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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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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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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산 전투
稷山 戰鬪
<colbgcolor=#F0C420,#000080><colcolor=#800000,#D0FC5C> 시기 1597년 (신종 25년) 10월 17일 (음력 9월 7일)
장소

조선 충청도 직산
교전 세력 <rowcolor=black>
(공세)
일본
(수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명나라 국기.png 양호
파일:명나라 국기.png 마귀
파일:명나라 국기.png 해생[1]
지휘관

파일:고시치노기리몬.svg 구로다 나가마사
병력 명군: 4,000명 (기병) 일본군: 5,000명 (보병)
피해 전사자: 200명 (日) 전사자: 29명 (日)
전사자: 600명 ↑ (明)
결과 승패 구분 불가

1. 개요2. 배경
2.1. 일본군의 진격2.2. 명나라군의 구성2.3. 조·명의 1차 방어선: 남원성2.4. 조·명의 2차 방어선: 직산 평야
3. 전개4. 이후
4.1. 결과 및 양측 피해규모 논란4.2. 일본군의 철수 이유
4.2.1. 선조의 의도적인 '대첩' 띄우기4.2.2. 명량해전과의 관계
5. 매체

[clearfix]

1. 개요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직산[2] 소사벌(소사평)[3]에서 벌어진 명나라군 일본군 간의 전투.

2. 배경

2.1. 일본군의 진격

1597년 1월 12일(음력), 일본군이 재상륙을 시작한다. 조선 측은 이를 '정유재란'으로 분류한다. 다급해져 이순신 1회, 원균 4회 출정하여 강습하지만, 강습에 면역이 생긴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지 못 한다.

1597년 7월 16일(음력), 조선 수군이 너무 강습을 오가다보니 그 경로가 뻔히 노출되어, 일본군에게 대규모로 역습당한 칠천량 해전이 발발한다. 이에 일본군은 8월 1일부로 3로로 나누어 북상을 시작했다.
  • 일본군 육군 우군 : 8월 7~16일 고령 전투, 8월 16일 황석산성 전투 등을 거치고 전주부성으로 합류했다. 이들이 북진하여 9월 7일 직산에 이르게 된다.
  • 일본군 육군 좌군 : 8월 3일에 이순신이 있던 곳에 도착했으나 놓치고, 8월 7일 석주관 전투, 8월 12~15일 남원 전투. 전주부성으로 합류했다. 이들은 충청도 일대, 전라도 일대를 휩쓸며 조선 수군의 근거지를 찾으려 수색했다.
  • 일본군 수군 : 8월 1~7일 진주~사천곤양~석주관을 따라 좌군 보급, 8월 중순 여수 전라좌수영 파괴, 8월 27일 어란포 해전으로 이순신과 조선 수군 발견, 9월 7일 벽파진 해전으로 추격해 명량에 초라한 13척의 조선 수군과 마지막 보루 전라우수영[4]이 있음을 확인하고 명량으로 향했다.

2.2. 명나라군의 구성

임진왜란 때로부터 긴 시간이 지나며 명나라의 파병군 지휘부도 다수 변경되었다. 다음과 같이 조선 조정은 양호-마귀와 자주 논의하게 된다.
  • 형개 - 파병군 총독. 명나라 병부상서라서 명목상 총대장일뿐 명나라에 있었다.
  • 양호 - 파병군 경리. 평양에 주둔. 직위가 높은 문관으로, 후방에서 관리감독 및 논공행상.
  • 마귀 - 파병군 총병. 한양에 주둔. 직위가 낮은 무관으로, 실제 전투를 지휘.
  • 양원, 해생, 오유충, 유정 등의 장수들은 임진왜란 때부터 있었으며, 진린은 새로 건너왔다.

2.3. 조·명의 1차 방어선: 남원성

1597년 7월 22일(음력), 칠천량 해전의 대패가 보고되었다. 선조는 즉각 명에 추가파병을 요청한다. #

1597년 7월 29일(음력), 일본군의 3로 진격(전라도 공략전)이 보고되었다. 선조는 명 육군에게 전주성/남원성 방어를 요청했다. #

1597년 8월 5일(음력), 이 시점에 마귀(한양, 명 도독)/양원(남원, 부총)/진우충(전주)/양호(평양, 경리) 등에 명 육군이 있는 상황이었다. 선조는 마귀의 1만 군사를 남쪽의 방비에 추가로 보내기보다, 한양에 두다가 전라도를 패싱하고 한양을 직공하려는 일본군과 평지에서 맞붙는게 낫겠다고 본다. 충주 탄금대와 한양의 내성에 성을 추가로 쌓지는 않기로 한다. #

1597년 8월 7일(음력), 마귀가 남산에 올라 한양의 내성을 이용한 수성전을 제안했다. 선조는 앞서 자신이 구상한대로 한양 수성전이 아닌 평지 전투를 제안한다. #

1597년 8월 9일(음력), 선조가 마귀에게 조선 육군은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겠다는 전략을 전달하고 암묵적 동의를 받는다. #

1597년 8월 12일(음력), 선조가 마귀의 한양 도성 축성 요구는 마귀의 뜻이 아니라 명나라 높으신 분들의 요구에 마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며 따르는 것임을 눈치채고 묵살하기로 한다. #

1597년 8월 15일(음력), 장운익(접반사)는 마귀가 (8월 5일 선조가 앞서 판단했듯) 일본육군 우군의 한양 직공을 우려해 남원에 구원군을 보내지 않고 있다고 보고했다. 김신원(좌부승지)은 현 한양도성이 평양성 전투 때보다 수성하기에 조건이 괜찮으며, 전라도까지 수군이 밀려도 충청도 안흥 앞바다에서 수륙병진을 차단가능하다고 보고했다. #

2.4. 조·명의 2차 방어선: 직산 평야

1597년 8월 16일(음력), 남원 전투의 패배가 보고되었다.[5] 명나라군은 양원과 10여명만 겨우 탈출했다. # 명군은 일본육군 좌/우군이 모두 들이닥치는 전주성을 중과부적으로 지키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보고, 진우충의 군대를 천안까지 물린다.

