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四姓) 『겐페이토키츠(源平藤橘)』 | |||
[ruby(源,ruby=みなもと)][ruby(氏,ruby=し)] 미나모토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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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f2170> 미나모토 가문의 가몬 | |
조릿대와 용담 笹竜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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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성 | 미나모토노 아손(源朝臣) |
본가 | 황실(皇室) |
씨조 |
천황의 황자, 왕 궁가의 왕 |
씨 최초 하사자 | 사가 천황 (嵯峨天皇) |
씨 최초 수혜자 | 미나모토노 마코토 (源 信) |
종별 | 황별(皇別) |
후예 | 사가 겐지(嵯峨源氏), 닌묘 겐지(仁明源氏), 무라카미 겐지(村上源氏), 세이와 겐지(清和源氏), 가잔 겐지(花山源氏), 우다 겐지(宇多源氏)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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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4대 본성(혼세) 중 하나로, 보통 일족을 가리키거나, 설명을 할 때는 '源氏'(원씨)라 쓰고, ' 겐지' 또는 '미나모토 우지'로 읽는다.'미나모토노'라고 된 것도 '미나모토'씨다. ' 노(の)'는 '~의'라는 뜻으로 '미나모토 가문의' 라는 뜻이 된다. 일본 고대 귀족의 이름을 쓸 때 이렇게 쓰는데, 서양식으로 따지면 독일어의 ' von',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의 'de', 이탈리아어의 'di', 영어의 'of'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타이라( 平), 후지와라(藤原), 타치바나( 橘)와 함께 4대 본성, 즉 겐페이토키츠(源平藤橘)로 칭해진다. 원래는 천황의 아들이나 손자가 신적강하할 때 주어지던 씨(우지)로,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 일족으로는 타이라와 타치바나가 있었다.
2. 기원
중국 위진남북조시대에 북위에서 선비계 황족인 탁발(拓拔)씨가 한화 정책의 일환으로 원(元)씨로 바꿀 적에 방계인 남량의 독발(禿髮)씨를 소리가 같은 '원'(源)씨로 바꾼 일을 본떠서 간무 천황의 차남이자 제52대 천황이었던 사가 천황이 아들들에게 '미나모토노 아손(아소미)'(源朝臣)을 준 일이 처음이었다.3. 역사
겐지 중에서도 일파가 나뉘어 하위로 21류파가 존재하며, 그중에서도 사가 겐지(嵯峨源氏), 세이와 겐지(清和源氏, 청화 원씨), 우다 겐지(宇多源氏), 무라카미 겐지(村上源氏) 계통이 특히 번성하여 널리 알려져 있다. 여담이지만 21류파라고는 해도, 이 중에는 천황의 자식인 친왕 중 한 명만 따로 '겐지'의 성을 얻어 분가했다가 곧바로 후손이 단절되어 사라지는 등 사실상 이름뿐이었던 분파들도 전부 포함한 숫자다.세이와 겐지 계열은 제56대 세이와 천황[1]의 자손들로, 그중에서도 카와치쿠니(河内國, 하내국)을 근거지로 삼았던 카와치 겐지(河内 源氏, 하내 원씨)의 미나모토노 요시이에, 미나모토노 요시미츠, 가마쿠라 막부를 창건한 정이대장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등이 이 계열이었으며,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가인 아시카가 가문, 에도 막부의 쇼군가인 도쿠가와 가문[2]도 카와치 겐지의 분파였다.
세이와 겐지 외의 겐지 류파 중 유명한 가문은 청화가(세이가케) 9가 중 하나인 쿠가 가문이나 무로마치 막부 당시 이세 슈고였던 키타바타케 가문[3]이 속한 무라카미 겐지(村上 源氏, 촌상 원씨), 센고쿠 시대의 유력 다이묘 가문이었던 롯가쿠씨, 아마고씨, 쿠로다씨의 시조격이었던 우다 겐지(宇多 源氏, 우다 원씨)의 사사키씨(佐々木氏)나 요리미츠 4천왕의 일원이었던 와타나베노 츠나의 후예인 와타나베씨의 원류 사가 겐지(嵯峨 源氏, 차아 원씨) 등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무가 정권 시절에도 천황의 상징성이 생각보다 강했기에 천황 가문과 연결된 일족이 아니면 고위직에 오르기는 쉽지 않았으므로 막부를 수립한 가문은 하나같이 천황가와 연관되어 있었다.
