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05-27 12:42:55

자롱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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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세조 자롱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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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남 초대 황제
嘉隆
자롱 | Gia L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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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153e 묘호}}} 세조(世祖)
{{{#94153e 시호}}} 개천홍도입기수통신문성무준덕융공지인대효황제
(開天弘道立紀垂統神文聖武俊德隆功至仁大孝皇帝)[1]
{{{#94153e 능호}}} 천수릉(天授陵)
{{{#94153e 연호}}} 자롱(Gia Long, 嘉隆/가륭)
{{{#94153e 성씨}}} 응우옌(Nguyễn, 阮/완)
{{{#94153e }}} 푹아인(Phúc Ánh, 福暎/복영)
{{{#94153e 생몰기간}}} 1762년 ~ 1820년
{{{#94153e 재위기간}}} 1802년 ~ 1820년

1. 개요2. 생애3. 평가
3.1. 현대 베트남에서의 취급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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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초대 황제.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고황제(高皇帝), 휘는 완복영(응우옌푹아인, Nguyễn Phúc Ánh, 阮福暎) 혹은 완영(응우옌아인, Nguyễn Ánh, 阮暎). 완복영이 재위기간 동안에 사용한 연호는 가륭(嘉隆, Gia Long, 지아 롱)이다.

베트남 남부를 통치하던 응우옌씨 정권의 마지막 우두머리인 응우옌푹즈엉(Nguyễn Phúc Dương, 阮福暘/완복양)의 친척으로, 망국의 왕자의 신분으로 외국의 군대를 끌어들여 여러 번 대규모로 떠이썬 왕조(西山朝, Tây Sơn)를 공격하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 공격하여 결국 떠이썬 왕조와의 대규모 전쟁에서 승리하여 떠이썬 왕조의 대월을 멸망시키고 응우옌씨 베트남을 창건했다.

2. 생애

1762년, 남부 응우옌씨 정권[2] 제 8대 왕[3] 세종 응우옌푹코앗의 손자이자, 왕자 응우옌푹루언(Nguyễn Phúc Luân, 阮福㫻)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응우옌푹루언은 권력다툼에서 밀려나서 감금당했고, 1765년,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이후 쯔엉푹로안[4]을 비롯한 간신들에게 나라가 휘둘리고 관리들의 횡포가 극에 달하여, 결국은 1771년에 농민 반란인 떠이썬 당의 난이 일어났다. 떠이썬 당은 응우옌씨 정권의 수도인 자딘(Gia Định, 嘉定)[5]를 함락하여 응우옌씨 정권을 멸망시켰고, 왕족들은 대부분 학살당했다. 겨우 살아남은 응우옌푹아인은 베트남을 탈출하여 시암(태국)으로 망명하였고, 그가 15살인 1777년부터 기구한 유년기를 보냈다. 이후 떠이썬 당의 급진적인 세력확대를 두려워한 시암 왕국은 응우옌푹아인에게 군대를 지원해준다.

응우옌푹아인은 1780년대부터 시암 짜끄리 왕조의 국왕 라마 1세로부터 지원받은 시암군을 이용해 끊임없이 떠이썬 왕조의 국경을 공격하여 베트남 남부 일대를 일시적으로 장악했지만, 곧이어 떠이썬 군에게 밀려 패배한다. 1782년, 사덱 전투에서 떠이썬 왕조의 북평왕 응우옌반후에[6]가 이끄는 대월군에게 또 대패하고 시암군 2만명을 잃는다.