1597년 8월 19일(음력), 선조는 조선 조정이 피난을 갈 수도 있으니, 평양에 있는 양호의 명 육군은 한양으로 오지 말고 그대로 자리를 지켜달라고 요구했다. # 선조는 마귀에게 (평양의 양호가 요구하는) 도성 축성은 현실적으로 어려우니 한강 방어 전략을 준비하자고 요구했다. #

1597년 8월 24일(음력), 남원 전투에서 살아온 양원의 군대가 도착했다. 선조는 남대문 밖으로 나와 이를 맞이했다. # 선조는 양호에게 조선군은 한강 방어전을 준비중이라고 편지를 보낸다. #

1597년 8월 27일(음력), 선조가 마귀가 도독에서 제독으로 승진한 것을 축하하는 핑계로 찾아 가 이야기를 나눴다. 이 시점에 일본군이 여산(전북 익산)에, 명군이 천안(충남)에 주둔해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 사헌부는 전주/공주 부근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충주/원주 등에 한강유역 방어선 구축을 건의했고, 선조가 이를 허락했다. #

1597년 9월 1일(음력), 은진(恩津)·여산(礪山)[6] 등까지 일본군이 진격했다. #

1597년 9월 2일(음력), 금산(錦山)·회덕(懷德)·임천(林川)·한산(韓山)[7] 등까지 일본군이 진격했다. #

3. 전개

1597년 9월 3일(음력), 평양에 있던 양호(경리)가 한성으로 내려왔다. 마귀(총병)에게 병력을 남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597년 9월 5일(음력), 마귀는 해생(부총병)을 시켜 기병 2000을 남파하고, 뒤이어 2000여기를 증파하였다.
파일:전국시대.jpg 파일:20190525095333_7dcc74a60c080a64d902a6f8598542f2_5.jpeg.jpg
일본군 보병 명나라군 기병
파일:attachment/직산 전투/Example.jpg
직산 전투 전개도

1597년 9월 7일(음력)
  • 해생의 기병대 2000이 새벽에 평택을 지나, 날이 밝기 전에 직산 남쪽 1km 삼거리에 도착했다. 때마침 북상중이던 일본군의 우군 선발인 구로다 나가마사 군의 선발 보병대 2000도 삼거리에 이르렀고, 서로를 발견하게 되었다.
  • 먼저 공격을 개시한 것은 일본군이었다.[8] 일본 보병대는 명 기병대에 조총 사격을 퍼붓고 나서, 칼을 들고 돌격했다.
  • 하지만 명의 기병대는 조총 화망을 방패로 방어한 뒤, 내려서 화포를 돌격하는 일본군에게 퍼부어 돌격속도를 저해한 뒤, 말에 다시 올라 타 일본 보병대를 향해 돌격했다. 이렇듯 처음 보는 기병 전술[9]에 당황한 일본군은 일시 퇴각한다.
  • 일본 측은 즉각 본대에 증원을 요청해 3천의 보병+기병을 추가 투입해, 좌/우로 나누어 명군에 또 조총 사격을 퍼붓고, 돌격하며 포위망을 형성하려 했다. 다만 일본 측의 기병은 명 기병의 상대가 되진 않았다.[10]
  • 명나라 측도 후발 기병대 2천이 추가 도착했고, 총 4천의 군을 좌/중/우 셋으로 나누어, 기병의 속도를 이용해 역으로 포위하려 하며 공격했다.

4. 이후

4.1. 결과 및 양측 피해규모 논란

결과상 양측의 승패 및 피해 규모는 불분명하고 무의미하다.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일본군 29명 전사 vs 명군 200명 전사'로 일본 측 승리라 주장하며, 조선측 선조실록에 따르면 '일본군 600명 전사'로 명 측 승리라 주장한다. 양측의 최대 사상자로 집계하더라도, 선발대 간의 충돌이었고, 일정 이상 피해가 누적되자 각자 군을 물린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일본군 우군의 기세가 한 차례 꺾였으나, 곧이어 9월 10일(음력), 안성(죽산)까지 추가진격하기도 했다.[11] 직산 전투 직후 조선 조정은 오히려 한양을 버리고 피난을 가야 하는지를 검토하기도 했다.

충청 병사 이시언이 사로잡은 왜적 복전감개(福田勘介)의 공초는 다음과 같다.

"아비는 전 국왕의 장수였는데 관백(關伯)이 찬탈할 때 피살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나를 혐오하여 쫓아내서 가등청정(加藤淸正)의 부하가 되었습니다. 군사 1백여 명을 거느리고 처음에는 서생포(西生浦)로부터 청정을 따라 전라도로 향했습니다.
(중략)
또한 직산(稷山)의 싸움에서 갑비수(甲斐守)의 군대가 많이 죽었으므로 부끄러워서 숨기고 있다 합니다마는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합니다. 내가 이미 사로잡혔으니 항복한 왜인과 같이 대해 주면 죽도록 힘쓰겠습니다. 칼이나 창 쓰는 재주와 포 쏘는 기술은 남의 모범이 되지는 못하지만 몸을 방어할 수는 있습니다. 그 중에도 조총의 묘기는 잘 압니다."
선조실록 93권, 선조 30년 10월 3일 경신 3번째기사

한편 1597년 조선의 충청 병사 이시언한테 사로잡힌 일본군 장수 후쿠다 간스케(복전감개福田勘介)는 "직산(稷山)의 싸움에서 갑비수(甲斐守)의 군대가 많이 죽었으므로 부끄러워서 숨기고 있다."라고 증언했다. 여기서 말한 갑비수란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를 뜻한다. 그러니까 실제로 직산 전투에서 왜군이 입은 피해는 꽤 컸을텐데, 그것을 왜군 측에서 사기가 떨어질까봐 숨기거나 실제보다 적게 말했을 수도 있다고는 하지만 전투 중에 포로로 잡힌 병사가 구로다가 피해를 적게 측정했다고 하는것도 근거라기엔 부족하다. 출처

명군 200명 전사에 일본군 29명 전사 등 직산전투의 사상자 수 및 결과의 근거는 『日本戦史・朝鮮役』이다.
접대 도감(接待都監)이 아뢰었다.

"방금 당보(塘報)가 경리 아문(經理衙門)에 들어왔습니다. 전일에 떠난 중국 군대가 직산(稷山) 남쪽 10리쯤 되는 지역의 험하고 좁은 데가 많은 곳에 매복해 있다가, 어떤 장수의 수하인지 모르는 왜적의 선봉을 만나 말에서 내려 시살(廝殺)하다가 잠시 서로 물러났습니다. 중국 병사들이 급한 나머지 수급을 벨 겨를도 없이 마구 죽이자 나머지 왜적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어제 떠나 보낸 3천 군사가 이미 도착하여 추격 중이라 합니다. 이것은 바로 오늘의 소식입니다.

