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1 19:08:24

알렉스 퍼거슨/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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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이스트 스털링셔 FC, 세인트 미렌 FC 감독3. 애버딘 FC 감독4.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5.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감독6. 평가
6.1. 전술적 능력6.2. 선수단 장악 및 관리 능력6.3. 유망주 육성 및 선수를 보는 안목6.4. 동기부여 능력6.5.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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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렉스 퍼거슨의 지도자 경력을 정리한 문서.

2. 이스트 스털링셔 FC, 세인트 미렌 FC 감독

국내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부임 이전 퍼거슨의 커리어는 그렇게 잘 알려진 편은 아니다. 퍼거슨은 1974년에 감독 생활을 시작했으나 국내에 해외축구가 널리 퍼진 건 2000년대 중반 즈음이기 때문이다. 해외축구의 선구자들로 대접받는 이들도 빨라야 1990년대 초 즈음에 입문한 경우가 많으니 맨유 이전 퍼거슨의 경력이 유명하지 않은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퍼거슨의 진정한 진가는 맨유 부임 이전에 드러났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퍼거슨은 맨유 이전의 커리어 또한 엄청난 감독이다. 사실 맨유 부임 이전 경력만으로도 퍼거슨은 이미 명장으로 대접받기 충분했고, 또 이미 그렇게 대접받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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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거슨은 1974년 6월 27일, 32세의 젊은 나이에 스코틀랜드 3부 리그 이스트 스털링셔 FC에서 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정규 계약이 아닌 주당 40파운드를 받는 파트타임 계약이었다. 당시 이스트 스털링셔는 파산 직전에 몰려 팀 상황이 엉망이었다. 기존 선수들을 전부 팔아버려 시즌 시작이 2주 전인데 스쿼드에 선수가 8명밖에 없었고, 심지어 그 중에는 골키퍼가 1명도 없었다. 막 선수에서 은퇴해 술집을 운영하고 있던 32살의 퍼거슨을 파트타임 감독으로 앉힌 것도 돈이 없어서였다.
저는 구단의 회장한테 가서 말했습니다. "회장님, 아시다시피 축구 경기를 하려면 11명이 필요합니다." 회장은 환상적인 사람이었어요. 그는 상황이 나쁠수록 더 줄담배를 피웠거든요.
알렉스 퍼거슨, 출처
신인 감독 퍼거슨은 이 팀이 정상적으로 시즌을 치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우선 100파운드에 그의 감독 커리어 첫 영입으로 골키퍼를 영입했고, 2주 사이에 2000파운드(한화 약 330만 원 가량)를 써 5명의 선수를 영입했다. 그리고 자신의 카리스마와 엄격한 규율로 선수단을 장악하고 엉망이었던 구단을 뜯어고쳤다. 당시 퍼거슨이 얼마나 매섭게 나왔는지, 이스트 스털링셔의 공격수였던 바비 맥컬리는 훗날 "그 전까지 누구도 두려워해본 적이 없었는데 퍼거슨은 처음부터 무서운 놈이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도 훈련해야 했고, 그는 사납고 팔을 휘두르고 이것저것 걷어차는 사람이었다."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심지어 퍼거슨은 자신도 축구화를 신고 자신이 선수들에게 요구하는 높은 강도의 훈련을 함께 소화했다.

동기부여 방법도 다양했다. 퍼거슨은 관중석에 빈 자리가 선수들의 의욕을 떨어트린다고 생각하고 직접 트럭에 확성기를 달고 경기를 홍보하고 다녔다.[1] 폴커크와의 경기를 앞두고 마을에 발행되는 유일한 신문이었던 '폴커크 헤럴드'를 들먹이며 지역 언론이 폴커크만 편애한다고 연설했고 경기에서 2:0으로 이긴 일화도 있다. 시즌을 치를 수 있을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이었던 이스트 스털링셔의 상황이 급격히 개선되며 좋은 성적을 내자, 초짜 감독의 재능은 다른 구단들의 관심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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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32살의 나이로 세인트 미렌에 부임하다
이스트 스털링셔 부임 고작 4개월 뒤인 1974년 10월, 같은 3부 리그의 세인트 미렌 FC가 퍼거슨에게 정식 감독직을 제의했다. 퍼거슨은 잠시 갈등했으나 그의 은사 조크 스타인의 권유로 세인트 미렌 부임을 결정한다.[2] 세인트 미렌의 팀 규모는 이스트 스털링셔보다 컸지만, 성적은 여러 시즌 동안 3부 리그 중위권을 오가던 팀이었다. 부임 당시에도 퍼거슨이 이끌던 이스트 스털링셔보다 순위가 낮았다. 게다가 퍼거슨은 시즌 중인 10월에 중도 부임했고, 선수들이 32살의 어린 감독을 제대로 대접할 리가 없었다. 부임 첫날 퍼거슨의 세인트 미렌 감독 선임 소식을 알리는 신문 기사에 팀 단체 사진이 실렸는데, 퍼거슨이 발견한 것은 주장 이안 리드가 자신 뒤에서 손가락 욕[3]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퍼거슨은 그 즉시 리드를 불러 팀에 성숙하지 않은 인간의 자리는 없으니 넌 앞으로 뛰지 못할 것이며, 원하면 팀을 떠나라고 통보했다.
감독을 시작했을 때 내가 가졌던 자산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었다. 나는 학생 시절에 팀을 선택할 때조차도 내 결정에 대해 불안감을 갖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선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런 나에게 선수 시절 나를 지도한 감독 중 한 명인 윌리 커닝엄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거 알아? 넌 진짜 밥맛 없는 놈이다."
퍼거슨 본인의 자서전 '나의 이야기' 49p
이후 40년의 세월 동안 퍼거슨이 명장으로 군림하도록 만든 과감함과 선수단 장악 능력, 선수를 보는 날카로운 눈 등 감독직에 대한 천부적 재능은 감독 생활 초기부터 두드러졌다. 시즌 도중에 부임했음에도 퍼거슨은 시작과 동시에 자신에게 반기를 든 주장 리드를 내쫓았고, 팀에 엄격한 규율을 적용시켰다. 특히 선수들이 게으르거나 을 마시면 곧바로 엄벌이 날아왔다. 거기에 빌리 스타크[4], 피터 위어[5], 프랭크 맥가비[6], 토니 피츠패트릭 등 팀에서 주목받지 못하던 어린 선수들을 발굴해 1군으로 끌어왔다. 막 1군에 올라온 선수들의 열정과 그들에게 자리를 위협받는 기존 선수들의 긴장은 팀의 분위기를 바꾸었다.

가장 파격적이었던 것은 피츠패트릭의 주장 임명이었다. 유소년 팀에서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은 17살의 피츠패트릭을 눈여겨 본 퍼거슨은 그를 주전으로 쓰더니 돌연 주장 완장을 채워버렸다.[7] 이는 누구의 자리도 안전하지 않으며 퍼거슨 자신이 원하면 그 어떤 파격적인 결정도 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퍼거슨이 피츠패트릭에게서 무엇을 봤는지는 몰라도, 그의 사람 보는 눈은 실로 날카로웠다. 피츠패트릭은 주장직뿐만 아니라 훗날 세인트 미렌의 감독, 심지어는 CEO까지 역임하게 될 타고난 리더였다. 2022년, CEO직에서 은퇴하는 피츠패트릭를 축하해주는 퍼거슨[8] 피츠패트릭은 주장직을 훌륭하게 수행하며 퍼거슨의 라커룸 장악을 도왔다.

기존 주장의 추방, 32살의 어린 감독에 대한 반항이 예상된 상황에서의 엄격한 규율 적용, 유소년 선수들의 잇따른 1군 콜업, 17살 선수의 주장 임명 등 도박수들로 보였던 파격적 선택들이 연달아 적중했다. 세인트 미렌은 퍼거슨 시절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팀이 되어갔고, 결국 퍼거슨은 팀을 반등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순위가 몇 개 올라가거나 경기력이 좀 좋아지는 수준의 반등이 아니었다. 부임 당시 3부 리그 하위권이었던 세인트 미렌을 퍼거슨은 중도 부임 시즌인 1974-75 시즌에 2부 리그로 곧장 승격시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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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커룸에서 세인트 미렌의 1부 리그 승격을 축하하고 있는 퍼거슨
이어진 1975-76 시즌, 세인트 미렌은 2부 리그에서도 곧바로 돌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퍼거슨이 발굴한 어린 선수들이 만개했고, 32세의 젊은 감독에게 의문을 가졌던 선수들도 중위권을 오가던 팀을 곧장 승격시키자 퍼거슨을 믿고 따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인트 미렌은 승격 시즌에 중상위권에 해당하는 리그 6위의 성적을 받아들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세인트 미렌은 다음 시즌인 1976-77 시즌에 2부 리그를 우승해 버리며 1부 리그로 승격하였다. 3부 리그 중위권이었던 팀이 고작 3년 만에 1부 리그로 승격한 것이다. 당시 세인트 미렌의 평균 연령은 19세, 주장 피츠패트릭은 20세였으며 감독 퍼거슨은 35세였다.

퍼거슨 감독 커리어 첫 1부 리그 시즌이었던 1976-77 시즌, 세인트 미렌은 10개 팀 중 8위를 기록하며 강등당하지 않고 1부 리그에 잔류하는데 성공했다. 이는 또 다시 예상을 뒤집은 이변이었다. 하지만 퍼거슨은 시즌 직후 클럽과의 마찰 과정에서의 복잡한 문제[9]로 세인트 미렌에서 경질되었고, 몇 개월 뒤 애버딘 FC 감독 부임을 결정하였다. 이는 퍼거슨의 감독 경력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경질이라는 기록으로 남아있다.[10]
당시 주장이었던 피츠패트릭이 2022년 회상한 퍼거슨과 세인트 미렌

3. 애버딘 FC 감독

애버딘 FC는 나름대로 매년 리그에서 4위권 정도에 위치하는 스코틀랜드의 유명 구단이기는 했으나[11] 1955년 우승이 처음이자 마지막 리그 우승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스코티시 프리미어십은 그때도 레인저스 FC 셀틱 FC의 양강 체제로 두 팀이 우승컵을 나눠갖는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국면은 10~20년도 아니고 1890년 창설 이래로 쭉 지속되어 왔다. 퍼거슨은 늘상 올드 펌이 다 해먹던 스코틀랜드 축구판에 혁명과도 같은 강세를 보여줬기에 아직까지도 스코틀랜드 축구팬들에게 회자된다.[12] 단적으로 퍼거슨의 애버딘 이후 스코티시 프리미어십에서 셀틱과 레인저스 이외의 팀이 우승한 적은 없다. 여기에 유럽 대항전 성적까지 더해지며 퍼거슨이 가장 위대했던 시절로 애버딘 시절을 꼽는 팬들도 있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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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미렌 FC에서 3년 만에 3부 리그에서 1부 리그 승격이라는 업적을 이뤄낸 퍼거슨은 1978년 애버딘의 신임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위에 언급된 바와 같이 지금과 마찬가지로 스코티시 프리미어십은 셀틱, 레인저스와 나머지 팀들 간의 격차가 너무 컸다. 실력뿐만 아니라 예산과 시설, 멘탈리티 등 모든 면에서 그랬다. 애버딘의 사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애버딘에는 트레이닝 시설이 없었으며, 선수들은 오전에는 동네 공원, 오후에는 주차장 또는 해변에서 훈련을 했다. 체력 훈련은 마을의 언덕과 골프장 주변을 달리는 것이었다.[13] 어차피 리그 우승은 셀틱이나 레인저스일 테니 선수들도, 팬들도 강등만 당하지 않으면 상관없다는 마인드였다고 한다. 후일 퍼거슨은 애버딘 지역 사람들 자체가 특유의 굉장히 너그러운 촌 사람들이기도 했고, 양강 체제가 너무 뿌리깊어 열등감을 느끼다 못해 다들 포기한 분위기였다고 회상했다.