그러나 포기를 모르던 응우옌푹아인은 기회를 엿보다가 미얀마, 마카오, 시암, 베트남 등지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프랑스 아드랑 지역 주교인 피에르 피뇨 드 베엔(Pierre Pigneau de Behaine)과 만나 친분을 쌓아갔다. 응우옌푹아인의 부탁을 받아들인 아드랑 주교는 푹아인의 친아들인 응우옌푹까인[7]과 함께 1787년 프랑스에 도착하여 루이 16세를 알현하고, 베르사유에서 대월과 프랑스의 공수 동맹 조약에 조인했다. 이 조약은 프랑스 국왕이 군대를 대월에 파견하여 도와주면, 대월은 다낭과 뿔로 꼰도르(지금의 꼰 다오)섬의 영유권 및 주권을 양도하고, 대월 전역에 대해서 프랑스가 상업권을 독점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원정군 편성을 위임받은 인도 주재 프랑스군 사령관이 원정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취소하면서 실현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근성인 응우옌푹아인에 못지않게 근성인이었던 아드랑 주교는 포기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무기와 탄약을 구입하며 대월 원정군을 조직하였다. 응우옌 푹 아인도 포르투갈 영국에 원조를 청하는 한편, 캄보디아 병력을 징병하여 기회를 노렸다. 이 정도 되면 다국적군이 따로 없다. 엮인 나라만 베트남, 프랑스, 영국, 포르투갈, 캄보디아의 5개국이다. 서방 세력에서 보낸 우수한 화력을 가진 용병들이라는 든든한 원군을 얻고, 모든 준비를 마친 응우옌푹아인의 용병들은 1789년에 드디어 대월 침공을 감행한다.

마침 사덱 전투의 승자인 떠이썬 왕조의 황제 응우옌반후에가 1792년에 병사하자, 전세는 응우옌푹아인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광중황제 완문혜와 중앙황제 완문악이 사망한 이후에 내분으로 인해서 떠이썬 왕조는 점차 세력이 약화됐으며, 때를 놓치지 않고 응우옌푹아인은 베트남 남부의 대도시이자, 과거 응우옌씨 정권의 수도였던 자딘을 수복하고, 그대로 북진하여 떠이선 왕조의 수도 푸쑤언(Phú Xuân, 富春)(지금의 후에)을 함락시켰다. 1802년에는 탕롱( 하노이)을 함락시키며, 베트남 전국을 통일하였다. 응우옌푹아인은 푸쑤언을 수도로 정하며, 베트남 최후의 왕조인 응우옌 왕조를 열었다. 4번이나 도전한 끝에 마침내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이후 후에에 살고 있던 떠이썬 왕조의 황족 및 인척들을 연좌제로 잡아들여서 피의 숙청을 벌이면서 과거 자신의 일족들을 죽였던 떠이썬 왕조에 대한 복수를 완료했다.

베트남 통일 후에는 일단 베트남의 북쪽 지방에 북성총진, 베트남의 남쪽 지방에는 자딘성총진을 설치하여 지방의 대폭적인 자치권을 인정하였고, 이때문에 중앙정부의 힘은 약화되었다. 1804년에는 청나라로부터 월남국왕(越南國王)에 책봉되었다.[8] 그리고 국호를 월남(베트남)으로 정하고, 연호를 가륭이라 하였다. 1806년엔 칭황식을 올려 외왕내제를 채택하였다.

1815년, 중국식 유교제도를 모방한 가륭율례(嘉隆律例)를 발표하여 고전적인 유교 교육 및 공무원 제도를 복원하기도 했으며 캄보디아 라오스에 제국주의적인 내정간섭을 하였다. 때문에 건국 초기에는 지원세력이었던 시암과 사이는 좋았지만, 나중에는 라오스, 캄보디아를 둘러싸고 관계가 점점 험악해진다. 또한 프랑스인들을 건국공신으로 우대하긴 했지만 프랑스와의 통상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거부하는 입장을 취하여 나중에 프랑스와의 사이도 안 좋아진다. 다만 이 때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영향으로 프랑스가 베트남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떠이선 왕조는 세금이 적었던데 반해서 새로히 들어서 응우엔 왕조는 군대유지를 위해 떠이선 왕조 시절에 비해 세금을 몹시 무겁게 매겼기 때문에 농민들의 반발이 상당해서 재위기간 동안 총 90여건의 반란이 일어났다. 다만 떠이선 왕조급의 화력을 지닌 반란이 없었고, 레 반 주엣(여문열) [9] 등 여러 명신들의 활약으로 민심의 반발을 수습할수 있었다는 것이 자롱에게는 불행중 다행이었다.

1820년, 응우옌푹아인이 58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명명제가 황제로 즉위하여, 뒤를 이었다.

