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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시대| 메이지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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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 구로다 기요타카 | 야마가타 아리토모 | 마쓰카타 마사요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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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 마쓰카타 마사요시 | 이토 히로부미 | 오쿠마 시게노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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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가타 아리토모 | 이토 히로부미 | 가쓰라 다로 | 사이온지 긴모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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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라 다로 | 사이온지 긴모치 | |||
[[다이쇼 시대| 다이쇼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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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온지 긴모치 | 가쓰라 다로 | 야마모토 곤노효에 | 오쿠마 시게노부 | |
<rowcolor=#C3C965> 제18대 | 제19대 | 제20대 | 제21대 | |
데라우치 마사타케 | 하라 다카시 | 다카하시 고레키요 | 가토 도모사부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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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곤노효에 | 기요우라 게이고 | 가토 다카아키 | 와카쓰키 레이지로 | |
[[쇼와 시대| 쇼와 시대
전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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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카쓰키 레이지로 | 다나카 기이치 | 하마구치 오사치 | 와카쓰키 레이지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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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카이 쓰요시 | 사이토 마코토 | 오카다 게이스케 | 히로타 고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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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 센주로 | 고노에 후미마로 | |||
[[쇼와 시대| 쇼와 시대
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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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C3C965> 제34대 | 제35대 | 제36대 | 제37대 | |
고노에 후미마로 | 히라누마 기이치로 | 아베 노부유키 | 요나이 미쓰마사 | |
<rowcolor=#C3C965> 제38·39대 | 제40대 | 제41대 | 제42대 | |
고노에 후미마로 | 도조 히데키 | 고이소 구니아키 | 스즈키 간타로 | |
[[쇼와 시대| 쇼와 시대
전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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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C3C965> 제43대 | 제44대 | 제45대 | 제46대 | |
시데하라 기주로 | 요시다 시게루 | 가타야마 데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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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다 히토시 | 요시다 시게루 | 하토야마 이치로 | 이시바시 단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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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다케오 | 후쿠다 다케오 | 오히라 마사요시 | 스즈키 젠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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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소네 야스히로 | 다케시타 노보루 | |||
[[헤이세이 시대| 헤이세이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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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C3C965> 제74대 | 제75대 | 제76·77대 | 제78대 | |
