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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align=center><tablewidth=81> 하얀색 칸 |
}}} 및 🎎 표시: 생전 서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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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양력 서위일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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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0년 11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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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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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7년 8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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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력 서위일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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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로 4년 10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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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키 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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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표 9년 7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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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세노 도코타) | 후지와라노 후히토 | 🎎 후지와라노 미야코 | 🎎 후지와라노 무치마로 | |||
737년 11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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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9년 5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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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0년 9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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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2년 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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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표 9년 10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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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표칸포 원년 4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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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표호지 4년 8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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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표호지 6년 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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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후사사키 | 🎎 타치바나노 모로에 | 아가타노 이누카이노 미치요 | 🎎 후지와라노 나카마로 | |||
770년 10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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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5년 6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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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5년 10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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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8년 6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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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키 원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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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랴쿠 4년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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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랴쿠 4년 9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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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랴쿠 7년 5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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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지와라노 나가테 | 기노 모로히토 | 후지와라노 다네츠구 | 후지와라노 다비코 | |||
79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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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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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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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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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랴쿠 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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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랴쿠 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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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도 원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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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도 원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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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토노 오토츠구 | 하지노 마이모 | 후지와라노 요시츠구 | 아베노 고미나 | |||
819년 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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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3년 6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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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3년 6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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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6년 9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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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닌 9년 1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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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닌 14년 5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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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닌 14년 5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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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초 3년 7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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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소노히토 | 후지와라노 모모카와 | 후지와라노 모로아네 | 후지와라노 후유츠구 | |||
83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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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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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7년 1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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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8년 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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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초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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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초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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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와 14년 10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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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와 14년 1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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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치바나노 기요토모 | 다구치노 미치히메 | 다치바나노 나라마로 | 다치바나노 우지키미 | |||
85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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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4년 10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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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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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7년 11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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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쇼(嘉祥) 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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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주 4년 10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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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난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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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간 9년 10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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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미츠코 | 미나모토노 도키와 | 미나모토노 기요히메 | 후지와라노 요시미 | |||
86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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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2년 10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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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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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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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간 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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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간 14년 9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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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간 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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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간 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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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모토노 마코토 | 후지와라노 요시후사 | 후지와라노 나가라 | 후지와라노 오토하루 | |||
884년 3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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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4년 3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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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1년 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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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5년 9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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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교 8년 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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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교 8년 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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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표 3년 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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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표 7년 8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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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후사츠구 | 후지와라노 가즈코 | 후지와라노 모토츠네 | 미나모토노 토오루 | |||
897년 7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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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8년 1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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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년 4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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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6년 6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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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표 9년 6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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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표 9년 12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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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타이 3년 3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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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기 6년 5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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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모토노 요시아리 | 소시 여왕 | 후지와라노 다카후지 | 후지와라노 슈쿠시 | |||
9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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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9년 4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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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3년 4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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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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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기 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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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기 9년 4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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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기 13년 3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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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헤이 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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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지노 렛시 | 후지와라노 도키히라 | 미나모토노 히카루 | 후지와라노 미츠코 | |||
949년 9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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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9년 9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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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2년 1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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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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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랴쿠 3년 8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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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랴쿠 3년 8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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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와 2년 10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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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호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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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다다히라 | 미나모토노 쇼시 | 후지와라노 기시 | 후지와라노 세이시 | |||
969년 12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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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0년 6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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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2년 1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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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8년 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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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2년 10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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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로쿠 원년 5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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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로쿠 3년 11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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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겐(貞元) 2년 1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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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모로타다 | 후지와라노 사네요리 | 후지와라노 고레타다 | 후지와라노 가네미치 | |||