퍼거슨은 여전히 36세의 젊다 못해 어린 감독이었고, 당연히 퍼거슨과 비슷한 나이대의 선수들도 있었다. 이스트 스털링셔나 세인트 미렌은 부임 당시 3부 리그 팀이었지만 애버딘은 1부 리그 팀이었고, 퍼거슨은 라커룸 장악에 애를 써야 했다. 때문에 첫 시즌은 쉽지만은 않았다. 올드 펌의 양강을 무너트리길 꿈꿨던 퍼거슨은 라인을 올리고 강팀의 축구를 하고 싶어했지만, 이를 반대한 윌리 밀러, 조 하퍼를 비롯한 고참 선수들이 인터뷰에서 공개적으로 퍼거슨을 저격하며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렇게 1978-79 시즌, 애버딘은 리그에서는 4위를 기록했다. 컵 대회들은 스코티시컵은 준결승, 리그컵은 결승까지 가며 우승컵에 가까워지긴 했지만 이 시즌에 퍼거슨은 팀을 정비하고 자신에게 반항하는 선수들을 휘어잡으며 선수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데 집중해야 했다. 퍼거슨은 이를 위해 일부러 엄격한 규율을 적용시키거나, 하프타임에 과격한 행동을 하거나, 스코틀랜드 언론들이 글래스고에 연고지를 둔 셀틱과 레인저스에게만 호의적이라고 연설하며 지역감정까지 자극했다.[14] 결국 퍼거슨은 라커룸을 확실히 장악하기 시작했고 애버딘 선수들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

퍼거슨 부임 후 두 번째 시즌인 1979-80 시즌, 애버딘은 더 빠른 템포, 높은 라인을 가진 공격적인 축구를 구사하기 시작했다. 애버딘은 퍼거슨의 의도대로 강팀이 되었고 시즌 말까지 2위에 위치했다. 다만 리그 우승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애버딘은 4월까지 셀틱과 승점 7점 차로 2위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당시는 승리 시 승점이 2점이었기 때문에 이는 지금으로 치면 승점 10점 차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애버딘은 시즌 막판 연승을 질주했고, 결국 마지막 경기에서 5:0으로 승리하고 셀틱이 0:0 무승부를 거두며 극적인 역전으로 리그 우승 트로피를 차지하는데 성공한다. 올드 펌 이외의 구단이 스코틀랜드 1부 리그 우승을 한 것은 15년 만이었고, 애버딘이 25년 만에 들어올린 두 번째 리그 우승 트로피였다. 셀틱의 1/10도 안 되는 금액으로 수십 년간 이어진 올드 펌의 양강 체제를 무너뜨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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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첫 리그 우승을 알리는 종료 휘슬 직후[15]
한때 퍼거슨에게 반항했던 선수들도 올드 펌이라는 거대 양강에 맞서는 과정에서 하나로 뭉쳤고, 상상도 하기 어려웠던 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자 퍼거슨을 인정했다. 리그 우승 다음 날 새벽 2시, 부임 초기에 전술 문제로 퍼거슨과 부딪혔던 윌리 밀러에게 전화가 왔다. 퍼거슨이 전화를 받자 밀러와 그의 집에서 파티를 하던 선수들은 술에 취한 목소리로 웃으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금주령을 내린 퍼거슨을 대놓고 도발한 것이다. 퍼거슨은 선수들이 이제 자신에게 이런 장난을 칠 정도로 친밀해졌다는 생각에 내심 기분이 좋았지만, 겉으로는 내일 너네 다 벌금이라고 말했고 다음 날 그 선수들은 언덕을 달려야 했다고 한다.

다음 시즌이었던 1980-81 시즌은 팀에 부상 악재가 덮치며 무관에 그쳤지만, 그럼에도 레인저스를 밀어내고 리그 2위를 차지하며 애버딘은 완전한 강팀이 되었음을 증명했다. 이후 애버딘은 승승장구했고 1981-82 시즌부터 3년 연속 컵대회 우승을 차지하고 8시즌 간 3번의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등 스코틀랜드의 대표 강호로 자리잡았다. 셀틱과 레인저스의 양강은 무너졌고 이젠 퍼거슨의 애버딘과도 경쟁해야 했다. 이 시기가 스코틀랜드 리그의 양강 체제가 마지막으로 붕괴된 시기이자 마지막 황금기였다. 1985년 애버딘 이후 현재까지 셀틱과 레인저스 이외의 팀이 리그를 우승한 사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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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축제 분위기가 된 애버딘 시내에서 트로피를 들어올리다
퍼거슨 부임 당시 스코틀랜드 중상위권, 유럽 클럽 랭킹 100위권에 불과했던 애버딘은 고작 수년 만에 유럽 클럽 랭킹 10위권, 유러피언 컵[16] 8강 진출 등 유럽의 강호가 되기에 이른다. 급기야 1982-83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위너스컵[17]에서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FC 바이에른 뮌헨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레알 마드리드 CF를 꺾고 우승하며 이변을 일으켰다. 당시에도 바이에른 뮌헨과 레알 마드리드는 세계에서 가장 이름 높은 축구 클럽들이었고, 스코틀랜드의 시골 도시 애버딘은 환호하며 도시 전체가 축제 분위기가 됐다. 특히 레알 마드리드와의 결승전이 열리는 스웨덴 예테보리로 가기 위해 인구 15만 명의 도시에서 1만 2천 명이 비행기를 탔고, 500명이 배를 탔다. 당시 애버딘 공항 면세점에서는 3일 만에 한 달치 술이 팔려나갔다. 기사 그 다음 시즌에도 애버딘은 함부르크 SV를 꺾고 UEFA 슈퍼컵까지 우승했다. 이 두 개의 트로피가 현재까지도 유이한 애버딘의 유럽 대항전 우승 트로피이다. 이 업적으로 인해 퍼거슨은 젊은 명장으로 유럽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우리가 만난 것은 축구 팀이 아니었다. 그건 불굴의 투혼이었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당시 퍼거슨은 UEFA 클럽 랭킹 100위대의 클럽이었던 애버딘을 단 8년 만에 UEFA 클럽 랭킹 6위로 끌어올렸다.
(애버딘의 UEFA 클럽 랭킹)
1978년 - 106위 ← 애버딘 감독 부임
1979년 - 116위
1980년 - 97위
1981년 - 78위
1982년 - 45위
1983년 - 20위
1984년 - 16위
1985년 - 13위
1986년 - 6위 ← 이때를 끝으로 맨유 감독 부임
2023년 기준 UEFA 클럽 랭킹 116위는 헝가리 리그의 몰 비디, 106위는 토리노 FC이며 6위는 파리 생제르맹 FC이다. 100위권 클럽이 6위까지 올라가는 게 어떤 일인지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다.
정말 믿기 힘들었습니다. 무엇보다 당시 모든 스코틀랜드 시민들은 그를 믿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믿지 않았냐구요? 그가 사람일 거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국 내 수사국에 마법사라는 고소가 수십 건 들어왔고, 실제로 그를 체포해 조사하기도 했답니다.
애버딘 FC 박물관
파일:Alex Ferguson Statue_Aberdeen FC.jpg
애버딘의 홈 구장에 있는 퍼거슨의 동상[18]
이후 퍼거슨은 FC 바르셀로나, 레인저스, 아스날 FC, 토트넘 홋스퍼 FC[19] 등에서 구애를 받았다. 그러던 중 1986년 11월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의 구단주였던 마틴 에드워즈[20]의 권유를 받은 퍼거슨은 곧바로 맨유의 감독직을 맡기로 했다.

4.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1985년, 퍼거슨은 애버딘 감독직과 함께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수석 코치직도 수행하고 있었다. 웨일스와의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지역예선 경기에 스코틀랜드의 월드컵 플레이오프 진출이 달려있던 상황에서 조크 스타인 감독과 퍼거슨은 엄청나게 긴장했다.[21] 이 경기에서 비긴 스코틀랜드는 웨일스와 전적은 같았지만 골득실에서 앞서 간신히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지었다. 그런데 조크 스타인은 경기 종료 휫슬이 불리고 심장마비로 사망했고[22] 졸지에 퍼거슨은 갑작스레 스코틀랜드 대표팀 감독을 맡게 됐다.
조크 스타인과 알렉스 퍼거슨
퍼거슨으로서는 굉장히 당혹스러운 시기였다. 감독 생활 초기부터 자신의 정신적 지주와 같았던 사람[23]이자 당시 스코틀랜드 최고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리던 조크 스타인이 경기 도중 사망한 충격은 팀에게도, 퍼거슨 본인에게도 매우 컸다. 그 와중에 월드컵 본선 진출이 걸린 플레이오프를 곧 치러야 했고, 월드컵 개막도 고작 수 개월 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퍼거슨이 감독을 맡고 있던 애버딘은 시즌이 막 시작한 시점이었다. 매주 클럽 팀 경기를 하면서 동시에 혼란에 빠진 국가대표팀까지 수습하는 건 제 아무리 퍼거슨이라도 버거운 일이었다. 자신의 정신적 충격도, 팀의 혼란도 제대로 수습할 여유가 없었던 상황에서 플레이오프를 맞이한 퍼거슨은 스코틀랜드 대표팀을 이끌고 호주를 상대했다.[24] 이러한 혼란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는 홈에서 2:0 승, 원정에서 무승부 1점으로 월드컵 24강 본선에 진출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러나 악재는 계속되었다. 스타인 체제부터 대표팀에 소극적이었던 앨런 한센[25]이 갑자기 퍼거슨과의 관계 악화[26]를 이유로 월드컵 불참을 선언했고, 이어 리버풀의 전설이자 팀의 간판 스트라이커 케니 달글리시가 월드컵 직전 부상으로 아웃, 대표팀 은퇴를 선언하면서 스코틀랜드는 월드컵 직전에 거대한 전력 손실과 계획 수정이 불가피했다. 결국 본선에서 스코틀랜드는 서독, 덴마크, 우루과이와 한 조가 되었는데 서독과 덴마크에게 패하고 우루과이와 비겨 승점 1점 1무 2패 조 4위 월드컵 19위로 탈락했다. 물론 스코틀랜드는 24강 본선도 간신히 올라온 전력이었고, 모시던 은사의 갑작스런 사망과 충격, 클럽팀 감독 겸직, 짧았던 월드컵 준비 기간, 주요 선수 이탈 등 상황을 고려하면 참작의 여지가 있다. 일단 혼란스런 상황에서 당초 스코틀랜드가 목표하던 월드컵 본선까지는 보내놨다는 점은 성과였다.

