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30 02:06:49

단지(동진)

송서(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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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권 「무제기(武帝紀)」 4권 「소제기(少帝紀)」 5권 「문제기(文帝紀)」
유유(劉裕) 유의부 유의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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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후폐제기(後廢帝紀)」 10권 「순제기(順帝紀)」
유욱(劉昱) 유준(劉準)
※ 11권 ~ 40권은 志에 해당. 송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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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3f51ba> 41권 「후비전(后妃傳)」 ||
조안종 · 소문수 · 장애친 · 장궐 · 사마무영 · 호도안 · 원제규 · 노혜남 · 왕헌원 · 하영완 · 심용희 · 왕정풍 · 진묘등 · 강간규 · 진법용 · 사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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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권 「무삼왕전(武三王傳)」
유의진 · 유의공 · 유의계
62권 「양흔등전(羊欣等傳)」 63권 「왕화등전(王華等傳)」 64권 「정선지등전(鄭鮮之等傳)」
양흔 · 장부 · 왕미 왕화 · 왕담수 · 은경인 · 심연지 정선지 · 배송지 · 하승천
65권 「길한등전(吉翰等傳)」 66권 「왕경홍등전(王敬弘等傳)」 67권 「사령운전(謝靈運傳)」
길한 · 유도산 · 두기 · 신념 왕경홍(4) · 하상지 사령운
68권 「무이왕전(武二王傳)」
유의강 · 유의선
69권 「유담등전(劉湛等傳)」 70권 「원숙전(袁淑傳)」 71권 「서담지등전(徐湛之等傳)」
유담 · 범엽 원숙 서담지 · 강담 · 왕승작
72권 「문구왕전(文九王傳)」
유삭 · 유굉 · 유창 · 유휴인 · 유휴우 · 유휴업 · 유휴천 · 유이부 · 유휴약
73권 「안연지전(顏延之傳)」 74권 「장질등전(臧質等傳)」 75권 「왕승달등전(王僧達等傳)」
안연지 장질 · 노상 · 심유지 왕승달 · 안준
76권 「주수지등전(朱脩之等傳)」 77권 「유원경등전(柳元景等傳)」 78권 「소사화등전(蕭思話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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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권 「문오왕전(文五王傳)」
유탄 · 유위 · 유혼 · 유휴무 · 유휴범
80권 「효무십사왕전(孝武十四王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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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권 「유수지등전(劉秀之等傳)」 82권 「주랑등전(周朗等傳)」 83권 「종월등전(宗越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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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권 「소혜개등전(蕭惠開等傳)」 88권 「설안도등전(薛安都等傳)」 89권 「원찬전(袁粲傳)」
소혜개 · 은염 설안도 · 심문수 · 최도고 원찬
90권 「명사왕전(明四王傳)」
유우 · 유홰 · 유숭 · 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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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권 「은일전(隱逸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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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로 토욕혼
97권 「이만전(夷蠻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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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권 「저호전(氐胡傳)」 99권 「이흉전(二凶傳)」
구지 · 저거몽손 유소(劉劭) · 유준(劉濬)
100권 「자서전(自序傳)」
심약
(1) 본명이 사유(謝裕)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인(景仁)으로 표기되었다.
(2)본명이 저유지(褚裕之)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숙도(叔度)로 표기되었다.
(3) 본명이 장유(張裕)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무도(茂度)로 표기되었다.
(4) 본명이 왕유지(王裕之)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홍(敬弘)으로 표기되었다.
(5) 본명이 왕욱(王彧)으로 유욱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문(景文)으로 표기되었다.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3f51ba><tablebgcolor=#3f51ba> ||
}}}}}} ||
<colbgcolor=#800080><colcolor=#fff> 서창위후(西昌威侯)
檀祗 | 단지
시호 위(威)
작위 서창현후(西昌縣侯)
단(檀)
이름 지(祗)
공숙(恭叔)
출신 고평군(高平郡) 금향현(金鄕縣)
생몰 368년 ~ 418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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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 말의 장수로 자는 공숙(恭叔)이다. 단소의 동생이자 단도제의 형이다.

