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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팽령

<colbgcolor=#c00d45><colcolor=#f0ad73> 조선 청백리
전팽령
全彭齡
출생 1480년 12월 20일[1]
(음력 성종 11년 11월 10일)
충청도 옥천군 지시래
(現 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 적하리)
사망 1560년 7월 25일[2]
(음력 명종 15년 6월 22일 / 향년 81세)
묘소 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 금암리 4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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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colcolor=#f0ad73> 본관 옥천 전씨
숙로(叔老)
송정(松亭)
학력 생원시 식년시 2등 9위 입격 ( 1504년 9월 18일)[3]
문과 별시 병과 23위 급제 ( 1524년 4월 16일)[4]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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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직]
봉상시 주부
형조 좌랑
공조 좌랑
형조 정랑
사도시 첨정
성균관 사성
내자시 정
사옹원 정
통례원 우통례

[외직]
평안평사
단천군수
삼척부사
밀양부사
상주목사
최종 관등 가선대부 부호군
부모 부친 - 전응경(全應卿, 1459~1481)
모친 - 김역(金酈)의 딸 안동 김씨(安東 金氏, 1460~1514)
형제자매 형 - 전팽조(全彭祖, 1476~1535), 전팽수(全彭壽, 1478~ ? )
부인 선부인 증정부인 안성 이씨(安城 李氏, 1485~1507) - 이국형(李國衡)의 딸
후부인 정부인 상주 김씨(尙州 金氏, 1493~1564) - 김축(金軸)의 딸
자녀 1남 1녀
[안성 이씨 소생 1남] 전엽(全燁, 1505~1583)[5]
[상주 김씨 소생 1녀] 정유건(鄭惟謇)의 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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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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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전기 때 활동한 문신이자 유학자이며 명종 때에 염근리에 녹선된 인물이다. 자는 숙로(叔老). 호는 송정(松亭)이다. 본관은 옥천 전씨이다.

현량과로 천거된 사림파 중 한 사람이다. 여러 지역을 맡아 선정을 베풀고 청백한 생활을 하여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학식이 있어 당대의 여러 명사들에게 추앙받았다.

사후 위패를 모신 삼계서원 동인 서인 간의 당쟁으로 인해 복구와 철폐를 반복했다. 옥천 지역 서인에 대항하는 인근 지역 동인의 거두(巨頭)였다.[7]

2. 생애

1480년 부친인 전응경(全應卿)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증조부 전오례(全五禮)는 대호군(大護軍)을 지냈고 조부 전효순(全孝順)은 현감(縣監)을 지냈으며[8][9] 부친인 전응경은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504년(연산군 10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현량과로 천거되었지만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10] 현량과 천거를 사양한 후 1524년(중종 19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11] 급제 후 형조 공조의 좌랑과 정랑을 거치고 사도시첨정(司導寺僉正),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12], 통례원우통례(通禮院右通禮)[13] 등을 역임하였다. 외임(外任)으로는 평안도 평사(平安道評事), 단천 군수(端川郡守)와[14] 삼척(三陟)과 밀양(密陽)의 부사(府使) 그리고 상주 목사(尙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는데 상주에 있을 때 조정에서 학행(學行)이 있고 청렴, 근신(謹愼)하다고 여기어 특별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진시켜 포상하였다.[15]

통정대부로 특진된 이듬해인 1551년 염근리 33인에 뽑히기도 했으며 그 이듬해에도 경상도 관찰사 이몽량이[16] 염근한 수령임을 이유로 천거했다. 이후에도 여러 번 천거를 받았지만 모두 사양하고 떠났다가[17] 1559년 나이가 80세가 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고 부호군(副護軍)에 임명되었다. 그 이듬해 6월에 병이 들어 별세하였고 8월에 고라산(高羅山)에 있는 선영(先塋)[18] 아래에 장사지냈다. 비문(碑文)과 묘지(墓誌)는 이암(頤菴) 송인(宋寅)이 작성하고 행장(行狀)은 사암(思庵) 박순이 작성했다.