다케시타 노보루 | 우노 소스케 | 가이후 도시키 | 미야자와 기이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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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부치 게이조 | 모리 요시로 | 고이즈미 준이치로 | 아베 신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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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다 야스오 | 아소 다로 | 하토야마 유키오 | 간 나오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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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누마 기이치로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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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제35대 내각총리대신
히라누마 기이치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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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 1867년 9월 28일 | ||
미마사카국 도마타군 미나미신자 (現 오카야마현 츠야마시 미나미신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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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2년 8월 22일 (향년 84세) | ||
도쿄도 | |||
재임기간 | 제35대 내각총리대신 | ||
1939년 1월 5일 ~ 1939년 8월 30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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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부모님 | 히라누마 신 (부친) | |
형제 | 히라누마 요시로 (형) | ||
친인척 | 히라누마 다케오 (양자 겸 외종증손자) | ||
학력 |
제국대학 법과대학 (영국법학 / 학사) 문부성 법학박사[1] |
||
작위 | 남작 | ||
정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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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
대심원 검사국 검사 제8대 대심원 검사총장 제11대 대심원장 제27대 사법대신 귀족원 의원 제2대 니혼대학 총장 초대 다이토분카대학 총장 제11대 추밀원 부의장 제62대 내무대신 제17·21대 추밀원 의장 제35대 내각총리대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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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제국의 법조인 출신 정치인. 제35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다.2. 생애
1867년에 오카야마에서 하급 사무라이 히라누마 신의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1872년에 도쿄로 상경하여 영어, 한문, 산술을 공부한 후 1878년 도쿄대학 예비학부[2]에 입학했고, 1888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3] 졸업 후에는 사법성으로 진출하여 출세가도를 타기 시작했다. 1908년 형법개정으로 설치된 범죄자이동식별법 조직회의 멤버가 되어 히라누마는 자신의 보고서로 지문에 의한 범죄인 등록제를 추진했다. 그러다가 1910년 덴노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하자 히라누마는 검사로서 고토쿠 슈스이 등 피고들에 대한 사형을 구형했다. 1912년부터 1921년까지 3대에 걸쳐 무려 9년간 일본 검사총장을 역임했으며 재임 중 지멘스 사건을 수사하기도 하였다.법조인 시절 그는 반체제사건이나 비리 사건 등을 주로 수사하며 명성을 얻었고, 이 덕분에 사법부에 입각한다. 이후 1913년, 사법대신 마츠무로 이타츠와 손잡고 사법성, 특히 법원과 검찰에 대한 대규모 숙청을 단행, 수백명의 판사, 검사들을 강제로 퇴직시키고나 휴직시킨 후 대규모 인사이동을 발령함으로서 사실상 검찰을 장악했고, 또한 1921년 대심원장이 되자 법원조직법을 개정해 검찰총장의 지위를 사법대신 수준으로 높게 끌어올리거나 기소편의주의를 도입하는 등, 검찰 권력을 크게 확대했다. 1923년 관동 대지진 이후 후일 치안유지법으로 정립될 치안 유지 규칙령을 발포함으로서 검찰 내 공안검사 라인이 득세하게 된다.
그는 이른바 관념우파라고 하는 국수주의계 보수주의 일파[4]의 수장으로서 사법계와 추밀원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고관들만을 상대로 한 그의 정치활동은 전국민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는 하마구치 내각과 제2차 와카쓰키 내각[5],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를 맹렬히 비난해서 이들의 반감을 샀고 특히 차기 수상후보를 점찍을 힘이 있었던 사이온지의 진노를 크게 산 까닭에 정당정치가 붕괴한 후에도 수상후보가 되지 못한 채 추밀원 부의장에 머물러야 했다.
아직 추밀원 부의장이던 1930년대 초, 5.15 사건으로 인해 이누카이 총리가 암살당하고 사이온지, 쇼와 천황의 뜻에 따라 해군 출신인 사이토 마코토가 총리가 되자, 히라누마는 사이온지의 정계 영향력을 배제시키고 그가 이끌던 입헌정우회를 박살낼 목적으로 당시 유명했던 테이진(帝人)이라는 합성 섬유 회사가 내각을 비롯한 정계에 뇌물수수를 했다는 일명 테이진 사건(帝人事件)을 조작, 검찰에 국책수사를 하도록 압력을 넣음으로서 이를 공안사건으로 확대했고, 결국 사이토 내각을 붕괴시키는데 성공한다.
이로 인해 사이온지가 정치 일선에서 후퇴하자 드디어 추밀원 의장이 되는데 성공했고, 이때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정치인으로서의 행보를 밟는다. 우선 국본사를 해체함으로서 자신이 파시스트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친영미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다. 히라누마가 총리가 될 수 있었던건 이 덕분이었다.
35대 총리 취임 후 |
이어 그는 대외정책에 골몰했다. 중일전쟁 문제에 대해 그는 왕징웨이 정권을 성립시켜 국민정부를 분열시킴으로서 전쟁을 막고 중국에 영향력을 투사하고자 했으나, 이것이 실패하면서 평화 교섭의 가능성이 물건너 가버리고 만다.
