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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이메레티 왕국 27대 군주 სოლომონ | 솔로몬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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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솔로몬 2세 |
조지아어 | სოლომონ | |
라틴어 | Solomon II | |
이름 | 다비트(დავით) | |
가족 |
헤라클리오스 2세(할아버지) 아르칠리(아버지) 엘레네(어머니) 안나 오르벨리아니(첫째 아내) 마리암 다디아니(둘째 아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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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 년도 | 1772년 ~ 1815년 2월 7일 | |
재위 기간 |
1789년 ~ 1790년(1차 재위) 1791년 ~ 1810년(2차 재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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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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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차 이메레티 왕국 27대이자 바그라티온 왕조 전체의 마지막 군주.2. 생애
2차 이메레티 왕국 25대 군주 솔로몬 1세의 아들 아르칠리와 카헤티 왕국 14대 군주이자 카헤티-카르틀리 연합 왕국 초대 군주 헤라클리오스 2세의 딸 엘레네의 아들이다. 본래 이름은 다비트이다. 1783년, 후계자가 없던 솔로몬 1세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1784년 4월 솔로몬 1세가 사망한 후 기오르기 9세의 아들이자 솔로몬 1세의 사촌인 다비트 2세가 밍그렐리아 공작 카지아 2세 다디아니 등 일부 귀족들의 지원을 바탕으로 이메레티 왕으로 추대되었다.1789년, 헤라클리오스 2세는 손자 다비트를 왕좌에 앉히기 위해 이메레티 왕국으로 쳐들어갔다. 1789년 6월 10일 맛호지 전투에서 이메레티 귀족들의 배신으로 패배한 다비트 2세는 아할치헤로 도주했고, 그는 이메레티 왕국의 수도 쿠타이시에 입성한 뒤 솔로몬 1세의 후계자라는 것을 모두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솔로몬 2세를 칭했다. 1790년, 다비트 2세는 투르크군과 연합하여 이메레티로 진군했다. 한때 수도 쿠타이시를 장악하고 이메레티 왕위에 복귀했으나, 1791년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은 그에게 패배하고 오스만 제국에 망명했다. 이후 양자는 헤라클리오스 2세의 중재로 화해했고, 다비트 2세는 이메레티로 귀환하여 많은 영지를 받았다. 그러나 왕위에 복귀할 야심을 포기하지 않았던 다비트 2세는 1792년 다케스탄에서 용병을 고용해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또다시 패배하고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했다.
이리하여 이메레티 왕으로서 입지를 확고히 한 그는 헤라클리오스 2세의 지원에 의존하여 나라를 통치했으며, 솔로몬 1세의 정책을 계승하여 지역 귀족들의 권력을 축소했다. 1795년 헤라클리오스 2세가 카자르 왕조와 전쟁을 벌일 때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참전해 크르차니시 전투에서 보조군으로 참여했다. 그런데 1798년 헤라클리오스 2세가 사망하고 1801년 카헤티-카르틀리 연합 왕국이 러시아 제국에 병합되면서, 그의 입지는 대단히 위태로워졌다. 밍그렐리아 공국은 대세를 읽고 러시아 제국의 보호령이 되었지만, 그는 러시아에 맞서기로 하고 오스만 제국과 카자르 왕조의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어느 나라도 그를 위해 러시아와 싸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
1804년 5월 2일, 러시아군 사령관 파벨 치치아노프가 군대를 이끌고 이메레티로 진군해 이메레티 왕국이 러시아 보호령으로 귀속되는 걸 받아들이라고 요구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엘라스나우르 조약에 서명하여 러시아의 봉신이 되었다. 그는 어떻게든 러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날 기회를 노렸다. 1809년 친척들이 조지아 동부에서 봉기를 일으켰을 때 지원했다가 구금되어 트빌리시에 수감되었다. 1810년 3월 4일, 러시아 정부는 군대를 파견해 그를 권좌에서 몰아내고 이메레티 왕국을 러시아의 영토로 병합했다. 그는 아할치헤를 통해 오스만 제국으로 달아났다.
1810년 9월 러시아의 지배에 항거하는 조지아인들의 봉기가 일어나자, 그는 이에 가담했고 오스만 제국, 카자르 왕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 제1제국에 원조를 호소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구원은 오지 않았고, 러시아군이 봉기를 진압하자 트라페준타로 도주했다가 1815년 2월 19일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트라페준타에 있는 니사의 성 그레고리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조지아 정교회는 1990년 겔라티 수도원으로 유해를 이전했고 2005년 6월 27일에 그를 성인으로 시성했다.
그는 1787년 안나 오르벨리아니와 결혼했고, 1791년 마리암 다디아니와 결혼했으나 자식을 얻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