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00:06:47

1997년 알바니아 금융사기 사건

1997년 알바니아 내전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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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니아 수도 티라나에 체류 중인 미국인들을 대피시키는 미 해병대. 1997년 3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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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니아 반군 소속 59식 전차

1. 개요2. 배경3. 발단4. 전개5. 종말6. 결과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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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바니아어: Kriza piramidale( 다단계 위기)

1997년 폰지사기 때문에 알바니아 국민의 대부분이 재산을 잃어버린 사건. 1월 16일부터 8월 11일까지 반 년 넘게 유혈사태로 이어졌다. 알바니아 내전, 알바니아 사태 혹은 알바니아 봉기라고 불리기도 한다. 영어 위키백과에는 이 사건 자체에 대해 다루는 ' 알바니아의 피라미드 사기' 문서와 이 사건으로 인해 일어난 내전에 대해 다루는 ' 알바니아 내전' 문서가 따로 존재한다.

2. 배경

한 국가의 절대 다수의 국민(60%)이 폰지사기에 휘말려 재산 대부분을 손실한 이 희대의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알려면 먼저 1990년대 초 알바니아의 상황을 살펴봐야 한다. 냉전 시기에도 서방권과 적대관계가 아니었던 인접국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적대관계였더라도 미국이나 서유럽 국가들과 기본적인 교류는 하던[1] 소련 바르샤바 조약 기구 회원국들과 달리 동구권에 속했던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공화국 스탈린주의에 철저히 경도된 엔베르 호자가 장기 집권하면서 어떠한 국가와도 일절 교류하지 않는 극단적인 쇄국 정책을 취했다. 타 동구권 국가들은 이미 1980년대부터 시장경제 요소를 도입했지만 알바니아는 꿋꿋이 철저한 중앙통제 경제정책을 취하며 자본주의적 요소를 일절 거부했다.

그 결과 알바니아는 동구권이 붕괴되던 1989년 1인당 GDP가 723달러에 불과해 동유럽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기준에서 보더라도 빈국 신세를 면치 못했다. 1989년 동유럽 혁명의 여파로 1991년 알바니아는 마침내 동구권에서 마지막으로 47년간 이어진 공산독재를 종식시켰지만 빈곤이 극심했고 체제전환 과정에서 루마니아, 불가리아보다도 어려움을 훨씬 더 많이 겪을 수밖에 없었다.

3. 발단

전술한 바처럼 알바니아 자본주의 경험이 없었는데 이런 취약점을 파고든 집단은 다름아닌 현지 마피아와 결탁한 다단계 회사들이었다. 1992년 5월 옛 집권당이었던 알바니아 노동당의 후신인 알바니아 사회당이 총선에서 패하고 심장외과의 출신 민주화운동가였던 살리 베리샤가 이끌던 알바니아 민주당으로 정권이 넘어갔는데 이때부터 알바니아 정부와 다단계 회사 간 유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정부에 경제 전문가가 하나도 없었으므로[2] 외부 전문가를 불러 의지했는데 그 전문가들 중에 폰지사기 연루자 하이딘 세이디야(Hajdin Sejdia, 1952~)[3]라는 작자가 있었다.

세이디아를 포함한 사기꾼들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 여러 다단계 회사들을 설립했다. 수디아(Sudja), 베노(Beno), 바슈키미(Bashkimi) 등 23개 회사들은 고수익을 보장해 준다며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50여 년 가까이 공산권 내에서도 유별나게 폐쇄적인[4] 공산주의 사회에서 살아 온 알바니아의 일반 대중은 물론 정부 관료들까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는 경제상식을 몰랐다. 더군다나 당시 알바니아는 3년간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했고 물가상승률도 높았기 때문에 국민들은 고수익이라는 말에 속아 기둥 뿌리를 뽑아 가면서 피라미드 회사들에 투자했다. 23개 다단계 회사들이 나와 고수익을 얻게 해준다며 돈을 끌어 모았으며, 심지어 정부가 공영 방송을 통해 3개월 안에 돈을 3배로 늘려주겠다는 광고를 하기도 했다.

피라미드 회사들은 주로 무기 밀매와 고객들의 투자 등을 통해 자금을 조달했고 처음엔 고객들에게 약속한 대로 고수익률 배당금을 지급해 주었다. 게다가 이 회사들은 알바니아 정부에게 합법적인 승인을 받았고 정부 관료들과도 유착했기 때문에 미래의 위험을 눈치채는 사람이 드물었다. 1996년 11월 알바니아 폰지 사업이 가지고 있던 규모는 총 GDP의 50%에 해당하는 규모였다고 하며, 1997년 초에는 전체 인구 330만 중 무려 60%가 넘는 200만 명이 다단계 회사들에 투자할 정도였다. 1996년부터 국제통화기금은 이 문제에 대해 계속 경고했지만 알바니아 정부는 무시했다.

