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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술

학암 이관술에서 넘어옴
<colbgcolor=#E40001><colcolor=#FED11E> 조선공산당 중앙검열위원
조선인민공화국 선전부장
이관술
李觀述|Lee Gwan-sul[1]
파일:이관술졸업앨범.jpg
출생 1902년 4월 25일[2]
경상남도 울산군 범서면 평천동
(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 입암리)[3]
사망 1950년 7월 3일 (향년 48세)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낭월리 골령골
(현 대전광역시 동구 낭월동 골령골)
당적


서훈
[[북한|]][[틀:국기|]][[틀:국기|]] 조국통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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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40001><colcolor=#FED11E> 학암(鶴巖)
자관(子觀)
족보명 이수해(李樹海)
이명 김종석(金鍾石), 김대성(金大成)
본관 학성 이씨[4]
학력 입신학교 (폐교)
울산간이농업학교 (졸업)
중동학교(현 중동고등학교) (졸업)
도쿄고등사범학교(현 쓰쿠바대학) (지리역사과 / 학사)
경력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현 동덕여자고등학교) 교사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
조선공산당 중앙검열위원
조선인민공화국 선전부장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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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생애 초기2.2.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시절2.3. 조선반제동맹 활동2.4. 조선공산당 경성재건그룹 활동2.5. 경성 콤그룹 활동2.6. 광복 후 정치인으로서의 활동2.7. 투옥2.8. 사망
3. 논란 및 비판
3.1. 북한 지령을 받기 위한 무전기 설치3.2. 북한으로부터의 불법 자금 수령3.3. 불법 공산당 비밀정부 운영3.4. 공장자주관리운동 관련 논란3.5.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정3.6. "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를 같다고 하면 상식부족" 발언 논란3.7. "공산당을 비판하면 반동" 발언 논란3.8. 박헌영을 추대하기 위한 공작과 전쟁 책임3.9. 반탁 연설을 한 뒤 며칠만에 찬탁으로 입장 변경 논란3.10. "소련군의 지구적인 주둔은 필시 조선인의 복리" 발언 논란3.11. 북한군의 이관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사람들에 대한 인민재판3.12. 중혼
4. 어록5. 관련 자료6.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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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와 해방정국의 공산주의 운동가로 일제강점기 공산주의 계열 항일운동가였으며, 광복 후 조선공산당의 2인자로서 남한 공산주의 운동 대부분에 깊게 관여했다. 남조선로동당의 수장 박헌영의 최측근으로서, 박헌영의 오른팔로 통했다.

2. 생애

2.1. 생애 초기

고향은 경상남도 울산군 범서면 평천동(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 입암리)이다. 유서 깊은 양반 집안 장자인 아버지 이종락(李宗洛)과 어머니 덕산 이씨(德山 李氏) 이성진(李誠震)의 딸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족이 울산을 떠나 울릉도에 거주할 때인 1902년 태어나 1905년쯤 울산으로 돌아와 성장했다.

1921년 경주 외동에서 태어난 박가야와 부부의 연을 맺고 난 뒤에 당시 경성부 종로 수성동에 있었던 중동학교에 입학했다. 1925년 3월 중동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도쿄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이관술은 도쿄고등사범학교에서 사회주의를 접한 적도 있으나 1929년 전까지는 사회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본래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고등사범에 들어간 것도 청년교육을 통하여 민족을 각성시켜보자는 이상에서 들어갔고 또 이민족과 접촉해가는 동안에 얻은 정신적 영향도 역시 민족주의 강화였다. 말하자면 일종의 이상적인 민족주의자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 때 나의 생각은 우리 민족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경중대소를 막론하고 그 일에 열성을 바치자는 일념뿐이었다. 내가 맑스주의에 접근해간 것도 약소민족 청년의 독자적인 경지에서 그리한 것이요, 그것을 연구하여 우리 민족 현실에 알맞은 길을 발견하자는 것이 진정한 목적이었다.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946

이관술은 1929년 3월 도쿄고등사범학교 지리역사과를 졸업하였다.

2.2.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시절

이관술은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그가 공산주의자가 된 시기가 바로 이 시기로 이관술이 공산주의의 길을 걷게 된 이유는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이 학생들의 운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에 실망했기 때문이었다.
광주학생 사건이 일어나서 경향이 불 끓듯 하고 학생 가운데서는 계속 희생자가 나오며 그래도 뒤를 이어 운동은 요원의 불처럼 확대되어 갈 때 나에게는 두 가지 깊이 감명된 바가 있었다. 첫째는 학생들이 일본제국주의에 대하여 불같이들 열렬한 데 비하여 교사들은 일반으로 냉담하고 비겁하다는 것. 둘째는 그 때 학교 내나 사회를 막론하고 소위 민족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도무지 반일 투쟁적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반일적이 아닌 민족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깨닫게 했으며 또 대부분 일제와 타협해야만 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 유산자 층이 반일적이지 못하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명백히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찍이 내가 전공하던 역사 연구의 한 방법론에 지나지 않던 유물사관이 조선에 있어서는 민족해방 투쟁에 있어서 유일한 지침으로 내 앞에 실천노선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946

1931년 학생자치 및 교내 경찰출입 반대 등을 내세운 학생들의 동맹휴학을 지도했다. 독립운동을 하던 학생들이 퇴학 처분을 받자 동료교사 신명균 등과 함께 교사들의 동반사직을 주동한다.
일제의 모욕적인 창씨개명에 반항하여 자살해버린 신명균 선생이 있었다. 그는 일생을 양심적 민족주의자로서 마쳤거니와 또 내가 안 단 하나의 철저한 반일적 민족주의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맹휴투쟁에 있어 신 선생은 사상의 차이를 조금도 느낄 수 없는 진정한 협동자이었고 열렬한 반일투쟁의 지도자이었다.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946

2.3. 조선반제동맹 활동

1932년 11월 중순 이관술은 이순근, 조정래와 '조선반제동맹 경성지방결성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이 날 결정된 반제동맹의 활동 구호는 식민지 노예교육의 반대, 수업료 감면, 학교 내 경찰 침입 반대, 입학에 대한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별 반대, 졸업생 취직에 대한 학교의 책임 부담, 여자 교육에 대한 남존여비적 교육에 반대 등 6개 조항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각 학교에 독서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한다. 반제동맹 산하 독서회는 보성고보, 보성전문학교, 연희전문학교, 경성부기학관, 경성기독청년학관으로 확대되었다. 이관술은 동덕여고보 재학생과 졸업생을 대상으로 두 개의 독서회를 직접 지도했다. 교내 독서회는 이경선, 임순득, 김영원, 박인순을 중심으로 사회과학 도서를 공부했다. 그리고 동덕여고보를 졸업한 여동생 이순금과 윤금자, 김길순이 가두독서회로 참가했다.

경성반제동맹은 1932년 11월 하순, 12월에 동경에서 열릴 예정인 ‘태평양연안제국 반제국주의민족대표자회의’에 대표자를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이들은 조선에서도 반제국주의에 앞장선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으나 파견한 조정래가 검거된데다 대회가 연기되면서 실패했다.

이후 반제동맹은 1933년 초 일제에 발각된다. 세포 조직 수가 13개에 이르고 체포된 숫자 미상의 인원 중 경성지방법원으로 송치된 연루자만 43명에 달하는 큰 사건이었다. #
파일:반제동맹활동개요.jpg
파일:반제동맹조직책동.jpg
파일:반제송국.jpg
반제동맹을 보도한 기사 중 일부. 경성반제동맹은 대대적으로 대서특필된다. 전향을 거부한 조정래 등은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전향서를 쓰고 재판정에서 전향을 맹세한 이관술은 집행유예를 선고받는다.

1934년 3월 31일 전향서를 쓰고 병보석으로 가출옥 했는데, 그해 12월 징역 2년, 재판정에서 전향을 맹세하여 집행유예 4년형을 선고받았다.

한편 박갑동 등 일부는 이 때와 정판사 사건 때를 포함해서 총 세 번 노덕술에게 고문당했다고 주장하지만, 노덕술의 근무처 위치나 지위를 보면 적어도 이 때와 정판사 사건 때는 이관술을 고문하지 않았던 것이 확실하다. 노덕술에게 고문당했다는 것 자제가 신빙성이 떨어지는 박갑동의 말과 이를 인용한 소설 남로당 이외에는 근거가 없다.

이 무렵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출신인 박선숙(朴璇淑)과 결혼했다.[5] 이관술은 이미 박가야와 결혼을 했었기 때문에 중혼이었다.

2.4. 조선공산당 경성재건그룹 활동

이관술이 석방된 지 4일 후인 4월 13일 이재유가 서대문경찰서를 탈출했다. 이관술은 당시 기분을 회상기에 써놓았다.
내가 나온 지 3, 4일 후에 이재유 동무가 탈주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것은 나에게는 큰 충동을 준 사실로 나는 한시라도 빨리 도로 운동선상으로 들어가겠다, 그렇지 않으면 동지들이 있는 감옥에라도 다시 들어가고 싶은 일종 형용할 수 없는 초조한 심정이었다. 나와서 보니 내가 검거될 때 잔류해서 활동하던 동지들은 그간에 전부 잡혀 들어갔고 새로 활동하던 동지들 역시 이재유 사건으로 일망에 타진된 형세라 경성 중심의 운동은 전부 파괴되고 적막하기 짝이 없는 상태였다. 동지가 그립고 일본놈들의 박해가 분하고 조직이 파괴된 것이 원통하고 참말 그때 격한 심정은 무엇이라고 형용할 수 없었다.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946

이관술은 이재유를 찾으러 1934년 8월 중순 경성으로 갔고 1934년 9월 중순 박진홍과 이순금의 노력으로 이재유와 접촉한다. 이관술과 이재유는 장충단공원 뒤 <앵구> 약수터에서 암호에 의해서 서로 알아보고 손을 잡았다.

이재유와 만난 첫날 이관술은 지식인으로서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노동자가 되어 공장에서 일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재유는 이미 이관술에게 몇몇 학교의 독서회 조직을 맡길 생각이었던지라 자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적당한 부서에서 당장 활동을 개시해야 한다고 이관술을 설득했다.

