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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이메레티 왕국 19대 군주 გიორგი | 기오르기 7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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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기오르기 7세 |
조지아어 | გიორგი | |
라틴어 | George VII | |
가족 |
알렉산드레 4세(아버지) 엘레나(어머니) 시몬(형) 로담(첫째 아내) 타마르 아바시제(둘째 아내) 타마르(셋째 아내) 타마르 구리엘리(넷째 아내) 알렉산드레 5세(장남) 마무카(차남) 기오르기 9세(삼남) 로스톰(사남) 타마르(장녀) 투타(차녀) 아나(삼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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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 년도 | 미상 ~ 1720년 2월 22일 | |
재위 기간 |
1707년 ~ 1711년(1차 재위) 1712년 ~ 1713년(2차 재위) 1713년 ~ 1716년(3차 재위) 1719년 ~ 1720년(4차 재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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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차 이메레티 왕국 19대 군주.2. 생애
2차 이메레티 왕국 14대 군주 알렉산드레 4세와 카르틀리 왕국의 군주 기오르기 11세와 조카인 엘레나의 차남이다. 형으로 시몬이 있었다. 1695년 아버지가 피살된 뒤 형과 함께 카르틀리 왕 헤라클리오스 1세의 궁정에서 자랐다. 1698년 형 시몬이 아할치헤의 이사크 파샤에 의해 이메레티 왕이 되었으나 1701년 구리아 공국의 공작 마미아 구리엘리에게 피살되었다. 이후 마미아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기오르기 6세가 이사크 파샤에게 뇌물을 주지 않자, 이사크 파샤는 이스탄불에 기오르기 6세를 비난하는 보고서를 올렸다. 술탄 무스타파 2세는 에르주룸의 셀림 파샤에게 이사크 파샤와 함께 이메레티 왕국을 정벌하고 시몬의 동생인 기오르기 7세를 왕위에 올리라고 명령했다.셀림 파샤는 구리아에서 초로키 강을 건너 구리아로 진군했고, 이사크 파샤는 그을 대동한 채 카카스히드로 진군했다. 이에 구리아 공작 마미아 구리엘리는 투르크 편으로 넘어갔고, 밍그렐리아 공국의 기오르기 리파르티아니와 적대 관계에 있던 기오르기 미켈라제도 휘하 병력과 함께 투르크군에 합류했다. 투르크군은 기오르기 6세의 근거지인 아르그베티를 황폐화하고 지역 주민들을 학살했다. 그런데 무스타파 2세가 사망하고 신임 술탄 아흐메드 3세가 술탄이 원정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셀림 파샤는 더 이상의 공세를 중단하고 기오르기 6세와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기오르기 6세는 쇼라피니 요새를 파괴하고 인질과 선물을 에르주룸에 넘겼다. 또한 그를 입양하고 이메레티의 새로운 왕으로 인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기오르기 6세는 투르크군이 철수길에 오르자 태도를 바꿔 병사들에게 적을 추격해 섬멸하라고 명령했고, 이로 인해 많은 투르크군이 전사하고 아할치헤의 이사크 술탄이 중상을 입었다. 또한 그들에게 내줬던 전리품을 모조리 회수했다. 그는 기오르기 6세가 자신을 해칠까 두려워 쿠타이시 요새로 피신했다. 기오르기 미켈라제가 그에게 충성하고 기오르기 11세의 딸인 로담과 결혼하도록 주선하자, 기오르기 6세는 구리아 공작과 밍그렐리아 공작의 지원을 받아 미켈라제를 공격해 크게 이겼고, 미켈라제는 카르틀리 왕국으로 도피했다.
