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25 시즌 참가 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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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기오날리가 참가 구단 · · · · |
Turn- und Sportverein München von 18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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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V 1860 뮌헨 | TSV 1860 뮌헨 II |
TSV 1860 뮌헨 | |
TSV 1860 München | |
<colbgcolor=#5aaadf><colcolor=#000> 정식 명칭 | Turn- und Sportverein München von 1860 |
별칭 | Die Löwen (사자들), Sechzger (60)[1] |
창단 | 1860년 5월 17일 ([age(1860-05-17)]주년)[2] |
소속 리그 | 3. 리가 (3. Liga) |
연고지 |
바이에른주
오버바이에른현
뮌헨 (München, Oberbayern, Bayern) |
홈구장 |
그륀발더 슈타디온(Grünwalder Stadion) (15,000명 수용) |
라이벌 |
FC 바이에른 뮌헨 -
뮌헨 더비[3] FC 잉골슈타트 04 - 오버바이에른 더비 FC 아우크스부르크 |
구단주 | 하산 이스마이크 (Hasan Ismaik) |
회장 | 로버트 라이징거 (Robert Reisinger) |
단장 | 귄터 고렌첼 (Günther Gorenzel) |
감독 | 아르기리오스 야니키스 (Argirios Giannikis) |
주장 | 예스퍼르 페를라트 (Jesper Verlaat) |
공식 웹사이트 | |
지난 시즌 성적 (2022-23 시즌) |
3. 리가 8위 |
우승 기록 | |
분데스리가 (1부) (1회) |
1965-66 |
2. 분데스리가 (2부) (3회) |
1954-55, 1956-57, 1978-79 |
3. 리가 (3부) (3회) |
1983-84, 1990-91, 1992-93 |
레기오날리가 바이에른 (4부) (1회) |
2017-18 |
DFB-포칼 (2회) |
1942, 1963-64 |
가우리가 바이에른 가우리가 쥐트바이에른 (1부)[4] (2회) |
1940-41, 1942-43 |
오버리가 남부 (1부)[5] (1회) |
1962-63 |
클럽 기록 | |
최다 출장 | 만프레트 바그너 (Manfred Wagner) - 324경기 (1957-1971) |
최다 득점 | 루돌프 브루네마이어 (Rudolf Brunnenmeier) - 146골 (1960-1968) |
[clearfix]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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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nmal Löwe, Immer Löwe |
2. 역사
19세기 초중반 당시 독일 내 자유주의 성향을 지닌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체조 동호회를 창설하고 해당 모임 안에서 교류를 갖는 것이 유행했다. 1860 뮌헨 역시 이러한 체조 동호회에 뿌리를 두고 있다. 3월 혁명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1848년 7월에 뮌헨 내에서 자유주의 성향의 젊은이들이 체조 동호회를 만든 것이 바로 1860 뮌헨의 시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3월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체조 동호회는 당국에 의해 곧바로 폐쇄되지만, 이미 시대의 흐름은 자유주의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고 결국 바이에른 왕국 역시 국민들의 결사의 자유를 인정해 줘야 했다. 이에 따라 TSV 뮌헨은 1860년 5월 17일에 공식적으로 재설립되었다. 