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대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당주
우에스기 겐신[1] 上杉謙信 |
|
|
|
<colbgcolor=#002f6b><colcolor=#fff> 출생 | 1530년 2월 18일 |
에치고국 구비키군 가스가 산성 (현 니가타현 조에츠시 가스가산) |
|
사망 | 1578년 4월 19일 (향년 48세) |
에치고국 구비키군 가스가 산성 (현 니가타현 조에츠시 가스가산) |
|
재임기간 | 제16대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당주 |
1561년 4월 27일 ~ 1578년 4월 19일 | |
신체 | 156cm |
[clearfix]
1. 개요
일본 센고쿠 시대 다이묘. 통칭 에치고의 용. 센고쿠 시대 전국 3영걸이라 불리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다음으로 인지도가 높은 인물로 많은 인기를 누리는 무장이다. 가이의 호랑이가 별명이었던 다케다 신겐[2]과 에치고의 용이라는 겐신은 용호상박이란 고사성어에 걸맞은 라이벌 관계로 유명하며 스스로 비사문천(毘沙門天)의 화신이라 믿었으며 정의감이 투철한 의리남이었다. 실제로 아버지부터 동맹 이마가와까지 뒤통수를 자주 쳤던 다케다 신겐에 비하면 우에스기는 대체로 정의라는 명분을 크게 저버리진 않았다. 그러나 정의의 편이라는 단순한 수식어는 과장이 들어간 평으로, 평소 행적은 그야말로 본심을 알 수 없는 행동들로 점철되었다는 평도 존재한다.명분을 중시하고, 구( 舊) 시대 질서에 대한 신봉자로서 난세라는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결정을 자주 내렸으며 이타적이었던 탓에 정의의 화신으로 미화되지만, 그도 전쟁 행적을 보면 인신매매와 약탈을 자주 저질렀다.
신겐과의 라이벌 구도 외에도 동국의 군신(軍神), 서국의 뇌신(雷神)이라며 타치바나 도세츠와 함께 불리기도 하며,[3] 생전부터 군신(軍神)이라 불렸다.
그로 인해 소위 난다 긴다 하던 다이묘나 지휘관들도 그와 직접 조우하여 싸우는 것을 아주 꺼렸다. 그 필생의 숙적은 호조 우지야스로 간토 평정을 위해 수차례 침공을 했으나 매번 이마가와, 다케다, 호조의 삼국동맹에 의한 단체행동으로 무산되어 끝내는 이루지 못하였다. 말년에는 사실상 일본의 천하인이 된 오다 노부나가와 대립했으며 압도적인 군재(軍才)로 노부나가에게 일생의 마지막 고비를 선사했다.
2. 생애
2.1. 출생 및 출가
겐신의 본래 이름은 '나가오 가게토라(長尾景虎)'였으며 이후 우에스기 마사토라(上杉政虎),[4] 우에스기 데루토라(上杉輝虎)[5] 등을 사용했고,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은 죽기 몇 년 전에 출가하면서 겐신을 법명으로 받으면서 사용한 이름으로, 생애 대부분은 우에스기 겐신과는 다른 이름을 사용했다. 정식 법명은 후시키안켄신(不識庵謙信).겐신의 아버지인 나가오 타메카게는 본래 간토 간레이[6] 우에스기씨의 일족인 에치고 슈고 우에스기씨의 대리(수호대)가문인 에치고 나가오 가문(越後長尾氏)[7]인데, 상관인 에치고 슈고를 공격하고 에치고를 장악하였다.
1530년, 타메카게가 환갑 정도 되어서 늦둥이 아들을 얻고 아명을 도라치요(虎千代)라고 붙였는데, 이 도라치요가 바로 훗날의 겐신.
겐신 탄생 당시 이미 20세가 넘은 장남 하루카게가 있었기 때문에 겐신은 태어났을 때부터 '그런 놈은 잉여인간이다'라는 취급을 받아왔다.
이때의 교육이 그에겐 큰 자산이 되었는데 시, 서화, 유학과 예절 등을 익혀 당시 흔하지 않게 글과 교양을 갖춘 무사가 되었다. 또한 입산했던 사찰은 린센지(林禪寺)로서 당시 조동종으로 분류되는 사찰로 매우 마초적인 성향의 불종으로, 여자들은 올라갈 수조차 없음은 물론 자기 수련을 갈구하는 종파로 욕망을 자제할 수 있도록 볼 때마다 생각나게끔 성기에 계인[8]을 찍을 정도여서 후에 나오는 여성설의 강력한 반증이 되기도 한다.
2.2. 환속 후 가독 상속
하루카게는 부친 다메카게와 반대로 국내 호족들에게 온건 정책을 펼치고 있었으나, 쿠로타키 성주 쿠로다 히데타다의 반란으로 본거지인 카스가야마 성까지 공격을 당하고 하루카게의 동생 2명이 전사하는 등, 진압에 어려움을 겪자 출가했던 도라치요를 환속시켜 토치오 성주로 임명하여 반란 진압을 맡겼고, 도라치요는 신속하게 반란을 진압했다. 그러자 유약한 하루카게보다 도라치요가 당주에 어울린다는 가신들이 등장하여 에치고는 하루카게파와 토라치요파로 나뉘어 내분이 일어나게 된다.당시 에치고 슈고였던 우에스기 사다자네가 슈고다이였던 하루카게에게서 실권을 찾아오고자 사위였던 하루카게를 제껴놓고 먼 윗지방의 다테 사네모토를 후계자로 삼은 데서 알 수 있듯 에치고에서는 연일 슈고파와 슈고다이 간 국지전이 일어났는데 거기에 더해 가문의 내분까지 더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에스기 사다자네도 도라치요를 적극 밀어주면서 하루카게는 결국 도라치요를 양자로 삼아 가독상속을 진행해야만 했다. 이때 하루가게에게서 나가오 가문의 통자인 '가게(景)'를 받아 가게토라(景虎)라고 개명한다.
