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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이메레티 왕국 2대 군주 ბაგრატ | 바그라트 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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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바그라트 3세 |
조지아어 | ბაგრატ | |
라틴어 | Bagrat III | |
가족 |
알렉산드레 2세(아버지) 타마르(어머니) 다비트(동생) 바크탕(동생) 기오르기(동생) 디미트리오스(동생) 티나틴(누이) 엘레니(아내) 기오르기 2세(장남) 콘스탄틴(차남) 테이무라즈(삼남) 바크탕(사남) 타마르(장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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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 년도 | 1495년 9월 23일 ~ 1565년 9월 | |
재위 기간 | 1510년 ~ 156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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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차 이메레티 왕국 2대 군주.2. 생애
2차 이메레티 왕국 초대 군주 알렉산드레 2세와 조지아 귀족 여인 타마르의 장남이다. 남동생으로 다비트, 바크탕, 기오르기, 디미트리오스가 있었고, 누이로 티나틴이 있었다. 1510년 4월 1일 아버지가 지난해 이메레티를 침략하여 큰 타격을 입힌 오스만 제국에 복수하기 위해 아나톨리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 사망하면서 14살의 나이로 새 군주에 등극했다. 1512년 동생 바크탕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목히시 전투에서 격파했고, 바크탕은 카르틀리 왕국으로 피신했다. 이후 카르틀리 왕 다비트 10세의 중재로 바크탕과 화해했다.1512년, 오스만 제국은 삼츠헤 공국과 동맹을 맺고 이메레티 왕국을 공격하라고 부추겼다. 삼츠헤 공작 므제차부크 자켈리는 그해 여름에 오스만군의 지원에 힘입어 이메레티로 진격해 이메레티 수도 쿠타이시를 손쉽게 함락했고, 그는 메스케타아 산으로 피신했다. 오스만군은 쿠타이시를 약탈하고 이웃 마을들을 파괴했으며, 조지아의 이전 군주들이 안장되었던 젤라티 수도원을 파괴했다. 그는 전국 각지에서 군대를 소집해 반격을 꾀했고, 그해 겨울 제카리 고개에서 자신을 추격해온 오스만군을 격파했다. 이후 오스만군은 보급이 끊길 위험에 처하자 남쪽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외세의 침략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킵카스 부족인 지기아인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고 압하지야와 밍그렐리아 항구에 대한 해상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지기아 해적들은 많은 조지아인을 붙잡아서 투르크 시장에 노예로 팔았다. 이후 그는 전쟁을 중단하고 피해를 복구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게라티 수도원을 재건하고 파넬리제에게 수도원을 맡겼으며 게라티 주변 영지를 넘겼다. 파넬리제는 그 대가로 왕에게 자신의 영지를 사냥용으로 개방했다.
1512년 밍그렐리아 리파리트 2세가 사망하자 아들 마미아 3세 다디아니가 새 공작으로 즉위하는 걸 수용하고 아버지 대에 협의한 대로 그가 내무장관에 취임하는 것 역시 받아들였다. 구리아 공작 마미아 1세 역시 이 시기에 공작이 되었고 왕실군 사령관에 취임했다. 이후 압하지야 종교 지도자 회의를 소집해 노예 무역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을 사형에 처하도록 명령했으며, 절도와 살인에 대한 가혹한 처벌을 성문화했다. 그리고 이슬람교가 왕국 내부에서 신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 조지아 정교회 부흥에 힘을 기울였다.
1520년, 구리아 공작 마미라 1세와 삼츠헤의 쿠바르쿠바레 5세와 동맹을 맺고 카르틀리 왕국을 침공했다. 이에 카르틀리 측이 평화 협상을 요구하자, 그는 국경을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재조정하고 공동 방휘 협정을 맺기로 했다. 1525년 카헤티 왕국의 레온과 카르틀리의 기오르기 9세와 함께 예루살렘을 순례하고 3국의 영원한 우호를 서약했다. 그러나 1526년 3월 그가 딸 타마르를 카르틀리 왕자 루아르사브 1세와 결혼시키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그는 루아르사브 1세를 카르틀리 왕위에 올리기로 마음먹고, 1527년 카르틀리를 기습 침공해 기오르기 9세를 폐위시키고 루아르사브 1세를 왕위에 올렸다. 그 대가로 소라미와 보르조미 시를 포함해 프로네 강 서쪽의 모든 땅을 합병했다. 이에 카르틀리 왕국 주민의 이메레티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었다. 그는 1530년대에 오스만 제국의 압력을 받자 카르틀리 왕국의 지원을 받는 대가로 정복한 영토를 루아르사브 1세에게 반환했다.
