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3 21:01:53

정난의 변

정난지역에서 넘어옴
정난의 변
靖難之役
Jingnan Campaign
<colbgcolor=#F0C420,#000080><colcolor=#800000,#D0FC5C> 시기 1399년 ( 혜종 원년) 8월 6일 ~ 1402년 ( 성조 원년) 7월 13일
장소 중국 화북(華北), 화동(華東)
교전 세력 정난군
(반란군)
명 중앙군
(진압군)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명나라 친왕 용보_바탕.png 주체 (연왕)
파일:명나라 국기.png 구복
파일:명나라 국기.png 주능
파일:명나라 국기.png 고성
파일:명나라 국기.png 정화
파일:명나라 국기.png 장옥
파일:명나라 국기.png 담연 †
파일:명나라 왕세자 용보_바탕.png 주고치
파일:명나라 군왕 용보_바탕.png 주고후
파일:명나라 국기.png 요광효
지휘관

파일:명나라 황제 용보_바탕.png 혜종 (명 황제)
파일:명나라 국기.png 경병문
파일:명나라 국기.png 이경륭
파일:명나라 국기.png 성용
파일:명나라 국기.png 평안
파일:명나라 국기.png 철현
파일:명나라 국기.png 하복
파일:명나라 국기.png 오걸
파일:명나라 국기.png 서휘조
병력 정난군: 120,000명 명 중앙군: 800,000명
- 경병문: 300,000명[2]
- 이경륭: 500,000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반란군의 승리
- 혜종 건문제 실각 및 실종
- 남경 함락
영향 정난군의 승리, 명 3대 황제 주체 즉위

1. 개요2. 발단
2.1. 명 태조 주원장의 붕어와 주윤문의 즉위2.2. 학자들의 시대2.3. 삭번정책
3. 거병4. 전개
4.1. 승승장구하는 정난군
4.1.1. 정난군 VS 경병문4.1.2. 정난군 VS 이경륭
4.1.2.1. 정촌패 전투4.1.2.2. 백구하 전투
4.2. 황제군의 반격
4.2.1. 제남 공성전4.2.2. 동창 전투4.2.3. 협하 전투
4.3. 최악의 형세 그러나 역사에 남을 한방 러쉬
5. 건문제 충성파 대숙청 - 임오순난( 1402년)6. 평가7. 영향8. 여담
8.1. 전한 초기 오초 7국의 난과의 비교8.2. 당시 주변국 사정8.3. 조선의 반응
8.3.1. 정도전의 명 내전 예측과 요동정벌 시도8.3.2. 무인정사 이후 조선의 움직임8.3.3. 만약 조선-명나라의 결혼동맹을 하였다면?
9. 현대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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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을축일, 금천문(金川門)에 이르러, 곡왕(谷王) 혜(橞), 이경륭 등이 문을 열고 왕을 받아들이니, 도성이 마침내 함락되었다. 이날, 왕이 여러 장수들을 나누고 명하여 도성 및 황성을 지키도록 하고, 돌아와 용강(龍江)에 주둔하면서, 영을 내면 군민을 안무했다. 크게 수색하여 제태, 황자징, 방효유 등 50여 인을 붙잡고, 그 성명을 방에 걸어 간신(奸臣)이라 하였다.
명사》 <성조본기>(成祖本紀)

1399년 8월 6일부터 1402년 7월 13일에 이르는 약 3년의 기간 동안 당시 신생제국 명나라를 뒤흔든 거대한 규모의 내전(內戰)이다.

훗날의 성조 영락제(永樂帝)인 연왕(燕王) 주체(朱棣)와 당시 명나라의 제2대 황제였던 혜종 건문제(建文帝) 주윤문이 대결했다. 그리고 결국 최후의 승리자는 남경(南京)을 함락시킨 주체였다.

명나라(明)가 개국한 지 30여 년 정도가 흐른 뒤에 벌어진 대규모 내전으로, 동성 제후(諸侯)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중앙과 이에 반발하는 지방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전한(前漢) 시대 초기에 벌어진 오초칠국의 난(吳楚七國-亂)과 많은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오초칠국의 난에서 승리자였던 쪽은 당시 중앙의 입장이었던 한경제(漢景帝)였음에 비해, 정난의 변 당시 승리자는 오초칠국의 난 당시 오왕(吳王) 유비(劉濞) 같은 포지션이었던 연왕 주체였다. 이로 인해 명나라는 황제가 교체되는 초유의 사건에 직면하게 된다.

