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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민주국 臺灣民主國 | Republic of Formosa |
||
국기 | 국새[1] | |
1895년 5월 25일 ~ 1895년 10월 21일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청나라 치하 대만 | 일본령 대만 | |
위치 | <colbgcolor=#fff,#191919> 타이완섬 | |
수도 | 타이베이 → 타이난 | |
국가원수 | 대총통 | |
연호 | 영청(永淸) | |
정치 체제 | 공화제 | |
언어 | 대만 민남어, 중국어 | |
문자 | 한자 | |
종교 | 도교, 유교, 대승 불교 | |
민족 | 한족, 대만 원주민 | |
현재 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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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95년 5월 25일부터 10월 21일까지 약 5개월 동안 타이완섬에 존재했던 나라. 영어 표기는 보통 Republic of Formosa[2]이다.2. 역사
1894년 발발한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 제국에게 패하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으로 인해 청나라는 일본 제국에게 타이완섬, 펑후 제도와 랴오둥 반도를 할양했다. 이 소식을 들은 대만인들은 조약에 반대하며 당경숭(唐景崧)과 구봉갑(丘逢甲) 등을 중심으로 타이베이에서 1895년 5월 25일 대만 민주국을 수립했고, 연호를 영청(永淸)으로 정했다.
당시 청나라의 총병(總兵)이였던 유영복(劉永福, 류융푸)은 자신의 무장 조직 흑기군(黑旗軍)과 함께 타이완 민주국에 가담하였다. 이에 일본 제국 측에서는 가바야마 스케노리(樺山資紀)에게 대만 총독 자리를 위임한 후 대만평정(台灣平定)이라고 칭해진 타이완 민주국 정벌을 맡겼다.[3]
대만 민주국 주도 세력은 일제가 랴오둥 반도를 토해낸 삼국간섭을 보고 열강들이 자신을 승인해줄 거라 생각했지만, 열강들은 물론 대만의 영유권을 할양한 청나라도 대만의 항전을 지원하지 않았다.[4]
당경숭과 구봉갑은 타이완 섬에 주둔하던 청나라 군대를 이용해 일본에 저항하고자 했으나, 막상 일본군이 대만에 상륙하자 별 힘도 못 쓰고 패주하였고, 6월 4일에 지룽을 내줬다. 당경숭과 구봉갑은 타이베이가 점령당할 것으로 보아 단수이를 거쳐 중국 대륙의 샤먼으로 도망쳤다.
유영복은 타이난으로 도망쳐 대만민주국의 부흥을 노렸다. 유영복은 독립선언만 발표하고 정부로써 제대로 된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했던 당경숭, 구봉갑과는 달리 의회를 설치하고 화폐를 발행하는 등 나름대로 존재감을 보여주었고, 자체 군사력과 한족 의용군을 통해 일본에 저항하였다. 나중에 중화민국 국민정부 주석을 지내는 린썬도 타이베이 전보국 직원이었다가 유영복 휘하에서 대일 항전에 참가했었다. 그러나 결국 일본군에 비해 한참 군사력이 부족한 건 마찬가지라 일본에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일본군이 남하하여 타이난이 점령될 위기에 놓이자 유영복은 10월 19일에 샤먼으로 도망갔다. 10월 22일에 일본군은 타이난에 입성했고, 11월 18일에 대만에 대한 평정 선언을 하였다. 그리하여 타이완섬은 일본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일본군은 1895년 10월 하순까지 계속된 대만 점령 과정에서 사망자 5천, 부상자 2만 7천명의 피해를 입었으나, 대부분의 피해는 교전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대만에 유행하던 말라리아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타이완 민주국과의 교전에서 전사한 일본군은 겨우 164명.
일본의 대만 점령 이후로 7년 동안 대만인들의 산발적인 저항이 이어졌다. 그러나 주민들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끝내 일본의 점령을 막고 통치를 뒤흔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이전부터 스페인, 네덜란드 등의 서방 식민제국과 명나라 유민 출신의 정성공 일파, 중국 본토의 청나라 등 외래 세력의 지배가 계속되어 왔기 때문에 대만인들은 이를 당연시하는 태도를 보였고, 독자적인 정체성, 민족 의식도 희박한 편이었다.