이처럼 가마쿠라 막부와 무로마치 막부를 개막한 정이대장군(세이이타이쇼군) 가문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성씨였던 만큼, 여러 실력자들이 족보 조작을 통해서 미나모토 일가임을 자칭했다. 에도 막부의 초대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도 세이와 겐지(清和源氏)의 일파인 닛타씨(新田氏)의 세라다(世良田) 도쿠가와(得川) 가문의 후손임을 자처하며 외국에 보내는 문서에는 자신들의 성을 미나모토로 표기하기도 했다. 즉 미나모토씨의 적장자= 일본 열도를 지배하는 자(쇼군가)라는 일종의 상징이 되었던 셈이다. 그래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름이 《 조선왕조실록》에는 원가강(原家康)이라고 기록된 것이었다.[4]
일족 간에 내분이 빈번했던 일본 내의 여러 가문 중에서도 가장 내분이 심했다. 특이한 점은 몰락할 때는 물론 승승장구할 때도 내분이 있었다는 것인데, 대표적으로 호겐의 난이 일어났을 때의 카와치 겐지 내 부자•형제 간의 다툼, 겐페이 전쟁 후반기에 카와치 겐지 가문이 이세 헤이시 가문(헤이케)을 몰아붙이는 시점에서도 내전이 일어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친동생인 요시츠네를 보내 자기 사촌이었던 미나모토노 요시나카(키소 요시나카)를 토벌한 사건이 있었고,[5] 나중에는 동생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까지 숙청해버렸다.[6]
애초에 겐페이 전쟁 이전, 카와치 겐지가 약해지고 이세 헤이시가 득세하게 된 것은 제4대 당주였던 미나모토노 요시타다의 암살 및 그에 연관된 잇따른 내분으로 인해 가문의 유력자들 중 상당수가 사라진 것이 그 원인이었는데, 이 모든 참극이 당주 자리를 빼앗으려던 요시타다의 숙부 신라사부로 요시미츠의 간계 때문이었다는 후대의 기록이 있다.[7] 그리고 이 요시미츠와 대립했던 인물 중 요시타다의 동생이자 요시미츠에게는 또 다른 조카인 미나모토노 요시쿠니가 있었는데 이 요시쿠니의 장남은 이후 닛타 가문의 시조가 되었고, 차남은 아시카가 가문의 시조가 되어 훗날 후손인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대에 무로마치 막부를 건립하게 된다. 그런데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있어 구스노키 마사시게와 더불어 일생의 숙적 중 하나로 꼽히는 인물이 바로 닛타 요시사다로 앞에서 언급한 요시쿠니의 장남 가문의 당주가 차남 가문 당주의 철천지 원수였다. 그리고 센고쿠 시대 미나모토 가문의 분파 후예들간의 내분을 보면 그냥 겐지일족 간의 내분이 중세부터 근대까지의 일본의 역사를 새겼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4. 분파
* 사가 겐지(嵯峨源氏)* 닌묘 겐지(仁明源氏)
* 몬토쿠 겐지(文徳源氏)
* 세이와 겐지(清和源氏)
* 셋츠 겐지(摂津源氏)[8]
* 야마토 겐지(大和源氏)[9]
* 카와치 겐지(河内源氏)[10]
* 요제이 겐지(陽成源氏)
* 고코 겐지(光孝源氏)
* 우다 겐지(宇多源氏)
* 다이고 겐지(醍醐源氏)
* 무라카미 겐지(村上源氏)
* 레이제이 겐지(冷泉源氏)
* 가잔 겐지(花山源氏)
* 산조 겐지(三条源氏)
* 고산조 겐지(後三条源氏)
* 고시라카와 겐지(後白河源氏)
* 준토쿠 겐지(順徳源氏)
* 고사가 겐지(後嵯峨源氏)
* 고후카쿠사 겐지 (後深草源氏)
* 오기마치 겐지(正親町源氏)
5. 기타
겐지와는 별개로 皆本, 皆元, 水元, 南本 등 '미나모토'라고 읽을 수 있는 다른 성씨들도 있기는 하지만 위의 원(源)씨와는 독음만 같을 뿐 한자 표기가 달라서 상관이 없다.현대 일본에도 겐지 성씨인 미나모토라는 성을 가진 사람은 많으나 앞에서 설명한 미나모토 가문의 후손은 아니다. 헤이안 시대 중기부터 가문 분할 이후에는 미나모토 본성(우지)을 쓰지 않고, 각 분가의 성씨(묘지)를 썼기 때문이다. 성씨의 본래 사용법으로 적용하면 미나모토는 성이 되고, 분가는 씨가 된다. 그리하여 이때 이후 미나모토 본성은 공문서나 족보에서나 쓰고 평상시에는 자기 가문의 씨명을 썼다. 또한 메이지 덴노 시대 평민에게 성을 주면서 자칭한 미나모토씨도 많다. 따라서 본성으로 쓰인 경우만 위에서 설명한 미나모토 가문 출신이고, 미나모토가 현대의 성씨로 쓰인 경우는 그냥 한자만 같은 평범한 미나모토 성씨라고 보면 된다.
