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9 00:45:23

에밀리 데이비슨



1. 개요2. 생애3. 사후

1. 개요

Emily Wilding Davison

영국의 여성운동가.

2. 생애

]]1872년]] 10월 11일 켄트 그리니치[1]에서 상인의 딸로 태어났다.

1891년 로열 홀러웨이 대학교에 입학할 정도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으나 아버지의 사망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잠시 가정교사로 일했다. 1895년 옥스퍼드 대학교 세인트 휴 컬리지에 입학해 영문학과에서 1등급 학사(First-Class Honours)[2]를 받을 정도의 성적을 냈지만 여성에게는 학위를 주지 않는 당시 옥스퍼드 정책 때문에 졸업을 못 하고 교사로 일하다가 1902년 런던 대학교에 입학했다.

세번째 대학 생활 중이었던 1906년 에멀린 팽크허스트 서프러제트 단체인 여성사회정치연합(WSPU)에 가입했다. 대학 생활을 마친 다음해인 1909년부터는 기존에 하던 일을 그만두고 전업 여성참정권 운동가로 활동했다. WSPU는 "말이 아닌 행동"이라는 신조대로 여성 참정권을 얻기 위해 여러 과격 시위를 벌였으며 데이비슨 역시 열성적으로 이에 참여했다. 물론, 그 결과 다양한 사유로 여러 번 체포되었다.
  • 1909년 3월에는 다른 20명의 여성과 함께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총리와의 면담을 요구하며 행진했는데 그 과정에서 경찰과 싸움이 붙었다. 결국 21명의 서프러제트는 체포되어 공무집행방해로 법정에 섰는데 데이비슨은 징역 1개월을 선고받았다.
  • 1909년 7월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재무장관[3]의 정치적 집회를 방해하다가 징역 2개월을 선고받았다. 5일간의 단식투쟁 끝에 죄수가 죽을 경우 생길 역풍을 두려워한 당국이 석방했다.
  • 1909년 9월, 남성만 참가할 수 있는 정치 집회가 열리던 건물 창문에 돌을 던져 징역 2개월을 선고받았다. 역시 2일간의 단식투쟁으로 석방되었다.
  • 1909년 10월, 월터 런시먼(Walter Runciman) 교육위원회 의장이 탄 차에 돌을 던졌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재무장관이 탄 차로 오해했다고 한다. 역시 단식투쟁을 벌였는데 당국은 이번에는 강제로 음식을 먹이려고 했다.[4] 그러자 감방문을 봉쇄했고 간수들은 수공 끝에 끌어내 음식을 먹였다. 어쨌든 8일 후 석방되었다.
  • 1910년 11월, 검은 금요일 집회에 참석해 웨스트민스터 궁전 창문을 깼다. 징역 1개월. 단식투쟁과 강제 음식 섭취 끝에 8일 후 석방.
  • 1911년 12월, 우체통 방화. 10일 동안 구금. 다음해 1월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수감. 이후 여러번의 단식투쟁 시도와 강제 음식 섭취가 있었는데 이에 항의하기 위해 계단으로 뛰어내려 중상을 입은 적도 있었다.[5] 결국 출소 예정일로부터 10일 정도 일찍 출소했다.
  • 1912년 11월, 침례회 목사를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재무장관으로 오인하고 말채찍으로 공격해 징역 10일. 단식투쟁으로 6일만에 석방.
이외에도 서프러제트 선전을 위해 1911년 인구조사 당시 웨스트민스터 궁전에 있는 세인트 메리 언더크로프트 예배당 찬장에 숨어들어간 적도 있었는데 주소지를 영국 서민원으로 등록하려는 목적이었다.
1913년 6월 4일 영국 경마의 중요한 대회 중 하나인 더비 스테이크스에 참석했는데 경기 도중 난간 밑으로 넘어가 주로로 난입한 그녀는 조지 5세 소유의 말인 앤머(Anmer)와 그대로 충돌했다. 당시 기록 영상 데이비슨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10일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마지막 순간에 무슨 의도로 주로 위로 올라섰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단지 앤머의 고삐를 잡기 위해서였다, 가지고 있던 WSPU 깃발을 앤머에게 달기 위해서였다, 사람의 이목이 끌리는 주로 위에서 깃발을 흔들 생각이었다, 순교자가 될 생각이었다[6] 등 여러 추론이 오갈 뿐이다.

3. 사후

당시 보수적이던 영국 사회는 데이비슨 사건을 두고 데이비슨의 죽음보다 기수와 말의 건강을 걱정할 정도였고 데이비슨을 마녀 등으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다만 앤머의 기수였던 허버트 존스(Herbert Jones)는 의식을 되찾은 후 데이비슨을 걱정했다.[7]

하지만 6월 14일 열린 데이비슨의 장례식에 수천명의 사람들이 몰리면서 여성 참정권 운동이 더욱 활발해졌고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18년에는 30세 이상의 여성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졌으며 1928년에는 모든 성인 여성들에게 보통 선거권이 주어졌다.

현재 그녀가 숨었던 세인트 메리 언더크로프트 예배당 찬장[8]과 목숨을 잃은 엡섬 다운즈 경마장에는 그녀를 기리는 명판이 설치되어 있다.
[1] 1889년 런던에 편입되어 그레이터 런던 자치구 중 하나가 되었다. [2] 영국은 학사 학위를 1등급, 상2등급, 하2등급, 3등급, 그냥 합격으로 나눈다. 1등급 학사면 GPA로 3.8~4.0 이상이니 열심히 한 셈이다. [3] 개인적으로는 여성 참정권을 지지한다는 입장이었지만 당시에는 실질적으로 무언가 이루어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서프러제트들에게 위선자로 찍혀 표적이 되었다. 1913년에는 WSPU가 짓고 있던 새 집에 폭탄 테러를 시도한 적도 있었다. [4] 당연하겠지만 본인은 이 강제 배식을 "평생 동안 잊을 수 없을, 끔찍하며 형언할 수도 없는 야만적인 고문"이라고 평했다. [5] 척추 두개골이 골절되었다. [6] 1912년 계단 투신 사건이나 순교 언급 등으로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망할 때 가지고 있던 물건 중에 런던으로 돌아가는 기차표 등 훗날을 계획한 물건들이 있기에 단지 가설일 뿐이다. [7] 그는 데이비슨의 장례식에 초대 았으나 당시 입은 부상으로 참가하지 못했고 1928년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장례식에 참석해 화환을 바치기도 했다. 1951년 자살했기 때문에 1913년 더비의 트라우마로 시달리다가 죽은 게 아니냐는 의견이 있지만 그의 아들과 1913년 더비에 대한 책을 낸 작가는 그건 쓰레기같은 소리이며 아내의 사망과 노령으로 인한 귀먹음이 원인이라고 말했다. [8] 1990년대에 토니 벤 당시 서민원 의원이 "직접 나사를 돌려가며 멋대로" 설치했다고 한다. 2001년에 한 발언에 따르면 웨스트민스터 궁전은 의회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나 여성참정권과는 관련이 없는 사람들을 기념하는 조형물들만 있었던 것이 불만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