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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이메레티 왕국 9대 군주 ბაგრატ | 바그라트 5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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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바그라트 5세 |
조지아어 | ბაგრატ | |
라틴어 | Bagrat V | |
가족 |
알렉산드레 3세(아버지) 타마르(어머니) 클리멘티(동생) 티나틴(누이) 케테반(첫번째 아내) 타티아(두번째 아내) 타마르(세번째 아내) 알렉산드레 4세(장남) 기오르기(차남) 다레얀(장녀) 마리암(차녀) 티나틴(삼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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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 년도 | 1647년 ~ 1681년 | |
재위 기간 |
1660년 ~ 1661년(1차 재위) 1663년 ~ 1668년(2차 재위) 1669년 ~ 1678년(3차 재위) 1679 ~ 1681년(4차 재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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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차 이메레티 왕국 9대 군주.2. 생애
2차 이메레티 왕국 8대 군주 알렉산드레 3세와 타마르의 장남이다. 남동생으로 클리멘티, 누이로 티나틴이 있었다. 1660년 3월 1일 또는 4일에 아버지가 사망한 뒤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아버지의 후처이자 자신의 계모인 네스탄 다레잔의 조카딸인 케테반과 결혼했다. 그러나 1661년, 네스탄 다레잔은 남편을 꼬드겨서 자신의 권위를 약화시키려는 케테반에게 반감을 품고 "당장 그녀와 이혼하고 다른 신부를 맞이하라"라고 권고했다. 그가 거절하자, 네스탄은 그를 폐위시키고 실명형에 처했다.네스탄 다레잔은 연인인 바크탕 츠추나슈빌리를 새 왕으로 추대한 뒤 그와 결혼하고 여왕을 자처했다. 귀족들은 세력이 한미한 귀족은 바크탕의 즉위에 반발하여 밍그렐리아 공국의 공작 바메크 3세 다디아니와 오스만 제국의 아슬란 파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슬란 파사는 쿠타이시를 점령하여 두 사람을 몰아냈다. 바메크 3세는 왕을 칭하려 했지만 아슬란 파샤의 압력을 받자 왕위를 그에게 돌려줬다. 하지만 실명 상태였던 그가 왕노릇을 제대로 할 리 없었고, 바메크 3세가 실권을 잡았다. 얼마 후 카르틀리 왕 바크탕 5세가 같은 바그라티온 왕실이 다스리는 국가인 이메레티의 혼란을 바로잡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군대를 이끌고 이메레티로 들어왔다. 바크탕 5세는 바메크 3세와 협의한 끝에 이메레티 서쪽은 바메크 3세가 관장하고 동쪽은 자신이 관장하기로 했다. 그에게는 쿠타이시 시만 주어졌다.
바메크 3세 다디아니는 바크탕 5세와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자신의 딸과 바크탕 5세의 아들 아르칠리를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바메크 3세는 곧 마음을 바꾸고 결혼을 취소했다. 이에 바크탕 5세는 구리아 공작 디미트리오스, 압하지야 및 이메레티 상부 지역의 귀족들과 협정을 체결하고 군대를 이끌고 이메테리로 진군해 삭헤라 인근에 진을 쳤다. 바메크 3세는 즉각 응전했고, 양군은 삭헤라 인근에서 격렬하게 맞붙었다. 전투에서 패배한 바메크 3세는 밍그렐리아 공국의 수도인 오디시로 도주했고, 바크탕 5세는 쿠타이시를 함락시키고 바그라트 5세를 억류한 뒤 오디시 인근으로 진격했다. 바메크 3세는 수도를 지킬 가망이 없자 스바네티로 피신했다. 바크탕은 오디시를 점령한 뒤 그곳에 주둔한 수비대를 학살하고 바메크의 가족과 재물을 모조리 확보했다.