3. 평가

인생 역경 자체는 대단하고, 기적적으로 나라를 재건했기 때문에 취약점은 그렇다 쳐도 걸물은 걸물이었다는 평을 내리는 사람들은 거의 다가 서양측 학자들일 뿐이며, '인물이 걸물이었다'라는 평가는 한 나라의 창업군주로서는 큰 의미가 없는 평가다. 애초에 걸물이 아니면 창업군주를 해먹기도 어렵다.[10] 창작물의 흔한 클리셰와 달리, 아무리 악인이라도 난세에 스스로의 힘으로 한 무리의 우두머리가 된 인물이 소인배 찌질이인 경우는 많지 않다. 즉 응우옌푹아인의 리더로써의 자질은 칭찬거리가 아니라 창업군주라면 기본으로 갖추고 있어야 할 자질에 불과한데 이걸 가지고 고평가를 내리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응우옌푹아인의 사정은 어떻게 보면 명나라가 막 망했을 당시의 오삼계와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오삼계는 이자성 때문에 모시던 군주가 죽고 나라가 망했고, 응우옌푹아인은 응우옌 3형제에게 가족이 몰살당하고 거지꼴로 쫓겨났다. 즉 이들은 '가족(혹은 전 주군)의 원수를 적대하기 위해 자기 민족을 배신한다'와 '민족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 원수에 대한 복수심을 접어둔다'에서 전자를 고른 인물들인 것이다. 민족 개념이 강해진 현대에 와서 좋은 소리 들을 행보는 절대로 아니지만, 이들 입장에선 결코 납득이 안 가는 선택은 아니었다.[11]하지만 하필 그 손을 잡은 외세가 나중에 베트남을 식민통치하게 되는 프랑스고, 그 때문에 그 자신과의 사정과는 별개로 현대 베트남인들의 평가가 안 좋기도 하다.[12]

사실 응우옌푹아인이 진짜로 군주로써 저평가받아야 할 이유는 외세와 손을 잡은 것이라기보다도, 자신이 권좌에 오른 뒤에 펼친 통치 때문일 것이다. 숙적인 응우옌반후에가 (중앙 권력과는 거리가 멀었더라도) 사실상 기득권을 가지고 태어나서 유복한 삶을 살았음에도 농민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선정을 폈던 데 비해, 응우옌푹아인은 어린 나이에 고향에서 쫓겨나서 시련을 겪으며 응우옌반후에보다 훨씬 곤궁한 삶을 겪어봤을 개연성이 높음에도, 오히려 황제가 된 다음에는 옛 기득권층의 이익을 보장하고 군대유지를 위해 세금을 무겁게 매기며 옛 법전을 그대로 계승하는 등 베트남 옛 왕조들의 악습을 그대로 반복했다.[13] 현대적인 기준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기득권만 위하고 농민들을 탄압해서 농민반란을 양산해내는 왕은 전근대 기준으로 봐도 폭군이다. 자기 조상들처럼 고생 한번 안 해본 것도 아니고 가난한 삶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 만큼 알 인간이 이런 짓을 했으니 그 평가가 더더욱 나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외세와 손을 잡았더라도, 과거 자신의 숙적이었던 응우옌 3형제의 통치 방식을 참고라도 했다면 평가가 조금은 더 나아졌을지도 모른다.

3.1. 현대 베트남에서의 취급

그래서 응우옌 왕조 1954년에 폐지된 된 후 현대 베트남에서는 응우옌반후에가 위인으로 추앙받는 데 반해서[14], 가륭제는 인생역경 자체는 대단하지만 황제로 복위한 다음에는 자기 어려운 시절은 싹 잊어버리고 자기 조상들과 똑같이 행동했다는 평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 또한 외세의 도움을 받았고, 프랑스가 베트남을 사실상 식민지화하는데 명분상으로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매국노로, 심지어 만악의 근원으로까지 평가하는 사람도 다수 있다. 또한 이러한 박한 평가는 베트남이 식민지화되고 북쪽에서 사회주의 확립, 남쪽에서 응우엔 왕조가 폐지되면서 강해졌지만 이미 가륭제 당대에도 세금문제로 썩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만약 다음대인 아들 명망제때도 세금개혁이나 군비축소와 같은 일들이 없었으면 응우옌왕조는 100년도 못갔을지.. 아니 진작에 나라가 혼란에빠져 미얀마처럼 왕실유지도 못하고 열강의 노리개가 됐을것이다.[15]