일본의 점령이 완료되고 일본의 지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다 대륙으로 떠나버린 후[5], 남은 대만 주민들은 대체적으로 일본의 지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편을 택했고, 일본도 굳이 강압적인 방식을 적용할 필요 없이 온건한 식민 통치를 펼쳤다. 이후 일본의 대만 식민 통치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일본이 패망한 1945년까지 50년 동안 계속되었다.
3. 평가
청일전쟁 이후 한때나마 대만의 항일 주체로 존속했던 대만 민주국에 관한 대만 내부의 평가는 다소 엇갈린다.타이완 독립운동을 벌이는 대만 민족주의자들 중 일부는 대만 민주국을 신해혁명으로 건국된 중화민국보다 16년 앞선, '아시아 최초의 민주 공화주의 국가'[6]로 평가하며 대만 자주독립의 기원으로 본다.
그러나 대만 민주국의 주도 세력이 대륙 출신의 청나라 관료들이었으며, 막상 일본의 대만 공격이 시작되자 며칠만에 대륙으로 피신했기 때문에 대만을 위하던 저항 주체로 보기 어렵다는 점, 그리고 불과 5개월의 단명 정부로 끝나 의미있는 활약을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평가 절하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반면 대만의 외성인이나 범람연맹처럼 중화 민족주의를 긍정하는 사람들이나 중국에서는 대만민주국이 짧게나마 대만 내 항일 주체로써 활동한 점을 높이 평가한다. 이들은 대만 민족주의자와는 달리 대만민주국의 주요 구성원이 중국 대륙을 기반으로 한 청나라 관료들이라는 점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보아 "(중화제국의 영토인) 대만을 잃지 않으려는 중화민족의 영웅적 저항"으로써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4. 역대 대총통
대수 | 이름 | 임기 |
1 |
탕징쑹 (당경숭, 唐景崧) |
1895년 5월 25일 - 1895년 6월 6일[7] |
2 |
류융푸 ( 유영복, 劉永福) |
1895년 6월 26일[8] - 1895년 10월 21일 |
[1]
전서로 民主國之寶印(민주국지보인)이라고 새겨져 있다.
[2]
굳이 대만 민주국을 영어로 직역하자면 Democratic State of Formosa 정도가 된다. 이 시기에는 타이완섬의 영어표기로 Taiwan보다 Formosa를 훨씬 많이 썼다.
[3]
오늘날 대만에서는 일본의 대만 정벌 사건을
청일전쟁(중국명 갑오전쟁)과 분리하여 을미전쟁(乙未戰爭)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4]
공식적으로는 지원하지 않았으나, 청나라 유력 관료들에 의한 개별적 지원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청나라에서 "혹시 대만민주국이 잘 되어서 일본 쫓아내면 다시 흡수하면 되고, 아님 어쩔 수 없지" 식으로 대만민주국 성립을 지원했다는 설이 있다.
[5]
약 20~30만 명 정도가 일본의 대만 점령 과정에서 대륙으로 도망쳤고, 일본이 1897년까지 2년 안에 대만인의 대륙으로의 이주를 허용한 이후 6,400여 명이 추가로 대만을 떠났다. 당시 대만 인구의 약 10% 정도. 이들은 반산(半山)이라 불렸다. 일부 반산은 50여년 뒤에 대만이 중화민국에 반환된 후 대만으로 귀환해
국민정부의 대만 통치에 협력했다.
[6]
실제로는 아니다. 보르네오 화교들이 세운
난방공화국도 있는데 무려 1777년에 건국되어 100여 년간 존속하다가 네덜란드에 망했다. 물론 '민주'를 내건 공화국은 타이완 민주국이 처음이다. 이보다 좀 더 전에 단기간 존속햇던 에조 공화국도 이름은 공화국이지만 외국의 눈에 그렇게 보였던거고 실질적으론 에도막부 잔당이었다.
[7]
청나라로 망명하여 궐위
[8]
타이난에서 제2공화국 수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