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12 22:14:56

케니 스미스

케니 스미스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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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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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스 스미스
Kenneth Smith
출생 1965년 3월 8일 ([age(1965-03-08)]세)
뉴욕주 뉴욕시 퀸스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출신학교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신장 191cm (6' 3")
체중 77kg (170 lbs)
포지션 포인트 가드
드래프트 1987 NBA 드래프트 1라운드 6순위
새크라멘토 킹스 지명
소속 팀 새크라멘토 킹스 (1987~1990)
애틀랜타 호크스 (1990)
휴스턴 로키츠 (1990~1996)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1996)
올랜도 매직 (1996~1997)
덴버 너기츠 (1997)
등번호 30번 - 새크라멘토 / 휴스턴 / 디트로이트 / 올랜도 / 덴버
31번 - 애틀랜타

1. 개요2. 선수 시절3. 플레이스타일4. 해설자 시절5. 여담6. 가족 관계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하킴 올라주원과 함께 휴스턴 로켓츠의 2연속 우승을 이루었던 포인트 가드. 별명은 케니 The JET 스미스 별명인 "The Jet"은 대학 시절에 붙은 별명으로, 어마어마한 스피드 덕분에 붙은 별명이다. 실제로 그와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선배인 마이클 조던은 대학 시절에 종종 달리기를 했었는데 매번 조던이 졌다고 한다.[1][2] 또한 점프력 역시 폭발적이어서 대학시절에나 프로 초창기엔 속공을 할때 어마어마한 스피드로 달려 덩크를 찍어버리곤 했다.

NBA 역사에 남을 정도로 뛰어난 평가를 받은 선수는 아니었지만, 하킴과 좋은 호흡을 보이면서 두 개의 반지를 얻으며 좋은 커리어를 보냈다.

2. 선수 시절

명문 노스캐롤라이나에 1983년 입학한 케니 스미스는 1학년으로 9.1점 5어시스트를 기록하며 3학년 마이클 조던이 이끌던 타힐스에서 조력자로 공헌했다. 이때 노스캐롤라이나는 딘 스미스 감독의 지도 하에 탄탄한 기본기와 팀플레이가 일품이었던 팀으로, 특히 스미스나 조던처럼 운동능력이 뛰어난 선수들이 끊임없이 움직이며 백도어 컷이나 속공득점을 해주는, 스타 한 명에 크게 의지하지 않고 고르게 활약을 하는 팀이었다.

전미 랭킹 1위었던 노스캐롤라이나는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혔으나 1984년 NCAA 토너먼트에서 2라운드에 인디애나 대학에 충격의 업셋을 당한다. 이후 올해의 선수상을 휩쓴 조던이 NBA에 진출하고 타힐스는 1985년, 87년에 8강까지 진출한다. 스미스는 4학년이던 시절에 팀의 리더로서 16.9점 6.1어시스트[3]를 기록하며 올아메리칸 퍼스트 팀에 올랐다.

1987년 NBA드래프트에 참가한 스미스는 전체 6순위로 새크라멘토 킹스에 뽑힌다.[4][5] 스미스는 13.8점 7.1어시스트를 기록하는 괜찮은 활약으로 올 루키퍼스트팀에 오른다.

2년차 때 17.3점 7.7어시스트로 한층 성장한 스미스지만, 3년차이던 시즌 중반에 애틀란타로 트레이드 된 후 평균 출전 시간 20분을 겨우 넘기면서 평균 득점도 7.7점으로 대부분의 기록이 반토막 나게 된 끝에 시즌이 끝나고 휴스턴으로 트레이드된다.

휴스턴에서 4년차인 90-91시즌을 맞이한 스미스는 평균 득점 커리어 하이인 17.7점이라는 기록을 내는 등 전성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비교적 기량 하락이 빨랐던 편이라 로켓츠가 우승을 차지했던 두 시즌부터 이미 슬슬 하락세였다. 연속 우승 당시 경기당 평균 득점이 11점대 정도이고 주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94 파이널 당시에는 그의 백업 가드였던 신인 샘 카셀이 더 강한 인상을 남겼다.

