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4 07:36:46

그랜트 힐

그랜트 힐의 수상 이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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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명예의 전당 그랜트 힐.jpg
그랜트 힐
헌액 연도 2018년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등번호 33번
캐딜락 앤더슨
(1993~1994)
그랜트 힐
(1994~2000)
요나스 예렙코
(2009~2015)
올랜도 매직 등번호 33번
데릭 스트롱
(1996~2000)
그랜트 힐
(2000~2007)
라이언 앤더슨
(2009~2012)
피닉스 선즈 등번호 33번
앨빈 아담스
(1975~1988)
그랜트 힐
(2007~2012)
앨빈 아담스
( 영구 결번)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 등번호 33번
트레이 톰킨스
(2011~2012)
그랜트 힐
(2012~2013)
앤트완 제이미슨
(2013~20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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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트 헨리 힐
Grant Henry Hill
출생 1972년 10월 5일 ([age(1972-10-05)]세)
텍사스주 댈러스
국적
[[미국|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출신학교 듀크 대학교
신장 203cm (6' 8")
체중 102kg (225 lbs)
윙스팬 211cm (6' 11")
포지션 스몰 포워드
드래프트 1994 NBA 드래프트 1라운드 3순위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지명
소속 팀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1994~2000)
올랜도 매직 (2000~2007)
피닉스 선즈 (2007~2012)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 (2012~2013)
등번호 33번 - 디트로이트 / 올랜도 / 피닉스 / 클리퍼스
5번 -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
SNS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커리어
2.1. 성장기2.2. 대학시절2.3. 데뷔와 함께 전성기2.4. 처절한 몰락2.5. 부활 그리고 회춘
3. 플레이 스타일4. 수상 내역5. 그 외6. 관련 문서7. 수상 내역

[clearfix]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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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농구인이자 現 NBA 팀 애틀랜타 호크스의 공동 구단주.[1]

2. 커리어

2.1. 성장기

그랜트 힐은 텍사스 댈러스 태생으로 독자로 태어났다. 보통 NBA선수들이 형제가 2명 이상인 것에 비하면 약간은 이례적인 케이스이다. 그의 아버지인 캘빈 힐은 예일 대학교를 졸업한 엘리트였으며, 미식축구 러닝백으로 NFL 1969년 드래프트 1라운드 24순위로 댈러스 카우보이스에 지명되어 12년동안 카우보이스, 레드스킨스, 브라운스 3개팀에서 뛰면서 1969년 신인왕, 4번의 프로보울(올스타), 1971년 카우보이스 슈퍼볼 우승멤버로 좋은 커리어를 쌓았다. 어머니인 자넷도 명문 여대 웰즐리 칼리지를 졸업했는데, 힐러리 클린턴과 대학동문이다. 룸메이트였다고.[2][3]

집은 어느 정도는 부유했던 것으로 보이며, 아버지 캘빈 힐이 미식축구 선수를 은퇴하고 난 후 가족은 버지니아 주 레스톤으로 이주했다. 그랜트 힐은 농구선수로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1990년 McDonald's All-American Team에 선정되면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2.2. 대학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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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대학들이 힐에게 구애를 펼쳤다. 그의 어머니는 흑인선수의 지위 향상에 많은 노력을 하는 존 톰슨 주니어 감독이 있는 조지타운 대학교를 원했지만, 아버지는 농구명문인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를 원했다. 하지만 힐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역시 농구명문 대학교인 듀크 대학교에 진학해 4년을 다 채웠다. 그는 마이크 슈셉스키 감독의 가르침을 받으며 크리스찬 레이트너 및 바비 헐리와 함께 1991 및 1992년에 2년 연속 NCAA 챔피언을 맛보았다. 대학 농구 역사상 최고의 게임을 뽑을 때 무조건 들어가는 1992년 켄터키 vs 듀크 8강전에서 레이트너의 The Shot 을 꽂게 롱패스를 꽂아준게 다름아닌 그랜트 힐이었다.

대학시절 보여준 포스가 워낙 엄청나서 그의 대학시절 등번호이자 현재 그가 애용하는 등번호 33번은 듀크 대학교 영구결번으로 등록되어있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 그랜트 힐은 1994년 NBA 드래프트에 참가신청을 한다.

2.3. 데뷔와 함께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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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의 표정이 신경쓰인다면 기분탓이다.

1994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3순위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 지명됐다. 이때 당시 디트로이트는 배드 보이즈의 해체 이후로 내리막을 타고 있었다. 힐은 팬들의 성원과 당시 배드 보이즈의 주축 멤버 중 유일하게 남아었던 조 듀마스의 지지와 뒷받침 덕분에 단숨에 팀의 리더로 올라섰다. 당시 인기가 엄청나게 높아서 94-95시즌에 열린 올스타전 팬투표에서 샤킬 오닐을 밀어내고 1위를 기록해서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올스타전 본 게임에 참가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때 당시가 마이클 조던의 은퇴 직후인데다가 아직 복귀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앤퍼니 하더웨이와 함께 NBA의 차세대 아이콘으로 주목을 받았다. 94-95시즌 힐은 신인으로서 경기당 평균 19.9득점 6.4리바운드 5.0어시스트 1.8스틸이라는 훌륭한 활약으로 제이슨 키드와 함께 올해의 신인상을 공동으로 수상했다. 팀으로서는 데이브 빙이후 오랜만에 나온 신인상 수상자이기도 했다.

