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20 01:51:43

알렉산드레 5세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11b39, #02336b 20%, #02336b 80%, #011b39);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바그라티온 왕조
알렉산드레 1세 기오르기 1세 콘스탄틴 2세 알렉산드레 2세 바그라트 3세
바그라티온 왕조
기오르기 2세 레반 로스톰 바그라트 4세 기오르기 3세
바그라티온 왕조 구리엘리 왕조
알렉산드레 3세 바그라트 5세 바흐탄그 츠추나슈빌리 아르칠리 디미트리오스 구리엘리
구리엘리 왕조 바그라티온 왕조 구리엘리 왕조
기오르기 4세 알렉산드레 4세 기오르기 5세 시몬 마미아 구리엘리
바그라티온 왕조 구리엘리 왕조 바그라티온 왕조
기오르기 6세 기오르기 7세 기오르기 8세 알렉산드레 5세 기오르기 9세
바그라티온 왕조
마무카 솔로몬 1세 테이무라즈 다비트 2세 솔로몬 2세 }}}
}}}}}}
2차 이메레티 왕국 21대 군주
ალექსანდრე | 알렉산드레 5세
제호 한국어 알렉산드레 5세
조지아어 ალექსანდრე
라틴어 Alexander V
가족 기오르기 7세(아버지)
로담(어머니)
마무카(동생)
기오르기 9세(이복 동생)
로톰(이복 동생)
타마르(누이)
투타(누이)
아나(이복 누이)
마리암(첫째 아내)
로담(둘째 아내)
타마르(셋째 아내)
다비트(장남)
솔로몬 1세(차남)
로세브(삼남)
바그라트(사남)
아르칠리(오남)
기오르기(육남)
호레산(장녀)
로담(차녀)
타마르(삼녀)
생몰 년도 1703년 또는 1704년 ~ 1752년
재위 기간 1720년 ~ 1741년(1차 재위)
1742년 ~ 1752년(2차 재위)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2차 이메레티 왕국 21대 군주.

2. 생애

1703년 또는 1704년경 2차 이메레티 왕국 19대 군주 기오르기 7세 카르틀리 왕국 군주 기오르기 11세의 딸 로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친동생으로 마무카, 누이로 타마르, 투타가 있었고, 이복형제로 기오르기 9세, 아나, 로톰이 있었다. 그는 아버지가 왕위를 놓고 힘겹게 싸우는 동안 카르틀리 왕국의 궁정에서 자랐다. 1712년 기오르기 7세가 이레메티 국왕이 되었지만, 카르틀리 왕 바크탕 6세는 그를 보내주지 않았다. 1714년 10월 바크탕 6세가 사파비 제국에 의해 예세로 교체된 뒤에야 이메레티 왕국으로 귀환했다. 1716년 아버지가 축출될 때 스바네티의 산악 요새에서 가족과 함께 은신했다.

그 후 아버지를 따라 이스탄불로 가서 오스만 제국 술탄 아흐메트 3세에게 개입을 간청했다. 1719년 8월, 그는 아버지와 함께 투르크군에 동행하여 이메레티에 귀환했다. 이후 기오르기 7세는 귀족들과 전쟁을 치른 끝에 왕위를 되찾았지만, 1720년 2월 22일 시몬 아바시제의 초대를 받고 연회에 참석했다가 살해되었다. 그는 카르틀리 왕국으로 도주했고, 이메레티 왕위는 구리아 공작 기오르기 구리엘리가 차지했다. 오스만 제국은 그를 왕위에 세우기로 결정했고, 바하흐트 바그라티온 장군이 지휘하는 투르크군의 호위하에 1720년 6월 이메레티로 진군해 기오르기 구리엘리를 구리아로 축출하고 이메레티 왕위에 올랐다.

당시 카르틀리 왕위에 복귀한 바크탕 6세는 오스만 제국에 협력하기로 하고, 이메레티 왕국에 맞서던 주라브 아바시제를 공격해 하라가울리를 점령하고 그를 서쪽으로 몰아냈다. 라차 공작 소시타 3세는 알렉산드레 5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카츠키 요새를 헌납했다. 이후 알렉산드레 5세와 소시타 3세는 아바시제 가문의 요새 중 하나인 츠우츠흐바티 요새를 포위 공격했고, 투르크군이 요새의 벽 아래를 파낸 뒤 지뢰를 폭발시켜 성벽을 허물어뜨리면서 함락되었다. 이후 투르크군은 밍그렐리아 공작 베잔 다디아니와 주라브를 추격하면서 이메레티 전역을 황폐화시켰다. 1721년, 두 귀족이 항복하면서 전쟁이 마무리되었다. 밍그렐리아와 아바시제는 스스로 오스만 제국의 신하라고 선언하고 매년 은화 12개를 공물로 바치겠다고 서약했다. 이후 수도 쿠타이시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1660년 알렉산드레 3세가 사망한 후 60년간 12명의 군주가 즉위와 폐위를 끊임없이 반복했던 혼란기는 그의 즉위와 함께 막을 내렸다.