이관술은 재판을 받아야 하는지의 문제도 이재유와 상의했는데[6] 이재유는 재판을 받으라고 조언했고 이관술은 이에 따라 재판에 출석하여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아 일단 자유의 몸이 된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이재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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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12월 25일 성탄절 이재유는 집을 나서며 돌아오지 못할 것을 예감이라도 한 듯 이관술에게 굳은 악수를 청했다. 이재유가 집을 나선 건 조직원 최호극과의 약속 때문이었는데 이재유와 이관술은 몰랐지만 최호극은 이미 경찰에 잡혀 이재유와의 약속을 경찰에 말한 상태였다. 이재유는 이관술에게 두 시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체포된 것으로 알고 달아나라고 재차 확인한다. 그리고 이재유는 잡혔을때도 고함을 치며 이관술이 자신의 체포 사실을 소문으로라도 확인할 수 있게 했다.

이관술은 오후 2시가 넘어가자 집을 나서 강원도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재유의 체포와 이관술의 도주 소식은 철저히 보도가 금지되었다가 4개월이 지난 1937년 4월 30일 이후 대대적으로 보도된다. 체포 당시 철저히 비밀로 붙이며 보도를 통제한 것은 이관술을 비롯한 남은 세력을 모두 잡고자 하는 목적 때문이다. 그러나 이관술은 잡을 수 없었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경성트로이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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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이후 이관술은 전적으로 박헌영을 따르게 되는데, 박헌영을 따르는 과정에서 그 이전 따랐던 이재류를 파벌이라고 매도한 점이 비판이 소지가 있다. 이재유는 이관술을 지키기 위해 체포 당시에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고문을 당하면서도 이관술의 위치를 말하지 않았는데, 정작 이관술은 그러한 이재유를 파벌이라고 비난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이후에도 계속 이관술이 소속된 그룹은 이재유를 파벌이라고 비난하곤 한다.
이재유와 파벌 운동을 한 것처럼 말을 하는데 실제로 나는 그런 생각에서 한 일이 아니고 나는 운동할 의사는 있었지만 그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이재유를 따라서 한 데 불과하다. 장래는 당신의 방침을 따라서 운동을 계속하고 싶다.
이관술

2.5. 경성 콤그룹 활동

경성콤그룹이 활동한 시기는 언론이 없어서 보도조차 되지 못할 만큼 폭압적인 시대였다. #

동생 이순금이 석방되자 이관술은 이순금과 수원에서 접촉한 뒤 1939년 1월 초 충주에 있던 김삼룡을 찾아가 새로운 항일 비밀결사 조직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이후 경성에서 김삼룡의 부인 이옥숙과 태창직물 소그룹을 만드는 것을 시작으로 6개의 공장 세포와 10개의 가두세포(조직원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는 조직)를 형성한다. 이들이 활동을 재개하자 이현상 권오직이 합류한다. 1939년 4월경 경성 콤그룹의 지도부가 구성되었다. 1939년 5월에는 석방된 박진홍과 정태식도 가담한다.
1938년 가을에 순금이 출옥했다는 소식을 듣고 수원 화홍문 앞에서 순금을 만난 다음 재회를 약속하고 다시 대구로 갔다가 39년 정월에 충북 충주로 가서 김삼룡 동무와 처음 만나 경성서 만나기로 상약(相約)을 하고 그길로 상경하였다. 상경 후에는 지금 삼룡 동무의 부인인 옥숙 동무를 통하여 이문정(里文町) 대창직물공장에 ‘콩그룹’을 만들기에 성공하여 5-6개의 공장세포 근 10개의 가두세포를 형성해가던 중(후략)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946

이관술은 경성콤그룹의 지도자로서 노동자 모임 교재 『노동자 리플렛』을 집필하고 '메이데이 투쟁방침서', '8.1 캄파니아 투쟁지침서'를 만든다. 이관술은 이론적 지도와 기관지 책임도 맡았다. 이관술은 1939년 9월에 기관지 『공산주의자』를 월간으로 창간해서 20부를 발간했다. 기관지는 1940년 3월호까지 이관술이 편집했다. 경성콤그룹의 기관지는 전국에 배포되어 읽히게 된다. 이관술은 「경성형무소의 반항사건을 보라」, 「남해제사의 동요사건」, 「염전인부 40명의 단결」, 「조선제강 양성직공의 단결」, 「예방구금령에 대하여」 등 기사를 직접 쓰면서 전국으로 조직을 확대한다.

기관지는 이관술이 직접 남선 일대와 청진, 함흥 등 북선 일대에 정밀한 배포망을 조직하여 노동자, 농민에게 배부하였다.
오빠는 이 월간 출판물의 책임자로서 이 비밀 출판물을 남선 일대와 청진, 함흥 등 북선 일대에 정밀한 배포망을 조직하여 노동자, 농민에게 배부하였다. 이 당시 오빠는 기술문제와 여비문제로 고물장수로 가장하여 고물 속에 출판물을 넣어가지고 자전거로 각지에 배부한 일이 많았었다. 한번 지방을 다녀오면 의복은 말 못할 만큼 누추하고 심히 궁하였다. 참말로 오빠는 열과 성의 화신이라고 나는 항상 감동하였다.
이순금

한편 당시 박헌영은 1939년 9월에 출소해 있었다. 이관술은 박헌영과 일면식도 없었는데 김삼룡과 이현상을 통해 박헌영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현상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있을 때 박헌영과 관계를 맺었다. 김삼룡은 이관술에게 ‘역사도 오래되고 운동 코스도 올바른 공산주의자가 지하에 잠복’하고 있다며 박헌영에 대한 접촉을 제안한다.

박헌영이 경성콤그룹에 들어간 경위는 일제의 이현상 피의자신문조서에 나온다. 이현상 피의자신문조서에 따르면 경성콤그룹의 지도자였던 이관술은 이현상을 보내 출옥한 박헌영이 변절하지 않았는지, 항일운동을 계속할 생각이 있는지 수차례에 걸쳐 시험했다고 한다. 이관술은 1939년 12월 12일에 박헌영을 만나고 경성콤그룹에 영입하기로 결정한다.

이관술, 김삼룡, 이순금, 이현상, 정태식, 박진홍 등은 이재유 그룹 출신이고 박헌영, 권오직 등은 화요계, 서중석 등은 상해파였다. 경성콤그룹은 계파를 불문하고 모든 운동가를 결합한 조직이었다.

경성콤그룹은 이관술의 동료교사인 신명균과 교류하며 조선어학회와의 연대도 모색했다.

이관술은 그 후 함경도로 가서 지도부를 구성하고 광산 노동자 조직, 흥남비료공장 노동자 조직 등에 착수하고 노조를 개편하고 기관지 출판과 편집책임자가 되었다.

이관술은 광부들을 조직하여 자신이 쓴 팸플릿으로 학습을 지도한다. 많은 광부들이 조직되어 조선혁명계림탄광노동조합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경성콤그룹은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했다. 게릴라전에 대비해 전기배선도를 확보해 놓기도 했다. 이관술은 노동자들과 산중에 동굴을 파고 은거하며 항일무장투쟁을 기획한다.
1939년 5월에 청진에 도착하여 장순명 김형관 등 동지들과 함께 광산 조직에 착수하고 일방 흥남공장의 조직화에 손을 대이면서 나는 산중 토굴을 파고 <붉은 길>이란 출판물을 간행하기 시작했으며 그곳 산중에 숨어있는 동무들과 더불어 무장 ‘빨치산’대(隊) 조직준비를 계획하였으나 그 일은 여러 가지 관계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예의 서대문서사건이 벌어졌다. 나는 사건의 수습을 위하여 김태준 동무의 집에 갔다가 숨어있던 형사대에게 잡히고 말았다.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946

서대문경찰서가 주도하여 서대문사건이라고 불리는 경성콤그룹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선풍으로 김삼룡과 이현상이 체포되자 이관술은 이를 수습하고 인력을 재배치하기 위해 경성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관술은 김태준 집에 갔다가 잠복한 형사들에게 체포되고 만다. 1941년 1월 7일이었다.

서대문사건을 시작으로 박진홍 등 중간 지도자들이 검거되어 조직은 급속히 마비되었다. 검거된 조직원은 150명이 넘었다.

한편 이관술의 할아버지는 이관술이 공덕리에 숨어살 때 세상을 뜨고 계모는 수배 중일 때 사망했으며 아버지 이종락은 이관술이 체포된 이듬해인 1942년 2월 6일 사망한다.

이현상도 옥중 단식투쟁의 결과 손수레에 실려 나왔다가 신기하게도 도피에 성공하여 덕유산으로 올라가 경상도 쪽에서 도피 활동을 했다.

이렇게 탈출한 이들은 박헌영을 찾으려 했지만 박헌영은 광주에 은거하며 꼼짝도 하지 않고 숨어 있었다. 그래서 조직원들은 박헌영이 해외로 탈출하지 않았나 추측하기까지 했다.[7]
대전을 중심으로 솥때움질을 하면서 전남 지방을 왕래하면서 주로 반전운동을 지도하다 8·15 해방의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조선인민보 1946년 4월 16일자 이관술 인터뷰

2.6. 광복 후 정치인으로서의 활동

1945년 8월 18일 서울 길거리에는 '위대한 박헌영 선생 나오시라!'는 삐라가 붙었다. 정태식이 폭로한 바에 의하면, 이것은 정태식, 조일명, 서득은, 이관술 등이 주동이 되어 박헌영 중심의 당 조직을 위한 사전준비로서 박헌영의 이미지 부상을 위한 것이었다.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박병엽 구술)
중앙부서의 조직국은 거의 콤 그룹 사람들 로 채운 것은 당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속셈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당 조직 준비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박헌영 직계인 김형선, 이현상, 김삼룡, 이관술 등으로 알려지고 있다.
남로당 연구. 34쪽

1945년 9월 11일 조선공산당이 정식 재건되었다. 이관술은 서완석, 김형선, 최원택과 함께 중앙검열위원으로 선출된다. 4명으로 이루어진 중앙검열위원은 당의 모든 분야를 감사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가진 기구였으며 이관술은 중앙검열위원 서열 1위였다. 또한 당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총무와 재정을 담당했다.

광복 후 조선공산당에 대한 민중의 지지가 대단했으며, 이관술은 조선공산당의 2인자이자 조선인민공화국의 선전부장이었기 때문에 광복 후 2개월이 지난 1945년 10월에 중도우익성향 잡지 ‘선구’에서 진행한 최초 여론조사에서 여운형·이승만·김구·박헌영에 이어 5위의 인기를 누렸다.