퍼거슨은 월드컵이 끝난 1986년 6월 중순 스코틀랜드 대표팀 감독직에서 사임했다. 그 해 여름 퍼거슨은 애버딘 또한 떠날 거라는 징후를 보이면서 토트넘 홋스퍼 FC, 아스날 FC 등 잉글랜드 클럽으로의 이적설에 휩싸였다.[27] 그리고 1986년 11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의 오퍼를 받아들이며 스코틀랜드를 떠나게 된다.

5.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감독

파일:퍼기10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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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평가

모든 면에서 뒤떨어지는 능력이 없었던 만능 육각형 감독이었다. 보통 명장이라도 전술적 완성도가 높으면 선수단 장악력이 부족하고, 선수단 장악력이 좋으면 좋은 선수 영입 안목이 부족하고, 좋은 선수 영입 안목이 좋으면 유소년 성장에 약점을 보이는 식으로 장단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퍼거슨은 감독으로서 갖춰야 할 역량 중 어느 하나 부정적 평가를 받는 영역이 없었다. 또한 가진 능력의 범위 자체가 방대했다. 퍼거슨은 선수단을 이끄는 헤드코치로서 뿐만 아니라, 구단을 재건하고 주도하는 경영자로서도 정상급의 기량을 가진 감독이었다. 이는 맡았던 클럽팀에서 오점이 없는 커리어와 맞물려 퍼거슨에 대한 평가를 크게 높이는 요소 중 하나다.

6.1. 전술적 능력

유나이티드의 전술 마스터
UEFA가 역대 최고의 감독 10인을 선정하며 퍼거슨에게 붙힌 칭호
퍼거슨에게는 리누스 미헬스 토탈 풋볼, 아리고 사키 사키이즘, 펩 과르디올라 티키타카, 위르겐 클롭 게겐프레싱과 같은 본인의 시그니처 전술이 없었고 전술적 혁명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그러나 팀의 성공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퍼거슨이야말로 위대한 전술가였다. 퍼거슨의 최대의 장점은 변화에 대한 열린 사고와 과감함이었다. 1974년에 감독으로 데뷔해 2013년에 은퇴하기까지 퍼거슨의 전술은 일관되지 않았다. 시대에 따라, 팀이 처한 상황에 따라 전술 스타일을 계속해서 바꾸어 나갔다. 이길 수 있는 전술이라면 그 어떤 것도 가리지 않았고, 성공했던 전술이라도 시대가 변했다고 느끼면 버리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것은 퍼거슨이 매번 혼란스러운 상황의 팀을 맡으면서도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던 이유였고, 40년에 이르는 커리어 동안 도태되지 않고 계속해서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 중 하나였다. 퍼거슨을 명장으로 만든 건 전술적 혁명이나 한 가지 전술의 극대화가 아니라 무려 40년 동안 축구계의 전술 변화를 모조리 쫓아가 연달아 기적을 만들고, 은퇴하던 그 순간까지도 팀을 성공으로 이끈 변화무쌍함과 과감함이었다.

팀의 조직을 다지는 능력이 탁월한 데다가 워낙 가진 능력이 많은 육각형 감독이었고, 국내에서 해외축구가 널리 퍼진 2000년대 중반에는 이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가 안정된 후였기 때문에 전술가로서의 역량은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있지만 애시당초 퍼거슨이 최고의 감독으로 뽑히는 건 그가 매번 무너지거나 침체된 팀, 리그에 부임해 팀을 일으켜 세웠기 때문이었다. 퍼거슨은 전술적으로 선수들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약점을 최소화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 능력으로 스쿼드에 부족함이 있고 불리한 상황에 처했더라도 본인의 역량으로 채워넣었고, 덕분에 세인트 미렌 FC, 애버딘 FC에서 기적을 만들고 맨유에서 인상적인 말년을 보내는 것이 가능했다.

1980년대 애버딘에서는 수비 라인을 높이고 강한 압박 강도를 가져가는 축구를 구사했고, 1990년대 맨유에서는 비교적 긴 패스로 쭉쭉 역습해 나가는 스타일을 보이는가 하면, 2000년대 중후반에는 선수들의 빠른 스위칭과 짧은 패스를 통해 상대를 현란하게 교란하는 기동전 축구의 정점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 시기의 맨유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의 라이언 긱스 데이비드 베컴[28], 그 후로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29]였다. 그렇기에 2명의 윙어를 통해 측면 플레이에 능한 4-4-2가 가장 유명한 포메이션이지만 때에 따라 4-5-1 등의 포메이션도 활용하는 등 포메이션에도 많은 변화를 주었다. 예를 들면 호날두를 제로톱으로 활용한 경기도 있었고 경기 중에는 리오 퍼디난드 네마냐 비디치를 포워드로 기용한 적도 있다. 2000년대 중후반부터는 주제 무리뉴로부터 선도된 흐름인 선수비 후역습[30]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화려한 역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맨유가 더블을 한 시기에는 화려하고 다이나믹한 축구로 팬들에게 재미를 선사했다.

감독 커리어 전체를 놓고 보면 4-4-2를 기반으로 양쪽 측면으로 볼을 운반해서 어떻게든 페널티 박스로 공을 투입하고 훌륭한 공격수가 이를 마무리짓는 방식을 선호하지만, 세부적으로는 매번 다른 시스템을 들고 나왔고 한 가지 전술을 극대화하기보다는 여러 전술 옵션을 갖고 상대 감독과 수 싸움을 즐기는 타입이었다. 예컨대 2006-07 시즌에는 굉장히 잦은 좌우 스위칭을 통한 공격 패턴을 선호했고, 2007-08 시즌에는 좌우 스위칭의 빈도를 줄이고 웨인 루니- 카를로스 테베스 투톱이 폴스 나인처럼 움직이고 호날두에게 더 많은 자유도를 부여하면서 상술했듯이 호날두를 제외한 선수들 전원이 많은 수비 가담을 통해 적극적으로 압박하기도 했다. 약팀을 상대로는 라인을 올리고 점유율을 높이면서 폴 스콜스 마이클 캐릭 같은 훌륭한 후방 플레이메이커가 빠르게 좌우로 전환해 수비 라인을 좌우로 벌려서 공략하고, 강팀을 상대할 때는 깊숙히 눌러앉아 재빠른 역습으로 때려잡기도 했다. 그래서 강팀들이 맨유의 '선 수비 후 역습'을 예상하고 플랜을 짜오면 2009-10 시즌 FC 바이에른 뮌헨과의 UEFA 챔피언스 리그 2차전, 2010-11 시즌 첼시 FC와의 리그 2차전과 같이 초반부터 벼락같은 전방 압박으로 리드를 확 잡아내기도 했다.

또 퍼거슨은 경기의 흐름을 읽고 용병술과 변칙 전술을 사용하는데 매우 능했다. 경기가 지지부진할 때면 자주 이른 시간에 변화를 줬고, 승패가 걸린 결정적 순간에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이런 결정들은 단지 과감할 뿐만 아니라 성공률 자체가 높았는데, 퍼거슨의 수석코치였던 카를로스 케이로스는 " 레알 마드리드 감독 때 퍼거슨 옆에서 봤던 대로 과감한 결정들 많이 해봤는데 나는 해보는 족족 실패하더라."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만큼 날카로운 안목에 엄청난 경험이 쌓여 수싸움, 심리전의 대가로 거듭났다.

어떻게든 이기는 축구를 했던 것도 유명하다. 특히 글레이저의 맨유 인수 후 구단이 엄청난 빚에 짓눌려 제대로 리빌딩을 못하던 말년에 소위 꾸역승을 가져가는 모습들을 많이 보였다. 분명 경기력도 별로고 라인업도 별로인데 어떻게든 골을 넣어 이기는 축구를 구사했다. 감독으로서 퍼거슨의 역량이 잘 드러나는 부분으로, 각 포지션의 선수의 장점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31] 그래서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굉장히 골치 아픈 성향의 감독이었다. 로테이션을 하도 돌려서 스쿼드조차 변화무쌍한 데다가[32] 전술에 있어서도 좋게 말하면 자유분방하고 변화무쌍했고 나쁘게 말하면 일관성이 없었다. 때문에 전술을 예측해 대응 전술을 짜는 것도 용이치 않았다.

다만 그 와중에도 퍼거슨은 언제나 공격적인 축구를 추구했는데, 그 이유는 맨유가 세계 최강의 팀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문화와 전통이 있는 팀이라는 것이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시대가 변하면서 퍼거슨은 새로운 페러다임을 계속 받아들였으나, 이 공격적인 축구 하나는 절대로 변하지 않았고 이러한 다이나믹한 축구는 팬들에게 큰 재미를 선사해 맨유가 세계적인 인기 구단이 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점 때문에 FC 바르셀로나, 뮌헨, 레알 등 강팀을 상대로도 맞불을 놓았고 이 점은 퍼거슨이 재임 기간 동안 리그 성적에 비해 토너먼트 성적이 신통치 않고 챔피언스 리그 우승이 적었던 대표적인 이유로 꼽힌다.[33]

때때로 언론 인터뷰를 통해 퍼거슨은 수석코치 등에게 팀 전술의 세부적인 부분을 떠넘기고 이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증언을 하는 스태프들이 있었지만, 정작 퍼거슨과 함께했던 코치들은 퍼거슨의 전술적인 부분을 대단히 높게 평가하고 있으며 이들은 모두 퍼거슨의 곁을 떠난 뒤로 자신의 감독 커리어를 쌓으면서 맨유 시절 이상의 전술적인 면모를 보여주지 못했다.[34] 퍼거슨은 단순히 선수단 운영뿐만이 아닌 구단에 관련된 모든 것을 관리하는 감독이었고[35], 이에 시간적/체력적인 부담을 덜기 위해 코치들에게 일임하는 부분이 많았을 뿐 전술적인 부분이 코치빨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심지어 퍼거슨 체제 하의 맨유는 수석코치를 한 명이 아닌 둘씩이나 두는 시기도 몇 차례 있기도 했다.

물론 퍼거슨이 이끌던 팀이 정말 전술적으로 완벽한 팀이었다고 볼 순 없었다. 팀의 전술적 완성도 자체는 펩 과르디올라 아르센 벵거 등이 이끌던 타 팀들에 비해 높다고 볼 수 없었으며, 이는 퍼거슨의 장점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퍼거슨의 진짜 장점은 이런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변화무쌍한 변화를 통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전술적인 구색을 지켜내는 것이었으며, 때로는 전술이나 전력의 부족함을 심리전이나 동기부여, 심지어는 시계를 들어 보이는 등 주심을 흔드는 작전 등을 통한 어지간한 감독은 상상도 못하는 방식으로 극복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술적 흐름을 뒤늦게 따라가지만 원판에는 분명 부족한 완성도를 극복해낸 측면이 있다.

