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4 23:22:10

함풍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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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고(淸史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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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본기(本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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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86a
1권 「태조기(太祖紀)」 2·3권 「태종기(太宗紀)」 4·5권 「세조기(世祖紀)」
애신각라 노이합적 애신각라 황태극 애신각라 복림
6·7·8권 「성조기(聖祖紀)」 9권 세종기(世宗紀)」 10·11·12·13·14·15권 「고종기(高宗紀)」
애신각라 현엽 애신각라 윤진 애신각라 홍력
16권 「인종기(仁宗紀)」 17·18·19권 선종기(宣宗紀)」 20권 「문종기(文宗紀)」
애신각라 옹염 애신각라 민녕 애신각라 혁저
21·22권 「목종기(穆宗紀)」 23·24권 덕종기(德宗紀)」 20권 「선통제기(宣統帝紀)」
애신각라 재순 애신각라 재첨 애신각라 부의
214권 「후비전(后妃傳)」
효정경황후 · 정강귀비 · 각순귀비 · 효각민황후 · 액이덕특씨
※ 26권 ~ 160권은 志에 해당. 161권 ~ 213권은 表에 해당. 청사고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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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6><tablebgcolor=#fecd21><tablewidth=100%> 215·216·217·218·219·220·221권 「제왕전(諸王傳)」 ||
애신각라 예돈 · 애신각라 액이곤 · 애신각라 재감 · 애신각라 탑찰편고 · 애신각라 막이합제 · 애신각라 서이합제 · 애신각라 아이합제 · 애신각라 파아랍 · 애신각라 저영 · 애신각라 대선 · 애신각라 아배 · 애신각라 탕고대 · 애신각라 망이고태 · 애신각라 탑배 · 애신각라 아파태 · 애신각라 파포태 · 애신각라 덕격류 · 애신각라 파포해 · 애신각라 아제격 · 애신각라 뇌모포 · 애신각라 다이곤 · 애신각라 다탁 · 애신각라 비양과 · 애신각라 호격 · 애신각라 엽포서 · 애신각라 석새 · 애신각라 고새 · 애신각라 상서 · 애신각라 도새 · 애신각라 박목박과이 · 애신각라 복전 · 영친왕 · 애신각라 상녕 · 애신각라 융희 · 애신각라 윤제 · 애신각라 윤잉 · 애신각라 윤지 · 애신각라 윤기 · 애신각라 윤우 · 애신각라 윤사 · 애신각라 윤당 · 애신각라 윤아 · 애신각라 윤도 · 애신각라 윤상 · 애신각라 윤제 · 애신각라 윤파 · 애신각라 윤례 · 애신각라 윤의 · 애신각라 윤희 · 애신각라 윤호 · 애신각라 윤기 · 애신각라 윤비 · 애신각라 홍주 · 애신각라 홍휘 · 애신각라 영황 · 애신각라 영련 · 애신각라 영장 · 애신각라 영기(永琪) · 애신각라 영종 · 애신각라 영선 · 애신각라 영성 · 애신각라 영기(永璂) · 애신각라 영성 · 애신각라 영린 · 애신각라 면개 · 애신각라 면흔 · 애신각라 면유 · 애신각라 혁위 · 애신각라 혁강 · 애신각라 혁계 · 애신각라 혁흔 · 애신각라 혁환 · 애신각라 혁합 · 애신각라 혁혜 · 민군왕
222권 「아합출등전(阿哈出等傳)」
아합출 , 석가노 맹가불화 이만주 완자독 맹가첩목아 범찰 동산 탈라 탈원보 불화투, · 왕고 , 왕올당,
223권 「만등전(萬等傳)」
, 호이간 맹가포록 대산 오이고대, · 청길노 · 양길노 , 납림포록 금태석 포한 포양고 포이항고, 포점태 · 배음달리
224권 「장황언등전(張煌言等傳)」 225권 「액역도등전(額亦都等傳)」
장황언 , 나륜 장명진 왕익, · 정성공 , 정금 정극장 정극상 정극거, · 이정국 액역도 · 비영동 , 삭해 왜흑, · 하화례 , 다적례 화석례 도류, · 안비양고 · 호이한
238권 「장혁덕등전(蔣赫德等傳)」
장혁덕 · 액색혁 · 차극 · 파합나 · 송권 · 부이점 · 여궁 · 성극공 · 김지준 · 왕영길 · 당숭아
247권 「팽이술등전(彭而述等傳)」
팽이술 · 육진분 · 요연저 · 필진희 · 방국동 · 우붕거 · 왕천감 · 조정표
250권 「이위등전(李霨等傳)」
이위 · 손정전 · 두입덕 · 풍부 · 왕희 · 오정치 · 황기 · 송덕선 · 이상아 · 아란태 · 서원문
251권 「도해등전(圖海等傳)」 252권 「감문혼등전(甘文焜等傳)」
마가도해 · 이지방 감문혼 · 범승모 · 마웅진 · 부홍열
253권 「막락등전(莫洛等傳)」
막락 · 진복 · 왕지정 · 비아달 · 이흥원 · 진계태 · 진단적 · 마비 · 엽앙류
255권 「장용등전(張勇等傳)」
장용 · 조양동 · 왕진보 · 손사극
256권 「채육영등전(蔡毓榮等傳)」
채육영 · 합점 · 항애 · 화선 · 동위국 · 동국정 · 주유덕 · 장덕지 · 윤벽 · 왕계문
257권 「조국조등전(趙國祚等傳)」
조국조 · 허정 · 주구 · 서치도 · 호세영 · 당희순 · 이린 · 조응규 · 조뢰 · 이방술 · 진세개 · 허점수
261권 「양첩등전(楊捷等傳)」
양첩 · 석조성 · 만정색 · 오영 · 감리 · 황오 · 방태 · 목혁림 · 단응거
262권 「위예개전(魏裔介等傳)」 263권 「왕홍조전(王弘祚等傳)」
위예개 · 웅사리 · 이광지 왕홍조 · 요문연 · 위상추 · 주지필 · 조신교
264권 「학유눌등전(郝維訥等傳)」 265권 「탕빈등전(湯斌等傳)」
학유눌 · 임극부 · 유홍유 · 유건 · 주배 · 장정추 탕빈 · 손지욱 · 육롱기 · 장백행
266권 「엽방애전(葉方藹等傳)」 267권 「장옥서등전(張玉書等傳)」
엽방애 · 심전 · 여두눌 · 서원공 · 허삼례 · 왕사정 · 한담 · 탕우증 장옥서 · 이천복 · 오전 · 장영 · 진정경 · 온달 · 소영조 · 숭축 · 왕서령
268권 「미사한등전(米思翰等傳)」 269권 「색액도등전(索額圖等傳)」
미사한 · 고팔대 · 마이한 · 전육선 · 두진 · 살목하 색액도 · 명주 , 여국주 불륜,
270권 「학욕등전(郝浴等傳)」 271권 「서건학등전(徐乾學等傳)」 272권 「탕약망등전(湯若望等傳)」
학욕 · 양소온 · 곽수 서건학 , 옹숙원, · 왕홍서 · 고사기 탕약망 · 양광선 · 남회인
273권 「이솔태등전(李率泰等傳)」
이솔태 · 조정신 · 낭정좌 · 동봉채 · 마륵길 · 시유한
304권 「장조등전(張照等傳)」
장조 · 감여래 · 진덕화 · 왕안국 · 유오룡 · 양여곡 · 장태개 · 양석불 · 팽계풍 · 손희렴 · 몽린