중국에서는 단순한 제위 다툼을 넘어서 3년간의 내전으로 번졌으므로 '정난의 변'보다는 정난지역(靖難之役, 정난 전쟁)이라고 부르는 빈도가 더 많으며, 이 표현이 실제 역사에 더 부합하는 표현이다.[3]

2. 발단

2.1. 명 태조 주원장의 붕어와 주윤문의 즉위

파일:1280px-A_Seated_Portrait_of_Ming_Emperor_Taizu.jpg
태조 홍무제 주원장
(明 太祖 洪武帝 朱元璋)

한때는 유민, 거지, 고아의 신세였던 명나라의 시조 주원장은, 곽자흥(郭子興)의 수하가 된 후 뛰어난 능력을 살려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355년, 곽자흥이 사망하고 그 세력을 이어받은 주원장은 자신의 근거지를 장강 이남으로 옮겨 현 남경인 집경(集慶)을 손아귀에 집어넣고 일약 강력한 군웅으로 떠오르는 데 성공했다.

그 후 최대의 적인 서계홍건군의 수장 진우량(陳友諒)을 파양호 대전(鄱陽湖大戰)에서 대패시키고, 휘하의 명장 서달(徐達) 등이 활약하여 장사성(張士誠)을 격파함으로써 전중국 최강자로서의 면모를 갖춰 나가기 시작했다. 이후, 서달과 상우춘(常遇春)이 북벌하여 원나라의 남은 잔당을 중국 내에서 깡그리 일소함으로써, 유일무이한 전중국 통일제국으로서 명나라의 판도를 확실하게 굳히는 데 성공했다.

이후 주원장은 1380년 호유용(胡惟庸) 일파를 소탕한 일을 시작으로, 1393년 남옥의 옥(藍玉─獄) 사건 때 수많은 공신을 학살함으로서 후대에 대한 불안을 지우려고 했다.(호람의 옥) 당시 주원장에게는 26명의 황자(皇子)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정실인 마황후(馬皇后) 출신의 자식은 모두 5명이었다. 황태자는 장남이었던 의문태자(懿文太子) 주표(朱標)였지만, 1392년 주표는 주원장보다 먼저 죽고 말았다.

장남이 죽고 난 후 다른 황자들 중 가장 주목되는 인물은 단연 4남이었던 연왕 주체였다. 당시 주원장은 황자들에게 각각 수천 명에서 수만 명의 병력을 주고 각지의 왕으로 봉해 대명제국의 울타리, 즉 번병(藩屛)으로 삼고 있었는데, 명나라에게 저주스러운 상대인 몽골은 아직 막북(漠北)에 건재한 상태였고, 주체가 다스리는 지역인 북평 연나라 지역은 바로 그 몽골을 막는 가장 앞선 울타리나 다름 없었다. 이 사실만 보아도 주체에 대한 평가나 대우가 어찌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황태자 주표가 죽은 후, 새로운 황태자를 책봉하는데 있어 연왕 주체의 이름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학사 유삼오(劉三吾)[4]가 말하기를
"아들이 죽으면 손자가 잇는 게 맞습니다."
라며 강력하게 반대 의사를 표시했고, 이에 홍무제는 주체를 태자로 삼는 일을 그만두었다.[5][6]

결국 새로 황태손이 되고, 이후 황제가 된 인물은 주원장의 손자였던 주윤문(建文帝), 곧 건문제였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2.2. 학자들의 시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Jianwen_Emperor2.jpg
건문제(建文帝)
선대 황제인 홍무제의 성향이, 밑바닥부터 시작해 모든 당대 영웅들을 무너뜨릴 정도로 강력하고 무시무시한 성향이었다고 한다면, 반면에 건문제는 아버지인 의문태자 주표를 닮아 학문을 좋아하고 대단히 효성이 지극할 정도로 선한 성격이었다.[7] 건국 30년간 끝없이 이어진 전쟁과 신하들에게 대단히 엄격한 홍무제의 치세를 겪은 학자들은, 젊은 건문제에게 상당한 기대를 걸었다.

이러한 학자들은 건문제가 즉위하기 이전부터 그와 보조를 같이 하며, 향후 건문제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대표적인 인물로 제태(齊泰)와 황자징(黃子澄)이 있었다.