베트남 학계에서는 이 사람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해외로 망명한 베트남계 학자들[16]만이 연구할 따름이다. 게다가 이런 학문적 해석을 두고도 서양 학계는 아무래도 베트남 내부 학계의 민족주의적 관점과 자국 중심적 관점에 반론하는 입장이다 보니 가륭제를 혁신적이고 진취적인 인물로 재조명하는 과정에서 전임 중흥 레 왕조의 취약함과 서산 왕조에 대한 환상을 시정하는데 치중하다 보니 베트남 내부에선 더욱 더 반발이 클 수밖에 없다.[17][18]

애초에 떠이선 왕조를 북베트남, 광남 응우옌 왕조를 남베트남으로 치환하려는 시각 자체가 현대사의 정치 논리를 전근대사에 무리하게 대입하려는 시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시각의 주체가 서방이든 현대 베트남 정권이든 말이다. 떠이선 응우옌 3형제는 하층민 농민이 아니라 지방의 세습직 관리 가문에서 태어나서 못해도 최소 하급귀족으로는 쳐 줄 수 있는 신분이었다.[19] 떠이선 왕조의 두 수도였던 푸쑤언과 꾸이년 모두 분단 당시에는 남베트남의 영토였으며, 현재의 하노이인 탕롱은 왕조가 망하기 직전의 임시수도였을 뿐 대부분의 기간 동안은 응우옌 왕조와의 대립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곳조차도 아니었다. 이렇게 현대의 베트남 전쟁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던 떠이선 왕조 통치기를 동일시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인 의도가 짙은 시각일 뿐이다.

더욱이 자롱은 드라마틱한 인생역정과는 별개로 옛 제도의 부활과 지주들의 이권 회복, 농민 박해에만 힘쓴 전형적인 전제군주에 불과했고 딱히 혁신적이거나 진취적인 정책을 내놓은 적은 없기에, 현대 베트남인 입장에서 보면 도무지 좋게 보려고 해도 볼 구석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것도 그를 재조명하는 것에 아무도 관심이 없는 이유이다. 물론 현대 통일 베트남이 공산국가인 북베트남의 주도로 베트남 통일이 이루어지면서 형성된 나라이고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뒤에도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사회주의 국가라서 옛 제도의 부활, 지주들의 이권 지지, 농민 박해에 대해 더더욱 박하게 평가하는 것도 있지만, 설령 북베트남이 아닌 남베트남이 베트남 통일을 이룩했다고 해도 자롱에 대한 평가는 박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자롱의 이러한 실책들은 천민자본주의 국가를 제외한 자본주의 국가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비판이 가능한 것들이었을 뿐더러, 남베트남이라는 국가 자체가 말만 응우옌 왕조의 후신이지 사실은 1955년도에 응우옌 왕조를 뒤엎고 공화정을 만든 나라고, 떠이선 왕조의 군주인 응우옌반후에를 화폐 도안인물(200동)로 넣을 만큼 떠이선의 난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자는 기조가 대세였기 때문이다.[20]

후에에는 응우옌 왕조의 여러 황제들의 무덤이 있는데[21], 거기서 멀리 떨어져 관광코스에서 소외된 가륭릉은 관리를 포기하여 낙서와 오물로 가득차 있다. 후에시 어디에서도 그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나 기념물이 없고, 현지 베트남인들은 그의 존재와 그가 묻힌 무덤이 있는 것도 잘 모르는 듯하며, 서양인들만 가끔 모험삼아서 이곳을 찾는데 이것이 베트남인들이 이 인물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방증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베트남인들에겐 잊힌 군주인데, 서양인들만 기억하는 군주라고 이해하면 된다. 현대 중국에서 조조 사마의를 재평가하는 것과는 달리 가륭제는 상술한 역사적 관점의 무게 때문에 베트남 국내에서는 흑역사가 문제가 아니고 아예 사실상 금기로 간주하거나, 무관심으로 치부되고 평가해주는 측도 잘해봐야 프랑스의 루이 18세, 못하면 샤를 10세 정도에 가까운 인물로 취급되고 있다. 다만 이상하게도 베트남과 별 관계가 없는 일본에서는 그나마 인기가 있는데, 디엔비엔푸만화나 여러 시대소설 등에 베트남의 황제로 등장한다. 하지만 그가 뛰어나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일본인들이 베트남사에 대해 관심이 없어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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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황제
경성제 완광찬 세조 가륭제 완복영 성조 명명제 완복교
대월의 역대 황제
78대 경성제 완광찬 (임시) 완왕 완복영 국호 변경/칭제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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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우옌 왕조의 역대 황제
칭제건원 1대 세조 가륭제 완복영 2대 성조 명명제 완복교

