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티 피펜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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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티 피펜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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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 1996 |
1991 | 1992 | 1993 | ||
1996 | 1997 | 19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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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티 피펜 | 미치 리치몬드 | |
1995-96 | 1996-97 | 1997-98 | 1998-99 | 1999-00 | |
마이클 조던 | 글렌 라이스 | 마이클 조던 | (NBA 파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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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브론 제임스 | 코비 브라이언트 | 르브론 제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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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애런 팍스 | - | - | - | - | }}}}}}}}}}}} |
베스트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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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st : 1993-94 · 1994-95 · 1995-96 2nd : 1991-92 · 1996-97 3rd : 1992-93 · 1997-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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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st : 1991-92 · 1992-93 · 1995-96 · 1996-97 · 1997-98 · 1998-99 2nd : 1990-91 · 1999-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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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불스 영구결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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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ccac00> No. 4 | No. 10 | No. 23 | No. 3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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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 슬로언 (Jerry Sloan) |
밥 러브 (Bob Love) |
마이클 조던 (Michael Jordan) |
스카티 피펜 (Scottie Pippen) |
필 잭슨 (Phil Jacks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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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ccac00>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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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 크라우스 (Jerry Krause) |
자니 커 (Johnny Kerr) |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스카티 피펜 | |
헌액 연도 | 2010년 |
스카티 피펜의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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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불스 등번호 33번 | ||||
자완 올드햄 (1983~1986) |
→ |
스카티 피펜 (1987~1998, 2003~2004) |
→ | 영구 결번 | |
휴스턴 로키츠 등번호 33번 | |||||
오티스 소프 (1988~1995) |
→ |
스카티 피펜 (19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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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 그리핀 (2001~2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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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등번호 33번 | |||||
게리 트랜트 (1995~19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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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티 피펜 (1999~2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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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리프 압둘라힘 (2004~2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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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4001f> 시카고 불스 No. 33 | |
<colcolor=#fff> 스코티 모리스 피펜 시니어 Scottie Maurice Pippen Sr.[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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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65년 9월 25일 ([age(1965-09-25)]세) |
아칸소주 햄버그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출신학교 | 센트럴 아칸소 대학교 |
신장 | 203cm (6' 8")[2] |
체중 | 103kg (228 lbs) |
윙스팬 | 221cm (7' 3")[3] |
포지션 | 스몰 포워드 |
드래프트 |
1987 NBA 드래프트 1라운드 5순위 시애틀 슈퍼소닉스 지명[4] |
소속 팀 |
시카고 불스 (1987~1998) 휴스턴 로키츠 (1999)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1999~2003) 시카고 불스 (2003~2004) 토르판 포야트 (2008)[5] |
등번호 |
33번 - 시카고 / 휴스턴 / 포틀랜드 8번 -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 |
가족 | 아들 스카티 피펜 주니어 |
SNS | | | |
[clearfix]
1. 개요
미국의 농구인. NBA 팀 시카고 불스에서 마이클 조던과 함께 6번의 우승을 이뤘고 1992년과 1996년의 올림픽에서 드림팀의 멤버로 2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2. 생애
2.1. 유년기에서 고교 졸업 전까지
1965년 아칸소 주 햄버그에서 아버지 프레스턴 피펜(1920~1990)과 어머니 에델 리 해리스(1923~2016) 슬하 12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집은 가난했는데 아버지는 가족을 먹여살리려고 불철주야 쉼없이 일했다. 피펜은 농구선수로서의 성공을 꿈꿨지만 햄버그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그의 키는 겨우 5피트 9인치(약 175cm). 그러다보니 운동부에서는 퇴짜맞기 일쑤. 간신히 들어간 농구부에서도 별반 두각을 나타내지도 못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당시에는 키도 작은데 몸무게 또한 아주 적게 나가서 거의 연필같았다고 하며 뚜렷하게 재능도 보이지를 못했다고 한다. 졸업이 다가오고 대학에서 스카웃 제의가 와야 했지만 디비전1 대학은 고사하고 디비전2, 디비전3 대학도 이런 피펜을 눈여겨보는 곳이 없었다.당시 감독인 도널드 웨인은 급기야 자신의 대학 은사에게 피펜을 받아달라고 하소연하기에 이르렀다. 그 대학은 바로 센트럴 아칸소 대학으로, NCAA가 아닌 NAIA라는, 당시에도 지금도 존재감은 엄청나게 낮은 대학리그[6] 팀이었다.[7][8] 센트럴 아칸소대는 NAIA에서도 존재감이 낮은 대학이었는데, 역사상 이 대학을 졸업하고 NBA에 간 선수는 단 한명, 피펜 뿐이었다. 게다가 NBA 2K20에 등장해 피펜 본인 입으로 썰을 푼 바에 따르면, 선수로 간 것도 아니고 팀 매니저로 합류했다고 한다. 라스트 댄스에서 더 상세하게 밝혔는데, 처음엔 장비 담당자(equipment manager)로 있다가 팀동료들 중 학업 성적 미달로 못 뛰게 되는 선수들이 생기자 자신을 로스터에 넣어달라고 감독에게 계속 부탁했다고 한다.
2.2. 반전의 대학시절. 그리고 NBA 입단
하지만 1학년 때도 별 두각을 나타낸 것도 아니었다. 1학년때 성적이 4.3점 3.0 리바운드가 고작이었으니 말이다. 키도 6피트 1인치까지 밖에 자라지 않았다. 이대로 피펜은 대학시절도 그저 그렇고 그런 선수가 될 뻔 했으나 기가막힌 반전이 찾아왔다.2학년때 몸무게가 8파운드나 늘어나고, 키는 6인치(약 15cm)나 자란 것이다.[9] 이 때부터 피펜은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2학년때 18.5점 9.2 리바운드, 3학년때 19.2점 9.2 리바운드, 졸업반인 4학년 시즌에는 23.6점 10.0 리바운드 4.3 어시스트를 각각 기록했으며, 1986 및 1987년에는 2년 연속으로 NAIA 올 아메리칸에 선정됐다. 하지만 자신이 속한 대학농구팀이 3류인 NAIA 소속이었기 때문에 큰 관심을 받지는 못했다. 스승인 돈 다이어 감독은 NBA 단장들에게 피펜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그를 발견한 이는 마티 블레이크(1927~2013)[10] NBA 스카우트부장이었다.
그는 친분이 깊은 제리 크라우스 시카고 불스 단장에게 피펜의 포츠머스 토너먼트(대학 졸업반 농구대회)를 보여줬고, 경기를 본 크라우스 단장은 에이전트 지미 섹튼에게 "제발 다른 팀에게 피펜을 보여주지 마라"고 부탁하는 한편, "필요하다면 팀이 비용을 전액부담할 테니 드래프트 사전 캠프에 참석하지 말고 하와이로 2주간 휴가를 가라"고 제안했다. 심지어 새크라멘토 킹스가 피펜을 알아채면 어떻게 될까라고 밤잠을 설쳤다는 일화도 있었다. 당시 불스는 8위, 킹스는 6위 지명권을 지녔기 때문이다.
참고로 크라우스는 좀 특이하게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 이런 씨알도 안 먹히는 제안을 다른 선수에게 한 적도 있는데, 피펜을 뽑은 다음 해인 1988년 드래프트를 앞두고 1라운드 지명이 확실시되는 댄 멀리(썬더 댄이란 별명을 가진 백인 선수로 외곽슛과 운동능력이 뛰어났으며, 올스타에도 세번 뽑혔다)에게 "우리가 2라운드에서 지명해줄테니 다른 팀과 워크아웃을 거부하게"란 택도 없는 제안을 했다. 말리는 너무 당연하게도 "거부하겠습니다. 1라운드에 뽑혀야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는데요"라고 답했다. 돈 문제를 떠나 한 팀의 지킨다는 확신도 없는 말만 믿고 워크아웃 거부란 무리수를 두는 건 바보짓이다. 보통 워크아웃 거부는 해당 팀에 대한 지명 거부로 해석된다.(물론 지명이 확실시되는 초대형 유망주의 경우 아예 일괄적으로 워크아웃 자체를 안하는 경우는 있다) 대놓고 "난 당신 팀 가기 싫다"고 하진 않는 게 예의이자 불문율. 실제로 멀리가 이렇게 했다가 시카고가 쌩깠다면, 멀리 정도의 대형 유망주가 안 뽑힐리는 없겠지만 지명된 팀과 좀 서먹했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이 때문에 싫어하는 팀에 뽑혀서 트레이드를 추진해도 겉으로는 일단 기쁜 척을 한다. 실제로 공개적으로 밴쿠버 그리즐리스 행을 거부했던 1999년 2번 지명자 스티브 프랜시스는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근데 크라우스는 다른팀이 피펜을 가로챌까봐 두려워했고, 피펜은 워크아웃을 통해 자신이 NBA 레벨의 선수임을 확인시켰다. 크라우스는 불안감이 증폭되었고, 결국 시애틀 슈퍼소닉스와 협상을 하게 되고, 피펜은 전체 5순위로 시애틀에 지명되고 바로 그날 전체 8순위로 지명된 올덴 폴리니스[11]와 트레이드 되어 불스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올덴 폴리니스와 스카티 피펜의 모자 교환. 당시에는 별것 아닌 광경이지만 이것이 불스왕조의 초석임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당시 드래프트 데이 광경을 보면 피펜의 이름이 불리는 순간 관중석에서 야유가 터져나온다. http://www.youtube.com/watch?v=8S8tOKJPZ-Q
2.3. 시카고 불스
2.3.1. 초반 3연패의 주역 그리고 올림픽 금메달
시카고에 입단한 후 그는 마이클 조던과의 연습을 통해 성장해 갔다. NBA를 소개하는 루키잡지에 피펜 관련 칼럼을 보면, 둘의 초창기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 조던은 당시 피펜을 그 특유의 제왕적 기질로 갈궜다고 한다. 하지만 피펜은 불만을 터트렸다거나 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오히려 필사적으로 덤볐다고. 이유는 바로 자신이 농구선수로서 성공해서 집안을 일으켜야 했기 때문. 하지만 루키시즌과 1990년 플레이오프때는 나약한 모습을 많이 보여서 비판받기도 했다. 1990년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 7차전때 알 수 없는 두통에 의해 10개의 슛 중 9개를 놓치게 된다. 그리고 피펜 본인도 이때부터 디트로이트 배드 보이스라면 이를 갈았을듯. 당시 디트로이트의 육탄전에 가까운 수비에 시달렸고 데니스 로드맨에 의해 턱에 흉터가 생기기도 했다.1990년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배드 보이스는 지독하도록 피펜을 괴롭혔는데 조던 룰을 피펜에게도 어느 정도[12] 적용했다고 보면 된다. 그 전까지는 조던 한 명만 잡으면 되기 때문에 조던룰[13][14]로 조던만 막는데 주력했다. 그러나 피펜이 점점 성장하면서 위협으로 작용하자 무지막지한 구타를 피펜에게도 적용한 것이다.
1991년 플레이오프에서는 그 원한이라도 되돌려주려는듯 시카고는 디트로이트를 4전전승으로 처바르고 파이널에 오르게 된다. 상대는 매직 존슨이 이끄는 로스엔젤레스 레이커스. 1차전을 패한 후 내리 4연승을 하며 우승을 하게 된다. 원래 불스는 조던에게 매직 존슨의 수비를 전담시켰으나 당시 불스 공격까지 거의 전담해야 했던 조던에게 지나친 짐이라 여겨 2차전부터 조던과 피펜이 번갈아가며 매직을 막게 된다.[15] 피펜은 이때 매직을 끈질기게 괴롭히면서, 공수양면에서 대활약하게 된다. 1993년까지 3개의 우승반지를 끼우게 된다. 그리고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드림팀1)에 선발되어 금메달도 목에 걸게 된다.
2.3.2. 구단과의 불화, 돌아온 조던, 또 한번의 3연패
그런데 피펜에게는 한가지 걸림돌이 있었다. 바로 슈퍼스타인 그에게 걸맞지 않은 형편없이 낮은 연봉 때문이었다. 그가 신인시절 맺은 계약은 7년간 2천 2백만 달러. 언뜻보면 당시에 연간 약 300만 달러를 받는것 같아 보였지만, 첫해 그의 연봉은 약 72만달러 정도였고 연봉지급의 인상과 삭감폭이 너무 심했다. 그리고 그 계약기간이 남아있던 1990-91시즌에 무려 1997-98시즌까지 이어지는 계약을 다시 한 번 체결하는데, 이는 피펜의 입장에선 두고두고 후회할만한 선택이 되었다.당시 불스는 61승을 거뒀지만 초반까지만 해도 별다른 전력보강이 없어 확실한 우승후보로까지는 여겨지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또 조던과 아이들이 될게 유력했기 때문. 피펜은 1990시즌 올스타에 선정됐지만 확실한 스타급 플레이어라기엔 아직 부족했고[16], 피펜 본인이 예전에 등 통증으로 고생한 적이 있어 본인의 커리어에 대한 의구심이 강했다.[17] 그러던 와중에 시즌 내내 제리 크라우스와 구단주 제리 라인스도프는 유러피언 센세이션 토니 쿠코치에게 꽂혀있었고, 심지어 시즌 도중 그를 보러 유고슬라비아를 방문하기까지 한다. 당시 이들은 가드를 주로 보던 쿠코치를 주전 PG로 쓰겠다고 공언했지만[18] 실질적으로 스몰포워드를 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피펜은 이에 불안해하게 된다. 이 때문에 피펜은 시즌 내내 연장계약을 요구했고, 두 제리가 유고에 가 있는 동안 언론에 불만을 토로하는 사고를 친다. 결국 구단주 라인스도프가 돌아와 한바탕 노발대발을 한 이후 피펜의 소원대로 연장계약을 한 것. 사실 당시 기준으로 피펜의 연봉은 그의 리그 내 입지를 고려했을때 오히려 후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훗날 피펜이 1991-92시즌을 기점으로 슈퍼스타가 되고, 리그 평균 연봉이 큰 폭으로 오르면서 노예계약이 된 것.[19]
한편으로 그는 1994년에 입단한 토니 쿠코치의 연봉이 자신보다 높자 팀에 섭섭함과 실망감을 드러냈는데[20], 실제로 피펜은 시카고를 떠날 때까지 쿠코치보다 적은 연봉을 받았다. 심지어는 2차 3핏때 영입했던 론 하퍼[21]는 영입 당시 31세로 클리퍼스에서 평균 20득점대를 올리던 선수긴 했지만 무릎 부상 후유증으로 기량은 계속 쇠퇴중이었고 불스에선 토니 쿠코치에도 밀리는 3~4옵션에 불과한 수준이었음에도 피펜보다 연봉을 많이 받았다. 불만이 안 쌓일래야 안 쌓일 수 없다.
1993-94시즌에 MVP 포디움(탑3)에 들어갈 정도로 맹활약을 펼친 피펜과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낸 호레이스 그랜트, B.J. 암스트롱 등에 힘입어 불스는 55승을 거두고, 좋은 팀케미스트리를 유지한 불스였으나 아래에 서술되는 1994년 플레이오프를 기점으로 이후 1994-95시즌이 시작되면서 불스도 흔들리고 피펜도 흔들렸다. 시즌 시작전 절친이자 팀 동료들이었던 호레이스 그렌트와 빌 카트라이트, 스캇 윌리엄스는 다른 팀으로 이적했고, 존 팩슨은 은퇴하여 전력이 약화되었다. 또한 피펜은 구단이 연장계약이라든지 계약갱신을 해주길 원했지만, 구단은 "당신이 그런 낮은 연봉을 받을선수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돈이 없다."이라고 무시했고, 오히려 그를 트레이드 하려고 했었다. 한국에 발간된 필 잭슨의 저서 NBA 신화에 따르면, 당시 시애틀 슈퍼소닉스가 숀 캠프와 리키 피어스를 매물로 트레이드를 요청해왔었다고 한다.
결국 피펜과 시카고 불스 구단은 돌이킬 수 없는 관계까지 가버렀다. 다음 1994-95 시즌 시카고 불스의 성적은 승률 5할에서 왔다갔다 하는 등 기복이 심했으며, 시즌 60경기까지 치른 시점에서도 30승 30패로 간신히 5할을 맞췄다. 결국 피펜은 "날 보내달라. 시카고 불스만큼 형편없는 구단이 또 있는가? 시카고 구단에게 말한다. 날 보내달라"라며 트레이드 요청을 하기에 이른다. 필 잭슨이 자서전에 언급한 내용에 따르면 자신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주는 곳이라면 아무데나 갈 생각이었다고 할 정도. 그리고 시즌기간인 1995년 1월에 샌안토니오와의 경기도중 심판판정에 항의하면서 의자를 코트에 집어던지는 등 그야말로 막 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조던이 아임 백을 외치며 팀에 돌아오면서 피펜도 잠시 구단에 대한 불만을 참았고, 조던이 피펜을 적극적으로 보호해주면서 불스도 함부로 피펜을 어쩌지 못하게 되었다. 1994-95시즌은 조던과 다른 불스 팀원간의 호흡이 완성되지 못하면서 컨퍼런스 세미파이널에 올랜도 매직에 패해 탈락했지만, 1995년 오프시즌동안 데니스 로드먼을 받아오면서 전력을 강화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당시 NBA최다승인 72승 기록 및 두번째 3연패.[22] 피펜도 조던이 돌아오면서 좀 더 편한 마음으로 경기에 임했고,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에 다시 국가대표로 출전하여 금메달을 목에 건다. 하지만 여전히 구단과의 갈등은 임시봉합에 불과했다. 특히 마지막 시즌이었던 1997-98시즌 같은 경우 피펜은 시즌이 끝나자 마자 수술을 받은 뒤 재활을 거쳐 바로 시즌시작에 맞춰 컴백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수술을 받는 대신 여름 내내 버티다 시즌 시작 직전에 수술을 마쳤는데 이는 피펜이 자신의 낮은 연봉에 대한 대놓고 직접적인 태업으로 보기도 한다.[23][24] 마이클 조던도 이에 대해 실망했지만 스카티 피펜이 팀에서 받는 대우가 워낙에 개차반이었기 때문에 이해한다고 말했을 정도. 그렇게 시카고 불스 구단과의 관계도 1998년 시카고가 여섯 번째 우승을 차지하면서 끝나가고 있었다.
