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생 정치인에 대한 내용은 황태성(1973)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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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성
黃泰成 | Hwang Tae-su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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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c0021><colcolor=#fff> 본명 | 황대용(黃大用) |
출생 | 1906년 4월 27일 |
경상북도
상주군 청동면 원장리 (現 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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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3년 12월 14일 (향년 57세)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서울교도소 (現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통일로 251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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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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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공산주의 독립운동가 출신의 북한 정치인. 본관은 장수(長水)[1], 본명은 황대용(黃大用), 창씨명은 나가미즈 케이쇼(長水憲昭)이다. 황태성 사건으로 사형당했다.2. 생애
1906년 4월 27일, 경상북도 상주군 청동면 원장리(현 상주시 청리면 원장리 822번지)의 중산층 가정에서 아버지 황주언과 어머니 박도곡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2] 아버지가 어물전을 경영했기 때문에 꽤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으며, 출생 이후 상주군 내남면 남산리(현 상주시 낙양동)으로 이주했다.1921년 3월, 상주의 첫 근대식 교육기관인 상산제일학교를 졸업하였다.[3] 이후 1921년 4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현재의 경기고등학교)에 진학, 1922년 9월 5일, 함창 김씨 집안의 김반달과 결혼하여 슬하에 황경옥(1924 ~ 1950), 황기옥(1927 ~ ) 두 아들을 두었다. 4학년 때인 1924년 초, 4학년 4개반 120명의 학생을 규합하여 무능한 일본어 교사 엔도와 화학교사 요시다를 교체하라고 교장 가토에게 요구하는 학생운동을 조직하였다. 가토 교장이 이를 거부하자 6월과 7월 2달간 동맹휴학에 들어갔고, 이 교장 배척운동 주도의 혐의로 1924년 8월 15일에 다른 주모자들과 함께 퇴학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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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에 찍은 머그샷 | 1930년에 찍은 머그샷[4] |
이 사건을 전후로 서울청년회에 가입하고 조선청년총동맹 결성에 참가하였으며, 1925년에는 연희전문학교 상과(지금의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에 진학했다. 그런데 중앙정보부 발표에 따르면 가정형편으로 인해 2학년 때이던 1927년 중퇴했다고 하는데, 사실 전술한 바와 같이 황태성의 가정 형편은 꽤 부유한 편이었으므로 가정형편 문제는 아닌 것으로 보이며, 가정형편 문제로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했다는 말은 1929년 동맹휴학으로 검거될 당시 스스로 "연희전문학교를 1학년 때 중퇴했다"고 진술했었고, 1940년 황태성의 대구형무소 가출옥 서류에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당시 황태성이 일본 경찰에 적당히 둘러댔던 말로 보인다. 한겨레의 보도에 따르면 연희전문학교에서도 학생운동을 하다가 퇴학당했다고 서술했다. 1925년 4월 14일, 이상재를 의장으로 한 전조선기자대회에 출석했지만 자세한 경위는 밝혀지지 않았다. 경위가 어찌되었던 간에 황태성은 1925년 10월,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하고 경상북도 김천군 김천면 욱정(현 김천시 감호동) 10번지로 이주해 본적을 옮긴 뒤 김천면 성내정(현 김천시 성내동)에 거주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을 이어 나갔다.
황태성은 무엇보다도 먼저 항일운동가들을 규합하기 위해 여관을 경영하였으며 금릉청년회 집행위원이 되었다. 이외에 김천형평사, 김천노우회, 김천독서구락부, 김천형평청년회, 김천철육단 등에서 다양하게 활동했고, 조선일보사 김천지국에 기자로 입사해 활동하기도 했다. 1927년 6월, 김천청년연맹을 해소하고 새로 김청청년동맹을 결성하여 집행위원을 맡았으며 1928년 1월, 경북청년연맹 집행위원도 맡았다. 그리고 박정희가 그랬듯이 조혼한 부인과 이혼하고 신여성인 사회주의 운동가 문일지와 재혼했다. 신간회 김천지부 간부로도 활동했다.
그 뒤 1928년 8월 25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경기도경찰부에 검거, 송치되었으나 그해 9월 23일에 석방되었다. 1929년 3월,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해 1929년 3월 상경한 그는 경기도 경성부 체부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체부동) 125번지 김명성(金明性)의 집에 거주하면서[5] 경성부를 근거로 조선공산청년회를 조직하고 정치부 책임 겸 경상도 조직책에 취임했다.[6] 같은 해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받아 경성부에서 광주학생항일운동에 호응하는 학생시위를 계획하고, 그해 12월에 조선학생전위동맹과 조선청년동맹의 이름으로 격문을 뿌리고 학생시위를 전개했다. 이 때문에 그는 조선학생전위동맹사건의 배후세력으로 지목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7], 1930년 1월 29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그곳에서 2년 10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뒤 1932년 9월 19일에 만기출소하였다.