305권 「전진군등전(錢陳群等傳)」
전진군 · 심덕잠 · 김덕영 · 전재 · 제소남 · 진조윤 · 동방달 · 전유성 · 추일계 · 사용 · 왕창
306권 「조사일등전(曹一士等傳)」 307권 「위위곽전(魏韋郭傳)」
조사일 · 이신수 · 호정 · 중영단 · 시조생 · 저인지 윤계선 · 유우의 · 진대수 · 장윤수 · 진굉모
308권 「나소도등전(那蘇圖等傳)」
나소도 · 왕초증 · 서사림 · 윤회일 · 왕서 · 방현 · 풍광유 · 양석불 · 반사구 · 호보전 · 왕창
318권 「아계전(阿桂傳)」 319권 「우민중등전(于敏中等傳)」
장가아계 우민중 · 뉴호록 화신 · 소릉아
322권 「두광내등전(竇光鼐等傳)」 323권 「황정계등전(黃廷桂等傳)」
두광내 · 이수방 · 범의빈 · 조석보 · 사진정 · 전풍 · 윤장도 황정계 · 악미달 · 양정장 · 장유공 · 이시요 · 오미태 · 관보
324권 「방관승등전(方觀承等傳)」
방관승 · 부찰부명안 · 주원리 · 이한 · 이세걸 · 원수동 · 정대진 · 유아 · 육요 · 관간정 · 장조규 · 호계당
325권 「이청시등전(李淸時等傳)」 326권 「개태등전(開泰等傳)」
이청시 · 요입덕 · 이굉 · 하위 · 오사작 · 살재 · 난제석 · 한횡 개태 · 아이태 · 계림 · 원푸
340권 「왕걸등전(王傑等傳)」 341권 「경규등전(慶桂等傳)」
왕걸 · 동고 · 주규 경규 · 유관지 · 대구형 · 대균원 · 탁진 · 장후 · 노음부
342권 「보녕등전(保寧等傳)」 343권 「서린등전(書麟等傳)」
보녕 · 송균 · 배탄 · 박계특 서린 · 각라길경 · 각라장린 · 비순 · 장백령 · 백린
344권 「늑보등전(勒保等傳)」 345권 「영보등전(永保等傳)」
늑보 · 액륵등보 , 호시현, · 덕릉태 영보 · 혜령 · 의면 · 영선 · 복녕 · 경안 · 태승은
386권 「문경등전(文慶等傳)」 387권 「숙순등전(肅順等傳)」 388권 「계량등전(桂良等傳)」
문경 · 문상 · 보윤 숙순 · 목음 · 초우영 계량 · 서린 · 관문 · 문욱
389권 「백준등전(柏俊等傳)」 390권 「가정등전(賈楨等傳)」 391권 「왜인등전(倭仁等傳)」
백준 · 인괴 · 서상 · 전경 가정 · 주조배 · 주봉표 · 단무겸 왜인 · 이당계 · 오정동
392권 「새상아등전(賽尙阿等傳)」 393권 「이성원등전(李星沅等傳)」 394권 「서광진등전(徐廣縉等傳)」
새상아 · 눌이경액 이성원 · 주천작 · 노숭광 서광진 · 엽명침 · 황종한
395권 「상대순등전(常大淳等傳)」
상대순 , 쌍복 왕금수 왕수동, · 장문경 · 도은배 , 다산, · 길이항아 · 나준전 · 서유임 · 왕유령
396권 「오문용전(吳文鎔等傳)」 397권 「육건영등전(陸建瀛等傳)」
오문용 · 반탁 · 등이항 육건영 · 양정문 · 청린 · 숭륜 · 하계청
399권 「여현기등전(呂賢基等傳)」
여현기 · 추명학 · 대희 · 장비 · 황종 · 도정걸 · 풍배원 · 손명은 · 심병원 · 장석경
400권 「하계진등전(何桂珍等傳)」 401권 「상영등전(向榮等傳)」
하계진 · 서풍옥 · 온소원 · 김광저 · 이맹군 · 조경현 상영 · 화춘 · 장국량
402권 「오란태등전(烏蘭泰等傳)」
오란태 · 등소량 · 주천수 · 요문선 · 문서 · 팽사거 · 장옥량 · 노점오 · 유계삼 · 서쌍래 · 구등룡 · 왕국재 · 호곤원 · 대문영
403권 「승보등전(勝保等傳)」 404권 「승격림심등전(僧格林沁等傳)」
승보 · 탁명아 · 진금수 · 덕흥아 승격림심 · 서통액 · 항령 · 소극금 · 하건오 · 전순 · 사영춘 · 악선
405권 「증국번전(曾國籓傳)」 406권 「낙병장등전(駱秉章等傳)」 407권 「강충원등전(江忠源等傳)」
증국번 낙병장 · 호림익 강충원 · 나택남
408권 「이속빈등전(李續賓等傳)」 409권 「탑제포등전(塔齊布等傳)」
이속빈 · 정예의 · 증국화 · 이속의 · 왕진 · 유등홍 · 장익풍 탑제포 · 필금과 · 다융아 · 포초, 송국영 누운경 담등달, · 당인겸 · 유송산
410권 「팽옥린등전(彭玉麟等傳)」 411권 「이홍장전(李鴻章傳)」
팽옥린 · 양악빈 · 왕명산 · 손창개 · 양명해 · 사준여 이홍장
412권 「좌종당전(左宗棠傳)」 413권 「증국전등전(曾國荃等傳)」
좌종당 증국전 · 심보정 · 유곤일
414권 「이신전등전(李臣典等傳)」
이신전 · 소부사 · 이원길 · 유연첩 · 팽육귤 · 장시일 · 오유수 · 주남계 · 나봉원 · 이상화 · 소경연 · 오종국
415권 「황익승등전(黃翼升等傳)」
황익승 · 정의방 · 왕길 · 오가방 · 이성모 · 이조빈 · 강복산 · 유배원
416권 「정학계등전(程學啟等傳)」
정학계 · 하안태 · 정국괴 · 유명전 · 장수산 · 주성파 · 주성전 · 반정신 · 오장경
418권 「원갑삼등전(袁甲三等傳)」 419권 「낙병장등전(左宗棠傳)」 420권 「한초등전(韓超等傳)」
원갑삼 · 모창희 유장우 · 유악소 · 잠육영 한초 · 전흥서 · 증벽광 · 석보전
421권 「심조림등전(沈兆霖等傳)」
심조림 · 조육영 · 허내보 · 조광 · 주준 · 이함 · 장상하 · 나돈연 · 정돈근 · 방종로
422권 「왕무음등전(王茂廕等傳)」
왕무음 · 송진 · 원희조 · 문서 · 육록 · 서계여 · 왕발규 · 염조윤 · 뇌이함 · 도양 · 오존의 · 은조용
423권 「종직진등전(宗稷辰等傳)」 424권 「오진역등전(吳振棫等傳)」
종직진 · 윤경운 · 왕증 · 목집향아 · 유백천 오진역 · 장량기 · 모홍빈 · 장개숭
425권 「이혜등전(李僡等傳)」 426권 「왕경운등전(王慶雲等傳)」
이혜 · 오당 · 영한 · 유용 · 교송년 · 전정명 · 오원병 왕경운 · 담정양 · 마신이 · 이종희 · 서종간 · 왕개태 · 곽백음
451권 「이조의등전(李朝儀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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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0권 「좌보귀등전(左寶貴等傳)」 461권 「송경등전(宋慶等傳)」
좌보귀 · 원영산 · 등세창 · 유보첨 · 대종건 송경 · 여본원 · 서방도 · 마옥곤 · 의극당아 · 장순
462권 「정여창등전(丁汝昌等傳)」 463권 「당경숭등전(唐景崧等傳)」
정여창 · 위여귀 · 엽지초 당경숭 · 유영복
464권 「이단분등전(李端棻等傳)」
이단분 · 서치정 · 진보함 · 황준헌 · 증화 · 양심수 · 양예 · 유광제 · 담사동 · 임욱 · 강광인
465권 「서동등전(徐桐等傳)」 466권 「서용의등전(徐用儀等傳)」
서동 · 강의 · 조서교 · 고아랍계수 · 하영년 · 희탑랍유록 · 육현 서용의 · 허경징 · 원창 · 토묵특입산 · 최가연원
471권 「성선회등전(盛宣懷等傳)」 472권 「육윤상등전(陸潤庠等傳)」
성선회 · 서징 육윤상 · 세속 · 이극탄 · 양정분 · 서방 · 노내선 · 심증식
473권 「장훈등전(張勳等傳)」 474권 「오삼계등전(吳三桂等傳)」 475권 「홍수전전(洪秀全傳)」
장훈 · 강유위 오삼계 · 경정충 · 상지신 · 손연령 홍수전
476·477·478·479권 「순리전(循吏傳)」