2.3.2.1. 피펜의 연봉에 대한 이모저모
스카티 피펜 같은 선수가 (1997-98시즌 기준으로) 팀내 6위 수준의 연봉을 받는 것은 말이 안되므로 팬들 사이에서 문제의 그 계약에 관한 부분은 "짠돌이 크라우스가 돈 몇푼 아끼려고 피펜을 헌신짝 버리듯 했다"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또한 필 잭슨의 증언에 따르면 피펜이 올스타로 성장한 이후 계약 협상을 원했지만 구단주인 제리 라인스도프는 나랑 협상할 생각 하지 말라며 냉정하게 내쳤다.그러나 실상을 살펴보면 더 복잡한 이유가 있는데, 일단 이 장기계약은 피펜 본인이 간절히 원한 것이었으며 다큐멘터리 The Last Dance에서 나왔듯 제리 라인스도프 시카고 불스 구단주는 피펜에게 더 좋은 계약을 앞으로 따낼 수 있는 상태에서 지금 이런 장기 계약을 받아들이면 후회하게 될거라고 경고했고, 피펜 역시 앞으로 부상 등의 이유로 농구를 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가족을 먹여살릴 수 없는 상황을 걱정했기 때문에 당시에 덥썩 계약을 맺은거라고 씁쓸하게 말한 바 있다.
일단 염두에 둬야할 것은 피펜의 커리어 대부분 기간동안은 현재 팬들에게 익숙한 맥시멈 연봉제도나 루키 스케일같은 제도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NBA는 1990년대를 거치면서 비약적인 성장을 이뤄냈고, 위에 설명되어있다시피 샐러리 캡이 큰 폭으로 성장하면서 장기계약 타이밍을 잘못 잡은 선수들이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이 점에서 피펜과 거의 비슷하게 손해를 본 선수가 바로 팀동료 마이클 조던, 더 심하게 손해를 본 선수가 커리어 내내 받은 연봉이 5천만달러도 안되는 찰스 바클리이다.[25]
두번째로 염두에 둬야할 것은 불스 구단주 제리 라인스도프는 일단 연봉계약에 사인하면 그 누구와도 재협상을 하지 않았으며, 이는 마이클 조던도 포함이었다. 실제로 조던 역시 장기계약에 묶여있던 시기에 노예계약 수준이었던 적이 있었으며, 1996시즌 당시 385만 달러로 리그 32위에 불과했다.[26] 실제로 조던과 그보다 두 살 어린(정확히 말하면 2년 7개월) 피펜은 같은 나이에 장기계약에서 풀려 FA가 되었다. 그런데 똑같이 33세이던 1996년의 조던은 3천만 달러를 받았고, 1998년의 피펜은 불스로부터 맥스 연봉을 제안받지 못한 이유는 둘의 상품성 차이와 더불어 당시 둘의 실력 차이 때문이었다. 피펜은 1998년 이후 올NBA팀이나 올스타 이력을 추가하지 못했지만 조던은 33세 이후 2년을 불스를 위해 뛰면서 1회 MVP, 2회 퍼스트팀 이력, 2회 득점왕, 2회 디펜스 퍼스트팀 등 이력을 추가했다. 사실 1997,98시즌의 임팩트가 워낙 크기에 조던도 피펜과 마찬가지로 연봉 관해 손해를 봤다는 점이 묻히기 쉬운데, 조던은 커리어 통틀어 피펜보다 천만 달러 이상 적게 받았으며 말년에 노화로 인한 기량저하로 먹튀화가 진행된 피펜과 달리 돈값을 못해준 적이 단 한번도 없다는 점에서 피펜보다도 훨씬 억울한 케이스라고 볼 수도 있다.[27][28]
그러나 조던은 피펜과 달리 연봉 외에 올리는 수익만으로 리그에서 압도적으로 가장 부자 선수였기에 피펜과 달리 연봉 계약에 집착하지 않았다.
피펜의 계약현황을 보면 1라운드 5순위로 뽑힌 그는 6년 계약에 사인했고, 당시 완전 무명대학 출신인 그에게 첫해 72만5천 달러는 상당히 후한 수준이었다. 실제로 그보다 3년 먼저 데뷔하긴 했지만 조던의 루키 연봉이 55만 달러였다. 그러나 첫 계약 당시 등 문제를 겪었으며, 구성원 중 두명 (아버지와 형)이 휠체어 신세이던 대가족(12남매이다!)을 부양해야했던 피펜은 하루 빨리 연장계약을 하고자 했다.
피펜의 계약은 1992-93시즌까지 남아있었지만 그는 1990-91시즌 내내 매니지먼트에게 연장을 하자고 졸라댔다. 그러나 불스는 당시 토니 쿠코치를 위해 1~2백만 달러 정도 여유를 샐러리 캡에 남겨두고자 했기 때문에 연장계약에 미적지근했다.
문제는 피펜과 쿠코치의 포지션이 같았다는 것. 미래를 안다면 피펜이 쿠코치 정도에게 위협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겠지만, 피펜은 1990시즌 첫 올스타, 1991시즌엔 올스타 탈락할 정도로 라이징 스타 정도 위치였지 슈퍼스타가 아니었다. 게다가 등 부상으로 인해 커리어가 끝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까지 있었다. 이 상황에서 같은 포지션에 유럽 최고의 선수에게 팀이 눈독을 들이니 불안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결국 구단주 제리 라인스도프와 제리 크라우스가 쿠코치를 보기 위해 크로아티아로 간 사이 피펜은 언론을 통해 공개적으로 연장 요구를 하는 사고를 치고, 라인스도프는 돌아오자마자 피펜과 면담을 갖고 위와 같은 상황 이후 피펜의 소원대로 연장계약을 맺어준다. 이 때 맺은 계약이 기존 2년에 5년을 연장한 7년/1천8백만 달러 계약으로, 피펜은 계약 첫 해인 1990-91시즌에 277만 달러를 받으며 처음으로 백만 달러가 넘는 거액을 손에 쥐게 된다.
피펜은 1993년까지만 해도 고연봉자에 속했다. 이는 조던도 마찬가지로 1992-93시즌 리그 연봉 1위는 로빈슨의 572만 달러, 2위 조던은 4백만 달러, 그리고 피펜은 342만달러로 리그 8위였다. 피펜의 연봉은 드렉슬러나 바클리나 유잉 같은 슈퍼스타들보다 많았으며, 피펜이 1992시즌 세컨팀, 1993시즌 서드팀으로 아직 리그 내 손꼽히는 스타가 아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충분히 후한 액수였다.[29]
문제는 선수들의 연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했다는 것. 1994시즌만 해도 로빈슨이 570만 달러로 1위였지만, 1995시즌에 매직 존슨이 천만달러의 벽을 깬 최초의 선수가 되고(실제로 뛰진 않았다), 그 다음 시즌엔 유잉이 위에 언급된 몬스터 계약, 1997시즌부터는 다들 아는 조던의 3천만 달러 계약 건이 터진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 1997-98시즌까지 계약이 묶여있는 피펜의 연봉은 1990년대 초반 수준에 그치게 된다. 심지어 피펜의 계약은 초반에 많은 액수를 받는 구성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적게 돈을 받게 된 것. 서두에 언급했다시피 조던조차도 재협상을 안 해주는 구단주가 피펜의 계약을 재협상해줄 리가 없었다.
사실 크라우스를 비난하기는 굉장히 뭣한 게, 불스가 피펜을 찬밥대우했다곤 하나 다방면에서 살펴보면 그럴만한 당위성은 있었다. 우선 피펜이 매우 우수한 선수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플레이스타일상 조던과 같은 확고한 에이스가 없는 팀에서 1인자로 팀을 이끄는 데에는 어느정도 한계가 있다. 구단 입장에서 그는 차기 조던으로 밀어줄 선수는 아니었다는 것. 더군다나 실제로 피펜은 아무리 연봉문제로 불만이 많다 한들 1994플옵에서 리더로서의 책임감을 말 그대로 벗어던지며 "피펜은 1인자에 걸맞은 그릇이 아니다." 라는걸 스스로 증명해버렸다. 게다가 애시당초 섣부른 장기계약은 당시 피펜의 의사가 많이 반영된 것이었고, 상기하였듯이 구단 측에서는 해당 계약에 대해 만류의 의사를 내비쳤다. 이미 구단은 도의적인 차원에서 한 차례 그를 말려주었고, 그럼에도 본인 의사로 염가계약을 맺은 이상 구단으로썬 마땅히 뽕을 뽑아야하는 게 맞다. 사실 샐캡상승, 시장상황, 선수 본인의 성장 등으로 인해 기존에 맺은 계약이 의도치않게 서비스타임이 되어버리는 경우는 NBA에서 아주 흔한 일일 뿐이다. 피펜은 그 방면에서 아주 극단적인 사례였을 뿐, 크라우스 단장이나 라인스도프 구단주가 잘못한 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
이 같은 낮은 연봉에 대한 불만은 위에 언급된 1997-98시즌 수술 연기로 이어졌는데, 피펜은 10월 말에 발목 수술을 하고 두달 반 정도를 쉰 후 1월 10일에 복귀했다. 그런데 피펜이 발목에 문제가 생긴 것은 1997년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 당시부터였다. 즉 6월 13일 막을 내린 NBA 파이널 직후에 수술을 했다면 넉넉잡아 9월 중에는 복귀하고 트레이닝 캠프에 합류해 시즌을 준비할 수 있었다는 것. 이 때문에 조던은 피펜의 낮은 연봉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하면서도 "일찌감치 수술을 하고 시즌을 준비했어야 했다"고 언급한 것.[30] 반면 필 잭슨은 "피펜의 낮은 연봉 때문에 보상심리가 있었던 것 같다"면서 이러한 태업은 정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2.4. 불스를 떠난 후
1997-98시즌이 종료되고 피펜은 사인 앤 트레이드 방식을 통해서 휴스턴 로케츠로 이적하게 된다. 계약조건은 5년간 6천7백만 달러. 드디어 원하던 천만달러의 사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팀도 나쁘지 않았다. 비록 클라이드 드렉슬러가 은퇴했지만, 하킴 올라주원이나 찰스 바클리가 건재했고, 여기에 피펜이 왔으니 이 멤버면 우승못하는 게 이상한 정도의 사기 라인업이었다.그러나 이것도 네임밸류만 보면 그런거지 실질적으론 빛 좋은 개살구에 가까웠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먼저 이들의 조합은 좋지 않았다. 하킴과 바클리의 공격범위가 빅맨치곤 넓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로우포스트 기반 빅맨들이었다. 안 그래도 이들의 활동반경이 겹치는데 심지어 이들은 수비범위도 당시 기준으로 그렇게 넓지 않았다(바클리는 원래 수비범위가 좁고 올라주원은 역대 최고의 수비수중 하나였지만 만 36세의 느린 발로는 한계가 있었다). 물론 수비에서 바클리의 구멍은 피펜이 메워줄 수 있긴 했다. 문제는 공격, 피펜은 슛을 안정적으로 넣어주는 선수가 아니다. 결국 포스트업이나 돌파로 해야되는데 로우포스트에 둘이 버티는 팀에서 피펜은 조던 옆에 있을때보다 더한 (공격 한정) 들러리가 되어야했다. 게다가 샘 카셀의 이적 이후 고질적인 문제가 된 포인트 가드 문제를 결국 해결하지 못해 슈팅 가드 두 명을 주전가드로 세워야했을 정도였다. 피펜이 트라이앵글 하에서 포인트 가드 역할을 했지만, 애초에 PG의 리딩력이 거의 필요없는 트라이앵글 오펜스와 포스트맨 두명을 위주로 짜여진 휴스턴은 천지차이였다. 게다가 피펜은 뛰어난 빅맨공격수와 뛰어본 적이 없는 선수여서 게임리딩으로 둘을 살려주는데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시너지는 커녕 1+1=2가 되기도 힘든 라인업.
두번째로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이 늙었다는 점이었다. 올라주원은 써드팀에 오르긴 했지만 예전의 그 드림이 아니었다. 34세가 가까워지던 피펜은 득점원으로선 올스타급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수준이 되어갔다. 바클리는 골밑득점과 리바운드(12.3개)에선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갈수록 저질이 되어가는 수비, 떨어지는 기동력으로 더 이상 엘리트 선수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그 시즌은 단축 시즌으로 팀당 50경기밖에 치르지 않았음에도 10경기나 결장할 정도로 부상이 잦았다. 게다가 30대 중반의 늙은 골밑은 기동력이 심하게 떨어졌고, 각각 평균 10득점 정도 넣던 마이클 디커슨이나 쿠티노 모블리의 득점력에만 의존해 속공 득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즉, 같이 뛰면 시너지가 안 나는 선수들끼리 모였다는 점과 네임밸류에 비해 노장들이라 실제 실력이 훨씬 떨어졌다는 점 때문에 애초에 그렇게까지 대단한 라인업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딱 5할이었던 전 시즌에 비해 6할까지 성적이 올랐으니 마냥 못했다고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해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로스엔젤레스 레이커스에게 1승 3패로 탈락. 피펜은 비난의 화살을 찰스 바클리에게 돌렸다. "그는 열심히 뛰지 않는다. 그는 정말로 우승할 마음이 있었는가? 조던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바클리 때문에 졌다."라고 하였다.[31][32]
피펜이 저런 투정을 할만도 했던 것이 바클리는 나이가 들면서 운동능력과 기동력이 점점 떨어졌음에도 체중부터 시작해 몸관리에 소홀했다. 오프시즌 때면 공을 손에서 놓고 놀기로 유명했는데 젊은 시절에는 충만한 재능으로 커버가 됐지만, 관리가 필요한 말년에 와서도 몸만들기에 힘을 쏟지 않았다. 툭하면 부상으로 결장할 정도로 시즌 내내 몸상태가 안좋았는데, 본인은 물론이고 말년에도 몸관리에 철저했던 조던을 봐왔던 피펜 입장에서는 바클리가 못마땅해 보이는 게 당연지사. 실제로 바클리와 피펜은 사이가 매우 안 좋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정작 바클리는 휴스턴을 떠나서 은퇴를 하려다 피펜과 계약한다는 소식을 듣고, "피펜이 온다면야"하면서 연봉 150만 달러의 헐값에 휴스턴과의 계약을 갱신했다. 특히 바클리는 "나에게 피펜같은 동료가 있었다면 조던이 가지고 있는 트로피중 절반은 내것이었을 것이다." 라는 발언까지 하며 피펜을 선수로서 대단히 높이 평가하고 존중해줬었다. 바클리가 우승에 얼마나 목이 말라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바클리 입장에서는 자발적인 페이컷까지 해가며 피펜과 팀이 계약할 수 있도록 도왔고, 실제로 피펜은 합류 초기에 이에 대해 고마워했는데 1년만에 런을 하려는 꼴이니 빡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게 시발점이 되어 둘의 관계는 험악해졌고, 결국 휴스턴은 그를 다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로 트레이드 시켰다. 당시 피펜의 네임드가 워낙 높았기 때문에 그의 샐러리를 맞추기 위해 포틀랜드는 무려 여섯명의 선수를 휴스턴에 퍼줬다.[33][34]
당시 포틀랜드는 명문팀으로 가기 위해 아낌없이 현질중이었다. 포틀랜드의 구단주가 바로 빌 게이츠의 동업자이자 친구인 폴 앨런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멤버가 라쉬드 월라스, 스티브 스미스, 브라리언 그랜트, 데이먼 스타더마이어, 아르비다스 사보니스, 데틀레프 슈램프, 본지 웰스, 저메인 오닐 등등의 후덜덜한 라인업이었다. 여기에 피펜까지 가세했으니 포틀랜드는 단숨에 우승을 노릴 수 있는 팀으로 거듭났다. 비록 피펜은 나이와 부상 덕택에 기량은 다소 저하되었으나 그 특유의 센스와 강력한 수비력은 변함없었다. 정규시즌에서 무려 59승을 거두며 2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컨퍼런스 파이널에서는 레이커스와 7차전까지 가는 대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최종 7차전에서 믿기지 않는 역전패를 당하며 아쉽게 탈락하고 말았다. 재미있었던 것은 바로 이 당시 상대팀 감독이 그와 고락을 함께 했던 필 잭슨이었다는 점이다. 피펜은 후에 이때가 자신의 농구경력에서 제일 아쉬운 한해였다고.[35]
적이 별로 없다는 생각 탓인지 시카고 불스를 떠난 이후로 그후 그는 수 년간 포틀랜드의 정신적 지주로써 활약했지만, 시카고 불스만한 포스가 없었다. 더군다나 포틀랜드가 Jail Blazers[36]라는 조롱과 비판을 받았을때, 팀을 바로 잡아주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37] 포틀랜드에서 다사다난한 4년의 시간을 보낸후 피펜은 자신의 커리어를 시작한 시카고 불스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2.5. 친정팀으로의 복귀, 그 이후
전과 달리 구단은 그를 환영했고, 팬들도 다시 돌아온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시카고는 당시 리빌딩 중이었는데, 피펜은 젊은 선수들을 이끌어 줄 베테랑이자 멘토로서 필요한 존재였다. 피펜도 경력을 시카고에서 마무리짓는것 외에도 불스의 구단임원으로의 진출도 꿈꾸고 있었지만, 부상으로 인해 많은 경기를 결장하면서 실질적으로 전력상엔 별 도움이 되지 못했고 결국 피펜은 2003-04시즌이 끝난 후 은퇴를 선언했다.스웨덴 리그에서 알바뛰는 피펜(2008년)[38]
그래도 2010년 1992년 미국 올림픽 국가대표 농구팀 자격과 개인 자격으로 미국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감격을 누리기도 했다. 이때 한해 먼저 헌액된 조던의 축하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2010년부터 시카고 불스의 홍보대사로 재직 중이다. 드웨인 웨이드에게 팀 레전드에 대한 예우가 없다며 디스를 당한 것이 이런 결과를 이끌어냈다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현역 시절 구단과 그렇게 치고박고 싸웠으면서도 팀의 한 자리를 내어준 것에 대해 팬들은 긍정적인 반응이다.
그리고 2010년에 시카고 불스측에서 드디어 피펜의 동상까지 만들어주었다. # 비록 반신상이고, 유나이티드 센터 정면에 있는 조던의 동상에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피펜에 대한 예우로서는 충분한 보답이 된 듯. 그리고 지금은 홍보대사라는 이름에 걸 맞게 팀의 행사나 경기에 얼굴을 비추며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시카고 불스 홈경기에서 자주 얼굴을 비춰주니 올드팬들은 찾아 볼 수 있다.