당시 로켓츠는 골밑에 하킴 올라주원을 두고 옆에 오티스 소프가 보조하면서 1,2,3번은 외곽에서 3점슛을 노리는 "양궁부대"로 구성했다. 95시즌에는 소프를 클라이드 드렉슬러와 맞바꾸면서 확실한 2옵션을 얻었지만 골밑이 더욱 약해졌고, 이 때문인지 정규시즌엔 서부 6위에 그쳤다.

올랜도 매직을 상대로 한 95파이널 1차전에서 스미스는 어마어마한 활약을 했는데, 수비가 올라주원에 몰린 틈을 타서 무려 7개의 삼점슛을 성공시키며 당시 NBA 파이널 기록이었던 한 경기 6개 삼점슛 성공 기록을 깼다. 특히 7번째 삼점슛이 백미였는데, 3점차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종료 직전에 그를 막고 있던 앤퍼니 하더웨이를 페이크로 제치고 슛을 성공시켜 경기를 동점으로 만든다.[6] 이후 연장전에서 드렉슬러가 위닝샷이 될 수도 있었던 레이업을 놓친 것을 하킴 올라주원이 팁인으로 넣어 결국 로켓츠는 1차전을 적지에서 승리로 이끌고 시리즈 전적 4승 0패로 승리하게 된다. 당시 경기 하이라이트 이는 스미스 커리어 최고의 순간으로 꼽히며, NBA.com에서 꼽은 플레이오프 최고의 순간 중 하나로도 들어가 있다.

3. 플레이스타일

엄청난 운동능력에도 핸들링이 좋은 선수가 아니어서[7] 돌파력은 그리 좋지 못했다. 또한 수비력도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앞선에서 많이 뚫려도 뒤를 받혀주던 하킴 올라주원이 역대 최고 수준의 수비수라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를 두고 게리 페이튼이나 찰스 바클리같은 다른 TNT 패널들은 "하킴에게 묻어간 거다"라고 놀리며 하킴 어깨 위에 어린아이처럼 무동을 타고 있는 케니 스미스의 합성 사진을 만들어 방송에서 보여주기도 했다. 물론 케니는 반지 갯수로 반격. 바클리는 확실히 깨갱

포인트 가드 포지션에서 패서로써 돋보이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전성기 시절에는 경기당 17.7점까지 올렸던 득점력도 나쁘지 않은 편. 기본적으로 케니의 장점은 휴스턴 로케츠에 오면서 올라주원을 센터에 박아두고 1,2,3번이 장거리슛을 퍼붓는 양궁단이 되면서 나온 것으로, 포인트가드로썬 큰 키인 6-3(191cm)의 키에 1번을 볼수 있는 핸들링은 최소한도로 가지고 있었고[8] 중장거리슛의 정확도가 좋은 편이라 주전 슈팅가드였던 버논 맥스웰을 뒷받침하는 제2의 궁병대원으로 활약했다. 참고로 3점슛은 휴스턴에 가서 익혔다고 한다.[9]휴스턴 가니 하킴이 골밑에 있으니까 외곽에 찬스가 자주 생길 것이라고 보고 연습해서 주무기로 승화시켰다고 한다.[10]

전체적으로 3점슛과 덩크를 제외하곤 어느 하나도 특출나지 못했고 역사에 이름을 남길만한 선수는 아니지만, 우승팀의 주전 포인트가드이자 핵심 롤플레이어로서 알토란같은 활약을 해준 선수라고 정리할 수 있다. NBA에서 13시즌 700경기 2만분 가까이 선수로 뛰었으니 올스타급에는 못 미치지만 그 바로 밑 정도에는 위치할 법한, 굳이 성적을 메기자면 B+ 정도는 되는 선수였다.[11]

4. 해설자 시절

은퇴 이후 "Inside the NBA" 등 여러 TV 프로그램에서 유쾌한 입담과 날카로운 비평을 선보이고 있다.
지금까지도 꾸준히 활동하고 있으며 Inside the NBA에서는 거의 모든 출연자가 바뀌는 와중에서도 거의 15년이 넘게 자주 등장하는 패널이자 토크의 핵심이다. 여러 팀을 다닌 경력들과 친근한 이미지로 에피소드도 많고 날카로울때는 날카롭고, 개그칠대는 개그치는 제대로된 감초 역할을 하고 있다. 단 일부에서는 조금 너무 많이 나선다는 비판도 어느정도 있는편. 주특기로는 하킴 성대모사가 있다.