2.3. 우에스기 가 상속
간토에서 당시 최강의 힘을 가지고 있던 후호조씨가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를 공격하자, 당주 우에스기 노리마사는 에치고로 달아나 겐신에게 의지한다. 이때 노리마사의 아들이 호조 우지야스에게 살해되었는데 노리마사는 겐신에게 복수를 부탁하였고 겐신은 간토, 시나노, 고즈케 지역의 제호족들을 규합하여 10만여 대군을 이끌고 호조 가를 공격한다. 이에 호조 우지야스는 거성 오다와라에서 농성으로 대항하였다.지루한 공방전이 펼쳐졌으나 워낙 오다와라가 튼튼한 성인데다가 호조 가와 동맹 관계인 다케다 가가 빈집을 털기 시작해 결국 철수하게 된다. 이 때문에 공성전은 서투른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직후 겐신은 가마쿠라에서 노리마사의 양자가 되어 우에스기 성과 간토 간레이직을 받았으며 노리마사로부터 이름 한 자를 받아 마사토라라는 이름으로 개명한다.[9]
우에스기 가문을 상속한 것은 간토 지방의 호족들에 대한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한 수였는데, 군소 세력들로 조각조각 갈라져 있는데다 강인하고 독립적인 기풍이 굉장히 강하던 간토에서는 이런 정치 선전이 그닥 효과가 없어서 겐신은 별 성과 없이 에치고에서 간토 지방으로 쳐들어왔다가 돌아가는 소모전을 늘 반복해야 했고 항구적인 거점이나 영토를 마련하지는 못했다. 이것과 관련된 설화로, 우에스기 가문 상속 예식을 치르고 돌아가는 길에 말에 탄 채 자신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간토의 호족 나리타 나가야스[10]를 끌어내려 구타했고, 이에 열받은 나가야스가 호조 가에 붙어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11]
2.4. 다케다 신겐과의 대립
다케다 신겐과는 라이벌인데, 이에 관련된 이야기는 소설 및 영화 〈 천과 지〉에서 잘 나온다. 도덕적인 모습을 숭배하는 우에스기 겐신과 극단적인 합리성을 추구하는 다케다 신겐과의 이상과 성격이 전혀 맞지 않아서 서로 경멸하는 것으로 묘사된다.서로 존중하는 듯 보이면서도 우에스기 측에서는 신뢰할 수 없는 면이 있고 이익 앞에 의리를 버리는 다케다를 평생 경멸했으며, 다케다는 숙적인 우에스기가 일개 슈고에 불과한 자신보다 격이 높은 간토 간레이에 있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아 그를 평생 간토 간레이 가문인 우에스기 성씨로 부르지 않고 격이 낮은 본래의 나가오 성으로 낮춰 불렀다고 한다.[12] 대부분의 사극에선 이 부분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둘의 라이벌 관계는 다케다가 시나노 지방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한 무라카미 요시키요를 1553년 마침내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자 영토가 맞닿게 되면서 직접적 가상 적국이 되어버린 데다가, 패배한 무라카미가 '의'를 중시한다는 겐신에게 의탁해 다케다 토벌을 의뢰했고, 정의 덕후였던 겐신은 별로 얻을 게 없는데도[13] 불구하고 그에 응해 시나노를 침공한 것에서 시작됐다.
카와나카지마 전투를 그린 그림 |
특히 다케다가 시나노를 제패하고 에치고로 북상할 길이 열리며, 다케다에게 쫓긴 시마즈 타다나오 등 몇몇 북시나노의 호족들이 의롭다는 평가가 많던 우에스기를 의지해 도망치자 두 세력의 대결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고, 북시나노의 '카와나카지마'라는 요충지를 두고 총 다섯 차례 싸움을 벌였는데, 사실 두 용장의 대결이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거의 양측이 지루하게 대치하기만 하다가 끝나곤 했다. 그러나 4차 전투만은 길이길이 회자될 정도로 격렬한 전투였다. 단 전투의 경과를 기술한 기록은 군기들뿐이라 신뢰도가 떨어지며, 전투의 자세한 경과에 대한 서술은 상상에 의존하는 부분이 많다.
상세 사항은 카와나카지마 전투 문서 참조.
이후에도 간토의 호조, 다케다 집안과는 계속 적대 관계였지만, 호조 우지야스의 아들을 양자로 받아들이고 총애했고, 오다 가와 호조 가의 판로 압박으로 다케다 가문에 소금 등의 생필품이 들어오지 않아 어려울 때 무역재재에 동참하지 않고 이전처럼 소금을 판매한 것을 보면,[14] 상대를 증오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15]
2.5. 오다 노부나가와의 대립
노부나가가 무로마치 막부의 마지막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쫓아내자, 간토 평정에만 주력하던 우에스기도 결국 노부나가의 토벌을 결심하는데, 마침 이 당시 우에스기와 오다 두 세력 사이에 껴 있는 지방인 노토 반도를 지배하는 하타케야마 가문에 내분이 일어나 가신단이 친 오다파와 친 우에스기파로 나뉘었다. 처음에는 친 오다파가 우세해 우에스기 겐신의 개입에 맞서 싸웠으나, 나나오 성에서 농성하던 중에 역병이 돌아 당주 하타케야마 하루오마루가 병사하면서 친 우에스기파가 우세해져 친 오다파 가신들을 죽이고 성을 우에스기 겐신에게 헌납했다.오다 노부나가도 친 오다파의 구원 요청을 받아 제일의 맹장인 시바타 카츠이에와 하시바 히데요시가 이끄는 7만 명 정도의 대 군단을 파견해 테도리가와 전투가 발발한다. 그러나 이미 나나오 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오다 측에 전해졌고, 히데요시는 안 되겠다 싶어 전투 이전 독단으로 퇴각, 카츠이에는 홀로 싸우다 도저히 안되겠다 생각하고 퇴각하는데, 이때 일본에서도 물살이 세기로 유명한 테도리가와의 물살이 불어났고 우에스기 겐신은 테도리가와로 퇴로를 막고 공격, 이로 인해 병사들 상당수가 빠져 죽거나 혹은 우에스기군에 참살되어 '전국 시대 가장 사망자가 많은 전투'로 기록되었다.
