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536349> 뫼즈-아르곤 공세 Meuse-Argonne Offensive Offensive Meuse-Argonne Maas-Argonnen-Offensive |
|||
제1차 세계 대전 서부전선의 일부 | |||
뫼즈-아르곤 공세를 묘사한 당시 엽서 |
|||
날짜 | |||
1918년 9월 26일 ~ 1918년 11월 11일 | |||
장소 | |||
프랑스 베르됭 북서부 뫼즈강-아르곤숲 일대 | |||
협상국 | 동맹국 | ||
교전국 |
[[프랑스 제3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태국| ]][[틀:국기| ]][[틀:국기| ]] |
[[독일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
지휘관 |
프랑스군 [[틀:깃발| ]][[틀:깃발| ]][[앙리 구로|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앙리 베르틀로 미군 [[틀:깃발| ]][[틀:깃발| ]][[존 조지프 퍼싱| ]] [[틀:깃발| ]][[틀:깃발| ]][[헌터 리게트| ]] [[틀:깃발| ]][[틀:깃발| ]][[로버트 리 불러드| ]] |
독일군 [[틀:깃발| ]][[틀:깃발| ]][[파울 폰 힌덴부르크| ]] [[틀:깃발| ]][[틀:깃발| ]][[에리히 루덴도르프| ]] [[틀:깃발| ]][[틀:깃발| ]][[빌헬름 폰 프로이센|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막스 폰 갈비츠 [[틀:깃발| ]][[틀:깃발| ]][[알브레히트 폰 뷔르템베르크| ]] |
|
병력 |
프랑스군: 500,000명 미군: 1,200,000명 (전차 380대, 항공기 840대, 야포 2,780문) 시암군: 850명 (총 2,000,000명 가량) |
450,000명 | |
피해 규모 |
프랑스군: 70,000명 (사망 35,000) 미군: 122,063명 (사망 26,277) 시암군: 19명 사망 |
126,000명 (사망 28,000, 부상 42,000, 포로 56,000) |
|
결과 | |||
협상국 승리, 제1차 세계대전 종전 | |||
기타 | |||
미 원정군(AEF)의 최대 작전이자 최다 사상자 발생 연합군의 백일 공세의 일환으로 독일의 항복을 이끌어냄 |
[clearfix]
1. 개요
뮈즈-아르곤 공세(Meuse-Argonne Offensive)는 1918년 9월 26일부터 11월 11일까지 제1차 세계 대전 서부전선에서 연합군이 감행한 마지막 대규모 공세작전이다. 베르됭 북부와 북서부의 뫼즈강과 아르곤숲 지역에서 프랑스군과 미군이 독일 제국군의 주요 보급선을 차단하기 위해 진행한 이 작전은 연합군의 백일 공세 중 가장 큰 규모였으며, 특히 미 원정군(AEF)에게는 최대 규모의 작전이자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전투였다.2. 배경
1918년 연합군은 독일군을 항복시키기 위해 연합군 총사령관 페르디낭 포슈의 지휘 하에 서부전선 전역에서 대규모 공세를 계획했다. 뫼즈-아르곤 지역은 독일군의 중요한 보급로인 스당-메지에르(Mézières) 철도가 지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 지역을 장악하면 독일군의 주요 보급선을 차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독일군이 베르됭 북서부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 수 있었다.3. 전투과정
3.1. 1단계 (9월 26일 ~ 10월 3일)
9월 26일 새벽 2시 30분, 연합군은 2,775문의 포격으로 공세를 시작했다. 연합군은 첫 날에만 남북전선 전쟁 4년간 사용된 것보다 많은 포탄을 소비했다. 오전 5시 30분, 미군이 본격적인 지상공격을 개시했다. 제5군단과 제3군단은 대부분의 목표를 달성했으나, 79사단은 몽파콘(Montfaucon) 점령에 실패했고 28사단의 공격은 독일군의 저항에 막혔다. 91사단은 에피농빌(Épinonville) 마을을 점령했다가 철수해야 했으며, 경험이 부족했던 37사단은 몽파콘 다르곤(Montfaucon-d'Argonne) 점령에 실패했다.9월 27일, 대부분의 제1군 진격이 중단되었으나 79사단이 마침내 몽파콘을 점령했고 35사단이 볼니, 218고지, 샤르팡트리(Charpentry)를 점령하며 인접 부대보다 앞서나갔다. 9월 29일, 독일군은 6개 사단을 추가 투입해 35사단을 공격했으나, 해리 S. 트루먼이 지휘하는 포병대의 지원으로 격퇴되었다.
3.2. 2단계 (10월 4일 ~ 28일)
새로운 공격을 위해 최초 공격사단들[1]이 제32사단, 제3사단, 제1사단으로 교체되었다. 제1사단은 독일 제37사단, 제52사단, 제5친위사단 방어선에 2.5km 깊이의 돌파구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이 시기에 유명한 '로스트 대대' 사건[* [2]이 발생했다. 28사단과 82사단의 10월 7일 공격으로 구출될 때까지, 이 대대는 적진 깊숙이 고립된 채로 버텨야 했다. 미군은 10월 14일~17일 사이에 일련의 비용이 많이 드는 정면 공격을 감행해 마침내 독일군 주방어선인 크림힐트선/힌덴부르크선을 돌파했다.10월 12일, 퍼싱은 AEF와 제1군 재편성을 단행했다. 제1군은 리겟이, 새로 편성된 제2군은 불라드가 지휘하게 되었다. 이 시기 동안 미군은 9,000명이 전사하고 100,000명이 부상당하는 큰 손실을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