9월 6일 좌익이 주도한 조선인민공화국의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colbgcolor=#121212,#fef2ca><colcolor=#fef2ca,#121212>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중앙인민위원 이승만, 여운형, 허헌, 김규식, 이관술, 김구, 김성수, 김원봉, 이용설, 홍남표, 김병로, 신익희, 안재홍, 이주상, 조만식, 김기갑, 최용달, 리강국, 김용암, 강진, 이주하, 하필원, 김계림, 박낙종, 김태준, 이만규, 이여성, 김일성, 정백, 김형선, 이정윤, 김점권, 한명찬, 유축운, 리승엽, 강기덕, 조두원, 리기석, 김철수, 김상혁, 정태식, 정종근, 조동우, 서중석, 박문규, 박광희, 김세용, 강병도, 이순근, 김무정, 장기욱, 정진태, 이순금, 이상훈
후보위원 최창익, 황태성, 홍덕유, 이청원, 최근우, 김준연, 한빈, 양명, 최원택, 안기성, 정재달, 김오성, 권오직, 김두수, 장순명, 이광, 최성환, 이림수, 현준혁, 김덕영
고문 오세창, 권동진, 김창숙, 정운영, 이시영, 홍명희, 김상은, 장도빈, 김용기, 김관식, 리영 출처

9월 14일 조선인민공화국 선전부장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2월 19일 <조선공산당 중앙 및 도당 대표동지 연석회의 의사록>을 보면 "당의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지도자로 박헌영과 이관술이 언급된다.

이관술은 조선공산당을 대표하여 여러 정치적 행위를 했다.

이관술은 조선공산당을 대표하여 독촉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1945년 11월 11일 기자 회견에서 이관술은 독촉 참가에 대한 질문에 통일전선을 이루기 위한 참가 결정이라고 밝혔다. 이관술은 기자들에게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완전히 제외한 통일전선”이어야 하며 만약 그렇지 않다면 “통일전선이라는 미명 하에서 일본제국 잔유세력과 친일파, 민족반역자의 도발을 허하는 반민족적, 반인민적 전선”일 뿐이라고 경계했다. #
파일:이관술중경임정담화.jpg
1945년 11월 19일 <자유신보> 중경 임정에 대한 이관술 담화

이관술은 중경 임시정부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중경 임시정부에 대한 나의 태도는 종래 상식적인 견해에서 아직 더 무슨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국내와 해외의 모든 진보적 민주주의세력을 규합하여 민족통일정권을 세워야 하는 것은 이미 보편된 정치 상식이 아닌가 싶습니다. 중경임시정부의 성격을 아직 명확하게 규정지을 수 있는 시기라고는 생각되지 않음으로 앞으로의 귀추를 살펴보지 않고 단정을 내리기는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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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 31일 <자유신보> 하지 중장과 회견한 공산당 이관술

이관술은 12월 30일 미군정 사령관 하지를 만났다. 하지 중장이 각 정당 대표들을 군정청으로 불러 3상회의 결과뿐 아니라 신탁통치보다 앞서 만들 임시정부 구성을 설명하는 자리였다. 대담 결과는 이관술이 기자들 앞에서 직접 정리해 밝혔다. #
“나는 신탁통치를 절대 반대하며 현재 우리의 노선은 민족통일전선에 있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다만 다른 공산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이관술은 소련의 지령이 있은 후 찬탁으로 돌변한다.

심산 김창숙이 이관술이 소련의 지령으로 찬탁으로 돌변한 이관술과 공산당을 비난하는 글을 자서전에 남겼다. 김창숙 자서전을 보면 당시 공산당 적색테러의 공포에 떨던 사회분위기도 엿볼 수 있다.
병술(1946년) 1월 2일 저녁때 들으니 박헌영이 평양으로부터 돌아와서 당 간부를 소집하여 비밀회의가 있었다는데 그 상세한 내용은 듣지 못했다. 3일 아침 반탁대회장에 나가려다가 마침 공산당의 기관지를 보니, 공산당은 탁치를 지지한다는 선명서가 크게 게재되어 있었다. 그것을 읽고 나는 분통을 이기지 못해 형기를 시켜 젊은이들에게 대회장에 가지 말게 하고, 공산당을 경고하는 글 한 통을 급히 초했다. 공산당이 나라를 파는 죄를 선토하여 그 글 내용이 썩 결렬했다. 젋은지들에게 주어 옮겨 써서 각 신문사에 돌리라 하니 그들은 모두 깜짝 놀라 그만 두라고 권하였다.

"너희들은 내가 화를 겁내는 줄 아느냐?"

그래도 젊은이들은 굳이 중지하려고 했다.

"이 경고문이 한번 나가면 저들은 필시 선생을 해치려 들 것이니 걱정됩니다."

나는 성을 내어

"너희들이 기어코 옮겨 쓰지 않으려느냐?"

고 호통하고 지팡이로 때리려 하니 젊은이들은 공손히 사과하며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꼭 이 들을 발표하려면 어디 비밀 처소를 예비해서 화를 피할 도리를 차리는 것이 옳습니다."

라고 말했다. 나는 소리를 질렀다.

"나는 구차히 탁치 아래서 숨어 살기를 바라지 않으니 화가 두려워 숨는 일은 나는 않겠다."

신문사는 모두 화가 두려워 감히 싣지 못했다는 뜻으로 답변했고, 동아일보사의 편집인은 애초에 원고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기자 중에 붉은 물이 든 자가 숨겨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직접 가지고 간 원고를 주었더니 그 이튿날 특별히 전문을 개제하여 전국에 전파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험하다 생각하여 숨으라고 권했다.

"나는 화를 겁내서 피해 숨을 사람이 아니다. 장차 공산당 지도자들을 불러 직접 죄를 따지겠다."

하루는 젊은이 몇을 시켜 박헌영, 이관술, 이영, 최익한, 이승엽, 홍남표, 이우적 등 여러 사람을 불렀다. 박, 최, 홍 및 양 이는 오지 않았고, 오직 공산당 조직부장 이승엽과 해방일보 주필 이우적 두 사람만 같이 왔다. 내가 두 사람만 부른 것이 아닌데 다른 사람은 어찌 오지 않았는가 물으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급한 일로 움직이기 어려워 자기들 둘이 대표로 왔다는 것이었다.

"군 등은 나의 경고문을 본 감상이 어떤가?"

"선생은 우리 공산당을 나라를 파는 반역으로 배척하다니 너무 과격한 말이 아니겠읍니까. 우리들은 결단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사국의 탁치를 환영한다니 나라를 파는 반역이 아니고 무엇인가?"

"지금 우리나라의 정세를 본다면 최고 5개년의 탁치를 불가불 받아야 합니다. 오늘날의 정세를 알지 못하고 공연히 반탁만 외치는 것은 실로 국가의 앞날에 해로운 일이지요. 또한 신탁통치 운운한 것도 각국 말의 해석이 달라서 소련, 일본 말로 해석하면 곧 후견의 뜻이 됩니다. 우리나라 현 정세가 실로 자립할 힘이 없으니 최고 5개년의 후견은 받지 않을 수 없읍니다."

"군 등이 소위 후견이라 함을 일본 민법의 술어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소위 후견이라 하는 것은 미성년자 및 정신이상자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닌가?

저 미 영 소 중 4국이 우리 한국을 3, 4세의 어린애로 보아 후견한다면 16,7년은 걸릴 것이요, 우리 한국을 정신이상자로 본다면 정신이상은 종신 불치의 병이니 후견은 필시 무기한이 될 것이다. 그대들이 후견을 달게 받고 싶어 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 아니고 무었이냐?"

그들은 말이 막히고 딸려서 답변이 궤변과 거짓으로 전혀 조리에 맞지 아니했다.

"군 등은 황잡 부당한 말로 나를 속이고 꺾으려 하나, 나는 나대로 주견이 있어 군들에게 움직여질 바 아니다. 내 이미 글을 지어 경고한 바이거니와 다시 군들을 불러 말하는 것은 군 등의 반성할 길을 열러 주려는 것이다. 내 듣건대 공산당의 이번 행동은 최고간부 몇 사람이 북한주둔 소련군 사령관의 지시를 받아 태도를 돌변해서 찬탁하게 된 것이라니 통곡할 노릇이다. 내가 그대들에게 바라는 바는 모름지기 지금부터 찬탁이 국가 민족에게 대죄를 짓는 것임을 깨달아 급히 당 전체대회를 개최해서 찬탁을 부르짖는 자들의 매국 행위를 성토하고 모든 간부들을 교체해서 새 출발을 하여 함께 반탁진영으로 돌아온다면 국가 민족을 위해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는가."

그들은 그래도 <후견>을 역설하고 반탁이 잘못이라고 해석하는 것이었다. 내가 다시 <후견>을 주장하는 죄는 찬탁하는 죄보다 더 크다고 했더니 저들은

"선생의 고집은 한 때 주고 받는 말로 풀 수 없오이다. 탁치와 후견 문제에 대한 각종 해석 문자를 가지고 다시 오겠읍니다."
하고 돌아갔는데 그후 다시 오지 아니하였다.

10여일이 지나 이관술이 찾아 왔다.

"군은 혹 내가 이승엽, 이우적과 문답한 말을 들었소?"

"진작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선생이 공산당을 지적하여 매국 반역이라 함은 옳지 않았읍니다."

"군 역시 탁치를 후견으로 해석하는가?"

"그렇습니다."

"군은 제1차 반탁대회 때에 통곡을 하며 연설한 사람이 아닌가. 그 후 며칠 못가서 태도를 돌변하여 찬탁을 주장하니 소련군 사령관의 지시에 팔린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처럼 주전이 없단 말인가?"

"소련군이 조선에 주둔하는 것은 미군의 침략을 제지하려는 것입니다. 소련군의 지구적인 주둔은 필시 조선인의 복리가 될 터인데 어찌 그 지시를 안 받을 수 있겠습니까?"

"군의 말은 당 전체의 의사인가?"

"그렇습니다."

나는 드디어 화가 나서 꾸짖었다.

