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6 02:43:50

니벨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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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구분은 전투 및 교전 발생 일자 기준, 전투 기간은 개별 문서 확인 }}}}}}}}}
파일:21412412.jpg
날짜
1917년 4월 16일 1917년 5월 9일
장소
파일:프랑스 국기.svg 프랑스,엔 강
교전국 파일:프랑스 국기.svg 프랑스 제3공화국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독일 제국
지휘관 파일:프랑스 국기.svg 필리프 페탱
파일:프랑스 국기.svg 로베르 니벨
파일:프랑스 국기.svg 조제프 조프르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빌헬름 2세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파울 폰 힌덴부르크
결과
프랑스군의 돌파 실패, 독일 제국군의 반격 실패[1]
니벨의 보직 해임 및 페탱의 총사령관 임명
프랑스군 내 대규모 항명 사태 발생[2]
병력 파일:프랑스 국기.svg 프랑스,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보병 85만 명
전차 128대
대포 7000문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보병 48만 명
피해규모 파일:프랑스 국기.svg 프랑스 사상자 11만 8000 ~ 18만 7,000명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사상자 13만명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사상자 16만 3000명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포로 1만 5천 ~ 2만 780명

1. 개요2. 1917년초 분위기3. 니벨의 공세작전안
3.1. 프랑스군의 평가
4. 생각지도 못한 문제의 발생
4.1. 독일군의 준비
5. 공세 전개와 대참사6. 공세 후7. 원인 분석8. 가상 매체 속 모습9. 여담10. 둘러보기

1. 개요

파일:external/i46.servimg.com/055_mo10.jpg

니벨 공세(Nivelle Offensive) / 2차 엔 전투(Second Battle of Aisne)는 1917년 4월 16일 엔(Aisne) 지역에서 시작된 프랑스군의 공세를 말한다. 4월 20일에 1차 공세를 중지하고 2차 공세는 프랑스 장군단과의 정치논쟁으로 무산되게 된다. 이 공세로 프랑스군은 18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고, 당시 목표였던 전선 돌파 역시 실패했다.

2. 1917년초 분위기

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달았을 1916~1917년에 협상국은 상대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놓여있었다. 동부를 지탱하던 러시아 제국 볼셰비키 혁명에 몰락하는 상황이었고 그 와중에 동부전선의 러시아군에서는 집단적인 항명 탈영이 일어나고 있었다. 영국-프랑스는 각각 집권세력의 변화가 일어났기에 장기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지도층이 성립되었다. 물론 이 시점에 오면 유럽 전선의 모든 국가의 국민 여론에 염전(厭戰) 사상이 만연한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분위기에 힘입은 서부전선의 협상국은 새로운 전세를 뒤집을 새로운 전략을 요구받고 있었다.

영국의 경우 로이드 조지 수상이 취임하면서 유럽원정군 사령관이자 참모총장인 헤이그 대장을 불신하며 관심을 중동으로 돌리는 바람에 헤이그 대장의 계획을 모두 무산시키고 프랑스군의 지휘에 협조하라는 입장을 내보였다.

그리고 서부전선의 핵심인 프랑스의 변화가 가장 컸는데 브리앙 수상이 물러나고 대신해서 알렉산드르 리보가 수상이 되었으며 국방장관 역시 폴 팽르베가 새 국방장관이 된다. 문제는 수상과 국방장관 모두가 프랑스군 총사령관 로베르 니벨(Robert Nivelle)과 사이가 무척 안 좋았다는 것이다. 덕분에 니벨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확고히하고자 단기간에 전략적 승리를 약속하며 준비한 공세의 일환에 맞춘 전략을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 될 니벨 공세의 서막이 된다.

3. 니벨의 공세작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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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벨의 공세안은 조공인 영국군이 아라(Arras)·누아용(Noyon)에서 주공에 앞서 공격을 하여 독일군의 예비전력을 흡수하고, 주공인 프랑스군은 엔(Aisne) 강을 도하하여 셰망 드 담까지 진격하여 전선을 돌파하여 독일군의 서부전선을 무너뜨리겠다는 계획이었다.

3.1. 프랑스군의 평가

총사령관 니벨은 정치인들에게 1916년 2군 사령관으로서 이동탄막사격을 활용하여 베르됭 전투에서 독일군의 공세를 좌절시킨 실적을 내세우며 이동탄막사격 전술에서 서부전선의 해답을 찾았다고 자부심을 내보였다.

