확고함을 강조했는데 푸앵카레가 떠난 직후 최후통첩문이 발송되면서 모두에게 뜻밖에도 푸앵카레의 연설은 러시아에게 백지수표를 위임해준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8] 세르비아 측 자료인 Die auswärtige Politik Serbiens 1903-1914에는 8월 14일에야 동원이 완료된다는 이중제국 군부의 보고가 있다. [9] 러불동맹은 방어 동맹인데, 세르비아를 오스트리아가 칠 경우 오스트리아를 치는 입장인 러시아가 프랑스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언급은 없으나, 러시아는 이를 당연하게 여긴 것으로 보인다. [10] 어이없게도 러시아 공사는 사라예보 사건 이후 오스트리아 공사와 함께 저녁을 같이 하며 위기수습 방안을 논의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었다. 주 세르비아 오스트리아, 러시아 공사는 모두 전쟁을 막으려는 쪽이었는데 한쪽이 이렇게 어이없이 죽어버린 것도 위기 수습이 안 된 원인 중 하나였다. 아울러 이 사건은 오스트리아 공사가 러시아 공사를 암살한 거 아니냐는 의혹까지 불러와 오스트리아 공사가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하느라 전쟁을 막기 위해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11] 당시에는 비행기 개발 초기였기에 정상 간 정상회담을 하려면 기차 선박을 타고 프랑스에서 러시아까지 가야 했다. 비행선이나 열기구가 있긴 했지만 역시나 비행기보다는 훨씬 느렸다. 푸앵카레의 선택은 선박, 즉 라프랑스였다. [12] 제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되면서 프랑스 황실, 귀족들은 모두 폐지됐지만 귀족들의 경우 1970년대까지도 귀족 가문의 후예들이 자신을 공작이니 백작이니 부르는 일이 흔했고 정부 차원에서는 귀족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공식 석상에서 구 귀족가문의 명사들을 XX백작, XX공작으로 불러줬다. 그러다 1975년에 와서야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대통령이 안와르 사다트 당시 이집트 대통령의 방불에 맞춰서 이러한 관례를 폐지했다. [13] 출처 : Die Österreichischen-Ungarnischen Dokumente zum Kriegsausbruch [14] 영국은 군주제 국가였고 프랑스도 군주제가 폐지되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검은 손을 지원하는 세르비아를 비판했고 공화국 입장에서도 한 나라의 차기 수장을 대놓고 암살한 단체를 지원하는 세르비아 왕실에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는 러일전쟁 때처럼 적들을 과소평가하고 러시아 제국 내부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세르비아를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급기야는 전쟁에 참가하여 세르비아를 도왔지만 1차 세계대전 참전은 러시아 제국을 망쳤다는 그 라스푸틴도 반대할 정도로 최악의 실책이었고 니콜라이 2세는 왕정과 제국을 파멸시키고 자신과 가족들도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 라스푸틴도 반대하는 것을 밀어붙인 것이다. 그만큼 니콜라이 2세가 당시 유럽 분위기는 물론 전쟁에서 중요한 명분 자체에 매우 무관심했다는 증거다. [15] 이에 대해 세르비아 정부가 모호한 말돌리기로 답변을 회피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요구한, 공교육의 문제나 세르비아 고위직들의 공개적인 모욕행위, 그 외 자국 내에서 있었던 일을 일절 인정하지 않고 세르비아 정부가 사건에 가담한 증거를 내놓으라는 답변서를 보내놓고는 자기들이 국제법에 따라 오헝 제국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다고 호소했다는 주장도 있다. 세르비아의 외교술로 오헝 제국을 "저들은 우리가 요구사항을 다 들어줬는데도 침략했다." 며 비난할 명분을 마련했다는 것. 관련 글 [16] 이것은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을 피할 수 없는 원인이 되었다. [17] 출처 : Die Österreichischen-Ungarnischen Dokumente zum Kriegsausbruch [18] 사진에도 나오지만, '914년'으로 잘못 적혀있다. [19] 오데사, 키예프 및 이 둘을 받쳐주는 모스크바, 카잔 군관구 [20] 예를 들어 러시아 해군은 러일전쟁에서 입은 피해를 2차 대전까지 회복하지 못했다. [21] 러시아는 러일전쟁 때보다 훨씬 더 심하게 털렸고 결국 러시아 혁명으로 무너졌다는 점에서 오판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렇게 러시아를 털어먹는 사이 전쟁에서 승리할 마지막 기회를 날려먹었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는 오판이나 다름없게 되었지만. 사실 전장의 승리에 집착해서 전쟁의 패배를 불러오는 건 2차 대전에서 보여준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22] 주영 독일대사 리히노브스키는 본국에 "독일이 프랑스를 공격하지 않는다면, 영국 역시 중립을 지킬 것이며 프랑스의 중립도 보장하겠다." 라고 영국이 제안했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사실 이것은 잘못된 전보였다. 영국의 외무장관 에드워드 그레이가 외교적인 기법으로 '러시아'를 생략한 것으로 실제론 프랑스와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하지 않기로 약속한다면, 프랑스의 중립을 보장한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벨기에를 침범하지 않는다면 영국의 직접적인 참전은 이뤄지지 않았을 공산이 높았지만 프랑스의 중립은 영국이 보장할 수 없었다. 