"지금 공산당이 소련의 지구적인 주둔을 원한다면 이는 이리를 방 안에 끌어들이는 격이다. 저 미군들도 반드시 이를 빙자하려, 철수하지 않을 것이니 나는 미, 소간의 틈이 반드시 이로 인해 벌어질 것을 걱정한다. 우리 한국은 필시 미, 소의 각축장이 되어 나라는 독립할 날이 없어질 것이니, 군 등의 매국의 죄는 이에 더욱 더 클 것이다."

"미국이 바로 이리지요. 저 이리를 견제하려면 소련이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소련군이 오래 주둔할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군의 말을 빌릴 것 같으면 저도 역시 이리요, 이도 역시 이리다. 군 등은 한 이리를 견제하려고 다른 한 이리를 끌어들이는 격이니, 나는 우리 한인이 두 이리의 이빨에 종자도 없어질 것을 두려워 한다. 그 마당에 이르면 군들은 반드시 매국의 죄를 변명할 도리가 없을 것이 아닌가."

이관술은 성이 난 기색이었으나 변명할 말이 없어 벌떡 일어나서 가 버렸다.
얼마 후에 또 최익한이 왔기에 그의 견해를 타진해 보니 역시 이승엽, 이관술과 대체로 별 차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기록하지 않는다.
심산 김창숙 자서전

이관술은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으로도 선출된다.
이관술씨는 그의 피로 쓴 지하운동의 과거를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의 과거 생활 중 가장 유쾌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체포되었을 때 박헌영 동지와 동생 순금의 주소를 말하라고 무서운 고문을 당할 때 내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중대 기로에 처했는데 나는 죽기로 맹세하고 13일간을 단식하다가 전에 함남 지방에서 일하던 것을 이용하여 허구를 꾸며서 그들을 감쪽같이 속인 일이다. 그리고 3일간을 단식한 후 쓰러진 체하여 의사를 부른 사이에 미리 병에 받아 놓았던 커피를 머금고 있다가 의무실에 가서 각혈을 하는 것같이 토하여 보석을 하게 만든 것 등이다. 나의 쓰라린 경험을 말하면 한 없다. 이재유 동지와 강원도로 낙향하게 되자 양주로 가서 참외막을 만들고 그것을 아지트로 쓰면서 한 해 참외농사를 하여 가며 서울과 연락하다가 이재유 동지가 돌연 체포되었고 나는 피하여 4개월 동안을 엿장수 쓰레기장수 봇짐장수 등으로 몸을 감추고 다녔다. 1937년 12월 대구로 갔을 때는 몸만 감추기도 대단히 곤란한 때라 처음에는 다리 밑을 집으로 삼았고 거기까지 마수가 뻗치게 됨으로 이곳저곳 다리 밑 집을 이사다녔던 것이다."
조선인민보 1946년 4월 16일자 이관술 인터뷰

2.7. 투옥

이관술은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투옥되고 그 결과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당시 학살당하게 된다.

1946년 5월에 다른 피의자들이 체포되었지만 이관술과 권오직은 체포되지 않았다.

투옥 중인 1947년에 반곡초등학교 건물을 신축[8]할 때 542평(1791.74㎡)의 땅을 기부했다.
파일:반곡초공적비.png
반곡초등학교 공적비. 이관술이 542평을 기부했다고 적혀 있다.

2.8. 사망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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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술은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3일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당시 처형되었다.

북한군은 남침 이후 정판사 사건 당시 이관술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던 대한민국 국민들을 집요하게 찾아내 인민재판했다. 대표적으로 민주화운동가이자 한글 기계화의 역사서라고 할 수 있는 공병우가 이관술에게 불리한 진단을 했다는 이유로 북한군에게 인민재판당하였다. 백병원으로 유명한 의사 백인제 또한 이관술에게 불리한 진단을 했다는 이유로 납북되었다.
1950년 6.25가 터졌다. 다들 부산으로 피난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나는 이승만 대통령의 방송을 믿고 서울에 남아 있기로 하였다. 용맹한 우리 국군이 남침해 온 공산군을 물리치고 있다더니, 난데없이 28일 아침에 공산군이 서울에 들이닥쳤다. 이북에서 내려온 해방군이란 사람들이 우익 인사들을 한강변 모래밭에 끌고 가서 모래 구덩이를 파고 총살하여 묻어 버린다는 소문이 돌자, 서울 장안은 살기가 가득한 분위기가 되었다. 내 평생 죄를 짓거나 남에게 잘못한 일이 없다고 자부하지만, 우익 사람을 마구 죽인다는 말에 겁을 먹고 2주일 가량 피신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날로 나는 정치보위부에게 붙들려 갔다. 아내는 타이피스트에게 내가 어디로 끌려나가 보고 오라고 미행을 시켜 국립도서관 자리로 끌려간 것을 알았다고 했다. 보위부에 나를 끌고 가서 시멘트 바닥에 꿇어않혔다. 군이 세 사람이 대뜸

"네가 정판사 사건 때 허위 진단서를 썼지?"

하며 으름장부터 놓았다.

"아닙니다. 저는 사실대로 썼습니다."

라고 대답을 하니

"이 새끼들 허위 조작 때문에 우리 애국 동무들이 대전 감옥에 갇혀 있다가 남쪽으로 후퇴하던 국군들에게 모두 학살을 당했어. 이 새끼."

모진 고문을 당하고 정신을 잃었다.

이튿날 아침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래층 어두운 독방이었다. 나를 그 방까지 어떻게 옮겨 놓았는지 알 수 없었다. 얼굴과 양쪽 다리가 퉁퉁 부었고, 피하 출혈로 검은 반점이 두 다리에 번져 있었다. 코에서 피를 흘렸는지 입었던 모시 바지와 저고리에 피가 무수히 엉기어 붙어 있었다. 나는 일어설 수도 없었다. 나는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꼴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1946년 내가 경성 의학 전문 학교 안과 교수로 근무할 때의 일이었다. 나는 서울 지방법원 판사로부터 이관술이란 사람의 눈을 검사하고 상해 진단서를 제출해 달라는 공문서를 받았다. 어느 날, 순경이 이관술이란 사람을 나에게 데리고 왔다. 이관술이 이른바 '정판사 사건'으로 경찰에서 고문을 당해 눈이 멀었다고 진술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내려 달라는 담당 검사의 의뢰였다. 내가 진찰을 해 보니 외상이 아니라 당뇨병으로 생긴 백내장으로 실명한 것이었다. 나는 전문의사로서 사실대로 진단서를 썼을 뿐이다. 내가 눈과 소변을 검사했던 이관술이가 나 때문에 대전 감옥에서 후퇴하는 국군에게 학살을 당하였다는 말을 어제 인민군에게서 들었을 때, 인민군이 나를 총으로 쏘아 죽일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때는 전시이고, 나의 진단서 때문에 그가 죽었다면 어찌 나를 살려 둘 리가 있겠는가.

나는 아무래도 오늘 밤 한강 모래밭에 끌려 나가 총살당할 것만 같았다. 나는 평소에 가족에게 무척이나 무관심했지만 오늘밤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죽기 전에 가족을 만나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공병우 자서전: 나는 내 식대로 살았다.

백인제가 공산당의 미움을 사게 되고 또 나중에 납북되는 한가지 이유가 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조선정판사 사건' 심리과정에서 고문 여부가 크게 문제가 되었을 때 백인제가 감정인으로 그 재판에 관여하면서 생긴 것이다. '조선 정판사 사건'이란 1946년 5월, 혼란기를 틈타 남한의 경제를 교란하고 또 당의 경비를 조달할 목적으로 조선공산당이 일으킨 지폐위조 사건을 가리킨다. 공산당 기관지를 발행하던 해방일보사 권오직 사장과 이관술은 일제 말 조선은행권을 인쇄하던 치까자와 인쇄소의 후신인 조선 정판사 박낙종 사장과 송언필 부사장에게 위폐제작 임무를 맡겼는데, 거기에 따라 총액 1200만원의 위조지폐를 시중에 흘렸다가 경찰에 발각되어 권오직과 이관술을 제외한 피의자 전원이 체포된 사건으로 미군정 당국이 공산주의자에 대하여 강경책을 펴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46년 7월 29일의 제1차 공판에서부터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 여부를 둘러싸고 검찰과 변호인단 사이에는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8월 17일 오전 10시에 개정된 14차 공판에는 피고들의 상처의 감정인으로서 외과의 최고 권위인 백인제와 안과의 권위인 공병우가 출두하여 피고들을 진찰 감정하고 감정서는 추후 서면을 통해 재판부에 제출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9월 2일 제출된 감정서에서 백인제와 공병우는 고문의 흔적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고문을 받았다는 피고인들의 주장은 재판부에 의해 배척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이때부터 공산당은 백인제를 적대적인 인물로 대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백인제는 공산군 점령 20여일 만인 1950년 7월 19일 박현환의 집에서 체포되어 동지들과 동생 백붕제와 함께 납북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그러면 왜 백인제는 피랍의 운명을 맞게 되었을까? 전종휘의 설명을 들어보자.

우리 백선생님께서 6.25 사변중 공산당에 의하여 의료계 인사 중에서는 제1호로 납치되어 납북되게 된 이유에 대하여 어느 정도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 할 듯합니다.
(중략)
아마 이것이 더 큰 공산당원들의 미움의 근원이 되었으리라 생각되는데, 예의 공산당이 저지른바 정판사의 위조지폐 사건 공판 때 선생님께서 증인 중의 한 분으로 선정되어 나가게 되었는데 피고들이 고문에 못 이겨 거짓 시인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에 고문에 의한 신체적 상해의 유무를 판정하는 의사증인으로서, 공산당 피고인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서슴지 않고 하였으므로 그 원한 때문에 적대시당하게 되었다고 보겠습니다.
(중략)
체포된 백인제는 조카 백낙환의 증언에 의하면 여러 동지들과 동생 백붕제 등과 함께 일단 미도파 백화점 옆에 있었던 옛 국립중앙도서관 건물에 억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2주 뒤에는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다고 전해진다. 백인제는 전종휘의 술회처럼 정치범으로 체포되었으며, 동생 붕제는 참고인 자격으로 소환되었다가 풀려나지 못하는 비극을 맞게 되었다. 백낙환과 백인제의 장남 백낙조는 자신들의 아버지와 삼촌의 구명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공산당 치하에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중앙도서관 등 억류장소로 짐작되는 곳들을 찾아가 보았으나 시체와 다를 바 없는 형색의 다른 수용자들만 보았을 뿐 인제, 봉제 두 형제는 만날 수 없었다.
선각자 백인제

3. 논란 및 비판

3.1. 북한 지령을 받기 위한 무전기 설치

광복 후 박헌영은 이관술의 집에 무전기를 구비해놓고 북한 측과 연락을 주고 받았다.[9]

즉 해방정국 박헌영을 포함한 공산주의자들이 북한의 지령을 원활히 받게 하는 것은 이관술의 역할이었다.