1533년 1월, 그는 밍그렐리아의 마미아 3세와 구리아의 마미아 1세의 도움을 받으며 지기아 원정에 착수했다. 그해 1월 30일 가그라 앞바다에서 벌어진 첫번째 해전에서 연합군은 해적들을 격파했다. 그러나 다음날 샨디아 이날 이파 등 압하지야 귀족들이 배신한 여파로 해적들에게 크게 패했다. 밍그렐리아 공작 마미아 3세는 전사했고, 구리아 공작 마미아 1세는 지기아 해적에게 생포되었다. 이에 총대주교 말라키아 1세를 보내 마미아 3세의 유해와 마미아 1세의 반환을 협상해 막대한 돈을 지불하고 성사시켰다. 1534년, 오스만 제국은 사파비 제국과 전쟁을 벌였다. 이때 오스만 일부 부대가 삼츠헤로 이동해 그곳의 내란을 종식시키고 쿠바르쿠바레 5세와 동맹을 맺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그는 1535년 군대를 모으고 밍그렐리아, 구리아와 손을 잡고 삼츠헤를 침공했다.
1535년 8월 12일, 그의 군대는 무르자케티 전투에서 쿠바르쿠바레 5세와 맞붙었다. 쿠바르쿠바레 5세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삼츠헤는 이메레티에 병합되었다. 쿠바르쿠바레 5세의 어린 아들 카이호스로는 이스탄불로 피신했다. 그는 새로 얻은 영토 중 자바케티를 카르틀리의 루아르사브 1세에게 제안해 두 나라 사이의 관계를 개선하려 했다. 한편 구리아의 마미아 3세는 그로부터 아자라와 차네티를 받았지만, 밍그렐리아는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1536년 7월 4일, 에르주룸의 군주 메흐메드 칸은 오스만 제국의 지령에 따라 삼츠헤를 침공하여 아르트빈과 나르만을 포함한 타오-클라제티의 여러 조지아 도시를 공략했다. 오스만 제국은 이 지역에 이슬람교를 강요하고 이메레티를 병합할 준비에 착수했다.
그 후 오스만 제국은 몇년 간 이메레티 왕국에 습격대를 잇따라 보내 교회와 마을을 약탈했다. 그는 이에 대응하고자 사파비 제국 샤한샤 타흐마스프 1세를 찾아가 병력을 지원해주는 대가로 봉신이 되겠다고 제안했지만, 샤한샤는 찰디란 전투 이래로 오스만 제국의 연이은 침공으로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 병력을 그쪽으로 보낼 여유가 없었기에 거절했다. 1543년, 오스만 제국의 장군 무사 파샤는 60명의 귀족과 22,000명의 군인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삼츠헤로 이동하여 아직까지 이메레티 왕국을 따르던 도시들을 제압한 뒤 이메레티의 수도 쿠타이시를 위협했다. 그는 제물과 열쇠를 무사 파샤에게 보냈고, 무사 파샤는 수비대와 대포를 삼츠헤의 도시인 올투에 남겨둔 뒤 철수했다. 그러자 그는 즉시 협정을 깨고 공세를 개시해 올투를 되찾고 오스만 제국의 대포를 손에 넣었다. 이후 구리아 병력과 합세한 그는 오스만군을 추격해 카라하크 전투에서 적군을 크게 물리치고 무사 파샤를 죽였다.