따라서 이번 공세만큼은 이전과 다를 것을 정치인들에게 역설했고 계속되는 소모전에 지친 정치인들도 니벨의 자신만만한 선전에 넘어가게 된다. 특히 오랜 전쟁에 지쳐가던 전선의 병사들에게도 이것은 귀가 솔깃한 이야기였다. 당연하게도 니벨 공세가 발표된 시점은 바로 그 처참한 살육전으로 알려져 있는 베르됭 전투가 끝이 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니벨의 이러한 공세작전안에 프랑스 고위장교단은 회의적인 시각이 강했다. 예비집단군 사령관 조제프 미슐레(Joseph Micheler) 대장은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고 중부집단군 사령관 페텡 대장 역시 랭스 동쪽에 위치한 독일군 돌출 부위를 중부집단군 주도로 돌파하자는 주장을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예비집단군을 중부집단군에 편입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프랑스군 고위장교단은 니벨의 작전안에 대해서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고위장교단이 이랬으니 정치가들 역시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니벨에게 반대입장을 보였다. 결국 니벨은 공세가 실패하면 48시간 이내로 종결하겠다 하고 작전을 허가받는다.

4. 생각지도 못한 문제의 발생

이러한 프랑스 정치권의 개입과 간섭, 그리고 군부 고위층간의 파벌갈등의 본모습을 보여준 니벨 공세안이 어찌어찌 통과되긴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발생하여 공세작전에 최악의 비극을 자초하게 된다. 바로 로베르 니벨(Robert Nivelle) 자신이 이 작전에 대해서 사교클럽 등에서 말해선 안되는 것까지 떠들어댔던 것이었다.[3] 덕분에 이 소식은 당연히 빠르게 퍼졌고, 독일군은 니벨 공세에 맞춰 철저한 방어태세에 돌입했다. 이 시점에서 이미 전략적 기습의 이점은 사라졌고 최악의 결과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4.1. 독일군의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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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협상군 측으로 커다랗게 반원을 그리고 있던 누아용 돌출부를 스스로 포기하고 30㎞ 후방의 지크프리트 선(Siegfried Line:Hindenburg Line)으로 철수, 전선을 직선에 가깝도록 조정했다. 덕분에 독일군의 방어 정면은 축소됐고 여유가 생긴 13개 사단을 예비대로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철수한 지역은 초토화함으로써 전략적인 거부작전을 실시했다. 게다가 모든 교량과 도로·건물을 파괴하고, 우물을 메우는 등 급수원을 오염시켰으며, 수목은 넘어뜨려 장애물로 이용하고 각종 부비트랩을 설치했다.

사전에 준비된 지크프리트 선에선 철근 콘크리트 진지와 철조망· 지뢰 등을 매설하고 기관총이 숨겨져 있는 반 요새화한 진지를 구축한데다가 철저한 화력유도점까지 확보했다.

솜 전투 때와 마찬가지로 독일군은 준비가 완료된 상태에서 적군을 맞이하기만 하면 되었다.

5. 공세 전개와 대참사

독일군의 이러한 준비를 프랑스군이 모를리 없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북부집단군 사령관 데스페레 대장은 철수하고 있는 독일군을 공격하여 공세의 시점으로 삼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니벨은 독일군이 자신의 계획을 알 리 없다고 자만심에 빠져서 이를 거절, 성공 가능성을 완전히 날려버리게 된다. 결국 니벨의 계획대로 지크프리트 선 북단의 아라스 지역에 대한 영국군의 견제공격이 실시됐고 그후 1917년 4월 16일 엔 지역에 대한 프랑스 주력부대의 대공세가 시작됐다. 40㎞의 정면에 120만 명의 대병력과 7000문의 야포전력을 집중시킴으로써 공세에 들어가게 된다.

파일:external/i184.photobucket.com/monkey_mountainAisne.jpg
"L'heure venue! Confiance! Courage! Vive la France!"
(시간이 왔다! 자신감과 용기를 가지고! 프랑스 만세!)

란 구호와 함께 공격이 시작되어 프랑스 5군과 6군은 3800문의 대포의 엄호 아래 독일군 힌덴부르크 선 엔 강 교두보 공략에 들어갔고 이때 쯤이면 프랑스군도 전차를 운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세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독일군은 말단 중대장들까지 니벨 공세의 계획을 알고 대비하고 있었기에, 1차 방어선은 극소수의 전력을 남겨 사실상 적군에게 내준 후 후방에서 안전하게 대기하고 있던 강력한 예비대로 역습을 가하겠다는 기본 전략을 수립해둔 상태였다.