한편, 카르틀리의 왕 바크탕 6세는 기오르기 6세에게 결혼 동맹을 제안하며 그의 아들 레반을 카르틀리로 보내라고 제안했다. 기오르기 6세는 처음에 동의했지만, 레반이 카르틀리 왕에 의해 사파비 제국으로 보내질 거라는 첩보를 입수하자 거부하기로 했다. 이후 바크탕 6세는 기오르기 7세를 돕기로 했고, 이메레티 총대주교, 갈라티 주교 및 쇼시타 영주도 그의 편에 섰다. 1707년, 공모자들은 기오르기 6세를 왕위에서 축출하고 그를 이메레티의 새 왕으로 선포했다. 그는 기오르기 6세에게 모든 왕실 토지를 포기하고 영지로 돌아가라고 요구했다. 기오르기 6세는 총대주교의 중재를 통해 그와 화해하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이에 밍그렐리아 공작이자 우호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하기도 했던 기오르기 리파르티아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기오르기 리파르티아니는 원군을 보내줬고, 기오르기 6세는 바케 마을 인근에서 기오르기 7세의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1709년 기오르기 리파르티아니의 아들들과 기오르기 6세의 조카들은 기오르기 7세의 편으로 넘어갔다.그는 이에 고무되어 군대를 이끌고 쿠타이시에서 출발하여 기오르기 6세가 있는 마츠키 요새를 포위했다. 기오르기 6세는 장남 파아타 아바시제에게 요새 수비를 맡긴 뒤 포위망을 뚫고 기오르기 리파르티아니와 합세하려 했다. 그는 이들이 합류하는 걸 막기로 하고 야간에 리파르티아니의 진영을 공격하여 완승을 거두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기오르기 6세는 스베리 요새로 피신했다. 그는 카츠키 요새로 돌아와서 맹공격을 퍼부었고, 파아타 아바시제는 곧 항복했다. 그는 카츠키를 점령한 뒤 모든 주민을 노예로 팔고 뒤이어 스베리 요새로 쳐들어갔다. 하지만 기오르기 6세는 적의 공세를 격퇴한 뒤 바크탕 6세의 초청에 따라 카르틀리 왕국으로 피신했다.
그는 형 시몬을 죽인 마미아 구리엘리에게 원한을 품고, 기오르기 리파르티아니와 화해한 뒤 그와 연합하여 마미아의 영지인 구리아를 공격했다. 그 결과 구리아 일대가 황폐화되었지만, 마미아를 완전히 제압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던 1711년, 기오르기 리파르티아니는 그를 배신하고 쇼호타 에리스타비, 베잔 리파르티아니 및 주라브 아바시제 공작과 함께 마미아 구리엘리를 이메레티 왕으로 복위시켰다. 그는 이에 맞서려 했으나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귀족들이 대거 이탈하자 카르틀리로 도피하여 고리에서 바크탕 6세의 영접을 받았다. 이때 기오르기 6세도 여기에 있었다. 그는 바크탕 6세에게 기오르기 6세를 넘기라고 요구했지만, 곧 바크탕 6세의 중재를 받아들여 기오르기 6세와 화해했다. 기오르기 6세는 이메레티로 넘어간 뒤 영지에서 여생을 조용히 보냈다.
그는 카르틀리에서 삼츠헤로 이동한 뒤 이사크 파샤에게 군사 지원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한편 주아브 아비시제는 마미아 구리엘리와 말다툼을 하고 투르크 영토로 도피했다. 그는 곧 기오르기 7세와 만나 이메레티로 돌아가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여기에 레흐쿠미의 통치자 베잔 리파르티아니도 기오르기 7세의 편에 서기로 했다. 1711년 여름 주아브 아비시제와 함께 아할치헤에 도착한 뒤 다시 레흐후미로 가서 베잔 리파르티아니와 합류했다. 이 소식을 접한 마미아 구리엘리는 쿠타이시에서 아르그베티로 이동해 반란군을 대적하려 했다. 1712년 양군은 취하리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 결과 그가 승리를 거두었고, 마미아 구리엘리는 라차로 도피했다. 이리하여 복위에 성공한 그는 사로잡은 모든 구리아인을 오스만 제국에 노예로 팔았다.
마미아 구리엘리는 카르틀리로 이동한 뒤 바크아 6세의 아들 바카와 만나 고리로 호위되었다. 그는 뒤이어 구리아로 돌아가서 반격의 때를 노렸다. 1713년, 마미아는 밍그렐리아 공국, 라차, 아다시드제와 함께 기오르기 7세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었다. 연합군은 오크리베 전투에서 왕실군을 물리쳤고, 기오르기 7세는 카르틀리 왕국으로 도피했다. 이후 아할치헤로 이동한 뒤 이사크 파샤에게 귀족들에 맞설 병력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사크 파샤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1714년 1월 마미아 구리엘리가 사망하자 그에게 투르크군을 딸려서 왕위를 계승하게 했다. 그는 귀족들과 화해하려 했지만, 베산 리파르티아니와 주라브 아바시제는 그를 인정하는 걸 거부하고 이메레티 왕국을 침공했다. 이에 군대를 이끌고 사치레 요새를 포위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자 게구티로 후퇴했다. 베잔이 아버지를 기오르기 리파르티아니를 밍그렐리아 공국에서 추방하고 자신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을 용인한다면 협조하겠다고 제안하자, 그는 이를 수락했고 주라브 아바시제와도 화해했다.
