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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미니즘의 역사에 대해서 다루는 문서.2. 시기별
크게 3개의 시대적 사조로 구분이 가능하다. 일반적인 역사 연구에서는 n세대라는 표현을 흔하게 쓰지만, 최근 여성 운동권이나 여성학계에서는 이 시대적 구분을 'wave'로 부르고 n파(또는 'n의 물결')로 번역하고 있다.2.1. 페미니즘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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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랭프 드 구즈 |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
The belief and aim that women should have the same rights and opportunities as men; the struggle to achieve this aim.
여성이 남성과 같은 권리와 기회를 누려야 한다는 믿음과 목표, 혹은 이를 성취하기 위한 투쟁
옥스퍼드 영어사전
여성이 남성과 같은 권리와 기회를 누려야 한다는 믿음과 목표, 혹은 이를 성취하기 위한 투쟁
옥스퍼드 영어사전
Feminism is a radical notion that women are people.
페미니즘은 여자도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급진적인 개념이다.
마리 시어 (Marie Shear)[1]
페미니즘은 여자도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급진적인 개념이다.
마리 시어 (Marie Shear)[1]
일반적으로 페미니즘(여성주의)은 18세기 근대 유럽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학자들 중에서는 프로토 페미니즘이란 용어를 써서 계몽 시대 이전에 존재했던 성평등 이념의 역사를 다루는 이도 있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국가>에서 "신체적인 힘에서 비롯된 차이만을 제외하면 여성과 남성은 동등하다"고 언급했다.[2] 프로토 페미니즘과 페미니즘을 가르는 기준은 "페미니즘 개념이 정립된 때"이다.[3] 그렇다면 페미니즘 개념이 언제 정립됐는지가 중요하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특정한 신념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한 건 1837년 샤를 푸리에가 처음이라고 흔히 알려져 있지만, 이러한 주장이 오류라는 반론도 있다.[4] 최초로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칭한 인물은 프랑스의 여성 참정권 운동가인 위베르틴 오클레르(1848~1914)였고[5], 1892년 파리에서 열린 '제1차 국제여성회의'에서 " 성평등 이념에 입각하여 여성에게 남성과 평등한 권리를 주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페미니즘을 정의했다고 한다. #참조 여러 사료들을 종합해 보았을 때, 페미니즘 개념이 온전히 정립된 건 19세기 후반 이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만약에 '프로토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를 받아들인다면, 페미니즘의 기원은 당겨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늦춰질 수도 있다. 그래서 몇몇 학자들은 프로토 페미니즘을 거부하기도 한다.[6]
18세기 근대 유럽, 당시 계몽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중시했고, 동등한 이성을 지닌 인간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 그러나 만인이 평등하다는 천부인권은 여성에게는 인정되지 않았다. 많은 계몽주의자들은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이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도 일부는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이성을 갖고 있으니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주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특히 프랑스 혁명 이후 여성에게도 참정권 등의 법적 권리를 인정할 것인지에 대해 벌어진 논쟁은 근대적인 성평등 이념을 이끌어냈다. 초기 페미니스트들은 계몽주의에 입각하면서도 계몽사상의 한계인 남성 편향성을 극복하려는 비판적 성찰을 가졌다. 최초의 페미니스트라고 불리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활동하던 시절도 바로 이 때이다.
장 자크 루소는 계몽 시대의 남성우월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 에밀>(1762)에서 "여성은 남성의 마음에 들도록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남성은 가정에서 여성의 뜻에 따르는 대신에, 사회에서는 강자 행세를 하게 된다. 남성은 이성에 따라 스스로 성욕을 억제할 수 있지만, 여성은 남성에게 순종하여 정숙한 아내이자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루소는 여성이 남성에게 예속되는 것을 정당화했다.[7] 다만, 루소의 여성관에 대해서는 상반된 해석도 존재한다. 루소는 성(sex)에 있어서만 남녀의 차이를 주장했고 종(species)에 있어서는 남녀의 평등을 주장했으며,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존재라고 강조했다. 여성성을 강조하였으며 여성 교육을 주장하면서 당시로서는 페미니즘의 발전에 긍정적인 불씨를 제공했다는 것이다.[8]
메리 울스턴크래프트(1759~1797)는 계몽 시대의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중 한 명이다. 그는 프랑스의 정치인 탈레랑이 "여성은 가사교육만 받아야 한다"라고 주장한 데 반박하여, 저서 《 여성의 권리 옹호》(1792)에서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교육을 받을 것"을 주장했다. 《 여성의 권리 옹호》에서 주된 비판 대상은 루소였다. 울스턴크래프트는 루소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여성상에서 ' 이성(理性)'이 결여되어 있음을 비판했다. 루소가 주장했던 여성 교육 역시 가부장제에 부합한 행실과 욕망을 자극하는 용모만을 갖추는 데 그친 노예 훈련이라고 비판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이 남성처럼 정치.경제.사회.문화 활동 전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적 여건을 마련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남성과 여성은 상호관계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성에 대한 이중잣대를 공격했다. 다만, 울스턴크래프트에게도 한계점은 있다. 그는 여성과 남성이 완전히 동등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아주 애매한 입장을 취했다. 즉, 완전히 같은 내용의 시민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지는 않다.