98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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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9년 8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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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2년 7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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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3년 6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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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나 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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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엔 3년 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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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랴쿠 3년 6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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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랴쿠 4년 5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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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도키히메 | 후지와라노 요리타다 | 후지와라노 다메미츠 |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 |||
993년 8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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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5년 6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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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5년 6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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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5년 9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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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랴쿠 4년 7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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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토쿠 원년 5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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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토쿠 원년 5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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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2년 8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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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모토노 마사자네 | 후지와라노 미치카네 | 미나모토노 시게노부 | 후지와라노 기시 | |||
1029년 1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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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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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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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5년 1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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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겐(長元) 2년 10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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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큐 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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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큐 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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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호 2년 10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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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긴스에 | 후지와라노 요시노부 | 후지와라노 시시 | 후지와라노 노리미치 | |||
(서기·양력 서위일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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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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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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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6년 11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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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력 서위일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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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호 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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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쇼(嘉承)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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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안 2년 10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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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요시나가 | 후지와라노 아키후사 | 후지와라노 사네스에 | 후지와라노 나가자네 | |||
1146년 11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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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6년 9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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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8년 7월
|
116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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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안 2년 10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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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만 2년 8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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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난 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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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난 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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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나모토노 마사코 | 고노에 모토자네 | 다이라노 도키노부 | 후지와라노 유시 | |||
1177년 8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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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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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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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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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쇼 원년 8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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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큐 원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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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큐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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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지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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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요리나가 | 후지와라노 규시 | 다이라노 지카노리 | 미나모토노 미치무네 | |||
1617년 4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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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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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2년 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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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1년 7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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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나 3년 3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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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에이 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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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에이 9년 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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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안 4년 5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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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 | 사이고노츠보네 | 도쿠가와 히데타다 | 도쿠가와 이에미츠 | |||
1680년 6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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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9년 3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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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9년 10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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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2년 1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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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호 8년 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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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에이 6년 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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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에이 6년 9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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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토쿠 2년 11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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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츠나 | 도쿠가와 츠나요시 | 도쿠가와 츠나시게 | 도쿠가와 이에노부 | |||
1716년 7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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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2년 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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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1년 8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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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6년 10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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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토쿠 6년 5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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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레키 2년 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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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레키 11년 7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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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메이 6년 9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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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츠구 | 도쿠가와 요시무네 | 도쿠가와 이에시게 | 도쿠가와 이에하루 | |||
1841년 4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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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 8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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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9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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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년 8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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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포 12년 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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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이 원년 7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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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이 6년 8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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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세이 5년 7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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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나리 | 도쿠가와 이에모토 | 도쿠가와 이에요시 | 도쿠가와 이에사다 | |||
1866년 8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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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 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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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8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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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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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오 2년 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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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13년 동월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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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15년 동월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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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18년 동월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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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모치 | 구스노키 마사시게 | 닛타 요시사다 | 이와쿠라 도모미 | |||
1891년 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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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3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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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9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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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1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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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24년 동월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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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31년 동월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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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32년 동월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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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33년 동월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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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조 사네토미 | 와케노 키요마로 | 산조 사네츠무 | 도쿠가와 미츠쿠니 | |||
1901년 5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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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5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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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6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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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3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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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34년 동월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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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34년 동월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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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36년 동월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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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37년 동월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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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나리아키라 | 모리 다카치카 | 도쿠가와 나리아키 | 고노에 다다히로 | |||
1908년 4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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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9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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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8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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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1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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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41년 동월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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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41년 동월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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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4년 동월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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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6년 동월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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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모토나리 |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 도요토미 히데요시 | 오다 노부나가 | }}}}}}}}}}}} |
닛타 가문의 가몬인 닛타 인양문(新田一つ引き).[1]
1. 개요
[ruby(新,ruby=にっ)][ruby(田,ruby=た)][ruby(義,ruby=よし)][ruby(貞,ruby=さだ)]1301년[2] ~ 1338년 8월 17일
일본 가마쿠라 막부 말기의 고케닌이며 남북조시대의 무장으로 실명은 ' 미나모토 노 요시사다'([ruby(源,ruby=みなもとノ)][ruby(義,ruby=よし)][ruby(貞,ruby=さだ)])다.
카와치 겐지의 일문으로 고즈케국에 자리잡은 닛타 가문 종가의 제8대 당주였고 메이지 유신 후인 1882년 8월 7일 정1위(正一位)로 추증되었다. 도쿠가와씨가 지족(支族) 세라다씨에서 비롯했다고 족보를 위조했다.