6.2. 선수단 장악 및 관리 능력

현역 시절 퍼거슨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확실한 선수단 장악이었다. 때로는 불같았고, 때로는 인자했다. 상대팀뿐만 아니라 본인이 이끄는 선수들을 상대로도 심리전을 펼쳤고 선수들이 감독의 권위를 넘보면 반드시 무자비하게 처분했다. 선수들이 지시를 따르지 않거나 용납할 수 없는 실수를 하면 코앞에서 선수들의 머리가 휘날릴 정도로 거센 비난을 퍼부어 '헤어드라이어'라는 별명을 얻음과 동시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언론으로부터 선수들을 보호하고 끝까지 보살펴 아버지 같은 분이라는 평도 들었다. 퍼거슨은 다른 무엇보다 라커룸을 장악하고 팀을 하나로 만드는 것을 우선시했고, 선수들을 컨트롤하는 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일부 축구 팬들은 퍼거슨의 선수단 장악 능력은 지금 와서는 통하지 않을 권위로 찍어누르는 방식인데 시대를 잘 타고나 쉽게 선수단을 장악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퍼거슨의 커리어를 제대로 살펴보면 이는 많은 국내 축구 팬들이 본 퍼거슨은 이미 말년이었기 때문에 나오는 오해라는 걸 알 수 있다. 박지성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에 이적했을 때 퍼거슨은 이미 맨유 부임 20년 차로 구단에서 전설적인 위치에 오른 뒤였다.[36] 당연히 팀 내 그 누구도 퍼거슨에게 감히 대항할 수 없었다. 최고참 라이언 긱스조차도 청소년 시절 퍼거슨이 직접 유소년 팀에 영입해 키우고 데뷔시킨 선수였으니 당연했다. 그러나 40년 감독 커리어 중 마지막 7~8년, 그것도 이미 팀이 완성된 상황에서의 퍼거슨만을 보고 그의 선수단 장악 능력을 판단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퍼거슨의 그 권위는 절대 시대적 배경 등으로 인해 공짜로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퍼거슨은 32살의 어린 나이에 감독이 되어 처음에는 선수들로부터 대놓고 모욕당했고, 가는 팀마다 어린 감독인 퍼거슨을 무시하는 선수들이 있었다. 당시 축구 선수들은 지금보다 휠씬 거칠었고, 규율로부터 자유로웠으며, 영국 축구가 술에 관대했던 시절 금주령과 엄격한 규율을 요구했던 퍼거슨에게는 요즘 시대에는 상상하기 힘든 수준의 반발과 어려움이 뒤따랐다. 이스트 스털링셔에서 파트 타임 임시감독으로 감독 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스쿼드에 8명의 선수밖에 남아있지 않았고 선수단의 정신 상태도 엉망이었다.[37] 공격수였던 짐 미킨은 가족 여행을 간다고 감독의 허락 없이 3주 동안 사라지는 등 선수들이 대놓고 퍼거슨을 무시했다. 첫 정식 감독이 된 세인트 미렌 FC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감독 부임 첫날 지역지에 실린 자신의 기사를 보던 퍼거슨이 발견한 것은 팀 단체 사진에서 주장이 자신의 뒤통수에 손가락 욕을 날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선수들은 술을 먹고 다음 날 훈련에 나오지 않기 일쑤였다. 애버딘 FC에서도 퍼거슨은 과 싸워야 했다. 또 셀틱 FC 레인저스 FC의 양강 체제에 우승을 포기하고 무기력해진 선수들은 퍼거슨의 공격적인 전술 지시를 거부했다. 고참 선수들이 인터뷰에서 퍼거슨을 공개 저격하는 일까지 있었다. 맨유 부임 초기에도 퍼거슨은 알코올 중독을 벗어나지 못하는 선수들을 팔아치워야 했고 때문에 부진과 선수들의 반항에 시달렸다.

퍼거슨은 거친 선수들을 휘어잡기 위해 더 거칠고 과감해져야만 했다. 직접 훈련에 참여해 선수들에게 요구하는 강도 높은 훈련을 자신도 소화했고, 규율을 어긴 선수들에게는 엄벌을 가했다. 자신에게 욕을 한 세인트 미렌의 주장은 즉각 팀에서 추방됐다. 선수들이 술을 마시거나 느슨해지면 술병을 벽에 던져 깨트리고 이것저것 걷어차는 등 분노를 폭발시키며 선수들이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후에도 '헤어드라이어'로 대표되는 퍼거슨의 다혈질 성향은 사실 처음에는 감독 생활 초기, 어린 감독이 반항하는 선수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장착한 무기였다.
내 분노는 유용한 도구였다. 분노를 터뜨리는 일은 내 권위를 확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선수들과 스태프들에게 내가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될 인간이라는 메시지를 주었다. 그러나 대들고 거역하려는 인간들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알렉스 퍼거슨 나의 이야기 45p
퍼거슨이 자신의 자서전에서 말하듯 이런 퍼거슨에게 더 크게 반항하는 선수들도 당연히 있었다. 그때마다 퍼거슨은 자신의 유소년 선수들을 보는 안목을 사용해 젊은 선수들을 끌어왔다. 젊은 선수들은 열정에 불탔고, 자신에게 기회를 준 퍼거슨을 잘 따랐다. 그들에게 자리를 위협받은 기존 선수들은 떠나거나 퍼거슨 체제에 적응해야 했다. 심지어 세인트 미렌에서는 17살의 피츠패트릭에게 주장 자리를 주기까지 했다. 그러다 보면 퍼거슨은 언제나 성적을 냈고, 퍼거슨이 데려온 유소년 선수들도 대부분 만개했다. 결국 선수들은 퍼거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38] 그 다음부터는 쉬웠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퍼거슨을 인정하고, 팀 내 주축 선수들은 퍼거슨이 키운 어린 선수들이었다. 구단도, 팬도 성적을 내는 퍼거슨을 지원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므로 퍼거슨 편이었다. 퍼거슨은 이미 장악된 선수단을 적절히 관리하면 됐다.

이 과정은 말이 쉽지 사실 하나하나가 도박수였다. 팀 내 주축 선수들과의 분쟁은 당연히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팀 내 주축 선수의 기강을 잡겠다고 몇 주 제외시켰는데 팀 성적이 안 나오면 그건 반대로 망신이다. 분노를 통한 기싸움도 퍼거슨이 카리스마가 있었기에 가능했지, 단순히 화만 냈다면 선수단은 오히려 어린 감독을 비웃었을 것이다. 유소년 선수의 콜업은 선수를 보는 안목이 동반되어야지 그냥 콜업만 시키면 오히려 성적은 추락하기 마련이다. 또 성적을 낸다고 해도 감독에 대한 반감을 가졌던 선수들에게 진심으로 인정받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세인트 미렌에 있을 시절, 나는 경기에서 0:2로 패했다. 그날 밤 내 친구인 존 도나키가 전화로 말했다. "네가 열 받을 거 같아서 말 안했는데 실은 금요일 밤에 프랭크를 펍에서 봤어. 잔뜩 취해 있더라고." 나는 즉시 프랭크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그의 어머니가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프랭크가 시내에 나가 집에 없다고 말했다.

"돌아오면 내게 전화하라고 전해주세요. 전화가 올 때까지 아무리 늦어도 자지 않을 겁니다." 밤 11시 45분에 전화가 왔다. 공중전화였다.

"금요일 밤에 어디있었나?" "생각이 안 나는데요." 그가 말했다. "그래? 그럼 내가 말해주지. 넌 워털루 바에 있었어. 넌 영구 출장 정지다. 돌아올 생각 하지 마. 스코틀랜드 U-21세 팀에서도 빠지게 될 거다. 내가 탈락시킬 거야. 평생 두 번 다시 축구공을 차게 되나 봐라."