3. 플레이 스타일
농구 역사에서 손꼽히는 공수겸장. 현대농구에 포인트 포워드라는 개념을 대중화시킨 선수로 평가되기도 한다.[39][40] 평균 득점 20점대를 기록할 수 있는 득점력 및 역대로도 정상급으로 평가받는 수비력, 게임리딩과 볼배급 및 우수한 리바운드 능력까진 공수겸장 웰라운디드 포워드. 사이즈, 힘, 운동능력, BQ가 모두 좋아 할 수 있는 게 많았던 선수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3.1. 리딩과 공격력
실제로 피펜은 트라이앵글에서는 꼭지점을 맡아 주로 하이포스트(자유투 라인 주변)에 자리잡고 공을 돌리는 역할을 주로 했다. 이 때문에 불스에서 1차, 2차 3-peat 당시 볼 소유시간이 가장 길고 어시스트가 가장 많은 선수는 피펜이었다. 피펜과 함께했던 존 팩슨, BJ 암스트롱, 론 하퍼 등의 포인트 가드들은 모두 탑에서 공격을 주도할 능력이 되는 전형적인 포인트 가드라고 보기 힘든 선수이다. 팩슨과 암스트롱은 3점 슛 스페셜리스트이고 하퍼는 스윙맨이 원래 포지션이었다. 트라이앵글 시스템 특성상 1번이 탑에서 경기를 주도하지 않는 것도 있지만 그만큼 피펜의 시야와 패스웍이 출중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경기 조율을 전담했다고 할 수 있다. 2020년대인 지금은 포워드들이 곧잘 리딩롤을 장착하고 나오지만 당시에는 이런 스타일이 정말 획기적으로 받아들여졌다.[41]특이한 점은 볼핸들링이 포인트 가드 역할을 볼 정도로 매우 뛰어나지만 드리블할 때 공의 위치가 매우 높다는 것. 장신 포인트 가드들이 공통적으로 그렇긴 하지만 피펜은 그 정도가 더 심해서 속공할때는 종종 머리까지 공이 올라온다. 피펜의 신장은 2미터 초반이지만 워낙 팔다리가 길어서 드리블시 약간 허우적 하는 느낌이 드는 편. 그러나 돌파나 볼 운반시 실책은 거의 일어나지 않으며, 핸들링 안정성은 충분히 보장되는 선수였다.
다만 중장거리 슈팅과 자유투가 약한 건 약점이었다. 커리어동안 32.6%의 3점 슛 성공률과 70.4%의 자유투 성공률로 스윙맨 기준으로는 2022년 현재는 물론이고, 당시 기준으로도 중장거리 슛이 나쁜 선수이다.[42] 들어갈 때는 괜찮게 들어가는데 안 풀리는 날은 슛이 림을 빗나가기 일수였다. 스티브 커에 의하면 필 잭슨 감독이 피펜의 이런 모습을 두고 "sometimes a shooter"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피펜은 전성기 때 1시즌반을 빼놓고 마이클 조던과 함께 했다. 조던에게 수비가 몰리는 와중에 비교적 헐거운 수비를 상대로 저 수치를 낸 것. 전성기 (1992~96) 때는 돌파능력과 포스트업에 이은 골밑 마무리 능력이 좋아 높은 필드골 수치를 기록했지만 1997-98시즌, 특히 플레이오프에서는 중거리 비중이 커지면서 효율이 굉장히 떨어졌다.[43] 다만 피펜의 슛거리 자체는 길었기 때문에 한번 삘받으면 슛이 족족 들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이 때문에 그는 파이널에서 한 경기 최다 3점슛 기록 (7개)을 10년 넘게 보유했었고 ( 케니 스미스와 타이), 터질땐 또 슈퍼스타마냥 터지기도 했다.[44] 문제는 안정적이지 않았다는 것.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그가 1옵션이 되어서 공격을 주도하는데 한계가 있던 것이다. 슛 시도가 많으면 많을수록 상대팀 입장에선 땡큐이니까.[45]
전성기 기준으로 피펜은 203cm란 스몰 포워드로선 남부럽지 않은 키, 탄탄한 근육질 체형, 긴 팔을 활용한 돌파와 포스트업에 이은 훅슛, 그리고 단거리 점퍼로 주로 득점하는 선수였다. 이 점에서 볼 때는 1980년대에 뛰던 스몰 포워드들과 비슷했으나 피펜은 거기에 중장거리 점퍼 능력까지 갖추었다. 피펜의 장점은 어마어마한 운동능력[46]과 뛰어난 피지컬, 팀 플레이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 공간침투 능력이 뛰어났고, 이를 기반으로 백도어 컷인하거나 스크린을 타고 돌파해 패스받아 마무리하는 능력이 뛰어났다는 것이다.
반면 그는 Shot Creation, 즉 개인기를 통해 수비를 떼어내거나 공간을 확보하는 능력과 슈팅 터치 자체는 좋지 않은 선수였다. 자유투 성공률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불스 시절만 치면 6할 후반대였던 그의 슈팅 터치는 당대 3번치고도 투박했으며, 슛이 터지는 날에도 오픈이 평소보다 잘 긁히는거지 조던처럼 수비달고 풀업/페이더웨이를 던져 고효율로 넣는 그런 타입은 아니었다. 또한 피펜은 풀코트에선 매우 빨랐지만[47] 조던같은 선수처럼 순간적으로 빠르게 움직여 수비를 떼어내는 능력도, 그럴만한 개인기도 없는 선수였다. 이 때문에 위 94년 컨퍼런스 준결승 4차전처럼 팀공격이 막혀서 에이스가 득점을 쥐어짜내줘야할 때 철저히 막혀버린 것.
어쨌거나 그는 불스 시절엔 위 언급된 한계에 부딪힌 94년 플옵을 제외하곤 조던과 함께 했기에 96-97시즌까진 대부분 시즌을 4할 후반대로 괜찮은 수준의 야투율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런 스타일은 단점이 있었는데 첫째로 운동능력에 의존하다보니 피펜의 몸상태가 안 좋거나 체력이 떨어지면(즉 중장거리 슛 비중이 높아지면) 공격력이 크게 떨어졌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수비가 더욱 강해지는 플레이오프에서 (수비를 쉽게 못 떼어내니까) 공격력이 급감했다는 것이다. 포스트시즌의 지배자였던 조던은 (한 시리즈만 뛰었던) 루키시즌과 3년차를 제외하면 단 한번도 야투율이 45%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지만 피펜은 반대로 6년차이던 92-93시즌 이후 45%를 넘은 적이 한번 밖에 없다.(3경기를 치른 01-02시즌) 심지어 3할대로 떨어진 적은 두번 있었는데 한번은 98-99시즌의 32.9%, 한번은 전성기 구간이던 95-96시즌의 39%였다.
즉 피펜은 에이스득점원으로 보기엔 수비를 떼어내고 공간을 확보하는 능력이 떨어지다보니 정규시즌에는 괜찮은 야투율을 유지해도 플레이오프에선 득점원으로서 위력이 급감하는 경향이 있었다. 원래 NBA수준에서 20점 이상 올리는 선수라면 대부분 오픈샷은 당연한 듯 넣는 수준이기 때문에 공간확보가 관건이 된다. 예를 들어 마이클 조던의 포스트업은 겉으로 보기엔 힘을 이용해 상대방을 밀어내는 것 같지만, 드리블 한 두번하는 동안 유리한 위치를 찾아낸 후에 어깨로 살짝 치거나 페이크를 해서 공간확보를 한 다음 그 공간으로 침투해 up&under(페이크 후 스쿱샷이나 레이업 마무리)을 하거나 수비가 적은 쪽으로 돌아 페이더웨이로 마무리한다. 포스트업 페이더웨이에서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지 못하면 터프샷이 되는데, 조던의 페이더웨이가 그토록 정확했던 것은 그의 슈팅터치와 페이더웨이 완성도도 있지만, 위에 서술된 과정을 통해 수비수와의 거리를 떼어놓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데 피펜은 조던보다 힘이 세기 때문에 밀어내는 것까진 잘해도 페이더웨이를 할만한 슈팅터치나, 조던같이 다양한 페이크와 스탭, 빠른 순간움직임으로 돌파를 할만한 능력이 없다. 그러다보니 체격과 힘 차이가 많이 나는 수비수의 경우 밀쳐내고 공간 확보 후 슛, 그 외엔 훅슛으로 마무리하게 되는데 옵션이 제한되다보니 위력에 한계가 있다. 결국 그 뻣뻣한 슈팅터치가 중장거리 뿐 아니라 거의 모든 공격옵션을 제약하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피펜은 커리어 대부분 기간동안 뛰어난 공격력을 지닌 동료들과 같이 뛰었다.[48]
3.2. 수비력
다재다능함, 2인자 마인드등 여러가지가 뛰어났지만 가장 뛰어났던 것은 역시 수비다. 1990~91시즌 세컨드팀에 오른후, 1991~92시즌부터는 8년 연속 마이클 조던과 함께 올 디펜시브 퍼스트팀에 같이 올랐다. 거기다 2차 쓰리핏 땐 로드먼까지 세명이었다. 이건 뭐 벽이 따로 없을 정도. 개인 수비만이 아니라 팀 수비를 업그레이드 시키는 선수였는데 포틀랜드와 LA 레이커스와의 플레이오프 때 적으로 마주하게 된 피펜이 교묘하게 일리걸 디펜스를 하고 있다고 필 잭슨이 주장했던 것이 대표적. 실상 2001년까지 지역방어를 금지하던 시기에 포스트맨에게 집중수비를 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빅맨들이 포스트에서 패스를 아예 받지 못하도록 하는 디나이가 매우 중요했다.[49]어쨌든 빅맨에게 집중수비를 가는 게 힘들었던게 시카고에게 왜 큰 악재였냐면 불스왕조는 올스타급 이상 센터를 가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1차 3연패 당시의 빌 카트라이트는 좋은 수비수였지만 패트릭 유잉이나 샤킬 오닐같은 파워센터들과 맞짱을 뜰만한 선수는 아니었고, 2차 당시 룩 롱리는 공수 모두 NBA주전 센터들 중 평균 이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피펜과 조던, 나중에 가면 론 하퍼 등의 헬프수비가 중요했고, 이 분야 최고봉이었던 피펜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피펜은 자신의 1:1 상대를 락다운시키는 재능은 물론이거니와 디나이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조던이 맨투맨 수비의 최고봉이라면 피펜은 팀 수비의 최고봉이었다. 6-8에 긴팔을 지닌 피펜은 당시 포인트 가드부터 간헐적으로 센터까지 막아내는 수비범위의 선수였고, 이 때문에 누구와 스위치 되어도 막아낼 수 있었다. 이 능력이 부각된 것이 1998년 유타 재즈와 파이널이었는데, 당시 재즈는 스탁턴과 말론의 2대2 플레이가 최고의 무기였다. 이론적으로 말론의 스크린으로 스탁턴이 자유로워지면 그는 바로 슛이나 돌파를 할 수 있었고 이를 막기 위해선 수비 측 파워 포워드나 센터가 스탁턴에게 붙어야 했다. 물론 NBA 빅맨이라면 기동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스위치해서 커버하는데 이 경우 포인트 가드가 말론을 막게 되기 때문에 말론이 (자신을 막을 수 없는) 조그만 포인트 가드와의 미스매치를 이용해 간단히 득점하면 그만이었다.[50] 그러나 스위치되어도 변화가 없다면? 시카고 불스는 포인트 가드부터 파워 포워드들까지 전부 198~203cm 사이에 팔이 긴 선수들이었고, 이들은 포인트 가드부터 파워 포워드까지 막을 수 있는 선수들이었다. 이 때문에 때에 따라 피펜과 로드맨이 스탁턴과 말론 듀오를 막았는데, 피펜은 말론의 파워를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었기 때문에 재즈의 공격은 시리즈 내내 삐걱거렸다.
1998년 동부 파이널 당시 잭슨은 피펜을 마크 잭슨에게 붙히는 승부수를 뒀다. 당시 페이서스 공격의 시발점이었던 잭슨은 191cm의 포인트 가드로 느리지만 강력한 포스트업과 넓은 시야로 동료선수들을 살려주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자기보다 훨씬 크고 팔까지 긴 피펜에게 잭슨은 거의 무력화되었고 턴오버쇼를 펼쳤다. 다만 맨투맨 수비에선 동급의 수비수였던 마이클 조던이 한 수 위였다. 피펜은 자신의 주 매치업이었던 앤퍼니 하더웨이를 96플레이오프에서 거의 날뛰게 했고, 하더웨이는 조던이 막을때 훨씬 고생을 했다.
그러나 피펜의 가장 뛰어난 점, 그리고 조던보다도 확연히 앞서는 점은 헬프수비를 포함한 팀수비였다. 피펜은 자기 매치업을 견제하면서도 필요할때마다 더블팀을 들어가 압박을 가하는 실력이 만렙이었다. 하더웨이, 그랜트 힐 등 폭발적인 공격수를 막던 피펜은 필요할때마다 중앙으로 들어가 빅맨들을 괴롭혔고[51], 외곽에서 기습적인 더블팀으로 가드들을 압박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그 누구보다도 넓은 수비범위를 자랑했으며 팀 수비를 견고히하는 점에 있어서 그야말로 리그 최강이었다.
불스는 여기에 수비왕까지 먹었던 마이클 조던이 미친듯이 1대 1 수비로 상대 에이스를 압살했고, 피펜의 지능적인 디나이로 상대의 패스흐름을 턱턱 막아제끼고, 호레이스 그랜트, 데니스 로드맨의 강력한 대인마크로 상대 빅맨을 지치게 만들고, 카트라이트 역시 수비력은 좋았으며, 룩 롱리, 윌 퍼듀 같은 별거 아니어보이는 센터들도 인간 방패 역할 정도는 무난하게 해냈다. 그 막강한 디펜스 때문에 상대팀이 압살을 당할 수 밖에 없었을 정도.[52] 잭슨은 이를 알고 있었으며 심판콜에서 득을 보기 위해 언론플레이를 하는데 매우 능했다. 이런 식의 언론플레이를 하는 감독 중 대표적인 또 다른 케이스가 팻 라일리였는데, 이들이 이끄는 불스와 닉스가 1992~94년 3년 연속으로 플레이오프에서 만나 혈전을 벌일때는 경기장 내에서만큼이나 경기장 밖에서 두 감독의 언플의 향연이 펼쳐졌다. 잭슨이 닉스가 거칠다고 불평을 하면 라일리는 심판이 조던이 슈퍼스타라 봐준다고 응수하는 식.
또한 피펜은 적극적으로 수비를 했는데 틈만 보이면 항상 스틸을 시도했다. 때론 의도적으로 포인트 가드를 막을 때도 있었는데[53] 상대를 압박해서 하프코트조차 넘기 힘들게 만들었고, 넘어와서도 손을 쉴새없이 움직여 제대로 된 패스를 하기 힘들게 할 때도 많았다. 포스트 업 수비시에도 안쪽으로 못 들어오게 막으면서 스틸을 시도하거나 턴오버를 유발했었다. 역대 플옵 통산 스틸 1위가 그러한 것을 반증하는 수치. 스틸을 노리는 수비는 실패시 대응이 어렵다는 점에서 도박수비로 불린다. 그런데 압박+스틸을 시전하면서도 수비를 철옹성같이 유지했다는 점이야 말로 피펜의 능력. [54] 그래도 만약 당시 약체 필라델피아와 토론토가 플레이오프 진출했다면 불스가 기본적인 전력이 워낙 앞서기에 3-0으로 완전히 제압했을 것이다. 당연한 것이 일단 전체적인 전적 자체도 불스가 앞서고[55], 일단 정 안되면 이들에 대한 수비는 평상시에 하는 론 하퍼 대신 조던이 직접 나서면 된다. 득점부담이 크고 도움수비를 많이 하는 조던에 대한 체력안배 때문에 부담되는 큰 단신가드 수비를, 득점에서 별 역할이 없는 하퍼에게 맡기는거지 민첩성과 수비센스, 체력 모두 조던이 압도적으로 뛰어나다. 실제로 후반 3연패 당시 조던은 이미 팀에서 피펜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수비수였으며, 하퍼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득점원이 있을때 나서서 막는 맨투맨 수비 최종병기같은 존재였다.[56]
당연하지만, 수비력으로는 스몰 포워드 포지션에서 카와이 레너드와 더불어 역대 최고 중 한 명이며 모든 포지션을 포함해도 빌 러셀에 버금갈만큼 역대 최고의 수비수 중 하나이다. 교묘한 일리걸 디펜스의 일화에서 보듯 당연히 역대 최고수준의 팀 디펜스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맨투맨 디펜스 능력 또한 스몰 포워드 포지션에서 최고수준인 동시에 역대 최고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1991년 파이널에서의 매직 존슨을 수비한 것이 대표적인 예. 당시 매직 존슨은 31살의 최전성기였으며 서부 플옵에서 승승장구하며 파이널에 올랐는데, 피펜과 조던의 맨투맨 수비에 경기조율에 큰 어려움을 겪으며 결국 우승을 시카고 불스에 내주었다.[57][58]
그 외에도 파이널 및 플레이오프에서 코비 브라이언트, 레지 밀러, 클라이드 드렉슬러, 찰스 바클리, 칼 말론등 기라성같은 레전드 에이스 플레이어들을 전담마크했을뿐만 아니라[59] 팀 디펜스로도 만능 살림꾼 역할을 했다. 화룡점정으로 선수생활 말년 포틀랜드 시절, 플레이오프에서 당시 우승팀 레이커스의 코비 브라이언트를 수비한것으로 명성을 더욱 드높였는데, 이 당시 코비를 상대로 락다운 디펜스를 시전하는 동시에 팀 수비의 앵커로서 전방위적인 수비사령관의 역할을 동시에 해냈고, 당시 천하무적 LA 레이커스에게 큰 위기를 선사한 점에서 피펜을 중심으로 한 포틀랜드 팀 디펜스의 위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맨투맨 및 팀 디펜스의 핵으로서 최강팀을 상대로 업셋의 순간까지 간 것은, 비록 연이은 부상으로 운동능력을 상실했음에도, 피지컬에 의존하지 않는 노련한 수비만으로 천하무적 레이커스를 몰아붙일 정도인 그의 수비력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한동안 그의 수비력은 동 포지션에서 비교할 만한 선수조차 없었으며, 포워드 가운데서 찾자면 1970~80년대에 활약했던 명예의 전당 포워드 바비 존스[60] 정도. 모든 포지션을 통틀어 최고의 수비수 중 한 명으로 거론되는 피펜이기에 다른 선수들과 비교하기 어렵다. 피펜은 팀 디펜스로는 현존하는 모든 수비기술에 능했고 맨투맨 수비역시 완벽했으며 빠른 손놀림으로 스틸역시 플레이오프 통산 1위에 올라와있을 만큼 가로수비 세로수비 모두 통달했다. 무엇보다 그의 진가는 큰 경기에서의 클러치 디펜스가 완벽했는데, 앞서 언급한 커리어 말기 포틀랜드 시절 레이커스를 상대로 한 디펜스뿐만 아니라, 전성기 시절의 클러치 디펜스는 상대적으로 스몰마켓이자 짠돌이 구단주를 보유했던 시카고 불스를 조던과 함께 6번 우승시킨 원동력이었다. 그나마 2014년 이후 스몰 포워드 포지션에서 2연속 DPOY를 받은 카와이 레너드가 등장해서 피펜과 비교할만한 만능 수비수로 평가받고 있다.