또 중국 병사가 진중(陣中)에서 달려와 구두로 보고하기를 ‘적의 머리 30급을 베었고 총에 맞아 죽은 자는 부지 기수이다. 오후에 각각 수습하여 진을 쳤는데 벤 수급(首級) 중에는 금회(金盔)와 금갑(金甲)을 입은 자가 몇 명 있었다. 이들은 필시 왜적의 우두머리일 것이다.’ 하였습니다."
선조실록 92권, 선조 30년 9월 8일 을미 2번째기사
제독 접반사(提督接伴使) 장운익(張雲翼)이 아뢰기를,

"방금 직산(稷山)의 전쟁터로부터 돌아온 중국 병사가 말하기를 ‘천안(天安)과 직산 사이에서 뜻밖에도 왜적의 선봉이 모두들 흰 옷을 입고 들판을 뒤덮어 오기에, 중국 병사들이 처음에는 조선 사람으로 생각하여 진격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후에 왜적의 선봉이 먼저 포를 쏘므로 중국 병사들이 일시에 말을 달려나가 시살(廝殺)하며 한참 동안 교전(交戰)하였는데, 화살에 맞거나 곤봉에 맞아 죽은 왜적이 거의 5백~6백 명에 이르렀고 수급(道級)은 30여 개를 베었으며 해 부총(解副摠)[12] 과 양 참정(楊參政) 도 각각 손수 수급 2개를 베었다. 그런데 왜적이 산에 올라가 백기(白旗)를 드니, 천안의 대군(大軍)이 즉각 구름처럼 모여들었으므로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각자 퇴각하여 지켰는데 해 부총 등 네 장수는 지난밤에 직산을 떠나 올라오고 있으며 중국 병사들도 죽은 사람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독이 즉각 각 군영에 명을 내려 모조리 강변(江邊)으로 나가 진을 치고 그대로 야영(野營)하게 하였다고 하며, 또 영기(令旗)를 보내 파 유격(擺遊擊)으로 하여금 정예병 2천 5백 명을 뽑아 거느리고서 수원(水原) 길에서 왜적을 맞아 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선조실록 92권, 선조 30년 9월 9일 병신 1번째기사

4.2. 일본군의 철수 이유

정유재란의 대전략은 조선 남부의 초토화 및 거점 마련을 통한 장기전 대비였지 임진왜란과 달리 빠른 북진을 통한 전쟁 종결이 아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은 1597년 2월 21일, 모든 장수를 일본으로 불러들여서 군령(朱印状)을 내리는데 이때 내려진 군령 내용은 다음과 같다[13]
  • 선봉[先手]의 군사행동은 장수들의 다수결로 결정한다.
  • 선봉은 ‘적국[赤國, 전라도]은 남김없이 평정하고, 청국[靑國, 충청도]과 그 외의 지역은 될 수 있는 만큼 군사행동을 취할 것’.(赤国不残悉一篇ニ成敗申付、青国其外之儀者、可成程可相動事). 즉 우선 전라도를 제압하고 충청도 등에 대해서는 가능한 범위 안에서 침공한다.
  • 이후에는 ‘전략거점성[仕置之城]’을 쌓을 지역을 선정하고 장수들의 다수결로 결정한 후, 축성 등은 귀국이 결정된 장수가 담당한다(右動相済上を以、仕置之城々、所柄之儀各見及、多分ニ付て、城主を定、則普請等之儀、爲帰朝之衆、令割符、丈夫ニ可申付事).

정유재란시 일본군의 목표는 전라도 지방을 초토화시킨후 충청도나 다른 지방에서는 가능한 범위까지만 작전을 수행한다는 것이었지, (당시 조선 조정의 우려와는 달리) 어떻게 해서든지 한양까지 진격한다는 대전략은 없었다.

이후 1597년 7월 모리 히데모토가 부산에 도착함과 함께 야전 장수들의 전략회의가 열였는데(소위 '부산 회의'라고 한다) 이때 일본군은 본대를 두 부대[二手]’로 나누어 ‘적국(전라도) 지역[赤國表]’을 침공하는 방침을 결정하였다.

부산 회의 결과에 따라 일본군 우군은 경상도를 북상하여, 8월 14일~16일 황석산성 전투에서 승리하고 전라도에 침공하여 전주에 이르렀다. 좌군은 경상도 남부를 하동까지 서진하여 마찬가지로 이 지역으로 서진해 온 수군과 8월 10일 경에 합류하고, 함께 전라도를 침공한 후 8월 13일 ~ 15일 남원성을 공략하고( 남원 전투) 전주에 이르렀다.

그리고 8월 26일 전라도 전주에 모인 일본군 제장은 회의를 통하여(소위 '전주 회의'라고 한다) 다음의 군사행동을 결정하였다[14].
  • 충청도 침공에 임하여 부대는 재편성한다.
  • 충청도 침공 후, <우군> 가토 기요마사와 <중군> 구로다 나가마사 두 부대에 <중군> 모리히데모토 부대 중 2,000명을 더하여 합계 35,000명이 전라도가 아닌 경상도로 바로 돌아가, 가토 기요마사와 구로다 나가마사의 ‘성 지역[城所]’으로 이동하여 축성[普請]에 임한다. 또한 경상도로 향하는 ‘귀환로[罷戻ミち筋]’를 진공(進攻)한다. 축성에는 경상도에 주둔하고 있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아사노 요시나가 두 부대도 합류한다.
  • 충청도 침공 후, 기요마사 부대를 제외한 <우군>과 <중군> 히데모토 부대 일부(깃카와 히로이에가 인솔하는 ‘주고쿠 지역 부대’) 그리고 <좌군>, 합계 78,700명이 전라도로 돌아가‘육해군이 함께 섬멸[海陸共ニ撫切]’에 임한다.
  • <수군> 7,000여 명은 충청도를 침공하지 않고, 전라도 연안으로 진격한다.
  • 전라도 침공이 종료 되는대로 ‘전략거점성’ 축성에 임한다

직산전투 훨씬 전에도 일본군은 전라도, 충청도 공략후 철군하고 축성할 것을 정하고 있었으며 소위 말하는 '수륙병진 작전'은 한양 공격이 아니라 전라도 지방 초토화를 위함이었다. 때문에 일본 수군의 활동범위도 전라도 연안으로 한정지었고 충청도로의 진입을 금지하였다.

한편 정유재란 발발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의사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명나라 군이었는데, 2월 21일 군령 배포시 히데요시는 명의 대군이 출격한 경우에는 히데요시 자신이 직접 조선에 도해하여 군사를 이끌 것이라고 공포하였다. 실제로 히데요시는 1598년 5월까지는 대규모의 파병계획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1598년 4월에는 토사(土佐) 지방에 250척이 넘는 공출용 선박 건조를 지시하기도 하였다[15]. 당시 계획에 따르면 히데요시의 조선 도해는 1599년으로 예상되었으나 1598년 9월에 히데요시가 사망함에 따라 그 계획은 전면 무효화된 것이다.

이와 같이 당시 일본군 내부의 군령와 내부 회의 문서를 본다면 직산 전투 직후의 미스터리한 전투 규모와 기동이 전부 이해될 것이다. 정유재란의 1차 목표였던 전라도 초토화는 이미 달성하였고 2차적인 목표는 충청도 및 기타 지방을 가능한 범위내에서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충청도 최북단인 직산(오늘날의 평택, 안성, 천안 인근)까지 도달함에 따라 2차적인 목표도 거의 완료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명나라 기병의 대규모 투입까지 마주하게 된다.