이 시기에는 말 그대로 순수한 체조 동아리였고, 축구팀은 그로부터 40년 가까이 지난 1899년 3월 6일에야 창단한다.1902년 최초의 공식 경기를 치른 데 이어 1911년에는 팀의 명칭을 지금과 같은 TSV 1860 뮌헨으로 변경한다. 1920-1930년대 내내 바이에른 지역 리그에서는[7] 강호였지만 당대 독일 내 최고의 팀이었던 FC 샬케 04에게[8] 연이어 발목을 잡히면서 독일 챔피언에 오르는 데 실패한다. 특히 1931년에는 결승전에 올랐지만 헤르타 베를린에게 밀리면서 통한의 콩라인. 바이마르 공화국이 몰락하고 나치 독일이 수립된 뒤에도 이러한 양상은 이어져서, 바이에른 내에서는 강호이지만 전국적으로는 어정쩡한 지위의 팀이었다. 그래도 1942년에는 오늘날 DFB 포칼의 전신이 되는 챠머 포칼(Tschammer Pokal)에서[9] 샬케를 2-0으로 누르고 우승을 차지하면서 팀 역사상 최초로 우승을 차지하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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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독일 챔피언 TSV 1860 뮌헨 |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에도 바이에른 지역 리그에서 강호로 활동하다가 1963년 분데스리가가 설립되자 지역 라이벌 FC 바이에른 뮌헨을 제치고 분데스리가 창립 멤버로 참여하는 영예를 누린다.[10] 1960년대 중반은 여러모로 1860 뮌헨 역사에서 가장 찬란히 빛나던 시기였다. 1964년에는 팀 역사상 두번째로 DFB 포칼 우승을 차지한 데 이어, 1965년에는 UEFA 컵 위너스컵 결승 진출.[11] 1966년에는 마침내 서독 챔피언을 차지하였으며, 1967년에도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당시 독일 내 최강팀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라이벌 FC 바이에른 뮌헨이 프란츠 베켄바워를 필두로 1960년대 후반부터 황금 시대를 열어갔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196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1860 뮌헨은 침체기에 접어들기 시작한다. 급기야 1970년에는 2부 리그로 추락하는 수모를 겪었고, 무려 7년 동안 2부 리그를 전전한 끝에 1977년 1부 리그에는 복귀했지만 1시즌 만에 다시 강등됐다. 1980년 다시 1부 리그에 복귀했지만 1982년에 다시 2부 리그로 강등되었는데, 이 당시 팀의 재정 악화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프로 자격을 박탈당해 3부 리그로까지 추락하는 수모를 겪는다. 1992년에 베르너 로란트가 지휘봉을 잡으면서 분위기가 뒤집혔고, 1994년에 12년 만에 분데스리가로 재진입하는 데 성공한다. 베르너 로란트 시기는 팀 역사상 나름대로 제2의 전성기를 누렸는데, 우승을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1부 리그로 팀을 승격시켰고, 승격 이후 1부 리그에서도 꾸준히 안정적인 성적을 거두었다. 로란트 감독의 지휘에 있는 동안 1860 뮌헨은 분데스리가에서 94-95 시즌부터 00-01 시즌까지 7시즌 동안 각각 14위, 8위, 7위, 13위, 9위, 4위, 11위를 기록했다. 특히 99-00 시즌에는 리그 4위를 기록하면서 근 40년 만에 다시 UEFA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하는 쾌거를 기록하기도 했다. 조별 단계 진출을 위한 3차 예선 라운드에서 리즈 유나이티드 FC에게 합계 1:3으로 패하면서 일찍 탈락했다.
베르너 로란트가 지휘봉을 내려놓은 후에도 2시즌 동안 중위권의 성적을 기록했으나, 결국 03-04 시즌을 끝으로 2부 리그로 돌아가게 된다. 그래도 워낙 유서 깊은 구단인 탓에 팬층이 두꺼워서 05-06 시즌 평균 관중 42,000여 명을 동원하였는데, 이는 04-05 시즌의 2만 명과 1부 리그에서의 마지막 시즌이 된 03-04 시즌의 2만 8000명을 초과한 것으로 2부 리그에서 가장 많은 평균 관객 동원 기록이다. 이 시즌 TSV 1860 뮌헨의 평균 관객 수는 분데스리가 1부를 포함해도 8위에 오를 정도였다. 하지만 오랜 기간 승격을 하지 못하고, 2부 리그에서도 중위권에 머물자 점차 관객 수가 감소하여 2만여 명 선으로 내려왔다. 관중 수가 감소하며 자연스레 구단 재정에도 큰 타격을 입었고, 2010-11 시즌 팀의 주축 선수들을 팔기 시작했다. 선수들을 팔았음에도 재정 위기는 사라지지 않았고, 구단 측에선 파산이 임박했다는 이야기까지 하기도 했다.