그는 왕위에 오른 뒤 밍그렐리아 공국의 공작 베잔 다디아니의 딸 마리암과 결혼했다. 이 결혼식 비용은 베잔이 전적으로 부담했는데, 이는 당시 이메레티 왕국의 국고가 바닥나서 결혼식을 치를 형편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베잔은 오스만 제국에 복종하면서도 내심 반감을 품고 있었고, 반 투르크 세력을 은밀히 지원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에 의해 선임된 그를 암살하려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마리암이 막아줬고 다른 귀족들이 방해한 덕분에 실패했다. 기오르기 7세의 미망인인 타마르 굴리엘리와 치콘디디의 주교 가브레일은 에르주룸의 쾨프뤼 압둘라 파샤에게 "베잔이 12살의 노예를 왕위에 세우는 대가로 자기 가문을 부유하게 만들었다"라고 비난했다. 그는 이에 대응하여 파샤에게 편지를 보내 타마르와 가브리엘을 체포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편, 그는 왕위에 오른 후 카르틀리 왕국의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카르틀리 국왕 바크탕 6세는 조지아를 통일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1722년 8월에서 11월 사이, 바크탕 6세와 바카르 왕자는 표트르 1세의 러시아군이 코카서스 일대로 진출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기 위해 간자를 침공했으나 실패했다. 1723년 1월 카헤티 왕국 콘스탄틴 2세가 카르틀리 왕국의 수도 트빌리시를 침공하자, 그는 바크탕 6세를 돕기 위해 시몬 아바키제 장군 휘하의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트빌리시는 1723년 5월 8일에 함락되었고, 시몬 아바키제를 포함한 이메레티 군대는 학살당했다. 바크탕 6세는 유격전을 전개하는 한편 아내 루수단을 이메레티 왕국으로 피신시켰다. 1724년 이스탄불 조약이 체결되면서 러시아 제국은 오스만 제국이 트란스캅카스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했고, 바크탕 6세는 러시아로 망명했다.

1725년, 구엘라티의 주교 구에데반이 드바리스티셰 성채를 점령하고 중앙 정부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와 베잔은 함께 요새를 포위 공격했고, 성벽 밑을 파내는 공사를 벌인 끝에 성벽이 무너지면서 함락했다. 1726년, 기오르기 아바시제의 아들 레반 아바시제가 초라파니 요새를 공략했지만 곧 베잔에게 반격당하여 탈취되었고, 베잔은 왕실에 충실한 가문의 후예인 주라브 아바시제에게 요새를 맡겼다. 1724년 7월 스칸다로 순행하던 그는 라차 공작 초치타 3세에게 공격받았다. 초치타 3세는 마을을 파괴했지만 그가 숨은 요새는 남겨뒀다. 그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사술루키조 요새, 세바 등 라차 공국 남부 요새를 파괴한 뒤 풍부한 전리품을 가지고 쿠타이시로 돌아왔다.

오스만 제국은 서부 조지아가 단 한 명의 공작의 손에 좌지우지되는 걸 원하지 않았기에, 베잔의 권력 강화에 경계심을 품었다. 차일다르 파샤의 아들인 유수프 빈 이차크 다켈리는 1728년 8월 압하지야 공작 로스톰 체르바키제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군사 작전을 조직했다. 그는 이를 논의하는 차원에서 요츠빌리 궁전에서 알렉사느데 5세를 만났고, 뒤이어 베잔과 아들 오티아 다디아니를 소환했다. 베잔은 궁전에 들어왔다가 오스만 군인에게 참수되었고, 그가 이끌고 온 밍그렐리아 근위대는 학살되었다. 여기에 초치타 3세 역시 소환되어 알렉산드레 5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강요받았다.

