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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어: Indomania인도 문화권에 대한 애호를 의미한다. 과거 중국에서 불교가 흥했을 당시 인도를 불교의 근본이자 천국과 가까운 장소라는 뜻의 "천축국"이라는 명칭으로 불린 것이나 아랍권이나 고대 헬레니즘 세계에서 부와 풍요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등 문화권마다 다르게 나타났다.
서구 기준으로는 주로 영국과 독일에서 특히 두드러졌는데 근대 독일 철학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친 것은 물론 현대 68운동 참여자들 및 히피들 사이에서도 유행했다.
설명하기에 앞서 첨언하자면 인도마니아들이 소비하는 인도 문화는 케랄라, 첸나이[1]가 위치한 남인도 지역의 문화를 주로 일컫는다. 인도의 수도인 델리가 위치한 북인도 지역은 수백년간 이슬람 왕조들이 통치한 덕에 아예 다른 나라라고 봐도 될 정도로 아랍, 페르시아 문화가 강하게 깃들어 있어서 북인도 문화를 향유하는 쪽은 오히려 인도마니아보다는 튀르크리, 페르소필리아 현상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2][3] 한국의 남아시아 문화 애호가들은 주로 후자에 해당하는데 한국에 거주하는 남아시아인들은 남아시아 북부 문화권인 네팔·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출신이 많기 때문이다. 다만 한국의 남아시아 문화 애호가들 중에서도 인도의 타밀어 영화 춤추는 무뚜를 추억하는 세대들은 전자에 해당하기도 한다.
2. 역사
2.1. 고대
고대 인도는 인더스 강과 갠지스 강의 생산력 및 높은 일조량에 힘입어 고대부터 많은 부가 생산되는 지역이었으며 인도의 풍요와 부는 아케메네스 왕조와 알렉산드로스 3세에 의해 중동과 서구에 알려지면서 인도를 풍요롭고 환상적인 문명으로 생각하는 풍조가 생겼다. 인도에서 생산되는 설탕은 고대 페르시아 시절부터, 후추는 고대 로마 제국 시대부터 사치품으로 유명해진다.마우리아 왕조라는 통일 왕조가 생겨나고 아소카 대제가 인도 밖으로 불교 선교사를 보내면서 인도에 대한 중동인, 로마인의 관심이 증폭되었다. 이후 파르티아에 불교가 전파되고 로마 제국에서 서기 1세기 이후 인도 해안 지방과 상당한 규모의 무역을 하면서 인도에 대한 환상이 증폭되었다. 파르티아가 멸망하던 서기 3세기 시점 메소포타미아에서 태어난 마니는 기독교, 유대교, 조로아스터교를 공부한 이 인도로 가서 불교와 자이나교를 공부하고 왔는데 그가 창시한 마니교는 이로서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외에도 인도 철학과 종교를 상당부분 흡수했다.
2.2. 중세
중국에서는 오호십육국시대부터 당나라 시절까지 불교가 크게 유행하면서 인도를 이른바 “천축국”이라고 불렀다. 현장, 혜초 같은 당나라, 신라 출신 승려들은 직접 인도를 기행하기에 이른다.아바스 왕조 시절 아랍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은 인도 문화에 큰 관심이 있었고 인도 수학과 과학이 페르시아어로, 페르시아어에서 다시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아바스 왕조 중기에 이슬람 세계를 페르시아인이 주도하면서 아랍 이슬람 문화와 다른 페르시아의 이슬람 문화를 창조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페르시아인들은 인도의 발달된 문화를 이슬람 문화로 편입시키고 이는 후기에 튀르크족에게까지도 영향을 미쳐 오스만 제국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유럽인들에게는 이것이 튀르크리로 알려지게 되었다.