제태는 홍무 17년( 1384년) 응천부 향시(鄉試)에서 첫 번째로 천거된 이후에 예부와 병부 2부의 주사(主事), 그리고 좌시랑(左侍郎)을 역임하며 관직 생활을 했던 인물이었다. 상당히 능력이 있었는지, 그 깐깐한 홍무제도 기이한 사람이라고 여겼을 정도였다. 건문제는 황태손 시절부터 제태를 중요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황자징은 홍무 18년( 1385년) 회시에서 1등을 했는데, 일찍부터 건문제에게 동성 제후 왕국들을 견제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혜제(惠帝=건문제)가 황태손이었을 때, 일찍이 동각문(東角門)에 앉아 황자징에게 이르길

"여러 왕들이 (나의) 존속(尊屬)인 데다 중무장 병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불법을 많이 저지르니, 어찌해야 하는가?"

라 하니, 대답하길

"여러 왕들의 호위병들은 고작 스스로 지키기에만 족할 뿐이며, 만일 변란이 일어나더라도, 6사(六師=중앙군)에 임하신다면 누가 능히 지탱할 수 있겠습니까? 한의 오초칠국은 강하지 않았던 게 아니지만, 끝내는 패망하여 멸망했습니다. 대소(大小)와 강약(強弱)의 세력이 같지 않으니, 순역(順逆)의 이치도 서로 다를 것입니다."라 했다. 황태손이 그 말이 옳다고 여겼다.─《명사》(明史) <황자징(黃子澄)전>

자연스레 건문제가 황위에 등극하고 나자, 이러한 학자들은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며 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제태는 지금의 장관격인 상서(尙書)로 승격되었고, 황자징은 태상경(太常卿)이 되어 국정을 담당했다. 또한, 원나라 시대의 뛰어난 문학가인 오래(吳萊)의 제자로, 당대 가장 뛰어난 학자였던 송렴(宋濂)의 문하 중에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는 방효유(方孝孺)를 시강학사(侍講學士)로 삼았다.

건문제 시기의 정치를 주도하게 된 학자들은 당시의 정치 현상을 분석하여, 지금 제국의 형세가 과거 전한 초기와 비슷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전한 제6대 경제 시절, 각지에 봉해졌던 유씨 황족들이 연합하여 오초칠국의 난을 주도했는데, 당대 명나라 역시 각지에 주씨 황족, 즉 건문제에게는 숙부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번왕으로 봉해져 각각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 번왕(藩王)들의 세력 약화. 이것이 바로 건문제 정부의 기본 방침이었다. 앞서 말한 학자들의 성향 등으로 미루어 보면, 이 정책의 가장 큰 시발점은 건문제 본인이라기보다, 그 주변 학자들로 봐도 될 것이다.

2.3. 삭번정책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35px-Huang_Zicheng.png
황자징(黃子澄)
건문제는 즉위한 후 황자징에게
"경은 과거 동각문에서 했던 말을 기억하시오?"
라고 했고, 황자징은
"감히 잊지 못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이리하여 동성 번왕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삭번정책(削藩政策)이 실시되었는데 여기서 황자징과 제태의 의견이 엇갈렸다.[8]

제태는 기왕 삭번정책을 하려면 당대 최강의 번왕인 연나라의 주체부터 건드려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황자징은 우선 다른 번왕들부터 제압해야 낫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당시 번왕들은 모두 주체와 교류를 하여서 만약 주체를 먼저 건드린다면 각 지역 번왕들이 이를 빌미로 주체를 중심으로 들고 일어날것을 염려했던 것이다.

즉, 다시 말해 주체와 교류중인 번왕을 먼저 제거하여 주체의 세력을 먼저 약화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황자징의 의견대로 다른 제후들부터 공격하기로 했는데 첫 번째 목표는 주왕(周王) 주숙(朱鏞)이었다. 주숙이 연왕 주체의 모제(母弟)인 만큼 일단 공격하면 주체를 옥죌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실제로 일이 전개되는 시간 순서를 보면, 1398년 5월에 홍무제 주원장이 붕어했고, 6월에 황자징과 제태가 등용되었으며 주왕 주숙은 8월에 변을 당한다. 엄청난 일사천리인데 이는 건문제가 즉위하기 이전부터 삭번정책을 시행하는 자들이 계획했기 때문이리라.

조국공(曹國公) 이경륭(李景隆)이 국경 경비라는 명목으로 병사를 이끌고 개봉부(開封府)로 갑자기 나타나더니 왕궁을 포위한 채 불문곡직하고 주왕 주숙을 체포했다.