바메크 3세는 스바테니에서 내부의 배신으로 살해당했고, 바크탕 5세는 쿠타이시로 돌아와 14세 아들 아르칠리를 이메네티 왕위에 앉혔다. 그 후 바그라트 5세는 카르틀리로 끌려가 한동안 억류되었다. 하지만 1663년, 카르틀리 왕국의 주군인 사파비 제국이 개입하여 아르칠리를 물러나게 했다. 이후 이메네티 귀족들의 요청에 따라 바그라트 5세를 풀어줬고, 조국에 돌아온 그는 두번째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새 밍그렐리아 공작으로 취임한 레반은 그가 왕으로 복귀한 걸 받아들일 수 없다며 군대를 이끌고 이메레티 왕국을 침공했다. 그러나 이메레티 귀족들의 호응을 거의 받지 못했고, 결국 이어진 전투에서 왕실군에게 패배하고 생포했다. 그는 레반에게 아내 타마르와 이혼하라고 강요하고 뒤이어 타마르와 결혼했다. 그 대신 자신의 누이 티나틴을 그와 결혼시킨 뒤 오디시로 돌려보냈다.
1666년, 이메레티의 대신 세크니아 크하이체는 눈이 멀어서 정사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그에게 불만을 품고 아할치헤의 아슬란 파샤와 비밀리에 접촉해 투르크군이 이메레티로 오게 했다. 크하이체는 비밀리에 쿠타이시로 잠입해서 요새를 장악하고 수도에 투르크 수비대를 남겼다. 1667년 또다른 귀족 베잔 도르키파니제가 정변을 일으켜 쿠타이시를 탈환하여 투르크 수비대를 죽이고 요새를 바그라트 5세에게 돌려줬다. 1668년, 당시 투르크에 억류되어 있던 네르탄 다레얀 여왕이 아슬란 파샤에게 자신과 남편 바크탕을 복위시키면 2만 알틴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해 가을, 아슬란 파샤는 다레얀 여왕과 바크탕을 데리고 이메레티를 침공했다. 그는 맞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카르틀리로 달아났고, 투르크군은 이메레티 전역을 황폐화시켰다. 아슬란 파샤는 다르얀과 바크탕을 옹립한 뒤 풍부한 전리품을 챙기고 아할치헤로 귀환했다.
다레얀과 바크탕은 레흐후미의 수장인 코시야 라슈키슈빌리를 동지로 삼고 이메레티를 통치하려 했다. 그러나 코시야는 정변을 일으켜 다레얀과 바크탕을 살해했다. 이메레티 귀족들은 구리아 공작 디미트리오스 구리엘리를 새 왕으로 옹립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곧 그의 통치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다시 정변을 일으켜 디미트리오스를 체포해 실명형에 처한 후 추방했다. 1669년, 카르틀리 왕국의 군주 바크탕 5세는 이메레티 귀족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바그라트 5세를 돌려보냈고, 귀족들은 그를 세번째로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이메레티 귀족 세크니아 치헤이드제는 그를 왕으로 인정하길 거부하고 밍그렐리아 공작 레반과 연합하여 대항했다. 이메레티 귀족들이 즉각 이들을 공격해서 취하리 전투에서 격파했다. 세크니아는 전사했고, 레반은 오디시로 달아났다.
1671년, 레반은 대군을 동원하여 이메레티를 침공해 각지를 황폐화시켰다. 하지만 이번에도 바그라트 5세를 따르는 군대에게 참패하여 사로잡힌 뒤 바그라트 앞으로 끌려왔다. 그는 레반에게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강요한 뒤 풀어줬다. 구리아 공작 기오르기 구리엘리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아슬란 파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슬란 파샤가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그는 아내 타마르를 크바라 요새로 보내고 군대를 이끌고 이들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1672년 쿠타이시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투르크군에게 패배하고 생포되었다. 바그라트 5세는 아슬란 파샤에게 뇌물을 바치고 자신을 왕위에 남겨두라고 요청했고, 아슬란 파샤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 대가로 그의 아들 알렉산드레 4세를 인질로 데려갔다.