저서로 『치신준승(治身準繩)』 2권, 『군서요어(羣書要語)』 4권과 『문집(文集)』 15권이 쌍봉서원(雙峰書院)에 보관돼 있었으나 아쉽게도 임진왜란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19][20]

3. 여담

  • 아들인 쌍암(雙岩) 전엽(全燁)이 부모를 정성을 다하여 모시고 평소에 효우(孝友)가 매우 깊어 지역에서 칭찬이 자자하자 조정에서 포상을 내리기도 했다. 광해군 때에 편찬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도 효자로 소개된다. 또한 18세기 무렵에 편찬된 지리지 여지도서에 옥천군 효자편 명단에 수록되어 있다. 관련 설화로 부모의 장례를 잇달아 치러 6년상을 치를 때 무덤 옆에 지은 움막에 흰 까치가 둥지를 틀고 6년간 함께 했다고 한다. 또다른 설화로 전엽의 효성에 탄복한 호랑이가 우물을 만들어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손자인 인봉(仁峰) 전승업(全承業)은 임진왜란 때 스승인 조헌[21]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의병활동을 했으며 조헌이 금산 전투에서 전사하자 스승과 700여 의병의 시신을 수습하여 칠백의총을 만들고 스승의 가족들을 봉양하였다. 그러나 스승과 함께 전투에서 전사하지 못하고 왜군을 이기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기다가 1596년 세상을 떠났다.
  • 상주 목사로 재임하던 때에 큰 흉년이 들었는데 자신의 녹봉을 깎아서 기부하여 음식을 제공한 적이 있었다. 소문을 듣고 원근에서 모여들었으며 이들의 목숨을 모두 살리는 데 이바지하였다고 한다. 상주에서 이러한 선정을 배푼 덕에 18세기 중반 무렵에 편찬된 여지도서 상주목 명환(名宦)란에 언급된다.[22] 고향인 옥천군편에는 인물란에서 소개된다.[23] 여지도서가 발행되기 전인 1656년에 유형원이 편찬한 지리지인 동국여지지의 옥천군 인물란에도 소개된다.
  • 다양한 기록에서 평생 청렴한 삶을 살았다는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상주 목사로 있을 때의 일화 외에도 단천 군수로 있을 때 아전들이 수백 량의 은을 뇌물로 주자 즉시 거두어라 하고 끝까지 받지 않았고 실록에도 청렴한 수령임을 이유로 직급이 올랐고 관찰사를 통해 천거되었으며 명종조 염근리 33인에 녹선되기도 했다. 또한 여러 문헌 기록에[24] 1552년에 임금이 선별한 청백리 10인으로[25] 녹선되어 궁궐에서 연회를 열었는데 병이 들어 불참하니 임금이 귀한 약재인 단목(丹木)과 호초(胡椒)[26]를 특별히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27][28] 또한 이암(頤菴) 송인(宋寅)이 지은 묘지(墓誌)에 '벼슬길에 나선 지 37년 동안에 네 번이나 주군(州郡)을 맡아서 다스렸는데도 집안에 한 섬 정도의 쌓아 둔 양식 저축이 없었으나 공은 오히려 느긋하고 편안하게 지내었다.'라고 나온다. 예조에서 지은 서원등록에도 '관직에 있을 때에는 청렴하고 결백하였습니다.'라고 평가했다.