[1] 통칭 고황제 [2] 당시 중국에서는 남부의 응우옌씨 정권을 안남국(安南國), 북부의 찐씨 정권을 교지국(交阯國)이라 불렀지만, 사실 황실로는 레씨들이 따로 있었다. 천황이 허수아비였던 일본과 비슷한 형국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3] 당시 베트남은 조선과는 다르게 외왕내제 체제였다. 때문에 응우옌 왕조의 수장들은 모두 자신들이 레 왕조 황제의 제후임을 자처하였기 때문에 위에 황제가 있음에도 왕의 호칭을 사용하는것이 가능했다. [4] Trương Phúc loan, 張福巒/장복만. [5] 지금의 호치민 시. [6] 이때는 응우옌반후에가 칭제 전이라 중앙황제 응우옌반냑의 제후인 북평왕 신분이였다. [7] 7살의 어린나이에 아드랑주교의 안내를 받아 프랑스로 건너가서 아버지의 왕조복원사업에 크게 일조한 공적이 있으므로 바로 황태자 자리에 책봉되었으나 안타깝게도 21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여 동생인 응우옌푹끼에우가 황제자리를 계승받게 된다. [8] 원래 응우옌 왕조는 월남이 아닌 남월(南越) 국왕에 책봉해주길 간청했으나, 청나라는 과거 중국 광둥성 일대까지 영역을 넓혔던 베트남 고대국가 남월을 떠올리며 베트남인의 민족의식이 고취되어 청나라에게 반기를 들 것을 염려해 그냥 남월이라는 단어를 뒤집어서 만든 국호인 월남의 국왕으로 책봉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9] 이 사람은 응우옌 왕조를 세우는데 공헌한 환관이었지만 인품이 휼륭한데다가, 행정능력도 뛰어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남베트남 100동 지폐 도안으로 들어갈 정도로 남베트남인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베트남 통일 이후로는 프랑스의 세력 확대에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그렇게 존경할만한 위인은 아니라는 평가를 받으며 레반 주엣의 이름을 딴 다수의 거리명이 개칭되는 등 평가절하되는 양상이 2000년대까지도 있었지만 그래도 뛰어난 면이 많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지라 걸물은 걸물이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10] 물론 예외가 존재하기는 한다(...). [11] 생각해보라, 당시 18~19세기 베트남은 유교이념이 뿌리깊게 자리잡은 나라였다. 본래 자신이 섬기던 나라인 응우옌씨정권이 망해버렸고 가족까지 죽임당했으니 복수를 통해 어쩔수 없이 같은 민족을 공격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충효를 지키는 행위였던 것이다. [12] 알렉산더 우드사이드, 리엄 켈리 등 서구권 학자들에 의하면 이런 현대의 박한 평가는 완복영 입장에선 상당히 억울한 평가이다. 어쨌든 정권 장악을 위한 물리적 투쟁이 끝난 이후 가륭제로서 완복영은 립서비스를 하는 조언가 초청이나 가톨릭 선교의 부분적 허용 같이 전례와 크게 벗어나는 범주에서 딱히 프랑스에게 더 큰 이익이나 특혜를 준 바는 없으며, 완조 월남이 프랑스의 본격적인 침공 대상으로 전락한 건 완복영의 탕롱 정복 이후 50년 뒤의 일이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는 베트남보다 더 중요한 일이 많아 그쪽까지 신경쓸 틈이 없었고, 실제로 베트남으로 본격적으로 손을 뻗칠 때 가륭제 완복영이 프랑스에 넘겨주었던 이권이 결정적인 단초가 되었으므로,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다. [13] 사실, 권력자의 성장 환경이 그가 누구를 위한 정책을 펼치느냐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건 아니다. 