그리고 주왕 세력을 체포해 심문하는 와중에 일이 커지면서 다른 왕부들에까지 미쳤다. 주왕 주숙과 민왕 주편(朱楩)은 서인으로 강등되었고, 대왕 주계(朱桂)는 대동(大同)에 유폐됐으며 제왕 주부(朱榑)는 감금되었다. 상왕 주백(朱柏)은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고 절망하여 분신 자살했다.

이때 연왕 주체는 황제에게 주왕 주숙의 죄를 해명하는 글을 대신 작성해 보냈다. 그리고 스스로 미친 척하면서 칭병불출했는데 성격이 어질었던 건문제는 그 글을 읽고서 마음이 흔들려 "그냥 다 그만두자."라고 지시했다.

황자징과 제태는 서로 이야기했지만 "이제 와서 멈추기는 늦었다."고 결론내리고서 연왕이 칭병불출하는 사이에 습격하라고 건문제에게 건의했다.

그러나 건문제는
"짐이 즉위한 지 얼마되지 않아 여러 왕을 연이어 축출했는데 또 연을 삭탈하면, 짐이 천하에 무어라 해명하겠소?"
라는 이유로 머뭇거렸다. 황자징이 '선수필승'의 이야기를 꺼내자 건문제는
"연왕은 용병술에 능한데 어떻게 금방 제압하는가?"
라고 핑계를 대면서 움직이지 않았다.

건문제의 우유부단한 태도와 별개로, 황자징은 도독 송충(宋忠)에게 명령해 연변(緣邊)에 주둔한 관군을 징발하여 개평(開平)에 주둔케 하고, 연부(燕府, 연왕부)를 호위하는 군사 중 정예로 예속된 충성스러운 군사를 선발해 휘하에 두게 했으며, 연왕 주체의 호위인 호기지위(胡騎指揮) 관동(關童)을 수도 남경으로 소환해 주체의 세력을 점차 약화시켰다. 또한 북평(北平, 베이징), 영청(永清)의 좌위·우위 군관을 징발해 창덕(彰德)과 순덕(順德)에 나누어 주둔하게 했으며, 도독 서개(徐凱)는 임청(臨清)에서 군대를 조련하고, 경환(耿瓛)은 산해관(山海關)에서 군대를 훈련하게 하면서 연왕 주체의 세력권인 북평을 감시했다.

3. 거병

이렇게 분위기가 극도로 험악해질 무렵, 연왕 주체는 수도 남경에 머무르고 있었던 세 아들을 돌려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태조 주원장이 붕어할 무렵, 연왕 주체도 수도 남경으로 오려고 했었지만 번왕들이 남경에 몰려들면 이를 빌미로 황위다툼이 있을까 염려되어서
'내가 죽더라도 각 지역 번왕들은 응천부( 남경)에 오게하지 마라'
라는 주원장의 유조 때문에 그냥 봉국에 머물면서 자신의 아들들만을 장례식에 참석하게 했던 것이다.

이에 제태는 세 사람을 인질로 잡아두어야 한다고 권했지만, 황자징은 적을 방심하게 하려면 이들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아들을 돌려주지 않으면 먼저 군사를 들고 일으킬지 모르니 오히려 보내주어 방심하게 만들려는 의도였겠지만 황자징이 이때 주체의 아들들을 풀어주지 않았다면 미래의 인종 홍희제(洪熙帝) 주고치(朱高熾)는 없었으리라.

당시 북평에는 조정에서 파견한 도지휘사(都指揮使) 사귀(謝貴)와 포정사(布政使) 장병(張昺)이 머물렀다. 요광효(姚廣孝)가 이를 계획하고서 7월, 주체는 그들을 갑자기 공격해서 모두 죽이고, 황제 옆의 간신인 제태와 황자징을 제거한다는 이유로 거병했다.

연왕의 반란군은
정난군(靖難軍)
으로 불렸는데 황제의 옆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난을 다스린다는 뜻이었다. 주체는 정난군을 일으키면서 조정에 상소하는 형식으로서 격문을 발표했는데 격문에는 태조 홍무제가 남긴 조훈이 인용되었다.
"조정에 올바른 신하가 없고, 안에 간악한 자가 있다면, 친왕은 곧 병사를 훈련시켜 명을 기다려라. 천자는 제왕에게 밀조하여 진병(鎮兵)을 통솔해 이를 쳐라."