2.3. 근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인도를 찾아 항해하는 와중에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다. 콜럼버스가 자신이 발견한 지역을 금은보화와 후추가 가득한 인도라고 선전하면서 대항해시대 초창기 스페인에서는 이 지역을 인도로 착각했다가 나중에는 자신들이 초기 장악한 지역을 서인도 제도라고 부르게 된다.포르투갈이 인도양 방향으로 대항해시대를 시작하면서 고아같은 남인도 지방의 도시들을 발견하고 식민화하면서 유럽, 중동과 전혀 다른 독특하고 신비로운 문화가 있다는 것을 본격적으로 파악하게 되었다. 이후 프랑스, 영국이 남인도와 벵골 지방에 도착했고 플라시 전투에서 승리한 영국이 인도 아대륙의 문화를 탐구하고 향유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영국은 인도를 탐구할 때 이슬람화돠지 않은 남인도와 벵골 지방을 중심으로 연구했고 이슬람화된 북인도는 페르시아와 다를 바가 없다고 여겼다.[4] 그 때문에 현대 비(非)인도인들에게는 이슬람화 이전 고대 인도와 남인도, 동인도만이 인도 문화 자체인 것으로 잘못 알려지게 되었고 인도가 불교, 힌두교의 나라라는 피상적인 이미지로만 알려지게 되었으며 남인도, 동인도 왕조에 대한 연구를 소흘히 했고 마우리아 왕조, 굽타 왕조, 무굴 제국같은 북인도 중심 통일 왕조 위주로만 서술하여 그들이 인도 자체로 알려지게 되었다.
2.4. 근대
영국 학자들이 산스크리트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산스크리트어와 고전 그리스어, 고전 라틴어와 상당 부분 유사점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비교언어학의 발전으로 이어짐과 동시에 인도유럽어족이라는 개념이 생긴다. 영국인들이 연구하고 유럽에 보급한 인도의 문화와 철학, 언어는 독일에도 전파되어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와 프리드리히 니체의 철학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2.5. 20세기
당시 서양인들에게는 인도가 불결하고 미개하고 끔찍하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인도에 우호적인 동화작가들이 있었다. 서양의 오컬티스트, 반기독교주의자들은 인도의 이런 특징이 서양에 만연된 물질주의, 정신적 고난, 종교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일부는 나치즘과 연관되어 인도 문화를 아리아인의 원천이라고 해석했고 일부는 힌두교와 인종주의를 결합하여 특이한 힌두교를 창시하곤 했다.20세기 중엽에 인도에 대한 서양인의 태도는 20세기 초까지와 달리 대중적으로 호의적으로 변했는데 그 계기는 제2차 세계 대전, 냉전으로 인한 모더니즘의 환멸이었다. 모더니즘에 반발한 일부 신좌파, 히피는 서양의 주류 종교인 기독교가 오히려 물질주의, 흑백논리, 전쟁, 편협성, 차별을 유발해 세계를 비인간적으로 만들었고 인도의 주류 종교인 힌두교, 불교가 이를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곤 했는데 그들은 이러한 믿음을 뉴에이지로 발전시켰고 일부는 신좌파의 모토인 성해방과 연관지어 인도의 카마수트라와 불교의 탄트라를 참고해 네오탄트라(Neo-tantra)를 창시했다. 오쇼 라즈니쉬가 인도 본토보다는 서양에서 더 유명했던 원인이 당시 서양인의 인도마니아 덕택이었다.
20세기 중엽을 석권했던 비틀즈는 인도 문화에 심취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인도로 여행을 가고 인도 철학을 공부하거나 자신들의 곡에 인도 전통 악기를 접목하기도 했으며 다른 서양의 음악가들도 인도 악기인 시타르에 관심을 가졌다.[5] 한국에서도 1990년대 말까지 인도에 대한 애호가 있었으며 대표적인 작가가 류시화, 한비야이다.
2.6. 21세기
인터넷, 대중매체의 발달로 인도의 실상이 객관적으로 전파되면서 20세기 후반 뉴에이저들이 상상한 인도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대중들이 알게 되었고 20세기에 비해 인도에 대한 호감은 감소했다.대신 발리우드가 2010년대 초부터 세계화가 되면서 힌두교, 탄트라 같은 종교, 철학보다는 인도의 의상, 인도 배우의 외모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인도 여배우들은 자국의 여배우와 달리 여신 호칭까지 생겼다.
정치적으로 이슬람공포증이 심해지면서 대안 우파가 인도를 옹호하고 있는데 이는 이슬람화에 대처하는 서양의 중요한 우방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도 인민당을 지지하고 인도의 이슬람이 인도 문명을 위협하고 있다고 억측하고 있다.