강팀의 주전급이긴 했지만 스타급은 아니었고 평범한 선수였던 현역 시절보다 오히려 은퇴한 이후 방송인으로서 훨씬 유명해진 특이한 케이스다. 필 잭슨이나 닥 리버스처럼 선수 시절보다 감독 시절이 훨씬 빛나는 인물들은 많지만, 스미스처럼 선수시절에 거의 이름이 없다가 순수 방송인으로서 포텐(?)이 터진 케이스는 굉장히 드물다. 방송인으로서 제법 입지가 다져진 찰스 바클리나 샤킬 오닐은 현역 시절부터 이미 레전드였던 선수들이다.

TNT 패널들이 NBA역대 최고 선수들을 뽑아서 자기만의 팀을 꾸리는 특집에서 케니의 아내 그웬들린이 보조진행자로 출연한 적이 있는데 스미스의 동료들이 하나같이 그녀가 너무 아깝다고 스미스를 놀렸다.[12]

2번의 우승을 이룬 휴스턴 로켓츠 선수들이 샥틴 어 풀[13]에 나올 경우에는 어떻게든 쉴드를 쳐보려 노력하지만 늘 실패(…)한다. 하지만 샥틴 어 풀에서도 뛰어난 존재감을 과시하는데 주로 하는 것은 "인트로 송 개조"[14] 및 추임새 및 리액션. 실제로 케니가 없는 것만으로 샥틴 어 풀의 재미는 확 떨어진다.[15]

현재 바로 며칠 전 스티브 밀스를 경질한 뉴욕 닉스의 차기 단장으로 물망에 올랐다는 루머가 있다. 유명 스포츠 칼럼니스트인 스티븐 에이 스미스가 ESPN First Take 에서 언급한 바에 따르면 본인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듯. 하지만 복수의 다른 기사에 따르면 구단주 돌런의 첫 번째 옵션이 유명 에이전트 Leon Rose로 알려져 케니의 뉴욕 단장 취임이 이뤄질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보인다.

NBA 선수들이 밀워키 경찰 총격 사건을 항의하면서 플레이오프를 보이콧하자 케니 스미스는 방송 도중에 선수들을 지지한다면서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방송을 그만두고 나가는 행동을 보였다.(그러나 이틀전 댈러스 선수인 루카 돈치치가 플레이오프중에 백인 흰둥이라고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들은 것에는 "이는 인종차별이 아니다" 라며 옹호를 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5. 여담