정난군이 군사행동을 시작하자 제태는 연나라를 속적(屬籍)에서 삭제하고, 그 죄상을 천하에 공표해서 토벌하자고 주장했다. 모두 "이건 조금 어렵지 않겠느냐"고 의견을 내놓았지만, 제태는 "이길 수 있다" 고 주장해 조정에서도 연왕을 상대하기로 결국 결정했다.

4. 전개

4.1. 승승장구하는 정난군

4.1.1. 정난군 VS 경병문

처음 기세를 타고 일어난 정난군은 파죽지세였다. 통주(通州), 준화(遵化), 밀운(密雲)은 정난군에게 즉시 항복했고, 북평으로 향하던 송충은 회래(懷來)로 물러났지만 정난군은 거용관(居庸關)을 함락시키고, 회래까지 즉시 점령해 송충을 포살했다.

이때 황제군은 제태나 황자징이나 학자일 뿐, 장수는 아니라서 주체를 상대할 만한 뛰어난 장수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개국공신 대부분은 늙어 죽거나 주원장에게 숙청당해 유명을 달리한 상황이었다. 일단은 장흥후(長興侯) 경병문(耿炳文)을 정로대장군(征虜大將軍)으로 삼고, 부마도위(駙馬都尉) 이견(李堅), 도독 영충(甯忠)을 좌/우부장군으로 임명하고는 참장(參將) 성용(盛庸)과 함께 주체를 상대하려는 북벌군을 편성했다.

경병문은 당시 나이가 60세가 넘었던 노장으로서 주원장 시대부터 활약하던 장수 중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고, 통솔하던 병력은 300,000명이나 되는 대군이었지만, 아직 130,000명밖에 먼저 도착하지 않았을 무렵, 정난군의 장수 장옥이 황제군을 염탐하고 기습전을 권했다.
“군대에 기율이 없고, 그 윗사람들에게는 패할 기운이 있으니 의당 급히 쳐야 합니다.”

이에 주체는 호타하(滹沱河) 북측에서 기습공격했다. 이는 대성공으로 끝나 30,000명이나 되는 황제군을 참살했고, 경병문은 진정(真定)에서 수비에 전념했다.(호타하 전투) 정난군은 2일간 공성전을 벌였지만 황제군을 격퇴할 수 없자 일단 물러났다.

패배했는데도 황자징은
"어차피 전쟁하면 이기고 지는 거야 항상 있는 일"
이라면서 조국공 이경륭의 파견을 주청했다. 이때 제태는 이경륭은 절대 안 된다면서 말렸지만, 황자징이 밀어붙인 끝에 이경륭이 새로운 정로대장군이 되어 결국 파견되었다.

4.1.2. 정난군 VS 이경륭[9]

4.1.2.1. 정촌패 전투
당시 이경륭이 건문제로부터 받은 병력은 무려 500,000명에 달했다. 모두 연왕은 이제 박살나리라고 간주했지만, 주체는 되려 이 소식을 듣고
"저 놈들이 나를 도와주는구나. 이경륭 그놈이 무슨 재주가 있단 말인가?"
하고 껄껄 웃어버렸다.

이경륭이 북진할 때 요동에 있었던 장수인 오고, 경환, 양문은 요동병을 이끌고 영평(永平)을 포위하고자 진군했다. 양방향으로 적을 둔 난감한 상황이었지만, 주체는
"어차피 이경륭 저 놈은 겁이 많아서 함부로 공격하지 않는다"
고 무시하고는 장옥 등과 함께 오고의 요동병을 먼저 공격해 쫓아버렸다.

이때 이경륭은 부대를 이끌고 연왕의 근거지인 북평을 포위했으나 연왕의 아들 주고치가 굳게 버티고 수비하면서 적을 막아냈고,(북평 포위전) 11월경 주체는 이경륭과 다시 싸우고자 돌아왔다. 이때 적과 싸우려면 백하(白河)를 건너야만 했었는데 백하가 흘러넘쳐서 도저히 건널 형편이 아니었다. 주체도 막막한 심정으로 하늘에 기도했는데 천만다행이게도 도착했을 무렵에는 강이 얼어 있어 정난군이 건너서 넘어갈 수 있었다.