그 후 나는 3주 동안 그를 영구 출장 정지시켰고 선수들은 모두 불평을 늘어놓았다. 3주 뒤 리그 상위권 팀인 클라이드뱅크와의 경기가 다가왔다. 프랭크가 필요했다. 고민하며 캐시와 걷고 있는데 프랭크가 기둥에서 뛰어나오더니 애원했다.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하늘에서 내려온 선물이었다. 나는 캐시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말하고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말했잖아. 넌 평생 뛰지 못할 거라고." 그러자 우리를 보고 있던 주장 피츠패트릭이 앞으로 나섰다. "감독님. 프랭크에게 한 번만 기회를 더 주세요. 제가 앞으로 녀석이 말썽 피우지 않도록 책임지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와서 말해. 지금은 안 돼." 나는 잘라 말하고 의기양양하게 자리를 떠났다. 우리는 클라이드뱅크전에서 승리했고 프랭크는 골을 넣었다.
퍼거슨의 자서전에 언급되는 세인트 미렌에서의 일화
이런 식으로 선수단을 장악하면 이제 팀을 관리하고 유지해야 했다. 이 부분에서는 맨유에서의 행보가 유명하다. 27년 간 한 팀에 있으면서 꾸준히 선수단을 관리했기 때문이다. 선수단이 장악됐다 싶으면 퍼거슨은 이전보다는 팀을 느슨하게 풀어주고 선수들을 인자하게 대하며 인간적인 유대를 쌓았다. 맨유 말년뿐만 아니라 애버딘의 선수였던 스튜어트 케네디도 퍼거슨을 회상하며 "헤어드라이기? 우리 때는 용광로였는데 몇 년 지나니까 헤어드라이기 수준으로 감소하더라."라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애버딘 말년에는 선수들과 장난도 많이 쳤다. 박지성도 "언론에는 퍼거슨 감독님이 되게 무서운 이미지인데 사실 친절하고 인자하시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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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거슨의 아버지 모드
언론에서는 다혈질이고 파격적인 결단들을 많이 내렸던 퍼거슨을 주로 조명했지만, 평상시 퍼거슨은 선수들을 섬세하게 보살피는 사람이었다. 특히 자신이 어릴 때부터 봐온 선수들를 매우 애지중지했는데, 게리 네빌은 레딩의 호텔에서 퍼거슨이 맨유 유소년 팀에 있다가 다른 팀으로 간 선수들 60명의 명단을 적으며 기억하려고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퍼거슨은 팀을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대항하는 하나의 가족처럼 만드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선수들이 자신의 기준을 충족하면 관대해졌고, 부진한다고 무조건 질책하지도 않았다. 실제로 퍼거슨은 대부분의 맨유 선수들과 좋은 유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선수들을 항상 무섭게만 대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퍼거슨은 내게 정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에요. 지금까지도 우리는 정말 좋은 관계를 맺고 있고 엄청 자주 대화해요. 서로 문자도 보내고요. 우리는 우리의 감정 상태에 대해 얘기해요. 예를 들어 최근에 UEFA 슈퍼컵에서 우승했을 때 퍼거슨이 제게 'Man of the Match'를 시상했죠. 리스본에서 챔스 우승을 했을 땐 내가 도핑 테스트를 받으러 갈 때 그가 동행했어요. 그는 내가 정말 존경하는 사람이고 친한 친구예요. 함께한 모든 감독님들 중 우정을 나눈 사람은 퍼거슨이 유일해요. 펠레그리니와 함께 일하는 것을 좋아했고 안첼로티와도 좋은 관계를 갖고 있어요. 하지만 진정한 관계를 맺고 주기적으로 대화하는 사람은 퍼거슨 뿐이에요. 출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퍼거슨은 아버지 같은 모습으로 다가오고 거기서 더 분발할 수 있었다. 그는 선수들에게 축구 외에도 온갖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주곤 했다. 훈련은 힘들어야 하는 것이고, 우리의 전력을 쏟아야 하는 것인 게 맞다. 그러나 훈련 분위기는 항상 즐거웠는데, 이는 그가 선수들이 분위기에 눌려있는 걸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저 우리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우리 자신을 드러내 보이면 족했다. 퍼거슨은 보수적인 감독이 아니었다. 그는 우리가 경기 중에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는 선수들이 경기장 위에서 누굴 상대할지에 대한 자유를 부여했고, 진심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다운 방식으로 움직이길 바랬다.
게리 네빌
판할은 변함없이 딱딱한 성격이다. 그는 자신의 철학이 강하다. 안첼로티는 퍼거슨같이 좀 더 자유롭다.
하비에르 에르난데스
(2012-13 시즌 10경기 정도 무득점을 했던 시기에 대해) 저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퍼거슨 감독님이 드디어 나한테도 헤어드라이기를 시전하실 때가 온 건가!' 하지만 그는 "괜찮다 로빈, 넌 골을 넣을 거야. 만약 득점을 하지 못하더라도 넌 항상 팀을 돕고 있단다."라고 저를 독려했습니다. 맨유는 2012-13 시즌 26라운드에서 결국 역전 우승을 이뤄냈어요.(2위 팀과 승점 11점 차 우승) 정신적인 동기부여의 힘이 팀에 끼친 영향은 정말로 대단했습니다. 퍼거슨 경은 언제나 선수들이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때때로 그는 말합니다. "얘들아, 내가 어디부터 시작해야겠니? 지루하다고! 내 생각 좀 해주렴, 얘들아. 72살이나 나이를 먹은 내가 이런 경기를 보고만 있어야 하니? 나를 좀 재밌게 해주길 바란다. 40미터 이상 패스를 시도하라고. 실패해도 상관없으니까 드리블도 해보렴. 막 두근거리고 싶다고. 나를 좀 흥분시켜줘. 경기를 더 빠르게 더! 더! 제발!" 퍼거슨 경은 천재였습니다.
로빈 반 페르시
판할 체제에서 팀 분위기가 급격히 나빠졌어요. 주된 이유는 소통이에요. 판할 체제에서 맨유 유스 팀은 1군 선수를 만나는 것조차 어려웠습니다. 모든 것이 단절됐고 분리됐어요. 가족같은 분위기는 전혀 느낄 수 없었죠. 퍼거슨 체제에서는 맨유 유스는 모든 것이 좋았습니다. 모두가 함께하고 소통했어요. 당시 1군 선수들도 우리에게 다가와 안부를 묻기도 했었습니다. 반면 판할은 근엄한 행동만을 요구할 뿐이었어요.
맨유 유스 출신 라이언 맥코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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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퍼거슨의 포용력과 리더십을 보여주는 또 다른 대표적인 사례들은 축구계의 문제아들을 팀에 포함시키고 컨트롤했다는 점이다. 말년에는 악동 웨인 루니를 길들였고, 선수 커리어 초반부터 스타성이 넘쳤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개인 플레이만 하고 윙크 사건으로 팀 내 파동을 일으켰을 때도 호날두를 끌어안았다. 한 성깔 했던 로이 킨도 키노게이트 전까지 퍼거슨 체제 하에서는 훌륭한 주장이었다. 하지만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당연히 에릭 칸토나일 것이다. 칸토나는 심부름을 시켰다고 팀원에게 주먹을 날렸고[39], 프랑스 대표팀에선 감독에게 욕설를 해 사실상 퇴출됐다. 이후 심판이 맘이 안 들자 심판의 얼굴에 축구공을 던졌고 징계를 받자 은퇴를 선언해 버린 전적까지 있었다. 이런 칸토나가 맨유에서도 관중에게 쿵푸킥을 날려 사고를 쳤을 때, 퍼거슨은 언론에 맞서며 칸토나를 감쌌다. 은퇴까지 시사하던 칸토나는 이를 보고 뭔가 느꼈는지 이적 제안을 전부 거부하고 맨유에 남았고, 퍼거슨에게 굉장한 존중과 충성심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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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평상시에는 인자했던 퍼거슨도 선수들이 좀 느슨해지면 다시 가차없이 욕설 섞인 헤어드라이기를 날렸다. 그리고 감독의 권위에 도전하면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와 관계없이 내쳤다. 주장으로 퍼거슨과 오랜 세월을 함깨한 로이 킨이 키노게이트를 일으키자 고민 끝에 그를 내쳤고, 데이비드 베컴이 팀의 기강을 해친다고 생각되자 퍼거슨을 아버지 같이 생각했던 베컴도 내쳤다. 어린 선수들로 스쿼드를 구성한 것에 불만을 갖고 반항한 뤼트 판니스텔로이도 내쳤다. 아무리 월드 클래스 선수라도 퍼거슨에게 반항하고서는 팀에 남을 수 없었다. 퍼거슨이 맨유에서 오랜 세월 유지한 규율과 권위의 바탕에는 기꺼이 팀에 생기는 구멍도 감수하겠다는 퍼거슨의 가차없음이 있었다.

6.3. 유망주 육성 및 선수를 보는 안목

퍼거슨은 선수를 보는 안목과 육성 능력에서도 정상급이었다. 더욱 대단한 것은 이 점이 오랜 감독 생활로 인한 경험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감독 커리어 초반부터 갖고 있었던 재능이라는 점이다. 퍼거슨은 세인트 미렌 FC에서 자신에게 반항하는 1군 선수들 대신 유소년 선수들을 끌어왔다. 이때 발굴된 빌리 스타크는 미드필더로 대성해 세인트 미렌에서 255경기 60골을 기록했고, 훗날 퍼거슨을 따라 애버딘 FC로 이적해 애버딘의 리그 우승과 유럽 대항전 우승까지 함께했다. 윙어였던 피터 위어도 훗날 애버딘까지 퍼거슨을 따라갔다. 퍼거슨의 부임 당시 18세였던 프랭크 맥가비는 퍼거슨 부임 이후 세인트 미렌의 주전 스트라이커가 되어 132경기 52골을 기록하며 팀의 승격을 이끌었다. 유소년 시절 키가 작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고, 심지어 자신이 방출되리라 생각했던 토니 피츠패트릭은 17살에 팀의 주장이 되었다. 특히 퍼거슨이 피츠패트릭에게서 무엇을 봤는지는 몰라도 그의 사람 보는 눈은 실로 날카로웠다. 피츠패트릭은 훗날 선수 은퇴 후 세인트 미렌의 감독, 심지어는 CEO까지 역임하게 될 타고난 리더였다.

애버딘에서도 퍼거슨은 항상 젊은 선수들을 기용하길 즐겼다. 이런 선수들을 알아보는 눈이 있고 성장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에 3부 리그 하위권에 있던 세인트 미렌, 변변찮은 트레이닝 시설도 없었던 애버딘, 20년 간 리그 우승을 못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등 상황이 좋지 않은 구단에 부임해 반전을 꾀할 수 있었다. 유망주들은 가격이 싸거나 공짜였고, 열정적이라 팀 분위기를 바꾸는 데도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내가 세인트 미렌에서 2부 리그를 우승했을 때 우리 팀 평균 연령은 19세였다. 나는 팀의 상황이 나쁘면 항상 어린 선수들에게 기회를 줬고, 애버딘에서도 똑같이 했다. 그게 더 편하기 때문이다. 첫째, 그들은 기회를 감사히 생각한다. 둘째, 그들은 감독에게 충성한다. 셋째, 그들의 태도는 일관된다. 애버딘의 소년들은 환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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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퍼거슨의 이러한 능력은 경력이 쌓이며 발전해 나갔고 맨유에서 절정에 달했다. 맨유 부임 초기부터 유소년 팀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퍼거슨이 맨유에서 영입한 소년들은 라이언 긱스, 니키 버트, 데이비드 베컴, 게리 네빌, 필 네빌, 폴 스콜스였다. 이들은 'CLASS OF 92' 혹은 퍼기의 아이들이라고 불리며 축구 유소년 육성의 전설이 되었다. 이후에도 퍼거슨은 맨유의 유소년 선수들을 애용하였고, 이 능력은 당시 맨유의 항상 최고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침체되었던 맨유의 팀 내 유스 시스템은 부활하여 다시 천재들의 양성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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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체스터 유나이티드 92 황금 유스, 퍼기의 아이들
퍼거슨은 무너졌던 세 팀을 재건한 감독이었고, 그만큼 격렬한 리빌딩을 했다. 그 과정에서 퍼거슨이 현명하게 돈을 쓰지 못했다면 퍼거슨의 업적들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피터 슈마이켈을 0.5M 파운드, 에릭 칸토나를 1M 파운드에 영입한 것은 아직까지도 회자된다. 물론 알짜배기 영입들만 한 것은 아니었고 로이 킨, 드와이트 요크, 리오 퍼디난드 등 쓸 때는 쓰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성공률이 좋았고 27년 간 여러 번의 리빌딩에서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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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1 ~ 2012-13(은퇴) 시즌까지 유럽 주요 클럽들의 이적료 지출 순위
추가적으로 총 수익 대비 스펜딩을 감안하면 퍼거슨의 위엄을 느낄 수 있다.

올레 군나르 솔샤르는 자국 노르웨이 내에서는 어느 정도 알아주는 선수였으나 유럽에서는 무명이었고, 퍼거슨은 당시 몰데 FK를 뒤집어 놓는 파격 제시를 해 그를 맨유로 데려왔다. 처음에는 다들 반신반의했으나, 솔샤르는 중요할 때마다 골을 넣어주며 맨유 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선수가 되었고 맨유에서 13시즌 동안 활약하며 레전드로 남았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호나우지뉴 영입 실패 이후 대체로 영입한 선수였다. 원래 어느 정도 알아주는 유망주이긴 했으나 초반에는 프리미어 리그라는 특유의 거친 무대에서 다소 고전하는 모습을 면치 못하면서 언론은 퍼거슨에게 오류였다고 보도를 쏟아냈다. 하지만 퍼거슨은 그를 믿고 신뢰를 보냈으며, 결국 호날두는 최고의 선수가 되었고 맨유의 전성기를 이끄는 선수로 성장한다. 2005년에 2천 6백만 파운드(한화 약 330억 원)의 헐값으로 향후 몇 시즌간 맨유를 이끌 박지성, 파트리스 에브라, 에드윈 반 데 사르, 네마냐 비디치 4명을 영입한 이적 역시 아직까지 회자된다. 반 데 사르를 제외하고는 아직 전성기가 오지 않은 젊은 선수들이었으며 이들은 모두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됐다.[40]

한 번의 기적을 만들어내는 감독들은 많지만 대부분은 그 세대가 끝나며 함께 무너지거나 그 업적이 다른 팀에서는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퍼거슨은 세인트 미렌, 애버딘, 맨유에서 연속해서 기적을 만들었으며, 맨유는 20년 간 정상의 위치에 있었다. 그 사이 퍼거슨은 매번 리빌딩에 성공했고, 리빌딩 와중에도 팀은 3위 아래로 내려가 본 일이 없었으며 결국에는 다시 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퍼거슨의 유망주 육성 능력과 현명한 선수 영입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업적이었다.