2. 세계(世系)
시조는 세이와 덴노의 손자고 사다즈미노미코([ruby(貞,ruby=さだ)][ruby(純,ruby=ずみ)][ruby(親王,ruby=ノみこ)])의 아들인 진수부장군 미나모토노 츠네모토([ruby(源,ruby=みなもとノ)][ruby(經,ruby=つね)][ruby(基,ruby=もと)])로 그의 14세손이고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7종형(16촌)이다.미나모토노 츠네모토 → 미츠나카(滿仲) → 요리노부(賴信) → 요리요시(賴義) → 요시이에(義家) → 요시쿠니(義國) → 요시시게(義重) → 닛타(新田) 요시카네(義兼)[3] → 요시후사(義房) → 마사요시(政義) → 마사우지(政氏) → 모토우지(基氏) → 토모우지(朝氏) → 요시사다(義貞)
3. 생애
닛타 가문은 카와치 겐지의 3대 당주로 하치만타로라 불리며 도고쿠 무사들의 숭앙을 받았던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의 넷째 아들 미나모토노 요시쿠니의 서장자 닛타 요시시게(新田義重)를 시조로 하며 닛타 장원(현 군마 현 오타 시 부근)에 터를 잡고 살았지만 닛타 요시사다 때에는 닛타 가문의 본가 영지는 닛타 장원 60 마을안 겨우 10여 마을 이내에 지나지 않았고, 요시사다 자신도 이렇다 할 관위도 관직도 없이 눈길 한번 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분포 2년 ( 1318년) 음력 10월 요시사다의 토지 문서에 매주(買主)로써 요시사다의 이름이 사다요시(貞義)로 잘못 표기되었는데 이는 가마쿠라 막부 내에서의 닛타 본가의 지위가 낮았음을 알려준다.[4]요시사다의 장자 닛타 요시아키의 생모의 출자를 안도 가문으로 적은 사료가 있는데 싯켄 호조 가문의 유력가신 안도 세이슈의 딸이라는 설이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몰락한 무사 가문인 닛타 본가가 싯켄 호조 가문의 가신 안도 가문의 딸을 맞이한 것이 된다.[5] 당시 호조 가문은 시모쓰키 소동으로 고즈케 국의 슈고 아다치 가문을 멸망시키고 고즈케 지역에 호조 가문의 영향력을 강화시켰는데, 요시사다가 호조 가문의 가신과 인척이 된 것은 권력 밖으로 밀려 쇠퇴해가는 닛타 본가를 다시 세우려는 아버지 닛타 도모우지와 함께 요시사다의 눈물겨운 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6]
4. 거병
겐코 원년( 1331년)부터 겐코의 변에서 닛타 요시사다는 가마쿠라 막부에 속했고 가와치 국에서 거병한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지하야 성 전투에 참가하였지만 곧 병을 이유로 무단으로 자신의 영지인 닛타 장원으로 돌아갔다. 이 이유 중 하나는 닛타 장원에 대한 막부측의 과도한 군비 요구와 강압적 집행이었다고 하며, 이때의 일은 닛타 요시사다가 거병한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고 사료된다. 《태평기》와 《매송론》에서는 병을 핑계로 닛타 장원에 숨어 있던 요시사다가 닛타 장원에 조사하러 온 막부의 징세사 가네자와 이즈모노스케[7]와 구로자와 히코시로를 포박해 가네자와 이즈모노스케는 유폐시키고 구로자와 히코시로를 살해한 후, 거병을 결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겐코의 변에서 막부군에 속해 출병하던 중 모리요시 신노(護良親王)[8]으로부터 호조 가문을 타도하라는 밀명을 받았다는 설도 있다.5. 겐무 신정
겐무 신정에서 닛타 요시사다는 가마쿠라 공격의 공을 인정받아 좌병위독에 임명되어, 교토 경비관아의 수장이 되었다.1335년 음력 11월, 다카우지는 닛타 요시사다가 간신이라며 덴노에게 " 현기증 난단 말이예요. 요시사다 토벌령 빨리 좀 내려주세요"라고 요청했으나 다카우지에게 쌓일대로 쌓인 게 많았던 고다이고 덴노는 이를 씹고 오히려 요시사다에게 다카우지를 토벌하라는 칙령을 내려버린다. 교토에서 요시사다는 다카요시 친왕을 내세워 도카이도를 통해 가마쿠라로 향했고, 동생 와키야 요시스케와 함께 야하기 강 전투(현 오카자키시), 데고시가와라 전투(현 시즈오카시 스루가 구)에서 아시카가 다다요시(足利直義)[12], 고노 모로야스 군을 격파했다.
급해진 다카우지는 모든 조정관직에서 물러나겠다고 하면서 자신을 사면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당연히 덴노는 이를 씹었고, 결국 다카우지는 덴노 정권에 대항해 궐기를 공식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 해 12월 요시사다는 가마쿠라에서 군을 이끌고 온 다카우지에게 하코네 · 다케노시타 전투에서 패해 교토로 도주했다. 이듬해인 1336년 1월에 다카우지는 교토에 입성했고 고다이고 덴노는 히에이산으로 도망쳤다.
