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메소포타미아 전역의 전투 중 하나로 갈리폴리 전투와 함께 유럽의 환자 오스만 제국군이 날린 영국군 역사상 최악의 참패로 불리는 전투다.2. 진행
2.1. 발단
갈리폴리 전투가 지지부진하자 영국은 메소포타미아 전선에 있는 영국군에게 빠른 진격을 요구했고, 현지상황에 맞춰 진군하던 영국군은 길어지는 보급선을 무시하고 진격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진격하던 영국군의 찰스 타운센트 장군은 크데시폰의 오스만 방어선을 공격했지만, 오스만군의 강한 저항에 물러나 쿠트로 물러났다. 이후 타운센드 장군은 바스라에서 강을 따라 계속 진군하는 대신 쿠트에 머물러 위치를 고수하기로 했다. 긴 강 고리 안에 위치한 쿠트는 바스라에서 오는 보급선이 늘어져 있었지만 방어하기 유리한 지형이었다. 당시 오스만군과 영국군 모두 1만명으로 엇비슷했기에 공격하기보단 방어하면서 기회를 보기로 결정했고 병사가 2만명까지 충당될땐 그 판단은 옳다고 생각됐다. 그러나...
2.2. 오스만군의 포위
영국군을 추격한 오스만 제국의 할릴 쿠트 파샤와 콜마르 폰 데르 골츠 장군은 직접공격하지 않고 12월 7일 쿠트와 바스라 사이의 길을 막고 역으로 포위했다. 당시 쿠트남부는 모래폭풍이 심해서 정찰이 어렵고, 증원도 띄엄띄엄 왔으니 비워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 틈을 파고들었다. 바스라에 있는 영국군의 구원시도를 막기위해 요새를 건설하고 주요 탈출로를 봉쇄해 쿠트의 영국군을 말려죽이려 했다.2.3. 악몽이 시작되다.
영국군 지휘관 타운센트는 보급이 한 달치 밖에 없다는 소식[1]을 전달받은 뒤 후퇴를 시도했지만 오스만군에게 막혀버렸고 정보 탐색 또한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인도를 비롯한 다민족으로 이뤄진 부대는 이슬람,힌두교도가 많아 소,돼지고기를 먹을 수 없었고 보급도 막힌 상황이라 굶주림도 커졌다. 결국 타운센트는 바스라에 있는 원정군 사령부에 구원요청을 했다.2.4. 영국군의 구원 시도
바스라에 있는 원정사령부는 서부전선에서 활약한 베테랑을 뽑아 쿠트로 구원을 시도했다. 그러나 오스만군은 이를 예상하고 충분한 병력을 둔 뒤 요새화까지 한 상황이었고, 영국군은 요새들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고 2016년 3월 8일 두자일라 전투에서 많은 병력을 상실해 후퇴해야했다.[2]2.5. 쿠트 포위의 종결
구원 시도마저 좌절되고 식량이 떨어진 타운센트 부대는 2016년 4월 29일 오스만군에 항복을 했다. 이 포위과정에서 영국군은 4만의 손실을 입고 1만 3천여명이 포로로 잡혔고, 오스만군은 1만명이 소진됐다. 다만 오스만 군은 포위 과정에서 콜마르 폰 데르 골츠 장군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3. 여파
영국 군사 역사상 가장 비참한 항복
얀 모리스-영국의 역사가-
얀 모리스-영국의 역사가-
제 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군이 겪은 최악의 패배
크리스토퍼 캐서우드
항복한 영국군은 알레포에 있는 포로수용소로 보내졌고, 그 중 인도군 일부는 오스만 인도의용군에 합류해 오스만군과 같이 싸우게된다. 항복한 타운센트 장군은 콘스탄티니예로 보내져, 수도 근처 섬에서 유폐된다.크리스토퍼 캐서우드
이 전투 이후 메소포타미아 전선은 잠시 소강상태를 유지했지만, 오스만 제국은 주요 전선인 캅카스와 시나이 반도,아랍에서 밀려나고 있었고 영국군은 이 전투 패배를 교훈삼으며 준비해 10개월 뒤 바그다드를 점령하면서 쿠트에서의 패배를 부분적으로 설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투는 유럽의 환자라고 불리던 오스만 제국이 1차 대전에서 대국을 상대로 보여준 2번째 대승[3]이며 제국이란 이름이 결코 노름으로 딴게 아님을 보여줬다.
[1]
후술하겠지만 넉달치가 남아있었다.
[2]
이 전투에서 포병의 사격시간과 보병의 돌격시점이 일치되지않아 야포 사격이 늦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보병을 손실했다.
[3]
1번째는 당연히
갈리폴리 전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