2011년 4월 요르단의 사업가인 하산 이스마이크(Hasan Ismaik)가 구단 합류에 관심을 표했고, 같은 해 5월 정식으로 협력 계약을 맺었다. 덕분에 파산을 면했고, 12-13 시즌에는 6위, 13-14 시즌에도 13승 9무 12패 승점 48점을 기록하며 7위에 올랐다. 14-15 시즌에는 부진에 빠져 16위에 가라앉아 강등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되었다. 상대는 3부 리그 3위인 홀슈타인 킬이었고, 1차전 원정 0:0 무승부, 2차전 홈에서 카이 뷜로의 극적인 골로 2:1 승리를 기록하며 2부 리그 잔류에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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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등이 확정된 TSV 1860 뮌헨 선수들 |
최종전에서 하이덴하임에게 1:2로 패배하면서 최종 순위 16위를 기록, 3부 리그의 3위 얀 레겐스부르크와 승강 플레이오프를 치렀다. 원정에서 치러진 1차전에선 일단 1:1로 가까스로 무승부를 거두었지만, 2차전에서 0:2 패배[12]를 당하며 3부 리그로 강등되었다. 강등이 확정되고 얼마 뒤 투자자 하산 이스마이크가 3부 리그에 참가하기 위한 라이선스 비용을 거부하며 4부 리그인 레기오날리가 바이에른으로 강등되었다.
다시 한 시즌 만에 3.리가로 승격했고, 그 뒤로 유지 중이다.
2.1. 요약
- 1부/ 분데스리가: 1963-1970, 1977-1978, 1979-1981, 1994-2004 (20시즌)
3. 홈구장
2017-18 시즌부터 그륀발더 슈타디온를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경기장은 1911년부터 1995년까지 1860 뮌헨이 홈구장으로 사용했던 경기장이기도 하다.이전에는 FC 바이에른 뮌헨과 함께 올림피아슈타디온 뮌헨를 사용하다가 2005년부터 2017년까지 알리안츠 아레나를 홈구장으로 사용했다.[13] 이걸 놓고도 굉장히 말이 많았다. 처음에 구단주가 FC 바이에른 뮌헨과 공동으로 홈구장을 쓸 계획임을 밝혔을 때 분노한 팬들이 데모를 벌였을 정도였다.
알리안츠 아레나를 FC 바이에른 뮌헨과 공동 소유하고 있었으나 심각한 재정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50%의 지분을 매각하였으며, 구장을 임대하는 형태로 사용했었다. 하지만 2017-18 시즌에 레기오날리가로 강등되면서 구장을 임대할 여건이 되지 않아 현재의 그륀발더 슈타디온으로 홈 구장을 옮겼다. 이 경기장은 바이에른 리저브 팀과 U-19팀의 홈구장[14]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2020년도에 와서는 튀르크귀취 뮌헨까지 이 경기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그 팀이 리저브 팀과 이 문서의 팀이 함께 있는 3. 리가에 승격하게 되면서 튀르크귀쥐 쪽이 다른 구장을 일부 경기 일정에 사용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4. FC 바이에른 뮌헨과의 관계
비슷한 시기[15]에 창설된 두 팀이지만, 초창기에는 별다른 라이벌 감정이 없었다. 애초에 1963년 분데스리가의 창설 이전까지 독일 내에서는 지역 단위의 리그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바이에른 단위의 지역 리그에서 두 팀은 매 시즌 맞붙었고 게다가 두 팀 이외에도 뮌헨을 연고지로 하는 축구팀은 수두룩했기 때문에 라이벌 의식이 좀처럼 생겨나기 힘든 상황이었다.두 팀 사이의 라이벌 의식은 분데스리가가 창설된 1963년을 기점으로 대폭 증가된다. 독일 축구 협회는 분데스리가를 창설할 당시 한 도시 내에서 두 개의 팀이 동시에 참가하는 것을 규제했고, 이에 따라 처음에는 TSV 1860 뮌헨이 분데스리가에 참가했고, FC 바이에른 뮌헨의 분데스리가 원년 입성이 좌절되면서 서로에 대한 적대감이 대폭 커지게 된다.