히데요시가 카츠이에에게 항명하고 이탈한 것 때문에 카츠이에가 주장 히데요시가 부장 정도 편제로 간혹 오해되는데 실상 니와 나가히데나 타키가와 카즈마스 등 카츠이에만은 못해도 히데요시보단 서열이 낮지 않은 무장들도 여기 참가하고 있었다.[16]
2.6. 최후
우에스기 겐신은 승기를 잡았지만 바로 교토까지 밀고 들어가지 않고 일단 본거지 에치고로 귀환한다. 10월에 벌인 테도리가와 전투가 끝날 때는 겨울이 시작되는 시점었는데, 워낙에 눈이 많이 오는 에치고였다보니[17] '오다 가문이 이 정도면 상경은 순조로울 것이다'라며 일단 귀환하여 이듬해 봄에 본격적인 출진을 계획하였으나, 겨울이 끝나 눈이 녹기 전에 겐신은 뒷간에서 뇌출혈로 사망하였다.[18] 무리한 단식 수행과 음주를 즐겨 하였지만 육식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안주로 우메보시를 먹어 영양의 균형이 무너졌다는 설이 있다. 겐신뿐 아니라 당대 대부분의 무장들은 전장에서 에너지 소모가 많다보니 염분을 많이 함유된 식단을 즐겨 순환계 건강이 굉장히 좋지 않았다고 한다. 가령 노부나가는 담백한 교토의 고급 식단을 싫어했다고 전해진다.노부나가 입장에서는 과거 다케다 신겐에게 밀리다가 신겐이 갑자기 죽어서 한 숨 돌렸는데 비슷한 행운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우에스기군은 이후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계속 오다군을 상대로 싸우지만 열세를 극복하진 못했다.
3. 기타
- 전략과 전술뿐 아니라 본인의 무술 실력이 뛰어나다고 전해지는 몇 안되는 무장으로 남들이 수급 5개 정도 가져올 때 겐신은 10개 이상을 가져왔다고 한다. 비사문천의 열렬한 신봉자로 싸우기 전에는 항상 병사들까지 비사문천에게 기원을 올렸다 하며 제자인 나오에 카네츠구의 투구 문양으로 유명한 '愛'는 애염명왕에서 유래한 것. 스스로가 정의라고 믿거나 전투 후에 자신이 따라주는 술잔을 받지 않으면 매우 심하게 화를 내고 부하들이 내분을 일으킨다고 가출해버려서 가신들이 따라와 싹싹 빌어서 귀환시키거나 적인 다케다 신겐이 신겐에게 배신당한 가문들의 무역 봉쇄로 인해 소금을 구할 수 없게 되어 곤란을 겪자 일생일대의 라이벌인 신겐을 돕기 위해 소금을 보내주는 등[19] 제멋대로이고 기분따라 행동하는 기인으로서의 일면도 있었던 특이한 인물이다. 우사미 사다미츠가 그의 전설적인 군사로 전해지지만 역사적 신빙성은 낮다고 한다.
- 코에이사 게임의 영향인지 전투는 잘 하는데 정치는 별로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사실 거성인 카스가 산성의 축적 재산량이 타케다 집안의 2배 이상이라 알려져 있으며 인신매매와 약탈을 중심으로 한 전략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20] 에치고가 눈 녹은 물로 토양이 대단히 비옥한 지방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겐신의 부를 설명하기 힘들다.[21] 금광으로 유명한 섬인 사도를 영유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널리 유포되어 있지만 사도는 에도 막부 치세 초기가 되어서야 채굴되기 시작했고 당시에는 겐신의 영토가 아니었다. 코에이뿐만 아니라 코나미의 <천과 지>, 게임아츠의 <천하포무>, 시스템소프트의 <천하통일>, 반프레스토의 <전국몽환> 등 내로라하는 전국시대 시뮬레이션 걸작들에서도 다 정치력은 별로인 것으로 나온다.
- 후계자인 우에스기 카게카츠는 군사 우사미 사다미츠와 함께 물에 빠져 죽은 자형 나가오 마사카게의 아들이고 또다른 자식인 우에스기 카게토라는 본래 호조 우지야스의 아들로 타케다 집안에 양자로 들어갔다가 다시 우에스기 집안에 양자라는 명목으로 볼모로 온 인물이다. 이처럼 평생 미혼이었고 자식들은 전부 양자인지라 여성설이 나오게 됐으며 비슷한 이유로 반음양설도 있다.
- 우에스기 겐신이 고안한 진법인 '차현'(구루마가카리)은 여러가지로 의견이 분분한데 아마도 본진을 중심으로 여러 기마부대가 원 형태로 움직이며 적을 연속으로 타격하는 전법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구루마가사'라는 투구도 발명하였는데 이는 투구의 머리 부분이 회전하게 되어 총탄같은 것을 맞더라도 직격이 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차현(수레바퀴를 이용한 전술)이나 무구의 발명에 대해서도 불교의 영향이라는 설이 있다.[22]
3.1. 여성설
널리 알려진 수염난 초상화는 에도시대에 그려졌고, 위 그림은 전국시대에 그려진 우에스기 겐신 말년기의 초상화.
우에스기 겐신이 여성이었다는 주장의 근거는
- 그 시대 남자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너무 밝고 붉은색의 옷을 즐겨 입었다.
- 1달에 1번 정도 격통을 호소하며 전투 중에도 진을 물릴 때가 있었다.
- 어느 신사의 노래에 '남자에게도 뒤지지 않는 용력'이라며 겐신을 찬양하는 구절이 있다.
- 문헌에 기록된 겐신의 죽음이, 현대의 부인병으로 해석되는 증상과 유사하다.
-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에 보낸 곤잘레스라는 인물의 보고서에 겐신은 ' 카게카츠의 백모'라고 나왔다.
- 남아있는 편지 등에서 여성적인 필체나 표현이 자주 나타난다.
- 겐지모노가타리를 비롯한 연애물을 즐겨 읽었으며 남녀 간의 애정을 다룬 시를 낭독하기도 했다.
이런 점이다.
그러나 실제로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당연히 이런 말을 우스갯소리 정도로만 생각한다. 이하는 이유.
- 겐신이 어렸을 적에 자란 린센지(林泉寺)는 금녀의 구역이었고, 상락했을 당시 참선하면서 소신(宗心)이란 법명을 받았던 다이토쿠지(大徳寺) 역시 여성의 출입이 금지된 절이었다.
- 붉은 색이 여성적인 색이란 관념 자체가 근대에 등장한 것이다. 예로부터 붉은 색은 다른 염료보다 얻기가 힘들어 지배 계층들 위주로 소비되었으며, 특히 동양에서는 붉은 색으로 옷을 해 입는다는 것 자체가 권력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신라에서 적색 관복은 급벌찬 이상 아찬 이하의 관료들이 입었으며[23], 고려와 조선에서도 적색 관복은 고위 관료의 관복이었다. 명나라의 법률인 대명률(大明律)에서는 아예 진홍색(眞紅色)을 천자의 색이라 하여 이 색으로 옷을 지어입은 자는 참형에 처한다는 조항이 있다. 더구나 겐신이 아시카가 쇼군 가로부터 관령급 대우의 상징으로 허가받은 7가지 특권(우에스기의 칠면허(上杉の七免許[24]) 중에는 붉은 색 우산의 사용 허가가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 당시 붉은 색은 고위급들의 상징이었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무사들이 자주 사용하기도 했다. 인근한 타케다 가에는 '아카조나에'라고해서 붉은 색으로 장비를 떡칠한 엘리트 부대가 있었다. 이 아카조나에는 후에 사나다 노부시게가 이었고, 타케다에게 엿을 먹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그 무공에 감명을 받아서 이이 나오마사가 붉은 장비를 갖추는 것을 허락했다.