6. 호쿠리쿠에서의 말년과 최후
미나토가와 강 전투 후 히에이 산으로 도망친 남조군은 아시카가 군세로부터 교토를 되찾기 위해 산발적인 전투를 벌이지만, 이마저도 저지된다. 고다이고 덴노는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화의를 맺고 닛타 요시사다를 내침으로써 히에이 산에서 하산하려 하지만, 닛타 요시사다의 가신 호리구치 사다미츠가 고다이고 덴노에게 “우리 닛타 집안의 충의를 버리고 아시카가에게 항복하시겠다면 우리 일족 전원의 목을 베고 가 주소서”라며 이를 저지했다. 이에 고다이고 덴노는 츠네요시 신노에게 양위하고 그와 다카요시 신노(尊良親王)에 지휘권을 위임한 후 하산했다. 닛타 요시사다는 두 친왕과 아들 닛타 요시아키, 동생 와키야 요시스케와 함께 호쿠리쿠로 향해 에치젠 가나가사키 성에 입성하였다. 하지만, 곧 고노 모로야스,[13] 시바 다카츠네가 이끄는 아시카가 군에 포위되었다. 닛타 요시사다, 요시스케는 소마야마 산성을 탈출해, 소마야마 산성 성주 우리우 다모쓰와 함께 가나가사키 성의 포위진을 붕괴시키려 하지만, 실패한다. 엔겐 2년/겐무 4년( 1337년) 음력 3월 6일 가나가사키 성은 함락되었고, 다카요시 신노와 닛타 요시아키는 자결, 츠네요시 신노는 추포되어 교토로 호송되었다.동년 여름이 되자, 닛타 요시사다는 세를 회복한 후, 시바 다카츠네와의 사바에 전투에 승리해 에치젠 후추와 가나가사키 성을 탈환했다. 엔겐 3년/겐무 5년( 1338년) 윤 7월 아시카가 측으로 돌아선 헤이센지 승병들이 농성하는 후지시마 성을 우익 군으로 공격하게 하고, 구로마루 성에서 원군으로 가세하기 위해 후지시마 성으로 향하던 중 우연히 적군과 만나 전투를 벌였다. 불행히도 닛타 요시사다는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14] 닛타 요시사다의 목은 교토로 보내졌고, 그가 가마쿠라 막부 공격 때 노획한 세이와 겐지의 가보 히게키리(髭切)[15]도 아시카가 가문 손에 넘어 왔다고 한다.
7. 인물
7.1. 평가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맞수로 불리기는 하지만 사실 무장으로써의 능력이 과연 아시카가 다카우지나 구스노키 마사시게,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등 당대의 무장들에 비하면 뛰어난 기량을 가진 인물이었는가에 대해서는 기록이나 학자들의 해석에 따라서 논란이 있다.동시대에 남조를 주도한 기타바타케 지카후사(北畠親房)[16]가 쓴 《신황정통기》에서는 “고즈케 국에 미나모토노 요시사다라는 자가 있다. 고 가문(高氏)[17] 일가이다.”라고 아시카가 다카우지보다 격하시켜 부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또, 같은 기사는 《마스카가미(增鏡)》에도 기재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 닛타 가문의 조상은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의 셋째 아들 요시쿠니의 첫째 아들 닛타 요시시게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가마쿠라 막부 창설에 비협조적이었기 때문에 막부 성립후 미나모토노 요시쿠니 계통을 묶어 이들 가문을 이끌 기둥은 닛타 요시시게의 동생 아시카가 요시야스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카네로 보았고, 닛타 가문 뿐만 아니라 겐지(源氏) 계보를 가진 무사들에게도 관행처럼 정착되었다는 설이 있다. 실제 닛타 일가 중에서도 아시카가 가문을 무가의 도료(당주)로 인식한 자도 있었고, 야마나 가문 등은 닛타 요시사다가 거병했을 때, 아시카가 센주오(후의 아시카가 요시아키라)의 지휘권 안에 편입해 아시카가 측에 조력하였다.