울스턴크래프트는 1797년 둘째 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고드윈'을 낳고 사망했다. 향년 만 38세. 딸 메리는 낭만주의 시인 퍼시 비시 셸리와 결혼했으니, 호러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저자 메리 셸리가 그 메리다. 울스턴크래프트의 사상은 생전에 나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사후, 세 번째 남편이자 선구적 아나키스트였던 윌리엄 고드윈(1756~1836)이 <여권의 옹호 저자에 관한 회고록>(1798)을 발간한 걸 계기로 맹비난을 받았다. 고드윈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개방적인 인물이었고 <회고록>에서 아내 울스턴크래프트의 연애 이력, 이혼, 자살 시도, 부부 생활을 꽤나 솔직하게 밝혔다. 당대의 사회 통념과 보수 윤리에는 어긋나는 내용들이었기 때문에 고드윈의 의도와는 다르게 울스턴크래프트의 평판은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울스턴크래프트의 선구적인 정신은 백여 년 동안 잊혀졌지만, 20세기 들어서 버지니아 울프(1882~1941)와 엠마 골드만(1869~1940)에 의해 발견되고 재평가받았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직후 작성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은 여성이나 무산계급을 배제하고 남성에 대해서만 인권을 천명했다. 이에 반발한 몇몇 계몽주의자들은 여성에게도 권리를 부여할 것을 주장했다. 예를 들어, 니콜라 드 콩도르세(1743~1794)는 <여성의 시민권을 위한 청원>(1790)에서 남성에게 부여된 자유와 권리를 여성에게도 부여할 것을 요구하며 여성 참정권을 주장했다. 올랭프 드 구주(1748~1793)는 < 여성과 여성시민의 권리 선언>(1791)에서 남성에게 부여된 모든 권리를 여성에게도 적용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자코뱅은 자신들을 비판하는 세력들을 숙청하는 공포 정치를 단행하고 있었다. 올랭프 드 구주는 왕정제를 옹호하고 자코뱅을 비판하는 저술활동을 벌이다가 길로틴에서 처형당했고, 그의 동지였던 콩도르세 후작은 체포된 직후 음독 자살했다.
"페미니즘이 이갈리타리아니즘(평등주의)에서 파생되었나"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우선 이갈리타리아니즘이라는 용어가 문서마다 각각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위키백과나 철학의 기초에서는 이갈리타리아니즘을 평등 이념을 하나의 사상 체계로 정립한 것으로 넓은 의미에서 정의하고 있다. 넓은 의미의 이갈리타리아니즘은 스토아 학파의 코스모폴리타니즘(세계시민주의)이나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평등 사상을 포괄하는 의미로 쓰였다.[9] 반면에 스탠포드 철학사전 등에서는 고전적인 리버럴리즘(자유주의)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별개의 운동이 된, 좁은 의미의 이갈리타리아니즘을 상정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이갈리타리아니즘은 용어가 정립된 이후인 19세기 후반에 형성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참조 "페미니즘이 이갈리타리아니즘에서 파생되었다"고 주장하는 측은 좁은 의미가 아닌 넓은 의미의 이갈리타리아니즘을 말하고 있다.