백등명 , 탕가상 임진단 우종요, · 송필달 · 육재신 · 장목 , 장훈(張塤), · 진여함 · 목수 , 진시림, · 요문섭 , 황정린, · 낙종린 , 최종태 조진조, · 조길사 · 장근 · 강고 , 장극억 가박, · 소사요 , 위입정 고음작 근양, · 최화 · 주중횡 · 유계 · 도원순 · 요기형 · 동국롱 · 육사 · 공감 · 진덕영 · 예복전 · 장림 · 염요희 · 남정원 · 엽신 · 시초정 · 진경문 · 주인룡 · 동화 · 이위 · 사중훈 · 이대본 · 우운진 · 장견도 · 소대업 · 주극개 , 정기 강기연 언여사 주제화, · 왕휘조 , 여돈화 주휴도, · 유대신 · 오환채 · 기대규 · 소희증 · 장길안 , 이육창, · 공경한 · 개방필 · 사소등 · 이갱예 · 이병수 · 적상경 · 장돈인 · 정돈윤 · 이문경 · 유체중 , 유후, · 장기 , 석가소, · 유형 , 서동, · 요간지 · 오균 · 왕조겸 · 조근 · 계초만 · 장작남 · 운무기 · 서대영 · 우수매 · 하왈유 · 오응연 · 유병림 , 진숭지 하자령 소세본, · 이병도 , 유주 주근인 추종준 왕무훈, · 괴덕모 · 임달천 · 방대제 · 진호 · 양영서 · 임계 · 왕인복 · 주광제 · 냉정형 · 손보전 · 가소경 · 도관준 · 진문불 · 이소 · 장해 · 왕인감
480·481·482·483권 「유림전(儒林傳)」
손봉기 · 황종희 · 왕부지 · 이옹 · 심국모 · 사문존 · 고유 · 탕지기 · 육세의 · 심윤 · 응휘겸 · 주학령 · 심호정 · 백환채 · 호승락 · 조본영 · 유원록 · 안원 · 이공 · 조포 · 이내장 · 이광파 · 장형양 · 왕무굉 · 이몽기 · 호방 · 노사 · 고동고 · 맹초연 · 왕불 · 요학상 · 당감 · 오가빈 · 유희재 · 주차기 · 성유 · 소의진 · 고염무 · 장이기 · 만사대 · 호위 · 모기령 · 염약거 · 혜주역 · 진후요 · 장림 · 임계운 · 전조망 · 심융 · 강영 · 저인량 · 노문서 · 전대흔 · 왕명성 · 대진 · 단옥재 · 손지조 · 유대공 · 공광삼 · 소진함 · 왕염손 · 왕중 · 무억 · 장술조 · 척학표 · 정걸 · 손성연 · 왕빙진 · 능정감 · 계복 · 강성 · 전대소 · 허강좌 · 공음식 · 육기 · 광계
484·485·486권 「문원전(文苑傳)」
487·488·499·490·491·492·493·494·495·496권 「충의전(忠義傳)」
497·498·499권 「효의전(孝義傳)」
주용순 · 오번창 오겸목 · 주정 · 적요 · 이경염 · 왕호 · 황농 · 조형 · 황가장 · 정명윤 · 유종수 · 하복한 · 허계각
500·501권 「유일전(遺逸傳)」
502·503·504·505권 「예술전(藝術傳)」
506 · 507권 「주인전(疇人傳)」
설봉조 · 공사연 · 왕석천 · 방중통 · 매문정 · 명안도 · 유상규 · 왕문계 · 주홍 · 박계 · 허여란 · 이황 · 왕래 · 진걸 · 시왈순 · 이예 · 낙등봉 · 항명달 · 정취충 · 사가화 · 오가선 · 나사림 · 고관광 · 좌잠 · 증기홍 · 하란상 · 추백기 · 이선란 · 화형방
508·509·510·511권 「열녀전(列女傳)」
518·519·520·521·522·523·524·525권 「번부전(藩部傳)」
526·527·528·529권 「속국전(屬國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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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제9대 황제
함풍제 | 咸豊帝
파일:800px-《咸丰皇帝朝服像》.jpg
출생 1831년 7월 17일
청나라 직예성 북경 원명원
(現 베이징시 하이뎬구)
사망 1861년 8월 22일 (향년 30세)
청나라 열하성 승덕
(現 허베이성 청더시)
능묘 정릉(定陵)
재위기간 제9대 황제
1850년 3월 9일 ~ 1861년 8월 22일 (11년 16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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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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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83e><colcolor=#00386a> 성씨 중국식 : 애신각라(愛新覺羅)
만주어 : 아이신기오로(ᠠᡳ᠌ᠰᡳᠨ ᡤᡳᡠ᠋ᡵᠣ)
중국식 : 이주(奕詝)
만주어 : 이주(ᡳ ᠵᡠ)
한국식 독음 : 혁저
국적
[[청나라|]][[틀:국기|]][[틀:국기|]]
부모 부황 선종 성황제
모후 효전성황후
형제자매 9남 10녀 중 4남
배우자 정후 - 효덕현황후 살극달씨
계후 - 효정현황후 뉴호록씨
후궁
16명 [ 펼치기 · 접기 ]
효흠현황후 예허나라씨, 장정황귀비 타타랍씨
단각황귀비 동가씨, 민귀비 서가씨, 완귀비 소작로씨
부비 예허나라씨, 희비 차하르 하탕춘, 길비 왕가씨
경비 장가씨, 운빈 무가씨, 용빈 이이근각라씨
숙빈 엽협나라씨, 옥빈 엽협나라씨
평상재 이이근각라씨, 춘상재 명암씨, 진상재 대가씨
자녀 2남 1녀
신장 165cm[1]
한호 굽치 얼옝어 한(ᡤᡠᠪᠴᡳ ᡝᠯᡤᡳᠶᡝᠩᡤᡝ ᡥᠠᠨ᠌)
칸호 투게멜 엘베그투 칸(ᠲᠦᠭᠡᠮᠡᠯ ᠡᠯᠪᠡᠭᠲᠦ ᠬᠠᠭᠠᠨ)[2]
묘호 문종(文宗)
시호 중국식 :
협천익운집중수모무덕진무성효연공단인관민장검현황제(協天翊運執中垂謨懋德振武聖孝淵恭端仁寬敏莊儉顯皇帝)
만주어 : 일어투 후왕디(ᡳᠯᡝᡨᡠ ᡥᡡᠸᠠᠩᡩᡳ)
연호 1851년 ~ 1861년
중국식 : 함풍(咸豊)
만주어 : 굽치 얼옝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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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즉위 전3. 즉위 후
3.1. 태평천국의 난3.2. 2차 아편전쟁3.3. 죽음
4. 평가5.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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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나라의 9대 황제. 강제 퇴위를 당한 종손 선통제를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가장 재위가 짧은[3] 청 황제이며, 중국 역사상 자기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준 마지막 황제이기도 하다. 얼마 되지도 않는 재위 11년간도 평안치 못하여 온갖 종류의 재난이라는 재난은 모두 일어나 이때부터 청나라는 본격적인 내리막길을 타게 된다. 뒤에 나온 황제들이 전부 아무 힘도 없는 허수아비[4]라서 권력을 행사한 청의 마지막 황제로 볼 수 있다.