95-96시즌에는 조던의 복귀 후 첫 풀 시즌이었음에도 힐의 인기는 높았다. 조던을 제치고 또 한번 올스타전 팬투표 1위를 하는 등 그야말로 전성기를 달렸다.[4] 이 당시 그랜트 힐의 인기가 어느정도였느냐면 NBA는 항상 경기전 원정팀과 홈팀의 스타팅5를 장내아나운서가 소개하는데, 보통 원정팀 선수를 소개할 때는 홈 관중들의 가벼운 야유가 쏟아지는 게 일상이지만, 오직 그랜트 힐만은 정말 큰 환호를 받았다. 여태껏 원정팀 선수면서 홈팀 선수 못지않게 큰 환호를 받는 선수는 이 당시 그랜트 힐이 거의 전무후무한 사례다.[5] 이 시즌 80경기에 출전해 평균 20.2득점 9.8리바운드 6.9어시스트의 성적을 올렸으며 팀도 간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오프시즌에는 드림팀3의 일원이 되어서 1996 애틀란타 올림픽에 참가해 금메달을 따기도 했다. 마이클 조던 이후 리그를 대표하는 후계자를 찾는데 혈안이 되었던 NBA로서는 이런 힐의 활약에 반색했으며, 실제로 앤퍼니 하더웨이와 함께 '포스트 조던'의 선두주자로 꼽혔다.[6]

파일:external/www.nba.com/grant_hill_pistons_dribble.jpg

96-97시즌부터는 조 듀마스의 충고를 받아들여 더욱 전투적으로 플레이했고, 팀 동료들을 독려하며 리더십을 보이는 등 완전한 팀의 리더로 올라섰다. 이 시즌 피스톤즈는 새로 바뀐 팀 로고와 유니폼과 더불어 제 2의 창단을 선언해 팀 분위기가 고무된 상태였다. 거기에 신임 감독 덕 콜린스의 전술, 마지막 불꽃을 태운 듀마스의 활약, 건재했던 오티스 도프와 테리 밀즈, 린지 헌터, 그리고 그 시즌 새로 영입된 이적생 그랜트 롱과 스테이시 오그먼 등의 활약으로 시즌 초반부터 리그 선두권으로 치고 나갔으며, 오랫동안 72승 불스에 이어 동부지구 2위를 유지했다. 이 시즌 힐은 80경기에 출전해 무려 평균 21.4득점 9리바운드 7.3어시스트로 세 카테고리에서 모두 팀내 1위를 기록했다. 시즌 평균 20득점이상 9리바운드 이상 7어시스트 이상을 해낸 것은 래리 버드 이후 처음이다. 이 시점까지 비교 대상으로 자주 거론되는 스카티 피펜[7]을 능가했다는 평을 받았으며 All NBA 퍼스트팀에 이름을 올렸다. IBM에서 선정한 시즌 최고의 플레이어에 선정되기도 했다.[8] 이와 더불어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이 시즌까지 트리플더블을 밥 먹듯 했었다. 팀도 54승 28패의 성적으로 다시 예전처럼 전성기를 맞는 것처럼 보였으나...

승승장구할 것 같았던 피스톤즈는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애틀랜타 호크스에 일격을 당해 2승 3패로 탈락하고 말았다. 이후 주축 멤버들의 구성 자체는 그렇게 큰 변화가 없었음에도 공교롭게도 완전히 약체인건 아니지만 전형적인 중위권과 하위권을 허덕이는 중간그룹의 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힐 또한 그동안 많은 짐을 짊어진데에 대한 부담 때문인지 개인 기록에서 소폭 하락세를 보였다.

조 듀마스, 릭 마혼 등 배드 보이즈 멤버들이 모두 떠나고 맞게 된 99-00시즌. 그제껏 활약에 비해 득점력이 좀 아쉽다는 평을 받아온 힐은 이 시즌 본격적으로 득점에 집중하겠다고 선언하고 정말 그렇게 했다. 그제껏 거의 시도하지 않았던 3점슛까지 펑펑 꽂아넣으며 시즌 평균 25.8득점을 기록. 샤킬 오닐 앨런 아이버슨에 이어 그 시즌 득점랭킹 3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시즌 막판 발목부상을 당했고 한 번도 플레이오프 1라운드를 통과해보지 못한 미련 때문인지 부상 치료 대신 플레이오프 출전을 강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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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몸이 정상이 아니었던 힐은 플레이오프 첫 두 경기동안 고작 평균 11득점에 그치는 저조한 활약 끝에 시즌 아웃 판정을 받았고, 팀의 스윕패를 지켜봐야만 했다. 제대로 뛸 수 없어 코트 바닥에 엎드린 채로 자책하는 모습이 많은 팬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리고 이 안타까운 모습이 피스톤즈에서의 마지막이었다.