3.2. 북한으로부터의 불법 자금 수령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과는 다른 논란으로, 소련 <테렌티 쉬띠코프 비망록>, 박병엽 회고록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에서 이관술의 활동시기 조선공산당이 북한으로부터 지폐를 받는 형태로 자금을 지원받았다는 것이 교차검증된다. 박헌영의 최측근으로서 조선공산당의 재정부장인 이관술이 이를 몰랐을 가능성은 없다. 실제로 미국 정보부도 이관술이 북한발 불법 지폐 유통의 주범이라고 지목하고 있다.
1945년 말까지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은 북한의 공산당에 고무되어 소련으로부터 지시를 받는 자들이라는 것이 분명했다. 그 문제에 관한 주한미군정의 첫 번째 공식적인 추측은 라디오를 통해 1945년 11월 1일 하지 장군에 의해 발표되었다.

“남한의 공산주의 활동을 조종하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명확한 증거는 아직 얻지 못했고, 증거를 확보하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정보원들은 지방의 공산주의자들이 평양의 본부에 종속되어 있고 지시를 받는다고 보고한다. 한국 전체의 공산주의자 지도자는 최익한이라고 알려져 있고, 김단야(김태연)와 최무정도 추가적으로 중요한 인사들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조선인민공화국의 최근 회담에 참가한 한 북한 인사의 진술이다. 그는 평양의 소련군 사령부로 불려갔었다. 소련인들은 그에게 그가 대표로 선정되었기 때문에 서울에서 열리는 회담에 참석이 요구될 것이며, 소련 측 경계선의 전초기지를 통과할 수 있는 통행증이 제공될 것이라고 말했다. 며칠 후에 이는 자발적인 참가로 수정되었다. 소련 측 경계선의 전초기지를 통과하는 통행증은 발급되었다고 했다. 이 발표는 회담의 의장인 허헌의 발표와 일치하지 않았는데, 허헌은 북한에서 오는 대표들은 스스로 위험을 무릅쓰고 참석한다고 말했다.

“외부로부터의 지원을 보여주는 정황 증거는 다음과 같은 것이 포함된다. a) 서울에 있는 소련 영사의 존재, b) 남한에서만 사용이 가능한 북한 내 조선은행의 모든 돈을 남한에서 사용하지 못하도록 소련 측이 인출하여 몰수한 것, c) 공산주의자들이 외부로부터, 짐작건대 북한으로부터 자금을 받아왔다는 보고들, d) 300명의 공산당 조직원들이 북한의 함흥에서 남한으로 보내질 것이라는 보고들, e) 내부의 사건들이 지역 공산당 지도자들의 추정 역량을 넘어서는 조직과 동향을 보여준다는 것.”

남한의 이 파견단은 북측으로부터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고 있었는데, 이는 갑작스럽고 잠깐 동안 당혹스럽게 하는, 신탁통치에 관한 공산당의 태도와 관련있는 1946년 1월 3일 당의 입장 변화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다. 비록 이 때에 미군 당국은 심적으로 확신하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이후 4월 초에 남한을 지나는 한 한국인으로부터 뺏은 문서는 미군 당국의 확신이 근거가 충분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한국의 양측에 있는 공산주의자들 간에 실제 연락이 존재한다는 첫 번째 명백한 증거는 사실 1946년 1월 말 최헌리(Tch'oi Hon Ni)가 경주에서 강도 행위를 하다가 체포되었을 때 밝혀졌다. 최는 다섯 명의 다른 자들과 함께 북한 제1의 한국인 공산주의자 지도자 김일성 장군에 의해 보내졌고, 남한의 공산당 우두머리인 박헌영에게 보고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진술했다. 최는 자신이 그 집단의 하급 당원일 뿐이며, 그 집단의 목적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주장했다.

진정한 좌와 우의 연합체를 만들고자 했던 남조선대표민주의원의 실패는 정치 고문 랭던에 의해 소련의 음모 탓으로 돌려졌다. 랭던은 1946년 2월 22일의 무선 전보를 통해 하지 장군이 현재의 민주의원을 한계까지 지지할 것인지, 아니면 민주의원을 진짜 연합체로 전환하기 위해 분투할 것인지의 딜레마에 직면했다고 계속해서 지적했다. 전자를 선택한다면 미국은 파시스트와 친일파 같은 사람들을 지원한다는 비난을 받을 것이고, 반면에 후자를 선택한다면 최종적으로 나타나는 민주의원은 매우 강하게 좌측으로 기울어질 것인데, 북한에서 내려오는 집단에 의해 5대 8의 기준(도의 수에 따라서), 그렇지 않더라도 2대 1의 기준(인구 수에 따라서)에 민주의원이 맞닥뜨릴 때, 소련의 지원을 받는 이 그룹들이 민주의원을 지배하게 될 것이었다. 이 딜레마는 전체 기간 동안의 결정적인 요소였다. 안정된 정치 집단이 남한에 형성되어, 북한에서 소련의 승인을 얻은 집단과 통합된 정치 기구를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이후에 결합한다면, 장래의 한국 정부는 바로 극좌의 품으로 넘겨질 것이었다.

동시에 1946년 2월 22일 하지 장군은 정치 상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소련 측은 북한에 그들의 집단을 세우고 있고(2월 8~9일에 수립된 임시인민위원회), 조선민주당(Chosen Democratic Party), 연안독립동맹(Yenan Independence Alliance), 조선공산당(Korean Communist Party)이라는 세 개의 당 이름 하에 공산주의자들을 위장하고 있다. 분명한 공산주의자인 여운형에 의해 지도되는 남한의 인민당(People's Party)[조선인민당]은 ‘민주적’ 사회단체로 인정받고자 하는 여러 저명한 집단들을 모으고 있고, 한편 우익과 중도는 뛰어난 지도자들을 배경으로 해서 집단들의 대통합을 추진하고 있다. 북한의 통제는 최근 강화되었다. 공산당의 입국 허가가 없는 남측으로부터의 통행자는 미국의 스파이로 체포되고 있다. 소련은 그들의 정부를 북한의 민주적 대표로서 우리가 받아들이기를 강요할 것이 틀림없고, 동시에 남한의 공산주의자 대표들에게 공산주의자에 의한 조선과도정부의 통치권을 주도록 우리를 강요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남조선대표민주의원의 위신을 계속 유지되도록 계획하고 있고, 한국인들의 전적인 지지를 얻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며, 공산주의자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진보 언론이나 다소 좌파인 언론에서는 나를 공격하겠지만, 현지에서의 그 외 다른 조치는 치명적일 수 있을 것 같다.”

현재까지 공산주의자 조직의 북측과 남측 지부가 연락한다는 암시를 주는 첩보는 제24군단의 정보참모부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명백한 증거가 있었는데, 1946년 3월 초에 남한의 공산당으로 자금을 보내기 위한 협상이 서울의 소련 영사관에서 있었다. 소련은 조선공산당에 자금을 지원하기로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한국을 지배하기 위한 이후의 활동들을 지원하기 위해 7,000만원의 금액을 약속했다고 한다. 박헌영은 위의 금액에서 2,000만원을 가져간 것으로 보고되었는데, 그 돈은 대체로 신문을 발행하는 자금을 대는데 사용했다.

동시에 “평소 믿을 만한 한국인 정보원”으로부터 정보가 밝혀졌는데, 소련은 남한에서의 조직 작업에 이용하기 위한 조선은행 지폐의 여분을 구하려는 특별한 목적으로 북한에서 소련군 화폐를 발행했다. 또한 1946년 2월 2일 민주주의민족전선(Leftist Democratic People's Front)의 조직을 위한 서울의 예비회담에서는 『조선인민보』의 지원을 위한 약 1,200만원의 금액이 가결되었다고 보고되었는데, 이 신문은 남한에서 공산당의 공식적인 기관지였다. 『조선인민보』의 편집인이자 발행인 겸 사장인 홍증식은 위의 정보원에게 신문사를 경비하기 위해 매일 약 8,000원이 지출되고 있다고 말했는데, 이와 같은 금액은 당의 자금에서 나온 것으로 추론된다. 홍증식은 이상하게도 이 직업을 갖기 전에는 비교적 가난한 사람이었는데, 1946년 9월부터는 꾸준히 더 부유해졌다. 그 외 많은 공산당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로 좋은 옷과 자동차를 과시하기 시작했고, 호화로운 접대를 하기 시작한 것이 사실이었다.

1946년 3월 말에 하지 장군은 상당한 양의 새로운 돈이 남한에 들어와 있는데, 이 돈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는 지극히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하지 장군은 계속해서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이 6,000만원(아마도 공식적인 일본의 지원으로부터)으로 시작했으나, 점차 다 써버렸고, 다시 채워지고 있는 중이라고 지적했다. 하지 장군은 연합군최고사령부에 보내는 전문에서 “비록 그 돈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규명할 수는 없었지만, 소련 대표단(공동위원회를 위한)의 도착과 동시에, 공산주의자들이 사용하기 위해 수십만 원의 돈이 남한에 들어왔다는 증거가 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을 소련 측의 새로운 혹은 예상치 못한 방식이라고 여겨서는 절대 안된다. 단지 그들은 다른 지역에서와 다를 바 없다.”

워싱턴 당국에서는 즉시 추가적인 내용을 알고 싶어 했고, 공동위원회에 참가하기 위한 소련 대표단원들, 또는 서울의 소련 영사와 회합하는 현지 한국인 정치 지도자들의 규모에 대한 정보를 요청했다. 방첩대는 영사관을 자주 드나드는 사람들을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정보원들은 실제 정당에 참가하는 사람들로 구했다. 일주일 이내에 하지 장군은 답장의 형태로 다음의 정보를 전문으로 보냈다.