2. 즉위 전

도광제의 넷째 아들이며, 생모는 효전성황후 뉴호록씨이다. 뉴호록씨는 사망 당시에는 후궁 신분이었고 훗날 함풍제가 황후로 추존하였다. 도광제가 사망할 시점에는 형들이 모두 요절했기 때문에, 그가 실질적인 장남(서장자)이었다.

그가 즉위하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도광제의 정실이었던 효목황후는 자녀가 없었고, 효신황후는 딸 1명을 낳았다. 도광제는 황자 시절 시녀를 범해서(화비 나라씨) 의도치 않게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도광제의 장남인 혁위(奕緯)이다. 도광제는 신분이 낮은 시녀에게서 의도치 않게 아들을 얻은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이것으로 인해 자신의 평판에 흠이 될 것을 두려워하였다. 하지만 가경제는 처음 얻은 손자를 기뻐하여 혁위를 패륵(貝勒)에 봉했으나 도광제는 이를 싫어하여 자신이 즉위한 직후, 혁위에게서 패륵 지위를 박탈하고 평범한 황자의 지위로 내려가게 하였다. 도광제는 황후가 낳은 적자를 원하였기 때문에 혁위를 후계자로 삼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런 잘못없이 작위를 취소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은 아니었다. 청의 법제에 따르면 공이 있으면 작위를 올려주고, 죄가 있어야 작위를 강등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도광제가 혁위를 패륵으로 봉하면 제신(諸臣)들이 그를 후계자로 생각할까 염려해서였다.

하지만, 도광제에게는 적자가 태어나지 않았고, 당시 총애하던 정비(靜妃)가 낳은 차남과 3남은 유아기 때 요절하고, 또다른 총비 전귀비(全貴妃)[5]는 공주를 연이어서 낳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도광제의 나이 50세가 가까워지면서 유일한 대안은 자신이 사랑하지 않은 아들인 장남 혁위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비로소, 혁위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그에 걸맞은 스승을 붙여주어 제왕학을 가르치는등 신경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도광제의 무시와 냉대를 받으며 사는 동안 혁위의 성격은 고집스럽게 변해 아버지와 자주 충돌하였고, 결국 1831년 5월에 혁위가 23세의 나이로 죽었다. <청사고> 등에는 전년부터 아팠다는 기록이 보이지만, 야사에서는 혁위가 공부에 신경쓰지 않고 방탕하게 놀다가 도광제가 분개하여 질책하다가 혁위의 중요부위를 걷어차서 갑작스레 죽었다는 얘기도 있다.