피스톤즈 시절을 총평하자면 그랜트 힐 개인은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그것이 피스톤즈의 성공으로 이어지진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일부 피스톤즈 팬들은 그의 플레이가 배드 보이즈와 비교해 너무 '신사적'[9]이라며 싫어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 후...

2.4. 처절한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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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00시즌을 마치고 FA가 된 힐은 고민 끝에 이적을 결심했다. 팀 던컨과 더불어 그 해 FA 최대어였던 힐에게 여러 팀이 달려들었지만 힐의 선택은 올랜도 매직이었다. 7년 93M의 조건에 사인 앤 트레이드 형식으로 이적했으며 그 대가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는 처키 앳킨스와 벤 월러스를 받았다. 당초 올랜도 매직은 팀 던컨-그랜트 힐 듀오 결성을 꿈꿨으나 던컨이 스퍼스에 잔류를 선언하자 발빠르게 힐을 잡고 플랜 B로 트레이시 맥그레이디를 영입했다. 팬들은 힐-맥그레이디의 조합에 그분과 피펜에 이은 또다른 슈퍼 듀오의 활약을 기대하며 새 시즌을 손꼽아 기다렸다.[10] 그리고 이때부터 그랜트 힐의 불운이 시작되었다.

2000년에 당한 발목부상[11]이 올랜도에 와서 제대로 발목을 잡아버렸다. 2000년 플레이오프에서 발목부상을 안고 억지로 뛴 것이 화근이었다. 2000-01시즌. 단 4경기만 출전하고 나머지 모든 경기를 결장했다.[12] 팬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근데 이 불운이 끝이 아니었다는 것. 그 다음 시즌인 2001-02 시즌은 달랑 14경기 출전. 그 다음 2002-03시즌은 29경기 출전. 2003-04시즌엔 아예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하고 시즌아웃되었다. 올랜도 이적 이후 발목 수술만 4차례를 받았으며, 올랜도에서 6시즌 간 출전 경기수는 도합 200경기에 불과했다. 게다가 이 시기에는 탈장 수술 까지 받는 등 한 마디로 성한 곳이 없는 만신창이였다

그랜트 힐의 팬들은 이런 힐의 몰락을 슬퍼하고 아쉬워했으며, 본의가 아니게 먹튀 혹은 유리몸으로 욕을 먹어야했다.[13] 한때 리그의 아이콘으로 대접받던 그는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에 사라져갔다. 같이 리그의 아이콘으로 추앙받던 앤퍼니 하더웨이가 똑같이 부상으로 몰락한 것 때문에 올드팬들은 여전히 이 때를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한다.[14]

2.5. 부활 그리고 회춘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에 잊혀졌던 힐은 04-05시즌에 정말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게 부활했다. 67경기에 출전하면서 오랜만에 많은 경기를 뛰었고, 올랜도 매직에 들어온 후 가장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2004년 12월 15~21주차 기간 동안 좋은 활약을 보여주면서 이주의 선수로도 선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힐은 팬들의 성원에 힘입어 05년 올스타전에 출전했다.[15] 이제 더이상 과거의 전성기 시절의 모습은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시즌 평균 19.9득점으로 오랜만에 좋은 폼이었고 팬들은 그저 힐이 코트에서 달릴 수만 있다는 것에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다음 시즌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으나 뜬금없이 탈장에 시달려 05-06시즌은 21경기 출전에 그쳤다. 이때 팬들은 다시 불안해했지만, 06-07시즌에는 다행히 건강한 모습으로 65경기에 출전했다.