  • 비교적 커리어가 짧아서인지 은퇴선수치고 상당히 몸 상태가 양호한 편인데, 방송에서 농구실력과 운동능력을 종종 선보이기도 한다.[16][17]
이 영상에서는 그와 별명이 같은 제이슨 테리[18]와 삼점슛 대결을 해서 이기기도 했는데, 이 때 테리는 현역인 반면 스미스는 은퇴한지 거의 20년이 가까이 되가던 시점이었다는 점. 또한 2013년에는 그보다 13살이나 어리고 은퇴한지 얼마 안된 마이클 레드를 삼점슛 대결에서 이기기도 했다. # 물론 이 두 대결 모두 정장 차림으로 한 대결이라 제대로 된 대결은 아니었다는 걸 감안할 필요는 있다.
또한 이 영상에서는 TNT 패널들이 달리기 시합을 펼치는데 자기보다 훨씬 어린 샤킬 오닐이나 크리스 웨버를 아주 여유있게 제치고 1위를 달리다가[19]...골인 직전에 너무 방심해 제대로 뛰지도 않으며 온갖 깨방정을 떨다가 막판까지 죽어라 달린 웨버에게 역전당한다. 다 이겨놓고 방심해서 졌다는 허탈함 때문인지 스미스는 현실을 부정하며(…) 온갖 진상을 떠는데, 이 때 웨버가 남긴 명언 "결승 테이프를 끊을때까지 열심히 달려라!"는 의외로 상당히 교훈적인 말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패널들의 단골 오락거리인 "케니 놀리기"에 아주 적합하기 때문에(…) 이후 방송에서 심심할 때마다 나온다. 위의 테리와의 대결 영상 중 두 선수 소개 장면에서 나오는 "Run through the tape"이 바로 그 의미이다.
  • 뉴욕 퀸즈 출신이라 뉴욕 닉스에도 애정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닉스가 삽질을 한 2014-15시즌에는 방송에서 닉스 소식이 나올 때마다 너무나 비통해했다.
  • 덩크 콘테스트에도 참가한 적이 있는데, 같이 TNT에서 프로를 진행하는 찰스 바클리는 "이길 확률도 없는데 참가한거다"고 놀렸지만[22][23] 실제로 1990년 덩콘에서 역대 최고의 덩커 중 하나인 도미니크 윌킨스에게 1점차로 뒤지는 준우승을 한 적도 있다. 191 이하의 "단신 덩커" 중에는 역대급 실력자. 필살기급 덩크는 자유투라인 부근에서 골대를 등진 채 서서 다리 사이로 공을 튕겨 백보드에 부딪히게 한 다음, 그 공을 그대로 공중에서 잡아 리버스 덩크로 마무리하는 고난이도 원맨 앨리웁. 이 덩크는 당시 상당한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후배 선수들이 덩콘에서 따라한 적도 있다.[24]
  • "프로 선수"와 "아마추어 선수"간의 간격을 나타낸 유명한 일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스티브 커가 활약했던 당시 뉴욕 길거리 농구의 성지 러커파크에서는 "3점슛빼면 시체인 스티븐 커같은 애들도 NBA에서 뛰는데 ㅋㅋㅋ"라고 프로 선수에 대한 폄하하는 분위기가 강했다고 한다. 이때 케니 스미스가 그해 러커파크에서 주최한 1 on 1에서 우승한 챔피언과 50점 내기로 1 on 1을 했는데 케니 스미스가 대충대충 뛰다가 스코어가 0 대 37까지 벌어지고 관중들이 NBA도 별 것 아니구만 이러면서 비웃자 그때부터 발동이 걸리기 시작, 50 대 37로 게임을 끝내버린 뒤 사람들을 향해 "니네 스티브 커가 우스워 보이지? 걔가 매치업 하는 상대는 게리 페이튼, 존 스탁턴 같은 인간도 아닌 사람들이야. 그 사람들 떨쳐내고 3점 쏜다는게 쉬운건줄 알아?"라며 일갈했다는 일화가 있다.[25][26]
  • Inside the NBA라는 농구팬들에겐 유명한 예능프로에서 영구결번이 되지 못한 그를 위해 특별한 영구결번식을 해주었는데

    급한 사람이라면 45초부터 보자(…).

6. 가족 관계

2006년에 모델 겸 배우 인 Gwendolyn Osborne과 재혼했는데,새 부인이 13살이나 연하인데다가 몸매도 좋고 상당한 미인이다. #

그웬들린 사이에서 두 명, 전처와의 두 명으로 총 네 명의 자녀를 두고 있는데, 이 중 딸 Kalya Brianna는 R&B 가수로 활동 중이다. 스미스 가족이 방송계에서 꽤나 유명세가 있어서 2015년부터 ''스미스 가족을 만나보세요"란 이름의 리얼리티 TV 쇼에 출연중이다.