6.4. 동기부여 능력

천재다. 그냥 천재였다. 일단 선수의 심리를 가장 적절하게 자극했다. 우리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박살나는 날들이 있었다. 영감의 수준에 맞지 않는 경기를 하면 하프타임 때 문을 부숴져라 닫고 나서 "2:0? 2:0? 야 이 좆같은 새끼들아. 지금 솔직히 양심적으로 6:0 7:0은 나와야 하는 거 아니야? 니네 그 따위 공 찰래? 장난하냐? 그 따위로 할 거면 때려쳐!"라고 소리쳤다. 경기가 잘 풀리는 날도 영감이 우리에게 주문하는 건 완벽 그 자체였다. 그리고 우리 모두 완벽한 게임을 위해, 그리고 영감을 위해 달렸다.
리오 퍼디난드
퍼거슨의 또 다른 능력은 선수들에게 동기를 부여해 최선을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퍼거슨은 동기부여를 위해 때로는 진실을 왜곡하고 선수들을 고의로 자극했다. 특히 상황이 거의 맨 땅에 헤딩 수준으로 열악하고 팀에 돈도, 좋은 선수단도 없었던 지도자 경력 초반에는 정말 별 짓을 다 했다.

이스트 스털링셔에서 같은 동네 팀 폴커크를 상대로 패배하자 분했던 퍼거슨은 한 가지 꾀를 생각해냈다. 당시 유일한 그 지역 신문이 '폴커크 헤럴드'였는데, 발행 부수 4만 부짜리 작은 신문이었다. 퍼거슨은 이 신문을 들먹이며 "언론이 부당하게 폴커크 편만 들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스트 스털링셔 선수들은 분개했고 다음에 폴커크를 만났을 때 열정적으로 뛰어 2:0으로 이겼다. 세인트 미렌 FC 시절에는 구장이 텅텅 빈 것이 선수들의 동기부여에 악영향을 준다고 생각한 퍼거슨은 벤 차량에 확성기를 달고 직접 마이크를 든 채로 경기를 홍보하고 다녔다. 이는 실제로 효과가 있어 관중 수가 많이 증가했다고 한다. 출처 애버딘 FC에서도 선수들이 패배주의에 빠져있고 자꾸 술을 마시자 라커룸에서 콜라병을 집어던져 산산조각냈으며, 눈앞에 있는 걸 전부 걷어차는 등 일부러 과격한 행동을 했다. 나아가 자신도 글래스고 출신이면서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글래스고 클럽인 셀틱 FC 레인저스 FC에게만 호의적이라고 연설하며 지역감정까지 승부욕 증진에 동원했다.[41]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에 부임하고 감독 경력이 20년이 넘어가고서부터는 덜 과감했지만 더 교묘했다. 뉴캐슬 유나이티드 FC와의 경기를 앞두고 갑자기 리오 퍼디난드를 구석에 몰아세우더니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리오, 내가 휴즈랑 친하잖아, 언론에 나온 건 아니고... 벨라미가 마크 휴즈한테 그랬대. 솔직히 너 별거 없다고." 그리고 퍼디난드는 벨라미에 대한 적개심에 차 해당 경기에서 완전히 그를 봉쇄했다.[42] 한편 로빈 반 페르시의 폼이 떨어졌을 때 반 페르시가 강하게 몰아붙여서 잘하게 될 선수는 아니라고 생각한 퍼거슨은 오히려 반 페르시에게 "골을 못 넣어도 걱정하지 마라. 넌 뛰는 것만으로도 팀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라고 다독였다. 그리고 팀 미팅에서는 "반 페르시는 매 경기마다 기가 막히게 공간을 찾아들어가고 있는데 니들이 공을 제대로 안 찔러주고 있다. 제정신이면 반 페르시에게 패스해라."라고 오히려 다른 선수들을 다그쳤다. 그 뒤 다음 경기에서 맨유 선수들은 의식적으로 반 페르시에게 패스를 많이 했고, 득점 찬스를 많이 얻은 반 페르시는 득점하면서 슬럼프에서 빠져나왔다.

다소 가혹한 일도 했는데, 파트리스 에브라의 가족들이 경기를 보러 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그를 벤치에 앉혀놓고 쓰지 않았다. 집에 돌아간 에브라는 괴성을 지르며 분노했다고 한다. 다음 경기에서 퍼거슨은 에브라를 선발로 썼고, 에브라는 화풀이를 하듯 크게 활약했다. 박지성도 퍼거슨의 이런 심리전을 피해갈 수 없었다. 부상도 회복하고 몸도 너무 좋은데 퍼거슨은 훈련 때마다 컨디션이 어떻냐고 물을 뿐 박지성을 쓰지 않았다. 이런 일이 세 번 반복되자 아무리 박지성이라도 화가 났고, 퍼거슨이 또 훈련 때 몸이 어떻냐고 물어보자 살짝 화난 기색을 드러냈다고 한다. 다음 경기에서 퍼거슨은 박지성을 선발로 썼고, 마찬가지로 분노에 찬 박지성은 골까지 기록했다. 에브라와 박지성의 일화 둘 다 박지성의 자서전[43] 에서 언급되는데, 박지성은 "퍼거슨 감독이 정말 나의 이런 심리를 읽고 있었다면 나는 그가 진정 천재라고 생각한다."라고 썼다.

타 팀을 깎아내리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아스날 FC와의 경기에서는 "아스날 선수들은 아가야. 박살내버려."라고 말하거나, 리버풀 FC와의 경기에서는 "솔직히 지금 리버풀이 리버풀이냐?"라고 말하며 선수들을 자극했고 선수들이 라이언 긱스를 잘 따른다는 것을 알고 긱스가 잘못한 것이 없어도 야단치기도 했다.[44] 그리고 퍼디난드의 증언에 따르면 맨유가 경기를 잘했음에도 졌을 땐 일부러 심판에게 트집을 잡거나 타 팀 감독들을 도발해 싸웠다고 한다. 경기의 패배보단 외부의 싸움을 부각시켜 선수단의 분위기를 전환하고 외부에 적을 만들어 팀을 하나로 다시 뭉치게 하기 위해서였다.

6.5. 총평

퍼거슨은 전술적 통찰력, 동기부여, 유망주 육성, 리빌딩, 조직 운영, 꾸준함, 심리전, 선수 관리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정상급의 기량을 가진 감독이었다. 그는 다재다능했기에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해결 방안을 찾아내고 실행할 수 있었다.

이스트 스털링셔에서는 골키퍼도 없던 팀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세인트 미렌 FC에서는 3부 리그 중위권을 멤돌던 팀을 고작 3년 만에 1부 리그로 승격시켰다. 애버딘 FC에서는 90년 간 이어지던 셀틱 FC 레인저스 FC라는 소위 올드 펌의 독주를 그들의 10분의 1 예산으로 붕괴시켰다.[45] 또 유럽 클럽 랭킹 106위였던 애버딘이 FC 바이에른 뮌헨 레알 마드리드 CF를 꺾고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UEFA 슈퍼컵을 우승했으며, 국내 리그에서도 고전하던 팀이 UEFA 클럽 랭킹 6위의 유럽 강호가 됐다.[46]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에서는 25년 간 리그 우승이 없던 팀이 프리미어 리그 출범 이후 20년 간 리그 우승 13회를 비롯해 총 38개의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도록 이끌었다. 맨유를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구단이자 세계에서 손꼽히는 명문 축구 클럽의 위치로 올려놓은 장본인이며, 헤이젤 참사 이후 추락했던 잉글랜드 프로축구 리그를 다시 일으킨 최대 공헌자로 이 공로를 인정받아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다.

퍼거슨은 리누스 미헬스- 아리고 사키- 펩 과르디올라 같이 축구의 전술의 흐름을 바꾼 혁명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매 시대마다 새롭게 등장했던 강적들과의 맞대결에서 고전했다.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에는 아르센 벵거에게 리그 무패 우승을 내주었고, 트레블을 달성한 1998-99 시즌에도 0:3 패배를 두 번 기록했다.[47] 2000년대 중반에는 주제 무리뉴가 등장했고, 퍼거슨은 그와의 맞대결 전적에서 역시 밀렸다. 이후 퍼거슨은 과르디올라에게 고전하며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여러 번 고배를 마셨다. 퍼거슨이 위대한 것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들고 나와 압도적으로 한 시대를 지배했거나, 맞수들과의 대결에서 많이 승리하는 전술의 스페셜리스트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퍼거슨이 진정으로 위대했던, 그리고 가장 무서웠던 건 그가 구단의 성공을 총체적으로 이끌 수 있는 감독이라는 점이었다. 물론 퍼거슨은 전술적으로도 매우 뛰어났고, 그랬기에 40년의 커리어 동안 도태되지 않았으며 가는 곳마다 기적을 일으키고 그걸 유지해냈다. 하지만 퍼거슨의 진가는 훨씬 넓은 범위에서 발휘됐다. 그는 침체되거나 몰락한 조직을 성공할 수 있는 조직으로 바꾸는, 시스템을 재설계할 수 있는 감독이었다.

퍼거슨은 선수단의 헤드코치였다기보다는 구단의 총체적인 매니저였다. 퍼거슨이 감독직을 시작하던 때는 현재처럼 보드진의 업무가 분업이 철저히 되어있는 시절이 아니었다.[48] 더욱이 퍼거슨은 부임하는 팀마다 침체되어 있었고 당연히 그곳에는 좋은 보드진이 있지 않았다. 따라서 퍼거슨의 활동 범위는 축구장 안으로 제한되지 않았다. 그는 전권을 행사했고, 현재는 대부분 디렉터를 비롯한 보드진들의 영역인 유소년 정책 개혁 및 영입, 선수 방출 및 영입과 재계약, 구단 스태프들의 개편과 선수들의 사생활 관리, 구단 사무까지 광범위한 분야을 주도했다.[49][50] 만약 퍼거슨이 단순히 대단한 전술가로, 단지 축구 구단이라는 조직의 한 부분이었다면 세인트 미렌, 애버딘, 맨유에서의 업적을 이뤄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퍼거슨은 조직의 관리자로서 활동하면서 구단을 재편했고, 침체되고 몰락했던 조직에 멘탈리티를 주입했으며 체계적이고 성공적인 시스템을 창조해냈다. 그리고 동시에 전술가, 승부사로서도 정상급의 기량을 보여주며 팀을 성공으로 이끌었다.[51]

축구 감독은 팀의 성공을 위해 존재한다. 성공을 위해서는 승리해야 하며, 승리하기 위해 전술이 발달한다. 퍼거슨은 팀의 성공이라는 목표에 있어 가장 강력하고 범용성이 넓은 감독이었다. 퍼거슨이라면 그 팀이 몰락했든, 침체됐든, 정상을 유지해야 하든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매 시즌마다 다양한 상태의 구단을 이끌었다. 파산 위기에 빠져 스쿼드에 8명밖에 남아있지 않은 팀(이스트 스털링셔), 하부 리그 중에서도 하위권 팀(세인트 미렌 초기), 막 승격한 팀(세인트 미렌 말년), 리그 중상위권 팀(애버딘), 침체된 명문(맨유 초기), 정상을 지키는 팀(맨유 전성기), 긴축 재정을 하는 팀(맨유 말년)이 퍼거슨의 지휘 하에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퍼거슨은 40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다양한 상황들을 마주해 실패하는 법이 없었다.