06-07시즌이 끝나고 올랜도와 계약이 만료되었던 힐은 재계약과 이적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피닉스 선즈로 이적했다. 과거와 같은 슈퍼스타의 모습은 아니었어도 준수한 주전급으로의 폼은 회복한 상태였기 때문에, 매직 팬들은 힐이 그동안 많은 연봉을 받고 뛰지 못한데 대한 미안함 때문에라도 매직과 적당한 가격에 재계약해주기를 바랐지만 이적해버려 실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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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당시 많은 팬들은 힐의 선택이나 피닉스 선즈의 선택에 의구심을 표했다. 그도 그럴 것이 피닉스 선즈는 당시 닥치고 달리고 넣는 공격농구를 한 것에 비해, 힐은 그동안 발목 부상으로 씨름한데다 나이도 30대 중반의 노장선수였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전망은 백업요원정도로 예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피닉스 선즈에서 보낸 초창기 두 시즌은 벤치에서 출전하기도 했으나 주로 주전으로 출전했고, 그 후에는 아예 풀타임 주전으로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피닉스 선즈 의료진의 유능함 덕분인지 힐은 회춘했다. 이유가 하도 발목부상으로 시달린 덕분에 무릎 상태가 매우 싱싱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피닉스의 달리는 농구에 무리없이 적응할 수 있었다. 38세의 나이에 슬램덩크를 꽂아넣기도 했다. 또 피닉스 선즈 로스터 중에서 가장 수비 잘하는 선수였기에 수비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선즈에서의 2년차였던 08-09시즌은 전성기때도 달성하지 못한 82경기 전 경기 출전을 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다음 시즌과 그 다음 시즌도 각각 81경기와 80경기에 출전하며 세 시즌동안 결장 경기수가 겨우 3경기밖에 되지 않는, 과거 유리몸이었던 시절엔 상상조차 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선즈에 있는 기간에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2라운드를 돌파하기도 했다. 물론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에게 패하긴 했지만.[16] 선즈가 리빌딩에 들어갈 즈음 계약이 만료되어 힐은 다시 한 번 재계약과 이적 사이를 고민했으나 선즈가 마음에 들었는지 1년 재계약을 택했다. 참고로 이 당시 뉴욕 닉스가 힐을 절실히 원해 3년의 계약기간과 더 많은 연봉을 제시하여 사실상 닉스로의 이적이 확정된 분위기였고, 해외는 물론 국내의 NBA 커뮤니티들조차 힐의 닉스 이적을 축하한다는 메시지가 많이 올라온 시점에서 선즈에 남기로 결정한 것이라 힐의 선택은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졌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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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즈와의 단년 계약이 끝나고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로 이적했다. 클리퍼스에서 한 시즌을 뛴 후, 2013년 6월 1일 현역 은퇴를 선언하면서 선수 생활을 마쳤다.[18]

3. 플레이 스타일

화려하면서도 다재다능했던 선수. 트레이시 맥그레이디, 마이클 조던 등과 함께 역사상 가장 뛰어난 퍼스트스텝을 가졌다고 평가받는다. 탑에서 공을 잡은 후 스텝 몇 번 밟으면 어느새 수비수를 제끼고 림에 도달해있을 정도로 폭발적인 스피드와 뛰어난 테크닉을 겸비했다. 뛰어난 돌파력을 가졌음에도 무리하게 볼호그처럼 플레이하지 않았고, 포인트 포워드로 활약할 정도로 뛰어난 시야를 바탕으로 팀원들을 살려주는 플레이에도 능했다.

스윙맨스러운 이미지가 강해서 간과하지만 리바운드 능력도 대단히 뛰어났다. 2년차 때 기록한 평균 20.2득점 - 9.8 리바운드 - 6.9 어시스트와 3년차 때 기록한 평균 21.4득점 - 9.0 리바운드 - 7.2 어시스트는 지금 봐도 놀라운 올라운더로서의 스탯이다.

당대의 스윙맨 에이스들에 비해 3점 옵션은 부족한 편이다. 많이 쏘지도 않았고, 주무기라고 할 시즌도 없다시피 하다. 그나마 득점랭킹 3위를 기록했던 99-00시즌에 이례적으로 많이 시도해 .347의 3점슛 성공률을 기록했고, 선즈 이적 이후 슛거리를 늘리며 3점슛을 옵션으로 장착했다. 그 외에 간결한 드리블 돌파 후 반박자 빠르게 던지는 미드레인지 점퍼는 상당한 정확도를 자랑했다.

4. 수상 내역

수상 내역
파일:NBA-Allstar2021.png NBA 올스타 7회 (1995-1998, 2000-2001, 2005)
파일:NBA 로고.svg NBA 올해의 신인상 (1995)[19]
파일:NBA 로고.svg 올-NBA 퍼스트 팀 (1997)
파일:NBA 로고.svg 올-NBA 세컨드 팀 4회 (1996, 1998-2000)
파일:NBA 로고.svg NBA 올-루키 퍼스트 팀 (1995)
파일:NBA 로고.svg NBA 스포츠맨십 어워드 3회 (2005, 2008, 2010)

5. 그 외

아내가 가수 타미아이다.[20]이 두 사람은 1999년 7월 24일에 결혼했고, 슬하에 딸 둘이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외모를 많이 닮아서인지 딸들도 귀엽다.

정말 잘 나가던 시절에 스프라이트 음료 광고를 찍었는데, 당시 월간지 루키와 했던 인터뷰에 따르면 실제로도 스프라이트 음료를 매우 좋아해서 아예 집에다 자판기를 설치해놓고 원하는 대로 뽑아먹었다고 한다. 당연히 경기 전이나 경기 중에도 많이 마셨다고 한다.[21]

그의 발목부상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말이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데뷔 초부터 경기당 40분 가까이 뛸 정도로 혹사를 겪은데다, 플레이 스타일이 드웨인 웨이드 이상으로 터프한 드리블 돌파에 전적으로 승부하는 타입의 스윙맨이라 그만큼 하체의 부담이 심했던 것. 통산 3점슛 성공률이 31%에 불과하고, 그나마 미드레인지는 쓸만했지만 기본적으로는 페네트레이션 기반의 플레이어라서 돌파가 막히면 팀 공헌도가 급격히 떨어지는 타입의 선수이다.