이리하여 권신 베잔 다디아니는 몰락했지만, 여전히 권위가 약했던 그는 구리아 공작 마미아 4세 구리엘리와 동맹을 맺고 마미아 4세의 딸 로담과 결혼했다. 그리고 체레텔리 가문과 아구아슈빌리 가문의 권력을 증진시키고, 라차 공국을 약화시키기 위해 초치타 3세의 형제에게 제공했던 바리 공국을 그의 왕실 영지로부터 단절시켰다. 이에 반감을 품은 초치타 3세는 1730년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이에 맞서 초라파니를 공격해 일시적으로 함락시켰지만, 주라브 아바시제가 오스만 지원군과 함께 초라파니에 상륙해 도시를 정복하고 수비대를 주둔시키는 걸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1731년, 초치타 3세는 이아치빌리 가문의 영지였던 사드멜리를 포위 공격했고, 왕군을 지휘했던 레반 아바시제를 인질로 잡았다. 오티아 다디아니는 반란에 가담해 이메르 장군을 그의 영지에 가두었다.

그는 이에 대응하여 라오니 강을 건너 사드멜리에 주둔한 적을 야습해 수많은 라츠인을 살해하고 레반 아바시제를 체포했다. 이후 많은 사바치조 죄수들과 레반을 맞바꾸기로 했고, 죄수들은 노예로 팔려갔다. 초치타 3세가 1731년 사망한 후에도 아들 그리골 치헤티제는 밍그렐리아 공국과 동맹을 굳게 맺어 왕실에 대했다. 그는 이에 맞서 사바키조 동맹과 손을 잡기로 하고 사바키조 공작 레반의 딸 타마르 아바키제와 결혼했다. 양자의 갈등이 점점 깊어진 끝에, 1732년 12월 23일 반란군은 그의 형제인 마무카 바그라티온 왕자를 왕위에 세웠다. 마무카가 오티아 다디아니, 그리골 치헤티제 등과 함께 이메레티를 침략하고 쿠타이시를 향한 맹공을 퍼부었지만, 그는 술루키제의 군 사령관 레반 아바시제와 바리 공작 게데반과 연합하여 쿠타이시를 지켰다. 그러다 오스만 제국이 침공 위협을 가하자, 반란군은 쿠타이시에서 철수했다.

1733년, 오스만 제국은 이메레티, 밍그렐리아, 구리아 사이의 삼각지대에 위치한 항구 도시인 포티에 오스만 총독을 임명해 서부 조지아 해안을 합병하려는 계획을 진전시켰다. 1735 ~ 1739년 제6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발발하자, 오스만 제국은 압하지야와 러시아 국경의 아조프 시 사이에 살고 있는 유목 민족들을 예속시키는 작전을 벌여 흑해에 대한 영유권을 강화하려 했다. 그 와중에 그와 오티아 다디아니에게 증원을 요청했는데, 오티아 다디아니는 거부했지만 그는 오스만 제국이 강력한 귀족들을 억누르는 것을 도와주길 희망하며 받아들였다. 오티아 다디아니는 그에게 사절을 보내 오스만 제국이 흑해 연안을 병합하면 위험하다고 경고했지만 무시당했다.

오스만군은 오티아의 참가 거부를 응징하기 위해 밍그렐리아를 파괴하고 성 게오르기오스 성당을 불태웠다. 이후 압하지야로 진격했고, 압하지야인들은 오스만군의 약탈을 피해 코카서스 산맥으로 피난했다. 압하지야 공작은 저항을 포기하고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하미드 베이가 되었으며 사로잡힌 수천 명의 민간인들은 노예로 팔려갔다. 이러한 오스만군의 원정에 동행한 그는 코도리 호를 건너 자케티아 국경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더 이상 갔다가는 불순종을 일삼는 귀족들이 자기가 없는 틈을 반란을 꾀할 수 있었기에, 아조프까지 가는 건 거절했다.

오스만군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아조프로 데려가려 하자, 그는 야간에 전리품을 남겨두고 조국으로의 귀환길에 올랐다. 그러나 엥구리에 이르렀을 때 오스만-압하지야 연합군의 습격을 받았고, 수많은 병사가 투르크군에 붙잡혀 노예로 팔려갔고 그는 군사 고문들과 함께 코도리 강에 몸을 던져 한참 동안 헤엄친 끝에 겨우 빠져나갔다. 밍그렐리아에 가까스로 도착한 그는 오티아 다디아니의 보복 공격에 직면했고, 캇소 다디아니 성채로 피신한 뒤 오티아에게 인질을 제공한 뒤 수도로 겨우 귀환했다. 한편 오스만군은 그가 떠나자마자 아조프에 대한 원정을 중단했다.