또 대 서방문제에 있어서, 당시 독일은 일본과 정식적인 군사동맹을 맺으려고 계속해서 러브레터를 보내고 있었고, 히라누마는 군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영미와의 대결구도로 흘러가는 것만은 피하고자 이를 유보했으나 독일과의 대소공조만은 계속 유지하려고 했는데, 이것에 불만을 품은 군부는 천진에서 일어난 한간 암살사건을 빌미로 톈진 조계를 봉쇄하는 이른바 톈진 사건을 꾸며내어 영미를 자극하는 등의 공작을 펼쳤고, 히라누마는 이후 종전까지 군부와 혁신우익의 암살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아무튼 이런 까닭에 독일과 소련이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자 히라누마의 외교 정책은 완전히 붕괴하였다. 그간 일본과 군사동맹을 체결하려고 접근해왔던 나치 독일이 갑자기 일본의 제일 적국인 공산주의 소련과 서로 침략하지 않겠다는 독소 불가침조약 발표를 해버리자 히라누마는 충격을 받았고 그 유명한 구주천지 복잡괴기, 즉 "유럽 천지가 복잡괴기하게 되어 신정세가 생겨났기 때문에 이를 감안하여 기존 정책을 버리고 다시 새로운 정책수립을 할 필요가 생겼다"는 등의 입장을 밝히면서 내각총사퇴를 하기에 이른다. 마침 같은 시기 할힌골 전투에서 일본군이 소련군에게 패배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발려버렸다. 그래도 사임 후에도 종전까지 중신으로서 일본의 정책 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40년 하순, 고노에 후미마로는 신체제운동과 일국일당운동을 주도하며 화려하게 총리에 복귀, 대정익찬회를 설립해 잘나가나 했지만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자들인 사회대중당 출신들을 대거 끌어들인 일이나 국가자본주의 노선을 견지해야 하는 당시 일본의 현실적인 상황 및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주장하는 신체제운동 지지자들의 이상 간의 갈등, 지지부진해져 가는 중일전쟁 등의 이유로 대정익찬회가 점점 힘을 일어가자, 히라누마는 중일전쟁의 뻘짓으로 인해 다소 힘을 되찾은 황도파와 함께 신체제운동 공격에 나섰고 결국 고노에가 히라누마와 황도파의 거수 야나가와 헤이스케를 입각시키며 사실상 항복을 선언한다.
히라누마는 내각에 입각과 동시에 내각의 다른 신체제운동 지지자들을 싸그리 정권에서 내쫒았고, 신체제운동에 호의적이던 관료들을 압박해 사실상 휴직시켰으며, 1938년 게이힌 그룹[7] 사건 당시 주범이었던 시바 히로시에게 관료들 중 인민전선[8]에 가담한 이가 있다는 실토를 받아내 그 대상이 된 법원 내 관료들을 대거 숙청해버렸고, 이어 사건 범위를 더 확대하여 아예 신체제운동의 경제 노선 자체를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로 몰아 그것을 기획한 기획원 관료들 다수를 사회주의 운동 가담 혐의로 체포시켰다. 이로서 정부 내의 혁신주의, 국가사회주의자들이 일망타진되었으며, 이 사건의 여파로 사회주의적인 경제정책을 주도했다는 혐의로 상공차관 기시 노부스케도 사임해야 했다. 이후 화족[9]이자 농민운동가로서 신체제 운동을 지원하던 아리마 요리야스 전 농림대신을 공직에서 반강제로 은퇴시킴으로서 신체제운동의 뿌리까지 완벽히 뽑아버리는데 성공한다.
이어 그는 친서방 성향을 이때도 그대로 견지하여, 파탄 일보 직전까지 간 대미관계를 개선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친독일 성향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 친독 성향을 견지한 마츠오카 요스케 외무대신과 갈등을 빚자, 고노에를 움직여 개각을 단행, 마츠오카를 내각에서 쫒아내 버리고는 자신이 내각 참사관 겸 내무대신이 되었다. 이때 그는 친미 성향을 견지한 보수세력들에게 상당히 추앙받았다.
이렇듯 그가 친미 행보를 지속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혁신우익 성향 극우단체에게 총기 테러를 당해 중상을 입기도 했으나 살아남았다. 또 비록 막지는 못했지만 태평양 전쟁에도 반대했으며, 내각을 떠난다. 하지만 도조 내각 설립 이후에도 반 도조 행보를 적극적으로 보이며 자신의 파벌이 대거 위치한 내무성과 검찰에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끝내 전세가 파국으로 치달으며 도조가 사임하자 히라누마하고 요나이 미쓰마사가 고이소 구니아키를 총리로 추천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고이소가 육군을 전혀 제어하지 못하며 오히려 뻘짓을 반복하자 다른 원로들과 함께 해군과 손잡고 고이소를 실각시켰고, 자신이 원하는 이를 총리에 앉히려는 도조를 물리친 후 스즈키 간타로를 총리로 추천해 임명을 관철시켰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히로히토 천황의 비공식적인 자문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이를 중신(重臣)[10]이라고 부른다 . 1945년 4월 다시 추밀원의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패전 직전 항복을 결의한 어전회의에서도 중신이자 추밀원 의장자격으로 참여해서 '국체수호가 보장되지 않으면 항복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11] 궁성사건 당시 반란군에 의해 사택이 불타기도 했다. 이유는 어처구니없게도 친영미파라는 것. 패전 이후 도쿄 전범 재판에서 히라누마는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그러나 1952년에 질병으로 가석방되었고 병이 깊어져서 가석방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망하였다. 향년 85세. 참고로 그의 위패는 1978년에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자민당 의원인[12] 히라누마 다케오가 그의 손자인데, 친손자는 아니고 양자이다. 히라누마 기이치로는 평생 독신이었기 때문에 직계자손이 없다. 실제 혈통은 형 유시로의 손녀 세쓰코의 아들이다.