2010년대 중반부터 시진핑의 엉망진창 외교정책으로 중국 위협론의 가능성이 커지면서 인도에 대해 호감을 가지는 인물들도 늘었다.[6][7] 특히 미국을 위시한 서방측에서 공산체제인 중국에 맞서 민주주의 국가인 인도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치켜세우며 민주주의 국가(인도)가 언젠간 공산주의 국가(중국)을 이길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3. 비판
인도마니아들은 대개 인도를 획일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고 이는 뉴에이지 쇠퇴한 현재에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인도를 힌두교, 불교, 다신교, 신비주의, 오컬트의 나라로만 보며 서북인도, 동남인도를 구분하지 못하고 인도를 열대문명이라고 상상하고 있다. 사바나 기후, 사막 기후에 가까운 서북인도를 열대 지방으로 묘사하고 서북인도에 있는 페르시아 문화를 전통 인도 문화로 혼동하고 있다.카마수트라, 탄트라를 보고 인도가 고대부터 성해방적인 문명이라고 착각하고 이슬람 때문에 인도 여성 인권이 추락하고 촐리 같은 노출 의상을 못 입게 되었다고 오해하고 있다.[8] 실제로 이슬람공포증 성향의 인도마니아들은 인도에서 일어나는 성범죄, 가정폭력, 종교분쟁 뉴스를 보고 야만적인 이슬람 때문에 신비롭고 아름다운 인도 문명이 엉망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9]
인도마니아들은 인도인에 대한 적대적 인종주의는 없지만 인도인을 일관적으로 피부색이 짙고 콧대가 낮고 코가 넓은 오스트레일리아 인종으로 생각한다. 인도인의 상당수는 백인에 속하는 아리아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보지 못하는 것은 17세기부터 서양인들이 자신들과 인도인의 차이를 부각하기 위해 그런 인도인들만 체리피킹해 왔고, 아리아인 계통 인도인은 인도인이 아니라 페르시아인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정작 실제로 인도 아대륙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인종 민족들의 대표 주자로 인식되는 베다족들은 21세기에 한동안 그들의 본거지였던 실론 섬에서도 인구 비율 0.2% 이하의 소수민족으로 떨어졌다.
가령 18세기 로버트 클라이브[10]의 가족들과 그의 인도인 시종을 묘사한 그림을 보면 인도인 시종이 피부색이 짙게 그려져 있다. 다만 당시 인도인 시종이 하류 카스트 출신인 것을 감안하면 현실을 잘 반영하지 않은 그림은 아니지만 당시 서양인의 시각이 반영된 것은 사실이다.
4. 원인
인도 문명은 시간에 대한 개념이 중국, 고대 그리스 및 이슬람권과 달랐다. 현세보다는 내세를 중시하는 데다 윤회를 믿던 고대 인도인들에게 있어서 시간은 무한정 반복되는 대상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11] 지식인들은 인도 지배자들의 연대기를 제작하는 데는 무관심하고 이 때문에 연대기라는 개념이 없어 종교인 관련 내용 이외에는 체계적인 역사서를 별로 남기지 않았다.[12] 이처럼 사고 방식이 이웃 문화권과 판이하게 다르고 철학, 종교의 발전 양상도 독특하게 발전하다보니 신비감이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 종이 이전에 널리 쓰던 패엽은 보존성이 낮아 후세에 제대로 전파되지 못했다.인도 아대륙의 경제는 다수의 인구가 카스트 제도를 기반으로 철저히 분화된 시스템을 기반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인도 아대륙을 침공한 정복 세력들도 카스트 제도와 인도 문화에 동화되는 경우가 많았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이슬람 정복자들이 인도인들의 이런 경제 기반 자체를 파괴하지 않는 이상 인도인들을 모두 이슬람화하기는 어려웠다. 실제로 인도에서 무슬림으로 개종한 사람들은 원래 카스트와 별 연관이 없던 불교 신자들이 많았고 힌두교인 중에서는 개종자 수가 드문 편이었다. 그 많은 힌두교도들을 한 번에 다 이슬람으로 개종시킨다는 것은 마치 몽골 제국에서 중국을 침공할 때 한족들의 논밭을 싹 뒤엎는 계획 수준으로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발상에 가까웠다. 다른 한편으로 철저하게 분업화된 + 거대한 인구의 바탕을 둔 규모의 경제에 힘입은 인도의 경제력은 어마어마한 수준이었고 이는 인도를 침공하거나 무역했던 중앙아시아, 중동, 서구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한편 힌두교와 불교는 고대 로마에 대한 고평가 및 중세 기독교 사회에 비판적이었던 근대, 현대 계몽주의 성향 서양인 입장에서는 신비의 대상이었고 인도에서 발달된 우파니샤드 철학들은 일신교와 다신교 교리가 접목된 형태라 기독교 신학 위주로만 전승되온 서양 철학과 달리 다채롭고 세련되어 보였다.[13]
인도의 전통 의식주는 서양과 가까이 있었던 중동에 비해 매우 다채롭고 특히 촐리 같은 노출 의상도 있었기 때문에 당시 성적 보수주의가 심했던 서양인에게는 매혹의 대상이 되었다. 인도의 향신료는 요리가 발달하지 못했던 서양에 매혹적이었고 당시 무굴 제국이 건설한 건축물들은 인도의 신비를 더 하는데 일조했다.[14]
현대에도 인도는 걸출하고 매력 있는 문화인 인도 영화와 노래, 게임들을 훌륭하게 만들어 빠들을 양산하고 있으며 인도의 신비롭고 다채로운 자연환경도 인도에 호감을 가지게 만드는 주요 원인 중 하나다.