이후 왕국 내부의 긴장감은 더욱 악화되었다. 1734년, 마무카는 오티아 다디아니, 그리골 라차, 주라브 아바키제의 지원을 받아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이 밀려오자, 그는 구리아 공작 마미아 4세, 레반 아바키제, 캇소 다디아니, 바리의 귀데반, 메라브 툴루키제, 그리고 몇몇 소수 이메르 귀족들과 함께 반란군에 맞섰다. 양군은 1734년 겨울 치코리에서 맞붙었다. 한창 격전이 벌어진 끝에 오티아 다디아니가 중상을 입고 왕실 근위대에 붙잡혔고, 캇소 다디아니는 전사했다. 그는 승리를 거둔 뒤 도망치는 자들을 추격하여 수백명의 라차, 밍그렐리아, 레차 귀족들을 붙잡아 오스만 제국에 노예로 팔았으며, 1,700명의 반란군 포로들을 쿠타이시로 끌고 갔다.

반란 진압 후, 그는 반란군이 재집결하는 걸 막기 위한 공작에 착수했다. 이차크 다켈리에게 선물을 주며 도움을 호소했고, 투르크 장군 마흐메트 벡을 사크헤레 지휘관으로 삼아 왕실의 권위를 강화했다. 한편 오스만 제국에게 "이번 반란은 반 오스만 세력이 일으킨 준동"이라고 설명했고, 오스만 제국은 이를 받아들여 카르틀리 왕국에 주둔하고 있던 산자크베이 기비 아밀라크바 휘하의 군대를 이메레티로 북상시켰다. 그는 투르크군의 도움에 힘입어 사칠라오 백국을 공략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이내 정책을 바꾸어 조지아 서부의 분할 정책을 추진했다. 마무카는 사칠라오와 사미켈라오 지방을 제안받았고, 오티아 다디아니는 석방된 뒤 잃어버렸던 영토를 되찾았다. 또한 오스만군은 더 이상 알렉산드레 5세를 적극적으로 돕지 않았다.

이에 고무된 귀족들은 알렉산드레 5세를 상대로 반란을 꾀했다. 1734년 말, 마무카는 세베카 성채를 공략하고 사치드자바초 일대를 공략했다. 또한 1735년 알렉산드레 5세와 주라브 아바사제 사이의 평화 협약에 화가 난 파푸나 체레텔리가 반란을 일으켰다. 알렉산드레 5세는 즉각 군대를 일으켜 사세레텔로 전역을 파괴했지만, 파푸나의 거주지인 모담나케 요새는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렇듯 왕국의 혼란이 갈수록 심해지자, 그는 갓 태어난 아들 솔로몬 1세를 메스헤티아의 마마츠민다 마을에 거주하는 하층 귀족 가문에 보내 양육하도록 했다. 여기에 동방의 위협도 거세졌다. 1735년, 나디르 샤가 사절을 그에게 사절을 보내 쿠타이시를 자신에게 넘기고 항복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는 이를 무시하고 오스만 제국에 더욱 의존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오스만 제국에 의존하기만 했다가는 조만간 왕국 전체가 오스만 제국의 손아귀에 들어갈 게 뻔했다. 그는 러시아 제국에도 끈을 댈 기회를 노렸다. 그러던 1736년 6월 16일 러시아군이 아조프를 점령하고 흑해에 세력을 떨치기 시작하자, 그는 이에 희망을 걸고 1737년 9월 티모테 가바슈빌리 주교를 대표로 삼은 35명의 사절단을 러시아 제국에 파견했다. 가바슈빌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뒤 안나 이바노브나 여제에게 국왕의 편지를 전하고 이메레티 왕국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해방시켜달라고 청했다. 그러면서 러시아 제국이 서부 캅카스 일대를 장악하는 걸 돕겠다고 덧붙였다. 왕은 서신에서 2만 명의 러시아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흑해에 대한 협동 작전을 추진하고 투르크 점령 하에 있는 해안 요새를 러시아로 넘기겠다고 제안했다.