덕분에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1차 방어선을 큰 희생 없이 점령했지만, 2차 방어선에 도달하자 전선이 대량살육의 현장으로 변하게 된다. 프랑스군은 독일군이 지독할 정도로 만들어둔 장애물에 막대한 출혈을 강요받으면서 진격이 계속 지체되었다. 병사들은 처음에는 무섭게 돌격하며 용맹성을 과시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시체가 산을 이루는 형국이 되면서 어마어마한 희생을 내었다.
공격의 선두에 세워졌던 세네갈 티라외르 사수들은 수천 명씩 허무하게 쓰러졌다. 비탈길은 급경사였다. 운이 좋아 철조망을 건넌다고 해도 다시 경사로를 올라가야 했다. 수류탄을 던지면 다시 우리에게 굴러 내려오는 바람에 재빨리 뒤로 돌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야 했다. 다시 올라가고 또 올라갔지만 고지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비탈 아래로는 푸른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우리는 질퍽한 내장 사이를 걸었다. 일급 살인자로 분류된 무능하고 고집 센 인간의 다리 사이에 버려진 셈이었다. 벙커에 숨은 독일 병사들은 우리가 지나가게 내버려 두었다. 뒤에서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빨래처럼 널린 전우들의 검게 변한 시체가 보였다. 들것병을 찾거나, 어머니 혹은 성모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는 병사들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총사령관이 자기들 신세가 된 모습을 보기를 바랐을 것이다. 말이 되나. 죽음 앞에서 정신이 돌아 헛소리를 하는게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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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노블 제 1차 세계대전(Putain de Guerre!) 中.}}}
단 하루만에 공세가 좌절되는 상황 속에서 약속했던 작전중지는 나오지 않은채 4일간 작전이 계속되었지만 프랑스군은 독일이 일부러 비워둔 1차 방어선에서 더는 진격하지 못하고 4월 20일 공세를 포기해야 했다. 물론 2차 공세가 준비되어있었지만 참담한 실패에 정치권의 강력한 압박으로 니벨의 2차 공세는 무산되었고, 프랑스군의 사기는 그야말로 땅바닥으로 추락했다.

사실 프랑스군과 독일군의 사상자 수만 놓고 보면 생각보다 큰 차이는 아니다. 그러나 영국군까지 합산한다면, 2배 가까운 병력 우위에도 불구하고 훨씬 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명백한 참패였다.

6. 공세 후

병사들은 장교들을 불신하다 못해 하극상과 반란이 곳곳에서 일어나는 형국이 되었다. 1916년 러시아군에서 발생한 대규모 항명과 하극상 사태가 프랑스군에서 재현된 것이었다. 게다가 병사들이 집단으로 평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까지 벌어지는 사태가 벌어졌고 명령체계가 가동되지 않는 등 그야말로 총체적인 마비가 발생했다.

프랑스군은 혼란을 수습해야 했고, 결국 아군을 하도 많이 죽여서 도살자라는 별명을 가진 샤를 망쟁 장군[4]과 로베르 니벨이 해임된다. 니벨을 대신해서 총사령관에 오른 페탱은 최악의 프랑스군 상황을 수습해야하는 위치에 오게 되면서 성공적으로 프랑스군 병사들에게 병영문화 개선과 정비 등의 사기진작과 동시에 반란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함으로써 군기와 사기를 회복하였다.

총사령관에 페탱이 임명되고 나서도 니벨은 한동안 자기 사령부에서 꼼짝하지 않다가 이후 북아프리카령 식민지군 사령관이라는 한직으로 조용히 전출되었고, 전쟁이 끝난 뒤인 1921년까지 프랑스로 돌아오지 못했다.

7. 원인 분석

역사상 가장 많은 피를 빨아 먹은 방어선(4) - 니벨 대공세. 상세한 실패 이유가 나와있다.
  • 니벨 공세의 실패에 대해 모든 책임을 니벨 한 명에게만 묻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사실 프랑스군의 파벌 싸움이 큰 몫을 한 점도 감안해야 한다. 총사령관인 니벨의 작전안에 많은 장군단이 회의적 입장을 품으면서 니벨에 대한 비난이 강화되었고, 무른 성격을 가진 니벨은 휘하 지휘관들을 리드하기보다는 그들에게 끌려다녔다. 게다가 날씨마저도 프랑스군에게 비극이었는데 12월의 눈보다 기나긴 겨울을 거쳐간 4월의 눈이 훨씬 더 큰 지장을 주는건 자명한 일이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전략적 기습에 대한 효과를 완전히 상실했다는 점이다. 정치권의 개입과 군부의 갈등으로, 작전 계획을 입안하기 위해서 총사령관이 너무 작전에 대해서 떠들어댄게 화근이었다. 덕분에 전략적 기습은 고사하고 독일군의 말단제대 지휘관들까지 적의 계획을 몽땅 다 알고 대비하는 형국이 된 것이 프랑스군 지휘부가 저지른 크나큰 실수였다. 덕분에 용감하게 싸우던 프랑스군 병사들만 대량으로 독일군에게 학살에 가까운 살육을 당해야했다.
  • 주공인 프랑스군을 지원하며 서쪽에서 동남쪽으로 진격하던 영국군은 공세를 부분이나마 성공시키며 독일군을 밀어내는데 성공했으나 위에서 보시다시피 애초부터 조공으로 짤짤이만 넣는 역할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큰 역할을 할 수도 없었으며, 그나마 진격한 영토도 나중에 독일군의 공세 때문에 버려두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 끝으로 니벨 자신이 너무 많은 것을 약속하여 기대를 지나치게 모은 것도 문제다. 니벨은 결정적인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지만 그 말과 달리 공세는 극심한 피해를 내면서도 초라한 성과를 내고 끝났다. 사실 이 피해는 당시 프랑스군의 다른 전투와 비교하면 평범한 수준이지만, 이미 베르됭 전투 등으로 기진맥진한 프랑스 병사들은 기대한 공세마저 실패하자 모랄빵이 터져버렸다.