7.2. 고토노 나이시
《태평기》에서는 규슈로 도주한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추토를 명받은 닛타 요시사다가 고다이고 덴노로부터 하사된 궁녀 고토노 나이시와의 이별을 애석히 여겨 추토의 시기를 놓친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다. 고토노 나이시란 궁중의 역직중 하나로 고다이고 덴노를 모신 이치조 츠네타다의 딸을 가리킨다. 연대 등으로 미루어 실재 존재유무가 의문시되어 가공의 인물로 사료된다.《태평기》에서는 덴노의 윤허를 받아 요시사다의 아내가 된 나이시를 요시사다가 애석히 여겨[18]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토벌 시기를 놓친 것으로 기술하고 있어서 황국사관에서는 충신 닛타 요시사다의 아내이면서 같은 충신 구스노키 마사시게를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나이시는 요시사다의 전사 소식을 듣고 비와호에 투신했다고 한다.[19] 혹은 교토 또는 가타타(현 오쓰 시)에서 요시사다의 제를 지냈다는 전설이 남아 있고, 그녀의 묘라고 전해지는 곳도 다소 전해져오고 있다.
7.3. 이나무라가사키의 타치
가마쿠라 막부를 공격할 때, 호조 사다나오가 수비하는 고쿠라쿠지 방면에서 결착이 나지 않고 더욱이 해안은 호조 측 선단으로 막혀있었다. 이에 닛타 요시사다는 이나무라가사키에서 황금으로 된 보검(타치)을 바다에 던져 용왕에게 기원했고, 그러자 바닷가에 썰물이 나타나 그곳으로 강행돌파하여 전투에서 승리했다라는 기술이 《태평기》 등에서 나온다. 문부성에서는 이 일을 창가로 만들어 교과서에 개재하였다.8. 동상 · 유품 · 비
- 동상은군마 현 오타시 세라다정의 도모 역사자료관 앞과 도쿄도 후추시 부바이가와라역 앞 로터리 앞에 세워져 있다.
- 유품으로는 앞서 서술한 대로 투구가 있으며 후쿠이 번주 마츠다이라 미츠미치가 세운 비가 있다. 비가 세워진 곳은 도묘지나와테 닛타 요시사다 전몰전설지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 군마현 오타시 닛타소리마치정에 있는 사찰 소리마치야쿠시(反町薬師)는 닛타 요시사다가 거병을 결의한 곳으로 〈소리마치 관터〉라는 명칭으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
후쿠이현 후쿠이시에는 닛타즈카(新田塚: 닛타 무덤)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9. 자손
무로마치 시대에 닛타 가문은 조정의 적, 역적 무리로 인식되어 토벌의 대상이 되었다.10. 대중매체에서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
100만인의 신장의 야망에서 특전무장으로 등장.
[1]
닛타 가문의 시조인 닛타 요시시게(新田義重)의 남동생 아시카가 요시야스(足利義康)의 후손이었던 아시카가 가문도 비슷한 '아시카가 인양문'(足利二つ引き)이었지만 그쪽은 3중 가로줄 문장이라서 닛타 가문의 인양문과는 꽤 차이가 난다.
[2]
1300년생이라는 설도 있다.
[3]
종형제 아시카가 요시카네와 이름이 같다.
[4]
아즈마카가미에 보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이복형으로 요시토모의 맏아들인 가마쿠라 아쿠겐타 미나모토노 요시히라의 부인인 쇼주히메(祥寿姫)에게 요리토모가 찝적거려서 우필(右筆) 후시미 히로쓰나(伏見広綱)를 시켜 연애편지를 보냈고, 쇼주히메가 받지 않자 요리토모는 다시 쇼주히메의 아버지 미나모토노 요시시게(닛타 요시시게)에게 직접 말을 넣었다. 호조 마사코의 성깔을 잘 알았던 요시시게는 대답을 못하고 모로 로쿠로(師六郎)라는 사람에게 쇼주히메를 재가시켰고, 요리토모가 이를 불쾌하게 여겨 이후 가마쿠라 막부 안에서 요시시게의 후손, 즉 닛타 씨는 두고두고 요리토모의 미움을 사서 찬밥 신세를 전전하게 되었다나... 물론 요시시게 본인이 요리토모가 거병한 뒤에도 조카나 아들, 손자 등이 요리토모의 거병에 동참한 것과 달리 요시시게 본인은 참진 요청을 무시하고 관망하다 요리토모가 간토 지방을 제압하고 가마쿠라로 들어온 12월에나 가마쿠라로 가서 요리토모를 만났고,
조큐의 난 때에도 닛타 씨 총령(당주)이 나오지 않고 그 대관(대리인)으로 세라다 씨(世良田氏)를 대신 보냈으니, 초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도 싯켄 호조 씨에게도 요시시게 자손인 닛타 씨가 가마쿠라 막부로부터 찬밥 대우 받을 이유는 충분했다. 반대로 요시시게의 일족 가운데 일찍부터 요리토모를 도와 참전했던 조카 아시카가 요시카네(足利義兼)나 아들 야마나 요시노리(山名義範), 손자 사토미 요시나리(里見義成) 등은 모두 가마쿠라 막부의 유력 고케닌으로써 대우받았다.