이를 본 이경륭은 도독 진휘(陳暉)를 정난군의 후방으로 돌아가게 했는데 주체는 군대를 나눠 이를 격파했다. 도망치던 진휘의 군대가 백하를 건널 무렵 정난군이 지날 때는 멀쩡하던 얼음이 갑자기 깨져서 수많은 병사가 그대로 익사했다.(백하 전투)

이후 주체는 정촌패(鄭村壩)에서 황제군과 직접 교전했다. 주체가 직접 정예 기병을 이끌고 적의 7영을 치자, 여러 장수가 즉시 재공격해 이경륭은 형편없이 박살났다.(정촌패 전투) 이경륭은 우선 물러나 산둥성 덕주(德州) 방면에서 군대를 조련했고, 익춘에야말로 제대로 싸우겠다는 태세를 보였다.
4.1.2.2. 백구하 전투
이에 대해, 주체는 오히려 대동(大同)을 공격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대동을 공격하면 이경륭은 대동을 구원하기 위해 진격할 텐데, 대동의 춥고 한랭한 기후에 남방군은 적응을 못 할 테니 쉽게 이길 수 있다는 것이 주체의 판단이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Jingnan_Campaign_%28simplified_Chinese%291398-1400.svg.png
1399년~1400년 당시의 전황

대동의 위치는 지도의 맨 왼쪽을 보면 알 수 있다. 우선 1399년 12월 경 정난군은 광창(廣昌)을 함락시켰고, 다음 해(1400년)가 되자마자 울주(蔚州)를 함락시켰으며, 2월경에는 대동에까지 이르렀다. 이경륭은 뒤늦게 구원하기 위해 쫒아왔지만, 정난군은 이미 돌아간 뒤였다. 새빠지게 고생해서 쫒아온 이경륭의 황제군은 적군은 보지도 못했고, 오히려 얼어죽고 굶어죽은 병사들만 가득했다.

이경륭은 정난군을 격파하기 위해서 곽영(郭英), 오걸(吳傑), 평안(平安) 등과 함께 백구하(白沟河)에서 만나기로 모의했다. 그런데 주체는 이에 선수를 치기로 했다. 장옥의 제안 때문이었다.
“병사란 신속함을 귀하게 여기니, 청컨대 먼저 백구하에 의거하여, 편안히 함으로써 피로한 자들을 기다리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앞서 이동한 정난군은 먼저 백구하 측면에서 평안의 부대와 만났고, 주체가 직접 100여 기를 이끌고 선봉에 서서 적군을 유인하여 격파했다.

이윽고 이경륭의 부대가 도착하여 양군은 서로 격돌했으나 이때의 싸움에선 그다지 정난군이 유리하지 못했다. 하지만 밤이 되어 양군은 서로 물러나게 된다.[10]

며칠이 지난 후 양군은 다시 격돌했다. 이때 이경륭은 부대를 수십 리에 걸쳐 진을 치고, 정난군의 후군을 격파했다. 그러자 주체는 직접 기병을 이끌고 적군의 장수인 구능(瞿能)을 죽이는 데 성공했다. 이때, 정난군의 장수 중에 한 명인 구복(丘福)은 황제군의 중군을 공격중이었지만, 적의 수비가 완강해서 돌파할 수가 없었고, 이에 주체가 직접 부대를 이끌고 황제군의 측면을 공격했다.

그런데 이경륭이 정난군의 후방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정난군은 포위되는 형세가 되었다. 양군은 한동안 치열하게 교전했고, 화살도 비처럼 날아들었다. 하지만 형세가 안 좋은 쪽은 정난군이었다. 주체는 직접 말을 세 번이나 갈아타고, 화살을 쏘다가 화살이 떨어지자 칼을 들고 싸웠다. 하지만 곧 칼까지 부러지고 말았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주체는 갑자기 근처에 있었던 제방 위로 올라가더니, 느닷없이 채찍을 휘두르며 지원군이 오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고, 이경륭은 이 때문에 복병이 있을까 두려워서 머뭇거렸다. 이렇게 잠깐 시간을 번 사이에 진짜로 주체의 차남인 주고후(朱高煦)가 구원병을 이끌고 나타나서 포위를 풀어버리게 된다.[11]

간신히 한 숨을 돌린 순간도 잠시, 정난군에 주고후가 구원하러 온 것처럼, 이경륭의 황제군 역시 또다른 부대가 도착해서 위세가 어마어마해졌다. 정난군에 속한 대부분의 장수들과 병사들이 새로 나타난 황제군의 구원병에 절망해서 데꿀멍하고 있을 때, 오직 한 사람, 연왕 주체만이 분연히 소리쳤다.
"내가 전진하지 못해도, 적도 퇴각하지 못한다. 오직 전투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일갈한 주체는 부대를 이끌고 황제군의 배후로 나와 공격했는데, 마침 강한 바람이 불어 이경륭의 군기까지 부러질 정도였다. 희대의 기회를 놓치지 않은 주체는 바람을 따라 불을 놓아 황제군을 공격했고, 순식간에 전세는 완전히 변하게 되었다. 정난군은 바람 같은 기세로 이경륭의 부대를 학살했다.