4.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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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라나의 사실상 외항인 두러스(Durrës)에서 항구의 통제권을 장악한 알바니아 마피아.
이들은 돈을 받고 알바니아인들을 아드리아해 너머 이탈리아 등지로 밀입국시켜 주는 브로커 역할을 하기도 했다.
사기 초기에는 돈이 확 돌았기 때문에 경제가 확 살아나는 효과가 있었다. 금융사기가 벌어지기 직전의 알바니아는 경제상황이 매우 암울하여 3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고[5] 1인당 국민소득도 1989년의 723달러에서 1992년에는 248달러로 거의 1/3토막이 났다. 그러나 다단계 사업이 활성화되기 시작하면서 1993년을 기점으로 경제성장률은 플러스로 돌아섰고 1993년부터 1996년까지 연 평균 8.8%대의 고도경제성장을 기록하였다. 이러한 경제성장에 힘입어 국민들의 소득수준도 급속히 불어나면서 이전보다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었고 사기로 드러나기 전에는 당시 알바니아 국민들의 한 달 월급에 맞먹는 매달 80달러를 평균 배당금으로 챙기는 수준이었는데[6] 당시의 평균 배당금은 알바니아의 1인당 국민소득과 맞먹는 금액이었다. 단기적으로 볼 때 몇 달치 급여에 해당되는 수준의 불로소득을 국민들에게 뿌려 준 셈이었다. 이렇게 1992년에 248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은 1995년에 공산체제 당시 기록했던 수치를 넘어섰고 1996년에는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를 달성했다. 참고로 동시기 한국의 평균 경제성장률은 1993년부터 1996년도까지의 통계를 합산하면 8.3%가 나온다. 그래서 동유럽에서 체제전환이 순탄하게 진행되는 나라로 분류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순전히 전쟁특수에 기인한 거품경제였다. 불법무기 밀매와 고객 투자유치만으로 회사들이 정상적인 수익을 낼 리가 없었다. 다단계 회사들은 이웃나라인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 보스니아 전쟁 개입과 체제 전환으로 인한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무기를 밀거래하면서 일단 고객들에게 수익금을 줄 수 있었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했으며 결국 1996년에 경제성장률이 7.1%로 둔화되며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동시기에 치러진 양대 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을 거두었지만 사회당 측이 선거결과에 반발하며 보이콧을 하는 상황이었는데 1997년 1월 8일을 기점으로 다단계 회사들이 연쇄도산하여 사태의 실체가 드러나고 말았다. 국민들 중 일부만 폰지사기에 연루되었어도 큰 사회 문제가 되었을 텐데 알바니아에선 국민의 과반수가 연관되어 관계자 절대다수가 전재산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냥 '큰 문제' 정도가 아니었다. 게다가 일반 개개인만이 아니라 호텔, 공장, 연료회사 등 경제의 핵심이 되는 일반 사기업들도 다단계 회사에 투자했다가 엄청난 손실을 입었기 때문에 단 며칠 만에 알바니아 경제가 마비되고 말았다. 결국 1주일쯤 지난 1997년 1월 16일 남부 지방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19일에는 수도 티라나에서도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24일에는 본격적으로 시위가 폭력사태로 격화되어 내무부를 제외한 수도의 정부 부처들이 모두 시위대에게 점령, 파괴되기에 이르렀다.

2월이 되자 베리샤 정권으로부터 홀대를 받아왔고 재산피해가 특히 심했던 남부 지방에서 시위가 더욱 잦아졌다. 2월 20일 블로러(Vlorë)에서 대학생들이 단식투쟁을 벌이며 시위가 촉발되었는데 27일에는 시위대가 대학교에 상주하던 공무원들을 습격해 공무원 6명과 민간인 3명이 사망했다. 사태는 더욱 격화되어 약 10일 간 준 내전 상태가 되고 말았다.

2월 27일부터 3월 9일까지 남부 지방은 사실상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3월 1일 블로러는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버렸고 시위대들은 블로러 남쪽의 해군기지를 점령했다.[7]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자 정부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대를 블로러, 테펠레너(Tepelenë)에 투입했지만 폭도로 변한 시위대는 군대의 접근을 막아섰다.