5. 관련 인물
[1]
이 두 지역은
힌디어가 어느 정도 보급된 타 지역들과 달리 여전히 통하지 않으며 반힌디 감정도 강한 대표적인
타밀어권이다.
[2]
알라딘이나
벨리댄스 등의 요소를 인도의 한 문화로 오해하는 것도 북인도의 영향 때문이며 오히려 힌디어를 사용하지 않는 남인도야말로 힌두 문화의 정통성을 잘 보존하고 있다. 타국과의 유사성을 꼽아 보자면 태국 문화와 비슷한 정도다.
[3]
비슷한 경우로 중국 문화에 대한 애호인
시누아즈리가 있는데 북중국 문화를 향유하는 쪽은
베이징·
만주 등의 북중국 문화권이 문화적으로
몽골족이나
만주족 같은 북방 기마민족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알타이 제어권 문화에 대한 애호의 연장선상에 가까운 반면 남중국 문화를 향유하는 쪽은
광동어권(
광둥성,
홍콩,
마카오)·
푸젠성·
대만 등 남중국 문화권이 중국 한족 문화의 정통성을 잘 보존하는 만큼 진정한 의미에서의 시누아즈리에 가깝다.
[4]
북인도는
가즈니 왕조 이후 이슬람화가 진행되었고 페르시아인들이 북인도에 아랍 문화, 페르시아 문화를 전파했기 때문에 고대 인도 문화와 차이가 생겼다.
[5]
시타르는 원래
이란에서 유래된 것이다.
[6]
한편 중국 문화를 애호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대만 등의 남중국 문화권에 호감을 가지는 경우가 늘어났는데 남중국 문화권이 북중국 문화권에 비해 개방적인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7]
다만 최근에는
나렌드라 모디 내각에 의해 인도의 힌두교 근본주의가 더욱 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것에 따른 반감 탓에 반대로 인도를 제외한 다른 인도 문화권 국가들에 호감을 가지는 사람들도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
[8]
촐리도 원래 노출이 심하지 않은데 인도의 무용수, 매춘부, 영화 배우들이 노출을 심하게 입어서 국제적으로 오해받게 되었다. 그러나 촐리는 이슬람, 불교가 다수인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네팔에서도 대중적으로 입는다.
[9]
비유하자면
인도인이 유럽을 보고 영국, 이탈리아, 러시아가 전통 의상과 건축물이 비슷하니 같은 문화가 아니냐고 착각하는 것과 같다.
[10]
영국이 프랑스를 물리치고 인도를 식민화하는 데 토대를 마련한 인물이다.
[11]
고대 산스크리트어에서는 어제와 내일을 나타내는 단어가 똑같았다.
[12]
인도가 이슬람화되기 이전 고대 인도사 관련한 기록은 불교, 자이나교 관련 기록이나 고대 그리스인들이 남긴 기록, 석주 혹은 중국인 승려들의 여행기를 참조하는 수밖에 없다.
[13]
고대 그리스 철학은 아랍인에 의해 재번역되어서 유럽으로 전파되었지만 당시엔 대중적인 철학이 아니고 기독교 신학 관점으로 고대 그리스 철학을 해석하곤 했다.
[14]
그러나 무굴 제국은 페르시아 문화를 인도에 대중화시켰고 무굴 제국이 남긴
타지마할은 인도 전통 양식이 아닌 페르시아 이슬람 양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