참고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항복할 것인지의 문제에 대해 상당히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하며 여러번 찬반을 번복한 덕분에, 히로히토 천황 사후 공개된 기록에 따르면 히로히토 천황은 그를 상당히 싫어했다고 한다.
3. 매체에서
4. 기타
- 파시즘을 서양 사상이라고 거부한 양반 답게, "유불(儒彿)[15]은 선각자가 만들어왔으므로, 이로 인해 해를 입는 일은 없다. 서양 사상은 아직 순화되지 않았다."는 말을 한 바 있다. 관념우파의 세계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라 하겠다.
- NHK 회장을 역임한 언론인 아베 신노스케(阿部眞之助)는 그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사실상 그의 성향을 정확히 꼬집어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파시즘은 실행이 생명인데 히라누마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머니 히라누마는 파쇼가 아니다'라고 비꼬는 부분이 인상깊다.
광풍과도 같은 우익 진영 내에, 신관(神官)과도 같은 그의 모습이 보였다간 사라지고, 사라지다간 나타나곤 한다. 오른손에 국체라는 제구(祭具)를 들고, 왼손에는 국수(國粹)라는 검을 잡고 묵묵히 앉아 있다. 이것이 문제의 인물 히라누마다. 태어나 60년간 축첩이 없다. 아니 첩에 대해서는 보장할 수 없다. 교우도 적고, 진중히 세월을 보내왔다. 만약 천하태평 시절이라면 정원 구석에 놓고는 잊어버리고 마는 장독 뚜껑 누르는 돌처럼 세상의 주목을 끌지 못하고 일생을 마쳤을지도 모른다. 히라누마는 사법대신으로서, 1년간 재직한 외에는 자발적으로 정계에 데뷔한 일이 없는, 낡은 신인이다. 그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미지수다. 그의 입버릇인 국체정신은 도덕준담의 범주에 머물러 있고, 정치 이론의 영역에 들지 못한다. 정치는 방책(方策)이며 방책의 실행이다. 히라누마에게 어떤 방책이 있는지 아무도 묻지 않는다. 그도 말하지 않는다. 히라누마는 ”파쇼는 아니다” 라고 스스로 변명한다. 파쇼는 다른 나라의 정치가 아니냐는 것이다. 번잡한 생활에서 먼지 하나 남기지 않는 결벽이 그의 신경질적 성격을 말해 준다. 실행제일주의의 파시즘과, 신경질은 인연이 멀다. 따라서 그는 파쇼가 아니다. 그의 강점은 군부와 관계가 만점이라는 점이다. 약점은 민중과 거의 절대로 교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금동서의 역사를 봐도 민중과 교섭하지 않는 정치인이 존재한 예가 없다. 만약 있다 해도 영속하지 않는다.
[1]
옛날 일본의 박사 학위는 대학이 아니라 문부성에서 수여했었다.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한 것은 1920년부터다. 그래서 히라누마는 일본 최초의 박사 출신 총리다.
[2]
1886년 '제국대학'으로 개칭 당시 제1고등학교로 분리되었으나 1949년 신제 도쿄대학에 재통합되었다.