목표는 대충 이루었고 히데요시가 직접 응전할 것이라고 하던 명나라 기병대까지 마주하게 된 선봉 일본군은 위력정찰 개념으로 약간의 소규모 전투만 치른후 히데요시의 군령 및 전주회의의 내용에 따라 남하하여 축성을 시작하면서 장기전에 대비한다.

직산 전투에서 붙잡힌 왜군 포로들의 심문 내용을 봐도, 왜군의 철수가 전부터 결정된 것이었지 이 전투와 관련이 없음이 드러난다.
포로1 당초에 행장과 청정의 뜻은 세 길로 나누어 직접 서울로 올라가려 했는데 관백이 사람을 보내어 전령하기를 ‘서울은 침범하지 말고 9월까지 닥치는 대로 무찔러 죽이고 10월 안으로 서생포나 부산 등의 소굴로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서울까지 3일 길밖에 안 되는데 곧바로 돌아간 것이며 전라도에도 머물 뜻이 없었습니다.
10월3일
포로2 관백이 이미 전라,충청2도를 공략했으면 급히 군사를 철수하되 10월2일에 배에 올라 20일 이내에 일본에 도착해야 하니 어기는자는 참수한다하므로 각 병영의 장수들이 그기한을 어기게될까 두려워서 물러가고 있습니다.
10월2일
포로3 처음에는 서울로 침범하려고 하다가 서울이 비어 있다는 말을 듣고 날씨도 추워서 철수하였으며, 또 대도주(大島主)가 작년부터 반역을 일으켜 풍신수길(豊臣秀吉)이 군대를 움직여 토벌하고자 하므로 나온 군대들도 철수해서 돌아갈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선조실록 30년 10월 20일자 기사


또한 선조 30년 6월 14일, 즉 직산전투가 발발하기 약 3개월전에 요시라가 조선측 인사에게 전달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일본군 제장간 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장을 모아놓고 관백이 약속하기를 「조선이 매번 이처럼 나를 속이고 있으니 내가 분함을 참지 못하겠다. 조선이 그래도 믿고서 내 말을 듣지 않는 것은 전라·충청 두 도가 아직 온전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8월 1일에 곧바로 전라도 등지로 들어가 곡식을 베어 군량을 삼고 산성을 격파할 것이며 보장할 만한 형세가 있거든 두 도에 유둔하면서 이어 제주도를 치라. 만약 불가하거든 군사를 돌려 고성(固城)에서 서생포(西生浦)에 이르기까지 서로 연이어 둔을 치고서 조선에서 강화를 애걸할 때까지 대기하라. 행장(行長)은 고성, 의지(義智)는 거제, 죽도(竹島)의 왜는 창원(昌原)과 죽도와 부산(釜山), 다른 왜장은 기장(機張), 안골포(安骨浦)의 왜는 가덕도(加德島), 가덕도의 왜와 청정(淸正)은 서생포, 이런 식으로 8개 지역에 나누어 둔거하고, 그 나머지는 다시 그 나라 안으로 들어가라. 조선이 끝내 강화를 애걸하지 않으면 가까운 곳이나 5∼6일 거리되는 지역을 수시로 침략하여 기필코 강화하도록 하라. 산성이 있는 곳이면 비록 다 죽더라도 공격해 깨뜨려야 하니, 너희는 죽을 힘을 다하라. 만약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너희 처자(妻子)를 모두 죽이겠다. 」고 하였다.’

‘조신이 그 불가함을 극력 진술하여 말하기를 「조선이 지금은 예전과 달리 정예 군사가 되었고 또 수군이 있어 매우 불편한 형세이다. 」 하니, 관백이 눈을 부릅뜨고 꾸짖기를 「네가 이토록 계책이 없으니, 대사를 어찌 이루겠느냐. 전라도·경상도·충청도 등을 짓밟으면 수군의 형세도 저절로 무너질 것인데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조선의 군마(軍馬)가 조금 강해졌다 해도 말할 것이 못된다. 」 하였다. 조신이 또 말하기를, 「중국 군사가 대거 들어와 이미 전라도에 도착했으니, 이 역시 어려운 형세이다. 」 하니, 관백이 이르기를, 「계사년에도 중국의 대군이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진주(晉州)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중국 군사가 나왔다 해도 어찌 나가 싸우지 못하겠는가. 너의 이런 말은 조선을 옹호하여 하는 말에 불과하다. 모든 일은 장수들이 임시(臨時)하여 하기에 달렸다. 전투하는 일은 실로 멀리서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니, 깊이 들어갈 만하면 들어가고, 그렇지 못하겠으면 그만두어라. 」 하였다. 조신이 더 이상 도모할 말이 없어 잠자코 물러나왔는데, 6월 그믐께나 7월 초에 대병(大兵)이 한꺼번에 바다를 건널 것이라고 하였다.’
-선조 30년 6월 14일 계유 6번째기사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
  • 당시 일본군의 대전략은 한양 입성이 아니라 전라도와 충청도의 초토화 후 조선 남부지방에 틀어박혀서 지연전을 수행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일본군 내부에서 배포된 군령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도해 계획을 통해서도 교차 검증 가능하다.
  • 왜성 즉, 2월 21일 군령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축성을 지시한 전략거점성[仕置之城]의 위치는 이미 직산 전투 이전부터 경상남도 남해안(부산 인근)으로 국한하여 결정되었다. 정유재란 전개과정에서 수정된 사항은 본래 고성군에 축성하기로 되어 있었던 고니시 유키나가가 좀더 서쪽으로 이동하여 전라남도 순천에 축성하는 것 정도였다.
  • 일본군은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의 조선 육군을 먼저 제압하면 조선 수군도 자연스레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일본 수군은 명량 해전에서 참패를 당한 뒤에도 일본 육군과 수군은 전라도 연해지역의 육지와 바다를 싹쓸이하였다.
  • 정예화된 조선군과 명나라 군대 역시 당시 일본군이 경계하던 대상이었다.