“일관되고 믿을 수 있는 보고들을 받았고, 남한 공산주의자들의 지도자인 박헌영과 인민당의 당수 여운형이 최근 3~4달 간 소련 영사관을 빈번하게 방문했음을 확인하였다. 몇몇의 보고에서는 두 사람 모두 영사관에서 자주 거주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영사관에서 한국인들과 정치 회담이 열렸다는 믿을만한 근거가 있다. 우리는 북한의 공산주의자이자 인민정부의 지도자인 김일성이 최근 서울에 도착했고, 영사관에서 머물고 있다는 소문에 대해 조사 중이다. 추가적인 보고서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곳에서 ‘스탈린그라드’로 알려져 있는 숙사에 거주하는 소련 대표단 내 적은 수의 단원들은 한국인들의 많은 접대에 참여하고 있다. 어떻든지 간에 정치 지도자들은 알려지지 않았다. 소련군의 대위이자 소련 대표단의 단원이었던 한 한국인은 현지 한국인들과 회담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추가적으로 분명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이 문제에 관한 지속적인 감시를 유지하고 있다.

추가 정보는 다음과 같다.

“...다음은 공동위원회 소련 대표단의 통역으로 서울에서 근무 중인 한국계 소련군 장교, 김소령과 스네그(Sneg, 이름은 알 수 없음) 소령의 활동 내역이다. 김과 스네그는 사복을 입고 서울의 여러 곳을 빈번하게 방문하고 있다고 하며, 매번 다른 운전수를 요구한다고 보고되었다. 그들은 대개 운전수를 목적지 근처에 기다리게 하고, 남은 거리는 걸어서 이동하거나, 차량 근처를 걸어 다니면서 다양한 한국인들과 대화를 나눴다.

남북의 공산주의자들과 소련 사이의 밀접한 관계는, 확실히 자리를 잡은 당의 방침을 따라서 남한 공산주의자 지도자들과 기관지에 의해 주창되는 친소련적 선전의 지속적인 흐름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현지의 “신문들” 가운데 가장 강경하게 목소리를 내는 신문은 『조선인민보』였는데, 서울에 있는 공식적인 공산당 기관지이고, 이는 공산당 측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게다가 더 많은 증거가 이 시기에 드러나게 되었는데,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이 정치 학교에 참석하기 위해서 북측으로 보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46년 5월 16일 조선공산당의 서울 본부에 대한 방첩대의 급습에서 노동자 정치 학교에 참여하기 위해 북한의 원산으로 향하는 당원의 실제 통행 허가증이 발견되었다. 통행증의 뒷면에는 사람 이름이 소련어로 적혀 있었다. 마찬 가지로 조선공산당 본부에서 획득한 다른 문서에는 평양의 정치 학교로 파견될 4명의 한국인들에 대한 신임장과 위임장이 있었다. 8월 7일 조선인민당의 조직부장인 김세용의 자택을 급습했을 때에는 다른 공산주의자들의 북한 통행증이 발견되었다. 그 통행증은 박헌영에 의해 서명되었고, 일부는 소련어로 적혀 있었다.

1946년의 늦봄과 초여름까지 북측과 남측 간의 연결은 모든 의혹의 그림자 너머로 확실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5월 16일 서울 본부의 급습에서 압수한 조선공산당의 장부들을 통해, 여러 번의 북한 방문이 매달 당의 자금에서 지원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특별히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한 번의 단독 방문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실수인 것 같은데, 특정 예금으로서 받은 돈의 실제 자금줄을 보여주었다. “1월 7일, 정재달이 북측에서 1만원을 받았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또한 중요한 점은 군정 법령 제55호(정당의 등록)의 요건에 따라 군정에 보고된 영수증과 당의 지출 내역이 압수한 장부들의 내역과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 장부들은 미국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다. 게다가 1945년 11월부터 1946년 5월까지 기간의 총 수입 금액은 284만 6,185원 25전에 이르렀는데, 그 중에 약 248만 7,100원은 나중에 위폐 사건의 중요 피고인인 이관술로부터 받았다. 당을 위한 돈을 받을 때, 사람 이름을 쓰는 이 체계는 실제의 출처를 드러내지 않고 효과적으로 감추었다. 이관술은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출처 불확실한 주요 자금을 가지고 있었고, 이 돈을 언제든 당의 자금이 줄어들었을 때 꺼내어 주었다는 풍부한 증거가 있었다. 이 주요 자금은 더 중요하게 보호되고 있는 다른 장부들에 의해 분명하게 밝혀질 수 있을 것이지만, 미군 조사관들은 그런 장부들을 절대 찾을 수 없었다.

물론 남한의 좌익 지도자들이 정책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북측의 상대들을 자주 방문한 것이 북측과 남측의 밀접한 동맹 관계를 만든 것은 분명하다. 극좌 세력으로부터의 이 외부 지령은 첫해동안 내내 미군의 점령을 괴롭혔다. 사실 이 꼭두각시 지도자들의 주요 목적은 미국이 점령하는 지역에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았고, 이는 미국에 의해 외관상 훌륭하게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불가능하게 할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안절부절 못하고 절망하는 한국인들을 극좌 진영의 겉모양만의 위안으로 몰아넣으려는 것이었다. 만약 이러한 목적이 완수될 수 있었다면, 소련은 국제 관계라는 장기판에서 최소한 말 하나를 추가하여 영향력이 상당히 강해졌을 것이 분명했다.
미군정 문서 소련과 남한 공산주의자들의 관계

3.3. 불법 공산당 비밀정부 운영

위 북한으로부터의 불법 자금을 숨기기 위해 이중장부를 운영하였으며, 당연히 불법이었다. 정판사 재판에서 이관술 본인도 인정한 사실이다.
점령이 시작되자마자 남한에 있는 공산당의 전략은 미군정의 노력들을 사보타주하여 미국 점령 지역을 혼란스럽게 만들고자 한다는 것이 분명했다. 이는 한국의 대중들 사이에 어느 정도의 자극을 유발하는 몇몇의 상황 혹은 활동의 형태로 나타났고, 사건의 진실에 비해 지나치게 포장되었다. 고발, 선전, 소문, 혼란 등과 같은 먹구름이 밀려왔고, 미군정 아래의 남한에서 만들어진 진전은 자주 순간적으로 흐릿하게 되었다. 특별히 아프게 느껴졌던 점들은 미곡 수집, 인플레이션, 군정 내의 인사, 토지개혁의 결여 혹은 한국인들로 구성된 정권의 부재 등인데, 마지막 두 가지는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북한의 상황과 반대되는 것이다. 폭력과 화폐 위조, 원래의 의도와 상당히 다른 뜻으로 미국의 성명을 왜곡하는 행위 등을 일으키도록 선동하는 조직들은 모두 공인된 공산주의 전략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활동들은 아주 많고 다양해서 예를 들기조차 불가능하다.

일례로, 1945년 12월 21일 이름이 알려진 공산주의자이자 『조선인민보』의 사장인 홍증식은 사실과 정반대되도록, 아놀드(Archibald V. Arnold) 장군이 한국민주당(Hankook Democrats)에 의해 “매수”되었으며 공산주의자들을 반대했다고 밝혔다. 홍증식은 이것이 아놀드 장군이 군정 장관 자리에서 “해고”된 이유라고 말했다.

1946년 1월, 공산주의자들의 통치를 받는 조선학생스카우트(Korean student scouts)는 미국인들을 위해 고용된 통역사들이 그들의 직업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벽보들을 만들었다. 같은 달의 말에는, 북한의 평양 공산당이 그들의 목적을 추진하고 우익 단체들을 테러하기 위해 남한으로 사람과 돈을 보내고 선전 활동을 시킨다는 것이 보고되었다. 또 3월 25일에는 방첩대가 북측에서 내려온 새로운 테러 조직을 보고했다.

4월에는 공산주의자가 농민들의 조직을 지배하고 있고, 인민위원회에서 남한의 농민들에게 그들이 수확한 미곡을 가지고 있다가 암시장에 팔도록 지시하고 있는 것이 알려졌다. 서울의 공산당 본부 습격에서는, 공산당이 시위를 목적으로 다양한 사람들과 조직들에 돈을 지불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밝혀졌다. 5월에는 두 명의 공산주의 선동가들이 전라남도 지방의 유세에서, 지방에 나타나는 미군정의 부패를 비난하고 한국의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키도록 자극했다.

공산주의 지도자와 조직들에 의해서, 군정이 후원하는 경찰에게 가해진 거듭된 언어적 매질은 점령 첫해 전체의 특징이 되었다. 친일파와 만행, 부패, 경찰에 의한 좌익 압박 등에 대한 비난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때로는 경찰에 대한 이러한 반대가 폭력으로 선동되었다. 또한 믿을 만한 소식통으로부터 남한 도처의 여러 도시에서 일어나는 파업과 노동 쟁의들의 많은 수가 북측에서 남한으로 침투한 공산주의자 조직들에 의해서 선동된 것이라는 보고가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작은 노동 쟁의들을 재빠르게 이용했고, 반체제적인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키도록 부채질했는데, 목적하는 것은 당연히 미군 사령부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1946년 5월 25일, 여러 차례 논의된 바 있는 위조지폐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에 대한 뉴스는 공동위원회의 문제조차 잠깐이나마 2순위로 밀어냈고, 공산주의자의 위신과 박의 당 장악에 심각하게 충격을 주었다. 1946년의 봄 동안에는 엄청난 양의 100원권 위조지폐들이 서울과 남한에 범람했다. 이후의 재판에서 약 900만원에서 1,100만원이 위조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5월 3일 경찰은 마침내 한 빌딩에서 위폐를 제조하는 인쇄소를 찾아냈는데, 그 빌딩에는 공산당 본부와 극좌신문인 『해방일보』의 인쇄기가 있었다. 공산당의 당원들은 즉시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 연루된 자들 중에는 공산당의 재정부장인 이관술(Lee Kwan Soo)과 잘 알려진 공산주의자이자 『해방일보』의 사장인 권오직이 포함되었다.註 011 사실 이들 가운데 한명을 제외하고는 결국 체포된 이후에 당원으로 밝혀졌기는 하지만, 미군 당국은 당원으로서가 아니라 개인 그 자체로 고소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공산당은 그에 대한 대응으로 모든 문제를 명백한 거짓말이라고 단정했고, 공산당 혹은 공산당의 어떤 관계자도 위조 집단과 관련이 없다고 부인했다. 이 사건은 그들에 따르면 “우리 당의 존엄성을 약화시키기” 위한 또 하나의 “악랄한 음모”였다. 1946년 7월 29일 서울의 법원 앞에는 공산주의자들의 사주를 받은 전례 없는 폭동의 혼란과 유혈사태가 벌어진 가운데 기소된 위조범들이 재판에 회부되었고, 그 폭동 과정에서 한 학생이 총에 맞았다. 그때 하지 장군은 비록 “공산당이 그 사건에서 얻은 이익의 정도에 관해서 그들의 행동으로 인해 중대한 의혹을 사고 있을지라도”, 재판이 계획된 것처럼 동일한 기준으로 각 개인의 재판으로서 계속되어야 한다고 지시했다. 판결은 최종적으로 1946년 11월 30일에 내려졌는데, 이관술 외 3명은 종신형을, 그리고 다른 4명의 피고는 그보다 적은 형을 선고받았다. 법적 절차의 마지막에는 피고들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을 노래하여 시선이 집중되었다.

