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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폰 슈튀르크

<colbgcolor=#000><colcolor=#ffcc21> 오스트리아 제국 총리
카를 폰 슈튀르크
Karl von Stürgkh
파일:Karl_von_Stürgkh_(1859–1916).jpg
본명 Karl Graf von Stürgkh
카를 폰 슈튀르크 백작
출생 1859년 10월 30일

[[슈타이어마르크 공국|]][[틀:국기|]][[틀:국기|]] 그라츠
사망 1916년 10월 21일 (향년 56세)

[[오스트리아 제국|]][[틀:국기|]][[틀:국기|]] 오스트리아 제국
역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틀:국기|]][[틀:국기|]] 시스라이타니아 총리 (1911년 ~ 1916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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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정치인이자 총리이다.[1] 1911년부터 1916년까지 총리직을 수행하며 독일인 중심의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유지하려 했다. 전제적 정책으로 의회를 무력화하고 제1차 세계 대전 개전을 주도했으나, 전쟁 말기 사회민주주의자의 암살로 생을 마감했다.

2. 생애

카를 폰 슈튀르크는 1859년 10월 30일 그라츠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877년부터 1881년까지 그라츠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처음에는 슈타이어마르크 주 행정부에서 일하다 1886년에 교육부 공무원으로 입사해 중등교육 담당관이 되었다. 1891년 계급 선거로 제국 의회의원에 당선, '헌법수호 대토지소유자' 그룹에 속했다. 그는 남부 슈타이어마르크 할벤라인의 영주였다. 1909년부터 1911년까지는 비너트-슈메를링 내각과 가우치 내각에서 교육부 장관을 역임하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프라하 대학교 교수로 임명하기도 했다.

1911년 11월 3일, 81세의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가우치 내각 사임에 따라 슈튀르크를 총리에 임명했다. 총리의 지위로 그는 "공동 각료회의"에서 대외정책과 안보정책을 논의했다. 그러나 의회와 정부의 관계는 늘 순탄치 않았다. 1867년 의회법에 따르면 황제는 긴급 상황 시 임시 법령으로 통치할 수 있었는데, 슈튀르크는 이를 이용해 1914년 3월 16일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서 제국 의회 휴회령을 얻어냈다. 이로 인해 4개월 후 사라예보 사건 당시 의회는 군부와 강경파 장관들을 견제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은 슈튀르크가 레오폴트 베르히톨트,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등 제국의 주요 인사들과 함께 '전쟁파'를 형성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2] 의회의 공백 속에서 이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대립과 갈등을 조장하며 개전을 향해 나아갔다.

그는 세르비아 전쟁이 범슬라브주의 확산을 차단할 기회가 될 것으로 보았다. 외교적 해법으로는 세르비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 세르비아에 대한 조치는 반드시 전쟁으로 끝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914년 7월 28일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감행, 세르비아 침공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는 곧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비화되었다. 그러나 협상국의 반격으로 전세가 기울면서 제국은 전략적 후퇴를 거듭해야 했다. 게다가 전쟁 장기화로 국력이 소진되자 내부의 불만이 급증했다. 이런 상황에서 슈튀르크 정부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전비 조달을 위해 화폐를 남발하면서 인플레이션이 극심해졌고, 각지에서 식량 부족 사태가 빚어졌다. 전쟁에 대한 회의감이 확산하면서 평화 요구가 비등했다. 하지만 슈튀르크를 비롯한 지도부는 이런 민심의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했고, 오히려 전쟁 도발 세력인 군부와 제휴하면서 강경 노선을 고수하여 국민의 여망을 외면했다.

또한 그런 와중에도 그는 오스트리아 내 독일인 우위 수호에 집착했다. 일례로 폴란드에 광범위한 자치권을 부여하면 슬라브계가 세력을 확장해 제국 존립을 위협할 수 있다고 보았다. 아울러 전시 기본권 제한, 야당 요구 묵살 등 전제적 통치 기조를 이어갔다. 한편 이탈리아와의 관계에서는 오스트리아령 트렌티노 지방을 이탈리아에 할양하겠다는 비밀 조약을 제안했다. 그 대가로 이탈리아가 동맹국으로서 참전해 발칸반도 재편을 승인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기만에 가까웠다. 슈튀르크는 이탈리아가 발칸 문제로 양보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므로, 약속과 달리 영토 할양을 피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던 것이다. 이 제안은 이탈리아를 덫에 빠뜨려 참전을 유도하되 정작 영토는 내주지 않으려는 술책이었다.[3]

전쟁이 장기화되자 슈튀르크의 권위는 추락했고, 결국 1916년 10월 21일,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가 서거하기 직전 사회민주당 소속의 정치가이자 전쟁 반대파였던 프리드리히 아들러(Friedrich Wolfgang Adler)[4][5]가 호텔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던 카를 폰 슈튀르크에게 권총을 쏘았고, 전쟁을 주도한 6인중 하나였던 카를 폰 슈튀르크는 그렇게 그의 총에 맞아 암살당하였다. 후임 총리 케르버 남작과 새 황제 카를 1세 역시 전제통치를 폐기하지는 않았으나, 제국은 이후 급속히 와해되었다. 한편 아들러는 사형에서 감형되어 옥중 생활 끝에 대사면으로 풀려났고, 공화국 시대에 활발히 활동했다.

[1] 현대의 연방총리(Bundeskanzler)와는 달리 오스트리아 제국의 정부수반이다. [2] 이 전쟁파 중에서도 슈튀르크는 그나마 온건한 축에 속했다. [3] 이에 대해 후고 한취(Hugo Hantsch)는 이를 "교활한 허위 조약"이라 비판하며, 슈튀르크의 정책이 "비현실적이고 도덕성이 결여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4] 사회민주당을 창당한 빅토어 아들러의 아들.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를 졸업했으며, 그 유명한 아인슈타인의 1년 후배이다. 흔한 후배 사이가 아니라 학창 시절 아인슈타인과 매우 절친한 사이였으며, 아인슈타인의 박사 지도교수인 취리히 대학교 알프레드 클라이너의 조수였다. 클라이너 교수가 지도제자인 아인슈타인과 조수인 자신을 취리히 대학 교원으로 채용하고자 저울질할 때 아인슈타인을 적극 추천해주었다. 학문적 재능도 있었지만 정치에도 더 관심이 많았기에 교원 자리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1911년 아인슈타인이 프라하의 카렐 대학교의 정교수로 떠나면서 물리학을 그만두고 빈으로 들어와 반전 정치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5] 흥미로운 점은 슈튀르크와 그를 암살한 아들러가 모두 아인슈타인과 일정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슈튀르크는 교육부 장관으로 재직하던 1911년, 아인슈타인을 프라하 대학 교수로 임명하는 인사를 단행했다. 한편 아들러는 아인슈타인의 친구였다. 비록 정치적 노선은 달랐지만, 슈튀르크와 아들러가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였던 아인슈타인과 각기 다른 방식으로 교류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