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16 05:59:01

오섭가

오섭가(五摂家)

1. 개요2. 역사

1. 개요

[ruby(五摂家, ruby=ごせっけ)]

한자로 오섭가(다섯 섭정가문)라고 하며 말 그대로 일본 역사에서 섭관직을 독점했던 최고위 공가 다섯 곳을 말한다. 코노에(近衛), 타카츠카사(鷹司), 쿠죠(九条), 니죠(二条), 이치죠(一条)를 말하며 후지와라 의 주류 혈통을 이었다.

섭가(摂家, 셋케), 섭관가(摂関家, 셋칸케), 집병가(執柄家, 싯베이케)라고도 한다.

오섭가로 나뉠 때부터 후지와라 은 공식문서에서만 쓰였고 일반적으로는 각 가문명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1]

공가의 정점인 오섭가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무가의 정점인 고산케(御三家, 어삼가)도 있다. 이쪽은 도쿠가와 막부의 오와리, 키슈, 미토 도쿠가와 가문을 이르던 말이며 오섭가와 달리 특정 분야의 삼대장과 비슷한 은어로 사용된다.

2. 역사

헤이안 시대에 후지와라노 요리후사가 황족 이외의 인물 중에서 최초로 섭관의 지위에 오른 이후 후지와라 가문은 대대로 외척의 지위와 섭관직을 계승하며 권력을 유지했는데 이러한 섭관정치의 절정을 상징하는 인물인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집권기 이후부터 어느새 섭관 자리는 후지와라, 그 중에서도 미치나가의 적장자 계통인 후지와라 홋케 미도류(藤原北家御堂流)가 승계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 결과 후지와라씨가 외척가문이 아니었던 고산조 천황 재위기나 미도류가 아닌 칸인류[閑院流]를 외척으로 둔 토바 천황 재위 기간에도 섭관(摂関)의 자리는 여전히 미치나가(藤原道長)의 후손인 미도류(御堂流)가 차지했으며 이는 후지와라씨의 권력이 쇠퇴하고 조정 자체가 허수아비로 전락한 무가정권 시대에도 꾸준히 유지되었다.

12세기 무렵 후지와라노 다다미치 호겐의 난 시기에 고시라카와 천황을 지지하여 대립관계이던 아버지와 동생을 누르고 가문의 실권을 획득했는데 이후 그의 세 아들들 사이의 권력싸움과 정치적 대립으로 인한 분열이 오섭가 성립의 시초가 되었다. 다다미치 사후 4남이자 실질적인 장남이었던[3] 모토자네와 그 후손들은 고노에(近衛) 가문을, 형의 요절을 계기로 실권을 잡았던 5남 모토후사와 그 후손들은 마쓰도노(松殿) 가문을, 모토후사 사후 고노에와 마쓰도노의 실각을 계기로 실권을 잡은 6남 카네자네가 구조(九条) 가문을 개창하여 후지와라 셋칸케(= 미도류. 御堂流)는 크게 3개 파벌로 나뉘었다.

이후 고노에 가문은 초대 모토자네의 증손자 대에 3대 당주의 4남 다카쓰카사 카네히라를 시조로 하는 다카쓰카사(鷹司) 가문이 분기하고 구조 가문도 초대 카네자네의 증손자 대에 3대 당주의 차남 요시자네의 니조(二条) 가문, 4남 사네츠네의 이치조(一条) 가문이 분기하면서 이 5개의 가문이 오섭가를 이루게 되었다. 반면 초기 3대 파벌 중 하나였던 5남 모토후사의 마쓰도노 가문은 모토후사와 그 아들을 끝으로 관백을 배출하지 못하고 가문의 단절이 거듭된 결과 다른 가문처럼 섭가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채 도태되어 결국 센고쿠 시대 무렵 완전히 단절되었으며 센고쿠 시대에 탄생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도요토미(豊臣) 가문은 완전 평민 출신이었던 히데요시가 고노에 사키히사의 양자로 들어가는 형태로 관백에 오를 수 있었으나 오사카 성 전투로 인해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사한 후 단절되었다.