혁위가 1831년 5월에 죽은 직후, 그해 7월에 전귀비(全貴妃)가 도광제의 넷째아들인 혁저를 낳았다. 도광제의 나이 50세에, 그 시점에서는 유일하게 얻은 아들이었다, 1833년 효신황후가 죽자, 전귀비는 황귀비가 되었고. 효신황후의 3년상 이후에 황후로 책봉됨으로서 혁저도 적자로 승격되었다. 1840년 효전황후가 죽었는데, 이 때 혁저의 나이 10세였고. 그의 양육은 동생 혁흔의 친모인 정귀비에게 맡겨졌다.

효전황후의 죽음에는 야사가 전해진다. 함풍제는 이미 황자 시절부터 동생 혁흔에 비해 무능함이 드러나 후계자 자리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효전황후는 자기 아들이 제위를 잇게하기 위해 혁흔이 먹을 생선요리에 독을 탔으나 고양이가 먹고 거품을 물고 죽자 추궁당하여 전모가 드러나 아들을 지키기 위해 자결했다고 한다. 물론, 야사일 뿐이다. 청 황실에서 자살은 큰 죄이므로 친어머니가 자살을 했다면 오히려 아들의 앞날에 걸림돌이 되었을 터이기 때문.[6]

정귀비에 의해 양육된 혁저는 정귀비를 생모처럼 여기면서 효로써 섬겼고, 정귀비의 아들인 혁흔(도광제의 6남)도 친동생처럼 여겼으며 유년시절을 같이 보냈다. 도광제의 5남 혁종은 숙부인 돈친왕 면개의 양자로 입양되어서 후계경쟁에서 탈락하였고, 7남 혁현 이하는 아직 어려 후계가 될 수 없었다. 자연히 도광제의 말년은 혁저와 혁흔이 후계자 지위를 두고 경쟁하게 되었다.

혁저는 어렸을 때 천연두를 앓아 얼굴에 곰보 자국이 있었으며, 또한 수렵사냥 중 낙마하여 부상을 입은 이후부터 다리가 불편한 점이 있었다. 혁흔은 문무에 능통하고 활달한 기개가 있어서 도광제가 총애하였다. 도광제에게 혁저는 유일한 적자이기도 했기에 혁저를 효전황후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총애하였다면, 혁흔은 문무에 고루 능하고 국제정세에도 관심이 많은 다재다능함으로 인해 사랑하는 바가 컸다.

혁저가 도광제의 유일한 적자이긴 했지만, 사실 청나라는 중국사의 다른 흔한 한족왕조와 달리 무조건 적자에게 제위를 물려주지 않고 오로지 능력(+ 외가를 비롯한 여러 배경)으로 계승이 이뤄진 사례가 많았고 옹정제 때는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도 도입[7]했기 때문에 적자 함풍제가 너무 소질이 없어보인다면 얼마든지 그것을 뒤집고 다른 서자가 제위에 오를 수 있었다. 당장 도광제도 적장자이긴 하지만 형제들 중 가장 뛰어난 능력과 인품을 자랑했기에 즉위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무능했던 함풍제가 어떻게 즉위할 수 있었는지 설명하는 야사(野史)가 있다. 도광제가 죽기 얼마 되기 전에 혁저와 혁흔을 같이 불렀는데, 형과 마찬가지로 스승에게 코칭을 받긴 했지만 벼락치기가 필요없을 만큼 평소에 열심히 공부하고 생각해오던 여러 국정 현안에 대해 막힘없이 답한 혁흔과 달리 두수전(杜受田) 등 스승들에게 쪽집게 과외를 받은 함풍제는 황제의 병세가 이리도 악화되었으니 이는 다 자식인 자신의 잘못이라면서 펑펑 울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눈물 감성팔이 작전이 먹혀서(…) 후계자는 함풍제가 되었고 혁흔은 공친왕 책봉에 그쳤다. 그래서 '혁흔이 후계자가 되었다면'이란 가정은 지금도 가끔씩 회자된다.

정사에는 도광제와 황친들이 수렵사냥을 나갔을 때, 혁저가 단 한 발의 화살도 쏘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보고, 도광제는 그가 생명을 중히 여기는 인효한 인품임을 크게 칭찬했다고 하며, 그로서 혁저를 후계자로 정하기로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 (1846년의 일)

입태자 문제에 대해서는 현대 역사학자들 간에 논쟁이 많다. 함풍제가 즉위 이후 보여준 무능함, 사실 그보다도 서태후를 그나마 견제할 수 있던 유일한 걸물이었다는 점에서 공친왕이 아예 형 대신 황제로 올랐더라면 서태후의 깽판을 볼 일도 없고 하는 가정이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는 있으나, 근래로 올수록 함풍제도 황자 시절 나름대로 능력을 입증한 바 있었으며, 유교적 가치가 중시되던 사회에서 서양이 추근거리는 국제정세에 밝고 서양 문물의 도입에도 관심이 많았지만 반대로 보수세력과는 껄끄럽던 공친왕과 달리 함풍제의 인품이 도광제와 보수파 중심의 중신들 사이에서 상당한 평가를 받았기에 경쟁에서 앞서가는듯했던 혁흔을 역전하기에 충분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함풍제에 대한 재평가를 둘러싸고 현재 대륙학계에서는 상당한 논쟁이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라 할 수 있다.

3. 즉위 후

3.1. 태평천국의 난

즉위한 바로 그해인 1850년 12월, 중국 사상 최대 규모의 민란 태평천국의 난이 시작되었다. 낙방한 유생 홍수전 야훼의 아들임을 자처하며 스스로 천왕이라 부르며 금전촌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이후 청나라에 실망한 사람들이 대거 모여들며 세를 빠르게 불렸다.[8] 이후 태평천국은 멸만흥한(滅滿興漢)[9]를 기치로 내걸고 영안(永安)을 점령하였으며, 우한 등도 손아귀에 넣었다. 1853년 3월에는 마침내 중국 남부의 핵심부인 난징을 점령하였으며, 이후 난징을 천경(天京)으로 개칭하고 수도로 삼았다.

태평천국은 난징을 얻은 후 청나라의 수도인 베이징을 들이치자는 북벌론과, 일단 장강 유역을 따라 영토를 불리며 힘을 키우자는 서정론으로 나뉘었다. 당시의 실권자였던 동왕(東王) 양수청[10]은 이를 동시에 실시하기로 결정했고, 1853년 5월에 북벌군에는 임봉상과 이개방을, 서정군 지휘관에는 익왕 석달개를 임명하여 각각 보냈다. 다만 북벌군은 청나라의 대대적인 공세와 인적 열세를 견디지 못하고 1855년에 고립된채 농성하다가 전멸당했으며, 이개방은 베이징으로 압송되어 능지처참을 당하여 죽는다.