3월 2일 인근 사란더(Sarandë)도 폭도들에게 점령되었다. 같은 달 4일에는 폭도들을 폭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지만 공군 조종사들 중 일부가 명령을 거부하고 전투기째 이탈리아로 망명했다. 8일까지 시위대는 남부 지역 대부분을 점령했고 일부는 수도 티라나 교외까지 접근해 리나스(Rinas) 국제 공항[8]을 습격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북부 지방까지 폭력사태가 확산되어 수도 티라나를 제외한 전국에서 정부가 통제력을 잃어버리고 시위대 및 시위대와 결탁한 갱단들이 날뛰었다. 폭도들은 알바니아군 기지들도 습격하여 총탄 약 15억 발, 수류탄 350만 개, 지뢰 100만 개, 총기 65만 정을 탈취, 유출했다. 경찰서 방화, 무기고[9]와 교도소 습격은 기본에 재무부 금고와 방사성 물질이 강도들에게 약탈당했으며, 정보기관 SHIK의 요원들이 화형당하고, 어린이들이 총기를 들고 다닐 정도로[10] 알바니아는 그야말로 소말리아, 아이티와도 같은 무법천지가 되었다. 당연히 외국인들은 본국으로 돌아가고 알바니아인들 역시 이탈리아, 그리스 같은 인근 선진국들로 도망쳤다.

결국 3월 9일 지로카스터르(Gjirokastër)[11] 시장 바시킴 피노가 이끌던 새 내각이 구성되었다. 살리 베리샤는 전국 텔레비전 방송으로 조기총선 실시, 남부 지방에서 군대 철수를 약속하는 대신 안정을 되찾아 달라고 호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태가 진정되지 않자 결국 같은 달 28일 알바 작전(Operation Alba)이라는 작전명으로 오스트리아, 그리스, 루마니아, 튀르키예, 프랑스, 이탈리아가 군을 투입하고 미국, 독일도 독립적인 군사 작전을 수행하면서 이 사태는 겨우 진정되었다. 그러나 5월까지도 갱단이 군을 습격해 수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는 등 불안정한 상태는 이후에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5. 종말

살리 베리샤 대통령이 약속한 대로 6월 29일 조기총선을 실시했다. 사태의 주 원인을 제공한 민주당은 당연히 대패하고 파토스 나노가 이끌던 사회당이 압승을 거두었으며[12] 7월 24일에 살리 베리샤는 사임했다. 마침내 불안정 상태는 거의 마무리되었고 8월 11일 알바니아에 투입된 외국군이 철수하여 사태는 완전히 끝났다.

6. 결과

이 사건으로 손실 12억 달러[13][14]가 일어났고 전국에서 민간인, 경찰, 군인을 포함한 2000여 명이 사망하고 3700~5000명이 부상을 입었다.[15] 알바니아의 1인당 GDP는 전년도 1046달러에서 749달러(전년 대비 70% 수준)로 1989년 수준으로 추락하였고 1997년 알바니아의 경제성장률은 -10.1%를 기록하였다. 총 GDP도 1996년 32억 달러에서 1997년 22.6억 달러 미만(전년 대비 2/3 수준)으로 역시 1989년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 사태는 자본주의적 경험이 없는 나라가 제대로 된 감독 없이 어설프게 체제 전환을 시도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적나라한 사례가 되고 말았다. 알바니아는 그걸 몸으로 겪으며 뼈저리게 배운 셈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인접한 구 유고 연방 국가들이 내전을 겪었던 것과는 달리 알바니아는 경제 문제가 주 원인이 된 사태를 상대적으로 빨리 진정시켰고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연 평균 9.2%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면서 이 사건의 후유증을 재빨리 넘기고 다시금 정상궤도를 밟게 되었으며 1999년에 일어난 코소보 전쟁에서도 알바니아 본토 자체가 유혈사태에 휘말리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유럽의 최빈국이란 불명예스러운 타이틀도 벗어던졌다.[16]

한편 이 사태의 중심에 있었던 살리 베리샤는 2005년 내각제에서 총리로 취임해 다시 권좌에 올랐지만 2013년 에디 라마가 이끌던 사회당에게 다시 정권을 넘겨주었다. 또 폰지사기를 주도한 하지딘 세지디아는 잠깐 스위스로 도피했다가 얼마 안 가 알바니아로 돌아온 후 알바니아에서 기업을 경영하면서 2024년 현재도 잘 살고 있다.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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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라나 스컨데르베우 광장에서 지지자들과 함께 무력 시위를 벌이는 레카 1세(가운데의 남자). 1997년 7월 2일
1928년부터 1939년까지 알바니아 국왕으로 재임하며 알바니아의 근대화를 이끌다가 베니토 무솔리니에게 쫓겨난 조구 1세의 외아들 레카 1세도 공산주의 붕괴 후 알바니아로 돌아와 머무르고 있었다. 레카 조구는 귀국 후에도 상당한 지지를 등에 업고 계속 왕정복고를 주장했는데 1997년 사태로 나라가 극도의 혼란에 빠지자 조구 왕조를 부활시켜야만 이런 혼란을 바로잡을 수 있다며 7월 2일 티라나 스컨데르베우 광장에서 지지자 2천여 명과 함께 무력 시위를 벌였다. 알바니아 정부는 당연히 이를 쿠데타로 간주했는데 이미 정부가 사태를 어느 정도 수습한 시점이었기 때문에 시위는 실패로 끝났고 레카 조구는 전용기를 타고 다시 알바니아를 떠나야 했다. 다만 코소보 전쟁 당시 알바니아를 적극적으로 지원했음을 감안하여 알바니아 정부는 레카 조구를 2002년 사면했다. 레카는 다시 귀국하고 2011년에 72세로 사망할 때까지 대우받으면서 계속 활동할 수 있었다.