그런데 여기에 찰스 바클리가 그의 부상을 두고 "그랜트 힐이 발목 부상을 당한건 휠라의 쓰레기 같은 신발 때문이다."라고 독설을 날린 바 있다. 근데 어느 정도는 신빙성이 좀 있었던 게, 당시 휠라는 스포츠의류에서는 알아주는 브랜드였지만, 농구용품 쪽으로는 거의 무지에 가까웠는데, 자기네들도 농구 쪽으로 진출해보자 하는 심보로 선수를 물색하다 힐이 낚인 것이었다.[22] 힐이 발목부상을 당했을때도 휠라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사실 리복의 펌프시스템, 나이키 에어시스템이 보편적이었던 스포츠 테크놀로지의 성황기였지만 그랜트 힐 시그니처슈즈는 아무 기능없는 목높은 운동화 수준이었던 것은 사실이다.[23] 결국 휠라는 힐과의 계약이 만료되자 슬쩍 그가 신던 농구화를 리트로 해버렸다. 그 후 힐은 나이키 아디다스를 번갈아 신었다. 최종적으로는 아디다스를 신었다.

2018년 휠라는 패션브랜드로 완전히 자리잡아 국내에서 상당한 매출액을 올리고 있다. 특히 10대~20대 초반 계층에서 레트로 된 농구화를 많이 신고 있는데... 휠라 농구화가 그랜트 힐의 발목부상이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는지 여부는 아쉽게도 정확히 알 수 없다. 디트로이트 팀 메이트 였던 제리 스택하우스도 휠라에서 힐과 함께 시그니처 모델을 만들어 주었고 몇 시즌 동안 착용했으나 힐과 같은 발목 부상, 다리 관련 부상은 발생하지 않았다. 다만 휠라 농구화가 그랜트 힐이 모델로 있던 시기에도 큰 임팩트를 보이지는 못했고 메인 모델인 힐이 부상당하자 빠르게 농구시장에서 사라진 점은 분명한 사실이였다. 앤퍼니 역시 나이키 대표 모델이였지만 결국 무릎부상으로 커리어를 완성시키지 못했고, 데릭 로즈 또한 아디다스 메인 모델이였지만 이어지는 무릎 부상으로 MVP 레벨에서 내려왔다.

결국 case by case 관점으로 선수 본인 건강관리, 플레이스타일, 철강왕 수준의 타고난 몸이 부상 여부를 좌지우지 하며 '농구화도 일정부분 영향을 끼칠수 있을 수도 혹은 없을 수도 있다' 라고 보는 것이 그나마 팬 입장에서는 위안을 얻는다. 90년대 하킴 올라주원, 칼 말론, 글렌 라이스 및 리복과 계약이 끝난 샤킬 오닐 역시 글로벌 스포츠 용품과는 거리가 있는 브랜드 제품을 착용했으나 커리어를 방해하는 악질 하체관련 부상은 없었다. 물론 오닐은 잔부상이 많았지만 시즌 전체 및 힐처럼 선수생명을 빼았는 부상은 전혀 아니었다. 그저 그랜트 힐의 발목이 유리 발목이였고, 무리해서 출전한 2000년 플레이오프가 힐의 농구 인생을 바꾸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수 있다.

NBA Open Court 에서는 한때 "잃어버린 기회들" 특집에 힐에 대해서 다룬적이 있다. 공교롭게도 그가 패널로 있던 자리에서 그 대화가 이뤄졌는데 계속되는 부상에 대해서 "과거를 회상하며 좌절했던 적이 있느냐?" 라는 질문을 받자 그는 "그저 뛸 수 있는 것에 감사하다" 라고 하였지만 한때는 좌절감을 느끼며 다 때려치고 싶었다고.... 하지만 몸이 나아지자 다시 코트에 뛰고 싶었다고 한다. 동료 패널들이 너무 겸손하다고 이야기하다가 불끈했는데 자기 딸이 힐을 가리켜 "아빠, 르브론이나 듀란트, 앤써니 같은 애들 못막지?" 라고 물어본게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딸이 유튜브에서 그랜트 힐의 전성기를 보고 난 후에는 "아빠, 정말 잘했었네?" 라고 알아줘서 기분 좋았다고 하더라.

이날 동료 패널들 (같이 코트에서 뛴 스티브 스미스, 스티브 커 등등) 에 의하면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선수 중에 하나였다고 한다. 사람들이 괜히 포스트 조던이라고 부르는게 아니었다고.... 아이제아 토마스는 아무래도 자신의 배드 보이즈 후배라 그런지 첫 등장할 때 사람들이 "포스트 조던이 나왔다" 라고 말했었다고 자랑스러워 했다.