  • 조선 말 강효석(姜斅錫)이 지은 인명사전인 전고대방(典故大方)의 청백리 명단과 또다른 인명사전인 청선고(淸選考)의 청백(淸白) 명단을 보면 명종 때의 청백리로 경주 김씨 김팽령이라는 사람이 기록되어 있는데 김팽령이라는 사람이 실존하고 과거에도 급제한 기록이 있으며 게다가 1551년에 선정한 염근리 33인에는 전팽령이 뽑혔는데 1년 뒤 1552년 청백리를 위해 열린 연회를 기록한 실록 기사에는 김팽령이라고 기록되어 혼란을 야기했다. 하지만 김팽령은 1512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1552년에 열린 연회에 애초에 초대될 수가 없고 실록 외에 이 연회를 기록한 당대의 여러 문헌에는 모두 전팽령으로 일관되게 기록되었다. 이처럼 명종조 청백리에 대한 실록의 기록과 여러 문헌을 교차검증하면 전고대방과 청선고에 기록된 명종 때의 청백리는 김팽령이 아닌 원래는 전팽령이라는 근거는 충분하다.[29] 조선시대 기록에[30] 전(全)과 김(金)이 한자가 유사해서 혼돈하여 잘못 기록된 적이 종종 있는데[31] 1552년 연회를 기록한 실록 기사에도 사관이 한자를 착각하여 김팽령으로 기록되었고 이로 인해 전고대방과 청선고에도 잘못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 덕계(德溪) 오건(吳健),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중봉(重峯) 조헌(趙憲) 등 당대의 명사들에게 추앙받을 정도로 명망이 있었다.
전팽령은 1545년 밀양부사에서 물러나 낙향한 뒤 휴식을 위해 양신정(養神亭)을 지었는데 소세양에게 양신정에 대한 기문(記文)인 양신정기(養神亭記)를 부탁하여 소세양은 글을 보내며 두 수도 함께 보냈다. 당시 소세양은 옥천에서 거리가 있는 익산에 낙향하여 살고 있는데도 글과 두 수의 까지 보내고 양신정기 내용 중에 쓰고 있던 다른 정기(亭記)는 미뤄두고 이 글을 먼저 적었다는 말을 보면 두 사람의 관계가 가까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신정 건립을 축하하는 시는 소세양 외에도 약포(藥圃) 이해수(李海壽), 호음(湖陰) 정사룡(鄭思龍), 동천(東川) 이충범(李忠範) 등의 축시가 남아있다.
오건은 전팽령에 대해 "지금 그가 조정에 있었다면 사람들은 몇 번이고 그의 도학을 배우러 갔을 것이다."(至今在朝人庶幾盡知事君之道)라고 했고 조헌은 그의 를 보고 감탄하며 말하길 "이 사람은 반드시 절개를 위해 죽음도 각오할 사람이다."(此必死節之人)라고 했다.[32] 이 외에도 송강 정철은 어전 회의에서 이름을 언급하며 "마음이 올바른 사람이자 덕이 있는 노인"(正人德老)이라고 말했고 고청(孤靑) 서기(徐起)는 "공의 학문은 진실로 평이하고 진리와 정도에 이르렀다."(眞到實地平易守正)고 평했다.[33]
  • 남인들의 계보인 남보(南譜)에 기록되어 있다. 남인계 가문으로 옥천 전씨가 기록되어 있고 인물로는 그의 형인 송오(松塢) 전팽수(全彭壽)와 충간공(忠簡公) 사서(沙西) 전식(全湜)의[34] 이름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35]
  • 사후 서원에 배향되었는데[36] 훗날 김장생, 송시열, 송준길 등 서인의 견제에도 지속적으로 서원에 배향되었다. 선조 때인 1571년에 세워진 옥천 최초의 서원 쌍봉서원(雙峯書院)에 김문기, 곽시(郭詩)와 함께 배향되었다. 이 서원이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어 광해군 때인 1621년에 다시 건립한 서원인 삼계서원(三溪書院)에는 김문기가 제외되고 전팽령, 곽시 그리고 조헌이 배향된다. 이후 삼계서원을 다시 건립한 서원인 삼양서원(三陽書院)에도 곽시, 한강 정구와 함께 배향되고 삼양서원이 사라진 후에도 대곡영당(代谷影堂), 목담서원(鶩潭書院)에서 배향되며[37] 많은 시간이 흘렀어도 지역 유림(儒林)들의 지지가 지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38]