[5]
안도 세이슈의 일가인 안도 시게야스의 딸이라는 설도 있다.
[6]
다만 겐코 2년(
1322년) 닛타 일가의 이와마쓰 마사쓰네와 오다테 무네우지가 용수 사용 문제로 다툼이 일어났을 때 막부에 판정을 요구하였지만 요시사다의 판정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 같다고.
[7]
싯켄 호조 가문의 가신인 기 씨(紀氏)쪽 사람이라는 설이 있다.
[8]
고다이고 덴노의 황자로 무예에 뛰어났으며 출가해 승려가 되었으나 아버지가 막부 타도를 외치며 거병했을 때 환속해 아버지를 도왔다. 함께 막부를 타도했던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위험인물로 보아 경계하였으나 아버지와의 불화(정확히는 아버지의 후궁인 아노 렌시와의 불화였다)로 황위 찬탈의 혐의를 쓰고 가마쿠라에 유폐되었고, 얼마 안 가서 살해되었다. 호사가들 중에서는 황족의 대표로써 그 자신이 무력을 지니고 있었던 모리요시 신노가 덴노가 되었다면 가마쿠라 막부 타도 이후 일본의 역사가 다르게 흘러갔을지도 모른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
[9]
물론 이 센주오의 나이는 이때 세 살밖에 안 됐지만, 아시카가 집안의 적장자라는 정통성이 있었기에 '아시카가의 적장자가 왔다'는 그 자체로 주변 무사들을 모으기 충분했다.
[10]
여기서 이나무라가사키를 건너기 위해서 바다의 용왕에게 황금 보검을 바쳤더니 신기하게도 물이 빠져서 건널 수 있었다나.
[11]
막부 개설은 이 뒤의 일이지만 고다이고 천황은 이 때 다카우지가 칙명도 없이 그냥 출병해 버리자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정이대장군 직함을 내렸다.
[12]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친동생
[13]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집사였던 고노 모로나오의 동생이다.
[14]
《태평기》에서는 닛타 요시사다가 탄 말이 활에 맞아 고꾸라졌고, 왼발을 안장에서 빼려는 찰나에 미간에 활을 맞아 요시사다 스스로 자신의 목을 베었다고 적고 있다. 닛타 요시사다가 이곳에서 전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죽음에 대한 묘사는 사실로 보기 어렵고, 《
헤이케모노가타리》에서 묘사된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의 죽음에 힌트를 얻어 《태평기》의 작가가 창작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15]
헤이안 시대 미나모토노 미츠나가가 만들게 했다는
일본도로 히자마루라는 일본도와 함께 세이와 겐지 가문의 중요 보검으로 전해지고 있다. 교토의
기타노덴만구(北野天満宮)에 소장되어 있으며 중요 문화재이다. 칼의 길이는 약 81 cm이다.
[16]
기타바타케 아키이에의 아버지.
[17]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집사였던 고노 모로나오와 같은 집안이다. 덴무 천황의 먼 후손으로 알려진 다카시나(高階) 씨의 일족이라고.
[18]
사실은 나이시의 미모에 요시사다가 푹 빠져 며칠 동안이나 그녀와 잠자리를 함께 하느라고 지쳐서, 다카우지를 공격하러 갈 날짜를 놓쳤다고 보는 편이 더 적합하다...
[19]
그러나 죽지 않고 비구니가 되어 출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20]
호소이 히로시 《고대 천문이변과 사서(古代の天文異変と史書)》 깃카와고분칸 2007년
[21]
도쿠가와 가문이 정말로 닛타 일족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족보 위조라는 주장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2]
아이러니하게도 요시사다보다도 더 높은 평가를 받는 충신인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경우 후손임을 확실히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구스노키의 후손인 화족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