추후 총리가 되는 야당이었던 사회당 소속 파토스 나노는 적절한 규제 없이 무분별하게 금융회사가 생기면 심각한 문제가 될 거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당은 파토스를 알바니아로 온 국제원조를 횡령했다는 혐의로 감옥에 넣어 버려 반대파를 강압적으로 탄압했다. 이는 명백한 정치공작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무죄방면되었다.

당시 폭동을 틈타 탈옥한 강도살인범 에르빈 샤히니가 미국과 캐나다를 거쳐 한국으로 귀화했다가 범죄 사실이 발각되어 2024년에 시민권 박탈과 함께 알바니아로 송환되었다. #

폭동 발발 1주일 전인 1996년 12월 30~31일 알바니아 RTSH 방송 녹화자료 살리 베리샤 알바니아 대통령과 이브라힘 루고바 코소보 대통령의 새해 연설이 담겨 있다. 보면 약 2주쯤 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듯하다.

알바니아의 피라미드식 사기의 흥망성쇠(1999년 1월 IMF 출판 연구자료)


[1] 실제 소련은 1970년대에 이미 펩시콜라가 들어왔었고, 1980년대에는 아디다스 짝퉁 제품들이 시장에서 널리 팔렸을 정도였다. 서방음반 역시 허용된것이라면 찍어서 팔려나갈 정도였다. [2] 사실 호자가 아무리 쇄국정책과 폐쇄무역을 선택했다 한들 그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기본적인 외교나 경제 전문가들을 다소 육성하면서 미래를 준비했는데, 복수랍시고 민주당은 이렇게 있던 전문가들을 죄다 배제하고 정부를 구성해버렸던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3] 사족으로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18개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천재라고 한다. [4] 오늘날의 북한도 당시 알바니아에 비하면 개방적인 국가일 정도.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알바니아는 나라에 항공사도 없다시피한 것을 넘어 올림픽 참가도 항상 거부했다. [5] 1990년 -10%, 1991년 -28%, 1992년 - 7.2% [6] 이것도 지역이나 가입연도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가 있었다. [7] 파샤 리만(Pasha Liman) 해군 기지. 1950년대 소련 해군이 건설한 해군기지로 지중해와 접하는 유일한 소련 해군기지였다. 알바니아가 바르샤바 조약 기구를 탈퇴한 뒤 소련군은 기지에서 철수하였으며 동구권 붕괴 후 튀르키예의 도움을 받아 기지 개수를 마치고 나서 알바니아 해군과 튀르키예 해군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기지가 되었다. [8] 2011년 너너테레사 티라나 국제공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9] 남부에서는 폭도들이, 북부에서는 여당 지지자들이 무기고를 약탈했다. [10] 영상을 보면 일국의 총리가 어린이들의 놀림거리가 될 정도로 베리샤가 민심을 잃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1] 엔베르 호자의 고향이다. [12] 전체 의석 155석 중 사회당이 100석을 차지하고 민주당은 단 27석만 얻었다. 참고로 민주당이 1992년 140석 중 92석, 1996년 140석 중 122석을 차지했던 것을 감안하면 민주당이 얼마나 민심을 완전히 잃었는지 알 수 있다. 쉽게 말해 의석 90% 가까이 독점하던 정당이 하루아침에 의석의 20%도 건지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3] 이는 2024년 가치로 환산하면 23.4억 달러(약 2조 8000억 원)다. 그리고 저 앧수는 1996년 알바니아 GDP(32억 달러)의 37% 수준이다. 비교하자면 간토 대지진 당시 일본이 입은 피해액 비중이 저것과 비슷했고,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의 피해가 당시 소련 GDP의 32%였다. 저런 대규모 참사들과 피해액 포지션이 비슷할 정도였으니 당시 금융사기 규모가 얼마나 거대했는지 알 만하다. [14] 심지어 내전 피해액까지 합하면 이는 2억 달러가 추가된다. [15] 당시 알바니아 인구가 315만 명도 되지 않았다. [16] 유럽 최빈국은 이후 몰도바였다가 우크라이나로 바통을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