안나 이바노브나는 사절을 정중하게 대접했지만, 전선이 너무 커지는 걸 걱정하여 알렉산드레 5세의 원조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다만 향후 동맹의 가능성을 열어두기 위해 가바슈빌리에게는 가까운 시일에 회답을 넣겠다는 식으로 말하고 돌려보냈다. 1739년 10월 3일,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은 니사 협약을 체결하면서 평화 협약을 맺었고, 러시아가 자신들을 당분간 돕지 않을 게 분명해진 걸 확인한 가바슈빌리는 그해 12월 모스크바를 떠났다. 러시아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자, 알렉산드레 5세는 왕권 강화에 더욱 치중했다. 1738년 이아슈빌리 경에게 라차 공작 그리골로부터 크바라 성채를 빼앗으라고 명령했다. 크바라는 함락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골이 반격을 가해 크바라를 점령한 왕실군을 격파했다. 이에 분노한 그는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받은 하라가울리 요새 총독을 붙잡아 그의 발과 손을 자르고 눈을 멀게 했다.

1739년, 라차 공작 그리골은 주라브 아바시제의 조카딸과 결혼했다. 그리골과 주라브는 오티아 다디아니와 연합하여 쿠타이시로 쳐들어갔다. 알렉산데르 5세는 카르텔 공작 샹체 드 크사니의 지원을 쵸청하여 500명의 용병과 소규모 크사니아 군대를 받았다. 그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반란군에 맞서 많은 적의 요새를 점령하고 파괴했으며, 많은 전리품을 모았다. 이후 밍그렐리아로 진군햇지만, 레반 아바시제의 조언에 따라 조지아인들의 두려움을 사고 있는 외국 용병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이 조치로 인해 그의 군사력은 격감되어 원정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1740년 9월, 그는 바르치케 왕궁에서 주라브 아바시제와 파푸나 체레텔리를 초대했다. 파푸나는 궁전에서 암살당했지만 주라브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 이후 모담나케 요새로 쳐들어갔지만 파푸나의 미망인과 아들이 이끄는 수비대에 패배했다.

이후 동생 기오르기 바그라티온과 레반 아바시제를 카르틀리로 보내 주라브 아바시제의 동생 바호트 아바시제를 포로로 삼았다. 테드제리에 있는 바호트 저택은 파괴되었고, 바호트는 나바라제티아에 감금되었다. 그는 아바키제 가문에 몸값으로 500개의 금고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1740년 11월 27일, 이스탄불에서 돌아온 조지아 총대주교 도메티오스 4세는 그를 찾아가 바호트의 석방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후 아할치헤의 유수프 3세 다켈리를 찾아가 바호트의 아내인 아누카 바그라티온을 자신에게 넘겨달라고 요청했지만, 유수프가 거절하면서 무위로 끝났다. 1740년, 오티아 다디아니는 주라브 아바시제, 그리골 라차, 압하지야인들을 끌어모아 이메레티 왕국을 침공했다. 그는 이 침공에 거의 저항하지 못했고, 반란군은 왕실의 모든 영토를 파괴했다. 급기야 왕궁이 불타는 상황이 벌어지자 결국 탈출했다.

1741년 봄, 오스만 제국은 피리아기슈빌리 장군의 지휘하의 군대를 투입해 자바케티아 만을 통해 이메레티로 침공하게 했다. 그는 이에 대항하여 샹체 드 크사니에게 지원을 호소했고, 샹체 드 크사니는 밍그렐리아로 진군하는 투르크군을 저지했다. 그러나 반란군의 기세가 갈수록 심해지자, 그는 1741년 가족들과 함께 카르틀리 왕국 국경에서 멀지 않은 하라가울리로 피신했다. 이후 그곳에서 100명의 병사와 함께 수라미로 이동한 뒤 카르틀리 총독 기비 아밀라크바리에게 망명을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타마르 왕비와 자녀들이 카르틀리로 들어간 반면, 그는 하라가울리의 숲에 있는 처헤리에서 동생 마무카, 레반 아비카제, 게데반 데 바리, 바호트 아바키제를 인질로 삼고 마지막 저항을 시도했다. 얼마 후, 카르틀리 왕국의 종주국인 아프샤르 왕조의 군주 나디르 샤가 그를 본국으로 이송했다. 한편 반란군은 알렉산드레 5세의 동생인 기오르기 9세를 새 왕으로 추대했고, 기오르기 9세는 오티아 다디아니의 딸과 결혼했다.