6. 해당 성씨를 쓰는 인물
6.1. 실존인물
* 미나모토노 요리미츠 (미나모토노 라이코우)* 미나모토노 요시이에
* 미나모토노 요시미츠
* 미나모토노 요시토모
* 미나모토노 타메토모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 미나모토노 요시나카
*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 미나모토노 요리이에
* 미나모토노 사네토모
* 미나모토노 스에후사
* 미나모토노 가네마사
* 미나모토노 도시요리
* 미나모토노 토오루
* 미나모토노 시게유키
* 미나모토노 히로마사
* 미나모토노 히토시
* 미나모토노 무네유키
6.2. 가상인물
작중의 미래 시점에서 결혼으로 인해 씨를 바꾸는 경우 ☆ 표시.미나모토의 가문 출신이자 이름에 源자를 유지하는 인물들은 밑줄.
* 겐지모노가타리의 히카루 겐지
* 닌타마 란타로의 미나모토 킨고(皆本)
* 도라에몽의 미나모토 시즈카(한국버전에서의 이름: 신이슬)☆
* 디지몬 프론티어의 미나모토 코우지(한국명: 선우현),
* 루이는 토모를 부른다의 미나모토 루이
* 릴리즈 더 스파이스의 미나모토 모모
* 마법선생 네기마!의 미나모토 시즈나
* 머나먼 시공 속에서 시리즈의 미나모토노 요리히사, 미나모토노 요리타다, 미나모토노 모토미
* 미나모토군 이야기의 미나모토 테루미
* 스트로베리 패닉!의 미나모토 치카루
* 영원한 7일의 도시의 미나모토 치유키[12]
* 음양사의 미나모토노 히로마사, 미나모토노 요리미츠
* 절대가련 칠드런의 미나모토 코이치
* 정령환상기의 미나모토 리카
* 좀비 랜드 사가 시리즈의 미나모토 사쿠라
* 진심으로 날 사랑해라!!의 미나모토 요시츠네, 미나모토 타다카츠
* 창각의 아테리얼의 미나모토 아토리
* 카노콘의 미나모토 치즈루, 미나모토 타유라
* 지박소년 하나코 군의 미나모토 코우, 미나모토 테루, 미나모토 티아라
7. 미나모토가 본성인 가문
* 아시카가* 도쿠가와
* 다케다
* 사타케
* 시마즈
* 모가미
* 이마가와
* 키라
* 키타바타케
* 닛타
* 마츠다이라
* 이와쿠라
* 키소
* 아케치
* 호소카와
* 카마치
* 마츠우라
* 오타
* 토키
* 바바
* 난부
* 야마나
* 사토미
* 아사노
[1]
웅진
백제를 중흥시킨
무령왕(제25대)의 후손이었던
타카노노 니이가사의
아들로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천황의 고손자였다.
[2]
난보쿠초시대 초기 북조 무로마치 막부의 아시카가씨와 대결했던 요시노 조정, 즉 남조의 충신이었던 닛타씨의 후예를 자칭했다. 다만 족보 위조라는 설이 주된 시각이다.
[3]
나중에 오다 가문에서 챠센마루(
오다 노부카츠)를 양자로 들였다가 몰살당했다. 이후 챠센마루가
혼노지의 변 이후 오다씨로 복성하면서 멸족되었다.
[4]
때문에 조선 쪽에서도 이에야스의 조상을
원뢰조(미나모토노 요리토모)라고 기록했다.
[5]
이는 요리토모, 요시츠네 형제의 아버지인
미나모토노 요시토모가 요시나카의 아버지였던 요시카타를 죽여버린 것이 컸다. 근데 그 요시나카는 또 요리토모, 요시츠네 형제의 사촌이었다.
[6]
그러나 이렇게 친족 숙청에 매달린 나머지, 결국 외척인
호조씨(간무 헤이시의 분파)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리고 본인의 직계가 단절된 건 덤이었다.
[7]
참고로 이 양반을 가문의 시조로 모셨던 후손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센고쿠 시대 다이묘 중에서도 모략과 신의 없음으로 유명했던 그
다케다 신겐이라는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그 조상에 그 후손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다.
[8]
미나모토노 미츠나카(源満仲)의 장남 계통
[9]
미나모토노 미츠나카(源満仲)의 차남 계통
[10]
미나모토노 미츠나카(源満仲)의 삼남 계통. 흔히 미나토모/겐지 하면 이들을 일컫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11]
코우지의 쌍둥이 형. 부모가 이혼을 한 바람에 모친의 성씨인 키무라가 되어버렸지만 본래 미나모토계다.
[12]
다만 한국으로 들어올 때 성이 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