1545년 여름, 오스만 제국은 에르주룸과 디아르바키르의 총독이 이끄는 대군을 동원해 이메레티를 대대적으로 침공했다. 그는 동맹국들에게 구원을 호소했지만, 밍그렐리아 공국의 레온 1세는 일전에 삼츠헤를 정복할 때 성심껏 도와줬는데도 아무것도 받지 못한 것에 원한을 품고 있었기에 거부했다. 그래도 카르틀리 왕국의 루아르사브 1세, 구리아의 마미아 3세는 즉각 도우러 와줬고, 연합군은 소호이스타 마을 인근에서 적군과 대치했다. 그러나 삼츠헤 출신의 조지아 병사들이 전투 도중에 배신하는 바람에 참패했고, 삼츠헤의 통제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오스만 제국은 카이호스로프를 삼츠헤의 통치자로 세웠다. 그는 삼츠헤를 되찾기 위해 1546년과 1553년에 잇따라 공격했으나 모조리 패배했다. 이에 서방인들에게 사절을 보내 원조를 청했으나 아무런 호응도 얻지 못했다. 이후 삼츠헤는 차츰 이슬람화되다가 18세기에 오스만 제국에 완전히 합병되었다.
그는 오스만 제국에게 승리를 거두려면 서부 조지아의 완전한 통일을 달성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강력한 귀족들을 처단하기로 했다. 1546년, 그는 밍그렐리아의 공작 레온 1세 다디아니를 호니로 초대해 사냥을 함께 하다가 돌연 체포했다. 레온 1세는 젤라티 수도원의 종탑에 연금되었다. 그는 즉시 밍그렐리아를 합병하기로 하고 구리아 공작 로스톰에게 밍그렐리아를 함께 치고 싶으니 자신과 합류하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로스톰은 그의 의도를 의심하고 초대를 거절하고 밍그렐리아 공작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와 동시에, 삼츠헤의 군주 카이호스로프는 왕실 고문 중 한 명인 호필란드레 츠크헤이드제에게 뇌물을 주어 레온 1세 다디아니를 석방시켜서 삼츠헤로 이송시켰다. 그 후 레온 1세는 로스톰의 도움으로 밍그렐리아의 수도인 주그디디에 도착하여 밍그렐리아의 권력을 되찾았다.
자신을 감금한 것에 원한을 품은 레온 1세는 이메레티 왕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오스만 제국의 봉신을 자처했다. 1549년, 오스만 제국은 구리아 공국의 지배하에 있는 차네티와 아자라를 침공했다. 로스톰은 그와 레온 1세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고, 그는 동생 바크탕의 지휘하에 500명의 분견대를 보냈다. 이때 그는 동생에게 밍그렐리아와 구리아 사이의 군사 동맹을 막으라는 비밀 지시를 내렸다. 바크탕은 이에 따라 밍그렐리아인들에게 후퇴하도록 설득했고, 구리아는 이로 인해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하고 바투미와 고니오를 빼앗겼다. 그 후 오스만군은 다라몽 남작 가브리엘 드 루에츠[1]의 지휘하에 이메레티 왕국으로 쳐들어가 바니 일대의 25개 요새를 파괴하고 쿠타이시를 위협했다. 결국 그는 어쩔 수 없이 오스만 제국의 봉신이 되기로 선언했고, 오스만 제국은 막대한 공물을 받고 물러났다.
1555년 5월 29일,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왕조는 아마샤 조약을 체결했다. 양국은 이 조약에서 트란스캅카스 일대를 분할하기로 했다. 이메레티 왕국은 이 협약에 따라 오스만 제국의 영향권에 놓였고, 막대한 공물을 부과받았다. 그는 아마샤 조약을 훼방놓기 위해 카르틀리와 사파비 왕조의 영향권에 있는 수아미를 공격해봤지만 격퇴당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의 봉신으로서 조용히 지내다 1565년에 사망하고 겔라티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조지아 귀족 여인 엘레니와 결혼하여 네 아들 기오르기 2세, 알렉산드레, 콘스탄틴, 테이무라즈, 딸 타마르를 낳았다. 이중 장남 기오르기 2세가 아버지 사후 왕위에 올랐고, 딸 타마르는 카르틀리 왕국의 루아르사브 1세와 결혼했다. 삼남 콘스탄틴은 1585년 기오르기 2세 사망 후 조카 레반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한때 스칸다, 카츠키, 아르게티를 포함한 리오니 강 동쪽 영토를 장악했지만 1587년 진압당하고 조카와 평화 협약을 체결한 뒤 아르게티의 영주로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