- 복통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생리설과 여성 특유의 병이었다는 설이 여성설에 붙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스트레스성 복통이나 평소의 식습관에서 오는 몸 상태의 악화 등이 원인이라고도 하며 결국에는 원인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아무런 근거가 되지 못한다. 평시의 기록들에 대해서는 겐신이 워낙 술을 즐겼기 때문에 단순 숙취라고 보는 연구자도 존재한다.[25] 애주가라면 복통이 잦은 것을 설명 가능하긴 하다. 실제로 매일같이 술을 마시는 사람은 설사와 복통에 시달리기 쉽다. 그리고 상기 문단에서 겐신이 우메보시를 술안주로 즐겼다는 서술이 있는데 실제로 매실은 설사를 멎게 하고 복통을 다스리는데 효과가 탁월한 음식이기도 하다.
- 여성적인 성격은 주변에 여성이 많았다는 점에서 유래하며, 당시에는 중들도 남녀 간의 애정을 다룬 시 정도는 외우고 다니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근거가 되지 못한다. 실제로 겐신은 어머니 세이간인(青岩院)과 누이를 몹시 사랑했다고 하며, 나중에는 그 누이의 자식을 후계자로 삼기도 했다.
- 당시에는 여성 다이묘들도 소수나마 존재했기에, 겐신이 여성이라도 굳이 숨길 이유가 없다.[26] 혹은 체면 등을 신경써서 숨겼다고 하더라도 이방인인 선교사가 그것을 알 정도면 숨기는 의미가 없다. 또한 겐신을 여성이라고 쓴 당시의 자료는 선교사의 문헌뿐이라서 그 사실을 증명할 만한 증거가 전무하다.
- 곤잘레스가 펠리페 2세에게 보낸 편지에 적힌 글은 이렇다. 「 아이즈(会津)의 우에스기(우에스기 카게카츠)는 그 백모(tia)가 개발한 사도(佐渡)의 순금을 많이 가지고 있다.」 여기서 tia는 스페인어로 숙모 또는 백모를 말하며, 사도에 금광을 개발한 우에스기 카게카츠의 친척이라고 하면 결국 우에스기 겐신을 가리키는 것이 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카게카츠의 백모는 우에스기 겐신이라는 것이다.
애초에 우에스기 겐신 여성설을 집대성해서 주장한 사람은 곤잘레스 보고서를 처음 발견한 야기리 토메오(八切止夫)라는 역사소설가이다. 그는 1968년에 요미우리 신문에 「우에스기 겐신은 남자인가 여자인가(上杉謙信は男か女か)」라는 연재글에서 처음 이와 같은 설을 주장했고, 이후 1982년에 우에스기 겐신 여성설을 비롯한 일본사에 관한 자신의 여러 독자적인 설들을 모아서 「은닉의 일본사(隠匿の日本史)」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야기리 토메오가 최초로 우에스기 겐신 여성설을 주장한 것은 아니지만, 이때까지 여기저기서 제기된 여성설의 근거들을 집대성한 것은 야기리 토메오의 업적이며, 일본 위키피디아의 서술도 주로 그의 저서를 근거로 삼고 있다. 야기리 토메오는 정식으로 역사학을 공부한 학자가 아니며, 출판사를 경영하면서 대중의 흥미를 끌만한 역사에 관련한 소설이나 논픽션 등을 저술한 사람이다.[27] 따라서 우에스기 겐신 여성설은 일본 사학계의 주류 의견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에스기 겐신 여성설 일본 위키 번역
아무튼 현실성과 별개로, 상당히 오래된 떡밥이고 특이한 설정이다보니 게임 같은 창작물에선 우에스기 겐신 여성설을 채택하는 경우가 꽤 있다. 개그물이 아닌 역사 시뮬레이션을 자처하는 노부나가의 야망 천도에서도 선택 이벤트로 넣어놨다.
3.2. 생애불범
겐신하면 유명한 것은 바로 생애불범인데, 불교에 심취한 겐신은 스스로에게 그것을 다짐했다고 한다. 한자로 쓰면 生涯不犯. 즉 '여성과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데, 그러나 당시의 의미는 달라서 즉 결혼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결과적으로 미혼에다가 자식을 낳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인척이었던 카게카츠가 대를 잇게 되었다. 또 이것을 오해한 후세의 사람들이 겐신 여성설을 만들기도 했다.다만 와카슈도 문화를 고려해 봤을 때 생애불범은 문맥적으로 어디까지나 ‘여자와 안 잔다’는 뜻이기 때문에[28], 남성이 아니면 자지 않는 동성애자였을 가능성도 있다. 모친이나 누이가 워낙 신앙심이 깊은 고결한 인물이었던지라 그에 못 미치는 주변 여자들을 보면서 점차 여성 혐오에 빠진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는 모양. 오늘날에는 여러 정황을 봐서 동성애자였던 것 아닌가하는 의견이 많지만, 사실 생애불범이건 동성애건 여성혐오건 간에 문헌상으로는 겐신이 여성이나 남성과 잠자리를 가졌다는 기록도, 가지지 않았다는 기록 자체가 없기 때문에, 어느 쪽이건 확인하기 힘든 추측에 그치고 있다.[29]
훗날의 군기물에서는 코즈케국 히라이성주 치바 우누메의 딸인 ‘이세히메(伊勢姫)’라는 여성이 등장하는데, 겐신에게 항복할 뜻을 품은 우누메가 딸을 겐신에게 바쳤고, 겐신은 이세히메와 서로 깊이 사랑하게 되어 혼인할 뜻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중신인 카키자키 카게이에가 “항장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선 안된다”고 강하게 반대하여 결국 단념하게 된다. 상심한 이세히메는 청룡사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목숨을 잃게 되고[30], 이에 비통함에 잠긴 겐신은 생애불범을 맹세했다는 전설이다. 다만 이세히메는 군기물에서만 이름이 보일 뿐 당시의 사료에선 찾아 볼 수 없어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이세히메 전설이 대표적이긴 하지만 이같은 겐신의 사랑 이야기는 군기물에 꽤 많은 편이다. 개중에는 나오에 카게츠나의 딸[31]과의 연애담도 있으며, 어느 민담이건 요지는,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대한 상처가 겐신을 생애불범으로 만들었다는 식이다.