피스톤즈 시절 힐의 플레이는 가히 폭발적이였는데 특히 크로스오버나 돌파에 이은 덩크는 힐의 전매특허였다. 돌파 후 패트릭 유잉, 알론조 모닝, 디켐베 무톰보[24]등 당대 최고 센터이자 블락커들 앞에서 원핸드 덩크를 찍었고 스카티 피펜과 1대 1에서 순식간에 크로스오버로 속이고 덩크를 하는 등 운동능력 역시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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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NBA 프로그램 inside stuff의 MC로 얼굴을 비추는 중이다. 방송에서의 활약도 꽤나 잘나가는듯. 코드에서 그랬던 것처럼 실제로 스티브 스미스와 함께 시끄럽고 와일드한 바클리, 샤킬 오닐 그리고 케니 스미스의 대조되는 패널로 점잖게 해설을 하는게 특징.

2015년 애틀랜타 호크스의 공동 투자자로 참가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기사

참고로 커리어 초창기부터 선수생활을 마칠 때 까지 준수한 용모로 주목받았으며, 무엇보다 선수생활 막바지에 40대에 이르렀을때도 20대 초반과 얼굴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미친 동안을 자랑했다. 이 위키에서 사진들만 쭉 스크롤을 내려 보면 알 수 있다. 동안 여부에 크게 의미부여하지 않는 해외 포럼에서도 "힐의 얼굴은 나이를 안 먹는것같다"는 소리가 심심찮게 나왔을 정도.

파일:external/media.mlive.com/granthilljpg-2600213b01e5a76b_large.jpg
오죽했으면 이런 짤도 있다.

1995-96 시즌과 올림픽을 마치고 방한한 적이 있었다. 당시 김국진이 진행하는 일밤코너인 김국진의 한판승부에 출연, 미션을 수행하기도 했다. 백보드에 맞고 튀어나오는 공을 바로 원맨 앨리웁으로 연결하는 것이었는데, 한판승부에 도전하려던 순간 MC김국진이 연이어 ‘그만(Stop)’을 외치자 결국 장난스레 김국진에게 ‘헤드락’을 걸기도 했다.

게다가 방한 당시 그랜트 힐의 철저한 경제관념을 볼 수 있는 일화가 화제였는데, 카세트 워크맨 을 구입하기 위해 용산전자상가로 쇼핑을 간 것. 몇 군데 가계를 둘러보며 물건을 고르다가 한 물건이 마음에 들었는지 구매를 고려했고 점원은 8만원이라며 힐에게 구매를 권했다. 그러나 한참 고민을 하더니 비싸다고 생각했는지 결국 구매하지 않았다! 당시 연봉으로만 4백만 달러를 넘게 수령했던 백만장자 그랜트 힐의 이런 자린고비 정신에, 함께 동행한 스태프와 기자들이 모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2018년 제이슨 키드, 스티브 내시, 레이 앨런 등 다른 레전드급 선수들과 더불어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듀크 출신 중 선수로서 명예의 전당에 오른 첫 선수다. 그 부상 이력에도 퍼스트팀 1회, 세컨팀 4회, 올스타 7회 선정 이력을 자랑하는 만큼, 20000점에 못미치는 통산 득점을 제하면 명전 입성이 어려운 커리어는 아니다.

2020 도쿄 올림픽 이후 제리 콜란젤로 전 피닉스 선즈 구단주의 후임으로 미국 국가대표팀 단장직을 이어받을 예정이다. 관련 내용

6. 관련 문서

7. 수상 내역

1995년 NBA 올해의 신인상
크리스 웨버 그랜트 힐, 제이슨 키드 데이먼 스타더마이어
2005년 NBA 스포츠맨십 어워드
PJ 브라운 그랜트 힐 엘튼 브랜드
2008년 NBA 스포츠맨십 어워드
루올 뎅 그랜트 힐 천시 빌럽스
2010년 NBA 스포츠맨십 어워드
천시 빌럽스 그랜트 힐 스테판 커리