이어서 요시라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한 말을 전하면서 당시 일본군의 진격 경로를 설명해주는데,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상의 진격경로와 일치한다. 즉, 직산전투 때문이 아니라 그 전부터 "전라도를 범하고 연해로 군사를 돌릴 것"이 정해져있었던 것이다.
관백의 뜻은 전투를 하지 않고도 조선 지방을 빼앗으려는 것인데, 조선이 기꺼이 강화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군사의 위력을 보여 강화를 하려는 것이다. 이번의 이 거사에서는 바로 전라도를 범하고 연해로 군사를 돌릴 것이다. 군사를 출동하는 즈음에 청정(淸正)의 무리는 경주(慶州)나 혹은 밀양(密陽)·대구(大丘)를 경유하는 길을 택해 전라도로 향할 것이고, 나는 의령(宜寧)·진주(晉州)의 길을 경유할 것이다.
-선조 30년 6월 14일 계유 6번째기사

이어서 요시라는 자신의 의견을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10월 그믐께면 연해(沿海)의 진으로 돌아온다고 하였으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전라도 깊숙이 들어가면 본진이 있는 경상도 지역과는 멀어지게 되어 서로 소통하기 어려운 점을 꼽았다. 그리고 이는 실제 역사상의 일본군 경로와 동일하다.
‘뒤에 나올 군사가 15만, 이곳의 왜군이 3만, 합계 18만이다. 3∼4만 명은 진영에 유둔할 것이고 그 나머지 군사는 깊숙이 들어가는데 잇대어 진영을 치지는 않을 것이다. 10월 그믐께면 연해(沿海)의 진으로 돌아올 것인데 이후에도 강화할 단서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행장의 말이나 내 말이 일을 겪고나면 징험이 될 것이다. 지금은 이미 싸울 기약이 정해졌으니 출입하기가 곤란한 형편이다. 그러나 대병(大兵)이 바다를 건너오면 죽음을 무릅쓰고 한 번 나와 알려줄 계획이며, 비록 진중에 있더라도 저들의 정상을 통고해 주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전라도 깊숙이 들어가고나면 병사(兵使)가 먼 경상도에 있게 되어 통고할 길이 없게 되니, 이것이 염려된다. 우리들은 어떻게 해서든 전쟁을 종식시킬 방책을 강구하고 싶다.’
-선조 30년 6월 14일 계유 6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의 다른 기사에서도 동일하게 6~7월경 일본군이 대대적인 출병을 할 것이라는 설과 함께 경상도, 전라도를 치고 나서 다시 연해(沿海)에 주둔할 것이라는 일본측 계획이 등장한다.
도원수 권율이 왜적의 재침략 계획과 목적, 방비에 관한 풍무수의 말을 보고하다

왜장 풍무수와 상견(相見)했는데, 그가 묻기를 『중국 군사가 많이 왔다고 하는데 그런가? 관백(關白)이 이미 여러 장수에게 조선과 교전해서 승부를 내라고 명령을 내렸다. 6∼7월 사이에 대병이 바다를 건너와 먼저 경상·전라도 등을 치고나서 다시 연해(沿海)에 주둔하며 제주도를 빼앗으려 하는데, 이때 세 나라 국민이 칼날 아래 모두 죽게 될 것이 분명하니, 우리들 역시 매우 가슴이 아프고 안타깝다. 조선은 어찌하여 바로 강화를 하지 않고 끝내 이런 환란을 일으킬 흔단을 만들었는가. 이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고 시운(時運)과 관계된 것이니 무엇을 한탄하겠는가마는, 지금이라도 강화를 논의하면 그래도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면할 수 있다. 』 하기에(...)
선조 30년 6월 14일 계유 7번째기사

참고로 일본군이 1597년 7월에 대대적인 출병할 것이라는 건 '선조 30년 6월 13일 임신 4번째기사'에도 동일하게 등장한다. 이는 대한민국 내에서 흔히 통용되는 속설, 즉, 1597년 7월 15일의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대패함에 따라 일본군이 비로소 본격적인 진격을 시작하였다'는 설과 모순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597년 6월 13일~14일에 이미 6월말(그믐)~7월 중 일본군으로부터의 대대적인 출병이 있을 것이라는 첩보가 조선측으로 입수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일본군이 1597년 7월에 조선을 다시 대대적으로 침공하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칠천량 해전의 발발 여부와는 인과관계가 없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일본군이 제주도를 침탈하려고 한다는 내용이 종종 등장하는데 정작 일본군 군령이나 회의기록에는 제주도 침공에 대한 내용이 발견된 적 없다는 점도 특기할만 하다.

어쨌든 이와 같이 조선측 기록과 일본측 기록이 교차검증된 바에 따르면, 일본군이 10월경 경상남도 남해안 일대로 후퇴하는 경로는 정유재란 출병 당시부터 계획된 바일뿐, 직산전투 같은 특정 전투에 따라 경로가 변경된 것은 아니다.

4.2.1. 선조의 의도적인 '대첩' 띄우기

일본군이 철수하자 선조는 이순신의 권위는 끌어내리고 (명나라 파병을 이끌어낸) 자신의 권위를 끌어올리고자, 명나라군의 직산 전투 때문에 일본군이 철수했다며 '직산 대첩'이라고 정치적으로 띄웠다. 오죽하면 칭찬을 받는 명나라 장수 양호조차 정도가 심하다고 여겨, 이순신을 칭찬하며 품계를 올려줄 것을 요청할 정도였다.
상이 말하기를,
"흉적이 조금 물러가고 종묘 사직이 다시 돌아왔으니 이는 참으로 대인의 공덕이라 감사함을 무엇으로 말하겠습니까. 절을 하여 사례하겠습니다."
하니, 경리[16]가 말하기를,
"이게 무슨 말씀이오. 제가 무슨 공이 있습니까. 이러한 예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고, 상이 굳이 청해도 따르지 않았다. 상이 말하기를,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사소한 왜적을 잡은 것은 바로 그의 직분에 마땅한 일이며 큰 공이 있는 것도 아닌데, 대인이 은단(銀段)으로 상주고 표창하여 가상히 여기시니 과인은 마음이 불안합니다.
"하니, 경리가 말하기를,
"이순신은 좋은 사람입니다. 다 흩어진 뒤에 전선(戰船)을 수습하여 패배한 후에 큰 공을 세웠으니 매우 가상합니다. 그 때문에 약간의 은단을 베풀어서 나의 기뻐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자, 상이 말하기를,
"대인에 있어서는 그렇지만 과인에 있어서는 참으로 미안합니다."
-선조 30년 10월 20일자 기사 --


물론 조선이 단순한 정치적 의도때문에 직산 전투를 띄운 것은 아니다. 일본군 내부 군령이나 회의내용을 몰랐던 조선조정 측에서는 직산전투 이후 발생한 일본군의 후퇴 원인을 제한된 정보를 바탕으로 나름 판단한 것인데, 그 내용이 "매우 황당"하더라도 취합된 정보가 그러니 그렇게 판단할 수 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일본군 고위층만 알고 있었던 대전략을 몰랐던 일본군 병사 역시 조선군에 의하여 포로가 된 후, 자기들이 알고 있는 선에서만 전황을 진술했는데 이런 진술 역시 직산 전투의 의의를 고평가하는데 일조하였다.