다만 이는 2014년부터 바뀐 디펜시브팀 및 수비왕 선정방식의 변경에 따른 것이 크다. 이전에는 수비왕을 기자단및 언론에서, 디펜시브팀을 감독들이 선정했지만 위에언급된 2014시즌부터는 기존의 수비왕및 디펜시브팀도 전부 기자및 언론에서 투표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어떤 방식이 더 객관적이고 검증되었는지는 논란이 될 수 있지만, 4번이나 수비왕을 받았던 디켐베 무톰보나 수비왕을 각각 1번, 2번씩 수상했던 데이비드 로빈슨, 하킴 올라주원 중 누가 더 뛰어났는지 단정적으로 말하긴 어렵다. 수비 왕이 전부라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 또한 어느 정도 객관적인 수치가 있는 공격과 달리 수비력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어떤 선수가 특급수비수다,라고 할 순 있어도 특급수비수 A와 B 중 누가 더 뛰어나다고 하기는 매우 힘들다. 농구는 공격수가 절대적으로 유리한 경기라 특급 수비수라도 대량 실점을 할 수도 있고, 스틸/블럭으로 드러나지 않는 좋은 수비도 있고 (대표적으로 역대급 수비수인 데니스 로드맨의 스틸/블럭은 각각 1개 수준이다) 팀동료들의 영향도 받기 때문에 +/- 수치만으로 판단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때문에 피펜이 래리 버드보다 훨씬 뛰어난 수비수라고 하는 건 쉽지만, 똑같이 역대급인 피펜과 레너드 중 누가 더 뛰어나다고 하는 건 매우 힘들다.
4. 비판
4.1. 1994년 플레이오프 흑역사
1993-94시즌 피펜은 생애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MVP투표 3위, 팀성적 55승, 올스타전 MVP까지 타는 등 마이클 조던의 사이드킥을 넘어 리그를 대표하는 슈퍼스타 중 한명으로 인정받게 된다. 그런데 그야말로 빛나는 모습을 보였던 이 시즌은 피펜 커리어에서 가장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 해이기도 하다.사건은 1994년 동부 준결승 3차전에서 일어났다. 치열한 라이벌이던[61] 닉스와 불스의 대결은 전국적인 관심을 모았으며, 홈코트 어드밴티지를 갖고 있던 닉스가 1,2차전을 따냈지만 3차전에서 공격이 되살아난 불스가 접전 끝에 승리, 7차전까지 접전을 펼치며 아쉽게 패배한다. 결과만 보면 전혀 피펜이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 두 팀의 성적 차이는 4승에 불과했지만 닉스는 동부에서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였으며, 역대 최고의 선수인 마이클 조던을 잃은 불스가 저렇게까지 접전으로 끌고 간것도 대단한 것이었다. 피펜은 21.7점 7.7리바운드 4.7어시스트 2스틸을 기록했으며, 40.5%란 야투율이 아쉽긴 했지만 리그에서 독보적으로 높은 디펜스 레이팅과 가장 적은 실점을 기록하는 닉스를 상대로 저 정도면 잘했다고 할 법했다.[62]
문제는 3차전에서 피펜의 태도였는데, 종료시간이 1.8초가 남은 상황에서 필 잭슨 감독이 마지막 슛을 피펜이 아닌 쿠코치에게 맡기고 그에게 인바운드 패스를 맡기자, 그는 출전을 거부하고 벤치에 앉아버렸다는 것. 심지어 쿠코치가 이 슛을 성공시키면서 피펜은 전국구적인 비난을 받게된다.
4.1.1. 전개
당시 경기흐름을 보면 3쿼터까지 불스는 닉스를 압도하며 89대 70으로 압도하고 있었다. 이 점이 얼마나 대단했냐면 당시 닉스는 리그 1위 수비팀이었고, 불스는 1,2차전에서 경기 통틀어 86점, 91점 밖에 득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3쿼터만에 89점이나 넣어버린 것으로 불스의 화력이 닉스의 짠물수비를 압도한 것. 그러나 운명의 4쿼터에 불스는 닉스의 수비에 밀려 15점에 그쳤고, 닉스는 공격이 살아나며 (비록 지긴 했지만) 32점이나 넣는다. 실제로 불스는 4쿼터 시작후 5분 30초동안 자유투로 1점을 넣는데 그쳤고, 그 기간동안 닉스는 13점을 추가하며 바짝 추격했다. 이후 닉스가 야금야금 점수를 좁혀가며 종료 3분 기점을 넘었을 때 98대 92, 6점차까지 점수차이를 좁히는데 성공한다.이후 불스는 BJ암스트롱이 기가막힌 풀업 롱2를 넣은 2분 35초에 점수를 100대92까지 벌린다. 그러나 닉스는 볼을 받은 유잉이 스핀으로 수비를 제끼고 베이스라인 점퍼를 넣어 100대94, 다음 공격권에 확률 높은 공격을 하고 있던 암스트롱이 과감한 골밑돌파로 자유투를 얻어내며 둘 중 하나를 넣어 다시 점수차는 101대94. 이때 불스와 닉스는 에이스 맞대결 모드로 들어간다. 이어지는 공격권에서 불스는 다른 선수들의 슛을 우려해[63] 유잉에게 더블팀을 약간 느슨하게 했는데 유잉이 이틈을 타 포스트업 후 페이더웨이를 넣으며 점수차는 101대 96, 5점차까지 줄어든다. 이후 존 스탁스가 톱에서 볼을 갖고 있던 피트 마이어스가 공을 놓치게 집중수비하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볼을 다투는 과정에서 파울을 해버려 마이어스가 자유투 1개를 넣으며 점수차는 102대 96이 된다. 다음 공격권에서 닉스는 유잉에게 볼을 투입, 기가막힌 타이밍으로 수비수 카트라이트와 몸이 떨어졌을때 엔트리패스를 받은 유잉은 원드리블 돌파 후 그의 수비를 제끼고 골밑슛을 넣으며 점수차를 4점차로 줄인다.
이렇듯 유잉과의 에이스대결에서 피펜이이 뭔가 해줘야하는 상황. 이때 샷클락 6초를 남겨두고 패스를 받은 그는 메이슨의 수비에 막혀 페이더웨이 슛을 놓친다. 반면 3점라인 밖에서 패스를 받은 유잉은 카트라이트를 제끼고 과감히 돌파하더니 커버들어온 피펜까지 제끼고 레이업을 성공, 점수차는 2점차가 된다. 29초를 남기고 2점차였기에 불스는 단순히 시간끌기만 할 수 없고 득점을 성공시켜야 하는 상황.
타임아웃 후 필 잭슨 감독이 그린 플레이는 바로 피펜의 아이솔레이션 플레이였다. 샷클락에 13초를 남겨두고 하프코트에서 볼을 받은 피펜은 메이슨과의 1대1상황에 놓인다. 그런데 피펜은 스탭을 밟으며 돌파를 노리다가 제자리에서 8초나 허비하고 만다.[64] 결국 메이슨의 수비를 전혀 제끼지 못한 피펜은 수비를 달고 다급하게 던진 3점이 백보드 위쪽을 맞고 튕겨나오면서 샷클락 바이얼레이션을 범하고 만다.[65] 그렇게 5.5초를 남겨두고 마지막 공격기회를 얻은 닉스. 이들은 다시한번 에이스 유잉에게 공을 맡겼고 로우포스트에서 볼을 받은 그는 특유의 강한 원투스탭 이후 드리블 러닝훅슛[66]으로 동점슛을 넣는다.
널리 알려지지 않은 부분인데 이때 피트 마이어스와 피펜 둘이서 엄청난 본헤드 플레이를 할뻔한다. 유잉의 득점 후 골밑에서 볼을 잡은 피펜은 갑자기 (인바운드 패스를 준비하던) 마이어스에게 서둘러 패스를 준 후 달려나가기 시작한 것. 다행히 그 전에 필 잭슨 감독이 타임아웃을 요청한 것이 인정되어 인바운드 패스 자체가 무효처리, 1.8초가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만약 이때 패스를 그대로 받았다면 허무하게 1.8초를 흘려보내고 피펜이 하프코트 뒤에서 절박한 슛을 던져야 했을 것이다. 타임아웃이 없다고 착각하고 이런 짓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잭슨이 미리 타임아웃을 불러두지 않고 선수들에게 맡겼다면(NBA는 볼을 든 선수가 타임아웃을 부를 수 있다) 희대의 본헤드 플레이가 됐을 것이다.[67]
4.1.2. Sit Down 사건
절체절명의 순간에 피펜은 팀의 에이스인 자신이 마지막 슛기회를 얻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위에 서술된 것처럼 4쿼터 내내 득점에서 별 도움이 안되었고, 슛감도 엉망이었던 그에게 (받자마자 던져야 하니까 당연히 장거리슛이 될 수 밖에 없는) 마지막 슛기회를 맡기는 것은 무리였고, 필 잭슨 감독은 그가 아닌 208cm 장신에 슈팅력이 뛰어난 토니 쿠코치에게 기회를 맡기기로 한다.[68]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피펜은 잭슨과 언쟁을 벌인 후, 인바운드 패스를 하라는 감독의 지시 자체를 거부하고 벤치에 앉아버린다. 위에 언급된대로 쿠코치는 이 슛을 성공시키면서 불스는 벼랑 끝에서 천금같은 1승을 거두게 된다.그 여파는 무서웠다. 쿠코치의 슛 이후 선수들은 환호했지만 가장 중요한 플레이오프에서 에이스의 항명 사건을 맞이한 필 잭슨은 슛이 들어갔음에도 굳은 표정으로 라커룸으로 향했으며, 경기 후 인터뷰에서 마지막 플레이에 대해 "스카티 피펜은 그 플레이에 없었고 관련되지 않았으며, 자신을 경기에서 빼달라고 요청했고, 전 그를 코트에서 뺐습니다. 그 건에 대해 말할 건 이게 답니다. 그리고 우린 내일 11시에 연습이 있습니다"라고 간단히 설명하곤 추가 질문을 받지 않고 바로 자리를 떴다. 피펜은 후에 라커룸에서 인터뷰를 통해 "필(잭슨)이 절 경기에서 뺐다고 보긴 그렇고...우린 서로 대화를 나눴고 제가 앉은 거죠"라고 말했다. 무슨 얘기를 나눴냐는 질문에 대해선 코멘트를 거부했다.
슛을 성공시킨 쿠코치는 골을 넣었는데도 팀 분위기가 험악한 걸 보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경기 후 팀의 공동주장이자 선수들이 믿고 의지하는 큰형같은 존재였던 빌 카트라이트는 드물게 감정적이 되어 눈물까지 흘리며 "어떻게 감히 동료들을 저버릴 수가 있어, 스카티?" 라고 피펜에 대한 실망감을 표했다고 한다. 이에 피펜도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는지 바로 울면서 동료들에게 사과를 했지만 이 사건은 두고두고 피펜의 발목을 잡게 되었다.
비록 간신히 이기긴 했지만 불스가 19점차 리드를 날려먹은 요인은 득점가뭄이었다. 물론 당시 최강이던 닉스의 수비 덕분이지만 1대1공격력이 강한 선수가 없던 불스 특성상 팀공격이 막히면 답답한 모습을 보였다. 문제는 이 상황에서 1대1득점으로 활로를 뚫어주던 조던이 없자 단체로 답답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69][70] 그래도 피펜은 경기 전체적으로 보면 40분동안 야투 20개 중 10개를 넣으며 25점 7리바운드 4어시스트 2스틸을 기록하며 준수한 활약을 했다. 유잉이 34점 (야투 14/19, 73.7%) 9리바운드 4어시스트 2블럭을 기록하며 맹활약했지만 피펜도 평타는 쳐준 셈.
문제는 4쿼터 활약이었다. 3쿼터까지 피펜은 교체되어 나가기 전까지 야투 16개 중 9개를 넣으며 (56.3%) 23점을 넣어 오히려 유잉(20점)보다 많이 넣고 있었다. 그러나 4쿼터에서 유잉이 고감도 야투율로 14점, 그것도 결정적인 순간에 넣은 반면 피펜은 훅슛 하나 넣으며 단 2점에 그치고 만다. 심지어 피펜은 스타일상 자유투를 많이 얻어내는 편도 아니기에 자유투도 경기 통틀어 세개 밖에 못 얻어내고 4쿼터엔 단 하나도 못 얻어내 공격에선 도움이 거의 되지 못했다. 이렇듯 피펜은 마지막에 공격기회를 계속 잡았지만 전혀 득점을 못했고, 반면 유잉은 팀이 101대 94로 뒤지고 있을 때부터 실패없이 필드골 4개를 시도해 모두 성공, 8연속 득점을 해 불스의 7점차 리드를 혼자 힘으로 없앴다.[71] 그것도 경기를 보면 알겠지만 다른 선수들이 수비를 끌어온 후 패스를 받아 득점한 것도 아니고[72] 자기가 수비를 떼어내 득점한 것이다.
즉, 냉정하게 판단하면 잭슨의 결정이 백번 옳았다. 에이스로서 유잉이 팀을 캐리하고 있을 때 피펜은 3점 에어볼을 내거나 드리블 돌파 후 닉스의 수비에 막혀 아무것도 못하고 패스하는 등 무력한 모습을 보였고, 실제로 피펜은 이 경기에서 3점슛 4개를 던져 2개를 성공시켰는데, 3쿼터까지 2개 던져 2개 모두 성공, 4쿼터엔 2개 모두 에어볼이란 극단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야말로 streaky shooter의 전형. 이 상황이니 잭슨이 피펜에게 슛이 지독하게 터지지 않고 있고 원래 슛이 뛰어난 편도 아닌 피펜에게 라스트샷을 맡기지 않는 건 당연한 조치였다.[73] 그는 어디까지나 괴물같은 운동능력을 이용한 속공이나 포스트업 이후 훅슛, 가속이 붙은 상황에서 스피드를 이용한 돌파로 주로 득점하는 선수였지, 조던처럼 아이솔레이션에서 수비를 제껴내는 드리블 실력을 지닌 선수도, 안정적인 슈팅 터치를 지닌 선수도 아니었으니까.
반대로 쿠코치는 피펜보다 훨씬 뛰어난 슈터였으며 NBA 기준으로는 루키였지만 이미 유럽에서 8년이나 (17세에 데뷔) 뛴 베테랑이었다. 게다가 오랫동안 에이스로 뛰어왔기 때문에 스스로 득점기회를 만들거나, 승부가 걸린 상황에서 해결하는 것에도 익숙했다. 게다가 쿠코치는 이날만 슛감이 안 좋았을 뿐 이 경기 전까지 한 시즌 내에 버저비터 위닝샷만 세개나 넣은 선수였다. 한마디로 오히려 피펜의 자존심을 세워주려고 그에게 마지막 슛을 맡기는 게 적절치 못한 처사였을 것이다. 위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13초나 남았을때 대놓고 1대1상황을 만들어줘도 못 넣는 선수한테 1.8초 남기고 원샷 플레이를 맡긴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된다.[74] 피펜의 이름값 때문에 논란이 됐을 뿐 애초에 과한 욕심이었던 것이다.
슈팅력이 불안정한 에이스가 자기보다 실력이 훨씬 떨어지는 벤치멤버에게 클러치슛을 넘기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실력이 좋다고 다른 모든 부분에서 앞서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피펜과 비교도 안되게 중거리 슈팅력이 앞서며 역대 최고의 클러치 플레이어인 조던조차 97파이널 5차전에서 쿠코치보다 훨씬 떨어지는 스티브 커[75]에게 패스해준 적이 있다. 당연히 조던은 클러치슛을 터뜨릴 능력이 있었으나 상대가 이중삼중 마크를 할 경우 더블팀을 뚫고 득점하는 것보단 오픈 상태의 커가 쏘는 게 훨씬 성공률이 높기 때문. 피펜은 더블팀당할 선수는 아니었으나 슈팅 자체가 쿠코치보다 훨씬 못했다.
어이없는 건 그가 경기 투입 자체를 거부했다는 것. 당시 시카고 최고의 패서이자 베테랑인 그가 안정적으로 인바운드 패스를 해주는 것 역시 중요했다. 인바운드 패스의 중요성은 NBA 역사에서 무수히 많이 증명되었는데 당시 기준으로 봐도 1987년 동부 결승에서 래리버드가 해낸 전설적인 클러치 역전 스틸&어시스트 역시 아이제아 토마스의 인바운드 패스를 스틸한 것이다[76] 또한 빌 러셀과 윌트 체임벌린의 마지막 동부 컨퍼런스 대결인 1968년 동부 파이널에서도 1점 앞서고 있던 셀틱스에서 리더인 빌 러셀이 "인바운드 내가 할게! 아무한테도 못 맡긴다!"라며 나설 정도였다.[77]보면 알겠지만 인바운드 하나로 팀들의 운명이 바뀌었다. 이렇게 중책을 맡겼는데 이를 내팽겨친것. 이 때문에 피트 마이어스가 인바운드 패스를 했는데 약간 불안정하게 주어서 쿠코치는 22피트짜리 (3점슛라인 한발짝 안) 턴어라운드 점퍼를 던져야 했다.
피펜이 자서전 unguarded에서 밝힌바에 의하면 4쿼터 종료 18초를 남긴 상황에서 피펜이 볼을 잡자 코트의 오른쪽으로 파고들 계획이었는데 그곳에 쿠코치가 남아서 방해가 되었다고 한다. 피펜이 옆으로 물러서라고 손짓했으나 쿠코치는 요지부동이었고 결국 무리한 슛을 시도하다 실패하여 유잉에 의해 동점골을 허용당했다고 피펜은 말한다. 즉 쿠코치가 일을 망쳤다는 것이다. 피펜은 마이클 조던이 떠난 불스에서 영웅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긴 것에 대해 분노했지만 한편으론 시즌 mvp 3위에 3개의 우승반지, nba 7년차인 자신이 신참에 불과한 쿠코치에게 공을 패스하라는 지시를 거부함으로 자신의 자긍심을 지켰다고 회고했다. 피펜은 이 사건이 선수 인생 중 최악의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최고의 순간들 중 하나였다고 말한다.
다음날 피펜과 필 잭슨은 이 사건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필 잭슨은 토니 쿠코치는 3개의 위닝샷을 성공시켰고 피펜은 팀 내에서 가장 패스가 정확한 선수라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말했지만 피펜은 자신이 아닌 마이클 조던이었더라도 그 상황에서 패스를 시켰을거냐고 반문하였다.
4.2. 어그로성 발언들
4.2.1. 마이클 조던에 대한 발언
그는 근래에 들어 마이클 조던에 반감, 혹은 자신의 2인자 이미지에 대한 유감을 굉장히 자주 피력하는 편이다. 예를들어 조던을 거만한(Condescending) 사람이라고 칭한다던지, 자신이 조던보다 더 좋은 팀동료였다던지, 자신은 등부상을 안고 뛰었다며 조던의 플루게임을 비웃는다던지, 자신에게 수비왕이 없는 이유는 사람들이 조던만 바라봤기 때문이라던지 등등...[78]여기서 조던의 성격적 결함에 대한 불호는 딱히 피펜 혼자만의 의견은 아니고, 팀 동료였던 인물로써 못 할 평가는 아니기에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나머지는 어딘가 피해의식이 묻어나는 게 사실이다.[79] 우선 피펜이 조던보다 부드럽고 유한 동료였다지만 94플옵 싯다운 사건 등을 고려하면 그는 조던보다 좋은 동료를 자처할 입장이 못된다. '친구'가 아닌 '동료'를 논하는 이상 부드러움 이상으로 중요한 덕목은 바로 책임감이고, 한 팀의 2인자씩이나 되는 인물로써 피펜은 이 부분에서 명백히 낙제점이다.
