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BBC8A8,#191911> 테크 공작 프란츠 폰 테크 Franz, Herzog von Teck |
||
|
||
이름 | 독일어 |
프란츠 파울 카를 루트비히 알렉산더 (Franz Paul Karl Ludwig Alexander) |
영어 |
프랜시스 폴 찰스 루이 알렉산더 (Francis Paul Charles Louis Alexander) |
|
출생 | 1837년 8월 28일 | |
오스트리아 제국 슬라보니아 왕국 오시예크 | ||
사망 | 1900년 1월 21일 (향년 62세) | |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런던 화이트 로지 | ||
장례식 | 1900년 1월 27일 | |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 | ||
배우자 |
케임브리지의 메리 애들레이드 공녀 (1866년 결혼 / 1897년 사망) |
|
자녀 | 메리, 아돌푸스, 프랜시스, 알렉산더 | |
아버지 | 뷔르템베르크의 공작 알렉산더 | |
어머니 | 키스레데 여백작 레데이 클라우디아 | |
형제 | 클라우디네, 아말리 |
[clearfix]
1. 개요
영국 국왕 조지 5세의 왕비인 테크의 메리의 아버지이자 에드워드 8세와 조지 6세의 외할아버지.2. 작위
- 호엔슈타인의 프란츠 백작 Graf Franz von Hohenstein (1837년 8월 28일 ~ 1863년 12월 1일)[1]
- 테크의 프랜시스 후작 전하 His Serene Highness Prince Francis of Teck (1863년 12월 1일 ~ 1871년 6월 16일)[2][3]
- 테크 공작 전하 His Serene Highness The Duke of Teck (1871년 9월 16일 ~ 1887년 7월 11일)
- 테크 공작 전하 His Highness The Duke of Teck (1887년 7월 11일 ~ 1900년 1월 21일)[4]
3. 생애
뷔르템베르크의 알렉산더 공작.
키스레데 여백작 레데이 클라우디아(Rhédey Klaudia).[5]
1837년 8월 28일에 뷔르템베르크의 알렉산더 공작[6]과 헝가리 귀족인 키스레데 여백작 레데이 클라우디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레데이 클라우디아는 왕공족이 아니라 헝가리의 일반 귀족이였기 때문에, 알렉산더 공작과의 결혼은 귀천상혼이었고 그들의 아들인 프란츠 역시 뷔르템베르크의 계승권은 없었다.[7]
1854년 오스트리아 제국군에 입대하여 경력을 쌓았다. 1863년 당숙인 뷔르템베르크의 빌헬름 1세로부터 그의 누나, 여동생과 함께 테크 후작위를 받았다. 1866년에는 조지 3세의 손녀이자 빅토리아 여왕의 사촌인 4살 연상의 케임브리지의 메리 애들레이드 공녀와 결혼을 함으로서 그레이트브리튼의 역사에 그의 이름이 편입되게 되었고, 결혼 후 런던으로 이주함에 따라 그의 군대 경력은 바다 건너에서 이어졌다. 그 와중에 빌헬름 1세의 아들인 카를 1세는 그를 테크 공작에 서임했다.
부인 메리 애들레이드가 받는 수당 이외에는 수입이 많지 않아서, 때때로 영국을 떠나 유럽 대륙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여왕의 사촌과 결혼하기는 했지만 정치적인 영향력은 전무하다시피 했는데 외동딸인 메리가 왕세손인 엘버트 빅터와 약혼함으로서 형편이 나아졌다. 그후 왕세손이 급작스럽게 사망하여 그의 외동딸은 1893년 요크 공작 조지와 결혼하게 되었다.
1900년 사망하였고,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 아내의 옆에 묻혔다.
4. 가족관계
4.1.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녀 |
영국의 왕비 메리 (Mary, Queen of The United Kingdom) |
1867년 5월 26일 | 1953년 3월 24일 |
조지 5세 슬하 5남 1녀[8] |
1남 |
1대 케임브리지 후작 아돌푸스 케임브리지 (Adolphus Cambridge, 1st Marquess of Cambridge) |
1868년 8월 13일 | 1927년 10월 24일 |
마가렛 그로스베너 슬하 2남 2녀[9] |
2남 |
테크의 프랜시스 공자 (Prince Francis of Teck) |
1870년 1월 9일 | 1910년 10월 22일[10] | |
3남 |
1대 애슬론 백작 알렉산더 케임브리지 (Alexander Cambridge, 1st Earl of Athlone) |
1874년 4월 14일 | 1957년 1월 16일 |
올버니의 앨리스 공녀[11] 슬하 2남 1녀[12] |
5. 여담
- 아버지 알렉산더와 어머니 레데이 클라우디아는 금슬이 상당히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클라우디아는 남편의 기병훈련을 구경 하는 도중 도망친 말에 짓밟혀 죽었는데, 알렉산더 공작은 아내 사망 이후 재혼도 하지 않고 홀로 살았다. 아내와의 사별 이후 알렉산더 공작은 남은 일생 동안 죽을 때까지 정신적 쇠약에 시달렸다고 한다.
- 그의 사후 테크 공작 작위는 장남인 아돌푸스가 이어받았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영국 내 반독정서로 인해, 1917년에 사위인 조지 5세가 왕실의 성을 윈저로 바꾸면서 아돌푸스도 테크 공작위와 폰 테크(von Teck)라는 성을 포기했다. 이후 어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작위에서 따온 케임브리지 후작에 서임되었고, 성과 작위도 케임브리지로 바꾸었다. 다만 케임브리지 가문(舊 테크 가문)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 채 남계가 단절되었다.
[1]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1세로부터 받은 작위이다.
[2]
결혼과 함께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후는 해당 작위로 서술한다.
[3]
Prince라고는 하나 왕자를 지칭하는 Prinz가 아닌 후작을 지칭하는 Fürst에 서임되었으므로 후작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
[4]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Highness라는 경칭을 받았다. 독일의 Durchlaucht는 Serene Highness로 번역되기는 하나 Highness로 번역되는 Hoheit보다는 급이 낮은 경칭이다. 즉, 독일에서는 Serene Highness < Highness인 셈.
[5]
헝가리는 동양처럼 성이 앞에 오기 때문에 이름이 클라우디아고 가문 성씨가 레데이다.
[6]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초대 국왕인
프리드리히 1세의 조카. 프리드리히 1세의 후손이 아닌 뷔르템베르크의 왕족들은 모두 뷔르템베르크의 공작을 칭했다.
[7]
허나 옛날로 거슬러 가면 헝가리 아르파드 왕조 3대 왕
어버 샤무엘의 후손격 가문으로 상당히 잘 나가던 가문이었다.
[8]
에드워드 8세,
조지 6세,
프린세스 로열 메리,
글로스터 공작 헨리 왕자,
켄트 공작 조지 왕자,
존 왕자
[9]
장남은 슬하에 딸 하나만 두었고, 차남은 미혼으로
2차 세계 대전에서 전사했다. 아래에 서술되어 있듯이 동생들도 남계 후손을 남기지 못해서, 1981년에 아돌푸스의 장남이 죽으면서 테크 공작가의 남계는 단절되었다.
[10]
폐렴으로 사망
[11]
올버니 공작 레오폴드 왕자의 딸이자 알렉산더와는 7촌 관계이다. 레오폴드 왕자의 영향으로
혈우병 보인자였다고.
[12]
장남 루퍼트는 스무 살에 뇌출혈로 사망했고, 차남 모리스는 생후 6개월 만에 요절했기 때문에, 알렉산더의 남계 혈통은 그의 사후 단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