군정을 향해서 행해지는 점점 더 발작적인 선전 중에 대표적인 것은 1946년 8월 15일 조선공산당의 서울 위원회가 배포한 전단이었는데, 부분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군정은 식민지 정책을 버려야하고, 정권을 인민위원회에 즉시 넘겨야 한다.
“8·15의 일주년 기념을 맞아 완전한 민주 독립을 위하여 만세를 부르자.
“동포들이여, 북한을 보라.
“토지 개혁, 노동 법령, 남녀평등 법령이 완전하게 시행되었다. 일본인들과 반민족자들의 회사는 국유화되었다. 공장들은 활발하게 가동 중이고, 실업자는 없다. 북한의 사람들은 지금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정권은 인민들의 손에 있다. 민주주의 조국의 건설은 견실하게 성장하고 있다.
“이것은 북한에서 해방의 첫 해에 소련군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동포들, 남한은 어떠한가!
“해방의 기쁨은 굶주림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고, 사람들의 자유는 반동 경찰의 총검과 총에 의해 조각났다. 이승만과 김구의 지도 아래에 있는 친일파와 민족 반역자들은 미군정의 도움을 바탕으로 인민들의 권리를 강탈하였다! 이뿐인가? 그들은 임시정부의 수립을 돕는 미소공동위원회(U.S.-Soviet Joint Conference)[위원회의 오기]의 휴회를 야기했고, 한국을 외세의 식민지로 만들고자 시도했다! 이것이 미군정 아래에 있는 남한의 상태이다!

1946년 8월 초에 하지 장군은 맹렬하게 공격을 퍼붓는 공산당의 활동들을 상급 기관에 요약하여 보고했다. 하지 장군은 다음과 같은 특정 혐의들을 만들었는데, 모든 것은 미군 수사관의 손에 들어온 확인된 공산당 문서들을 기반으로 했다.

1. 지령을 받은 공산주의자들이 “의욕과 능률, 충성심을 약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의 경찰과 국방경비대, 해안경비대로 침투한 점.
2. “불화를 만들어내고 한국인들을 혼란시키고 분열시키려고 가능한 모든 것을 다하기 위해” 남한 내에서 공산당이 노력한 점.
3.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통치되는 전국농민조합총연맹(All Korean Farmer's Union)에서 1945년 수확한 미곡과 1946년 여름 수확한 곡물을 미군정의 곡물 수집 정책에 내어주는 것을 막기 위한 지시를 발표한 점.
4. “대도시와 식량 부족 지역에서의 식량 배급을 방해하여 사람들 사이에 고통과 불안, 불화를 만들 더 좋은 기회를 조장하고, 법률 기관의 명성을 떨어뜨려서 더 많은 당의 추종자들을 얻기 위해” 노력한 점.
5. 공산당이 “그들의 지지자들에게 세금과 지대를 지불하지 않도록 하고, 공공사업을 계속 이행하고 하자가 있는 경제 시설들을 수리하는데 그 돈을 사용하도록” 충고한 점.
6. “폭동을 부추기고 민간 소요사태를 만들 모든 기회를 포착하고”, 더해서 “언제든 기회가 있을 때 문제를 조장하기 위해 훈련된 선동가들을 활동시키고 군중들과 집회에 침투시키도록” 지시한 점.
7. “광범위한 스파이 체계”가 지속되고 있는 점.
8. 학생과 청년 운동의 대중적인 선전 활동과 공산주의 이론의 학습이 행해지는 점.
9. 세심한 조작과 다중 당원 가입, 비밀 스파이 활동 등을 통해, 몇 개의 노동조합들과 농민조합, 청년단체 중 핵심 세력의 “사주를 받은 수천명의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한 점.

하지 장군은 이 고발 내용을 다음과 같이 말하며 결론 내렸다.

“남한의 조선공산당은 아주 민주적인 권리와 남한에 존재하는 특권을 이용하여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혼란을 만들어내려 하고 있고, 한국의 통일을 방해하고 있으며, 미국 행정부와 원조에 대해 불신의 씨앗을 퍼뜨리고 있고, 공산주의자들의 정치적 목적을 성공시키려 한다. 조선공산당의 활동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방식 내에서 정치권력을 구하는 민주주의 정치 조직의 모습이 아니었고, 남한의 경제와 정치의 진전에 손상을 입히고 방해하기 위해 광범위하게 잘 계획된 기획이라 할 수 있다.

“조선공산당 지도자들의 핵심 세력을 작동시키는 동기는 한국의 본질적 특성, 그리고 이해관계와는 이질적인 것이었다. 그들의 활동이 분명하고 엄격하게 남한의 밖에서 지시된다는 점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들의 지도자들의 목적은 한국 민족에 미치는 영향과 관계없이 명백하게 한국을 공산주의자들이 지배하는 국가들의 목록에 추가하는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모든 활동은 미국의 인내심을 크게 시험했는데, 이는 미군에 대한 완전히 노골적인 간첩 행위였고, 결국에는 이것이 파국을 가져오도록 만들었다.
미군정기 주한미군사 주한미군사 2 2부. 4장. 점령 첫 해의 미소관계(American-Soviet Relations, The First Year) 미국인들, 소련인들, 그리고 한국인 공산주의자들 사보타주

3.4. 공장자주관리운동 관련 논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한 뒤 공업부문 생산은 75.2퍼센트나 감소했고 실업률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에 맞서 노동자들은 생산을 재조직하기 위해 공장을 접수해 통제하기 시작했다. 자주관리운동은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집단화·조직화돼 있던 공장을 중심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공장뿐 아니라 운수업, 상업, 어장, 극장, 학교 등으로 확산됐다. 1945년 11월 4일까지 16개의 산별노조에 7백28개의 공장관리위원회가 구성됐다. 전체적으로 노동자들은 어떤 형태로든 공장관리에 개입했고, 자본가들이 주도하는 관리위원회조차 노동자들의 협조 없이는 공장을 운영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공산당 중앙 간부인 이관술은 공장관리운동이 “중앙간부로서 귀찮으니 자본가한테 넘겨줌이 어떠냐”는 발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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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정

이관술은 조선공산당이 지배하는 조선인민공화국의 일원으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해체를 위해 노력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따르는 대한민국으로서는 비판점이다.
“앞으로 我黨이 이들을 여하히 맞이하느냐 하는 점에 대하여는 누차 성명한 바와 같이 해외에 기존한 정권을 무조건하고 맞아 받드는 것이 아니다. 혁명가로서의 그들을 개인의 자격으로 맞아 들이려 하며 그들에게 대한 요망은 조선의 현실을 파악하고 진보적인 민주주의정권수립을 위하여 達觀的 협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관술의 임정요인의 환국에 대한 견해 발표

3.6. "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를 같다고 하면 상식부족" 발언 논란

(問) 일부에서는 인민공화국 또는 인민위원회와 貴黨과의 관계가 투명치 않다고 하여 貴黨이 즉 인민위원회라고도 보는 이가 있는데
(答) 이것을 같다고 보면 상식부족이다.
조공 이관술, 민족통일운동 현황 문답

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와의 관계가 투명치 않은 것이 사실이고, 설령 그렇지 않다고 가정해도 교육받지 못한 민중은 충분히 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를 혼동할 수 있는데 상식부족이라고 일축해버렸다.

평전 등 옹호자들의 이관술에 대한 해석과는 달리, 이관술이 남긴 발언을 실제로 보면 매우 과격한 공산주의자임을 느낄 수 있다. 조선일보에 보낸 축사도 다른 인사의 축사와 비교해보면 혼자만 상당히 과격하다.
일본 제국주의의 철쇄(鐵鎖·쇠사슬)에 얽매이었던 조선일보가 다시 나오게 된 것은 귀보(貴報)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나로서 반가운 일이다. 더구나 방금(方今·이제) 조선이 모든 반역자를 박멸(撲滅)하고 단연코 민족을 통일하여야 할 중대한 현 단계에 있어서 조선일보가 전통 있는 그 본령을 충분히 발휘할 것으로 크게 기대하여 마지 않는다.
5년만의 복간

3.7. "공산당을 비판하면 반동" 발언 논란

(問) 일부에서는 貴黨의 정강이 급진적이고 貴黨의 행동이 너무 편협과격하다고 비난하는 편이 있는데.
(答) 우리 당의 당면 주장을 보고 말하는 것 같은데 우리의 당면 주장은 진보적 민주주의이다. 이것을 과격이니 편협이니 한다면 그는 반동적 부류에 소속된 인간들일 것이다.
조공 이관술, 민족통일운동 현황 문답

이관술은 공산당을 비판하면 반동이라고 주장했다. 참고로 여운형과 같은 온건 정치인은 자신의 당을 비판한다고 반동이라고 하지 않는다.