그러나 베잔 리파르티아니와 주라브 아바시제가 왕명을 사사건건 거역하자, 그는 이들에게 반감을 품고 밍그렐리아의 일부 영토에서 근근히 버티고 있던 기오르기 리파르티아니를 게구티로 초대해 베잔을 타도하는 걸 돕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베잔은 아버지를 함정으로 유인해 체포한 뒤 아버지의 지지자들을 학살했다. 이에 그는기오르기 리파르티아니는 가망이 없다고 여기고 포기하면서도 주라브 아비시제를 직접 공격해 그의 영지를 황폐화시켰다. 1716년, 베잔 다디아니와 주라브 아비시제는 아할치헤의 아슬란 파샤에게 기오르기 7세를 타도하고 마미아 구리엘리의 아들인 기오르기 구리엘리를 왕위에 앉히고 싶다고 요청했다. 아슬란 파샤는 이에 동의하고 투르크군을 파견했다. 그는 이에 항전했으나 끝내 패배를 면치 못하자 라차로 도주했다.
투르크군은 그를 한달 간 추격했지만 끝내 잡지 못하자 쿠타이시로 돌아간 뒤 기오르기 구리엘리를 기오르기 8세로 즉위시켰다. 그는 스비모네티로 이동해서 반격의 기회를 노렸지만, 아슬란 파샤에게 따라잡혀 크게 패해 많은 병력을 잃고 카르틀리 왕국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새 군주 기오르기 8세는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곧 구리아로 망명했다. 이후 다디아니 가문, 아바시제 가문, 에리스타비 가문이 왕국 전체를 자기들 마음대로 나눠 가졌다. 그는 1717년 봄에 이메레티로 돌아왔지만, 귀족들이 왕으로 인정하길 거부하자 아할치헤로 도피했다. 이후 귀족들은 1719년까지 이메레티 왕을 선출하지 않았다.
그는 아할치헤에 도착한 뒤 마침 구리아에서 어머니 엘레나와 분쟁을 벌이다가 다른 귀족들의 침공을 받고 아할치헤로 도주한 기오르기 구리엘리와 만나 화해했고, 구리엘리의 누이인 타마르와 결혼했다. 아할치헤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 기오르기 구리엘리는 에르주룸으로 가서 그곳의 파샤로부터 군대를 지원 받고 구리아로 돌아가 공국을 되찾고 어머니와 형제들을 추방했다. 한편, 그는 이스탄불로 이동한 뒤 술탄 아흐메트 3세에게 자신을 복위시켜달라고 간청했다. 1719년, 아흐메트 3세는 마침내 그를 돕기로 하고 아할치헤의 이사크 파샤에게 이메레티로 진군하라고 명령했다. 그해 8월, 그는 투르크군과 함께 이메레티로 진입하여 수도 쿠타이시를 점령했다.
그는 귀족들에게 자신을 왕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투르크군은 귀족들의 영지를 공격해 많은 전사를 죽이고마을들을 모조리 파괴했다. 그는 투르크군에 적극적으로 협조했고, 다디아니 가문의 소유인 밍그렐리아를 초토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결국 견디다 못한 귀족들은 그를 왕으로 인정하기로 했고, 투르크군은 귀환했다. 그러나 그가 투르크군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자신들을 짓밟은 것에 원한을 품은 귀족들은 그를 암살하기로 결의했다. 1722년 2월 22일, 그는 시몬 아바시제의 초대를 받고 연회에 참석했다가 살해되었다. 그를 따라갔던 추종자들은 사로잡힌 뒤 노예로 팔렸다. 이후 기오르기 구리엘리가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곧 축출되고 그의 장남인 알렉산드레 5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생전에 네번 결혼했다. 첫번째 부인은 카르틀리의 전 군주 기오르기 11세의 딸 로담으로, 1703년 결혼하여 알렉산드레 5세, 마무카, 타마르, 투타를 낳았다. 1712년 로담과 이혼한 뒤 1713년 기오르기 6세의 딸인 타마르 아바시제와 결혼했으나 곧 이혼했고, 1714년 라차 공작 파푸나 2세의 딸 타마르와 잠시 결혼했다가 다시 이혼하고 1716년 마미아 구리엘리의 딸이며 기오르기 6세의 누이인 타마르 구리엘리와 결혼해 기오르기 9세, 아나, 로톰을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