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02 21:45:21

카키자키 카게이에

柿崎景家
(1513 ~ 1575)

1. 소개2. 대중 매체에서

1. 소개

일본 전국시대의 인물.

우에스기 사천왕 중 1인으로, 에치고 호족이자 카키자키 성주 카키자키 토시이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카키자키 성과 사루게 성을 보유한 에치고의 주요 호족 중 하나로, 카스가야마 성 수비대장을 맡으며 나가오 다메카게와 우에스기 겐신 부자를 대대로 섬겼다. 겐신이 그를 두고 "에치고에서 그를 당해 낼 장수는 없다." 라고 말했을 정도로 그의 용맹에 있어서는 따를 자가 없는 맹장이었다.

1563년 오다와라의 호죠씨 공략에 참전한다. 다음 해 1564년엔 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에 선봉으로 출진하여 하치만바라에 본진을 두고 있던 다케다 신겐을 공격하여 신겐의 간담을 서늘케 한다. 이러한 공으로 우에스기 겐신의 신임이 두터워 주요 직책을 역임하였다. 1570년 호죠 우지야스와 동맹을 맺을 땐 차남 하루이에를 오다와라성에 인질로 보내기도 하였다.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1574년에 병사하였다고 하는데, 그에 관련한 속설이 있으며 이게 반쯤 통설로 여겨진다고 한다. 이는 카게카츠공일대기(景勝公一代略記)의 기록에서 유래하는데, 이에 따르면 1575년 엣츄에 출진하였을 때, 적장 오다노부나가와 편지왕래를 해오다 겐신에게 발각되는 데 이것을 카게이에가 노부나가와 내통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판단한 겐신은 카게이에를 엣츄 미즈시마에서 주살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동시기의 기록에 이미 그 아들인 하루이에가 카키자키 가문의 당주라고 되어있는 점, 그 시점에는 아직 오다와 우에스기간에 교전상태가 아니었다는 점, 큰 신임을 받던 우에스기가 중신인 카게이에가 그 정도 이유로 주살되었겠냐는 점 등의 이유로 신빙성이 없다고 여겨진다고 한다.[1] 한편, 노부나가와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을 받은 사람은 카게이에가 아니고 하루이에이고 주살당한 사람 역시 하루이에라는 설이 있다. 주살 사건이 카게이에의 기록이 보이지 않는 시점과 비슷한 시기에 발생하여 후세에 이를 기록한 사람이 혼돈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추측에 불과하며 하루이에가 오타테의 난에서 전사했다는 등, 하루이에가 죽은 시기 마저도 확실하지가 않다.

재미있는 건 후에 겐신이 측간에서 볼 일을 보다 뇌출혈로 쓰러지는데, 측간에서 겐신은 원한에 가득찬 카게이에의 망령을 보았다는 설이 있다.

앞서 보았듯 그의 가문은 에치고 내에서도 끗발 좀 날리는 국인으로, 여러 교양이나 의례에 대한 지식이 풍부해 외교 업무 등도 관장했다고 한다.

2. 대중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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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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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의 야망 창조

신장의 야망에서는 우에스기가의 무력 에이스. 천도때까지는 답이 없는 지력이었으나 창조에서는 무려 70대까지 올라서 더욱 쓸만해졌다.

태합입지전에선 우에스기 가문의 맹장. 우에스기가문에서 통솔은 겐신, 우사미 사다미츠에 이어 3위지만(우사미 사다미츠는 기본 통솔은 85라 오히려 88인 카게이에가 기본 통솔 자체는 더 높지만 사다미츠는 군사 칭호때문에 통솔이 91이다) 정치, 지모쪽으론 참담하다.

센고쿠히메의 팬픽 성장기(聖将記)에서는 초반부에 등장. 주인공 아마기 소우마와 대립하게 되는, 하지만 본인은 그럴 의욕이 없던 나가오 카게토라(우에스기 겐신)을 옹립하기 위해 멋대로 출진하지만 소우마의 수공에 당해 그대로 전사한다. 작중에서 계속 띄워주고 했던 것과 별개로 작중 취급은 소우마가 천재 군사로서 이름을 날리게 해주는 중간 보스 취급. 눈물난다.

아키야마 아키코의 만화 전국전술전기 LOBOS에서 카키자키의 죽음을 다룬다. 여기서는 오다와의 석연치않은 행적을 이용해 삿사 나리마사가 주인공 이치조에게 카지자키의 암살을 의뢰한다. 카지자키의 암살이후 우에스기는 험난한 내부단속으로 오다를 견제하지 못하게 된다.

[1] 실제로 2번이나 모반을 한 혼죠 시게나가는 2번다 겐신에게 용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