3.8. 박헌영을 추대하기 위한 공작과 전쟁 책임

1945년 8월 18일 서울 길거리에는 '위대한 박헌영 선생 나오시라!'는 삐라가 붙었다. 정태식이 폭로한 바에 의하면, 이것은 정태식, 조일명, 서득은, 이관술 등이 주동이 되어 박헌영 중심의 당 조직을 위한 사전준비로서 박헌영의 이미지 부상을 위한 것이었다.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중앙부서의 조직국은 거의 콤 그룹 사람들 로 채운 것은 당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속셈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당 조직 준비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박헌영 직계인 김형선, 이현상, 김삼룡, 이관술 등으로 알려지고 있다.
남로당 연구. 34쪽

해방정국 조선공산당, 남로당의 다수 공산주의자들이 전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이관술은 "박헌영의 오른팔"로 불리게 될 만큼 박헌영을 조선공산당의 1인자로 추대하기 위해 공작을 벌였고, 이는 일일이 언급할 수 없을 만큼 무수한 자료에서 교차검증가능하다. 그리고 이관술이 여러 공작으로 추대한 박헌영은 6.25 전쟁의 주범이 된다.

3.9. 반탁 연설을 한 뒤 며칠만에 찬탁으로 입장 변경 논란

위 김창숙 자서전 인용에서 나온 바와 같이 이관술은 반탁에서 찬탁으로 입장을 변경하며 그것이 소련의 지령 때문임을 밝혔다.

3.10. "소련군의 지구적인 주둔은 필시 조선인의 복리" 발언 논란

"소련군이 조선에 주둔하는 것은 미군의 침략을 제지하려는 것입니다. 소련군의 지구적인 주둔은 필시 조선인의 복리가 될 터인데 어찌 그 지시를 안 받을 수 있겠습니까?"

"군의 말은 당 전체의 의사인가?"

"그렇습니다."

나는 드디어 화가 나서 꾸짖었다.

"지금 공산당이 소련의 지구적인 주둔을 원한다면 이는 이리를 방 안에 끌어들이는 격이다. 저 미군들도 반드시 이를 빙자하려, 철수하지 않을 것이니 나는 미, 소간의 틈이 반드시 이로 인해 벌어질 것을 걱정한다. 우리 한국은 필시 미, 소의 각축장이 되어 나라는 독립할 날이 없어질 것이니, 군 등의 매국의 죄는 이에 더욱 더 클 것이다."

"미국이 바로 이리지요. 저 이리를 견제하려면 소련이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소련군이 오래 주둔할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심산 김창숙 자서전

3.11. 북한군의 이관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사람들에 대한 인민재판

난데없이 28일 아침에 공산군이 서울에 들이닥쳤다. 이북에서 내려온 해방군이란 사람들이 우익 인사들을 한강변 모래밭에 끌고 가서 모래 구덩이를 파고 총살하여 묻어 버린다는 소문이 돌자, 서울 장안은 살기가 가득한 분위기가 되었다. 내 평생 죄를 짓거나 남에게 잘못한 일이 없다고 자부하지만, 우익 사람을 마구 죽인다는 말에 겁을 먹고 2주일 가량 피신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날로 나는 정치보위부에게 붙들려 갔다. 아내는 타이피스트에게 내가 어디로 끌려나가 보고 오라고 미행을 시켜 국립도서관 자리로 끌려간 것을 알았다고 했다. 보위부에 나를 끌고 가서 시멘트 바닥에 꿇어않혔다. 군이 세 사람이 대뜸

"네가 정판사 사건 때 허위 진단서를 썼지?"

하며 으름장부터 놓았다.

"아닙니다. 저는 사실대로 썼습니다."

라고 대답을 하니

"이 새끼들 허위 조작 때문에 우리 애국 동무들이 대전 감옥에 갇혀 있다가 남쪽으로 후퇴하던 국군들에게 모두 학살을 당했어. 이 새끼."

모진 고문을 당하고 정신을 잃었다.

이튿날 아침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래층 어두운 독방이었다. 나를 그 방까지 어떻게 옮겨 놓았는지 알 수 없었다. 얼굴과 양쪽 다리가 퉁퉁 부었고, 피하 출혈로 검은 반점이 두 다리에 번져 있었다. 코에서 피를 흘렸는지 입었던 모시 바지와 저고리에 피가 무수히 엉기어 붙어 있었다. 나는 일어설 수도 없었다. 나는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꼴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1946년 내가 경성 의학 전문 학교 안과 교수로 근무할 때의 일이었다. 나는 서울 지방법원 판사로부터 이관술이란 사람의 눈을 검사하고 상해 진단서를 제출해 달라는 공문서를 받았다. 어느 날, 순경이 이관술이란 사람을 나에게 데리고 왔다. 이관술이 이른바 '정판사 사건'으로 경찰에서 고문을 당해 눈이 멀었다고 진술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내려 달라는 담당 검사의 의뢰였다. 내가 진찰을 해 보니 외상이 아니라 당뇨병으로 생긴 백내장으로 실명한 것이었다. 나는 전문의사로서 사실대로 진단서를 썼을 뿐이다.
공병우 자서전
시체와 다를 바 없는 형색의 다른 수용자들만 보았을 뿐 인제, 봉제 두 형제는 만날 수 없었다.
선각자 백인제

이관술이 인민재판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박헌영을 추대한 공산당 최고위직 이관술도 전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또한 공병우, 백인제 지인의 증언을 보면 북한군이 이관술만을 언급하며 그 때문에 인민재판한다고 확실히 말했기 때문에 인민재판당한 사람 입장에서는 이관술이 매우 원망스러울 것이다.

3.12. 중혼

본처인 박가야가 있음에도 조선총독부 직원이었던 박선숙과 재혼한 것이 비판의 소지가 있다.

4. 어록

이재유와 파벌 운동을 한 것처럼 말을 하는데 실제로 나는 그런 생각에서 한 일이 아니고 나는 운동할 의사는 있었지만 그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이재유를 따라서 한 데 불과하다. 장래는 당신의 방침을 따라서 운동을 계속하고 싶다.
앞으로 我黨이 이들을 여하히 맞이하느냐 하는 점에 대하여는 누차 성명한 바와 같이 해외에 기존한 정권을 무조건하고 맞아 받드는 것이 아니다. 혁명가로서의 그들을 개인의 자격으로 맞아 들이려 하며 그들에게 대한 요망은 조선의 현실을 파악하고 진보적인 민주주의정권수립을 위하여 達觀的 협조를 바라마지 않는다.
우리 당의 당면 주장을 보고 말하는 것 같은데 우리의 당면 주장은 진보적 민주주의이다. 이것을 과격이니 편협이니 한다면 그는 반동적 부류에 소속된 인간들일 것이다.
중앙간부로서 귀찮으니 자본가한테 넘겨줌이 어떠냐.
소련군이 조선에 주둔하는 것은 미군의 침략을 제지하려는 것입니다. 소련군의 지구적인 주둔은 필시 조선인의 복리가 될 터인데 어찌 그 지시를 안 받을 수 있겠습니까?
미국이 바로 이리지요. 저 이리를 견제하려면 소련이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소련군이 오래 주둔할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5. 관련 자료

6. 가족

  • 부 : 이종락 (울산군 범서면 입암리 출생)
  • 생모 덕산 이씨(德山 李氏) (이성진(李誠震)의 딸이다. 이종락과 일찍 결혼하여 외아들 이관술을 낳고 사망했다.)
    • 본인 이관술
  • 계모 김해 김씨 (김일홍(金日泓)의 딸이다. 생모 덕산 이씨 사망 후, 부친 이종락과 재혼하였다.)
    • 첫째 이복 남동생 : 이학술[11]
    • 둘째 이복 남동생
  • 서모 김남이 (주막집 과부로, 부친 이종락의 측실로 들어오기 전에 이미 딸이 하나 있었으며, 딸 이순금을 낳고 일찍이 요절했다. 이종락은 그녀를 위해 울산 선영에 정식으로 장례를 치러주고 묘를 세워 요절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위로했다고 한다.)
    • 첫째 이복 여동생
    • 둘째 이복 여동생 : 이순금(李順今)
  • 첫째 부인: 박가야: 6.25 전쟁 중 행방불명
    • 장녀 이정환 - 사위 박동철(朴東澈): 밀양 박씨로 박극수(朴克洙)의 아들이다. 본인은 좌익이 아니었는데도 이관술의 사위라는 이유만으로 국민보도연맹 가입을 강요받았으며, 이 때문에 보도연맹 학살 사건 때 처숙부인 이학술과 함께 학살당했다.
      • 외손녀 박경희
    • 차녀 이성옥: 6.25 전쟁 중 행방불명
    • 3녀 이정성: 6.25 전쟁 중 행방불명
    • 4녀 이경환 - 사위 손붕익(孫鵬翼): 경주 손씨로 손진구(孫晋九)의 아들이다.
      • 외손녀 손옥희: 교사. 이관술의 복권을 위해 노력함.
  • 둘째 부인 박선숙: 6.25 전쟁 중 행방불명
    • 5녀: 박선숙의 딸. 6.25 전쟁 중 행방불명


[1] Lee Gwan-sul은 변은진이 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표기이다. 미국 문서에는 Lee Kwan Sool 혹은 Lee Kwan Soo 두 가지 방법으로 표기되어 있다. MBC 다큐프라임은 Lee Gwansul로 동영상을 올렸다. 이관술 본인이 사용한 표기가 무엇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2] 제적등본에 1902년 4월 25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1933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902년 7월 25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3] 안재성이 쓴《이관술 1902-1950》의 친족의 구술에 따르면 출생지는 울릉도이고 울릉도 가구도 있다고 하니 실제 출생지는 울릉도일 것이나 제적등본이나 호적 등에는 어디에도 울릉도 주소는 나오지 않고 입암리 출생이라고 쓰여 있다. [4] 18세 수(樹) 항렬 [5] 이관술 (李觀述)(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6] 왜 재판 이야기를 하냐면 이관술은 재판을 받던 중 병보석으로 풀려난 것이라 재판이 정지된 것이지 아직 끝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7] 출처: 안재성, 이현상 평전, 2007 [8] 반곡초등학교는 원래 언양초등학교 분교로 해방 전인 1943년에 문을 열었다. 지금 위치인 울주군 언양읍 반곡리 709번지로 이전한 것은 1946년이었는데, 1947년 학교 건물을 새로 짓기 위해 부지를 기증받고 건축비를 모았다. [9] 박헌영 평전 2009년판 각주 [10] 해방 후(1945~46년) 공장관리운동 60주년 - 한국사 최초의 대중적 노동자 민주주의 [11] 족보명 이수학(李樹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