[1] 정확히 말하면 애틀란타 호크스는 사모펀드 '아레스 매니지먼트'가 인수했는데 투자자 중 한 명이 바로 그랜트 힐이라고. 기사 [2] 사실 이때문에 힐은 선수시절 흑인 동료들에게 왕따를 당했다고 한다. 원래 흑인 운동선수들 상당수는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고 흑인들끼리 뭉쳐서 그들만의 문화를 공유하는 경향이 강한데, 부잣집 도련님으로 올바르게 자란 힐은 같은 흑인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했다고 한다. [3] 이 때문에 디트로이트 시절 재밌는 컨셉의 광고가 있는데, 배드 보이즈로 유명한 팀 레전드 빌 레임비어가 "그랜트. 넌 너무 착해"라며 그가 나쁜 놈이 되도록 트레이닝시킨다. "심판이다!"란 레임비어의 외침에 맹견처럼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대는 힐의 모습이 압권. 사실 대부분의 스타들은 신인 시절 이런 웃긴 모습의 영상을 찍는다. 샤킬 오닐 영상 대부분에 나오는, 그가 신인시절 미키마우스 모자를 쓰고 "s.h.a.q.i.e.m.o.u.s.e"(샤키 마우스, 즉 미키마우스 노래 패러디) 노래를 부르는 영상이 대표적. [4] 조던은 초월적인 인기를 자랑하는 인물답게 87~93시즌, 97~98시즌까지 총 9번 올스타 투표 1위를 차지했다. 86시즌을 부상으로 거의 못 뛰었고, 94, 95시즌은 은퇴한 상태니(95시즌 막판에 복귀했지만 이미 올스타전이 끝난 상태) 제대로 뛰고도 올스타투표1위를 놓친건 루키시즌과 96시즌뿐이다. 다시 말해 전성기의 조던을 인기로 누른 건 힐이 유일하다. 참고로 조던 다음으로 올스타 투표 1위를 많이 차지한 건 2020년 기준으로 르브론 제임스, 총 7회이고, 그 다음은 줄리어스 어빙 빈스 카터로 각각 4회씩. [5] 조던은 경기 중 환호를 받는다. 그 예로 게리 페이튼이 루키시절 이였던 90년 11월 17일 시애틀 홈 경기를 보면 시카고 홈으로 착각될 만큼 조던 플레이에 많은 환호를 보낸다. [6] 조던의 예상치 못한 1차 은퇴 이후 한참 글로벌 시장 개척을 하고 있었던 NBA 입장에서는 정말 호들갑스럽다 싶을정도로 포스트 조던을 물색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 이 당시는 정말 조금만 싹수가 보이는 선수가 있어도 언론에서 포스트 조던 후보군에 넣고 설레발을 치곤 했는데, 가장 많이 이름이 언급된 선수가 본 항목의 그랜트 힐, 앤퍼니 하더웨이, 그리고 90년대 후반부터 NBA에 입성한 코비 브라이언트 빈스 카터 등이 있다. 그 외 나름 유명했던 선수가 95-96시즌 필라델피아에 입단한 제리 스택하우스인데, 조던과 똑같은 6피트6인치 신장,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출신, 드래프트 3순위 등의 요소가 있어 스택하우스가 시즌 초반 반짝하며 신인왕 후보 1순위로 꼽히자 언론에선 진짜 조던의 후계자가 나타났다는 식으로 장난 아니게 설레발을 쳤다. 심지어 해롤드 마이너같이 덩크만 잘했던 선수조차도 당시 포스트 조던 후보군에 있었으니 그 심각성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다. [7] 힐과 피펜은 세대가 다른 선수다. 피펜은 87년에 데뷔했고 힐은 94년도니까 대략 8시즌이 차이가 난다. 물론 96/97시즌만 보면 힐의 활약이 더 좋았지만 피펜도 2nd팀에 이름을 올렸다. [8] 참고로 역대 IBM Award 수상자 중 리그 MVP 수상 경력이 없는 선수는 그랜트 힐이 유일하다. [9] 그랜트 힐을 대표하는 별명이 '코트의 신사'. 실제로 명문대 출신 부모 밑에서 정규 교육을 잘 받아 흑인문화와는 거리가 있었던 힐을 싫어하는 흑인도 적지 않았다. 이럴 때 쓰는 속어가 버락 오바마도 가끔 듣는 오레오. [10]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인데 던컨은 사실상 올랜도 이적으로 마음을 먹었지만 데이비드 로빈슨이 직접 설득하여 스퍼스에 잔류했다. 그리고 이 결정은 던컨 개인뿐만 아니라 소속팀 스퍼스에게도 서로 최고의 결정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2001-02 시즌 토니 파커가 영입되고, 2002-03 시즌 마누 지노빌리가 영입되면서 그 유명한 스퍼스 BIG 3가 결성되어 이후 스퍼스는 네 번의 파이널 우승을 더 하게되고, 던컨 개인으로서도 MVP를 2번 수상하고, 파이널 MVP도 이후 2번이나 더 수상하면서 통산 3회 수상을 기록한다. [11] 힐은 매직과 계약당시에 발목에 깁스를 하고 올 정도였는데 매직입장에서 이 발목 부상이 경미한 정도로 인식했다. 