사로잡힌 왜적 한 사람이 실토한 적의 내부 사정을 접반사 장운익이 보고하다

정원이 제독의 접반사 장운익(張雲翼)의 말로 아뢰기를,

"지금 영국윤(寧國胤)이 왜적 한 사람을 사로잡아 사람을 차출하여 압송해 왔으므로 제독이 통사(通事) 박대근(朴大根)을 시켜 물어보니, 왜적이 대답하기를 ‘본디 왜장 모리(毛利)에게 소속된 노정(奴丁)이었는데 청주에 이르러 병을 얻어 뒤떨어졌다가 9월 24일에 사로잡혔다. 당초에 관백(關伯)은 여러 장수들에게 분부하기를 「조선의 남녀를 모두 죽이고 닭과 개도 남기지 않도록 하라. 그러한 뒤에 다음 분부를 듣도록 하라. 」고 하였다. 그러므로 남원을 함락시켰을 때 왜적의 전사(戰死)한 자가 백여 명이나 되었고 서울로 진격하고자 직산(稷山)에 이르렀다가 중국군에게 저지당해 죽은 자가 5백여 명이었으며, 천 파총(千把摠)도 20여 명이나 죽었다. 이 때문에 가등청정(加藤淸正)이 붉은 깃발을 가진 사람을 시켜 전령하여 철수해 돌아가게 하였고, 관백도 전령하기를 「이미 전라·충청 2도를 공략했으면 급히 군사를 철수하되 10월 2일에 배에 올라 20일 이내에 일본에 도착해야 하니 어기는 자는 참수한다. 」하므로, 각 병영의 장수들이 그 기한을 어기게 될까 두려워서 당황하여 물러가고 있다…….’ 하였습니다. 제독이 말하기를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느냐. 네 말이 매우 황당하구나.’ 하니, 왜적이 ‘소인이 이미 이러한 처지에 이르러서 생명이 노야(老爺)에게 달렸는데 어찌 감히 황당한 말을 하겠는가. 만약 내 말이 옳지 않다면 중벌도 달게 받겠다…….’ 하였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선조 30년 10월 2일 기미 4번째기사

4.2.2. 명량해전과의 관계

직산 전투의 전개나 결과가 조선시대 당시 띄워주던 것에 비해서 별 내용이 없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국내에서 널리 퍼졌던 가설이 '일본군 철수는 명량해전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직산전투 이후에도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일본군에게 '일본군 수군이 이순신에 의해 명량 해전에서 대패'했음이 알려지자 일본군은 더이상의 수륙병진을 통한 북진이 불가능했기에 한반도 남해안으로 후퇴하여 성을 쌓았다는 가설인 것이다.

이는 1597년 2월 21일 군령이나 전주회의 등 일본군 내부의 군사 명령 자료가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때에 널리 인기를 끌었으나, 구체적인 증거는 없고 일본을 포함하여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되는 문헌적 근거는 전부 일본군의 철수가 명량해전 또는 직산전투 이전에 계획된 것이라는 점을 가르키고 있기에 인터넷 담화 이상은 되지 못한다.

오히려 일본군의 후퇴에 명량해전이 영향을 끼치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다수의 근거는 아래와 같이 확인된다.

첫째. 명량해전이 벌어진 9월 16일 당일, 전주회의를 통해 전라도 방면 담당으로 지정된 일본군 장수들은 전라도 정읍에 모여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소위 '정읍회의'라 한다) 이 정읍회의에서 결의된 전략은 기존 전주회의에서 결의된 대전략의 재확인 및 마무리에 가깝지 전환이 아니었다.

인터넷 가설을 보면 명량해전 결과가 이 정읍회의 내용에 영향을 미쳤다는 설을 종종 펼치는 사람도 종종 보인다. 명량해전은 9월 16일 유시(酉時 오후 5시~7시)경에 종결되었던 점을 고려하면 명량해협(오늘날의 전라남도 진도군)에서 전라북도 정읍시까지 당시 전황과 당시 기술력에도 불구하고 몇시간만에 전투 결과가 (비교적) 정확한 전투결과가 알려졌고 일본군 장수는 이때문에 심야에 (긴급히) 회의를 했다는 등 다수의 가정이 추가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믿을만한 증거는 없다.

참고로 정읍회의 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17].
  • ‘적국(전라도) 중에서 남은 지역들[赤國うち相残こほり/\]’ 즉, 전라도 미침공 지역에 대한 침공계획을 세우고 실행한다. 침공 종료 후에는 ‘전략거점성’을 축성한다.
  • 전주회의에서 정읍회의까지의 충청도, 전라도 침공상황을 ‘지도[絵図]’에 기재하여 히데요시에게 보고한다.
  • 장수들이 주둔과 축성에 임하는 ‘전략거점성’을 지을 지역을 결정하고 히데요시에게 보고한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히데요시로부터 ‘백국(しろ國) 중에서’ 즉 경상도 지역 안에 배치할 것을 지시받았으나, ‘적국 순천군 지역[赤國順天郡内]’ 즉, 전라도 순천으로 변경한다.
  • 히데요시로부터는 다치바나 무네시게의 부산 주둔이 지시되었으나, 부산은 일본과 조선 사이의 정보 전달 요지이므로 모리 요시나리가 주둔한다. 무네시게는 시마즈 요시히로․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주둔하는 ‘전략거점성’ 사이에 하나의 성을 쌓고 주둔한다.

둘째. 당시 일본군 내부의 기록과 조선왕조실록 등을 봐도 명량해전보다 앞선 9월 16일 이전에 조선 남부로의 철수가 결정되어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일본군 종군승려 케이넨(慶念)의 조선일일기(朝鮮日々記)(국내출판명 : 임진왜란 종군기)에서도 유사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케이넨은 부대의 목적지가 충청북도 진천(鎭川)까지 가는 것으로 정해졌는데 이때 케이넨은 "배가 있는 부두에 가까워 지는 것"을 즐거워하고(9월 9일) 어떤 장소에서는 배가 정박해있는 부두로 퇴진하라는 지시를 받고(9월 14일) 뾰족뾰족한 바위들이 줄지어 있는 산속 계곡 사이를 통과하다가(9월 18일) 경상도 상주(尙州)에 도착한다(9월 19일).

당시 케이넨은 충청북도 진천군에 있는 어떤 나루에서 배를 타고 내륙 수운(강/하천)을 통하여 경상도 상주로 퇴진하였고 퇴진명령이 내려진 시점은 9월 14일로서 명량해전 일자(9월 16일)보다 이르다. 즉, 명량해전이 벌어지던 그 날짜에 충청북도 내륙 지방의 일본군은 이미 수로를 통하여 경상도로 퇴진을 진행중이었다.