[1] 율리우스력 12월 11일 [2] 율리우스력 7월 15일 [3] 음력 연산군 10년 8월 1일 [4] 음력 중종 19년 3월 3일 [5] 이름난 효자로 실록에도 기록이 등장한다. [6] 두 사람 사이에서 낳은 아들 중 정립(鄭雴)이 자신의 외조부인 전팽령을 배향하는 삼계서원 건립의 중심 인물이다. [7] 지역 동인의 존경을 받기는 했으나 동서분당이 일어나기 이전에 활동해서 당색이 명확하지는 않다. 서인계 강경파여서 동인에 비판적이었던 조헌에게도 칭송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서인에 가까웠을 가능성도 있다. [8]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으나 무과에 급제했다는 기록이 있다. [9] 참고로 조모이신 하양 허씨 부인이 세종 때의 명재상 허조의 손녀이다. [10] 현량과로 천거된 사람의 명단에 이름이 등장하고 숙종실록에 현량과에 선정되었다는 언급이 있다. 이 외에도 정유건의 행장, 고암유고, 옥천읍지, 동국여지지, 서원등록, 삼양록 등 여러 문헌에서 관련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당시 마을 사람들이 이 때 관직에 나가지 않은 덕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많은 사림이 희생되었는데도 그 화를 피하게 되니 그의 선견지명에 감탄했다고 한다, [11] 전팽령의 형인 송로(松老) 전팽조(全彭祖)와 송오(松塢) 전팽수(全彭壽)도 모두 소과인 생원시 혹은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전팽수는 1519년에 문과에도 급제하였다. [12] 성균관에 소속된 종3품직으로 성균관의 실질적 수장인 대사성 다음의 고위직이다. 성균관 유생의 교육과 왕실 종친의 교육을 담당했다. 현재의 서울대학교 교수로 비유할 수 있다. [13] 조회, 제사에 관한 의식을 맡은 관아인 통례원의 차관이다. 예법에 관한 업무를 맡은 관아의 차관이기 때문에 법과 예학(禮學)에 밝은 문신이 주로 임명되었다. 450일의 근무 기간을 마치면 당상관으로 승진될 수 있는 관직으로 우대되었다. [14] 옥천읍지에 따르면 단천군수로 왔을 때 고을 아전들이 수백 량의 은을 뇌물로 바치자 즉시 거둘 것을 명하고 끝내 받지 않았다고 한다. [15] 이외에도 경주부윤으로도 역임했던 기록이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16] 오성 이항복의 아버지이다. [17] 예조참판(禮曹參判)과 강원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안종화(安鍾和)가 지은 인물사전인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에 따르면 관직이 종2품 당상관인 동지중추부사까지 이르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서에 이 관직을 역임한 기록이 없는 이유는 여러 번 천거되어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은 안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18] 조상의 묘를 말한다. [19] 삼계서원과 삼양서원에 대한 기록이 담긴 삼양록을 보면 이시립이 작성한 찬문에 '선생께서는 문집 15권과 일록(日錄) 4권을 남기셨는데 임진란에 사라져 그의 시와 글이 상고되지 못하게 되었다.'라는 문구가 있다. [20] 외손자인 정립(鄭雴)이 외조부인 전팽령의 묘를 성묘하고 읊은 시에서 외조부의 덕으로 자신이 만년에 과거에 합격하였음에 감사를 표하는데 이 시구 이후에 '남긴 훈계가 있지 않지만'이라는 구절이 있다. 정립은 아버지인 정유건을 통해 학문을 배웠고 정유건은 스승이자 장인이었던 전팽령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그렇기 때문에 정립은 자신의 학문적 근원이 외조부인 전팽령에서 시작되었지만 아쉽게도 외조부가 남긴 '훈계'가 전해지지 않는 아쉬움을 과거에 합격한 후 시로 표현하였는데 이 시에서 언급한 남기지 못한 '훈계'가 바로 쌍봉서원에 보관되어 있던 서적들로 추측된다. [21] 조헌은 1544년 생이고 전승업은 1547년 생이라 두 사람의 나이차는 3살 밖에 안나는데 이런데도 스승으로 모신 이유는 과거에는 15살 이상의 많은 차이가 아니라면 나이 차이에 대해 깐깐하게 따지지 않아서 나이 차가 조금 있더라도 친구로 지내는 경우가 많았고 반면 나이 차가 적어도 상대의 학문을 존경한다면 친구이자 스승으로 모셨다. [22] 이름 옆에 나오는 인물 설명에도 굶주린 상주 백성들을 살린 일화가 똑같이 소개된다.