당시 매직은 2000년 FA시장에서 힐, 던컨, 맥그레이디을 최우선 영입대상으로 목표를 잡은 만큼 98-99시즌 종료 후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앤퍼니 하더웨이를 선즈로 보냈을 정도로 이 시기 시장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결과적으로 당시 무명이였던 벤 월러스는 당대 최고의 수비형 센터로 성장하였으니 매직입장에서는 처절한 실패였으나 당시 그랜트 힐은 ALL - NBA급 선수였고 SF 1인자 선수였기에 매직 입장에서는 단행할 수 밖에 없는 계약이였다. 역사적으로도 리그를 대표하던 선수가 트레이드 직후 부상으로 급 하락한 경우는 거의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굉장히 희귀한 케이스다. 하지만 당시 힐이 성실하고 좋은 이미지를 가진 선수였기에 지금까지도 욕은 덜 먹고있다. 비슷한 예로 유럽축구에서 카카가 AC밀란에서 레알 마드리드로 당시 엄청난 이적료로 팀을 옮겼으나 카카 역시 끊임없는 부상과 컨디션난조로 빠르게 기량이 하락했는데 카카 역시 힐 만큼 좋은 이미지를 가진 선수였기 때문에 욕을 덜 먹었던 것과 비슷하다. [12] 대신 트레이시 맥그레이디가 힐의 몫까지 함께 활약했고 무려 평균 26.1득점을 기록하며 그 시즌 기량발전상(MIP Award)을 수상했다. [13] 국내에서도 'NBA의 최악의 조합'으로 '그랜트 힐의 발목'이 꼽히기도 했다. [14] 다행인지 불행인지 힐이 이적 첫 해부터 부상으로 못나오자 맥그레이디는 자연스럽게 매직 1인자가 되었고 팀을 넘어 당대 최고 인기 선수로 성장했다. 하지만 맥그레이디 역시 원맨팀의 한계에 지쳐갔고 결국 03/04 시즌 동부 최하워권으로 성적이 폭락하는 사태까지 발생하고야 말았다. 04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를 획득 한 매직은 고졸 센터 드와이트 하워드를 선발했지만 즉각적인 전력상승을 기대한 맥그레이디는 에메카 오카포를 뽑지 않은 매직에게 대놓고 실망한 심정을 숨기지 않았으며 시즌 내내 불평 불만에 지친 매직은 결국 맥그레이디를 휴스턴으로 트레이드 시켰다. 맥그레이디 본인도 고졸 선수 출신으로 리그에 데뷔한 선수였음을 볼때 참으로 아이러니 한 전개과정이 아닐수 없다. 하워드가 데뷔와 동시에 즉각 적응하여 안정적인 루키 시즌을 보냈고 당시 하워드는 전성기 시절 및 로스앤젤레스, 휴스턴 시절과 달리 초창기에는 순둥순둥한 면이 많았으며, 당시 최고 스윙맨이자 전성기에 들어선 맥그레이디의 플레이에 반대를 할 이유도 없었다.또한 맥그레이디 이적 이후 기적적으로 힐이 복귀해서 올스타 까지 선발된 것을 보면 한치 앞날도 볼 수 없음을 알 수 있는 점 또한 흥미롭다. [15] 이때 인터뷰에서 과거 (훨씬 베테랑인) 스카티 피펜이 자신에게 숀 켐프를 막으라고 떠넘긴 것처럼 자신도 르브론 제임스에게 케빈 가넷의 수비를 떠넘기겠다고 밝혔다. 물론 켐프/가넷이 칼 말론/팀 던컨보다 좋은 선수는 아니지만, 보통 이들처럼 사이즈가 딸리는 선수 입장에서는 운동능력이 뛰어난 선수들이 더 막기 힘들기 때문. 다만 당연하지만 경기에서 힐은 던컨에게도 털렸다. [16] 후에 회술하기를 이 때가 가장 아쉬웠다고 한다. 우승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라고 생각했기에. 실제로 선즈가 우승에 가장 근접한 순간이기도 했다. [17] 참고로 닉스는 힐의 최전성기 때 첫 FA가 된 2000년에도 힐을 영입해 패트릭 유잉을 보좌하고자 했다. 힐 본인 또한 "유잉이 우승반지 끼는 것을 돕는것에 관심이 있다."는 코멘트를 남기며 나름 고민했으나, 결국 당시 가장 전도유망한 팀이었던 올랜도 매직을 택했다. [18] NBA 토크쇼 오픈 코트에 나와서 밝힌 바에 따르면, 어느날 경기 직전에 연습을 하다가 젊은 선수들이 화려하게 덩크하는 것에 자극받아(클리퍼스에는 블레이크 그리핀, 디안드레 조던 등 운동능력 뛰어난 선수들이 즐비하다.) 자기도 덩크를 꽂았다고 한다. 당시 경기에서는 일분도 뛰지 않았는데 통증이 느껴져서 검사해보니 부상을 당했다고. 힐은 "연습하다가 부상당하는 걸 보니 갈때가 됐구나 싶었죠"라고 회고했다. [19] 제이슨 키드와 공동으로 수상 [20] 타미아라는 이름 자체는 한국에서 썩 유명한 편은 아니지만 그녀의 노래 Officially Missing You는 한국에서 매우 유명하다. [21] 후에 인터뷰에서 젊었을적엔 케이크나 패스트푸드 등을 그렇게 먹고도 몸이 멀쩡했다라고 말하는걸 봤을때, 꽤나 군것질이나 단 음식들을 좋아하는것같다. 물론 나이가 점차 들면서부터 몸이 예전같지 않았고 다이어트를 위해 저런 고칼로리 음식을 금하는 등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했다고. [22] NBA 뿐만 아니라 비슷한 시기 KBL의 오피셜 스폰서로 참여하면서 국내 여러 구단에게 용품 스폰서도 같이 했다. 당시 국내 신문에 실린 휠라 광고에도 힐이 나왔었다. [23] 보통 농구선수가 발목부상을 당할 때는 고전적인 방법 중 하나로 발목을 완전히 덮는 농구화를 신는 것이 있다. [24] 그만큼 이 선수들이 열정적으로 수비했다는 점 또한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