7. 관련 문서



[1] 여담으로 조던은 체중을 크게 불려 스몰포워드 급의 체격을 갖춘 시절에도 원맨 속공 시 다른 선수들은 서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빠른 선수였다. 대학시절이면 체중을 불리기 전 비상식적인 스피드와 탄력을 소유하고 있던 블랙캣 시절인 셈인데, 스미스는 그 시절 조던과의 달리기에서 매번 이겼을 정도로 발이 빨랐다는 소리이다. [2] https://www.youtube.com/watch?v=A-9B6WzkpsA 이 영상의 1분40초부터 보면 조던의 공을 스미스가 스틸하고 둘이 거의 비슷한 위치에서 전력질주를 시작하는데, 드리블하면서 달리는 스미스를 맨몸으로 달리는 조던이 따라잡지 못하고 거리가 조금씩 벌어진다. 조던이 신장차이에도 불구하고 체이스다운 블럭을 시도조차 못할 정도. 91시즌 당시 조던은 아직 비상식적인 스피드를 유지하던 시절이었는데도 육안으로 봐도 스피드 차이가 확연하다. 조던도 PG수준의 스피드를 갖고 있었지만, 스미스는 PG중에서도 톱급 스피드였기 때문. [3] 얼핏 낮아보이지만 딘 스미스 체제 하엔 꽤 높은 수치다. 스미스는 위에 언급된 대로 한 명에게 공격을 독점하는 걸 용납하지 않는 팀플레이 신봉자라 천하의 조던조차 평균 20점 정도에 그쳤다. 당장 조던이 대학 3학년때 20점 언저리를 기록했는데 훨씬 수준이 높은 NBA에 진출하자마자 평균 28점을 넣은 걸 보면 스미스가 얼마나 선수들의 개인플레이를 제약하는지 알 수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82년 NBA 드래프트 전체 1순위였던 초특급 유망주 제임스 워디가 UNC마지막 해에 기록한 평균득점이 불과 15.6점이었다. 물론 이때는 샘 퍼킨스에다가 이례적으로 1학년으로 주전자리를 차지한 조던까지 있어 스미스 시절보다 공격진이 빵빵하던 시점이었지만... [4] 이 과정에서 웃픈 에피소드가 있는데, 당시 감독이었던 빌 러셀은 버스에 탈 때마다 신인 스미스에게 자기 옆에 앉으라고 했다. 왜 그러냐고 스미스가 불평하자 킹스 선수들을 가리키며 "얘도 루저고! 얘도 루저고! 얘도 루전데 뭘 배우겠냐!"고 일갈하기도... [5] 여담이지만 빌 러셀은 어린 팬들에게는 실없는 농담을 던지며 사람좋은 웃음을 던지는 레전드 출신 할아버지로만 알려져 있겠지만, 러셀은 젊은 시절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에 대해 날리는 직설적이고 날카로운 멘트와 냉소적인 유머로 유명한 인물이었으며, 흑인 인권을 위해 싸운 사회운동가의 면모도 있었다. 60년대에 선수생활 대부분을 보낸 그는 그때까지 남아있던 인종차별에 시달렸는데, 한번은 켄터키에서 친선경기를 위해 방문했을때 한 레스토랑에서 흑인 셀틱스 선수을 받지 않자 친선경기를 거부하기도 했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 중에는 1963년에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가 보도한 "난 대부분의 백인들은 그들이 사람이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아요...난 대부분의 흑인들은 내가 흑인이기 때문에 좋아합니다. (I dislike most white people because they are people ... I like most blacks because I am black)"라는 멘트도 있는데, 훗날 이에 대해 자기비판의 의미로 한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그는 백인 동료 및 감독 레드 아워벡과 무난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백인혐오자로 보일만한 행보를 보인 적은 없다. 일부러 공격적으로 남긴 멘트. 