알렉산드레 5세는 트빌리시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군주로 대접받았다. 그러나 그의 동지인 크사니 공작 상체 크사니가 아체라 계곡에 자리를 잡고 반 페르시아 반란을 일으키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그는 나디르 샤를 접견하던 중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고, 마무카, 레반 아바시제, 그 외에 다른 이메레티 귀족들은 이메레티로 돌아갔다. 그는 나중에 반란에 관련없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나서야 석방되었다. 1741년 말, 나디르 샤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준비하던 중 트란스 캅카스로 이동했다. 그는 유수프 3세 파샤에 사절을 보내 알렉산드레 5세의 이메레티 왕위 복위를 요구했다. 이에 유수프 3세는 이스탄불에 어찌할 지 물었고, 나디르 샤와 전쟁을 벌이기 싫었던 오스만 제국 측은 요구를 받아들이라고 지시했다. 유수프 3세는 곧바로 일부 병력을 보내 알렉산드레 5세를 호위하여 아흘치헤로 데려간 뒤, 1742년 가을 이메레티를 침공하여 기오르기 9세를 몰아내고 알렉산드레 5세를 복위시켰다.

1743년 알렉산드레 5세의 계모이자 기오르기 9세의 어머니인 타마르 구리엘리가 구리아의 공주이자 이메레티의 여왕, 유수프 파샤의 후원자로서 추종자들을 끌어모으자, 사치노 바라타치빌리가 위협을 느껴 타마르를 체포해 처형했다. 이에 복수하기로 마음먹은 그는 타마르를 죽인 귀족들의 영지를 침략해 각지를 파괴했고, 사치노의 추종자들 중 몇 명을 노예로 팔았고, 오티아 다디아니와 그리고르 드 라차는 군대를 모아 이에 대적했다. 그는 반란군을 대적하기 위해 아할치헤에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고, 아할치헤 파샤는 즉시 군대를 파견해 반란군을 격파했다. 그리골 드 라차는 추격 도중 피살되었고, 뒤이어 라차 공작이 된 바크탕은 그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또한 그는 밍그렐리아 공작 다디아니에게 항복과 복종을 강요받았다.

1744년, 레반 아바시제는 말차바리아니 공작에게 스베리 성치를 빼앗겼다. 그는 이를 중재해 더 이상의 유혈충돌을 금지했다. 그해 말, 레반은 사촌 자알 아바시제를 크로차에서 포위 공격핬고, 자알은 이메레티를 떠나 카르틀리로 떠났다. 1745년 그는 레반 아바시제의 성장에 두려움을 느낀 끝에 그를 상대로 내전을 벌였다. 한편, 오스만 제국은 그가 나디르 샤와 손을 잡은 것을 불만스럽게 여겨 동생 마무카를 새 왕으로 세우려 했다. 1746년, 마무카는 자신을 이메레티 왕으로 선언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밍그렐리아로 피신해 이전의 적이었던 오티아 다디아니의 보호를 받았고, 카르틀리 왕 테이무아즈 2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테이무아즈 2세는 나디르 샤로부터 분쟁에 개입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승인을 받은 뒤 1748년 이메레티로 진군했으나 오스만 제국군이 보급을 끊자 많은 병사가 굶어죽고 여러 지휘관이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은 지원 대상을 마무카에서 그에게 돌렸고, 이 덕분에 그는 마무카를 물리치고 왕위에 복귀했다.

이후 수년간 조용히 지내던 그는 1750년 압하지야의 대주교 베사리온의 중재하에 카이호스로 체레텔리 공작과 평화 협정을 맺었다. 1752년 초 카쿨리의 성모 이콘을 훔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얼마 후 중병에 걸렸고, 1752년 3월 사순절 기간에 사망했다. 사람들은 이를 신의 저주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후 17세의 아들 솔로몬 1세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생전에 3번 결혼했다. 1721년 밍그렐리아의 공작 베잔 다디아니의 딸 미리암과 결혼했으며, 뒤이어 마미아 4세 구리엘리의 딸 로담과 재혼했다. 하지만 얼마 후 이혼한 뒤 1732년 12월 23일 레반 아바시제의 딸 타마르 아바시제와 결혼했다. 마리암과의 사이에서 아들 다비트, 딸 호레산, 로담을 낳았고, 타마르와의 사이에서 솔로몬 1세, 요시프, 바그라트, 아르칠리, 타마르를 낳았다. 이중 아르칠리 왕자는 이메레티 왕국의 마지막 왕인 솔로몬 2세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