금수저 물고 태어나서 친서민적인 정책으로 위대한 지도자가 된 사람도 있으며 가난하게 성장해서 자수성가했음에도 권력을 잡은 뒤엔 기득권과 유착하는 인간도 있다. 다만 후자의 케이스가 욕 먹을 거리가 매우 많은 건 사실. [14] 인기요소가 엄청나게 많을 수밖에 없다. ' 농민 출신으로 사회의 밑바닥을 경험하며 구체제에 회의를 느낌' + ' 농민들을 위해 사회 개혁정책을 폄' + ' 청나라의 대군을 격파하고 옛 남월의 땅이었던 곳까지 영토를 확장할 계획까지 세움' + ' 그러나 뜻을 완전히 이루지 못하고 39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사망'. [15] 결론적으로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긴하지만 왕실은 유지되고 베트남 중부지역 일부는 왕실직할령으로 남아 그나마 프랑스의 치하에서 자유로운 지역이 되었다. [16] 주로 남베트남계라 응우옌 왕조와 관련 있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다. [17] 안 그래도 전근대 역사의 해석의 초점을 어디에 두고 있냐에 따라 베트남 자국 출신 학자들과 서구권 학자들의 온도, 시각 차이의 충돌은 큰 편이다. 베트남 학자들 본인들은 일단 한자 문화권의 유교 국가로서 정체성을 확실하게 재확인하고 조선, 사와 같은 사관을 중심으로 역사 연구를 시작하나, 서양 학자들은 베트남의 동남아적 정체성을 더 강조하며 16-17세기 남북조 시대에 당시 조정이 지방을 통치하는 능력이 상실되었던 것과 이에 대비된 남중국해 상업 네트워크나 참파, 크메르와의 관계같은 다극화된 역사적 변경으로서 초점을 둔다. 이러한 관점과 초점의 차이를 두고 서양 학계는 베트남 학계를 전쟁과 혁명 시기의 민족주의적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집착으로 치부하고, 베트남 학계는 서구 학자들의 접근법을 반대로 정치적 목적이 함유된, 베트남 민족성을 희석시키려는 유사학문적 의도로 의심하는 경향이 있다. [18] 참고로 20세기에 발흥한 신흥종교 까오다이교가 범세계적 포용론 교리를 갖춘 점은 이러한 베트남의 동아시아 vs 동남아시아의 완충지로서의 경향과도 무관하지 않다. [19] 3형제가 빈민층이었다는 믿음이 북베트남 정권의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원래 공산주의 정권들은 사상 때문에 하층민 출신들을 영웅시하는 경향이 있다. 베트남인들에게 영웅으로 추앙받는 3형제가 최소 중산층 이상이었다는 사실은 분단 당시의 북베트남 정권에게도 그닥 달갑지 않은 사실이었을 개연성이 있다. [20] 마치 기존 독일 우익의 정치적 영향력은 적극적으로 써먹었지만 막상 이들의 사상적 핵심이었던 호엔촐레른 왕조와 군주정에 대해선 의외로 민주적(?!) 관점에서 지극히 나쁘게 봤던 히틀러와 비슷하게 남베트남의 창업국부이자 실질적으로 마지막으로 강력한 권력을 발휘했던 응오딘지엠또한 완조 황실이 명목상 군주였던 전임 프랑스령 베트남국의 인프라는 적극 활용했지만 막상 완조 황실은 오히려 나쁘게 보면 봤지 애착도 없었다. 그리고 지엠 또한 베트민 공산주의자들과 방법은 달라도 나름 민족주의적 대중주의 정치인이었던만큼 서산당에 대한 대중의 역사적 낭만 같은 요소는 오히려 적극 활용, 권장했다. [21] 특히 현대 건축 공법을 사용한 계정제의 황릉이 화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