심지어 피펜은 98시즌에는 당시 여름휴가를 망치기 싫다고(+낮은 연봉에 대한 불만으로) 동부 파이널에서부터 문제가 되었던 발목을 오프시즌에 수술하지 않고 네 달이나 미루다가 시즌 개막 직전인 10월 말에 수술해 절반을 날려먹었다. 게다가 노장 조던과 로드맨이 피똥싸며 팀분위기를 반전시켜보려던 11월 말에 공개적으로 무조건 트레이드를 요구해 분위기를 박살낸 적도 있었다. 실력을 떠나 리더십을 운운할만한 인물이 아니다.[80]
사실 다 떠나서 피펜은 휴스턴에서 안하무인한 태도로 거의 모든 팀원들에게 질타를 받았다. 책임감을 빼고 보더라도 피펜은 조던에게 Condescending 운운할 입장이 못된다는 것.
수비왕에 대한 언급은 여러모로 평이 갈린다. 사람들이 조던만 바라봤기에 그 팀원들이 들러리취급을 받았다는 식의 발언이라면 어느정도 동의하는 의견도 많은 게, 실제로 국내의 경우 조던의 팀원들을 필요이상으로 폄하하는 부류도 적잖이 존재한다. 피펜 역시 국내에서 그저 득점력이 아주 뛰어난 선수는 아니었다는 이유로 엄청나게 후려치기를 당했던 시기도 있었고[81], 현지라고 해서 '위대한 2인자'의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건 다를 바 없는지라 이에 대해 상당히 불만과 아쉬움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때때로 표출할 수는 있다는 것.
다만 수상은 이와 별개인게, 피펜은 조던의 곁에서 몇번이나 올느바를 수상했고 디펜시브팀에도 단골로 들어갔으며, 수비왕 투표에서 조던과 동률 혹은 이상을 기록하는 경우도 몇차례 있었다. 즉, 팬덤 내 평가가 아닌 수상에 있어서는 조던때문에 무언가 피해를 입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애초에 피펜은 조던과 함께 뛸때 최고 야투시도가 16.7개(97시즌), 조던이 없을 때 최고 야투시도가 17.8개 (94시즌), 조던과 함께 뛸 때 커리어하이가 21점(92시즌), 조던이 없을 때 커리어하이가 22점으로 조던 때문에 딱히 스탯상 손해를 본 적도 없는 선수다. 피펜은 위에 언급된 약점 때문에 공격권을 가져가는데도 한계가 있던 선수이기 때문. 오히려 피펜은 조던과 함께 뛰며 뛰어난 성적 덕분에 수상에서 유리한 위치였던 적도 있었는데, 91-92시즌 당시 피펜은 찰스 바클리나 패트릭 유잉보다 리그 내 위상에서 떨어졌음에도 67승이나 거둔 불스의 팀 성적 덕분에 올NBA세컨팀 멤버 중 가장 많은 득표를 했다. 또한 피펜은 90년대에 전성기를 맞은 선수였는데, 이때 수비왕을 차지한 선수들은 하킴 올라주원, 데이비드 로빈슨, 디켐베 무톰보 등 88년 조던이 와도 수비왕을 빼앗기 힘든 포스의 선수들이었다.[82]
결국 피펜은 수상실적에서 손해본 적은 없었고, NBA 인기가 미미한 한국같은 곳의 팬덤에서 후려치기 당하는 수준의 손해 정도 밖에 받은 게 전부인데, 사실상 손해라고 보기도 애매하다. '위대한 2인자'의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는데, 피펜이 위대한 2인자라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이렇게 평가받는다고 손해라고 보긴 힘들다.
게다가 피펜이 2인자라고 딱히 선수평가에서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닌데, https://www.espn.com/nba/story/_/id/29105681/ranking-top-74-nba-players-all-nos-40-11 2020년 ESPN에서 발표한 역대 선수랭킹에서 피펜은 21위를 기록했다. 이는 은퇴선수들만 놓고 봐도 MVP수상자였던 바클리나 데이빗 로빈슨, MVP는 아니었지만 60년대 최고의 선수 중 하나였던 엘진 베일러보다 높은 순위이다. 전성기 시절 피펜과 바클리는 절대 대등한 위상이 아니었는데도 피펜이 조던의 2인자로 커리어 대부분을 보내면서 얻은 우승반지 6개 덕분에 이렇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퍼스트팀 3회에 그치고, 전성기에 MVP투표에서 1위표 단 7개 받은 선수가 역대 21위권에 위치하고 있는 것 자체가 역대최고선수의 2인자였기 때문인데, 손해를 운운하는 것이 적절한 지는 의문이다.
이후 피펜의 전부인 라르사 피펜 과 조던의 아들 마커스 조던 의 관계가 연인으로 발전 한 게 알려지면서 단순히 선수로서의 비교뿐만 아니라 감정적으로도 조던이 불편해지면서 조던에 대해 부정적인 표현을 시작하게 된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생기게 되었다. [83]
피펜은 조던에게 존재감이 가려지는 것에 반발하지만, 정작 최근 어그로에 있어선 조던을 운운하며 화제성을 올리는 모습이 아이러니하다는 평도 존재한다. 그래도 조던에 대한 언급들이야 그냥 피펜이 조던에게 가지는 반감, 유감, 열등감의 배경에는 이해될만한 구석이 어느정도 있기도 하니 그 심정은 이해한다는 반응도 있다. 정말 문제가 될 발언은 이 아래.
4.2.2. 필 잭슨 인종차별자 발언
위에 언급된 카트라이트의 질책 당시 스카티 피펜 역시 눈물을 흘리며 동료들에게 사죄했고, 반성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사건이 지난지 거의 30년 가까이 된 2021년까지 피펜은 이에 대해 필 잭슨에게 큰 반감을 가지고있었다. 문제는 그 반감이 도가 지나치다는 것.피펜은 GQ 매거진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아닌 쿠코치에게 마지막 샷을 맡긴 잭슨의 결정이 "인종 때문에 한 결정(racial move)"라고 주장했으며, 이후 댄 패트릭 쇼에 나와 "그러면 필 잭슨이 인종차별주의자였거나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까?"란 질문에 "그럼요(Oh yeah)"라고 답변했다. 그는 "마이클 조던 없이 1년 뛰었는데, 슛 한번 쏠 수 없는겁니까? 궂은 일은 내가 다 하잖아요? 대체 왜 그때 루키였던 토니가 마지막 슛을 쏘고 내가 아웃 오브 바운드로 빠져야 하는거죠? 그러니까 인종차별적이란 겁니다"라고 말했다. 이후 그 플레이 자체만으로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볼 수 없다는 진행자 패트릭의 질문에 "난 그와 함께 라커룸에 함께 있었고, 연습도 함께 했어요. 당신은 멀리 있었고요"라고 말했다.
진실은 당사자들만 알겠지만, "에이스인 나를 제쳐두고 루키에게 슛을 맡긴 건 인종차별적이다"란 피펜의 주장은 설득력이 전혀 없다. 일단 첫째로 잭슨은 흑인 마이클 조던의 커리어 내내 당연한 듯 위닝샷을 맡겨왔던 사람이고, 이후에도 흑인 코비 브라이언트와 샤킬 오닐을 중용했다. 코비와 함께 뛰던 백인 파우 가솔은 본인도 슈퍼스타라고 할 법한 위상의 선수였음에도 항상 2옵션이었다. 잭슨이 인종 때문에 누구에게 슛 기회를 줄지 결정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말. 간단히 말해 흑인이고 백인이고 간에 코비는 가솔보다 농구를 잘하기에 독보적인 에이스였고, 조던은 피펜보다 잘하기에 독보적인 에이스였고, 조던이 없을때 피펜은 가장 잘했기에 독보적인 에이스였고, 쿠코치는 피펜보다 라스트샷을 넣을 확률이 높기에 그에게 플레이를 맡긴 것 뿐이다. 인종과 전혀 상관없는 basketball decision이다.
두번째로 그 누구도, 심지어 피펜 본인도 지금까지 필 잭슨이 인종차별주의자라고 하지 않았다. 잭슨은 젊은 시절엔 마약과 히피 생활이 논란이 되었고 감독 시절엔 지나친 언플과 정치질로 비난을 받았으며, 특히 뉴욕 닉스 사장 시절 평생 먹은 욕에 맞먹을 정도의 욕을 먹었지만 인종차별주의자란 비난은 없었다. 이는 잭슨에게 인종차별주의로 보일만한 언행이 딱히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던과 오닐은 오직 잭슨만이 자신을 감독할 수 있다고 할 정도로 신뢰했으며, 흑인 데니스 로드맨은 자신의 농구 커리어에서 가장 명예로운 명예의 전당 헌액식 당시 자신을 소개해줄 인물로 잭슨을 골랐고, 그 자리에서 그에게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면서 "아버지같은 분(father figure)"이라고 설명했다. 흑인을 차별하는 인종차별주의자가 흑인들에게 이런 존경을 받는 게 말이 될까?
셋째로 위에 충분히 설명되었다시피 피펜이 아닌 쿠코치가 슛을 던진건 농구적으로 백프로 타당한 결정이었다. 쿠코치는 피펜이 평생 넣은 것만 모아도 그리 많지 않은 게임위닝 버저비터를 루키 시즌에만 네개 넣은 선수다. 게다가 심지어 피펜이 공격기회를 못 얻은 것도 아니고 그 이전부터 공격기회를 여러번 줬으나 이걸 계속 날려먹은 건 본인이다. 즉, 피펜보다 쿠코치가 그 상황에서 슛을 넣을 확률이 훨씬 높으니까 쿠코치에게 쏘라고 했을 뿐이다.
불만을 갖는 것 자체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는 반응도 적지 않지만[84] 문제는 그 방식이다. 갑자기 감독이 인종차별주의자라서 그랬다는 생트집을 잡으면서 비난했기에 문제가 된 것. 게다가 피펜이 일관적으로 잭슨이나 조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면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니 그럴 수도 있지만, 20년동안 둘에 대해 좋은 얘기만 하다가[85] 20년이 지나서야 갑자기 이상한 얘기를 해대니 공감을 못 받는 것이다.
하지만 피펜은 자서전 unguarded에서 필잭슨을 인종차별주의자라고 한 것은 잘못한 일이라고 밝혔다.
5. 수상 내역
수상 내역 |
NBA 챔피언 6회 (1991-1993, 1996-1998) 올스타 7회 (1990, 1992-1997) 올-NBA 퍼스트 팀 3회 (1994-1996) 올-NBA 세컨드 팀 2회 (1992, 1997) 올-NBA 서드 팀 2회 (1993, 1998) NBA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 8회 (1992-1999) NBA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 2회 (1991, 2000) NBA 스틸왕 (1995)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10)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 1996 애틀란타 올림픽 금메달 |
6. 말말말
나는 득점만 하면 된다. 나머지 모든 것은 피펜이 다 알아서 하기 때문이다.
마이클 조던
마이클 조던
그가 도와준 덕에 시합에 잘 임할 수 있었고 좋은 경기를 뛸 수 있었어요. 마이클 조던을 논할 때 스카티 피펜이 빠지면 안 되죠.
마이클 조던[86]
마이클 조던[86]
마이클 조던과 스카티 피펜은 아마도 농구 역사상 최고의 원투펀치일 것이다.
데니스 로드맨
데니스 로드맨
7. 기타
- 리즈시절인 1990년대 중반 <Slam City with Scottie Pippen>이라는 게임의 최종 보스로 등장하기도 했다. 실사 FMV 인터렉티브 게임으로 1대1 길거리 농구의 주인공이 최종 보스인 스카티 피펜과 붙어서 이기는 스토리다. 중독성 있는 힙합 음악과 함께 한판 승부가 펼쳐진다. 나이키 농구화 박스를 가득 트렁크에 싣고 나타난 피펜의 어색한 연기를 감상할 수 있는 진귀한 영상인데 당시 그의 인기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아케이드성 성격이 짙은 게임을 잘 만들었던 Midway에서 내놓은 2:2 게임인 NBA JAM이란 게임에서 끝판왕은 당연히 당대 최강 시카고 불스였는데, 라이센스 상 조던이 못 나오다보니 불스의 멤버는 피펜과 그랜트였다. 그 중 피펜의 능력치는 그야말로 사기급이었다.[87] 또한 그를 주인공으로 한 게임도 있다. 1994년에 SEGA CD와 MS-DOS용으로 출시한 게임이다. : Slam City With Scottie Pippen
- 2011년 동부 결승에서 마이애미 히트의 르브론 제임스가 맹활약하면서 시카고 불스를 격파하자 이에 감명을 받았는지 중계 도중 자신의 옛 동료 마이클 조던을 "역대 최고의 스코어러"라고 한 반면에 제임스를 "아마도 역대 최고의 선수"(!)라고 크게 치켜세우면서 파문이 일기도 했다.[88] 이 발언으로 인해 피펜은 전방위로 까이게 되었고, 급기야 본인은 르브론의 실력을 존중해주려다 일으킨 실수였다고 해명했다. 그 후 르브론 제임스가 결승전에서 졸전을 펼쳐 흑역사가 되는 분위기다 웃긴건 훗날 2017년 파이널을 앞두고는 "르브론이 아직 코비를 제쳤다고 보기 힘들다"는 상반된 평을 내리게 된다. Scottie Pippen: LeBron hasn't surpassed Kobe at all[89] 지금이야 르브론이 어찌어찌 조던과의 비교 논의가 어찌어찌 성립은 하는 수준의 커리어로 올라왔지만, 2020년 전까지는 비교 자체가 무리수에 가까웠기에 더더욱 어그로성이 강했던 셈.
- 은퇴 후에서는 슬쩍 독설가의 이미지도 있는듯 보인다. 은퇴 후 근황을 묻는 중 골프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아직은 서툴지만 찰스 바클리보단 잘 친다."고 해서 대놓고 찰스경을 씹기도 했다. 또한 한 언론 인터뷰에서 케빈 가넷은 과대평가되었다고 평가절하했다.[90] 팬들의 반응은 대다수가 피펜에 대해 이해할수 없다와 소수의 피펜이 옮은 말 했다로 나뉘기도 했다. 아무래도 조던이 시카고의 레전드를 넘어서 농구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지라 언사에 신중해야 하기에 자신과 시카고 불스가 보여줬던 실력이나 업적에 대한 후배들의 도전을 직접적으로 평가하기보다는 상투적인 답변으로 평가하는 반면, 피펜은 뭐 딱히 그럴 게 없다보니 대놓고 평가해서 이래저래 어그로를 끄는 일도 종종 있는 편. 또다른 독설 중 하나로, ESPN 해설가이자 전 NBA 감독이었던 제프 밴 건디가 2010-2011년도에 마이애미가 72승을 깰것이라고 한것에 대해, "제프 밴 건디는 얼간이다. 마이애미는 불스의 기록을 절대 깰 수 없다"라고 하기도 했다. #
-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조던과 함께 드림팀의 일원으로 올림픽에 참가하였는데 크로아티아 전에서 훗날 자신의 동료가 되는 토니 쿠코치를 만나게 된다. 이 당시에 제리 크라우스 단장은 쿠코치 영입을 위해 그에게 피펜보다 더 많은 연봉을 제시했는데(전술했듯 피펜은 연 200만불 수준, 그시절 실력대비로 노예계약 수준의 적은 연봉을 받고 있었다.) 그것에 잔뜩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피펜은 조던과 합작해 쿠코치를 묵사발 만들기로 계획한다. 매직 존슨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 당시 조던과 피펜은 서로 쿠코치를 맡겠다고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그래서 전반은 피펜이 후반은 조던이 쿠코치를 전담마크했다. 쿠코치의 회상으로는 그 당시 크로아티아 동료들이 쿠코치에게 "쟤네 너한테 왜 저럼?" 하고 물어볼 정도로 정말 철저하게 박살냈다고 한다. 하지만, 예선에서 철저하게 밟힌 쿠코치는 절차부심, 결승전에서 좀더 나은 활약을 하여 조던에게 "NBA에서 뛸 수 있는 선수"란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카고 불스로 이적한 후, 마이클 조던이 1차 은퇴를 하는 바람에 피펜과 쿠코치의 관계는 초반에는 그리 좋지 못했다. 물론 그후에는 사이가 원만해졌고, 쿠코치에게 제일 많은 도움을 준 선수도 피펜이었다.
- 1994년생 딸인 테일러 피펜은 서던 일리노이 대학교 시절까지 배구선수로 활약하였다. 키가 183cm 밖에 되지 않아 은퇴한 후 회계사로 활동하고 있다. 2000년생 아들 스코티 피펜 주니어는 밴더빌트 대학교에서 농구를 배웠으나 아들 역시 183cm 77kg의 비교적 왜소한 체구로 아버지의 피지컬을 물려받지 못했다. 2022년 드래프트에 참가하다 떨어졌으나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 투웨이 계약을 맺었고, 산하 G리그 팀 사우스베이 레이커스에 입단했다. 전 부인인 랄사 피펜은 리얼 하우스 와이프 오브 마이애미에 출연하는 리얼리티 스타이다. 킴 카다시안의 절친이었으나 랄사가 카다시안 가족들을 뒷담화 하는 것을 카다시안 가족들이 알았고 그대로 손절했다고 한다.
- 2016 NLCS 6차전에서 시카고 컵스가 월드 시리즈 진출을 확정짓는 자리에 참석했다. 7회 공수교대 때 Take Me Out to the Ballgame을 가사도 박자도 음정도 다 틀렸지만 리글리 필드의 컶빠들이 일제히 피펜을 연호하는 장관을 연출했다.
- 1996년 플레이오프와 동년도 애틀란타 올림픽에서 신은 피펜 첫 시그니처 모델인 에어 모어 업템포가 몇 년간 꾸준히 레트로 되면서 완전히 패션화로 인식되는 듯. 1990년대 나온 모델 전부가 그렇다.