8. 가상 매체 속 모습

파일:external/3.bp.blogspot.com/Valiant-Hearts-08.jpg

발리언트 하츠: 더 그레이트 워의 최종 스테이지로 등장한다. 상당한 난이도와 동시에 어마어마한 살육의 현장[5]과 더 이상 암울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에밀과 함께 진격하다가 한 명씩 죽어가는 동료 병사들, 그리고 이런 시궁창스러운 상황에서 돌격하라며 권총으로 협박하는 장교까지... 그동안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에밀은 결국 장교를 삽으로 때려 죽일 정도로 마지막 이성을 놓고 만다. 실제 역사대로 전역의 병사들이 항명과 하극상을 하는 사태가 해당 챕터 말미에서 그대로 표현되었고, 이후 작전 중단과 동시에 에밀은 군사재판을 통해 처형당한다.

파일:니벨의 밤.jpg
배틀필드 1에서 니벨의 밤이라는 이름의 맵으로 등장했다. 각 진영 본진 앞의 두 거점에 길게 깔린 참호와 그 앞에 펼쳐진 무인지대에는 철조망, 포탄구멍, 진흙탕이 어두운 전장과 어우러져 현장감이 아주 뛰어나다. 설상가상, 야간이라는 특성상 프랑스군의 푸른 군복이 독일군의 색바랜 검은 군복보다 훨씬 잘 보여서 총 맞고 눕기 딱 좋다.

9. 여담

한국 웹상에는 작전개시 24시간만에 프랑스군 10만이 전사했다는 괴설이 퍼졌지만 사실이 아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부상자와 실종자까지 포함해 최소 20만의 프랑스군이 하루만에 무력화되었단 이야기인데 정말 그랬다면 프랑스가 승전하는 게 아니라 패전했을 것이다.

1919년 장 드 피에르푀(Jean de Pierrefeu)의 저서에 따르면 1917년 4월 16일부터 25일까지 발생한 프랑스군 피해가 11만 8천명이고 그 중 전사자는 3만 3천명이다. 이것은 부상치사 5천명도 합산한 것이다. 2005년 로버트 도티(Robert Allen Doughty)의 저서도 같은 기간 프랑스군 피해를 13만 4천명으로 추산하고 그 중 전사자는 3만명으로 잡는다. 하루만에 전사자 10만은 2차 대전 당시 소련 붉은 군대 중국 국민혁명군도 입은 적 없는 피해다.

영화 1917에서 공세 직전 명령서의 전달 덕에 독일군의 함정에 빠지지 않은 영국군 2대대는, 실제 역사에서는 영화 시점으로부터 불과 9일 후에 벌어진 이 공세에도 참여하게 되어 큰 희생을 당하고 말았다. 해당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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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문위키 니벨 공세 항목에선 indecisive라 나와있으며, 독일군이 프랑스군의 돌파를 저지하긴 했으나 반격전으로 슈맹데담 지역을 탈환하는 것도 실패했다. 베르됭 전투가 프랑스군의 승리로 여겨지는 이유는 베르됭 수비 성공도 있지만 독일군에게 빼앗긴 지역 상당수를 탈환한 것도 있다. [2] 이 사건으로 프랑스군의 명령체계가 일시적으로 마비되었고, 이후 주모자 23명이 처형되었다. [3] 굳이 니벨의 행동을 변호해보자면 무리한 공세 계획의 입안 등으로 행정부와의 사이가 극도로 나빠진 뒤였고, 이 공세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정치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동시에 그 당시에는 군사기밀의 개념이 명확하지 않았던 점도 감안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1916년 솜 전투에서 그 문제로 실패를 당해놓고도 같은 실수를, 그것도 태연하게 했다는건 큰 문제였다. [4] 베르됭 전투에서 아무런 준비나 작전도 없이 요새 앞으로 무조건 돌격을 지시하여 일주일만에 1개 사단을 말아먹은 개막장의 끝을 보여준 인물이다. [5] 산처럼 쌓인 시체를 방패로 삼는 건 기본, 아예 지형 삼아 다닐 정도의 마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