종합적으로 퍼거슨은 단순히 선수들을 관리하고 전술을 짜는 축구 감독으로서 대단했을 뿐만 아니라, 축구 구단이라는 조직을 이끈 리더로서 위대했다. 퍼거슨은 여러 차례 절망적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조직을 물려받아 어떻게든 성공할 수 있는 조직으로 갱생시켰고, 실제로 그 조직들을 성공시켰다. 성공한 후에도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 성공을 유지해냈다. 커리어가 증명하듯 그는 자신이 맡은 조직이 어떤 상황에 있어도 성공으로 이끌 줄 아는 리더였다. 그의 지휘 아래 구단의 위상은 격상되었고, 수입 구조는 극적으로 바뀌었으며, 구단이 속한 리그의 명예는 수복되고 드높여졌다. 또 매번 우승컵을 들어올리기 힘든 구단에 부임했음에도 축구 역사상 가장 많은 우승을 기록한 감독이 되었다. 이러한 퍼거슨의 업적은 축구 감독이 구단을 성공으로 이끈 사례의 정점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현역 당시에도 위상이 엄청났지만, 은퇴한 후 맨유의 행보는 그가 얼마나 넓은 분야에서 대단한 능력을 발휘했는지, 얼마나 어려운 일을 해냈던 것인지 보여주고 있다. 21세기 들어 자본 유입으로 구단들의 규모가 커졌고 축구의 전술이 급속하게 발전했다. 이에 따라 감독들은 전술의 스페셜리스트들이 경쟁력이 커지고, 경기장 밖 영역들은 프런트들의 분업과 권한이 강해지는 쪽으로 축구계가 변화했다.[52] 그러나 2004년에 맨유를 인수한 글레이저 가문은 오직 돈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구단 구조 개혁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럼에도 퍼거슨이 감독일 때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구단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의 퍼거슨의 거대한 영향력이 클럽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축구계의 변화와 구단주의 무관심 속에서도 퍼거슨이 20년 간 구축해 놓은 시스템은 견고했다. 심지어 퍼거슨은 글레이저 가문의 구단 인수로 인해 발생한 부채를 전부 맨유에 돌려 엄청난 빚에 짓눌리는 와중에도 아무 일 없다는 듯 긴축재정으로 리그 정상에서 경쟁을 계속해 나갔다.