스토아 학파가 이갈리타리아니즘적이라는 건 "후대의 평가일 뿐"이라는 반론이 있다. 이 반론에 일관성을 맞춘다면, 이갈리타리아니즘이라는 개념이 정립된 19세기 이전에 존재했던 평등 사상들이 이갈리타리아니즘적이라는 건 모두 "후대의 평가일 뿐"일 것이다. 그리고 페미니즘 개념이 정립되기 이전에 여성의 평등을 주장했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1759~1797)나 올랭프 드 구주(1748~1793)의 사상이 페미니즘적이라는 것도 "후대의 평가일 뿐"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이갈리타리아니즘과 페미니즘을 모두 가장 협소한 의미로 파악하게 되어 서로 간에 큰 상관관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개념짓기 이전인 프랑스 혁명기의 여권 운동가들도 페미니즘이라고 용어의 반경을 넓히는 이상 "후대의 평가일 뿐"이라는 반론은 자기모순이 있다. "후대의 평가"라는 반론 외에도, 프로토 페미니즘인 플라톤이 스토아 학파보다 이전의 세대이므로 페미니즘이 이갈리타리아니즘보다 먼저 발생했다는 반론도 있다. 잘못된 반론이다. 프로토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의 기원이 아니라 전사(前史)를 말하므로, "플라톤이 프로토 페미니즘"이라는 말은 "페미니즘은 아니었지만 그 이전에 영향을 준 사상"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프로토 페미니즘만으로는 페미니즘이 이갈리타리아니즘보다 먼저 발생했다는 결론이 도출되지 않는다. 차라리 "이갈리타리아니즘을 분명히 정의하고, 스토아 학파는 이갈리타리아니즘이 아니라 이갈리타리아니즘의 전사(前史)에 해당한다"고 반론을 제기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스토아 학파는 평등에 이론적으로 영향을 주었을지언정 근대 정치철학으로서의 평등 사상까지 이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페미니즘의 역사를 근대적 의미로 한정한 예에 비추어봤을 때, 스토아 학파를 이갈리타리아니즘의 전사(前史)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계몽주의자들의 평등 사상까지는 이갈리타리아니즘의 범주로 묶일 수 있을 것이다.
넓은 의미의 이갈리타리아니즘은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평등은 인류 보편의 관념이지만, 어떤 것이 평등인지에 대한 근대적 이론 체계는 고안되는 것이며, 이런 이론들은 넓은 의미에서 이갈리타리아니즘이라는 범주로 묶일 수 있다. 사변적으로 봤을 때 페미니즘 역시 이갈리타리아니즘의 범주로 묶여 일응 하위 개념이나 파생 개념으로 보일 수 있지 않을까도 싶다. 그러나 아무리 이갈리타리아니즘을 넓게 보더라도, 일상적으로나 학술적으로나 현실상에서 페미니즘은 이갈리타리아니즘의 하위 개념, 파생 개념이 아니라 별개의 독립 개념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계몽 시대의 페미니즘은 이전의 이갈리타리아니즘을 그대로 계승한 게 아니라 안티테제로서 등장했다. 장 자크 루소(1712~1778)는 계몽 시대의 남성우월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 에밀>(1762)에서 "여성은 남성의 마음에 들도록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남성은 가정에서 여성의 뜻에 따르는 대신에, 사회에서는 강자 행세를 하게 된다. 남성은 이성에 따라 스스로 성욕을 억제할 수 있지만, 여성은 남성에게 순종하여 정숙한 아내이자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루소는 여성이 남성에게 예속되는 것을 정당화했다.[10] 다만, 루소의 여성관에 대해서는 상반된 해석도 존재한다. 루소는 성(sex)에 있어서만 남녀의 차이를 주장했고 종(species)에 있어서는 남녀의 평등을 주장했으며,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존재라고 강조했다. 여성성을 강조하였으며 여성 교육을 주장하면서 당시로서는 페미니즘의 발전에 긍정적인 불씨를 제공했다는 것이다.[11]
다만, "페미니즘이 이갈리타리아니즘에서 파생되었는가"라는 논의는 "페미니즘을 젠더 이갈리타리아니즘으로 대체할 수 있는가"라는 논의와는 결이 다르다. 비록 페미니즘이 이갈리타리아니즘으로부터 파생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건 이갈리타리아니즘이라는 개념을 현실적인 쓰임과 과거 용례 등 언어의 사회성을 고려해서 정의내렸기 때문이다. 대체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측도 현실적인 쓰임을 주요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언어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 함께 변화한다. 오늘날 말하는 이갈리타리아니즘은 젠더 평등을 포함하고 있고, 페미니즘이 과거 여권 운동의 틀을 넘어서 젠더 평등을 지향하는 운동이 되었기 때문에, 대체 가능성은 충분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대체되려면 사회적 수용과 합의가 뒤따라야 한다. 아직은 일상에서나 학계에서나 논의가 미흡하다.