그외에 간파쿠 고노에 사키히사의 여동생인 타에히메(絶姫)와 혼담이 있었다. 겐신이 상락했던 1559년에 있었던 일이나 생애불범을 맹세했기에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겐신에 대한 연모를 잊지 못한 타에히메는 남장을 하여 겐신을 따라갔으며 겐신이 호조 우지야스와 전쟁을 벌였을 때도 함께 했다고 한다.
3.3. 능력
전쟁에 능한 다케다 신겐의 라이벌로 여겨지는 만큼 겐신도 뛰어난 무략을 자랑했다.시나노 일대를 평정하여 힘을 축적 이를 바탕으로 전국의 어느 정도 입지가 있는 다이묘라면 꿈꾸는 상경을 하고자 하는 신겐에게 있어 시나노 장악에서 신겐 본인을 두고두고 엿먹였던 무라카미 요시키요가 이후 우에스기 겐신에게 지원을 요청한다는 희대의 한 수를 두면서 무라카미 요시키요의 거센 저항 외에는 줄곧 승승장구하며 세력을 착착 불려나가던 신겐을 아주 크게 엿먹였다.
결국 겐신과의 대립은 신겐에게 있어서 크나큰 걸림돌이 된다. 덕분에 타케다 가문이 시나노 지역의 안정적인 확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북 시나노에 묶여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방면에 대하여 소홀해질 수 밖에 없게 됐는데 타케다 신겐이 시나노에 묶여 지내는 동안 오다와 도쿠가와가 착실하게 힘을 길렀다는 분석까지 나올 정도다.[32] 실제로 타케다 신겐이 뒤늦게나마 상경을 계획하지만 이미 예전에 상경하여 중앙에서 힘을 착실하게 길러온 오다, 도쿠가와의 거센 저지에 뚫어내야만 했고 이 결과로 발생한 것이 바로 미카타가하라 전투였다.
이때 신겐이 보여준 놀라운 외교 전략과 군사적 전술은 신겐의 상경이 좀 더 빨랐다면[33], 신겐이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일본의 역사가 바뀌였을 것이라는 인식을 낳을 정도로 신속하고 적절한 판단들로 이뤄졌으며 반드시 취해야했던 배후 공작들이 착실하게 이뤄졌다.[34]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런 신겐을 오랜 기간 북 시나노에 묶어둬버리고 줄기차게 공세를 취하며 대등하게 맞선 겐신에 대한 평도 높아질 수 밖에 없었다.
신겐과는 적이지만 서로 인정하는 관계였다고 추정되는데 그 신겐이 사적인 자리에서 일본 제일의 장수로 꼽은 것이 이 겐신이고 이것은 자료까지 남아 있다. 또 오다 노부나가 측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오다의 병사들 사이에서 '일본 최강은 타케다가 아니면 우에스기'라고 여겨졌다고 한다.
그 밖에도 겐신의 부대가 온다는 말에 부대가 철퇴를 결정할 정도였다고 하며 신겐도 야전에서 겐신과 싸우는 것은 피했다. 이 겐신의 유일한 약점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공성전인데 실은 공성전에서도 나쁘지 않은 전적을 기록했다. 단순히 승률이라는 면에서는 전국 최강의 장수의 반열에 오를 만한 인물.
또 내정면에서도 훌륭해서 새로운 무역 루트를 개척하거나 했고 또 위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그의 사후에 성을 뒤적여보자 금덩어리들이 나왔다는 것으로도 알려지며 시와 노래에도 매우 능해서 전쟁터 한복판에서 노래를 지은 적도 있다고 한다.
3.4. 건강
보통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나 전투에 나가기 전 간헐적인 폭식과 폭음 때문에, 부하들은 그의 식단을 보고 전투가 가까워졌다는 것을 짐작하곤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그런 것과는 달리 애주가[35]였고 또 안주로 먹는 것이 매실절임 등 염분이 많은 음식이었기 때문에 그런 안 좋은 식습관이 원인이 되어서 죽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갑자기 쓰러져서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했는데 현대에서 추정하는 사인 중에 하나가 뇌출혈이며 이건 평소의 식습관도 연관이 있다고 한다. 40대밖에 되지 않는 나이에 중풍을 앓았었다는 사료도 있다.그 이외에도 전장에서 왼쪽 다리에 상처를 입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나중에 장년에 들어서는 종종 다리를 저는 모습을 보였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이외에 키가 장대한 6척 거구라느니, 체구가 작은 인물이니 여러 설이 있었는데 실제 그가 입던 갑옷으로 추측하면 150cm 대 후반이라고 한다. 당시 일본인 평균인 155cm. 그리고 그가 당시 썼던 혈판장에서 얻은 혈액형은 AB형이다.
3.5. 다케다 신겐과의 관계
일반적으로 호적수라고 여겨지며, 이를 증명하는 것이 포위로 인하여 소금[36]을 얻지 못하게 된 신겐에게 이것을 비겁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겐신이 소금을 보냈다는 일화가 있다. 이 고사에서, 적의 약점을 이용하지 않고 오히려 그 곤경에서 구해준다는 뜻의 '적에게 소금을 보내다(敵に鹽を送る)'라는 일본어의 관용구가 탄생했다.[37] 신겐은 이에 대한 답례로 명도를 보냈고, 현재도 이 칼은 남아서 중요문화재로 지정받았다.[38]한 편으로 당시의 자료에는 이러한 일화에 대해서 정확하게 서술된 자료가 없다는 점을 들어서 후세의 창작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아버지를 쫓아내고 다이묘가 된 신겐을 겐신은 몹시 탐탁지 않게 여겼다고도 한다. 일부의 자료에 의하면 신겐의 죽음을 전해듣고 호적수의 상실에 생각지 못하게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도 있으나 신빙성은 낮기 때문에 겐신과 신겐의 관계가 실제로 어떠하였을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신겐 신격화로 일관하는 《갑양군감》에서조차도, 주변의 호조 우지야스, 토쿠가와 이에야스 등 쟁쟁한 명군주들조차도 신겐에게 영토를 빼앗겼지만 그런 신겐이 "오로지 겐신의 영토만은 빼앗지 못했다"며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정도. 또한 겐신은 라이벌인 신겐이 죽더라도 그 후계자인 타케다 카츠요리를 괴롭히는 일이 결코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을 정도로 그 인품과 정의로움에 대해서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4. 어록
운은 하늘에 있고 갑옷은 가슴에 있으며 공훈은 발에 있다
어떤 때라도 적을 쓰러트리고자 하면 내 수중에 넣고 싸워야 하며
죽을 각오로 싸우는 자는 살 것이요.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니
운은 정해진 것이 아니며 때가 되면 저절로 되는 것이라 생각하면 틀린 것이다.