어쨌던 러셀은 자기가 할 말은 따박따박 하는 스타일로, 노년에 이런 성향이 좀 줄었지만 50대이던 감독 시절엔 까칠함이 남아 있었다. 스미스가 또 남긴 일화로 한번은 킹스가 연습하는데 러셀이 앉아서 꾸벅꾸벅 졸다가 퍼뜩 깨서는 선수들에게 "연습 집어쳐! 니들이 이렇게 형편없지 않았으면 내가 이렇게 지루할 일도 없을 거 아냐!"라고 버럭했다고... [6] 해설자 마브 앨버트가 지적한 것처럼 시간이 어느 정도 남아있었기 때문에 안쪽의 올라주원에게 투입했다가 수비가 몰리면 킥아웃해줘도 됐을 것이며, 옆에서 마리오 엘리가 와이드 오픈 상태에서 손을 들고 있었는데도 깡다구 좋게 그대로 올라가 성공시킨 멋진 플레이였다. [7] 정확히 말하면 핸드체킹 시대에 탈압박 능력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스미스는 매우 뛰어난 드리블러였고 드래프트 당시에도 가장 큰 장점이 볼핸들링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당시는 외곽선수들이 핸드체킹을 활용하며 피지컬한 압박수비를 할 수 있는 시기였기에 PG로서 장신이었음에도 파워가 좋은 편이 아니었던 스미스로서는 1대1공격에서 한계가 있었다. 이 점에서 핸드체킹이 금지된 현대농구라면 더 빛을 발할 수 있었을 수도 있다. 특히 스미스는 수비력이 약했는데 이 점 역시 맨투맨보다 팀수비가 중시되는 현대농구에서 더 커버가 많이 될 수도 있었던 부분. 당시에 가능하던, 수비수가 드리블러에게 몸을 딱 붙히고 손으로 진로를 방해(핸드체킹)하는 압박수비에 스미스가 약했는데, 현대농구에는 수비수가 드리블러 앞에서 발로 뛰면서 막아야하기 때문에 드리블 실력, 스피드 둘 다 탑급인 스미스에게 딱 좋은 환경이다. [8] 유념해둘 건 핸들링이 안 좋다, 패스능력이 평범하다는 건 어디까지나 NBA 강팀 주전 포인트가드치고 안 좋다는거지 그 강력한 NBA 수비를 받으며 대부분의 시간동안 공을 간수하며 고작 경기당 실책 2,3개에 그친다는 건 기본적으로 볼핸들링 실력이 엄청나다는 거다. 저 3개도 초창기지 연속 우승할때는 1.6개, 1.5개 밖에 실책을 저지르지 않았다. 물론 출장시간도 28분, 25분밖에 안되긴 했지만... 또한 하킴이 안정적으로 공격을 전개할 수 있게 입맛에 맞는 엔트리 패스를 넣어주곤 했는데, 이 간단해 보이는 엔트리기술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스티브 프랜시스를 제외하곤 커리어 내내 허접한 PG들 뿐이었던 야오밍을 응원해봤으면 알것이다. 참고로 이때 나머지 20분을 책임졌던 휴스턴의 백업 PG는 스콧 브룩스 오클라호마시티 썬더 감독, 후일 밀워키에서 레이 앨런, 글렌 로빈슨과 빅 3로 전성기를 구가했던 루키외계인 샘 카셀이었다. [9] 이게 뭔소린가 싶겠지만 NCAA에서는 1986-87시즌이 되어서야 정식으로 3점슛을 도입했다. 일부 팀들 (80-81시즌부터 도입한 Southern Conference 등)은 그 이전부터 3점슛이 있었지만 스미스는 4학년이 되어서야 3점슛을 경험한 것이다. 참고로 정식 도입 이전에 대학시절을 보낸 조던같은 선수들도 3점슛 라인이 있는 코트에서 뛰는 영상이 있어 헷갈릴 수 있는데 유튜브 영상 이 경우 3점슛을 일찍 도입한 남부 지역의 대학과의 경기라서 3점라인 있는 것 뿐이고, 당시 3점라인은 타 컨퍼런스 팀들간의 경기에선 적용되지 않고 컨퍼런스 내 팀들간의 경기에서만 적용이 되었었다. 이 때문에 조던도 커리어 초창기에는 3점 능력이 없다시피했다. NBA에서조차 79-80시즌에 도입한 룰이니 63년생인 조던이나 65년생인 스미스에겐 생소했던 것이다. 다만 휴스턴 시절 이전에도 거의 쏘지 않아서 그렇지 3점을 넣는 능력이 있긴 했다. 주요 무기 중 하나로 장착한 것이 바로 로키츠 시절인 것이다. [10] 큰 의미는 없지만 NBA 역사상 유일하게 삼점슛 콘테스트와 덩크 콘테스트를 같은 날에 참가한 선수이기도 하다. 