게다가 FC 바이에른 뮌헨이 분데스리가 진입에 성공한 1960년대 중후반에는 양 팀이 모두 독일 내 최고의 팀 중 하나였기 때문에 뮌헨 더비는 독일 전역을 들썩이게 하는 최고의 더비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후 1970년대에 FC 바이에른 뮌헨이 전성기를 맞은 것과 반대로 1860 뮌헨이 몰락하면서 두 팀은 좀처럼 만날 일이 없었다. 오히려 이 시기 바이에른의 최대 라이벌은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였다. 1994년에는 1860 뮌헨이 분데스리가에 다시 진입했지만, 이미 두 팀 사이의 격차는 너무 벌어진 상황이었다.
양 팀 팬들 사이의 입장을 보면 1860 뮌헨 팬들이 일방적으로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고 있는 상황이다. FC 바이에른 뮌헨 팬들은 1860 뮌헨에게 1. 분데스리가도 못올라오는 약팀으로 보는 등 무관심스러운 태도를 보인다.
2015년에 1860 뮌헨 팬들이 FC 바이에른 뮌헨 팬 한 명을 집단 폭행한 사건이 있었는데, 담당 판사가 바이에른 뮌헨 머천다이스 샵에 가서 60만 원어치 굿즈를 사거나 감옥에서 15개월을 보내거나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는 판결을 내렸고, 피의자인 1860 뮌헨 팬들이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전자를 선택해서 큰 웃음을 주기도 했다. 분데스마니아 요약 빌트 지(독일어) TZ(독일어)
17-18 시즌 1860 뮌헨이 레기오날리가 바이에른 지구로 내려오면서 FC 바이에른 뮌헨 리저브 팀과 격돌하게 되었다. 홈 경기인 1차전에서는 0:1로 패했고, 원정인 2차전에서도 1:3으로 패배했다.
19-20시즌에 FC 바이에른 뮌헨 리저브 팀이 1860 뮌헨이 있는 3. 리가로 승격함에 따라 다시 맞붙었다. 1차전 홈 경기에서는 1:1로 비겼다.
두 팀의 통산 전적은 204전 104승 50무 50패로 FC 바이에른 뮌헨의 압도적인 우세이다. 마지막 매치가 2008년 DFB 포칼 8강에서 맞붙었던 경기로 이 경기 이후 10년이 넘도록 더비 매치가 성사되지 못하고 있다. 참고로 이 경기는 홈 팀인 바이에른 뮌헨이 1-0으로 이겼다.
5. 기타
- 2019년 1월에 'PENTA'라는 e스포츠단과 파트너십 후원을 맺어 'PENTA 1860'이라는 리그 오브 레전드 게임단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해당 팀은 LEC 밑의 유럽 2부 리그인 각 지역 국가 리그 중 독일 리그 PRM에 참여하고 있다.
- 리저브 팀인 TSV 1860 뮌헨 II은 현재 속해 있는 3. 리가의 두 단계 아래[16]인 바이에른리가 남부에 속해 있다. 그리고 2017-18 시즌에 레기오날리가 바이에른에서 우승했는데 리저브 팀인 TSV 1860 뮌헨 II는 2012-13 시즌에 우승하며 초대 우승 타이틀을 가지고 있게 되며 리저브 팀이 1군 팀보다 빨리 우승한 희귀한 경우가 생겼다. 이로서 2021년 1군 팀과 2군 팀이 현재까지 레기오날리가 바이에른에서 우승한 유일한 팀이라는 뜻밖의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다.