하지만 퍼거슨은 2013년에 은퇴했고, 글레이저 가문은 이때도 프런트 개혁에 무관심했다. 그들은 오히려 구단 단장에 축구팀 경영 능력이 없는 에드 우드워드를 앉혀 사태를 악화시켰다. 퍼거슨의 은퇴 이후 맨유에는 디렉터조차 없었고, 그나마 감독을 도와줄 수 있는 단장은 초보였다. 결국 후임 감독들은 프런트들의 부담 분산 없이 퍼거슨이 져왔던 과중한 책임을 견디지 못하고 연달아 무너졌다. 퍼거슨처럼 본인이 영입도 잘하고 유망주도 잘 키우면서, 전술적으로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떼우며 리그를 우승하며 팀의 기강도 유지하는 건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53] 퍼거슨은 휠씬 힘든 상황에서 팀을 재건했고, 초기와 말년에는 예산에도 쪼들렸던 데 비해 후임 감독들이 물려받은 건 세게에서 가장 부유하고 리그를 우승하던 팀이었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퍼거슨은 정말로 대단했다. 맨유 팬들도 퍼거슨이 사라지고 후임 감독들이 몇 번 실패하자 프런트 개혁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긴 시위 끝에 에드 우드워드가 퇴임했고 풋볼 디렉터 직책이 생겼다. 그러나 후임 단장 아놀드와 풋볼 디렉터 머터프도 전문가라고 보기 어려운 내부 승진 인사인지라 불만과 부진이 이어지고 있다. 이 문제는 최근 맨유 인수 사가에서 주요 입찰자인 카타르 이네오스 양측이 모두 즉각적인 구단 내부 개혁과 새 디렉터를 약속하였고, 이후 새로운 구단주로 들어온 이네오스가 외부 영입을 통해 프런트 주요 인사들을 개혁하기 시작했고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1] 실제로 관중이 느는 등 효과는 있었다고 한다. [2] 이스트 스털링셔의 선수들에게 자신이 떠난다고 말했을 때 윙어였던 톰 도널리가 "이 개자식아!(You bastard!)"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3] 손등을 뒤로 보이며 브이를 만드는 사인. 영국의 대표적인 손가락 욕이다. [4] 퍼거슨의 부임 당시 유소년 팀에 있던 선수로, 미드필더로 대성해 세인트 미렌에서 255경기 60골을 기록했다. 훗날 퍼거슨을 따라 애버딘 FC로 이적해 애버딘의 리그 우승과 유럽 대항전 우승까지 함께했다. [5] 포지션은 윙어로, 빌리 스타크와 같이 훗날 애버딘 FC까지 퍼거슨을 따라갔다. [6] 포지션은 공격수. 퍼거슨의 부임 당시 18세였다. 이후 세인트 미렌의 주전 스트라이커가 되어 132경기 52골을 기록하며 팀의 승격을 이끌었다. [7] 피츠패트릭은 어릴 적부터 키가 작다는 이유로 주목받지 못했고, 그가 성인 팀으로 올라온 직후 퍼거슨이 "이번 주 화요일에 누가 남고 떠날지 발표하겠다."라고 말해 자신이 방출되리라 예상하고 체념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운명의 화요일에 퍼거슨은 사무실로 선수들을 한 명씩 불러냈고, 가장 먼저 불려간 피츠패트릭에게 퍼거슨은 대뜸 "몇 주 동안 널 지켜봤다. 넌 엄청난 재능을 갖고 있다."라고 말했고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훗날 인터뷰에서 회상했다. [8] 17살에 주장이 되어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세인트 미렌의 감독, CEO까지 역임하며 구단의 레전드가 됐다. 2022년 66세의 나이로 구단과의 49년 간의 동행을 마치고 CEO직에서 은퇴했다. 이때 퍼거슨도 영상 인터뷰로 경의를 표한다며 축하해줬다. [9] 당시에는 선수들에게 임금을 무단 지불하는 등 계약 위반이 경질 이유로 알려졌다. 하지만 당시 퍼거슨을 경질했던 세인트 미렌 경영진은 2008년 더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1977년 애버딘과의 접촉 과정에서 퍼거슨이 최소 한 명의 선수에게 자신과 함께 애버딘으로 가자고 한 것이 경질 사유였다고 밝혔다. 문제는 퍼거슨은 고민하다가 이 오퍼를 거절했고 세인트 미렌에 남기를 바랬다는 것인데, 해당 경영진은 시즌 도중에 퍼거슨에게 접근한 걸 끝까지 사과하지 않은 애버딘을 비판하면서도 경질 결정은 후회한다고 밝혔다. 퍼거슨은 세인트 미렌에서 경질된 후 부당 해고로 복직 소송까지 검토했으나 애버딘이 본인에게 다시 접근했고, 이번에는 오퍼를 수락했다. [10] 이후 세인트 미렌은 퍼거슨이 만들어놓은 평균 연령 20세의 팀이 전성기 나이대에 들어가며 10년 정도 황금기를 보냈다. 퍼거슨의 경질 두 시즌 후인 1978-79 시즌에 기록한 1부 리그 3위가 현재까지 세인트 미렌의 리그 최고 성적이다. 참고로 그 시즌 우승팀은 퍼거슨의 애버딘이었다. 이후 황금 세대가 나이가 들어가며 1980년대 후반에는 강등을 두고 싸워야 하는 처지가 됐지만, 결국 몰락했던 팀이 퍼거슨을 기점으로 현재까지도 1부 리그 팀으로 꾸준히 자리잡는데 성공했다. [11] 다만 위에서도 설명됐듯이 당시 스코틀랜드 리그는 1부 리그에 10개 팀이 있었으므로 4위면 중상위권 정도에 해당한다. [12] 현재까지도 올드 펌 두 팀이 다 해먹으며 리그가 정체된 양상이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이 양강 체제를 무너트렸던 퍼거슨이 자주 언급되는 편이다. 올드 팬들은 퍼거슨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에 부임하면서 다시 양강 체제가 복구된 것을 스코틀랜드 리그가 죽어버린 원인으로 꼽기도 한다. [13] 퍼거슨을 다룬 다큐멘터리 'Never Give in'(2021)에서 언급된다. [14] 참고로 퍼거슨은 글래스고 출신인데, 그가 얼마나 절박하게 온갖 수단을 동원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어찌나 불같았는지 당시 애버딘의 수비수였던 스튜어트 케네디는 퍼거슨이 나중에 맨유에서 '헤어 드라이어'라는 별명을 얻자 인터뷰에서 "헤어 드라이어? 그놈 애버딘 초기에는 헤어 드라이어가 아니라 그냥 용광로였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15] 훗날 이 장면을 토대로 애버딘의 홈구장에 퍼거슨 동상이 건립된다. [16] UEFA 챔피언스 리그 [17] UEFA 컵위너스컵의 이전 명칭으로, 유럽 각국 컵대회 우승팀들이 그 중 최강자을 가리는 대회였다. 위상은 현 UEFA 챔피언스 리그인 유러피언컵이 더 높았지만, 당시는 리그 우승팀은 유러피언컵으로, 컵대회 우승팀은 UEFA 컵위너스컵으로 가는 시스템이라 상위, 하위 리그가 뚜렷히 나뉘는 지금의 챔피언스 리그와 UEFA 유로파 리그의 관계와는 달리 우승 난이도는 비슷했다. [18] 맨유에 이어 애버딘도 구장에 퍼거슨 동상을 만들며 퍼거슨은 살아 생전에 이미 두 경기장에 동상이 세워진 인물이 됐다. [19] 이때 토트넘의 제의를 받고 진지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20] 마틴 에드워즈는 1986년 이후로 맨유의 감독을 선임한 최후의 맨유 경영진이었으나, 퍼거슨의 은퇴로 데이비드 모예스가 선임되며 기록이 중단되었다. [21] 퍼거슨의 아내 캐시는 집에서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중 카메라에 잡힌 남편의 모습을 보고 크게 놀랐다고 한다. 퍼거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곧 심장 발작이라도 일으킬 사람처럼 초조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훗날 퍼거슨은 그랬던 자신보다도 조크 스타인이 휠씬 긴장했다고 회상했다. 손을 떨고 식은 땀을 흘리며 경기를 지켜봤다고. [22] 조크 스타인은 셀틱 FC에서 유럽 축구 역사상 최초의 트레블이라는 엄청난 실적을 남긴 감독으로, 축구 전문지에서 매기는 명장 순위에서도 높은 편에 드는 뛰어난 인물이다. 퍼거슨도 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사제 관계로 묘사될 정도로 그를 따랐다. [23] 퍼거슨이 감독의 길에 들어선 것도, 세인트미렌의 정식 감독직 제의를 수락한 것도 그 뒤에는 조크 스타인의 조언이 있었다. 애버딘의 감독이었음에도 대표팀 수석코치직을 수락한 것도 평소 스승으로 모셔왔던 조크 스타인이 감독으로서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퍼거슨은 맨유에 부임할 때도 조크 스타인이 생전에 자신에게 맨유 감독직을 거절한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다며 자신은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고 말한 바 있다. [24] 당시 플레이오프에는 4팀이 올라왔다.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벨기에, 호주. 스코틀랜드로서는 네덜란드를 피하고 호주를 만난 건 대진운이 따라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25] 문서를 계속 읽다 보면 알겠지만 훗날 은퇴 후 출연한 방송에서 유소년 선수들을 중심으로 맨유를 리빌딩하던 퍼거슨에 대해 "꼬맹이들을 데리고 우승할 수는 없다."라고 일갈했다. 나름 타당한 비판이었지만 문제는 그 꼬맹이들이 데이비드 베컴, 폴 스콜스, 게리 네빌, 필 네빌, 라이언 긱스, 니키 버트였다는 것. 결국 앨런 한센의 발언은 영상으로 박제되어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26] 당시 한센은 리버풀 FC 선수였는데, 리버풀의 동료 선수에 대한 정보를 요청했으나 번번이 거부당했고 심지어 차출 거부까지 했었다. 이는 퍼거슨 때만이 아닌 그 이전 스타인 감독 시절부터 그랬다고 한다. [27] 2009년 BBC 보도에 따르면 아스날은 확실히 감독직을 오퍼했었고, 수락 직전까지 갔으나 퍼거슨이 결국 거절했다고 한다. [28] 클래식 윙어 조합 [29] 골 넣는 윙어 [30] 과거 문서에는 전 선수들의 수비 가담이라고 되어있었는데, 실제론 무리뉴보다 훨씬 이전부터 토탈 풋볼의 일환으로 전방 선수들의 압박 등이 활용되었다. 퍼거슨은 이걸 이미 1980년대 에버딘 시절에도 활용하고 있었던 감독이라 퍼거슨 본인의 팀 컬러라고 보는 것이 옳다. 오히려 퍼거슨은 무리뉴를 통해 자신이 그 이전까지 너무 라인을 많이 올리기만 했음을 깨닫고 가끔씩은 라인을 의도적으로 낮추는 축구를 하기도 했다. 이후 그 전까지 상당히 밀리던 대 아스날 FC전 전적을 커리어 후반엔 오히려 아스날에게 강한 모습으로 뒤집기도 했다. [31] 비슷하게 어떻게든 승리를 갈구하는 무리뉴의 선 수비 후 역습 축구와는 또 달랐다. 무리뉴식 꾸역승 경기는 대체로 단단한 수비를 바탕으로 최소한의 득점을 얻어 승리하는 방식인데, 퍼거슨은 수비고 공격이고 라인업이고 다 별로인데 일단 이기기는 한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팀 전술 차원에서의 적절한 포지셔닝이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선수들의 포지셔닝이 적절하고 이것이 팀 전술로도 잘 갖춰져 있다면 청소부가 그라운드에 서있어도 상대를 막을 수 있다고 아리고 사키가 말했던 것의 실제 예시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32] 나름 최고의 라이벌이라는 리즈 유나이티드 FC와의 컵 대회 경기에서는 주전 2명에 유소년 4명, 그 외 나머지 서브 선수들로 베스트 11을 기용했고, 아스날과의 FA컵 경기에서는 풀백만 4명 기용, VfL 볼프스부르크와의 챔피언스 리그 원정 경기에서는 미드필더인 캐릭과 대런 플레처를 센터백으로 두고 마이클 오언을 원톱으로 출전시켰다. 그리고 상술한 저 경기들을 모두 이겼고, 아스날은 당시 기용이 가능한 선수들 중에서 최대한 고른 주전으로 출전하고 경기력 면에서는 더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2:0 패배를 당했으며 그중에서도 전 시즌 분데스리가 우승팀이었던 볼프스부르크는 주축 선수들의 부상으로 물 건너갔다는 평가를 받았던 데다가 당시 맨유에서도 3번째 공격수 옵션이었던 오언에게 해트트릭을 얻어맞으며 침몰했다. [33] 그 예로 2010-11 시즌 챔스 결승에서 바르셀로나에게 패했을 때 상대적으로 열세인 상황임을 알고도 수비적으로 나가지 않고 공격적으로 나갔지만 후반전에는 공격다운 공격도 못해보고 완패했다. 퍼거슨은 이 경기 후 "맨유가 수비적 축구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34] 케이로스, 브라이언 키드, 마이크 펠런, 스티브 맥클라렌, 르네 뮬레스틴 등. [35] 심지어 맨유만이 아닌 EPL의 다른 구단들까지 신경써야 했다. 중하위권 팀들의 감독들은 퍼거슨에게 끊임없이 팀 운영에 관한 조언을 구하고 있었다. 그중 앨런 파듀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감독 시절 맨유를 3:0으로 이기고 난 뒤 1년 넘게 그토록 친절했던 퍼거슨으로부터 아무런 조언도 받지 못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이기고 난 직후 퍼거슨이 화났을 거라는 생각부터 들었다는 모양. [36] 퍼거슨이 맨유 감독에 부임한 게 1986년, 26년 만에 리그 우승 트로피를 안긴 게 1992년, 트레블을 하면서 잉글랜드 축구 리그를 살리고 기사 작위를 받은 게 1999년이었다. 박지성이 이적한 후 불과 5-6년 후 올드 트래포드의 북쪽 스탠드가 '알렉스 퍼거슨 스탠드'로 개칭되고 구장에 퍼거슨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37] 당시 이스트 스털링셔의 구단주는 금전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선수들을 모조리 팔았다. 오죽하면 감독으로 코치 경험도 일천한 32살의 퍼거슨을 알바로 쓸 정도였다. 당시 이적 예산은 2000파운드로 이 예산으로 팀 전체를 꾸려야 했다. 타 팀 선수를 빼오는 일 따윈 불가능했고, 결국 타 팀에서 방출된 선수를 2000파운드란 예산 안에서 모셔와야 했다. 퍼거슨의 감독 커리어는 그렇게 시작됐다. [38] 3부 리그 하위권 팀이었던 세인트 미렌은 3년 만에 1부 리그로 승격했고, 애버딘은 상상하기 힘들었던 리그 우승을 퍼거슨 부임 2년 만에 해냈다. 맨유도 부임 이후 너무 급한 리빌딩이 문제였지 사실 퍼거슨 부임 당시 리그 21위였던 팀이 리그 11위로 시즌을 마쳤고, 그 다음 시즌은 리그 2위를 차지하는 등 팀 분위기가 크게 달라졌다. 1992년 리그 우승 이후에는 말할 것도 없다. [39] 당시 17세로 막 1군에 올라온 선수였다. 재능으로도 똘끼로도 떡잎부터 범상치 않았다. [40] 특히 비디치는 별로 유명하지 않아 뜬금포 영입이었다는 말이 많았는데 후에 리오 퍼디난드와 함께 맨유 수비진을 이끄는 리그 최고의 수비수로 거듭난다. [41] 지금도 그렇지만 셀틱과 레인저스와 나머지 팀들 간 격차가 너무 큰 리그였기에 애버딘 선수들과 팬들은 "어차피 우승 못할 거 강등만 안 당하면 된다."는 식의 패배주의에 빠져있었다. 그렇기에 퍼거슨은 동기부여를 위해 무진장 애를 써야 했는데 셀틱과 레인저스를 묶어 지역감정으로 적개심을 키우는 전략은 꽤나 효과적이었다. [42] 퍼디난드는 자서전에서 나중에서야 자신이 퍼거슨에게 조종당한 걸 깨달았다고 적었다. [43] 더 큰 나를 위해 나를 버리다(2010) [44] 아마 제일 유명한 일화는 토트넘 홋스퍼 FC와의 경기를 앞두고 선수들을 모은 뒤 딱 세 단어만 한 것이다: "Lads, it's Tottenham(얘들아, 고작 토트넘이다)." 당연하지만 맨유는 그 경기를 승리했다. [45] 1985년 퍼거슨이 애버딘에서 마지막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맨유로 떠난 후 4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올드 펌 이외 팀의 스코티시 프리미어십 우승이 없다. [46] 2023년 기준으로 토리노 FC가 7년 만에 파리 생제르맹 FC의 위치까지 올라간 것과 같다. [47] 이 시즌 맨유는 아스날 FC를 다섯 번 만나 1승 2무 2패를 기록했다. 그나마 1승도 FA컵 준결승에서 연장전까지 가는 승부 끝의 승리였다. [48] 과거에는 감독에게 전권을 주는 경우도 꽤 많았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축구계 자본 유입으로 빅클럽들의 규모가 너무 커져버렸고, 전술이 급속하게 발달하며 보드진의 권한이 커졌다. 현재는 대부분의 빅클럽들에서 클럽 운영 부분은 보드진이 담당하고 감독들은 과거보다 전술적 능력이 휠씬 중요해졌다. 요즘 주목받는 감독들 대다수가 전술색이 뚜렷하거나 세부 전술이 있다. 이런 추세에 글레이저 인수 후 엄청난 빚으로 돈도 제대로 못 쓰는 상황이었음에도 본인이 구축한 시스템으로 2013년까지 리그 정상에서 버틴 것이 퍼거슨의 또 다른 위용이라면 위용이다. [49] 이 때문에 한준희, 장지현은 과르디올라와 퍼거슨을 비교하는 영상에서 "둘의 직함은 감독으로 같았지만 실질적으로 역할은 완전히 달랐던 감독들이었다."라고 평가했다. 과르디올라를 최고의 헤드코치, 퍼거슨을 최고의 매니저로 칭하며 대학에 비유한다면 최고의 총장은 퍼거슨이고 최고의 교수는 과르디올라일 것이라고 결론을 냈다. 영상 [50] 퍼거슨이 맨유에서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들에게 불렸던 호칭이 이를 잘 나타낸다. 퍼거슨은 구단 일원들에게 "BOSS"라고 불렸다. [51] 감독과 보드진의 분업이 뚜렷해진 요즘 축구계로 생각하면 경영자로도, 감독으로도 최고 수준의 기량이었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퍼거슨을 분석한 매체나 서적들에서는 퍼거슨을 단순한 감독이라기보다는 조직의 리더나 경영자로 묘사하는 경우가 흔하다. 여담으로 퍼거슨은 은퇴 후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최고위 과정 강사로 채용되어 몇 학기 동안 강단에 서기도 했다. [52] 본래 감독에게 전권을 주는 경우가 흔했지만 이런 추세로 인해 구단 운영, 구단 방향 설정, 선수 영입 및 방출과 재계약 등은 구단 보드진이 관리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디렉터의 역할이 중요해진 것도 이 시기이다. 또 요즘 축구계에서 지속적으로 성공하는 명장들은 대부분 전술적 색체가 뚜렷한 감독들이 됐다. [53] 현재 축구계에서 퍼거슨이 펼쳤던 상당수 능력들은 대부분의 팀들에서 더 이상 감독의 권한이라고 보기 힘든 점도 있다. 정말로 제2의 퍼거슨이 등장하지 않는 이상 맨유의 부진은 결국 제대로 된 보드진을 데려와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우선적 해결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