무사라면 내가 가야할 길은 이것 외에는 없다고, 스스로 운을 만들어야 한다.[40]
어떤 때라도 적을 쓰러트리고자 하면 내 수중에 넣고 싸워야 하며
죽을 각오로 싸우는 자는 살 것이요.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니
운은 정해진 것이 아니며 때가 되면 저절로 되는 것이라 생각하면 틀린 것이다.
무사라면 내가 가야할 길은 이것 외에는 없다고, 스스로 운을 만들어야 한다.[40]
5. 평가
이미 무장으로서는 뛰어난 평가를 생전부터 얻고 있었고 동시에 매우 의롭다는 평가를 얻고 있었다. 형과 상쟁을 한 기록도 있으나 동시에 장군 가의 요청을 듣고 두 차례나 상경한 기록이 남아있다. 첫 상경은 단독으로, 두번째 상경은 병력 5,000을 이끌고. 당시 기록에 따르면 두번째 상경은 병력을 이끌고 간 탓에 이동 경로에 있는 다이묘들에게 어마어마한 돈을 뿌려 통행 허가를 받아냈다고 한다.그 밖에도 의에 따라서 무라카미 요시키요나 우에스기 노리마사의 애원에 아무런 전략적 의미도 없는 출병을 하기도 했다. 이 결과 얻은 것이 한두 쿠니(國)가 아니라 한 주(州)에서 쇼군을 대리하는[41] 역할인 간토 간레이의 자리인데, 이미 무로마치 막부의 위세는 밑바닥까지 떨어졌기 때문에 이건 실력이 없는 자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직함일 뿐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패권을 잡는 것이 아니라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를 되살리고 싶어했다는 겐신은 그 자리에 집착했고 이런 겐신을 좋지 않게 바라보는 시선도 당시부터 있었다.
당시에도 많은 장수들이 대의명분에 집착했으나 겐신은 유독 그런 성향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겐신은 누군가와 한 약속을 먼저 깬 적은 없다는 것이다. 단순히 명분을 중시하는 꼴통이나 말만 정의로운 위선자가 아니라 그것을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끝까지 관철했다는 점은 겐신의 인물됨을 파악할 때 몹시 중요한 사항이다.
숙적 중에 하나인 호조 우지야스는 전국 제일 의리있는 인물로서 이 겐신을 꼽았다. 한 때 호조가 우에스기에게 멸망 직전으로 몰린 적까지 있다는 사실에 주목. 먼저 동맹을 깬 적은 없는 노부나가하고 시도 때도 없이 배신 크리를 때리는 신겐은 까면서 한 말이다. 더구나 신겐조차 후계자인 타케다 카츠요리에게 평생의 철천지 원수인 우에스기를 두고 '자신이 죽은 다음에 곤경에 빠지면 겐신에게 몸을 맡겨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것이 우에스기 측의 자료가 아니라 호조나 타케다 측의 자료에서 나온 말들이다.
또한 겐신은 정의감이 투철하면서 인품 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급성장한 전국 다이묘 가문이 대개 그랬지만 겐신은 평생 가신의 모반에 시달렸는데, 라이벌들의 선동이나 배후공작이 주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극형이 당연한 반란죄조차도 대부분 관대하게 용서했다는 것이 특징. 키타죠 타카히로 같은 가신은 타케다 신겐의 선동으로 한번, 호조 우지야스의 선동으로 한번, 합쳐서 2번이나 반란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2번 다 용서받고 우에스기 가문의 가신으로 충실하게 섬겼다. 혼죠 시게나가 같은 가신은 반란을 일으켜 다른 유력 가신이 목숨을 잃는 정도의 혈전을 벌여 놓고도 잠깐의 근신처분 정도로 관대하게 용서받은 적이 있다. 게다가 이 둘은 영향력을 잃기는커녕 이후로도 중신으로 대접받으며 지냈다. 이런 관대한 행실이 정의로운 이미지에 큰 영향을 끼쳤음은 말할 것도 없다.
물론 이런 탓에 실제 사료와 비교하면 겐신의 업적이 다소 과대평가되었다는 얘기도 있다.[42] 우에스기 가문의 가신들은 타케다 가문처럼 상당히 조직력, 결속력이 약한 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43] 우에스기 가문이 철통같은 결속을 자랑하게 된 것은 후계자인 우에스기 카게카츠 대의 일이다.
6. 대중매체에서
자세한 내용은 우에스기 겐신/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전국시대 무장 중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인물 중 하나인만큼 창작물에서도 뛰어난 장수이자 비중 있는 역할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타케다 신겐과의 라이벌 관계는 그대로 먹고 들어가며, 여성설이나 반음양설도 나도는 인물이기 때문인지 여성이나 중성적인 이미지로 등장하곤 한다. 또한 비사문천의 화신을 자처한 것 때문에 종교적 색채를 띄는 캐릭터로 각색되곤 한다.
[1]
일생 동안 다음과 같이 이름이 여러번 바뀌었다. 나가오 가게토라(長尾景虎) - 우에스기 마사토라(上杉政虎) - 우에스기 데루토라(上杉輝虎) -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 현지 발음은 우에스기 켄신(うえすぎ けんしん)에 가깝다.
[2]
이쪽은 지금의
야마나시현 쪽
다이묘이다.
[3]
물론 혼슈 내에서도 동쪽에 위치한 에치고의 다이묘였던 겐신과 규슈에서 활동한 도세츠는 직접 만나거나 대적한 적이 없다.
[4]
우에스기 노리마사의 양자로 입적하며 우에스기 성과 돌림자로 마사(政)를 받아 바꾼 이름.
[5]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알현하고 그의 이름 중 한 자인 데루(輝)를 하사받아 바꾼 이름.