(値歲大侵, 列數十竈於州街上, 捐俸作粥以食。 飢者遠近輳集, 全活甚多。) [23] 인물 설명에 청백리에 선정되어 궁궐 연회에 초대되었으나 집에 머물렀고 임금께 상을 하사받았다고 나온다.(朝廷嘗選廉謹十人, 賜宴闕庭。 彭齡時在家, 特賜賞物。) [24] 이 일화는 칠송(七松) 김경백(金敬伯)이 작성한 찬문(撰文), 종현손(從玄孫)인 창주(滄洲) 전극념(全克恬)이 작성한 신도비문(神道碑文)과 유사(遺事), 삼양서원 건립에 대한 글인 삼양록, 고암유고, 옥천읍지, 관성사마안, 여지도서 등에 기록되어 있다. [25] 기록에 따라 염근리와 청백리가 혼용되는데 남구만의 기록에 생전에는 염근리로 부르고 사후에는 청백리로 불렀다고 하니 두 단어는 사실상 동의어라고 봐도 무방하다. [26] 후추를 말한다. 과거에는 후추가 매우 귀했기 때문에 귀한 약재로도 쓰였다. 과거에 설탕, 계피, 후추, 얼음은 현재의 고급 캐비어 송로버섯과 같은 최고급 사치품으로 구하기 매우 힘들었기 때문에 왕실에서도 마음껏 쓰기 힘들었다. 그래서 임금이 신하에게 이 중 하나를 하사한다면 임금이 내리는 성은(聖恩) 중에서도 최고의 영광이었다. [27] 고암유고에 따르면 연회에 나가지 않은 이유가 사실은 병이 아닌 과분한 상이라 생각하여 부끄러워 나가지 않았다고 하며 받은 약재마저도 이웃에게 나눠 주었다고 한다. [28] 그런데 이 일을 기록한 실록 기사에만 유일하게 다른 여러 문헌과는 달리 전팽령이 아닌 김팽령이라고 적혀있다. 이에 대한 분석은 다음 문단 참고. [29] 청백리에 선정된 사람이 전팽령이라는 자세한 증거는 이 글에 첨부된 파일을 참고바람. [30] 그 이전의 기록에도 비석이 마모되거나 필체를 착각하여 다른 성씨로 잘못 알려진 경우가 있다. 일연 스님이 바로 이러한 경우였는데 최근 연구를 통해 오류를 수정하였다. [31] 국조방목 과거 합격자 명단을 자세히 보면 완산 전씨인 전하민(全夏民), 옥산 전씨인 전경창(全慶昌), 용궁 전씨인 전형(全灐)과 전근사(全近思), 옥천 전씨인 전극항(全克恒)과 전명룡(全命龍) 등이 모두 김씨로 잘못 기록되었고 전팽령 또한 여기서는 본관이 옥천으로 정확히 기록되었지만 이름은 여전히 김팽령으로 잘못 기록되었다. [32] 전팽령과 조헌은 훗날 같은 서원에 배향되는데 서원건립 중심인물들이 전팽령의 세력과 조헌의 세력으로 나뉘어 위패의 순서를 두고 대립한다. 전팽령의 손자는 조헌의 제자였고 조헌은 전팽령의 시를 보고 감탄하며 그의 절의(節義)를 추앙한 적이 있었는데도 그들을 추앙하는 세력은 둘로 분열되어 대립한 점이 아이러니하다. [33] 오건은 남명 조식, 퇴계 이황, 하서 김인후의 문인으로 동인 계열 인물이다. 조헌 송시열이 가장 존경한 인물이자 그의 스승으로 대표적인 서인 강경파 인물이다. 정철은 동인이 북인 남인으로 분열되는 계기를 제공한 인물로 역시나 대표적인 서인이다. 서기는 서경덕 이지함의 문인으로 대표적인 화담학파 인물이다. 이를 통해 당색을 불문하고 양당의 인물에게 모두 칭송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4] 첫째 형인 송로(松老) 전팽조(全彭祖)의 증손 [35] 남보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 달리 당색이 확실하지 않다. 당색이 확실하지 않은데도 남보(南譜)에 기록된 이유는 사후 자신이 배향된 서원이 당쟁이 심화되며 동인계 서원의 성격을 띄는데 이 것을 근거로 기록된 듯하다. [36] 서원에 배향되는 것은 양반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라는 의미이고 동시에 그의 가문이 지역의 유력한 가문이라는 의미이다. 특히 여러 위패 중 가장 윗 자리에 모셔진 인물은 지역에서 가장 큰 존경을 받는 인물이며 그의 가문이 지역에서 영향력이 가장 강한 가문이라는 의미였다. 이로 인해 위패의 순서를 가지고 치열한 경쟁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전팽령은 쌍봉서원을 제외하면 배향된 모든 서원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위패가 모셔졌다. [37] 연려실기술 따르면 대곡영당은 계사년에 훼철되었다고 하는데 대곡영당이 사라져서 건립된 목담서원이 1765년에 건립되므로 기록에서 말하는 '계사년'은 1713년이 가장 유력하다. [38] 삼양서원 철폐 이후 중앙 정계와 옥천 서인이 강세를 보이는 시기였는데 이를 무릅쓰고 동인 계열 유림의 존경을 받는 전팽령을 배향한 대곡영당과 목담서원이 건립된 것을 보면 주변 지역 동인들이 전팽령에 대한 존경심이 매우 컸다는 의미이고 동시에 그의 가문 옥천 전씨가 지역에서 가진 영향력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