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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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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기타

1. 개요

日本国王. 전근대 중국에서 일본의 통치자를 책봉할 때 부여했던 왕호.

2. 역사

일본이 자국을 지칭하는 말로 일본을 쓴 것은 7세기 전후의 일이지만 전통적으로는 위노국(委奴國)이나 위()에 사람인변()을 붙인 왜노국(奴國) 등으로 지칭하였고 한나라 때 하사한 금인에도 한위노국왕(漢委奴國王)이라는 명문이 확인되고 있다. 보통은 줄여서 왜국(倭國)이라고 하였고 책봉할 때에도 왜왕(倭王)이란 책봉호를 사용하였다. 당나라 이후 조공책봉 질서에서 벗어나면서 왜국이나 왜왕이라는 명칭은 사라지고 일본이 대내외적으로 표방한 일본이라는 명칭이 주가 되게 된다.

보통 천황이 일본국왕에 책봉되지만 실권자가 대신 책봉되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무로마치 막부의 제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이다. 명나라로부터 감합무역을 허가받고 일본국왕에 책봉되어 쇼군의 권위가 천황을 뛰어넘는 것을 보여주었다. 한반도와 달리 일본은 섬나라라는 특성으로 인해 한반도 국가들보다 사대에 무관심했지만 그들도 무역 등의 실리적 이유를 위해 스스로 일본국왕에 책봉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아시카가 요시미츠 이전에 중국으로부터 일본국왕으로 책봉된 사람이 고다이고 천황의 아들이었던 가네요시 친왕(懷良親王, 1329? ~ 1383)으로,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밀려 교토를 떠나 요시노에 남조를 수립한 고다이고 천황이 자신의 왕자들을 각지에 파견해 무사들의 지원을 받아 내려고 했을 때 규슈 방면으로 파견된 인물이었다. 규슈에서 기쿠치 씨의 지원을 얻어서 정서부(征西府)를 열고 정서장군궁이라 불린 그는 명에 사신을 보내 양회(良懷)라는 이름으로 홍무제로부터 책봉을 받았다. 1369년의 일이다.

홍무제가 가네요시 친왕을 '일본국왕'으로 임명한 것은 당시 명의 해안에까지 쳐들어 오던 왜구를 금압할 것을 요구하기 위한 것이었고, "더 이상 왜구의 해적 행위를 방치한다면 우리가 군사를 보내 너 '일본국왕'을 체포할 것이다"라는 홍무제의 엄포에 '일본국왕' 가네요시 친왕도 이에 발끈해서 명의 사신을 구금하고 죽일 생각까지 했다고. 중국의 《 명사》(明史)에는 1381년 홍무제가 보낸 상당히 고압적인 내용의 국서를 받고 '일본국왕' 가네요시 친왕측도 반박하는 국서를 보냈다고 하는데,[1] 그 국서 내용은 요약하자면 이러하다.
야, 너네만 왕 있고 너만 성깔 있는 줄 아냐? 그렇게 다른 나라 침략해서 배 채우고도 모자라냐? 쳐들어올 거면 말만 털지 말고 쳐들어와 봐라. 나도 대책 다 있으니까. 너하고 나하고 전쟁하면 뭐 무조건 니가 이길 것 같지? 우리같은 작은 나라 상대로 전쟁해서 이긴다고 뭐 니가 어디 가서 자랑이나 할 수 있을 것 같냐? 만에 하나라도 지면 그게 더 쪽팔릴걸?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말고 생각 잘 해라.

이 도발적인 내용의 국서에 홍무제는 노해서 일본을 치려고 했다가 예전에 패했던 것을 반면교사로 그만두었다고 한다. 이후 1387년에 앞서 일본에서 사자로 왔던 승려 여요(如瑤)가 승상 호유용(胡惟庸)의 모반을 지지하였으며 화약과 도검 등의 병장기를 숨겨두고 홍무제를 죽이려던 음모가 있었음이 발각되어, 명과 일본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사실 저런 수위 높은 국서를 보내 홍무제에게 받아쳤던 가네요시 친왕도 여유 있는 상황이 못 되었다. 가네요시 친왕이 '일본국왕'으로 책봉되고 얼마 되지 않아 가네요시 친왕 세력이 쇠퇴해 버렸다. 1372년에 명의 사신이 가네요시 친왕의 일본국왕 책봉을 위해 하카타에 왔다가 북조 측의 단다이 이마가와 료슌에게 잡혔다고 해서 이 시점에서는 이미 하카타 같은 곳이 북조에 넘어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또 《명사》에는 홍무 9년(1376년) 4월에 '일본국왕 양회'가 승려 규정용(圭廷用) 등을 보내 명에 공물을 바치며 왜구 피해에 대해 사과하였다고 적고 있는데, 일본의 사학자 사쿠마 시게오(佐久間重男)는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군세에 남조의 기쿠치 세력이 쫓기고 있던 여러 긴박한 정황상 가네요시 친왕이 명에 사절을 보낼 겨를은 없었고, 아마도 규슈의 다른 세력들이 명 왕조로부터 '일본국왕'으로 공인받고 있던 가네요시 친왕 즉 '일본국왕 양회'의 이름을 도용하여 명 왕조와의 접촉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명 왕조는 자신들이 처음 책봉했던 '일본국왕'만을 자신들의 외교적 교섭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명과의 교역을 시작하면서 새로 '일본국왕'으로 책봉될 때까지 사쓰마의 시마즈 우지히사 등 규슈의 무사들이나 심지어 북조의 쇼군 요시미츠도 명에 사신 보낼 때는 '일본국왕 양회'의 이름을 도용해야 했다. 명 왕조에게 가네요시 친왕 외에는 '자국의 신하 책봉을 받은 자로써 양회와는 일본의 국왕 자리를 두고 다투고 있는 자'로 간주되었고, 외교 관계 수립 상대로 인식되지 못했다.

국학의 성행으로 천황을 떠받드는 존황사상과 국수주의가 퍼져나가면서 메이지 시대 이후로는 일본국왕 칭호를 스스로 받은 것에 대해 사대주의라고 비난하게 되었다. 일본국왕 칭호를 받은 요시미츠도 "천황을 능멸했다", "외세에 굴종했다" 등의 악평을 받았고 무로마치 막부를 세운 조부 아시카가 다카우지, 아버지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자신 3대의 목상이 참수되어 길바닥에 효수되었다.

재밌게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칭송을 받았는데 에도 시대 유학자, 병법가들에 의해 강화회담을 파탄냈다고 알려졌고 '천황을 능멸했다는' 에도 막부의 대적이란 이미지 덕분이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도 임진왜란 중 강화 회담을 하면서 일본국왕에 임명되고 관복, 도장, 칙유문을 받았다.[2] 현재까지도 유물이 전해지고 있다.

파일:히데요시 관복.jpg

히데요시가 명나라에서 받은 일본국왕 곤룡포. 현재 교토박물관 소장중.

3. 기타

1986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일본 총리 스와질랜드 국왕 음스와티 3세의 즉위식에 참석해달라는 초청장을 받았는데 거기에 수신인이 '일본국왕 나카소네'로 쓰여있어서(...) 화제가 된 바 있다. 초청장을 보내는 측에서 착오가 있었던건지는 불명이다.
[1] # [2] 심지어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유 중 하나가 감합무역의 재개라는 설이 있으며 실제로도 도요토미가 전쟁을 끝내는 조건으로 내세운 것 중 하나가 감합무역의 재개인데 감합무역은 기본적으로 책봉국-조공국 관계의 사고가 깔려 있으며 당연히 중국이 책봉국이고 그 외 다른 나라들이 조공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