[6]
関東管領(관동관령),
무로마치 막부가
간토 8개국 및 간토와 인접한
이즈 ·
카이를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인 가마쿠라(鎌倉)부의 장관 보좌직.
[7]
참고로 이 나가오 가문은 간무 헤이시 가마쿠라당(桓武平氏鎌倉党)의 일족인 타카모치류 반도 헤이시의 8개 가문 중 하나이다. 참고로 반도 헤이지 가문의 종가뻘 되는 가계가 보소 헤이시(房総平氏) 일족인데 이 가계의 종가인 치바 가문이 반도 헤이시 전체의 종가로 대우받고 있다.
[8]
戒印-승려들이 주로 이마에 점을 찍어 수양을 나타내던 용도
[9]
이 때 조정에서 상징적이나마 사적으로 겐신 자신의 적을 징벌할 권한을 인정받았고, 강렬한 붉은색 털 장식이 된 마구인 '모센 쿠라오오이'를 하사받았는데 현재까지 유물로 보존되어 있다.
[10]
오시성 성주.
카이히메의 할아버지
[11]
나리타 가문이 비록 세력은 약해도 쇼군에게도 머리를 숙이지 않을 권리를 인정받는 명문가인지라 겐신의 행렬을 보고도 말에서 내리거나 절을 하지 않은 것인데, 타지인인 겐신이 이런 사정을 모르고 나가야스를 구타했다는 것. 하지만 이 일화의 역사적 신빙성은 매우 낮다.
[12]
참고로 막부의 역직이 아니라 조정에서 수여해준 관직으로 위계를 따지면 신겐은 세습받은 종4위하 좌경대부, 상경하여 받은 정5위상 대선대부이지만 겐신은 정5위하 탄정소필이기에 상하관계가 역전된다.
[13]
다케다를 무찔러도 원래 주인인 무라카미에게 땅을 돌려줘야 한다.
[14]
물론 무상공급이 아니라 판매이기는 하나 미담으로 남은 것을 고려하면 최소한 다케다 측의 어려움을 이용해 막대한 폭리를 취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15]
호조 우지야스와 다케다 신겐 또한 우에스기 겐신을 일본에서 가장 의리 있는 사람이라 평한 것을 보면 이들 역시 숙적인 것과는 별개로 겐신에 대한 악감정은 별로 없던 것으로 보인다.
[16]
카츠이에가 물론 오다 가의 가신들 중 필두 격이긴 했지만 높은 위치의 다른 가신들을 상당수 거느리고 싸운 셈인데, 아마 당시 오다 가의 다중 전선이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노부나가 본인이 빠지면 혼간지나 모리의 움직임에 신속히 대처하기가 어렵고 장남인 노부타다는 미노에서 타케다를 억제하고 있었어야 하며 차남 이하는 나이나 경험 면에서 전선 한 곳을 맡기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었으니 그렇다고 우에스기 문제에 대해 병력을 적게 보낼 수는 없다 보니 지위상으로 그리 차이 나지 않는 많은 중신들을 카츠이에가 통제하게 되었는데 이는 결국 히데요시의 항명이란 결과를 낳는다. 노부나가가 지휘 중이었으면 히데요시가 감히 항명할 수 없었다.
[17]
지금의 니가타현인데 이곳은 홋카이도마저 능가하는, 일본열도 최고의 다설지다. 해안가보다 산간지역으로 갈수록 적설량이 많아져서, 연간 적설량이 10m 정도 되는 세계 최고 수준의 다설지이다.
[18]
실제로 혈관 건강이 안 좋은 사람은 대변 볼 때와 겨울이 아주 위험하다. 대변을 볼 때는 힘을 주느라 혈압이 급격히 올라 혈관이 파열될 수 있고, 겨울철 추운 밖과 따스한 실내를 오가면서 급격한 기온 차를 경험하면 순환계에 상당한 무리를 받게 된다. 현대에도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다가 기절해서 응급실로 실려오는 사례가 왕왕있으며, 겨울철 일본 노인들의 높은 실내 사망율을 차지하는 원인이다. 충분히 납득이 가는 사유이지만, 이름난 무장의 죽음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우스꽝스럽기에
일본에서는 뒷간 밑에 숨어 있던 자객의 창에 당했다 같은 음모론을 믿는 사람이 많다.
[19]
'적에게 소금을 보낸다'는 속담의 연원이었다. 단, 실제로는 관대하게 지원해주는 의미에서 소금을 거저 준 것이 아니라 무역 봉쇄에 동참하지 않고 소금을 계속 판매한 정도다.
[20]
당시에는 타 영지에 대한 약탈과 인신매매는 겐신만 했던건 아니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지나치게 과장된 잔학성과 마찬가지로 당시와 현대
일본의 윤리관의 차이에 의한 문제를 특정
다이묘의 성향과 결부하는 것이 문제이다.
[21]
다케다 신겐의 근거지였던 가이는 땅이 척박하고 인구도 적은 가난한 동네였던 반면(다만 가이 지방에는 금광이 있었기에 마냥 가난한 지방은 아니었다.), 에치고는 전통적인 곡창지대였기에 덕분에 인구가 상당히 많았다. 그러나, 에치고는 기후와 기술력 문제로 인해 당시에는 이모작이 안 되는 지역이어서 동북과 마찬가지로 춘궁기에 취약했다. 그래서 가마쿠라 막부 시기부터 1년 3작(쌀 - 보리 - 메밀)을 하던 긴키 지방과 비교하면, 농업 생산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편이었다. 그렇다보니 겨울만 되면 겐신은 관동 지역을 약탈해 보리 이삭을 베어 오고 노예로 팔아 먹을 사람들을 잡아 왔다.
[22]
불교 사상에서는 주요한 신적 존재들이 수레바퀴를 들고 다니거나 장식으로 갖추고 있다.
[23]
진골 귀족만이 될 수 있는 대아찬 이상의 관료는 보라색 관복을 입었다. 급벌찬부터 아찬까지는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한계로, 최상위 계층은 아니었다.
[24]
1. 하얀색 우산집 사용 2. 양탄자 장식 말안장 사용 3. 서화의 감정 서명 허가 4. 옻칠한 가마 사용 5. 국화 문양, 오동 문양 사용 허가 6. 붉은색 우산 사용 7. 오야카타 칭호 허가. 이상 7가지는 모두 아시카가 쇼군 일가 및 관령에게만 허가되던 특권으로, 쇼군가의 요청에 2차례나 상경한 겐신에게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하사한 것이다. 참고로 이때 요시테루로부터 이름의 테루(輝)를 하사받아 우에스기 테루토라(上杉輝虎)로 개명했다.