2.2. 제1파(1세대 페미니즘)
파일:데이비슨.jpg | |||
에멀린 팽크허스트 | 에밀리 데이비슨 | 캐리 네이션 |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
"1세대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는 원래 미국 68운동 세대의 페미니스트들이 자신들을 2세대로 규정지으면서 여성 참정권 운동을 부르던 말이었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전개되었으며,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발견된 페미니스트도 포함시킨다. 주로 자유주의 페미니즘 성향이 말했지만, 동시대에 유럽에서 진행되던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12]나 사회주의 페미니즘도 포함시킨다. 이들은 법적 수단을 통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얻으려 했으며 여성의 자유와 선택을 중시하였다.
존 스튜어트 밀과 그 아내 헤리엇 테일러 밀은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를 근간으로 하여 페미니즘 사상을 한층 더 이론적으로 강화시켰다. 울스턴크래프트와 밀 부부는 뒤이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18세기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는 참정권, 취업권, 재산권 등 법률적 권리의 획득과 관련된 투쟁이 이어졌다. 특히 1890년에서 1920년 사이에 미국과 영국 등지에서 일어났던 여성 참정권 운동이 핵심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에멀린 팽크허스트였다. 그는 1903년 여성 참정권 도입을 목표로 여성사회정치연합(WSPU)를 창립했다. 《 서프러제트》는 이를 다룬 영화이다. # 이 움직임들은 당시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으나, 결과적으로 여성의 권리가 많이 신장되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최초로 여성의 투표권을 보장한 나라는 1893년 뉴질랜드였고, 1920년 미국에서도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해방 이후 실시된 첫 선거(1948년)부터 여성에게 참정권이 부여되었다.
여성참정권론자들의 경우에도 남성성에 우월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여성들이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남성과 같아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경향은 20세기 중반의 2세대 페미니스트들에게 비판받게 된다.
개중에는 비백인 여성과 여성 노동자를 차별하는 등 친제국주의 성향의 여성 운동가도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비판받았다.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렇게 말했다. "남성 특권에 맞선 투쟁에서는 사자처럼 행동하는 부르주아 여성들은 대부분 참정권을 얻고 나면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반동 진영의 유순한 양이 될 것이다." #참조
심지어 에멀린 팽크허스트조차도 장녀 크리스타벨 팽크허스트와 함께 국가를 위한다는 이유로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일에 앞장섰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팽크허스트 가의 반(反) 볼셰비키 성향이 강해져 1926년 에멀린-크리스타벨 모녀는 파업을 분쇄하기 위해 여성특별경찰부대에 자원 입대했다. 성병의 유해성을 이유로 남성 순결을 주장하는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삼녀 아델라 팽크허스트는 훗날 파시즘에 심취하여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일본 제국을 옹호하다가 구금되기도 했다.[13]
한편 미국에서는 여기서 페미니스트들이 기독교 근본주의와 결탁해 금주법 제정 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캐리 네이션은 첫 남편이 알코올중독과 도박으로 사망하자, 금주, 금연, 금오락 운동을 주도했고, 보수주의 페미니즘 단체 '여성기독교금주연맹'을 이끌었다. 술집을 폐쇄하기 위해 직접 도끼를 들고 다니며 술집과 오락실, 경마장을 때려 부수다가, 30번이나 체포되었다. 결국 미국에서는 1920년 여성의 참정권 부여와 함께 금주법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금주법 시행 이후 범죄가 폭증하자 금주법 반대 연합 AAPA를 중심으로 금주법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여성 정치인 폴린 세이빈은 1929년 금주법을 반대하는 여성 단체 WONPR를 결성하기도 했다.