2. 생애

고평군(高平郡) 금향현(金鄕縣) 출신으로, 단지의 집안은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잃어서 형제들이 모두 당숙인 단빙지 밑에서 자랐다. 단지는 젊은 시절에 보국장군(輔國將軍) 손무종의 참군을 지냈고 손무종이 손은을 정벌할 때 공을 세웠으며, 다시 용양장군(龍驤將軍) 왕탄의 참군이 되었다.

404년, 건무장군 유유가 환현을 토벌하고자 거병할 때 단지는 단소, 단도제와 함께 유유에게 종군했고 유유의 참군사가 되었다. 나락(羅落)에서 단빙지가 전사하자, 단지는 단빙지 휘하의 군대를 계속 지휘했다. 환현이 평정된 뒤에는 진군부 참군이 되고 진무장군(振武將軍)이 더해졌으며, 유도규에게 소속되어 환현을 추격하며 연전연승했다.

405년, 단지는 유도규의 명으로 운수(溳水)와 면수(沔水) 일대로 달아난 환도아(桓道兒), 장정(張靖), 부사(苻嗣) 등을 토벌하여 평정했으며, 용양장군, 진군(秦郡) 태수, 북진류국(北陳留國) 내사로 제수되었다가 다시 영삭장군(寧朔將軍), 경릉군(竟陵郡) 태수가 되었으나 받지 않았다. 또한 장사(長沙)에서 환량(桓亮)을 물리치고 상동(湘東)에서 부굉을 물리쳤다. 무릉군(武陵郡) 내사 유열(庾悅)이 병에 걸리자, 단지는 유도규의 명으로 유열을 대신하여 무릉국 내사가 되었다. 이때 영삭장군이 더해지고 서창현후(西昌縣侯)에 봉해져 식읍 1000호를 받았다. 409년, 입조하여 중서시랑(中書侍郞)이 되었다.

410년, 노순이 건강으로 침공하자, 보국장군이 더해져 서명문(西明門) 바깥에 주둔했다. 노순이 퇴각하자, 단지는 군대를 이끌고 강릉의 원군으로 출병했으나 도중에 병에 걸려 그만두었다. 412년, 우위장군(右衛將軍)으로 옮기고 보국장군, 선성군(宣城郡) 내사로 전출되었으며, 다시 도독강북회남제군사(都督江北淮南諸郡事), 청주(靑州) 자사, 광릉상(廣陵相)이 되고 정로장군(征虜將軍)으로 진호되었다.

414년, 사마국번(司馬國璠) 형제가 북서주(北徐州) 경계에서 수백 명의 무리를 모아 몰래 회수를 건너고 밤에 광릉을 습격했다. 단지는 이때 정강이가 화살에 맞았고 물러나서 부하들에게 오경을 알리는 북을 치게 했다. 단지의 부하들이 북을 치니 사마국번 형제는 새벽이 된 줄 알고 물러나 뿔뿔이 흩어졌고, 단지는 이 틈을 노려 백여 명을 죽였으나 이때의 일로 인해 건무장군으로 강등되었다. 415년, 우장군(右將軍)으로 진호되었다.

416년, 유유가 후진을 정벌할 때 사마씨[1]가 도중(涂中)으로 침공하여 진군(秦郡) 태수 유기(劉基)가 구원을 청하자, 단지는 군대를 나누어 이를 토벌했고 곧바로 사마씨를 참수했다.

418년, 유유가 송공(宋公)으로 책봉된 뒤 단지는 송국(宋國) 영군장군(領軍將軍)이 되었고 산기상시(散騎常侍)가 더해졌다. 단지는 유유의 공신이었으나 성품이 거만하고 방종하여 밖에서 방자하게 즐겼고 내부의 승진을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결국 병을 얻게 되자 단지는 치료를 포기했고, 그해에 광릉에서 사망했다. 사후 위(威)라는 시호를 받았다.


[1] 이름은 불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