6. 스쿼드
6.1. 1군
1
힐러 · 2
쿠르트 · 3
랑 · 4 [[예스퍼르 페를라트|페를라트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000; font-size: .8em"]] · 5
제이눌라후 · 6
리더 · 7
구타우 · 8
슈타르케 · 9
츠바르츠 · 10
브레네치 · 11
그라일링거 12 슈미트 · 13 봉가 · 14 스켄데로비치 · 15 리히터 · 16 라인탈러 · 17 슈뢰터 · 18 클로스 · 19 라켄마허 · 21 콰도 · 22 술레이마니 · 23 쉬르 24 빙클러 · 29 루데비히 · 30 초치치 · 31 타르나트 · 32 방게르터 · 35 글뤼크 · 36 슈타인하르트 · 37 프라이 · 39 로트다우셔 |
* 이 표는
간략화된 버전입니다. 스쿼드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여기를 참고해주세요. * 스쿼드에 변동이 있으면 두 틀 모두 수정해주세요. * 타 팀으로 임대 간 선수는 제외했습니다. |
6.2. 유소년
7. 유명 선수
- 루디 푈러 (1980~1982)
- 베른하르트 트라레스 (1991~1997)
- 옌스 예레미스 (1995~1998)
- 하랄트 체르니 (1996~2007)
- 다니엘 비로프카 (2000~2002/2007~2014)
- 베냐민 라우트 (2000~2004/2008~2014)
- 라스 벤더 (2006~2009)
- 스벤 벤더 (2006~2009)
- 마티아스 레만 (2003~2006)
- 마이크 오트 (2005~2014)
- 케빈 볼란트 (2010~2011/2011~2012(임대))
- 크리스토퍼 신들러 (2010~2016)
- 카이 뷜로 (2010~2017)
- 다니엘 아틀룽 (2013~2017)
- 율리안 바이글 (2013~2015)
- 밀로시 데게네크 (2015~2017)
- 플로리안 노이하우스 (2016~2017)
- 자샤 묄더스 (2016~2021)
- 다보르 슈케르 (2001~2003)
8. 둘러보기
분데스리가 원년 멤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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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분데스리가 | 3. 리가 | |
FC 바이에른 뮌헨 | TSV 1860 뮌헨 | ||
도이체 아이스하키 리가 | 바스켓발분데스리가 | ||
EHC 뮌헨 | FC 바이에른 뮌헨 바스켓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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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이에른 방언
[2]
#
[3]
분데스리가 출범 당시 1860 뮌헨이 1부, 바이에른 뮌헨이 2부에서 시작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는 1860 뮌헨이 더 강팀이었고,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1부 리그 소속이었다.
[4]
분데스리가 출범 이전의 리그로 이 리그에서 우승한뒤 다른 지역 리그에서 우승한 팀과 붙는 방식이었다.
[5]
분데스리가 출범 이전의 리그로 이 리그에서 우승한뒤 다른 지역 리그에서 우승한 팀과 붙는 방식이었다.
[6]
Turn- und Sportverein 혹은 약칭 TSV가 이를 의미한다.
[7]
이 당시 독일은 지역마다 리그가 나뉘어 있었다. 그리고 해당 지역 리그의 우승팀들끼리 토너먼트를 거쳐 독일 전체의 챔피언을 가르는 시스템. 독일 전국적인 단위의 리그가 도입된 것은 1963년
분데스리가가 열리면서부터다.
[8]
FC 샬케 04는
분데스리가가 창설되기 전까지 독일 내 최다 우승팀이었다. 분데스리가가 창설되고 나서는 우승한 적이 없다.
[9]
돌격대의 수장이자 체육부 고위 관료를 지낸 한스 폰 챠머의 이름을 따왔다.
[10]
당시 독일 축구 협회에서 한 지역에서는 한 팀만이 분데스리가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FC 바이에른 뮌헨보다 상대적으로 성적이 좋았던 1860 뮌헨이 분데스리가의 창립 멤버가 될 수 있었다. FC 바이에른 뮌헨이 분데스리가에 승격할 수 있었던 것은 그로부터 2년이 뒤난 1965년.
[11]
결승에서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FC를 만나 2-0으로 졌다.
[12]
0대2로 끌려가던중 화가난 홈팬들이 달려들며 몰수패당했다.
[13]
1860의 홈 경기가 있는 날은 경기장 표면의 조명을 파란색, 바이언의 경기 때는 빨간색으로 켜놓는 방식이었다.
[14]
U-19인 JT는 '바이에른 캄푸스'로 되어있다.
[15]
TSV 1860 뮌헨이 1860년에 설립된 것은 맞지만 처음에는 그냥 체조 동아리였다. 축구 팀이 창설된 것은 1899년이다. FC 바이에른 뮌헨 역시 비슷한 시기인 1900년 설립했다.
[16]
바로 아래는
레기오날리가 바이에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