비록 우승은 못 했지만 두 대회 모두에서 순위권 내에 들어 상금을 받아갔다. [11] 본인은 최소 한번 올스타전에 나갔어야 주장하고 있는데, 사실 동부에서 뛰며 한번 올스타에 뽑힌 닥 리버스나 대니 에인지와 비슷한 수준의 실력과 성과를 낸 선수라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나 그가 전성기를 보낸 시기엔 서부의 가드진이 좀 더 두터웠다. 올스타 출장이 보장되는 수준의 선수는 아니었지만 운이 따랐다면 충분히 노려볼 수 있었던 선수. [12] 스미스의 팀 이름이 "Aim High(목표를 높게 잡는다)"였는데, 그웬들린을 보며 "그래, 목표 겁나 높이 잡은 거 맞네 ㅋㅋㅋ 근데 그녀(그웬들린)은 너무 낮게 잡았어!"라고 놀렸다. [13] 한 주 동안 나왔던 정신나간 턴오버 플레이를 보면서 씹고 뜯고 즐기는 Inside the NBA의 코너. 이 코너에 걸리는 선수는 샤크에게 영혼까지 탈탈탈탈탈 털린다. 참고로 이 코너의 주 피해자는 저베일 맥기... 골든스테이트에서는 덜하지만 그 전에는 거의 매주 출연했다... [14] 매주 인트로에 들어가는 멘트가 바뀌는데 이걸 케니가 한다. [15] 사실 Inside the NBA 패널 중 가장 예능감과 방송감각이 뛰어난 멤버라 나설 때 안 나설 때 균형이나 개드립 수위주절을 잘하는 편이다. 이 때문에 그가 없이 방송이 나가면 전문방송인 어니 존슨이 진행을 함에도 종종 난장판이 되는 경우가 있다. 주 범인은 샤킬 오닐로, 해당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개그욕심에 비해 예능감은 떨어지고 다소 막무가내인 면이 있어(한국 희극인 중에 박명수에 비견될만하다. 잘 활용하면 정말 웃기지만 단독 진행에 한계가 있는) 바클리와 스미스가 받아주지 않았으면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 뻔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16] youtube 2013년 당시 만 48세(한국 나이 49세)이던 스미스가 양복 차림으로 양손으로 공 두개를 동시에 드리블하면서 현란한 묘기까지 보인 영상이다. 참고로 이 영상을 튼 계기는 한 네티즌이 그가 늙었다며 볼핸들링 연습이나 하라고 비웃자 "스튜디오로 오면 내가 댁을 앵클브레이킹할 수 있다(현란한 드리블로 수비수를 자빠뜨리는 것)"고 응수하면서 나온 것이다. [17] 케니는 뉴욕출신인데, 뉴욕은 지금도 길거리 농구의 메카지만 그가 자라던 70년대는 그야말로 길거리 농구의 황금기로 ABA/NBA슈퍼스타들인 줄리어스 어빙같은 선수들도 스트릿볼의 성지 러커파크에서 기량을 겨루곤 했다. 실제로 70년대 NBA 전설 중 하나인 Earl "the pearl" Monroe 역시 뉴욕의 길거리 농구 출신이었다. 길거리 시절 별명은 무려 Black Jesus. 이 시기 뉴욕 길거리에서 기량을 익힌 케니 스미스의 드리블 실력은 상당하며 (물론 화려한 드리블과 NBA의 안정적인 볼핸들링은 다르지만) 뉴욕 출신이라는 자부심도 엄청나다. [18] 본명이 Jason Eugene Terry라 이름의 약자를 따서 JET라고 불린다. [19] 물론 덩치가 훨씬 작은 스미스가 스피드 면에서 훨씬 유리하긴 했다. [20] 바클리가 이끈 피닉스 선즈는 93년 파이널에서 마이클 조던에게 패배했다. [21] 참고로 그 2개중 1개는 95 파이널때 샤킬 오닐의 올랜도 매직을 상대로 뺏은거다. 상술했듯 1차전 종료 1초 남기고 결정적인 동점 쓰리 포함 7개의 3점 폭격으로 원정승리를 이끈 그 경기의 활약까지 포함한 것. [22] 사실 TNT 팀에서는 케니 놀리기가 주요 오락거리로 자리잡은 터라 실제로 잘한 것도 무조건 까고 본다. 같이 나오는 바클리와 오닐의 커리어와 말빨이 워낙 후덜덜하다보니 털리는게 어쩔수 없긴 하지만, 덩크 콘테스트에 나온 덩크 중 상당히 멋졌으나 우승을 못해 묻힌 덩크를 재조명하는 "Lost dunks" 특집에서 밑에 나온 고난도 덩크가 나왔는데 커는 별것도 아닌데 떠벌린다고 깠으며 샤킬 오닐은 "그건 역대 최악의 덩크였다"고 깠다. 