영국의 로버트 오언(1771~1858)은 자본주의의 한계를 인식하고 협동조합 같은 대안 공동체를 통해 사회변혁을 꿈꿨던 유토피아 사회주의 사상가였다. 그는 여성의 재생산 기능(가사노동, 양육과 교육 등)을 공동체 전체의 책임으로 확대하려고 노력했다. 윌리엄 톰슨(1775~1833)은 오언주의의 여성관을 확장시켰다. 톰슨이 1825년에 저술한 <인류 절반을 위한 호소(Appeal of One Half the Human Race)>에서는 자본주의 경제체제 내에서 여성의 재생산은 필연적으로 남성에 대한 경제적 종속을 초래한다고 보았다. 만약에 협동조합에 기초한 사회주의로 이행한다면, 여성의 경제적 독립이 보장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오언주의자들은 여성 노동자에게 가사노동과 임금노동이라는 이중부담을 지우는 걸 거부하고 결혼 제도의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다. 다만, 성적 자유에 관해서는 일치된 견해가 존재하지 않았다. 여성도 남성처럼 합리적으로 정념을 다루고 출산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성욕을 향유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오언주의자도 있는 반면에, 여성이 남성보다 경제적으로 취약해 연애 시장에서 불리하다는 이유로 자유 연애에 반대하는 여성들도 있었다.
프랑스의 생 시몽(1760~1825)도 자본주의의 한계를 인식하고 상호협력에 기초한 노동자연합이 생산수단을 소유하게 하여 무산계급을 해방시키려 한 유토피아 사회주의 사상가였다. 생 시몽 사후에 그의 추종자 앙팡탱(1796~1864)은 진정한 해방을 위해선 정치적 혁명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전통 윤리를 대체하는 도덕 혁명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가톨릭이 여성성을 억압해왔다고 봤고, 여성의 감정적인 본성이 남성의 이성적 본성을 보완하는 사회를 꿈꿨다. 성적 자유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보았다. 앙팡탱을 위시한 생시몽주의자들은 점점 종교적 성격을 띠어 여성 메시아의 도래를 굳게 믿고 종교공동체를 조직했다. 그러나 1832년 앙팡탱이 풍기문란죄(집회조례 위반)로 투옥된 걸 계기로 이들 조직은 해산되었다. 앙팡탱의 여성관은 당시로서는 진일보한 면도 없진 않았으나, 오늘날의 관점으로 봤을 땐 '여성숭배'에 해당되어 비판의 여지가 많다.
프랑스의 샤를 푸리에(1772~1837) 역시 유토피아 사회주의 사상가로서, 이성과 도덕에 기반을 둔 문명 사회 전반을 부정하고 '정념'의 해방을 부르짖었다. 그는 시장경제는 빈곤을 양산한다는 이유로, 일부일처제는 성욕을 억압한다는 이유로 인민의 욕구 충족을 방해한다고 비판했다. 또한 모성 이데올로기는 여성의 정념, 즉 사회적 능력과 성욕을 억압한다. 푸리에는 여성 해방을 사회진보의 척도로 삼았으며, 여성의 경제적 독립을 보장하고 여성의 성욕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가족제도가 변화할 것을 주장했다.
2.3. 제2파(2세대 페미니즘)
시몬 드 보부아르 | 베티 프리댄[14] | 케이트 밀레트 |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
1960년대~1970년대에 걸친 운동으로, 소위 래디컬하다 일컫는 래디컬 페미니즘과 에코 페미니즘이 그 중심이 된다. 단순히 일할 권리만이 아니라 직장에서의 평등. 그리고 남성 유명 대학에 입학할 권리, 임신중절 합법화와 시민권 운동의 일환으로 행해진 운동이다. 차별적 관행뿐만 아니라 가부장제 철폐를 목표로 하는 래디컬 페미니즘 계열이 주가 된다. 근세기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여성우월주의도 2세대 페미니즘에서 갈라져 나왔다.