오섭가 성립 후 관백 섭정의 자리는 이들이 독점하게 되었으며 이후 바지시장으로[4] 에도 시대에도 쇼군가나 유력 다이묘와 혼인을 맺으면서 조정 내 최고실권자이자 정실 황후의 가문으로 군림했고 18세기 모모조노 천황기의 치세에 일부 유자들이 급진 존황사상을 천황에게 강의하다가 제재된 호레키 사건에서도 섭관가가 주도적으로 존황강의 정지 및 강사 다케노우치 시키부와 이에 동조하던 젊은 중하급 공경가 출신 천황 배신들을 제재하였다. 메이지 이후 다이쇼 천황까지 이어지다가 화족제가 도입되면서 오등작 중 가장 높은 공작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만 하더라도 후지와라氏 중에서도 수장 취급인 고노에 家의 당주, 즉 후지와라氏의 당주였다. 밑으로는 청화가, 대신가, 우림가, 명가 등 여러 공경 가문이 있었으며 가문에 따라 오를수 있는 관직은 제한되어 있었다.[5][6][7]

헤이안 시대부터 천황의 황후들을 보면 대다수가 후지와라였고 그 후예인 오섭가의 가문이 각가 돌아가면서 황후를 뽑았는데 이 전통은 오랫동안 이어져서 무츠히토 요시히토의 경우를 보더라도 쇼켄 황후 데이메이 황후가 오섭가 출신이었다.

본래는 히로히토 천황의 황후도 오섭가에서 뽑으려고 했지만 당시 군부의 사정과 데이메이 황후가 본래 뽑기로 했던 오섭가가 다이쇼 천황에게 무례히 군다고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서 일본 최고(最古)의 세습친왕가[8] 후시미노미야의 분가인 구니노미야 家의 구니노미야 나가코가 고준 황후가 되었다.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친왕의 아들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의 3남 구니노미야 구니요시가 구니노미야의 이름을 이었는데 구니노미야 구니요시의 딸이 구니노미야 나가코였다. 구니노미야 구니요시는 대만에서 독립운동가 조명하 의사의 손에 죽었다.[9]

이후 오섭가 전체가 몰락하면서 과거의 특권도 모두 상실하고 그냥 일반 집안이 되었다. 현대 일본 황실에서 더 이상 오섭가 출신은 찾아볼 수 없다. 더불어 이치조가가 옛 우린케인 시조가 출신 사위를 서양자로 받아들이거나[10] 고노에가가 무가 출신인 호소카와가에서 양자를 받아들이거나[11] 다카쓰카사 가에서는 도쿠가와 가문의 방계인 오규 마쓰다이라(大給松平)가에서 양자를 받아들이는 등[12] 양자는 반드시 황족이나 같은 섭가에서 받아들인다는 오섭가의 옛 불문율도 현대에서는 유명무실해졌다.

오섭가가 다 후지와라의 자손이기는 하지만 중간에 대가 끊겨 당시의 천황이 자기의 작은 아들들을 양자로 집어넣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중간에 이치조가, 다카쓰카사가, 고노에 가는 천황가의 핏줄이 이어간 경우도 있었다. 이후 이치조와 다카쓰카사 가문은 그들의 대가 끊기자 구조 가문[13]에서 양자를 들여 다시 빼앗아 왔으나 고노에 후미마로로 유명한 고노에 가는 끝내 되찾아 오지 못했다. 사실상 후지와라의 정통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집안은 구조 가문뿐이다.