[25]
그러나 1달에 1번씩 아팠다는 병을 제대로 설명하지는 못하는데, 고대부터 술을 많이 마신다=숙취로 고생한다. 이러한 귀결은 당연한 것이었다. "술을 좋아한다"라는 기록이 버젓이 남아있는데 숙취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복통이라고 한다? 음주가무를 즐겨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기록에도 연회 다음날 숙취로 인해 정무를 못 봤다는 기록이 있다. 만약 숙취가 다이묘로써 수치였다면 숨겼을 테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음주로 인한 숙취를 숨길 이유가 없다.
[26]
하지만
이이 나오토라도 여성인 것을 숨기기 위해 남성으로 행세했다고 하므로 단언하기는 어렵다.
[27]
우에스기 겐신 여성설 외에도
오다 노부나가를 죽인 것은
아케치 미츠히데가 아니었다는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28]
더 정확하게는 ‘아내를 두지 않는다’는 뉘앙스가 강해서, 꼭
성관계 자체를 부정하진 않는다고도 한다.
[29]
타케다 신겐과
코사카 마사노부,
오다 노부나가와
마에다 토시이에의 경우와 같은 증거나 증언이 없다. 코노에 사키히사가 겐신이 미소년을 좋아한단 말을 했다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카더라 통신을 입에 담은 것뿐이다.
[30]
마음의 상처가 병이 되어 죽었다고도, 자살했다고도 한다.
[31]
즉 훗날의
나오에 카네츠구의 아내인 오센의 언니.
[32]
시나노 북부에서만 10년이 훨씬 넘는 세월을 허비했다. 그와중에 오다는 상락을 했고
미카와의 도쿠가와는 큰 세력으로 성장했다. 우에스기와 타케다는 결국 서로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33]
다만 이마가와와 동맹을 맺은 시점에서 이미 상경은 전략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오다 세력을 침공하여 상경을 노리던 이미가와의 이해와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기 때문. 독자적인 상락이 아니라 이마가와를 한 몫 거들어서 이마가와가 오다를 이기게 해 주었더라도 타케다는 아직 미노 방면으로 진격하는 길목에 있는 시나노를 제대로 정벌하지 못하고 궁벽한 카이 1국을 차지하고 있는 세력이었고 이마가와는 스루가, 토토우미, 미카와 3국을 차지하고 오와리를 손에넣고 미노를 노리는 상황이었을 것이니 주도권은 이마가와가 챙겼을 것이다. 결국 이마가와를 먼저 쳐서 이길 생각이 없었던 이상 큰 의미가 없는 가정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마가와는 군소 세력들이 난립하던 시나노 지역에 비해 훨씬 공략하기 어려운 세력이었다. 실제로 타케다가 뒤늦게 상경쪽으로 생각을 돌렸을 시점에서 이미 이마가와의 옛 영지들은 친오다 세력이자 타케다의 적성 세력이었던 도쿠가와가 털어먹다시피한 시점이었기 때문에 상경을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에는 오다 세력보다 지리적으로 교토에서 멀리 떨어져있었던 한계점이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4]
신겐은 군세를 일부 나눠 아키야마 노부토모에게 주어 노부나가 영토의 히가시 미노에, 주력군은 신겐 본인이 가신인 바바 노부하루와 함께 아호구즈레 고개로부터 도토미로 공격, 야마가타 마사카게가 이끄는 5천 병력은 미카와 공격을 감행했다. 당시 오다 가문은 아사쿠라-아사이 동맹군, 아시카가 쇼군과 그 세력, 혼간지 겐뇨에 의해 촉발된 잇코, 종도 대처에 분산되어 있던 상황에서 타케다의 대대적인 침공에 맞서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오다 가문은 타케다 가문을 능가하는 역량을 보유했으면서도 신겐의 적절한 찌르기 전략에 타케다를 막는 핵심 방벽인 도쿠가와에게 제대로 원군을 보내주지도 못했으며, 심지어 도쿠가와는 그런 상황에서 요격을 선택해 대패했다.
[35]
여러 사료에서 술잔을 보물단지처럼 아꼈다는 기록이 있다. 사세구(辞世の句)에도 술잔을 언급할 정도니 어지간한 애주가로 추측할 수 있다.
[36]
당시에는 내륙 지방에서 소금을 얻을 방법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신겐에게는 치명적이었다.
[37]
실제 야마나시 지방의 오랜 사찰 중에는 비상시에 쓰려고 속에 암염을 넣어서 건축한 담장이 발견되는 곳이 있다.
[38]
소금봉쇄의 태도(塩留めの太刀)라고 하는데, 현재 도쿄 국립박물관에 소장중이다. 다케다 가문에서는 라이이치몬(來一門)의 라이쿠니유키(来国行)가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후대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비젠이치몬지(備前一文字) 일파의 도검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39]
이 때의 술은 사케다.
[40]
NHK 사극
풍림화산을 통해 알려진 겐신의 어록. 성벽의 한 쪽에 새겨져있다.
[41]
간토 간레이로 임명된 겐신이 명목상 통솔할 수 있는 당시 간토 지방은 이즈, 사가미, 무사시, 카즈사, 시모우사, 아와, 코즈케, 시모츠케, 히타치, 카이의 10개 구니를 모두 포함한 구역이다. 한두 구니의 슈고 다이묘와는 격이 다르다.
[42]
그러나 반대로 보자면 이런 결속력 낮은 콩가루 가신단을 거느리고서도 손해를 보면서까지 대의명분에 입각한 정의와 약속을 지켰다는 것은 그야말로 대단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과대평가는커녕 오히려 과소평가를 우려해야 될지도?
[43]
그나마 신겐이 겐신에 비해 반란 문제로 골머리를 덜 썩어서 신겐이 더 낫지 않냐는 의견이 있지만 신겐이 반란 문제를 덜 겪은 이유는 이미 신겐의 부친인 타케다 노부토라가 가이를 통일하면서 반란을 일으킬 만한 주요 호족들과 토착 사무라이들을 먼저 밞아놓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대가로 타케다 노부토라는 가이 내에서 인심을 상당히 잃었고 결국 이는 아들인 타케다 신겐에게 다이묘직을 축출당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