1세대 페미니즘의 성취로 여성참정권 보장 등 법적 기본권이 확대되었고, 세탁기, 분유, 피임약의 발명은 여성들이 짊어지고 있던 이전까지의 가사노동이나 출산의 부담을 경감시켰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사회구조가 지속되고 있었으며, 68혁명 이후의 세대들은 여기에 의문을 갖고 새로운 페미니즘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사상사적으로 시몬 드 보부아르의 < 제2의 성>(1949), 베티 프리댄의 < 여성성의 신화>(1963), 케이트 밀레트의 < 성 정치학>(1970), 캐럴 해니쉬의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1969),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블랙 파워 다음은 여성의 해방>(1969),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 성의 변증법>(1970)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1963년 미국의 프리랜서 작가였던 베티 프리댄(1921~2006)은 <여성성의 신화>[15]를 출간해 페미니즘의 제2파를 촉발시켰다. 여기서 프리댄은 많은 여성들이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면서도 주부로서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모성으로 대표되는 여성성이 과도하게 찬양받는 사회를 비판했다. < 여성성의 신화>는 큰 반향을 이끌어 1963년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천명한 임금평등법이 제정되는 데 영향을 미쳤으며, 프리댄은 '현대 여성 운동의 어머니'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후 프리댄은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자유주의 페미니즘 성향의 사회 운동을 벌였다. 1966년에는 전미여성기구(NOW)를 창립하여 여성권리장전을 채택하였는데, 이 단체는 현재 미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여성주의 단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1968년에는 처음으로 코넬 대학교에 여성학 강좌를 개설하는 데 공헌했다.
1967년 슐라미스 파이어스톤(1945~2012)이 뉴욕급진여성모임 NYRW를 창설했는데, 이 단체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표방했다. 이들은 성차별적이라는 이유로 미스 아메리카 선발대회에 항의하는가 하면, 전통적인 여성상을 상징하는 마네킹을 땅에 묻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급진-페미 계열의 단체 '레드 스타킹'은 낙태 금지 법안을 폐지할 것을 주장했다. 파이어스톤은 1970년 <성의 변증법>에서 프로이트, 라이히, 마르크스, 보부아르 등의 사상을 급진주의 페미니즘으로 종합하여, 여성학의 토대를 형성했다. 1970년 케이트 밀럿(1934~2017)은 <성의 정치학>을 출간해, 가부장제를 분석했다.
이들은 제도적 변화를 강조하는 리버럴-페미를 강하게 비판하고, 제도의 기저에 깔려 있는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급진주의의 입장은 관점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뉘는데, 파이어스톤은 남성 지배가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구성되었으며 여성 해방을 위해서는 과학기술을 통해 여성이 성을 스스로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케이트 밀럿은 문화적 차원을 강조하여 가부장제 문화가 남성 지배를 확산시키기 때문에 가부장제를 해체할 것을 주장했다.
급진주의 경향은 68세대 젊은층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으나, 7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퇴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캐서린 맥키넌(1946~ )과 안드레아 드워킨(1946~2005)은 급진주의를 극단적으로 적용하여 사회의 모든 폭력적인 것들을 가부장제나 강간 문화와 결부짓기 시작했다. 특히 포르노, 성매매, 그리고 BDSM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고, 80년대 안티-포르노그래피 운동을 주도했다. < 포르노그래피: 여자를 소유하는 남자들>(1981)에서 드워킨은 "포르노는 이론, 강간은 실천", "결혼이란 강간을 정당화하는 제도" 등의 언급을 했으며, 문예 비평에서도 남성 작가들이 강간과 성폭력을 에로티시즘으로 긍정하고 있다고 규탄했다. 기독교 우파와 결탁하여 음란물을 규제하는 법을 제정하는 데 힘쓰기도 했다. 이들은 미네폴리스주와 버지니아주에서 반 포르노법을 제정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자유주의 페미니스트와 급진 리버테리안 페미니스트들이 FACT(Feminist Anti-Censorship Taskforce, 페미니스트 반 검열 대응본부)를 표현의 자유 운동가들가 함께 세워 연방대법원에 위헌 소송을 하였고, 이에 대법원이 받아들여 미국에서 반 포르노법은 폐지된다.[16]
맥-드워킨주의는 자유주의 페미니즘 진영으로부터 "도덕적 권위주의이자, 표현의 자유에 대한 위협"이라는 이유로 공격 받았을 뿐만 아니라, 게일 루빈(1949~ ) 등 급진주의 페미니즘 진영 내부에서도 안티-포르노 운동은 비판받았다. 엘렌 윌리스의 저서 <여성 운동은 친-섹스인가?>(1981)에서는 섹스가 남성 지배의 수단이 아니라 여성을 위한 오락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포르노그래피는 다양하며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관건이라고 역설했다. 친-섹스 페미니스트들이 포르노의 남성편향성을 부정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이것 역시 여성 억압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그 징후이고, 안티-포르노 운동은 본말전도를 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친-섹스주의자들은 페미니즘 포르노의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러한 대립은 가수 마돈나를 바라보는 상반된 시각으로 예를 들 수 있다. 친-섹스주의자들은 마돈나가 여성의 성을 주체적으로 표현하는 페미니스트라고 본 반면에, 맥-드워킨주의자들은 마돈나가 남성우월주의를 선전한다고 분노했다. 마돈나의 누드집 <섹스>(1992)가 발매되었을 때는 "마돈나는 지구상에서 가장 노출이 심한 여자다. 사람들은 마돈나의 몸에 대해 자기 배우자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다"고 조롱하기도 했다.