한편 서정군은 상대적으로 더 나은 성과를 올렸다. 함풍제가 북벌군의 진군에 놀라 모든 병력을 베이징에 몰빵하는 사이, 증국번이 이끌던 청나라의 상군은 태평천국 군대에게 연이어 패배하였고, 증국번은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다만 홍수전이 수도 바로 옆에 주둔한 청군을 몰살하기 위하여 익왕 석달개를 다시 불러들이면서 중국 서부의 청나라 군대는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 석달개의 군대는 난징으로 돌아가 난징 바로 곁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의 강북대영과 강남대영을 몰살시켰고, 이로서 태평천국에는 진정한 전성기가 도래한 듯 보였다.

태평천국은 남녀 평등, 구시대 악습 타파, 사유재산 금지, 아편 금지 등 급진적인 사회 개혁 정책들을 내놓으며 민중의 지지를 얻었으나, 시간이 흐르자 이들의 이상도 변질했고 태평천국 지도층은 오히려 청나라 관리 못지않은 약탈 행위를 저지르며 인심을 잃고 말았다. 게다가 지도층의 내분도 상당히 심각했는데, 특히 동왕 양수청이 점차 홍수전의 지위를 노리자 홍수전은 북왕 위창휘와 연왕(燕王) 진일강(秦日綱)을 은밀히 불러 양수청을 제거할 것을 명령했고, 1856년 9월 2일, 북왕부와 연왕부의 군대가 동왕부를 기습해 양수청을 살해했으며, 이를 천경사변(天京事變)이라고 한다. 게다가 유능한 군지휘관이었던 석달개는 홍수전의 친인척 감싸기를 참다못해 1857년 여름에 정예군 10만을 이끌고 사천 지방으로 도망가기까지 했다.[11] 아무튼 지도층 간의 내분은 갈수록 심해졌고, 한편 함풍제는 증국번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본격적인 반격에 들어갔다. 이후 이홍장은 연합군인 상군(湘軍)을 이끌고 서구 열강들의 도움을 받아[12] 태평천국을 멸망시켰다.

태평천국의 난은 13년이나 계속되어 함풍제가 죽은 이후인 1864년 8월에야 태평천국의 수도인 난징이 함락되어 끝났으며, 흡사 강희제 시절의 오삼계의 난처럼, 아니 그보다 더더욱 심할 정도로 중국 남부를 폐허로 만들었다. 이미 백련교도의 난(1796년 ~ 1805년)으로 재정 낭비가 심했던 청나라는 또 없는 살림에 막대한 전비를 소모하여 재정이 완전히 탕진되었고, 가장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강남이 초토화되어 경제, 사회적으로 몹시 피폐해졌다.

3.2. 2차 아편전쟁

태평천국의 난이 한참 현재 진행 중인 상황인 1856년, 영국은 애로호 사건[13]을 들먹이며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게다가 프랑스도 자국 선교사가 중국에서 처형당한 것을 빌미로 전쟁을 선포하였고, 결국 청나라는 당대 최강대국인 두 나라와 동시에 전쟁을 벌이는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14]

이미 태평천국 때문에 국력을 거의 소진해버린 청나라는 더이상 서구 강대국들을 상대할 힘이 없었다. 이때문에 청나라는 얼마 싸우지 않고 톈진 조약을 맺어 이권을 어느 정도 더 떼주고 배상금을 지불하는 선에서 그치려 했으나, 그 사이에 또 영국, 프랑스 연합군과 마찰이 생기며 조약 파기 수순까지 들어갔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 기회에 제대로 청나라를 밟아버리기 위해 수도인 베이징을 공략한다는 초강수를 두었고, 끝내 그해 10월에는 베이징에 입성했다. 한편 전쟁을 지지했던 함풍제와 조정대신들은 모두 겁에 질려 열하의 피서산장으로 튀었고, 베이징을 점령한 연합군대는 원명원, 이화원 등을 마음껏 약탈하며 유린하였다.[15]

한편 함풍제가 열하로 몽진했을 때, 조선에서는 문안 겸 정보 수집 겸하여 사신을 보냈던 모양이다. 이에 황제는 적잖이 감동하여 "다른 나라에선 한 놈도 아무도 안 찾아오던데 조선만이 이토록 찾아와 주니, 한결같이 사대하는 정성이 감탄스럽다. 참으로 예의의 나라다."라고 말했다고. 그토록 힘든 상황에 외국에서 사신을 보냈으니 충분히 감동할 만하다. 다만 하술하겠지만 이것저것 다 귀찮고 도피하고 싶었던 모양인지 사신을 인견하여 직접 보지는 않았던 듯. 제후국 보기에 창피했을지도 조선왕조실록 기사에도 반응을 전해 들었다고만 나와 있고, 청나라 쪽 기록인 청사고 기사에도 사신이 행재소(별궁)에 오지 못하게 했다고 되어 있다. 또한 조선 사신으로서는 황제에 대한 문안 의사 전달은 성공했을지 몰라도 정보 수집은 시원찮았던 듯한데, "가 보니 서양 오랑캐들 난리 쳤어도 생각보다 편안하고 괜찮던데요?" 수준으로 보고한지라... 신명호(부경대 사학과 교수)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1)

각설하고, 그 결과 청나라는 베이징 조약을 또 맺어 추가로 개항장을 지정하고 배상금을 늘렸으며 구룡반도까지 강제 할양해버렸다. 한편 러시아는 중개를 빌미로 아무르강 이북의 광대한 영토를 떼어먹었다. 한편 2010년 건륭제의 80세 생일을 기념해 제작된 옥새가 경매에 올라와서 중국 네티즌들을 격노케 했던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그 옥새 또한 이 시기에 영국군이 원명원을 분탕질 할 적에 반출된 것으로 추정한다.

3.3. 죽음

아무튼 이때 함풍제는 앞서 말했듯 수도를 버리고 열하 피서산장으로 몽진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가 중재에 나섰고, 북경에 남은 함풍제의 동생인 공친왕의 주도로 1860년 베이징 조약을 맺게 된다. 그리고 러시아는 중개 수수료 명목으로 연해주를 차지했다(…) 참고로 연해주는 만주와 함께 여진-만주족의 성지였다. 조약은 체결되었지만 크게 상심한 그는 외국 공사와의 친견을 거부해 계속 열하에 있었다. 비참한 처지에서 도피하기 위해서인지 열하에 있는 동안 함풍제는 연회와 공연 감상에만 열중했고, 곧 병사하였고 유언장은 무시당하며 불태워졌다.