애초에 자기 나라도 아니지만.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알자스-로렌 문제로 안 그래도 프랑스 국민 전체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과의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에 프랑스 국민들은 만세를 부르고 파리 시청에 알자스-로렌의 깃발을 올리는 등 환호하는 분위기였다. 영국이 중립을 지키더라도, 분명히 프랑스는 러시아를 공격하는 독일의 뒤통수를 쳤을 것이다. 이후 리히노브스키는 영국의 긍정적인 제안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다시 전보를 보냈다. [23]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승리로 이끈 명장이었던 대 몰트케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에 이미 사망했다. [24] 이후 몰트케는 회고록에서 이 발언이 자신에게 큰 충격과 상처를 주었다면서 자신도 결코 자신이 삼촌처럼 뛰어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언급했다. [25] 사실 이런 병력 이동은 이미 독일이 부속계획으로 준비해놓았기에 가능했다. 당시엔 철도 국장이었던 폰 스타브 장군은 몰트케의 회고록을 보고 격분하여 서부전선의 7개 군 중 3개 군은 방어를 위해 남겨두고, 나머지 4개 군은 8월 15일까지 동부전선으로 배치할 수 있다는 것을 자신의 책에서 장황한 설명으로 입증했다. [26] 프랑스 입장에선 지금은 동맹이지만 잠재적 적국이나 다름없는 영국과 언제 또 마찰이 생길지 모르는 마당에 당시 자국과 이해관계가 잘 부딪치지 않으면서 든든하고 신뢰 가능한 우군이라 할 수 있는 러시아를 포기하지 못했다. [27] 이 시점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전쟁 명분은 설득력을 완전히 잃는다. 벨기에는 사라예보 사건과 아무 상관도 없었고 러시아와 프랑스 편도 아닌 중립국이었다. 그런 벨기에를 독일이 침공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이를 반대하지 않은 것은 유럽을 지배하는 게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진짜 목적이었음을 보여준다 [28] 18명의 내각구성원 중 12명이 프랑스에게 영국의 지원을 확약하는 것에 반대했다. 당시 영국의 양대 정당이던 자유당은 벨기에를 포함하여 무슨 일이 있더라도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제안을 지지했다. 영국 은행 총재는 은행가와 사업가를 대표하여 전쟁 개입을 반대한다고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에게 전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때 프랑스는 영국과의 협약에 의해 모든 함대를 지중해로 보냈고, 이로 인해 프랑스의 해안은 독일 해군에게 노출되어 있었다. 그래서 주영 프랑스대사 캉봉은 타임즈 편집자에게 "영어사전에서 '명예'라는 단어가 지워지는 것인지 지켜볼 것이다." 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29] 오늘날에도 독일 시간대는 UTC +01:00로 1시간이 더 빠르다. 프랑스, 스페인은 영국과 경도가 비슷하지만 나치 독일 시기에 UTC+01:00으로 바뀐 것이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30] 전자는 몰라도 후자는 일부 군주들의 책임도 크다. 예를 들어 범게르만주의 범슬라브주의의 충돌의 가장 큰 선봉장인 독일 제국과 러시아 제국은 모두 군주정 국가이다. [31]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 모든 과정에서 보스니아인들의 동의는 조금도 구하려 하지 않았다. 훗날 아돌프 히틀러조차도 오스트리아를 독일과 합병할 때 국민투표를 통해 오스트리아인들의 사후 동의를 얻은 것과 대조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합병은 완전히 강제적이었다. [32] 오스트리아의 남슬라브 분열 시도 자체는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이를 지적하는 세르비아의 시각 역시 보슈냐크인들과 크로아티아인들 등 기타 남슬라브인들을 자신들이 대표한다는 전제를 은연중에 깔고 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제국 내 남슬라브인들은 세르비아가 자신들의 리더임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33] 빌헬름 2세는 7월 위기의 외교적 해결을 위해 러시아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서한에서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의 주권을 침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해명한 바 있다. 다만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의 속내를 어느정도 짐작한 것으로 보인다. [34] 특히 프랑스와 러시아 포함. [35] 다만 러시아는 동원령만 먼저 내렸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먼저 선전포고하지는 않았다는 걸 참작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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