이렇게 여성주의 성 전쟁을 거치면서 2세대 페미니즘은 내부 갈등을 빚으며 퇴조하였고,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부활하게 된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여성 억압의 원인을 자본주의의 문제로 보았던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과 그 원인을 남성 지배의 문제로 보았던 급진주의를 절충한 사조였다. 또한 페미니즘 외부에서도 페미나치, 포스트 페미니즘이라는 신조어가 생기는 등 대중이 페미니즘에 질려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사회 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 역시 하향세를 걸었다. 대신에 80년대에는 페미니즘이 여성학이라는 이름으로 학계에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운동권 측에서는 여전히 학계의 남성편향성이 심하기 때문에 주류편입에 따른 보수화와 타협을 우려했다. 그러나 여성학은 운동으로서의 언어를 학문으로서의 보편 언어로 정제하여 페미니즘의 깊이를 한층 더
2.4. 제3파(3세대 페미니즘)
주디스 버틀러 |
90년대 들어 새롭게 등장한 페미니스트들은 여성학과 퀴어이론의 영향으로 2세대와는 선을 긋고 새로운 방향을 추구했다. 이들은 2세대에 비하면 정치적 운동으로서의 성격은 약했지만, 대신에 일상의 페미니즘을 주장했다. 정신분석학, 포스트 모더니즘, 생태주의 등 다양한 학문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페미니즘의 새로운 흐름을 창출해냈다. 그리고는 어떤 틀에 자신을 맞추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삶에 페미니즘을 맞췄다.
제2파에 이어 보다 여러 분파로 나누어지게 된다. 이 시기부터 '여성주의'의 범위에서 벗어나 서구권, 백인, 중산층 여성 등의 권리뿐만 아니라 제3세계, 제 3, n개의 성 등의 "상호교차성" 담론에 도달하였다. 즉 제2파에서 전제되어왔던 소위 '여성문제'라는 것이 대체 어디서 어디까지로 규정되는지 의문이 일었고, 학계의 논의가 진전됨에 따라 여성과 여성문제를 일반화된 범주로 인식하는 것은 오류라는 합의에 이른 것이다. 예컨대 같은 여성이라도 무급가사노동에 종사하는 30대 히스패닉 여성과 고소득 전문직을 가진 50대 백인 여성의 삶의 양식은 크게 다르다. 이들이 겪고 있는 삶의 문제를 모두 '여성문제'라는 프레임에 끼우는 것이 아니라 n개의 성, 내지는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 등의 개념을 통해 좀더 넓은 범위에서 성 문제에 접근하고자 하는 것이 현대 페미니즘 학계의 주된 경향이다.[17]
n개의 성에는 생물학적 남성과 그 속의 수많은 젠더, 섹슈얼리티가 모두 포함된다. 요컨데 현대 페미니즘은 여성만이 아닌 다른 소수성에 대해서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대표적으로 상호교차성 페미니즘, 트랜스 페미니즘, 아나코 페미니즘, 우머니즘과 같은 다른 소수자와의 연대, 여성내에서의 차별을 주장하거나 아나키즘 등 사상을 결합한 페미니즘이 3세대 페미니즘에 들어간다. 립스틱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도 3세대 페미니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근래 한국에서는 래디컬 페미니즘의 급진성
2.5. 제4파(4세대 페미니즘)
4세대 페미니즘, 혹은 4물결 페미니즘(4th wave feminism)은 2010년대부터 페미니즘 운동 내에서 새로이 생겨난 개념으로, 2011년에 제니퍼 바움가드너가[18] 맨 처음 제시하였으며, 키라 코흐랜이 2013년에 본격적으로 개념화했다.[19] 단 용어의 정의와 범위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로 활동하는 것이 특징이며, 어떤 페미니즘을 주장하는지는 이용자마다 차이가 있다. 3세대에 비해 정치적 올바름에 집착하는 특징이 있다.