망국 군주가 그렇듯이 함풍제 또한 청나라가 멸망한 뒤로 무덤이 무참히 도굴당했다. 동릉 도굴 사건 당시 부장품이고 뭐고 털리면서 시신조차도 강희제, 동치제의 시신과 같이 아무 데나 내팽겨쳐버려 아예 사라졌다.

4. 평가

시대를 모른 청나라 최악의 암군[16]으로 평가받지만 그래도 시대적 분위기를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제위에 오른 것 자체가 왕조와 나라 모두에 재앙이었라는 극악의 평가를 받고 있으며, 생전의 행적과 그가 남긴 결과만 놓고 보면 변명거리가 없어 보인다. 청나라 역사상 실권이 있던 황제 중에서 가장 무능했기 때문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함풍제는 이른 나이인 31세에 요절해서 하나뿐인 아들 동치제는 10살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황제에 올라야 했다. 이는 결국 자신의 후궁 서태후 동치제 생모 자격으로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서태후의 실정이 청나라의 쇠퇴를 더욱 가속화시켰음을 감안하면 악재가 연달아 닥쳤다고 할 수 밖에 없다.[17] 그리고 함풍제가 죽은 지 딱 50년 뒤인 1911년에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나라는 멸망했다.

함풍제의 치세는 조선 철종(재위 1849년 ~ 1863년)의 재위 기간과 비슷하게 일치한다. 자연 재해는 빗발쳤고, 민란은 연이어 일어났지만, 정작 왕은 무능하여 이렇다할 일도 해보지 않고 승하했다는 점에서 비슷한 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18]

5. 대중매체

중국사에서 함풍제의 치세는 다사다난한 근대사의 도입부라서 함풍제는 자주 묘사되지는 않고, 등장해도 딱히 좋은 취급은 못 받는다. '착하지만 우유부단한' 캐릭터 정도로 나온다. 작품마다 공통적으로 동생에 대한 열등감이 묘사되는 편이다. 또한 낙마 사고로 인해 함풍제의 캐릭터는 한쪽 다리를 저는 것으로 묘사된다. 또한 친어머니 못지않게 지극정성으로 키워준 정귀비(효정성황후)에 대한 효성이 공친왕 못지않게 지극해서, 공친왕과도 여러모로 껄끄러운 관계에 놓인다.

서태후와 공친왕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제국의 눈물(원제 홍장녹와)>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이 둘의 관계가 묘사되는데, 어린 시절을 단시간에 묘사하느라 상당히 축약하지만 둘의 차이를 상징적으로 그려낸다. 태후가 여는 만찬에서 혁흔이 전귀비로부터 독을 넣은 생선요리를 권유받는데 정작 아들인 자신은 그걸 못 먹게 하자 귀신같이 독살 음모를 눈치채고는 밥상을 뒤엎어서(!) 혁흔을 구하지만, 어머니가 태후에 의해 자결을 명받고 정귀비가 어미를 잃은 혁저를 혁흔과 함께 키우게 된다. 함께 공부하고 보르지기트 셍게린첸 앞에서 새로운 검법을 선보이는 등 혁저와 혁흔의 우애는 동복형제 못지않지만, 보수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그 옛 학문에서도 동생만 못함을 스스로도 체감하는 혁저와 달리 혁흔은 " 진시황이 영국 대포를 본 적이 있는가? 공자가 아편을 피워는 봤나? 자치통감에 강산중흥의 비결이 나와있나?" 같은 발언으로 신문물 도입과 개혁에의 신념을 드러낸다. 한편 혁저가 다리를 절게 된 원인은 둘 다 코흘리개일 때 시위들한테 승마를 배우던 중 혁흔이 말 빨리 배우고 싶다면서 천방지축으로 겁없이 과속하다가 어설프게 따라가던 혁저가 낙마한 것으로 묘사된다. 주로 1~2화에서 묘사되는데, 형제간 우애가 지극하던 유아기의 모습이 매우 귀엽게 나온다. 도광제도 정귀비가 친아들과 양아들 구분하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키웠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과감히 정귀비에게 황태자를 누구로 정할까 물어볼 정도였는데, 정귀비가 어미도 잃었는데 동생이랑 놀다 절름발이가 된 착한 아이가 안쓰럽다고 혁흔 대신 혁저에게 제위를 물려주라고 할 정도다. 태비가 된 후에는 의귀비와 친하게 지내는데, 의귀비가 곁을 지키던 임종 때는 함풍제와 공친왕을 착각해서 공친왕에게 할 말을 황제에게, 황제에게 할 말을 공친왕에게 하느라 껄끄러운 사이였던 형제가 화해하나 했지만 황후가 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는 황제에게 남길 넋두리를 공친왕에게 하는 바람에 공친왕이 평소엔 잘 찾아오지도 않던 황제에게 울며 달려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황태후로 책봉을 해달라 졸라대자 자신이 황제가 된 것이 사랑으로 자신을 키워준 태비 덕분임을 알고 눈물을 흘리며 황태후 책봉 조서를 이미 쓰고 있던 황제가 섭섭해하며 공친왕을 타일러 내보내고는 홧김에 조서를 찢어버린다. 물론 실제 역사대로 성질을 누그러뜨리고는 상중의 공친왕을 적당히 훈계하고 다시 정태비를 황태후로 추봉하긴 하지만, 청군이 영불연합군에 참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태묘에 꿇어앉아 선황들에게 죄를 빌면서도 어린 시절 아버지가 같은 자리에서 통곡할 때 자신은 왜 아버지가 서럽게 우는지 모르는데도 동생은 모든 사건을 파악했던 것을 새삼 떠올리며 다시금 속이 쓰리기만 하다. 대체로 유능하다고는 못해도 선량한 황제의 모습인데, 일국의 군주로서 형제를 잠재적 반역자로 경계할 수준의 극한의 열폭은 불쌍해보일 정도다.

1995년에 개봉한 홍콩 영화인 <외전 혜옥란> [19]에서는 신삼국에서 관우 역을 한 우영광이 함풍제를, 그리고 양가휘가 공친왕을 맡았다.[20] 함풍제는 성 불구자로 묘사되며, 혜옥란은 궁녀로 들어왔다가 승은을 받지 못하자 유곽에서 테크닉을 익혀 황제와 잠자리를 갖고, 또한 공친왕과도 관계를 맺어 동치제를 임신하여 황후로 승진한다. 이후 황제가 승하하자 공친왕을 숙청하고 스스로 수렴청정으로 정권을 잡는다.