다만 패널들 중 진중한 편인 스티브 스미스는 "솔직히 상당히 멋졌다"고 인정했으며 패널이 아닌 t셰릴 밀러 (전설적인 여자농구 선수로 레지 밀러의 누나)도 대단한 덩크였다고 칭찬했다. [23] 여담이지만 이 "케니 놀리기"가 어느 정도냐면 위에 언급된 95파이널 1차전에서 앤퍼니 하더웨이를 제치고 종료 직전에 성공시킨 삼점슛은 파이널 역사에서 남을 만한 멋진 플레이였다. 플레이 자체의 난이도와 멋도 있지만, 당시 전력이 매직보다 딸린다고 평가받던 휴스턴이 적지에서 열린 1차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주도권을 잡아 오히려 4연승으로 우승을 거머쥐었는데, 이걸 이뤄낸 결정적인 플레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에 언급된 TNT 방송 동료들이 참가하는 Open Court 토크쇼에서 역대 최고의 파이널 클러치 샷을 논하는 특집에서 이 샷의 하일라이트 플레이가 나온 직후에 진행자인 진행자 맷 와이너는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이미 케니 스미스 샷에 대해 논하지 않겠다고 동의했습니다.(…) 물론 대단한 플레이가 아니란 건 아니지만, 케니의 자존심을 더 이상 키워줄 필요가 없거든요"라고 했다. 사실 스미스는 떠벌이기질이 커서 잘난척을 정말 많이 하긴 한다. 앞서 언급된 마이클 레드/제이슨 테리와의 경기에서도 "어떻게 해줄까? 눈 가리고 쏴줘?"를 포함해 룰도 듣지 않고 지치지도 않고 떠벌였다. [24] 한 번은 슬램덩크 콘테스트를 앞두고 역대 최악의 슬램덩크 콘테스트 참가자들을 까는 세그먼트가 있었는데, 이 중 당시 필라델피아 소속이었던 래리 휴즈가 자신이 했던 덩크를 하려고 하는 것 같아서 흥분했다가 3번 연속 삑살내자 시원하게 까는 스미스의 속사포를 들을 수 있다. 이걸 보고 드러누워 폭소하는 팀메이트 앨런 아이버슨은 덤. 직접 보자. [25] 다른 버전으로는 게리 페이튼이 '니네 스티브 커가 우습냐? 걔가 여기 뜨면 너네 누가 와서 붙어도 다 발려.'했다던 버전도 있고, 심지어 스티브 커 본인이 1 on 1으로 상대를 개발라 버렸다는 버전도 있다. 다만 스티브 커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이는 사실일 가능성이 별로 없다. 아무리 프로와 아마추어의 벽이 어마어마해도 그냥 얼치기도 아닌 1대1챔피언을 상대로 50점을 연속으로 넣는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게다가 스미스나 커라면 신체적 어드밴티지도 크게 없으며, 그나마 현역 시절 스미스는 운동능력이라도 넘사벽이지 커라면 오히려 운동능력은 떨어진다. 물론 커건 스미스건 현역시절에 아마추어와 붙었다면 쉽게 발라버릴 수는 있었을 것이다. 50점 연속내기는 무리겠만 말이다. [26] 사실 해당 일화는 실화에 스미스 특유의 과장이 더해져 나온 일화일 가능성이 높다. 케니 스미스는 은퇴 이후에도 프로나 아마추어들과 종종 농구를 해왔고, 실력 자체가 상당한데다 승부욕이 강하기 때문에 저런 식으로 지고 있다가 역전해버린 일화가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NBA선수들은 트래쉬토킹의 영향인지 상당히 과장법이 심한데( 크리스 웨버가 대학선발팀이 드림팀에게 발린 일화를 얘기하며 '한점도 못 넣었다'고 한다던지) 스미스는 그중에서도 떠벌이 기질이 워낙 심한 편이다. 위에서 프로듀서에게 덩크를 먹은 일화에 대해서도 스미스가 "그 전까지 내가 15대0으로 이기고 있었어!"라고 주장했고, 동료들은 저렇게 덩크할 수 있는 사람 상대로 15대0이 말이 되냐고 야유를 보냈다. 즉, 진짜로 아마추어 챔피언을 상대로 대충 뛰며 지고 있다가 발동 걸려서 압도하면서 이긴 걸 갖고 저렇게 과장했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