참고로 당시 진천은 충청도 내륙과 경상도 내륙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충지였는데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조선 역시 충청북도 진천(鎭川)을 통하여 경상도 대구, 경주에 파견될 명나라군의 군량을 운송하려고 하였으나 이 부근 고을이 일본군에 의하여 피해를 너무 심하게 입어서 어렵다는 내용이 나온다.
경주와 대구 지방에 파견할 중국군의 군량 조달에 대한 대책을 비변사가 아뢰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제독이 4∼5천 명의 군사를 진천(鎭川)을 경유해서 경주와 대구 지방에 보내려고 하는데, 이 부근의 고을들은 왜적의 피해를 너무 심하게 입었으므로 행군 중에 식량을 공급하기가 어려울 것이며 머무는 곳에 식량을 계속 공급하기 위하여 아무리 온 도내의 힘을 모은다 하더라도 수십 일의 공급을 결코 갑자기 마련할 수 없을 것이니 매우 우려됩니다.
선조 30년 10월 3일 경신 5번째기사

한편 9월 18일 기사에는 일본군의 철수과정에서 명나라 장수들이 급하게 추격하였으나 진천에 거주하던 일본군이 이미 형강[18]을 건너서 명나라군이 추격을 더이상 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나온다.
따라서 그 철군은 명나라군이 따라잡을 수 없는 일정으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진천에 주둔했던 일본군의 철군이 명량해전에서 일본 수군에 패배한 것에 따른 결과라면 진천의 일본군은 단 하루만에 그 소식을 알아채서 당일에 진을 정리하고 대규모 인원을 즉시 이동시키면서 46명의 전사자를 제외하고는 (기병대가 포함되어 있을) 명나라군의 추격부대까지 따돌렸다는 것인데 통신과 수송이 발달한 현대에서도 하루만에 군부대가 이런 기동을 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진천의 왜군이 이미 형강을 떠났음을 접대 도감이 보고하다

접대 도감이 아뢰었다.

"제독(提督)이 파(擺)·시(柴)·팽(彭) 세 장수에게 분부하여 금강(錦江) 가에서 왜적을 추격하도록 하였는데 어제 또 46급(級)을 베었으며, 진천(鎭川)의 왜적은 이미 형강(荊江)을 건너 떠났다고 합니다."
선조 30년 9월 18일 을사 2번째기사

셋째. 명량해전(9월 16일) 때문에 일본군이 수세로 전환하였다는 근거가 없다. 명량해전 이후에도 전라도 해안가의 일본군은 살육과 약탈을 행하면서 1597년 2월 21일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령, 즉, 전라도의 초토화를 충실히 행하였다.

일단 조선 수군의 본거지였던 전라우수영은 초토화된다. 조선 수군은 고군산군도로 물러났다가 10월 9일에 해남 전라우수영으로 복귀하였는데 이때 기록을 보면 당시 우수영에는 인적이 없고 보이는 것은 참혹 뿐이며 "해남에서 흉악한 적들이 진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는 내용이 난중일기에 적혀있다. 그리고 조선 수군은 1598년 7월에 벌어지는 절이도 해전(일본군 공세)까지 전투를 치르지 않고 고금도에서 수군 재건에만 집중한다.
통제사 이순신이 적 수군의 동태 및 아군의 준비상황을 아뢰다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의 서장에,

"소서행장(小西行長)은 예교(曳橋)에 주둔하고 있으며 2월 13일에는 평수가(平秀可)가 그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같은 곳에 주둔하고 있습니까. 우리 주사(舟師)는 멀리 나주(羅州) 경내의 보화도(寶花島)에 있으므로 낙안(樂安)과 흥양(興陽) 등의 바다에 출입하는 왜적이 마음 놓고 마구 돌아다녀 매우 통분스럽습니다. 그리고 바람이 잔잔하니 이는 바로 흉적들이 소란을 일으킬 때이므로 2월 16일에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보화도에서 바다로 나아가 17일에 강진(康津) 경내의 고금도(古今島)로 진을 옮겼습니다.
선조 31년 3월 18일 계묘 4번째기사

그 와중에 전라도 지방은 내륙과 해안가 지방을 막론하고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었다. 강항이 지은 간양록 중 <난리를 겪은 사적(涉亂事迹)>을 읽어보면 9월 14일에 이미 왜적이 "이미 영광군(靈光郡)을 불태우고 산을 수색하고 바다를 훑어 인물(人物)을 도살(屠殺)"하고 있었으며 9월 23일에 강항은 전라도 영광군 논잠포에서 왜군에게 납치되었다.

그리고 9월 24일에는 무안현(오늘날의 무안, 목포) 어느 해안가에 도착하니 "적의 배 수천 척이 항구에 가득 차서 붉은 기ㆍ흰 기가 햇볕 아래 비치고, 반수 이상이 우리나라 남녀로 서로 뒤섞여 있고, 양옆에는 어지러이 쌓인 시체가 산과 같았다"고 할 정도였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30년 10월 10일 정묘 1번째기사를 보면 비변사가 당시 호남 정세를 탐지한 내용이 나오는데 이에 따르면 "전주성은 왜적의 무리가 다 헐어버려 터만 남아 있을 뿐이고, 남원은 성지(城池)가 그대로 있는데 왜적의 자취는 없어졌으며, 나주에는 대부대의 적이 주둔하고 있고, 곡성·구례 등에도 수백 명의 왜적이 있다"고 하여, 당시 일본군 주력이 전라남도에 대거 주둔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량해전 직후에도 전라남도 지역에서의 육전은 치열했는데 기록이 남아있는 것만 봐도 전라남도 강진‧장흥일대에서 펼쳐진 왜구와의 전투는 전몽성‧김덕랑을 중심으로 한 밤재전투, 윤륜‧윤신 등을 중심으로 한 병치 전투(성산벌 전투), 파주염씨 염걸(廉傑)‧염경(廉慶) 등의 구십포 전투, 안동김씨 김흥업(金興業)의 남당포 전투, 김응원‧김응규의 장흥 토구동 전투, 해남윤씨 윤현‧윤걸의 장흥 석대들 전투, 위대기의 장흥 중령산 전투, 장흥 안양 지포(지천포)전투 등이 있다 #

일본측 기록을 교차 검증하였을 때도 명량해전 이후에도 일본군은 전라남도 지역에서 꾸준한 공세를 취하고 있는데 나베시마 가쓰시게가 10월 1일 금구 김제일대에서 취한 비수(鼻數)는 3,369개고 킷카와 히로이에의 경우에는 9월 21일 진원에서 취한 것이 870개, 9월 26일 영광, 진원일대에서 취한 것은 무려 1만 40개. 해남에서는 시마즈 타다츠네가 9월 25일에 참살한 자는 많았으며 같은 해남에서 시마즈 요시히로은 10월 2일, 3일에 비수를 다수 취하였으며 10월 9일에는 의병 수 십명을 참하였다고 한다. 또한 전라남도 나주지역에 주둔한 바 있었던 쵸소카베 모토치카는 한 지역에서 6천 6인의 코를 베었다고 한다[19].