참고문헌
2.6. 현대
페미니즘에는 엄청나게 많은 이해 관계와 이익 관계, 역사와 현재, 합리적 판단을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등 많은 것들이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기에, 주제 자체가 문화권을 막론하고 거대한 화두가 됐다. 한국에서는 페미니즘이 2015년 이후부터 큰 이슈가 되었지만, 그 이전에도 페미니즘은 한국 포털사이트에서 자주 내리오른 용어였다.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인 박근혜가 당선된 2012년에는 해외 언론에서 페미니즘 사상이 한국에서 부각되고 있다고 보도할 정도로 이미 페미니즘 사상은 2015년 이전에도 자주 인용되었다. 페미니즘은 한국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뜨거운 이슈이며, 유럽[20]과 북미에서는 한국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이슈화되었다.[21]2015년부터 한국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키워드이며 나무위키를 비롯한 인터넷 커뮤니티를 비롯하여 정치계, 언론계를 뜨겁게 논하는 이슈 중 하나다.[22]
[1]
폴라 트라이클러(Paula Treichler)가 이 말을 했다고 잘못 알려져 있는데 사실 이 글귀는 폴라 트라이클러와 체리스 크래머레이(Cheris Kramarae) 교수가 공동으로 집필한 'A Feminist Dictionary'(페미니스트 사전)라는 책을 마리 시어라는 신문 기자가 비평하며 신문에 쓴 글귀이다. 즉 폴라 자체는 이 말을 한게 아니고 오히려 이 말에 비평당한 입장. 현재로선 발언자에 대해선 둘째치고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인상적인 비평이라는 평이 많다.
[2]
그리스 문명에서는 여성을 남성과 동등하게 보지 않았으므로 이는 굉장히 급진적인 발언이다.
[3]
Botting Eileen H, Houser Sarah L. "Drawing the Line of Equality: Hannah Mather Crocker on Women's Rights".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2006), 100, pp. 265–78
[4]
Karen M. Offen. "European Feminisms, 1700-1950: A Political History".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0.
[5]
Karen M. Offen. "European Feminisms, 1700-1950: A Political History".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0.
[6]
Ferguson, Margaret. "Feminism in time", Modern Language Quarterly, (2004), pp. 7–27.
[7]
강선미 외, "가족철학:남성철학과 여성경험의 만남",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97).
[8]
조희원, "『에밀』에 나타난 루소의 여성관에 대한 재조명", 페미니즘 연구 제12권 제2호 (2012).
[9]
서울대학교 교육연구소, "교육학용어사전", 하우동설 (2011).
[10]
강선미 외, "가족철학:남성철학과 여성경험의 만남",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97).
[11]
조희원, "『에밀』에 나타난 루소의 여성관에 대한 재조명", 페미니즘 연구 제12권 제2호 (2012).
[12]
마르크스주의 여성주의라고도 한다, 단 당시 자유주의 계열과 마르크스주의 계열 사이엔 갈등이 심했다.
[13]
한편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차녀
실비아 팽크허스트는
공산주의자로 활동였고, 좌파 정치와 멀어진 이후로도
파시즘과
제국주의를 반대했다.
[14]
상단에 나열된 다른 제2파 인물들과 래디컬 계열인 것과 달리 베티 프리댄은 자유주의 페미니스트에 가까웠다.
[15]
<여성성의 신화>는 <여성의 신비>로 번역되어 출간되었지만, 이것은 The Feminine Mystique의 오역이다.
[16]
Tong, Rosemarie. Feminist Thought: A More Comprehensive Introduction (p. 49). Avalon Publishing
[17]
아직도 흔히 쓰이는 양성(兩性)평등이라는 단어도 이러한 맥락에서 굉장한 어폐를 지닌 것이다. 단어 자체가 '두 개의 성이 평등하다'을 뜻함으로써 '남성'과 '여성'이라는 획일화된 범주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18]
Fem: Goo Goo, Gaga and some thoughts on balls
[19]
All the rebel women
[20]
정확히는
서유럽과
북유럽
[21]
TERF같은 일부 분파는 파시즘적 성격을 보인다는 지적이 있다.
#
[22]
주로
대한민국에서 주류인 페미니즘(래디컬 페미니즘)의 여러 논란 때문에 대부분은 부정적인 쪽으로 이슈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