1672년 겨울, 바그라트 5세는 군대를 모아 구리아로 쳐들어가 철저하게 황폐화시켰다. 이후 1674년 쿠타이시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요새를 점령하고 투르크 수비대를 몰아냈다. 이에 아슬란 파샤는 사절을 보내 그가 요새를 반환하면 알렉산드레 4세를 돌려보내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귀족들의 조언에 따라 쿠타이시의 요새를 아슬란에게 반환하고 알렉산드레 4세를 돌려받았다. 얼마 후, 카르틀리의 아르칠리 왕자와 기오르기 구리엘리 공작이 아슬란을 찾아가서 바그라트 5세를 몰아내달라고 요청했다. 조짐이 심상치 않다고 여긴 바그라트 5세는 1677년 딸 다레얀과 기오르기 구리엘리의 결혼을 주선해 자기 편으로 삼았다.
1678년, 카르틀리 왕자 아르칠리가 이메레티 왕국에 쳐들어와서 수라미를 점령하고 많은 이메레티 귀족들을 자기 편으로 삼았다. 그 후 쿠타이시로 진군해 왕위에 올랐고, 바그라트 5세는 구리아로 도주했다. 아내 타마르는 스칸다 요새에 남아있다가 아르칠리가 요새를 함락시킨 뒤 밍그렐리아로 이송되었다. 그는 이에 맞서 기오르기 구리엘리와 함께 아슬란 파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아슬란 파샤는 에르주룸 파샤 휘하의 투르크군을 파견하여 이메레티로 파견했다. 1679년 8월 투르크군은 아르칠리가 이끄는 군대를 격파했고, 이메레티 귀족들은 바그라트 5세 편을 들었다. 아르칠리는 키르틸리로 도주했고, 에르주룸 파샤는 아르칠리를 따랐던 이들을 모조리 처형하고 이메레티 각지를 황폐화시켰다. 이리하여 바그라트 5세는 4번째로 이메레티 왕위에 올랐다.
그 후 바그라트 5세는 군대를 모아 밍그렐리아 공작 레반과 전쟁을 벌였다. 레반은 패배했고, 바그라트 5세는 아내 타마르를 되찾은 뒤 재혼했다. 레반은 바그라트 5세를 지원하는 기오르기 구리엘리와 화해하고 자신의 아들 마누하르를 인질로 보냈다. 그러나 1680년 레반이 사망하자 기오르기는 마누하르를 살해하고 밍그렐리아를 함락시키려 했지만 실패했다. 1681년, 맹인 왕 바그라트 5세는 4차례에 걸쳐 폐위와 복위를 반복한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무리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는 생전에 3번 결혼했다. 첫번째 부인은 카헤티의 왕자 다비트의 딸이자 네스탄 다레잔의 조카딸 케테반이었다. 1661년 네스탄 다레잔의 이혼 요구를 거부했다가 실명당하고 폐위된 그는 1663년 복위한 뒤 무크라니 공작 콘스탄틴 1세의 딸 타티아와 결혼했다. 하지만 나중에 이혼하고 밍그렐리아 공작 레반의 아내였던 타마르와 결혼했다. 그는 이 세번의 결혼에서 2남 3녀를 두었다. 장남 알렉산데르 4세는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카르틀리에 인질로 잡혀 있었기 때문에 바로 왕이 되지는 못했지만, 1691년에 왕위에 올랐다. 차남 기오르기는 1678년에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 장녀 다레얀은 구리아 공작 기오르기 3세, 아바시제 공작 파타, 라차 공작 파푸나 2세와 차례로 결혼했다. 차녀 마리암은 치코바니 공작 이세, 라차 공작 쇼시타 3세와 연이어 결혼했다. 삼녀 티나틴 공주는 구리아 공작 기오르기 구리엘리, 밍그렐리아 공작 레반 4세와 잇따라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