조선왕조실록의 선조 30년 11월 12일 기해 4번째기사에서 전라우수사 이시언이 치계한 바에 따르면 당시 일본군이 철군 하기 전에 전라도 해남(海南)·강진(康津)·장흥(長興)·보성(寶城)·무안(務安) 등의 고을에서 대규모 살육을 자행하였다는 내용이 담겨져있는 등 당시 일본군의 전라도 점거는 몇달간 이어졌으며 그 공세의 강도 역시 높았다.

선조 30년(1597년) 12월 기사에서도 전라도 연해에 여전히 일본군이 활개치고 다님이 확인되는데, 당시 조선군과 명군이 주력부대를 호남에서 영남으로 이동시키려하자 전라도 관찰사 황신은 이의 부당함을 진언하면서 여전히 장흥, 보성, 순천 지역의 해안가는 일본군이 득실득실함을 염려하고 있다.
감사 황신이 전라도의 적정과 영남으로의 군사 이동의 부당성을 진언하다

전라도 관찰사 황신(黃愼)이 치계하였다.

"본도의 적세(賊勢)가 점차 철수하여 물러가는 듯하지만 장흥(長興)과 보성(寶城)의 적은 낙안(樂安)의 적진에 합세하고, 순천(順天)과 흥양(興陽)의 적도 군사를 나누어 낙안에 목책을 쌓고 집을 지으면서 날마다 곡식을 수확하여 오래 머물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그 형세가 스스로 물러갈 리는 없을 듯합니다. 삼가 듣건대 대군이 남하하여 모두 영남으로 향한다 하고 또 본도의 병사(兵使)와 방어사(防禦使)에게 군병을 이끌고 대군을 따라 전진하여 합세해 적을 섬멸할 것을 명하였다고 합니다. 도내의 연해 지방이 온통 적의 소굴이 되어 있는데, 중국군이 와서 토벌하지는 않고 본도의 제장(諸將)마저 영남으로 옮겨간다면 적은 반드시 우리의 허실(虛實)을 엿보아 뒤를 추적할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그리고 곧장 위도(魏都)로 달려갈 계획을 세울 수도 있는데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정에서는 다시 십분 헤아려 조처하여 후회가 없도록 함이 어떻겠습니까."
선조 30년 12월 10일 병인 5번째기사

정리하자면 1597년 9월부터 시작된 일본군의 북상 중단과 전라도 침탈은 직산전투 또는 명량해전 같은 특정한 전투때문이 아니라 1597년 2월 21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군 장수들에게 군령을 배포할 때부터 정해진 대전략에 따른 것이고 철군의 구체적인 시기도 직산전투, 명량해전과는 무관하게 정해졌다고 볼 수 있다.

5. 매체

김경진의 소설 < 임진왜란>에서는 전반적으로 이 전투 자체를 제대로 된 교전이 아니라는 식으로 서술한다. 명군에 전투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명군은 초전에 패배하자 일본군 견제를 위한 기동 정도만 하다가 돌아갔고, 일본군은 거의 피해 없이 재편성을 위해 휴식하던 중 명량 해전의 소식을 듣고 스스로 물러간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김훈의 소설 < 칼의 노래>에서는 직산 전투가 명군의 패전이라고 서술했다.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명나라군이 이 전투 직후 한양으로 후퇴하고 일본군은 오히려 북진한 기록을 토대로 명나라의 패전으로 기록했다.


[1] 총사령관 양호와 도독 마귀는 한양의 명군 본진에서 작전을 총괄하였고 전장에서 직접적인 지휘를 한 것은 부총병대장 해생이다. [2] 지금의 천안시 서북부 직산읍 일대. [3] 대동여지도에 따르면 직산, 평택, 안성의 경계부에 표시되어 있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행정구역이 다른 천안시(직산), 평택시, 안성시 모두 직산 전투를 자기 고장에서 벌어진 전투라고 각각 소개하고 있다 [4] 명량 바로 뒤의 해남군 문내면 남문길 25-2에 우수영 본진이 있었다. [5] 비슷한 시기 황석산성 전투도 패배했으나, 9월 1일에 뒤늦게 보고된다. [6] 오늘날 지명으로 은진은 충남 논산, 여산은 전북 익산. [7] 오늘날 지명으로 금산은 충남 금산군, 회덕은 대전 신탄진, 임천은 충남 부여군, 한산은 충남 서천군. [8] 전국시대로부터 충주 탄금대 전투 때도 그러했듯, 기병을 상대로 조총부대는 압도적이어왔기 때문. 이에 양측의 숫자가 비슷한 상황에서 조총부대가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9] 이전까지 조선이나 일본의 기병은 무장을 가볍게 하여 속도를 높여, 보병대를 충파하여 부숴버리고 각개격파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경기병의 파훼법이 조총이었기에 일본군이 평지전에서 승승장구해 왔으나, 이번 정유재란에서 명나라 측은 마귀(총병)을 비롯해 초원에서의 기병 전문가들이 대거 파병되어, 평지전에서 대등한 전력을 보인 것이다. [10] 애초부터 일본 기병은 말 탈 줄 아는 하급 사무라이들을 모아서 급조하다보니 전투로 단련된 명나라 기병한테 상대가 될 수 없다. 게다가 명군에는 기마술과 마상전을 잘하는 중앙아시아 출신 병사들도 상당했다. [11] 9월 14일 "왜적이 10일에 안성을 노략질하고 전진하여 죽산 지경을 침범했다"고 짧게 보고된다. [12] 명나라 부총병대장 해생을 말한다. [13] 출처 : 19p. 정유재란시 일본의 목적과 일본측의 군사행동(丁酉再乱時の日本の目的と日本側の軍事行動), 츠노 토모아키(津野倫明) 고치대학 교수, 韓日関係史研究 (57) 83-122 2017년8월31일 [14] 출처 : 22p. Ibid [15] 출처 : 14p. Ibid. 前掲中野 「慶⾧の再派兵」 , 津野倫明 「朝鮮出兵期における造船に関する⼀試論」등 으로부터 재인용 [16] 명나라 장수 양호를 가리킨다. [17] 출처 : 27p. Ibid [18]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오늘날의 대청댐 인근으로 추정된다 #. 참고로 한강, 금강, 낙동강 등을 포함한 현대의 강은 각종 현대적인 치수사업과 댐 건설을 통해서 수계가 조선시대 대비 상당히 변형되었음을 유념해야한다 [19] 출처 : 北島万次 지음, 朝鮮日日記.高麗日記: 秀吉の朝鮮侵略とその歷史的告發, 303~3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