- 2019년 PO에서 C.J. 맥컬럼와 데미안 릴라드과 인터뷰하면서 현역 시절 가장 막기 힘든 상대로 마이클 조던을 꼽았지만 이는 팀내 연습때 얘기고, 실전에서는 도미니크 윌킨스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매치업 상대 중 윌킨스가 3점슛이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 현역시절보다 방송출연을 많이 하는 은퇴 후에 부각되는 부분이지만 목소리가 엄청나게 낮고 굵다. 디켐베 무톰보처럼 거친 목소리나 특이한 것도 아니고, 이선균처럼 울림이 깊은 것도 아니고 톤 자체가 그냥 엄청나게 낮다. 톤이 낮은 샤킬 오닐 같은 선수들과 차별화되는건 (톤 자체도 피펜이 더 낮긴 하지만) 굵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 선수로서는 레전드 of 레전드이지만, 현역시절의 행동이나 은퇴 후의 발언 등으로 자신의 위상을 스스로 깎아먹는 타입이기도 하다. 당장 위에 언급한 싯 다운 사건, 경기 출전 거부 등은 아무리 피펜이 받는 대우가 안좋았다곤 하나 동료들과 감독들, 그리고 팬들을 모두 엿먹인 사건으로 리더로서의 책임감을 의심해야 하는 사례였고, 20년이 넘게 흐른 지금은 필 잭슨을 인종차별주의자로 몰아가며 자신의 한심한 짓거리에 어떻게든 당위성을 부여하려는 꼴불견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심지어 자기 책을 팔아먹기 위해 영혼의 파트너였던 조던을 까는 추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 외에도 은퇴 후 사업실패로 그나마 벌어둔 돈마저 날려버리거나, 온갖 어그로성 발언으로 이목을 끄는 등 후배선수들이나 팬들의 시선에선 '대단한 선수'는 맞을지언정 '존경할만한 사람'이 되지는 못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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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불스 시절 팀원들은 연습이든 경기든 자기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동료들을 자주 갈구는 조던에 비하면 오히려 피펜을 더 좋아하고 편하게 생각하여 잘 따랐다. 특히 피펜과 친하던
호레이스 그랜트[91]는 피펜은 선수들을 잘 다독이고, 잘 챙겨주니 조던보다 훨씬 리더의 자질이 뛰어나다고 한 적이 있다.
다만 피펜이 동료들을 편하게 해주고 다들 좋아하는 선수였던 것과 별개로 피펜이 리더로서 팀을 잘 이끌었던 적은 93-94시즌 정도 뿐이었다.[92] 94-95시즌은 조던이 복귀하기 전까지 본인과 프런트 진의 갈등까지 더해 팀분위기가 개판이었으며, 포틀랜드는 피펜 합류 전에도 컨퍼런스 결승 진출하단 팀이 합류 후에도 컨퍼런스 결승 1회에 그쳤으며, 00년 이후론 기대치에 못 미치는 성적과 더불어 jail blazers로 악명이 높았다. 조던은 동료들과 갈등이 있을지언정 위저즈 시절에도 합류 전 대비 승률이 두 배 가까이 뛰었다는 걸 생각하면 '리더로서 성과'는 둘이 비교대상이 못 된다. 그토록 조던을 까던 호러스 그랜트 역시 불스 시절에 가장 빛났으며, 이는 닉스에서 이미 후보로 전락했던 빌 카트라이트, 꼴찌팀에서도 로테이션으로 나오던 룩 롱리 역시 마찬가지다. 즉 호불호가 갈리는 성격과 인성을 떠나 조던과 같이 뛴 선수들은 제 실력 이상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는데, 피펜은 그랬던 적은 없다.[93]
- 2022년 최근 피펜의 전부인 이였던 랄사 피펜이 마이클 조던의 아들인 마커스 조던과 사귀고 있어서 화제이다.나이는 무려 17살차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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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조던 - 더 라스트 댄스에 관해서 조던만 찬양하고 자신에게 충분한 비중이 없었다며 불만을 표했는데, 이에 대해 90년대에 불스를 커버한 시카고 선타임즈의 Rick Telander 기자는 "피펜에 대한 8부작은 아무도 보지 않을 것(Nobody would tune in to see an eight-part Pippen story)이라고 코멘트를 남겼다. 그는 조던의 카리스마와 신체, 훌륭한 기술과 외모 등 매력 때문에 주목을 받는 것이며, 피펜은 매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no charm whatsoever) 마케팅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의견을 밝혔다.
#
8. 관련 문서
[1]
전 세계적으로 이 유명한 이름의 표기는 잘못되었다. NBA 드래프트는 총재가 드래프트된 선수들을 하나하나 호명하면 그 선수가 나와 총재와 악수하는 식으로 이뤄지며, Top 10이 확실한 선수면 드래프트장에 나오고, 아니면 집에서 전화받고 지명발표된다. 근데 2011년 에스콰이어 잡지와 피펜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 운명의 순간
데이비드 스턴 전 NBA 총재가 5위로 드래프트 된 Scotty Pippen을 보고 이게 Scott의 애칭이라고 생각했는지 Scott Pippen이라고 똑똑히 발음해버린다. 당시 피펜은 명백히
듣보잡 선수였고,
거기 나와서 스턴과 악수하고 사진찍을 Top 10급 유망주가 전혀 아니었다. 이에 따라 당시 생방송을 진행하던 방송인들도 얜 대체 누구야라며 프로필만 받고 Scott Pippen이라고 지칭했다. 정작 그가 화면에 나오자 자막으론 오기인 Scottie Pippen라고 나왔다. 진행자가 지명 직후 "스캇 피펜, 아마 시청자들 대부분이 모르실 이름일 겁니다."라고 출신대학과 기본 설명을 하다가 갑자기 화면에 Scottie Pippen"이라고 뜨자 말하던 도중에 슬그머니 "스카티 피펜은 말이죠"라고 말을 바꾼다. 피펜은 인터뷰에서 "scotty인데, 사람들은 y가 붙은 걸 보면 무슨 이유인지 항상 scott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제 이름을 드래프트에서 호명한 겁니다. 스콧 피펜이라고요. 제가 어쩌겠어요, 총재한테 따지겠습니까?"(It's really Scotty. But for some reason, when people see it with a y, they shorten it to Scott. That's how they announced me at the NBA draft. Scott Pippen. What was I going to do, argue with the commissioner?)라고 말했다.
기사 전문
[2]
그의 신장은 커리어 초기에는 6피트 8인치로 나왔으나 (1987년 드래프트와 1990년 덩크 컨테스트 때의 선수 소개 화면을 보면 6피트 8인치로 나옴) 90년대 들어 6피트 7인치(201cm)라고 표기되었고 말년에 6피트8인치로 다시 수정되었다. 당시에도 드래프트 전 신체검사를 받긴 했지만, 이때는 결과가 공표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맨발/신발신은 신장은 불명이다. 피펜과 비슷하게 6-7과 6-8을 오가는
데니스 로드맨보다 눈에 띄게 크다는 점 때문에 로드맨보단 약간 크지 않겠냐는 추정이 있을 뿐.
[3]
팔이 길다는
카와이 레너드와 윙스팬이 같으며, 팀 동료인 조던만큼 손도 크다.
[4]
드래프트 당일 8순위로 지명된 올덴 폴리니스와 트레이드 되어
시카고 불스에서 커리어를 시작한다.
[5]
핀란드 리그
[6]
실제로 조던이나 유잉 같이 NCAA 디비전 1팀에서 뛴 선수들의 대학 시절을 보면 수만명이 들어가는 거대한 NBA급에 버금가는 경기장에서 뛰었지만, 피펜이 뛰던 센트럴 아칸소 대학의 홈경기장은 고등학교 체육관보다는 좀 나은 수준의 경기장이었다.
[7]
재밌는 것은 수년이 지나 함께 트리오를 결성했던
데니스 로드먼 또한 NAIA 출신이라는 점. 더불어 피펜은 드래프트 시절에 Comparison이 로드먼이었다. 로드먼과는 재밌는 공통점이 또 하나 있는데, 로드먼 역시 피펜처럼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 8인치(20.3cm)가 자라서 농구선수가 되었다는 거다.(
#) 이들은 현역시절 키와 덩치도 비슷했으며, 둘 다 엄청나게 뛰어난 운동능력을 갖고 있었다.
[8]
해당 농구부는 1993년 NCAA 디비전 2 승격 후 걸프 사우스 컨퍼런스에 소속됐다가 2006년 디비전 1 승격 후 사우스랜드 컨퍼런스에 소속중이다.
[9]
재밌게도 96~98시즌까지 3연패의 주역 3인방은 모두 농구 관련해 좌절 후 급성장을 겪었다. 일단 조던은 고등학교에서 그 유명한 농구부 탈락 사건 이후 여름동안 6인치가 자랐으며, 원래 농구부도 아니었던 로드맨은 고등학교 졸업 이후 20cm나 자랐다.
[10]
1954~1970년까지 밀워키/세인트루이스/애틀랜타 호크스 단장을 지내며 밥 페팃, 에드 매카울리, 클리프 헤이건, 리치 게린, 레니 윌킨스, 젤모 비티, 조 칼드웰, 루 허드슨 등을 발굴 혹은 영입했다.
[11]
피펜과 드래프트 동기로 지명되었지만, 공격력에 문제를 드러내며 93~98년 새크라멘토 킹스 주전 센터 시절을 제외하면
저니맨으로 이팀저팀 다니다가 2004년 은퇴했다. 물론 그렇다고 드래프트 당시 그의 기대치가 높았던 것은 아니고 그냥 평범한 롤플레이어 수준이었다. 즉, 당시 기준으론 롤플레이어감인 두 신인이 서로 팀을 바꾼 거였는데 피펜이 예상을 뛰어넘어 레전드로 성장한 것. 실제로 피펜은 루키시즌에 후보선수로 20분 정도 출장했다.
[12]
피펜도 견제했지만 주된 수비 대상은 조던이었다. 당시 영상을 보면 조던이 받는 압박과 피펜이 받는 압박은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피펜은 캐치 앤 슛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돌파만 견제하면 된다. 그러나 조던은 공을 잡기 전부터 찰거머리같이 따라붙는 수비로 괴롭히고 (조던은 캐치앤슛도 특급이기 때문), 잡으면 슛하지 못하도록 또 집중견제, 마지막으로 골밑으로 돌파하면 둘러싸서 두들겨 패는 것이다. 영상을 한번 보자. "두들겨 팬다"가 전혀 과장이 아니다.
[13]
신체접촉에 관대한 1980년대 룰로 집중수비를 당하게 하는 극악의 전술로, 역사상 가장 더티하고 악명이 높은 수비전술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전술은 조던을 맨투맨으로 막는 선수가 조던이 공을 잡고 중앙으로 돌파해오도록 유도하면, 주변의 수비수들이 조던을 둘러싸면서 거칠게 막는 것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비슷한 전술로는 슬램덩크에서 북산이 이정환을 상대로 한 4대1 전술, 그리고 2000년대에 보스턴 셀틱스가 르브론 제임스를 상대로 한 걸 들 수 있는데, 이 전술들보다 조던룰이 더 극악했던 것은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NBA는 신체접촉에 관대했기 때문이다. 당시 영상을 보면 수비수가 핸드체크 (손으로 밀고 당기면서 공격수를 견제하는 것)을 자유롭게 하는 것과, 2000년대 농구 같으면 플래그런트 파울(상대에게 부상을 입힐 수도 있는 도를 지나친 신체접촉에 주는 파울로 플래그런트 1을 두번 받으면 퇴장, 2를 받으면 즉시 퇴장이다. 1990년대에 도입)을 받을 만한 것도 그냥 파울로 넘어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즉, 한 팀이 작정하고 한 명을 거의 두들겨 패다시피 막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하면 다른 선수들은 프리가 된다. 그렇지만 1989년까지의 불스의 부실한 선수진으론 어차피 도움이 안됐기 때문에 조던만 막은 것.
[14]
이 전술이 지역방어란 오해가 있는데, 기본적인 목적과 설계가 다르다. 조던룰은 각 선수들이 지역을 맡는 게 아니라 맨투맨을 하되 매치업에게 느슨하게 붙고 있다가 조던이 공을 잡으면 무조건 중앙으로 유도해 샌드위치 마크를 하는 것이다. 2010년대 이후 NBA에선 이런 식으로 막는 게 불가능한데 첫째는 위에 언급된 피지컬한 플레이고, 두번째는 당시는 현대보다 훨씬 코트를 좁게 썼다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거의 모든 공격이 3점라인 안 쪽에서 일어났기에 일리걸 디펜스(지역방어 금지)에 걸리지 않고도 한 선수를 5명 전원이 견제하는 것이 가능했다. 예를 들어 현대농구에서는 수비가 3점라인 바깥까지 이어지기에 아무리 재빨리 커버를 들어와도 한 선수를 완전히 둘러싸는 것이 매우 힘들고, 둘러싸는데 성공했더라도 그 선수의 동료들이 완전히 오픈이 된다. 그러나 당시엔 커버해야할 지역이 훨씬 좁았기에 아예 바싹 붙을 정도로 둘러쌀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위에 언급된 느슨한 파울 규정을 백분활용해 때리거나 공중에서 잡아채는 건 기본. 심지어 페인트존에서 트리플팀 당한 조던을 마크 어과이어가 주먹으로 허리 부근을 치고, 로드맨이 잡아채 고꾸러뜨렸는데도 파울이 불리지 않은 적도 있다. 당시 조던룰을 현대농구에서 구현하는 것이 불가능한 게 바로 이 때문이다. 조던룰을 현대농구에서 했다간 외곽의 슈터들에게 피를 보고, 저런 짓을 에이스플레이어에게 했다간 바로 퇴장&징계다.
[15]
피펜이 매직을 전담마크했다고 아는 사람들도 있는데, 2차전 이후에도 매직의 주 매치업은 조던이었고 피펜의 주 매치업은
제임스 워디였다. 그러나 2차전 초반에 매직을 막던 조던이 파울을 두개 범하자 기습적으로 피펜을 붙였는데, 이때 피펜이 매직을 풀코트 프레스로 막으면서 고생시키자 이 장면이 인상이 깊어 이렇게 와전된 것. 자세히 보면 피펜이 매직을 마크하는 하이라이트 장면의 절대다수에서 그가 하얀색 홈 유니폼을 입고 있는걸 볼 수 있는데, 이때 불스는 홈에서 1, 2차전만 치렀고 1차전에서는 피펜이 매직을 마크하지 않았다. 즉, 피펜이 매직을 막는 장면 대부분은 2차전에서 나온 것.
이 영상에서는 당시 피펜이 매직에게 붙은 경위가 나온다. 그리고 5차전 하일라이트인
이 영상을 보면 이때도 매직을 주로 막는 건 조던이란 걸 확인할 수 있다.
[16]
실제로 1991시즌엔 올스타 선정에 실패한다.
[17]
완전 듣보잡인 센트럴 아칸소 출신은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전체 5순위로 뽑히고도 루키 시즌 도중 에이전트에게 "루키시즌에 방출되면 돈을 얼마나 받을 수 있죠?"라고 물어봤다.
[18]
이 때문에 당시 주전 PG였고 마찬가지로 입지가 불안한데다 만기계약자였던
존 팩슨의 어그로를 끌었다. 이때 팀은 시즌 도중 잠깐 팩슨 대신 BJ 암스트롱을 중용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팩슨 부부는 진지하게 다른 자리를 알아봤을 정도. 팩슨의 친구인 에드 닐리가 피닉스와 70만 달러 계약을 했을때 크라우스는 내놓고 "자네는 저런 계약 기대하지 말게"라고 해 어그로를 끌 정도였다. 물론 팩슨은 파이널에서 대활약 이후 우승팀의 주축멤버로서 시즌 이후 백만달러 이상 계약을 끌어내게 된다.
[19]
이는 마이클 조던도 마찬가지로, 1980년대 후반에 계약을 할때는 리그에서 가장 많은 수준이었지만 이후 1990년대부터 1995-96시즌에 계약이 만료될때까지 그는 노예계약 수준이었다. 후술할 론 하퍼와 토니 쿠코치는 샐러리캡이 증가한 이후 계약한 케이스.
[20]
그 전부터 제리 크라우스 단장은 계속해서 쿠코치를 찬양하고 영입의 의지를 보이는 등 많은 관심을 보내왔으며, 그것을 빌미로 쿠코치는 올림픽에서 성질이 있는대로 난 피펜과 조던의 수비에 호되게 당한다.
[21]
1994시즌을 피트 마이어스란 평범한 SG로 떼워야했던 불스가 1994-95시즌을 앞두고 야심차게 단행한 영입이었다. 실제로 하퍼는 당시 클리퍼스에서 에이스 대니 매닝에 이은 2옵션이었음에도 평균 20점을 올릴 정도였고, 비록 올스타에는 선정된 적이 없지만 올스타급 실력을 가진 선수로 널리 인정받고 있었다. 1994시즌에는 4백만 달러를 받으며 리그에서 가장 돈을 많이 받는 슈팅 가드였던 적도 있다. 그러나 부상 후유증과 트라이앵글 오펜스 적응 실패로 인해 주득점원으로 활약하진 못했고, 불스 이적 직후부터 득점이 거의 반토막난 9점 수준이 된다. 또한 마이클 조던이 복귀하면서 조던과 공격범위가 겹치면서 외곽슛도 없는 하퍼는 더욱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이후 하퍼는 득점력을 거의 포기하고 수비 스페셜리스트로 변신하게 된다. (물론 하퍼는 원래부터 긴 팔과 탁월한 운동능력으로 맨투맨 매치업에서 제법 실력을 발휘하긴 했지만)
[22]
이 72승 기록은 쉽게 깨지지 않을 것이라 여겨졌으나 20년만인 2015-16 시즌에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 의해 73승으로 경신되게 된다. 그러나 이 시즌 워리어스는 파이널에서 클리블랜드에 3승 4패로 우승을 못하는 바람에 여러모로 불스와 비교되고 있다.
[23]
다큐 시리즈 라스트 댄스에 출연한 피펜 본인이 "난 내 여름을 재활하느라 날리고 싶지 않았다(fuck my summer up)"이라고 함으로서 간접적으로 인정했다.
[24]
심지어 재활 중이던 11월에 공개적으로 트레이드 요구를 하면서 언론에 "다시는 시카고 유니폼을 입지 않겠다" 즉 트래이드가 되지 않으면 복귀하지 않겠다고 선언까지 한다. 이에 대해 조던 역시 "스카티가 이기적으로 굴었다"고 할 정도. 실제로 시즌 초반 당시 불스는 분위기가 안 좋았고, 복귀 이후 한 경기도 결장하지 않은 조던은 물론이고 원래 결장이 잦은 로드맨까지 이때 꾸준히 뛰어줄 정도로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던 시점이었다. 이 상황에서 2인자가 팀분위기를 박살낸 것. 피펜이 리더로서 그리 높은 점수를 못 받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조던도 크라우스를 싫어하고 트러블을 겪었지만 이런 식의 공개 인터뷰로 팀분위기를 흐린 적은 한번도 없었다.(카트라이트 영입 초반 갈등은 조던 룰즈를 쓴 샘 스미스 기자의 폭로로 뒤늦게 알려진 사실이다.) 사실 조던이 크라우스에 대해 심하게 군 것은 유명하지만 피펜이 크라우스에게 이때 욕하고 조롱한 것은 그리 많이 알려져있지 않았는데, 라스트댄스에서 백업센터였던 조 클라인의 증언에 따르면 모두 앞에서 대놓고 욕설을 퍼붓고 무시했다고 한다.