[1] 현대 일본에도 후지와라라는 성을 가진 사람은 많으나 앞에서 설명한 후지와라 가문의 후손은 아니다. 헤이안 시대 중기부터 자칭한 후지와라씨도 많았고 고셋케 분할 이후 후지와라 성을 쓰지 않고 각 분가의 성을 썼기 때문이며 메이지 시대에 평민에게 성을 주면서 후지와라 가문을 위해 일했거나 그 근방에 살았던 사람도 후지와라의 성씨를 주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김씨 다수가 신라 가야 왕실의 후손이 아닌 것과 같다. 따라서 본성으로 쓰인 경우만 위에서 설명한 진짜 후지와라 가문 출신이고 그냥 성으로 쓰인 경우는 평범한 성이라고 보면 된다. [閑院流] 미치나가의 숙부인 후지와라노 킨스에를 시조로 하는 분파로 오섭가 다음 서열인 청화가([ruby(清華家, ruby=せいがけ)])인 산조(三条), 사이온지(西園寺), 도쿠다이지(德大寺) 가문 등이 이 칸인류 계통의 가문이다. [3] 다다미치의 아들 중 위의 3명은 일찌감치 요절하여 늦둥이로 태어난 모토자네가 사실상 다다미치의 장남 포지션이었다. [4] 다만 후지와라 섭관정치도 시라카와 천황이 상황이 된 뒤 무가 세력들을 이용하여 정권을 잡게 되면서( 원정) 사실상 종식되고 한동안 상황들이 정권을 잡는 시대가 되었다가 고시라카와 상황 시대에 막부에 실권을 내줬다. 가마쿠라 막부가 무너지고(이후의 막부들에 비해서 권위가 약함)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남북조시대를 열면서 천황이 완전히 바지사장으로 전락한다. 결국 후지와라 오섭가는 헤이안 시대 대부분 기간을 누렸던 정치적 실권을 원정 이후 상실하였으나 섭관가의 지위는 메이지 유신에 이를 때까지 계속 유지한 셈이다. [5] 그런데 후지와라의 중시조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부친 가마타리가 덴지 천황에게서 하사받은 여인에게서 후히토를 낳았다고 하는데 그래서 후히토가 실제로는 덴지 천황의 아들이 아니냐는 소문이 있었다. 물론 진위여부는 불명이다. 사실이라면 후지와라도 천황가의 분가인 미나모토, 타이라, 다치바나랑 같이 천황가 출신인 셈이다.(...) [6] 다만 오섭가 중 고노에가, 다카쓰카사가, 이치조가는 에도 시대에 이르러 적남(嫡男)의 대가 끊겨 황실이나 친왕가로부터 양자를 들여 대통을 이었는데 이 세 가문을 황별섭가(皇別摂家)라고 한다. 앞서 언급한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도 실제 부계 혈통상으로는 고요제이 천황의 12대손이었다. [7] 황별섭가 가문들은 혈통이 단절되었지만 방계 쪽으로 혈통이 남아 있다. [8] 남북조 시대부터 이어져 왔다. [9] 여담으로 아사히코 친왕의 4남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친왕의 동생의 궁호를 이어받았는데 모리마사의 딸인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는 황태자비 후보로 논의되었다가 요시히토와 정명황후의 뜻에 따라 영친왕과 결혼해 이방자가 되었다. 모리마사는 황궁에서 부른다기에 황태자비인가 싶어서 기대했더니 청천벽력이었고 여기저기에서 협박전화가 걸려오는 등 고생했다는 모양. [10] 다만 혈통상으로는 고요제이 천황의 8세손이다. [11] 현 고노에가 당주 고노에 다다테루. 전 일본 총리였던 고노에 후미마로의 외손자로 후미마로의 장남 후미타카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2차대전 말 포로로 잡혀 시베리아에 억류되었다가 석방되기 얼마 전 그곳에서 41세에 죽어 이 사람이 후미타카의 양자로 입적하는 형태로 당주직을 계승했다. 참고로 이 사람의 친형이 전 일본 총리였던 호소카와 모리히로. 사족이지만 후미타카에게는 결혼하기 전 다른 여인에게서 낳은 서자(작가이자 각본가 아즈마 류메이)인 친아들이 있기는 했으나 천한 여자에게서 태어나 애당초 후계대상은 아니었다. 아즈마 류메이는 서브컬처계에서는 나름 유명했고 여러 만화가들과 친분이 있었다고 하지만 아버지의 집안과는 일체 교류가 없었다. [12] 현 다카쓰카사가 당주 다카쓰카사 나오타케(鷹司尚武). 원래는 도쿠가와 가문의 방계인 오규 마쓰다이라 자작가문의 구성원인 마쓰다이라 노리타케(松平乗武)와 그 부인인 마쓰다이라 아키코(松平章子)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그가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가 전사하고 아버지가 차남이었기 때문에 자작위 상속도 못 했다. 외가인 다카쓰카사 가문으로 입적된 건 1960년경으로 당시 외삼촌인 다카쓰카사 도시미치(鷹司平通)와 외숙모인 다카쓰카사 가즈코 부처에 의해 들어가게 되었으며 1966년 외삼촌이 사망하자 28대 당주가 되었고 현재 이세 신궁 대궁사를 거쳐 정치결사 조직인 일본회의 고문을 맡고 있다. [13] 니조 가문도 끊겨 구조 가의 자손이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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