[1]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서 나온 키이다. [2] Tügemel Elbegtü Qaɣan. 현대 몽골어로 투게멜 엘벡트 칸 Түгээмэл Элбэгт хаган (Tügeemel Elbegt Khaan) [3] 초대 황제 천명제도 10년밖에 재위하지 못했지만 이 사람은 즉위하기 30년 전부터 이미 만주족 군주였다. [4] 광서제가 정말 잠시 동안 변법자강운동을 계기로 실권을 되찾은 적이 있기는 하지만, 서태후 무술정변으로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실권을 도로 빼앗겨 버리고 유폐당한 채 살다가 권신 위안스카이에게 독살당했다. [5] 함풍제의 생모 뉴호록씨는 14세때 도광제의 후궁으로 간택되었는데, 명문가 출신에 미인에다 총명하고 성격도 온순해서 전부 뛰어나다 라는 의미로 '전귀비'라 불리었다. (이후 효전성황후로 추존) [6] 정사에선 죽기 몇 년 전부터 병을 앓았는데 악화되어 사망했다고 기록 돼 있다. [7] 황제 생전에 공식적으로 태자를 지정하지 않고 대신 자금성 정전인 건청궁의 판액인 정대광명’(正大光明) 현판과 황실 관청인 내무부에 각각 후계자를 낙점한 황제의 유조를 은밀히 보관한 뒤 황제가 붕어한 뒤 두 유조의 이름이 같다면 그 인물을 차기 황제로 즉위시키는 제도였다. 더 정확히는 청나라 초기 순치제까지는 능력 위주의 황위 계승이 이루어졌으나 강희제 즉위 후 태자(윤잉)를 공식 지정하였다 폐위시키는 사태가 반복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즉위한 옹정제가 이를 공식적으로 도입한 것이다. [8] 대체적으로 만주족인 청 황실에 대한 뿌리깊은 모멸감, 아편 전쟁 등으로 갈수록 피폐해지는 경제, 자연재해의 연이은 등장 등으로 당시 청나라 국민들의 민심은 크게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9] 만주족을 멸하고 한족을 부흥시킨다 [10] 태평천국은 천왕인 홍수전 아래에 동왕(東王) 양수청(楊秀淸), 서왕(西王) 소조귀(蕭朝貴), 남왕(南王) 풍운산(馮雲山), 북왕(北王) 위창휘(韋昌輝), 익왕(翼王) 석달개(石達開) 등 총 5명의 왕들을 따로 두었다. [11] 이들은 초기에는 승승장구했으나, 나중에는 보급도 받지 못하다가 결국 청군에게 전멸당했다. [12] 서구 열강들은 반외세, 자주를 주장하는 태평천국의 도움을 전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만만하고 친숙한 청나라를 훨씬 선호하였기에, 나중에는 청나라를 본격적으로 도와주었다. [13] 청나라가 영국인 소유의 애로호를 단속하는 과정에서 명예로운 유니언 잭을 모욕했다고 주장한 사건이다. 사실 별거 아닌 사건이지만 영국이 청나라에 전쟁을 선포하게 하는 빌미를 만들어주고야 말았다. [14] 당시 이 황당한 개전 사유 때문에 영국 의회 내에서도 말이 많았다. 결국 전쟁 선포는 의회에서 부결되었으나, 당시 총리였던 헨리 존 템플은 의회를 해산하고 전쟁 선포를 통과시켜버렸다. 다만 영국 내부에서는 제1차 아편전쟁을 지나치게 일찍 끝냈다는 불만이 있었으며, 지난 전쟁을 통해 얻은 이익이 상대적으로 너무 작다는 인식이 만연하였기에 제1차 아편전쟁 때와 달리 은연중에 전쟁을 찬성하는 분위기였다. [15] 당시에는 자금성을 불태워버리자는 의견까지 나왔으나, 청나라의 정궁을 아예 태워버리는 것은 심하다는 반대 의견 때문에 실행되지는 않았다. 한편 황제의 여름궁전으로 사용되며 진귀한 보물들이 쌓여있던 원명원은 그딴거 없고 그냥 태워버렸다. 이때 반출된 국가급 문화재들이 요즘에도 간간히 영국, 미국 등지에서 발견되고는 한다. [16] 천명제~ 건륭제까지는 명군이었고,(다만, 건륭제는 논란이 다소 있다.) 가경제는 건륭제 말기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열심히 노력했고 (하지만 성과는 별로 없었다), 도광제 제1차 아편전쟁이 발생한 시기에 황제였으나 자기 잘못이라고 보기는 힘들며, 동치제 광서제 서태후의 꼭두각시였으며, 어린 나이에 잠깐 즉위했다 망국으로 인해 퇴위했을 뿐인 선통제는 설명이 필요없다. [17] 다만 함풍제는 도장을 두 개 만들어 어상은 동태후에게, 동도당은 후계자 재순(사실상 서태후에게 준것)에게 주었다. 성지에 두 개의 도장을 모두 찍어야 성지가 효력이 있게 함으로써 서태후에 대한 견제장치는 두었다. 서태후가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나라를 쥐락펴락한 것은 견제장치라 할 수 있는 동치제와 동태후가 일찍 죽은 탓이 컸다. 동치제는 친정을 할 20세가 되기도 전에 병으로 너무 일찍 죽었고 동태후는 광서제가 성년이 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18] 다만 철종은 세도 가문들의 세가 강해 뭔가 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다는 점은 참작의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뭔가해보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는 점에서 철종은 오히려 광서제와 비교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또한 철종이나 함풍제가 이전의 군주들에 비해 정치력이 미달이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실정으로 나라가 망했다기에는 어폐가 있다. 조선이나 청나라가 사실상 사망선고를 받게 되는건 이 시기가 아니라 몇십년쯤 지난 이후이며 그것도 당시 재위했던 군주가 아니라 실권을 쥐고있던 서태후 공친왕, 명성황후 흥선대원군의 실정이 결정적인 원인이였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시기까진 두 나라 모두 회생의 기회가 충분히 존재했었다는 것이 현대 역사가들의 중론이다. [19] 원제는 <慈禧秘密生活>(자희비밀생활) [20] 아이러니하게도 양가휘는 10여 년 전, 이한상 감독의 '화소원명원'에서 함풍제역할을 맡았고, 연작 '수렴청정'에서도 함풍제 역할을 연기하여 제3회 금상장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