[25]
피펜은 결과적으로 커리어 통틀어 1억995만달러를, 조던은 불스에서 마지막 2년동안 몬스터 딜까지 합해서 9천402만 달러 연봉에 그쳤다. 1회 MVP/올NBA퍼스트팀 5회/세컨팀 5회/NBA서드팀 1회로 스카티 피펜보다 월등히 뛰어난 선수였던 바클리의 통산 연봉은 4천360만 달러에 불과했다. 이는 당시 슈퍼스타들이 장기계약을 잘못 맺어 가치에 비해 헐값에 뛰는 케이스가 그렇게까지 드물지 않았으며, 이 경우 재협상을 하는 게 그렇게까지 당연시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26]
1위는 1천872만 달러를 받은
패트릭 유잉, 2위는 981만 달러의
클라이드 드렉슬러, 3위는 770만 달러를 받는
데이비드 로빈슨이었다. 보다시피 맥스 연봉 제도가 없어 연봉이 제멋대로인 것을 볼 수 있다.
[27]
물론 리그 32위 연봉과 리그 120위 연봉이란 차이가 있지만 애초에 조던과 피펜이 벌어들이는 수익은 비교대상조차 안되고 둘이 각자 33세이던 시절 실력과 공헌도 자체도 차이가 크다.
[28]
조던과 피펜이 각자 33세이던 1998년, 1996년 오프시즌 기준으로 할 경우(조던이 7개월 더 나이가 많다) 피펜은 11시즌동안 2천만 달러, 조던은 12시즌동안 2,870만 달러 조금 넘는 연봉을 받았다.
[29]
이 시즌 MVP 투표에서 바클리는 1위, 유잉은 4위였으며 둘은 각각 서부와 동부 1위팀의 에이스였고 퍼스트팀/세컨팀에 올랐다.
[30]
이는 조던은 연봉 관련해 피펜과 크게 다를바 없는 상황이었지만, 조던 문서에 설명된 것처럼 그는 뛸 수 있으면 무조건 뛰는 선수였다. 워싱턴 시절에는 무릎에 계속 물이 차오르는 것을 경기 중에 주사로 빼가면서 수술을 미루고 억지로 뛸 정도. 그런 조던이니 "여름휴가를 망치고 싶지 않다"면서 시즌 절반 가까이를 일부러 날리고 개막에 맞춰 수술을 한 피펜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사실 조던도 잭슨과 마찬가지로 피펜의 심정은 이해하는 입장이었지만, 조던 본인이 연봉과 별개로 몸이 부서지기 직전까지 뛰는 유형의 선수이기 때문에 태업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것에 가깝다.(조던은 불스 복귀후 프리시즌까지 포함해 전경기 출장했고 02-03시즌엔 베테랑 미니멈을 받으며 망가진 무릎으로 평균 37분/전경기 출장을 했다)
[31]
ESPN Sports Century에서 바클리가 한 말에 따르면 인터뷰 직후 조던이 전화해 "그런말 한적 없어. 스카티가 한 말은 bs(bullshit:x소리)야"라고 했다고 한다. 진실이야 당사자들만 알겠지만 조던이 사적으로는 그리 친하지도 않은 피펜에게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는 바클리를 욕했을까? 조던과 바클리는 바클리가 조던의 구단 운영에 대한 소신발언을 하기 전까지는 친하게 지냈지만 피펜과는 둘다 사적인 교류가 없다.
[32]
정확히 말하면 조던이 1999년 은퇴 기자회견을 할 당시 은퇴 전 패트릭 유잉, 찰스 바클리와 의논했다는 점을 밝히면서 "찰스 바클리한테 넌 평생 우승 못할거라고 했죠. 팀을 위한 헌신이 부족하니까"라고 언급한 것을 집은 것이다. 그런데 이 멘트는 조던이 늘상 바클리에게 하는 장난스런 디스였고, 실제로 기자회견 장에서도 웃으며 한 농담에 불과했다. (조던은 2005년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바클리와 동반 출연했을때도 비슷한 디스를 한 적이 있다) 즉 친한 친구끼리 트래쉬토킹이었지, 진지하게 폄훼를 한 멘트가 아니었음에도 이를 이용해 바클리를 폄훼하는데 쓴 것이다.
[33]
다만 6명의 선수 중 휴스턴에서 터진 선수는 아무도 없다.
[34]
트래이드 당시 바클리는 "피펜은 휴스턴과 팀, 그리고 (연봉을 포기한) 나한테 사과해야한다"고 주장했는데, 트래이드 직후 피펜은 "그 한심하고 뚱뚱한 엉덩이 (sorry fat butt) 옆에서 뛰게했으니 그 (바클리)가 사과해야한다"며 자신은 총을 들이밀어도 (at gunpoint) 사과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바클리가 기자들에게 한 멘트가 압권인데, "글쎄 난 항상 총을 갖고 다니거든요. 제가 만약 살인으로 체포되면 '그 녀석이 사과 안 했구나' 하세요."라고 농담했다.
[35]
아무래도 시카고 시절에는 조던의 사이드킥이었기 때문에 자신만의 가치를 인정받기가 힘들었고, 때문에 피펜은 신진강호의 기둥으로 활약해서 팀을 정상으로 이끌어 자신만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시기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당시 레이커스를 상대로 1승 3패로 뒤진 상황에서 5, 6차전을 잇달아 잡아내 동률을 만들었고, 최종 7차전 또한 4쿼터 한때 15점차의 리드로 파이널 진출을 목전에 두고 있었으나 정말 귀신에 홀린듯한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으니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을 듯.
[36]
당시 포틀랜드는 워낙 주축선수들이 막장짓을 해대는 바람에 홈관중들마저도 팀을 외면하는 상태였다. 보이콧 움직임까지 보였다.
[37]
실제로 피펜의 실력은 누구도 부인못하는 레전드이지만 리더십이 훌륭한 모습을 보여줬냐고 하면 아무래도 대답이 궁해진다. 스티브 커가 증언했듯 불스 시절 피펜은 다들 좋아하는 따뜻한 리더였지만 위기의 순간에 팀을 강하게 장악하며 동료들을 끌고 간 적은 없다. 1993-94시즌은 불스 왕조를 겪으며 완성된 선수들의 기량과 팀웍, 공동주장인 빌 카트라이트와 베테랑 존 팩슨 등이 있었기에 피펜은 조던 옆에서 하던 것처럼 농구만 잘하면 되는 환경이라 훌륭한 기량을 보였지만, 팀이 위기에 처한 첫 무대인 닉스 시리즈에선 위에 나온 것처럼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1994-95시즌의 경우 불스의 팀케미는 그야말로 콩가루였다. 1999-00시즌 블레이저스의 리더로 유명하지만 포틀랜드는 전 시즌에 승률 70%로 디비전 1위를 차지한 강팀이었고, 이는 82경기로 환산할시 57승으로 2000시즌 59승과 별 차이가 없으며 플레이오프 성적도 둘 다 서부 결승 탈락이다.(물론 피펜의 합류가 의미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분명 2000년 블레이저스는 1999년보다 확실히 강했지만 그 차이가 우승후보팀이 우승팀으로 스텝업할 정도로 크진 않았단 의미) 블레이저스는 전형적인 win-now팀으로 베테랑들이 많은 팀이었는데도 피펜이 별다른 리더십을 보여주거나 성과를 보인 적도 없으며 오히려 2000년 7차전 4쿼터 단체부진에 일조했다. 즉 '에이스 피펜'의 성과는 딱히 특출나지 않으며 리더십 측면에서도 그다지 부각되지 않는다. 그의 뛰어난 실력에도 불과하고 1옵션, 혹은 에이스로서는 그리 높이 평가받지 않는 이유.
[38]
이외에도 핀란드 리그에서도 뛴적이 있다.
[39]
그가
르브론 제임스와 더불어 가장 유명하고 뛰어난 포인트 포워드지만 이런 개념을 만들어낸 선수는 아니다. 이 용어가 등장한 것은
스몰 포워드였음에도
포인트 가드 역할을 했던 1980년대
밀워키 벅스의
포워드 폴 프레시의 플레이를 언론에서 묘사하면서였다. 보통 포인트 포워드의 창시자라고 하면 프레시를 얘기한다. 피펜은 특이한 플레이스타일 정도로 잊혀질 수 있었던 포인트 포워드를 대중화시킨 것. 이 외에도
래리 버드라는 20-10-5를 밥먹듯이 찍은 대괴수가 존재했지만 버드는
어시스트보다는
득점과
리바운드에 강점을 보이는 선수였으며, 패싱 센스가 좋은 선수였지 메인 핸들러로서 리딩을 하기 보단 스타일상 전형적인
코너맨에
스트레치 포워드로 활동했다.
[40]
앞선 각주를 보충하자면 버드는 대학때까지
빅맨이었고 NBA에 데뷔하고도 한동안은 그의 다재다능함을 활용하기 위해 공격에서는 전방위에서 득점하면서 동시에 리딩도 하는 스몰 포워드로, 수비에서는 큰 체격과 강력한 리바운드 장악능력을 살려
파워 포워드로 활약했다. 비교하자면 이 점에선 리딩을 많이 할 당시
케빈 가넷과 유사했던 편. 그러나 버드는 초창기엔 타이니 아치발드의 말년과 겹쳤고, 전성기 때는 데니스 존슨과 뛰었기에 볼운반과 주 게임리딩은 이들에게 맡길 수 있었다. 물론 1980년대에 버드처럼 큰 선수가 이렇게 하는 것도 혁신적이었는데, 이후 한두명의 슈퍼스타보단 여러명의 뛰어난 선수들이 골고루 활약하는 팀이었던 밀워키 벅스의
돈 넬슨 감독이
슈팅 가드가 주 포지션인 두 선수(크렉 하지스와 시드니 몽크리프)를 동시에 출전시키고 리딩을 다재다능한 포워드 프레시에게 맡기며 이런 실험적 라인업이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41]
당시
스몰 포워드의 역할은 득점과 중거리에 중점을 둔 스타일로
크리스 멀린,
데틀레프 슈렘프, 클리포드 로빈슨, 글렌 라이스, 션 엘리엇 등의 선수가 대표적인 선수들.
[42]
해당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3점 슛은 35%, 자유투는 75%가 효율성의 마지노선이다.
이런 굴욕 영상
[43]
1998 파이널 당시 시카고의 박스 스코어를 보자. 피펜과 쿠코치가 15점, 나머지 선수는 5점 이하인데, 그나마 피펜은 집중마크에 시달려 커리어 최악급의 야투율을 기록한 조던보다도 야투율이 낮다.
[44]
https://www.youtube.com/watch?v=0YYzfVyOB8U 피펜이 커리어하이 47점을 넣을 당시 하일라이트 영상.
[45]
실제로 2차 쓰리핏 당시에 피펜이 컨디션이 좋지 않을때는 안정적인 점퍼를 가진
토니 쿠코치가 때때로 제 2옵션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조던이 있던 시기 피펜은 확실한 찬스가 아니면 슛을 던지는걸 자제했고 패스를 돌리고 팀플레이에 주력했다.
[46]
1990년대 덩크 콘테스트에서 조던보다도 살짝 먼 곳에서 뛰어 자유투 라인 덩크를 성공시킨 적도 있다. 공중 동작과 완성도 면에서 조던만은 못했기에 47.2점에 그쳤지만.
[47]
불스 시절 오픈코트에서 위력은 엄청났다. 체격과 파워까지 겸비한 선수였기에 속공에서 달릴 때 위력은 바로 전 세대의
제임스 워디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또한 외곽에서 우격다짐으로 돌파해 덩크를 우겨넣는 능력도 있었는데, 많이 간과되는 그의 파워 덕분이었다. 반면 조던처럼 세련된 공중동작으로 마무리하는 것은 잘 못했다.
[48]
불스 시절엔 조던, 로키츠 시절엔 하킴/바클리, 포틀랜드 시절엔 라쉬드 월러스, 스미스, 사보니스, 스타더마이어 등.
[49]
외곽선수들은 빠른 발을 이용해서 수비를 떼어내도록 돌아다니고 NBA수준의 선수들은 운동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지역방어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다. 오히려 핸드체킹룰이 2004년에 개정되면서 외곽수비수 시 손으로 견제하는 게 불가능해져 외곽선수들이 전성기를 맞았다. 단신에 돌파위주며 외곽슛이 그리 뛰어나지 않은 알렌 아이버슨이 지역방어 도입 이후에 나이가 30대에 접어들었음에도 오히려 커리어하이를 맞은 게 그 증거. 그러나 발이 늦은 빅맨들은 상대적으로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 때문에 90년대 득점순위를 보면 조던과 미치 리치몬드 정도만 제외하고 전부 4,5번으로 채워져있었지만 (레지 밀러는 고득점을 올리는 선수는 아니었다) 2010년대는 오히려 빅맨이 한두명 정도에 나머지는 전부 1~3번으로 외곽위주 선수들이다.
[50]
여기에 거의 불쌍할 정도로 당한 게 당시 데릭 피셔-샤킬 오닐이 이 듀오를 막아야했던 LA 레이커스. 오닐은 발이 느려 스탁턴을 결코 따라갈 수 없었고 185cm인 피셔는 슛과 돌파 둘 다 뛰어난 206cm의 탱크같은 말론에 손도 못 댔다. 이때문에 이들은 60승 팀임에도 무력하게 스윕당했다. 여담이지만 레이커스는 수비력이 좋고 키가 큰 론 하퍼를 영입해 피셔 대신 주전에 세움으로서 수비문제를 해결했고, 이로 인한 외곽능력 저하를 당시 리그 최고의 슈터 중 하나였던 글렌 라이스를 릭 팍스 대신 영입해 주전으로 세워 문제를 해결했다. 이때 라이스를 받는 대가로 샬럿 호네츠에 보낸 게 에디 존스.
[51]
특히 2차 3연패 당시 시카고 불스는 타 팀의 후보센터급들로 센터진을 꾸려야했고, 파워 포워드 데니스 로드맨은 단신이었다. 이 때문에 패트릭 유잉이나 샤킬 오닐같은 특급 센터들을 막는 걸 특히 어려워했다.
[52]
다만, 2차 스리핏 시절부터는 조던의 나이와 체력을 고려해 최대한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서 상대방 스윙맨 에이스에 대한 마크는 주로 피펜이 담당하게 되었다.
[53]
6피트 8인치의 신장으로 스몰 포워드로서는 평균 이상의 신장인데도 자기보다 훨씬 작고 빠른 포인트 가드들을 수비할 때 별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는 것도 피펜의 위엄을 보여주는 한 단면. 사진과 같이 비슷한 시기 활동했던 NBA 최단신
먹시 보그스도 마크한 적이 있었는데 해설자가
2미터가 넘는 피펜이 170도 안되는 보그스보다도 자세가 낮다며 감탄했던 적도 있다.
[54]
다만 엄밀히 말하면 자기보다 작은 선수에 대한 맨투맨 수비는 특급까진 아니었다. 실제로 마크 잭슨같이 느린 PG가 아니고서야 상대 팀의 PG는 론 하퍼가 주로 막았었다(1990년대 극초반까진 조던이 막거나 당시 PG들이 막았다). 그랬기 때문에 2차 3연패 당시 불스를 가장 괴롭힌 건 알렌 아이버슨이나 데이먼 스타더마이어처럼 작고 재빠른 PG를 보유한 팀들이었으며, 실제로 스타더마이어를 보유한 토론토 랩터스는 리그 꼴찌수준의 약팀이었음에도 1996시즌에 72승을 거둔 불스를 상대로 1승을 거둔 적이 있다! 조던과 피펜을 비교한다면 맨투맨 수비는 조던이, 팀수비는 피펜이 우세라는 평이 많다.
[55]
워낙 강팀이라 어쩌다 한번 진게 충격적인 거지 호구잡히거나 그런건 전혀 아니다
[56]
1998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 상대였던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레지 밀러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57]
다만 위에 언급됐듯이 매직의 주 매치업은 엄연히 조던이었다. 당시엔 조던이 더 뛰어난 수비수였전 점도 있지만 레이커스엔 매직말고도 워디가 있었기 때문에 누가 누굴막든 비슷했다. 그리고 매직이 피펜 때문에 많은 턴오버를 기록했다고 아는 사람들도 있는데, 파이널에서 매직이 범한 턴오버는 평균 4.4개로 이때 플레이오프 전체에서 범한 4.1개와 큰 차이가 나진 않았다. 원래 매직은 커리어 평균 턴오버가 3.7개일 정도로 실책을 많이 저지르는 선수다. 그리고 이때 매직은 파이널 평균 18.6점 12.4어시스트 8리바운드를 기록했는데 이때 플옵 평균 21.8점 12.6어시스트 8.1리바운드와 비교하면 득점만 3점 떨어졌을뿐 제몫을 했다. 필드골 성공률도 44%->43.6%로 크게 떨어지진 않았다. 이때 매직의 포스트업을 막기위해 조던, 피펜을 번갈아 붙여도 안되자 파워 포워드인 그랜트까지 붙였지만 매직이 포스트업으로 밀고 들어가서 득점해버리는 장면까지 나왔다. 그나마 조던이 가장 괴롭히고 효율적으로 막았지 피펜은 그냥 포스트업하다가 동작 한번에 아무것도 못해보고 뚫리는 장면을 계속해서 보여줬다.
[58]
그리고 당시 매직은 커리어 초년부터 당했던 무릎부상이 오랜기간 축적된데다가 장신 포인트 가드는 원래 무릎이 성할 수 없는 상태이며 당시는 지금처럼 선수관리가 잘되던 때도 아니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최전성기가 아니었다. 당시 30세 초반은 노장이라고 할만했으면 무릎이 성하지 못한 만큼 체중이 많이 불어있었다. 무릎상태가 그나마 덜 상했던 80년대 후반의 매직이었다면 피펜이 어찌 해보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올드 농구팬들은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당시 체중이 많이 불어난 매직조차도 2차전 빼고는 잘막지 못했다. 이 시리즈에서 조던과 피펜이 번갈아 가며 매직을 수비하면서 매직의 체력을 많이 소진시켰고 그것이 크게 주효했으나 번갈아 가면서 막는동안 가장 잘 막은건 조던이었다. 공격만이 아닌 수비까지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이 조던이었다.
[59]
이 멤버들 중 코비와 바클리 정도만 피펜이 전담마크 했다. 밀러는 주로
론 하퍼가 많이 막았고 드렉슬러는 조던이 주로 막았다. 칼 말론은 피펜이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선수였고 로드맨이 주로 막았다.