[3]
현 도쿄대학은 도쿄대학이라는 이름으로 개교했다. 이 개교 당시의 도쿄대학을 구제 도쿄대학, 현재를 신제 도쿄대학으로 구별해 부른다. 도쿄대학은 1886년 제국대학으로 개칭되었으나 1897년
교토제국대학이 개교하자 제국대학 간 구별을 위해 도쿄제국대학으로 또 한 번 개칭되었다. 그러나 종전 후인 1947년 제국대학령이 폐지되어 식민지를 제외한 각지의 제국대학들은 '제국'이 삭제되었다. 그리고 2년 뒤에 구제고등학교들을 각각 통합하여 모두 신제대학으로 개편되었다. 히라누마가 졸업할 당시는 도쿄제국대학으로의 개칭 전이니 제국대학이라는 이름이었다.
[4]
"
파시즘 그거 유럽 놈들 사상 아니냐? 우리는 우리 식으로 혁신을 해야하고 파시즘은 배격대상이다."라고 주장하던 양반들이다.
일본군 육군의 황도파와 많이 연루되었다. 소련을 일본의 제일 위협으로 본 황도파와 사회주의를 불구대천원수로 취급하던 관념우파의 쿵짝이 잘 맞아떨어진 것으로 이와 반대로 통제파와 혁신우익들은 소련의 통제경제를 선망하거나 적어도 연구의 대상으로 보았다.
[5]
제2차 와카쓰키 내각과 하마구치 내각은
입헌민정당이 집권 여당이던 온건파 민정 내각인데,
하마구치 오사치,
와카쓰키 레이지로 둘 다 입헌민정당의 총재를 역임했다.
[6]
사실, 추밀원 부의장으로 오래 재직하였고, 전임자였던 이치키 키토쿠로가 워낙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히라누마의 헌법관이 천황주권론자인데다, 극렬 파시스트였기 때문에 추밀원 의장직을 계승하지 못했다. 의장이 된 것은 파시스트 단체인 국본사를 떠난 뒤였고, 그나마도 히로히토 천황에게 자신은 파시스트가 아니라고 맹세를 한 다음에야 가능했다.
[7]
도쿄 주변을 중심으로 하는 게이힌 공업지대의 노동자들이 시바 히로시의 주도 하에 게이힌 그룹이라는 연구회를 결성한 사건
[8]
1937년 일어나
사회대중당 내 좌파를 일망타진해버린 인민전선 사건을 말한다
[9]
작위는
백작이다.
[10]
과거에는 원로(겐로)라 부르는 유신과
이토 히로부미,
가쓰라 다로,
사이온지 긴모치처럼
메이지 유신 이후 총리를 지낸 사람들이 천황을 보좌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고령으로 점점 세상을 떠나자 천황은 사이온지에게 원로의 추가지명을 위한 추천을 부탁했다. 그러나 사이온지가 '더 이상 원로는 필요없습니다.'라면서 거절하였고, 사이온지 사후에는 히라누마와 같이 총리나 추밀원의장 등을 역임한 전직 고관들이 중신이라는 이름으로 천황을 보좌하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중신을 맡은 인물로는 와카쓰키 레이지로,
오카다 게이스케,
히로타 고키,
고노에 후미마로,
기도 고이치(내대신부 내대신), 하라 요시미치(추밀원 의장),
요나이 미쓰마사,
아베 노부유키,
도조 히데키,
고이소 구니아키 등이 있다.
[11]
국체는 천황제를 의미한다. 당시 일본제국이 연합군의 무조건 항복 요구에 대해서, 다른 조건들은 하나씩 포기하면서도 끝까지 고집했던게 천황제였다. 이미 1945년에 접어들면 패전은 기정사실이라는 암묵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으나 끝까지 천황제에 대한 미련 때문에 결단을 못내리고 질질 끌다가 결국 소련의 참전과 핵무기를 본 뒤에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게 된다. 히라누마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천황제를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12]
중간에
일어나라 일본 →
일본유신회 →
차세대당을 거쳐 자민당으로 돌아왔다.
[13]
전 타이완 총독이다.
[14]
내각에서 사퇴한 것은 아니다. 원래 농상무대신과 사법대신을 겸임하고 있었고 사법대신만 그만둔 것.
[15]
유교와 불교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