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536349>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 Gorlice–Tarnów offensive Горлицкий прорыв Schlacht bei Gorlice-Tarnów Durchbruchsschlacht bei Gorlice-Tarnów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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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 동부전선 전투 중 하나 | |||
포로로 잡힌 러시아 제국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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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
1915년 5월 1일 ~ 1915년 6월 22일 | |||
장소 | |||
갈리치아, 러시아령 폴란드 일대 | |||
결과 | |||
러시아 제국군 참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전쟁 전 영토 수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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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국 | 협상국 | ||
교전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틀:국기| ]][[틀:국기| ]] [[독일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러시아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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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 |
]][[틀:깃발|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 ]][[틀:깃발| | ]][[틀:깃발|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 ]]|
병력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90,000명 독일 제국: 126,000명 |
러시아 제국: 219,000명 | |
피해 규모 | 사상 87,000여명 |
사상 100,000명 포로 최대 250,000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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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 |||
동맹국의 승리 | |||
영향 | |||
러시아군, 폴란드에서 전략적 후퇴 발칸 전선에 대한 동맹국의 압박 강화 러시아에 의한 동부전선 위협 제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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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경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동맹국은 프랑스와 러시아 제국의 사이에 끼여 양면 전선을 강요받았다. 당초 슐리펜 계획에 따른 독일 제국군의 전쟁계획은 러시아의 빠른 총동원령과 마른 전투를 비롯한 서부전선에서의 실패로 수포가 되어버렸다. 러시아 제국은 독일의 예상을 깨고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쳤다. 동부전선을 담당해야 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갈리치아 전투에서 참패하고 카르파티아산맥에서 러시아군의 공세를 겨우 막고 있었다. 독일 제국군은 타넨베르크 전투와 마주리아호 전투(Battle of Masurian Lake)에서 승리하여 동프로이센을 지켰으나, 러시아의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독일군은 우치 전투를 통해 러시아령 폴란드에 대한 공세를 시도했으나 러시아군의 저항에 막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한편, 리마노바-와파누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간신히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이어진 카르파티아 전투에서는 러시아군의 반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프셰미실이 포위당하고, 이 곳을 점령당한다면 러시아군이 헝가리 대평원과 부다페스트를 위협할 수 있었다. 그런 상황이 되자,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참모총장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는 이탈리아의 참전 가능성까지 우려하며 러시아군의 돌파를 막기 위해 먼저 고를리체-타르누프 (독일어: Gorlice-Tarnów, 러시아어: Горлице-Тарнув) 지역에서의 중앙 돌파 작전을 구상하고 독일군의 협력을 요청했다.
독일군 참모총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은 서부전선에 집중하길 원했으므로 이런 오스트리아의 요청에 난색을 표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의 궤멸 위기와 단독 강화 가능성에 결국 1915년 4월 갈리치아 공세를 승인하였다. 이에 맞춰 새로 창설된 독일 제11군을 갈리치아로 보내 오스트리아군과 합동작전을 펼치기로 하고, 총지휘관에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장군을 임명하였다. 공격 목표는 콘라트가 제안한 대로 러시아군 방어선의 중앙인 고를리체, 타르누프 지역으로 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