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서(宋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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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권 ~ 40권은 志에 해당.
송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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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본명이 저유지(褚裕之)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숙도(叔度)로 표기되었다.
(3) 본명이 장유(張裕)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무도(茂度)로 표기되었다.
(4) 본명이 왕유지(王裕之)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홍(敬弘)으로 표기되었다.
(5) 본명이 왕욱(王彧)으로 유욱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문(景文)으로 표기되었다.||<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3f51ba><tablebgcolor=#3f51ba> ||
<colcolor=#fff> 崔道固
최도고 |
|
<colbgcolor=#dc143c> 작호 | 임치현자(臨淄縣子) |
성 | 최(崔) |
이름 | 도고(道固) |
자 | 계견(季堅) |
부친 | 최집(崔輯) |
조부 | 최경(崔瓊) |
본관 | 청하군(淸河郡) 동무성현(東武城縣) |
국적 | 유송(劉宋) → 북위(北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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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북조시대의 관료로 자는 계견(季堅).2. 생애
청하군(淸河郡) 동무성현(東武城縣)을 본관으로 하는 청하 최씨 출신이다. 최도고는 태산태수(泰山太守)를 지낸 최집(崔輯)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서출로 태어났기 때문에 적출로 태어난 최유지(崔攸之)와 최목련(崔目連)이 최도고를 경멸했다. 최집은 최유지와 최목련을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이 아이의 용모와 식견이라면 혹여 우리 집안을 일으킬 수 있을텐데, 너희들은 어째서 이 아이를 경멸하느냐?
하지만 최유지와 최목련은 최도고를 점점 경멸해서 이들 사이에 우애가 전혀 없었다.
448년, 유송의 무릉왕 유준이 서연2주자사(徐兗二州刺史)로 부임한 뒤 다른 주의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벽소하여 종사(從事)로 삼았다. 최집은 이에 최도고에게 사비를 마련하여 서주로 보냈으며, 팽성에 도착한 최도고는 유준의 종사가 되었다. 최도고는 용모가 아름다웠고 행동거지가 고상한데다 궁술과 기마술에 뛰어났고 무예를 좋아해서 유준은 점점 최도고를 칭찬했다.
이후 451년, 유흥조가 청주자사(靑州刺史)로 부임하면서 팽성을 지날 때 유준과 만났는데, 유준은 유흥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최도고는 이런 자태를 지녔는데도 어째서 늙어서까지 미천한 선비 노릇을 한다는 말이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최도고가 서출이라는 이유로 더더욱 최도고를 능멸하니 개탄스러운 일이오.
유준의 말을 들은 유흥조는 청주로 부임한 뒤 최도고를 주부(主簿)로 삼았고 치중(治中)으로 전임시켰다.
453년, 문제 유의륭의 태자 유소가 문제를 시해하고 제위에 올랐으나 무릉왕 유준이 거병하여 유소를 토벌하니 이가 제4대 황제인 효무제였다. 효무제로부터 재주를 인정받은 최도고는 태자둔기교위(太子屯騎校尉), 좌군장군(左軍將軍)을 역임하였다.
459년, 제북해2군태수로 전출되었다. 이때 초공(焦恭)이라는 백성이 무덤을 파헤쳐서 옥으로 만든 갑옷을 얻었는데, 최도고는 사실을 조사한 뒤 갑옷을 조정에 바치고 초공을 구류하였다. 이후 입조하여 북중랑장 신안왕(新安王) 유자란의 자의참군(諮議參軍), 좌군장군 영가왕(永嘉王) 유자인(劉子仁)의 사마(司馬)를 역임하였다.
머지 않아, 최도고는 청주로 파견되어 인재를 초빙하였다. 이때 장사(長史) 이하의 관원들이 최도고를 찾아왔는데, 최도고의 형들이 생모를 핍박하여 손님에게 술과 고기를 대접하게 했다. 최도고는 몸을 일으켜 넘겨받았고 손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집에 일손이 없어서 노모께서 직접 나서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손님들은 모두 최도고의 형이 벌인 짓임을 알고 일어나서 최도고의 모친에게 감사를 표했다. 최도고의 어머니는 최도고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미천해서 귀빈에게 보답하지 못하니 네가 답례하는 것이 옳다.
이때 손님들은 최도고 모자를 찬탄해 마지않았고 최도고의 형들을 경멸하였다.
465년, 영삭장군(寧朔將軍), 기주자사(冀州刺史)로 전출되고 역성(歷城)에 진수하였다. 이후 전폐제 유자업이 수적지의 손에 살해당하고 상동왕 유욱이 제위에 오르니 이가 제6대 황제인 명제였다.
466년, 보국장군(輔國將軍)으로 승진했다가 다시 정로장군(征虜將軍)으로 승진했다. 당시 명제의 즉위 이후 유송에서는 진안왕 유자훈을 추대하려는 반란이 벌어졌는데, 여기에 설안도가 가담하였다. 그리고 유자훈의 반란이 진압된 뒤 설안도, 소혜개, 유원호, 필중경, 은부(殷孚), 상진기 등은 건강으로 사자를 보내 항복을 청했다. 명제는 장영과 심유지에게 50,000명의 군사들을 주어 설안도를 맞이하게 했다. 설안도는 의구심이 들어서 북위에 투항했고 조정에서는 최도고를 서주자사로 파견했다. 하지만 최도고는 명제의 명령을 받지 않았고 아들인 최경휘(崔景微)와 주부 최영월(崔靈越)을 설안도에게 보냈다. 최도고는 유송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하여 성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때 북위로 사자를 보냈는데, 북위에서는 최도고를 안남장군(安南將軍), 남기주자사(南冀州刺史), 청하공(淸河公)으로 삼았다.
사방이 평정된 뒤 명제는 최도고에게 사자를 보내 최도고를 위로했고 최도고는 명제에게 항복할 뜻을 밝혔다. 이때 설안도가 북위를 끌어들였는데, 최도고는 심문수와 함께 북위군을 막았다가 포위되었다. 북위군은 계속 성을 공격했지만 최도고는 이를 격퇴했다.
467년, 도독기청연유병5주제군사(都督冀青兗幽并五州諸軍事), 전장군(前將軍), 기주자사가 되었고 다시 평북장군(平北將軍)으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역성이 함락된 뒤 최도고는 상건(桑乾)으로 압송되었고 평제군(平齊郡)이 설치된 뒤 그곳의 태수가 되었다. 최도고는 임치현자(臨淄縣子)라는 작위를 받고 영삭장군이 더해졌다. 이후 평제군의 치소를 평성으로부터 남서쪽으로 200여 리 떨어진 곳으로 옮겼는데, 흉작과 기근이 일어나서 최도고가 몇 년 동안 백성들을 위무했는데도 불구하고 원망의 목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최도고는 이후 효문제 연흥(延興) 연간[1]에 죽었다.
3. 여담
최도고는 북위로 압송된 뒤 설안도, 필중경과 같은 객사에 머물렀다. 세 사람은 같은 동료였지만 설안도는 최도고에게 냉담했고 필중경은 최도고에게 친절했다. 최도고는 이때 유휴빈과 방법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옛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동족이 아니라면 그 마음도 틀림없이 다르다'고 했는데 정말로 헛된 말이 아니외다. 설안도는 사람을 냉담하게 보는데, 필중경보다 못하오.
[1]
471년 ~ 47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