[60]
바비 존스는 1974년 ABA 덴버 너기츠에서 데뷔해 1986년까지 필라델피아에서 뛴 포워드로, 리그 역사상 가장 뛰어난 파워 포워드 수비수로 자주 거론되는 선수이다. 6-9의 3~4번 겸임가능한 큰 키를 바탕으로 한 파워 포워드였는데, 득점력이 뛰어나지 않아 한시즌 15점을 넘긴적이 단 한번도 없음에도 트랜지션 디펜스에 탁월하여 별명이 '국방장관'이었다. 선수 시절 열한 번이나 디펜시브 퍼스트 팀에 선정되었고 그덕에 올 NBA에 1번 뽑혔음에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61]
둘은 역사가 오래된 라이벌은 아니다. 시카고가 뉴욕에 비해 모든 면에서 밀리긴 하지만 지역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미국에서 동부와 중부 지역은 문화나 관습, 정서 면에서 상당히 다르다) 뉴욕 사람들은 오히려 보스턴 같은 지역과 라이벌 감정을 불태우고 스포츠에서도 이런 쪽으로 형성이 많이 된다. 실제로 불스는 조던 시대를 제외하면 닉스와 플레이오프에서 붙은 것은 둘 다 중위권이었던 1980-81시즌 한번 뿐이다. 그러나 각각 1984년, 1985년에 입단한 걸출한 두 루키 조던과 유잉을 중심으로 시카고와 뉴욕은 바닥권 팀에서 리그에서 내로라하는 강팀이 되어가고, 이들은 1989년부터 시작해 1991년, 1992년, 1993년, 1994년, 1996년에 플레이오프에서 맞붙으며 싱겁게 끝난 1991년 정도를 제외하곤 명승부를 연출했다.(1996년에도 비록 성적은 1승4패였지만 무적함대였던 불스에 플레이오프 첫 패배이자 동부에서 유일한 패배를 안겼고, 4차전에서도 막판에 빌 웨닝턴의 위닝샷으로 승부가 갈리는 접전을 벌였다) 특히 1994년에는 수년간 연이어 양팀간 라이벌 의식이 그야말로 극에 달한 상태였다. 게다가 닉스는 리그에서 가장 피지컬한 팀이었기에 격한 신체적 충돌과 더불어 서로간의 감정도 많이 안 좋아진 상태.
[62]
참고로 경기를 참관하러 온
데이비드 스턴 코앞에서 불스와 닉스간의 패싸움이 벌어진 것도 바로 이 경기다. 2쿼터 막판에 불스의 조조 잉글리쉬와 데릭 하퍼가 싸움을 벌이면서 다른 선수들까지 뒤엉켜 그 여파가 관중석까지 번지면서 선수들이 관중들 위에 엎어지는 등 상당히 분위기가 험악한 사건이었다. 결국 이 둘이 퇴장당하고 경기가 재개되었다.
[63]
전 공격권에서 스탁스가 3점슛, 오클리가 롱2를 연달아 넣으며 따라잡혔다.
[64]
17.9초에 인바운드 패스를 받은 피펜이 돌파를 시작할때가 9.9초였다.
[65]
이때 해설자는 "이건 정말...안타깝게도 피펜이 너무 오래 기다렸고 사이드라인이 또다른 수비수처럼 작용하고 말았어요.(Now this is just...Unfortunately, he waited too long and the sideline acted as another defender.)라고 해설했다. 실제로 그는 중앙쪽으로 돌파하지 않고 사이드라인쪽으로 돌파했는데, 만약 중앙쪽으로 돌파했다면 당시 유잉이 너무 멀어 커버를 할 수 없는 위치였기에(피펜의 아이솔레이션을 위해 불스 선수들이 공간을 충분히 준 상황) 옆에 있던 존 스탁스가 커버해야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불스에서 슛이 가장 뛰어난 BJ암스트롱에게 오픈 찬스가 났을 것이다.
[66]
샤킬 오닐이 "조지타운 출신들(Georgetown boys)의 멍청한 러닝훅(Dumb-ass running hook)이라고 장난삼아 평한 슛이다. 실제로
알론조 모닝,
디켐베 무톰보 등 조지타운 출신 센터들이 곧잘 하던 슛이었다. 물론 이건 오닐의 애정 섞인 디스로, 오닐이 어린 시절 가장 좋아하던 선수가 유잉이었을 뿐더러 이 러닝훅슛은 오닐 본인의 공격패턴 중 하나이기도 하다.
[67]
해설자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믿기세요? (마이어스는) 1.8초를 남겨두고 피펜에게 인바운드 할 뻔했어요. 타임아웃이 세개나 남아있었는데 타임아웃을 안 부르고요. 믿을 수가 없군요!"라고 코멘트했다. 근데 이때 착각한 사람은 마이어스가 아닌 피펜이었을 확률이 높다. 마이어스는 천천히 (볼을 받으러) 엔드라인 밖으로 가고 있었고, 피펜이 볼을 던져주자 갑자기 서둘러서 인바운드 패스를 던져줬는데, 애초에 인바운드 패스를 던져줄 작정이었으면 최대한 빨리 볼을 잡고 기습적으로 인바운드 패스를 하지 저렇게 느긋하게 볼을 받으러 갈 이유가 없다. 반면 피펜 본인은 마이어스에게 공을 주고 바로 앞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는데, 타임아웃을 부를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당연히 벤치쪽으로 걸어갔을 것이다. 즉, 마이어스는 타임아웃을 부르려고 하던 것으로 보이고, 서둘러 공을 마이어스에게 던져주고 앞으로 달려나간 피펜이 착각해 빨리 공달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68]
이날 쿠코치의 컨디션도 엉망이었다. 13분을 뛴 그는 그 전까지 야투 5개중 하나만 넣고 있었으며, 자유투도 6개 중 반타작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4쿼터 당시 슛감이 좋은 불스 선수는 없었다. BJ암스트롱이 괜찮은 슛감을 유지하고 있었은나 188cm 단신인 암스트롱은 저 짧은 시간에 수비를 제끼고 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결국 원래 슈팅력이 좋은 쿠코치 밖에 옵션이 없었던 것. 게다가 쿠코치는 이 경기 전까지 NBA에서 위닝버저비터를 세번이나 넣은 적이 있었다.
[69]
실제로 1993년 파이널 6차전 4쿼터 당시 불스는 12점으로 침묵했다. 심지어 이때는 조던이 혼자 9점을 넣으며 팀을 멱살잡고 캐리했고 마지막에 팩슨이 3점 위닝샷을 넣어서 이 정도란 것.
[70]
여담으로 수십점씩 몰아넣는 게 드물지 않은 현대농구 시점에서 보면 이런 서술들이 이상해 보일 수 있는데, 당시는 3점 빈도수가 현대와 비교도 할 수 없이 적었고, 수비가 3점 라인 안쪽에 몰려있는데다 핸드체킹 금지 전이라 피지컬한 수비가 가능했다. 이 때문에 한 팀이 수비 위주로 나오면 공격팀 입장에서는 좁은 공간에 밀집한 수비를 뚫고 레이업이나 중거리를 넣는 식이라 현대농구처럼 대량의 득점이 한꺼번에 나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현대농구는 득점기술이 크게 발달한 반면 수비는 신체접촉에서 크게 제약받기에 득점에 능통한 양쪽이 '누가 더 많이 넣느냐'는 경쟁이라면, 당시는 비교적 투박한 득점기술과 거친 수비로 닉스처럼 '나도 힘들게 넣지만 니는 더 힘들기 넣는다'는 기조의 진흙탕 농구가 가능했다.
[71]
이 경기 때문에 가장 억울한 건 유잉일 것이다. 유잉은 얼토당토않게 새가슴이란 오해를 받아왔는데, 4쿼터 14점, 경기 막판에 8연속 득점을 하며 4쿼터 19점차 리드를 따라잡은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클러치 플레이이기 때문. 닉스가 이 경기를 이겼으면 유잉 커리어 최고의 클러치 퍼포먼스로 기억되었겠지만 sit down 사건 때문에 그 전까지 유잉이 얼마나 잘했는지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실제로 아래 링크된 TNT경기 분석에서도 유잉에 대해선 하일라이트 장면에서 "맹활약했습니다(coming up huge)"라고 간략히 언급되고 이후 분석 파트에서도 아예 언급도 안된다. 실제로 경기 자체에 대한 분석은 없다시피 하고 피펜 얘기만 하다가 끝냈기 때문에 마무리하면서 진행자 어니 존슨이 "시간이 촉박해서 여기서 끝낸다"며 게스트에게 사과를 할 정도였다. 그만큼 농구 외적인 게 너무 커서 농구 자체가 묻힌 셈.
[72]
애초에 닉스는 로스터를 통틀어 수비를 끌어올만한 공격력을 지닌 선수가 유잉과 '불붙었을 때 존 스탁스' 밖에 없다.
[73]
피펜은 좋은 득점력의 소유자고 슛거리도 길었지만 안정적으로 슛을 넣는 선수는 아니었다. 파이널 한 경기에 3점슛 7개를 넣는 등 터질 때는 터지지만 슛 한방이 필요할 때 맡길만한 선수는 아니란 말. 99년에 시카고를 떠난 이후에 포틀랜드에서 리더 역할을 맡을 때도 마지막 슛을 전담하는 선수는 아니었다.
[74]
실제로 TNT에서 경기 후 분석할 때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감독을 지내기도 한
Dick Versace는 "24초 (바이얼레이션) 사건을 봤을때 이는 잭슨의 훌륭한 '깡다구 있는 결정(good gut call)였다고 봅니다"라고 평했다.
[75]
물론 전체적인 커리어나 능력은 당연히 쿠코치가 더 뛰어나지만 3점 그것도 오픈 3점 한정이라면 스티브 커 역시도 NBA 레전드 급으로 커의 통산 3점 성공률은 0.454 이다.
[76]
여기서도 피스톤즈 최고 패서였던 토마스에게 인바운드 패스를 맡긴 걸 볼 수 있다. 심지어 토마스는 피펜보다 클러치 결정력이 훨씬 앞서는 선수인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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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픈 사건은 결국 스틸당해 러셀이 "얘들아 어쩌지"라고 했는데 (본인 회고니 웃기게 셀프비하일 수도 있다) 당시 젊은 선수였던 존 하블리첵이 상대팀 식서스의 인바운드 패스를 스틸해버려 (그 유명한 "Havelicek stole the ball!") 경기가 그대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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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피펜의 등부상이 조던의 플루(사실은 식중독)보다 훨씬 심각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 비교는 좀 엄한 것이 보통 부상투혼으로 화제가 되는 경우는 몸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잘했을때 화제가 된다. 예를 들면
아이재아 토마스는 88년 파이널 6차전 당시 3쿼터에 발목을 접질렀음에도 절뚝거리며 파이널 한 쿼터 최다기록인 25점을 포함한 43점을 올렸다. 92년 불스를 상대한
패트릭 유잉은 6차전 당시 부상에도 절뚝거리며 27점을 올리고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윌리스 리드의 경우 부상투혼을 발휘한 70년 파이널 7차전 당시 4점 밖에 못 올렸지만 팀의 독보적인 에이스로서 득점-리바운드에서 시리즈 1위이고 파이널 MVP도 수상했다. 조던도 마찬가지로 플루게임 당시 38점을 올리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반면 98년 피펜의 경우 시리즈 평균 15.7점 6.8리바운드 4.8어시스트로 평이한 활약을 했고 6차전에는 8점에 그쳤다. 물론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든 몸을 이끌고 꾸역꾸역 뛰어주며 큰 역할을 한 피펜의 부상투혼이 대단한 것은 맞다. 그러나 플루게임이나 위에 언급된 다른 에이스들처럼 팀을 하드캐리한 에이스들의 활약과는 애초에 결이 다르다는 것이다. 만약 피펜이 등부상에도 불구하고 6차전에 30점 이상을 올리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거나, 1~5차전에서 큰 활약을 했어서 파이널 MVP를 수상했더라면 본인이 원하는대로 "back injury game"이라고 불렸을 것이다.
[79]
실제로 조던에 대해 가장 악평을 많이 했던
호레이스 그랜트라든지 조던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발언한
룩 롱리라던지, 합류 초기 마찰이 심했던
빌 카트라이트 중 누구도 조던의 실력 자체에 대해 딴지를 걸진 않았다. 그랜트는 오히려 자신이 둘 다 뛴 팀들 중에서 시카고 불스가 왕조 시절 레이커스를 확실히 이길 수 있을 것이라면서 그 차이로 마이클 조던을 드는 등 인간 자체는 싫어하지만 조던이 최고의 선수란 걸 부정한 적은 없다.
[80]
조던 복귀 전까지 승률이 5할대에 그쳤던 94-95시즌에도 피펜은 좋은 리더쉽을 보이지 못했다. 오히려 이때 퇴장당하면서 코트 위로 의자를 집어던지는 사고를 쳐 1경기 결장, 벌금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피펜의 리더쉽에 대해 좋은 평가를 했던 그랜트는 94년에 올랜도로 이적해 이 항목에서 나온 피펜의 안 좋은 모습을 경험한 적이 없고, 게다가 조던을 싫어하고 피펜과 친한 사이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객관적인 입장이라고 보기 힘들다.
[81]
한때 피펜이 버드급 포워드라는 해괴한 인식이 퍼졌던 시절도 있었음을 고려하면 국내에서의 위상이 매우 극단적으로 바뀐 감이 있다.
[82]
수상자 리스트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80년대엔 오히려 외곽 수비수들이 수상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러나 역대 유례없는 센터 황금기인 90년대에는 수상자들이 거의 센터 일변도가 된 것. 조던 본인도 90년대에 한번도 수상한 적이 없는 것을 보면 피펜의 수상 실패를 조던에게서 찾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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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두 사람의 나이차이는 16살로 라르사 피펜쪽이 연상이다.
[84]
분명 잘못이긴 하지만 평생 사이드킥으로 있다가 이제야 에이스가 됐는데 마지막에 감독이 신뢰를 주지 않으면 실망할 수도 있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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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피펜은 자신의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 소개해줄 사람으로 조던을 선택하기까지 했다. 자신의 농구인생 최고의 자리를 빛내줄 사람으로 선택할 정도로 신뢰하던 사람을 갑자기 까기 시작한 것이니 말의 신뢰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이때 소개자로는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사람이면 아무나 선택할 수 있으며, 실제로 조던도 자신과 개인적인 연이 전혀 없는 어린 시절 우상 데이빗 톰슨을 선택했다. 굳이 조던을 선택했다는 건 그만큼 당시로선 신뢰가 깊었다는 뜻이고, 실제로도 그때 당시에 피펜은 조던에 대해 좋은 얘기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최근 몇년간 다른 소리를 하기 시작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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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조던 - 더 라스트 댄스 2화에서
[87]
능력치가 10점이 만점인데 스피드는 10점 만점의 8점, 파워는 6점, 슈팅력은 8점 덩크 9점, 스틸 9점 블럭 8점으로 블럭은 빅맨 포지션인 로드맨보다 높고 슛은
스티브 커와 동급이며, 스피드는 작은 가드들 빼곤 거의 최상급이다. 파워가 낮아보여도 실제 게임플레이에서 센터들에게 쉽게 밀리지 않는 파워인데다가 모든 스킬이 골고루 발달되어 있어 실제 플레이에선 사기캐였다.
[88]
피펜은 조던을 찬양하는 다른 불스 동료들과는 달리 조던을 칭송하는 걸 다소 꺼리는 모습도 보인다. 한 방송에서 케니 스미스가 조던이 은퇴를 안 했어도 94 휴스턴 로켓츠가 불스를 이겼을 것이라고 하자 다른 패널인 폴 피어스와 빈스 카터는 조던의 존재를 계속 언급했으나 피펜은 불스가 이길것이라고 하면서 조던은 크게 언급하지 않았다. 매치업상 절대우위(vs 버논 맥스웰)인 포지션임에도. 또한 골든스테이트와 불스의 비교에서 조던이 매치업 상대인 클레이 톰슨에게 "우위를 점할 확률이 높다. (probably)"라고 해서, 다른 패널들이 "확률이 높다고요?? (Probably??)"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역대최고 선수인 조던이라면 톰슨을 박살낸다고 보는 게 일반적. 그래놓고 자기랑 듀란트는 서로를 지울 거라고 했는데, 까놓고 말해 피펜의 득점력은 더 크고 수비가 좋은 듀란트에 지워지는 게 당연하니만, 아무리 수비왕급 선수라도 득점왕급의 공격수를 지우는 건 불가능하다. (조던을 역대 가장 잘 막은 듀마스가 그에게 허용한 평균 점수가 30점이다) 아무래도 다들 조던만 칭송하고 자기는 들러리 취급하니 진절머리가 난듯).
[89]
저 발언이 나오기 불과 하루 전에
찰스 바클리가 "르브론이 코비와 대등한 위상을 자랑하려면 다시 한 번 골든스테이트를 파이널에서 꺾어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피펜이 이에 대한 연장선상에서 의견을 밝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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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하게 가넷과 피펜은 최강의 수비력, 다재다능함, 멀티포지션 소화, 투박한 슈팅터치로 인한 득점력의 한계 등 장단점을 대부분 공유하는 선수들이다. 즉 가넷에 대한 비판 대부분은 피펜 본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91]
다만 그랜트는 조던과의 사이가 극악으로 안 좋다는 걸 감안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도 그랜트는 조던의 농구 실력은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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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당시 불스는 조던과 잭슨 감독 위주로 수년간 조직력을 탄탄히 다져온 팀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과연 피펜의 리더십 덕으로 봐야하는지 애매하다. 실제로 조던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동료들이 다들 스탭업해 전력상 한 수 위인 닉스를 거세게 몰아붙히던 2라운드 당시, 희대의 어그로짓을 하며 팀분위기를 박살낸 것이 바로 리더라던 피펜 본인이었다. 게다가 필 잭슨은 관리의 달인인데, 그가 감독으로서 이끌었던 팀들 중 가장 분위기가 안 좋고 재능 대비 결과가 안 나왔던 스쿼드가 바로 95시즌 불스였다. 반면 5할 언저리에서 놀던 이 팀이 시즌 막판에 13승4패를 달리며 분위기를 반전시킨 게 바로 피펜이 리더십 관해 그토록 까댔던 조던의 복귀 이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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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던의 리더십에 대해서는 윌 퍼듀가 조던에 대해 라스트 댄스에서 남긴 멘트를 보면 알 수있다: "오해하진 말아요. 그는 나쁜 새끼(asshole)였어요. 재수없는 놈(jerk)이었고, 무수히 많이 선을 넘었어요. 하지만 되돌아보고 그가 뭘 하려고 했던지 생각해보면, '녀석은 대단한 동료(he was a hell of a teamate)였어'라고 하게 되죠.(“Let’s not get it wrong: He was an a**hole, he was a jerk, he crossed the line numerous times but as time goes on you think back about what he was actually trying to accomplish — you’re like, he was a hell of a teammate,” Will Perdue said.). 즉 조던은 같이 있는 게 불편하지만 성과는 확실히 내는 식의 동료이자 리더였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