출소 후 김천군으로 돌아온 황태성은 김천읍 본정(현 김천시 용두동) 60번지에 거주하면서 정미소를 경영했고, 1933년 1월에는 김천그룹 재건협의회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1934년 1월 28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경기도경찰부에 재차 검거되었다가 석방되었고, 1935년 4월,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 조직을 모색하면서 각 지역 책임자까지 정한 이들은 김천소비조합을 당의 기층조직으로 삼기 위해 침투, 1935년 4월 13일, 황태성을 김천소비조합 전무이사로 당선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하지만 황태성을 감시하고 있던 일본 경찰이 이를 탐지해 곧 대규모 체포에 나섰으며, 이에 결국 1935년 10월, 김천그룹재건협의회 사건의 주모자라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그 뒤 1936년 3월 14일부터 1937년 11월 15일까지 무려 11차례에 걸쳐 대구지방법원의 구류갱신결정 처분이 내려졌고, 1938년 2월 28일에서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6개월형(미결 구류 통산 350일)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황태성의 아버지 황주언이 국방헌금과 황군위문품을 바친 결과 1940년 4월 12일, 형기를 1개월 남기고 가출옥되었다. 창씨개명령이 떨어지자 본관인 장수 황씨의 장수를 따서 나가미즈 케이쇼(長水憲昭)로 개명했다. 박상희의 친구였고, 이 때문에 박정희가 그를 형님으로 크게 따랐다고 전해진다. 일대기에 대해서 워낙 황당한 얘기가 많은데, 이미 월북한 후인 1950년에 박정희의 주례를 서줬다는 주장도 있고[8] 박정희가 신경군관학교 진학을 결심하자 조언을 해줬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땐 황태성이 감옥 안에 있었다.
출소 이후에는 대구 중구 대봉동에서 거주했으며 일제 말기에 1944년 8월, 여운형이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자 전라남북도 책임자가 되었다. 일제 패망 이후 경상북도 건준과 인민위원회를 조직했다. 황태성은 경북인민위원회 선전부장을 맡았으며,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후보위원에 위촉되었다. 그리고 당조직 재건을 위해 조선공산당 대구시당을 조직하였다. 1946년 남로당이 다시 조직되면서 경상북도당 조직부장을 맡았으며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성곤, 박상희 등과 함께 대구 10.1 사건 배후자로 지목되어 도피하다가 서울과 개성을 거쳐 1947년 10월에 세브란스의과대학 의학과에 다니던 둘째 아들과 함께 월북하였다. 1949년, 남북로당 합당 과정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53년에 남로당 출신들이 대거 숙청당했지만 생존하였고, 오히려 1953년 8월 제6차 전원회의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 당규약개정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
이후 상업성 관리국장을 거쳐 1952년 무역성 부상에 임명되었고, 무역상 진반수를 대신하여 무역상 서리를 지낸 적도 있었다.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미영제국주의 무력침범자들을 반대하여 자유와 독립을 수호한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보장함에 있어서 온갖 헌신성과 창발적 활동으로써 특출한 공훈을 세운 국가정권기관 및 당 지도일꾼"으로 선정되어 국기훈장 제2급을 받았다.
하지만 1955년 9월, 건강상의 문제 때문에 퇴직한 뒤 평양시 중구역 중성동 3반에 거주하면서 요양하였고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서 탈락했다. 무역성 부상 재임 시절 김일성과 자주 만났기 때문에 김일성과도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였다. 김일성과 안면이 있던 점, 그리고 건강 문제로 요양만 한 덕분에 1956~1958년 사이에 남로당 출신에 대한 대숙청이 이루어졌음에도 생존하였다. 이후 5.16 군사정변 이후 조선로동당 연락부에서 박정희와 접촉할 특사를 물색할 때, 황태성이 김일성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김일성이 건강이 좋지 않은데도 남한에 갈 수 있겠냐고 묻자 이 일을 마지막으로 하고 죽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1961년 8월 30일 남파되어 9월 1일에 서울에 도착하여 김민하 등과 접촉했으나 결국 10월 20일 검거되었고, 1962년 10월에는 전향서를 제출하였으나 5.16 이후 처음으로 열리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의 정치공세에 시달리던 박정희 정권에서 박정희의 남로당 꼬리표를 떼버리기 위해 그를 죽이기로 하면서 1963년 10월 22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 1963년 12월 14일에 총살형이 집행되면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자세한 것은 황태성 사건 문서 참조.
김종필 증언록에 따르면, 황태성과 친밀하였던 박정희는 그의 체포 소식에 잘 취조해보라고 딱 한마디를 하였고 죽었단 소식을 듣고는 "그렇게 했어..."라고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황태성의 사진을 보고 많이 늙으셨구나 하고 한숨을 쉬었다던가, 김형욱이 개입해서 죽인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김종필은 부정했다. 여담으로 황태성이 가지고 왔던 공작금은 김종필이 KBS 개국 과정에서 미국산 방송장비 주문에 썼다고 한다.
3. 참고문헌
- 김종필, 김종필 증언록 1권(서울: 와이즈베리, 2016).
- 김학민, 이창훈,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서울: 푸른역사, 2015).
-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서울: 도서출판선인, 2005).
- 유영구, 남북을 오고간 사람들: 남의 조직사건과 북의 대남사업(서울: 도서출판글, 1993).
- 間諜 手票去來說, 경향신문(1963.9.28).
[1]
황태성의 묘비명에 '학생장수황공휘태성지묘(學生長水黃公諱泰成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2]
장수 황씨의 집성촌이다
[3]
박상희의 부인인 조귀분의 조카 조길수는 조갑제와의 인터뷰에서 황태성이 대구
계성고등학교(대구)를 졸업했다고 주장했지만 전혀 사실 관계에 부합되지 않는 증언이다,
[4]
이 사진에는 그의 이름이 황대용(黃大用)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의 이명(異明이었다.
[5]
당시 본적지는
경상남도
부산부
범일정(현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510번지에 있었다.
[6]
다만 일제가 황태성을 잡아넣기 위해 조작에 의해 꾸며낸 조직이란 주장도 있다.
[7]
1929년 12월 6일 당시 본적지는
경상남도
부산부
초량정(현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477번지에
있었다.
[8]
하지만 박정희의 주례를 서준 것은 대구시장 허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