기적 같은 백구하 전투 끝에 이경륭의 황제군은 수만 명이나 죽었고, 또 100,000명이 물에 빠져서 죽었다. 이경륭은 건문제로부터 받은 새서(璽書)와 부월(斧鉞)까지 모두 잃어버린 채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덕주로 도망치고 말았다.

4.2. 황제군의 반격

4.2.1. 제남 공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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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호철공사(大明湖铁公祠)
덕주로 달아난 이경륭이었지만, 정난군은 5월 경에 덕주까지 함락시키고, 군수물자를 100만 석이 넘게 거둬들었다. 여기서도 패배한 이경륭은 급기야 제남(濟南)까지 달아났다. 정난군은 이를 추격했는데, 만일 제남까지 함락되면 대번에 산둥성(山東省)까지 장악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여기서 정난군은 쉽지 않은 전투를 치렀다.(제남 공성전)

산동참정(山東參政) 철현(鐵鉉)은 과거 태조 홍무제 앞에서 당당하게 말을 했던 일 때문에 황제에게 칭찬을 받은 적이 있었던 인물이었다. 당초에 이경륭이 북벌할 때 후방에서 물자를 대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경륭이 백구하 대전에서 캐관광을 당하고, 덕주까지 함락되자 그 기세를 보고 지린 수많은 성들이 정난군에게 항복했다. 이경륭이 도주하기 이전부터 제남에 있었던 철현은 울면서 성용과 함께 필사적으로 싸울 것을 다짐했다.

이경륭은 일단 제남 앞에서 부대를 주둔시키고 있었지만, 여기서도 정난군에게 박살이 나고, 더 남쪽으로 도망쳤다. 이때 건문제는 연이어 패배한 이경륭을 소환했지만, 사면하고 죽이지는 않았다. 처음 이경륭을 추천한 황자징은 울면서 이경륭을 죽여야 한다고 말했지만, 건문제는 그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황자징은 가슴을 치면서 소리쳤다.
"대사(大事)가 이미 떠나갔으니, 이경륭을 천거하여 나라를 그르친 것은 10,000번 죽어도 속죄하지 못하겠다!"

이경륭을 수차례 대패시킨 정난군은 기세등등해져서 제남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먼저 정난군은 물길을 막아 성에 수공(水攻)을 퍼붓고, 포위망을 길게 유지하며 밤낮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철현은 계책을 내어 정난군의 공성 장비를 불태워버렸고, 정난군이 당황하는 틈에 기습하여 큰 타격을 가했다. 그렇게 완강하게 저항하면서도 1,000여 명의 병사를 따로 뽑아 일부러 제남성을 들어바치는 모양새의 거짓항복을 하는 계책을 꾸몄던 것이다.

사정을 모르는 주체는 '야, 깝깝했는데 일이 간단하게 되려나 보다.' 하고 입성하려고 했지만, 실제로는 주체가 성에 들어오는 틈을 타 철판(鐵板)을 떨어뜨려 공격하고, 따로 다리를 끊어버리는 무서운 계책이었다. 하지만 약간 타이밍이 어긋나 주체가 입성하기도 전에 철판이 끊어져버렸고, 놀란 주체는 곧바로 말을 돌려 달아났다. 워낙 급박한 사이라 아직 다리도 끊어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당연히 분노가 있는대로 오른 주체는 온갖 계책을 다 짜내어 제남성을 공격했지만, 뭔 수를 써도 성이 함락되지 않았다. 그렇게 장장 3개월 동안 기약 없는 공성전이 벌어지고 있었을 때, 황제군의 대군 200,000명이 후방인 덕주를 공격해서 수복했다. 이렇게 되면 정난군의 보급로가 끊길 우려가 있었고, 결국 주체도 그 점을 두려워해 군사를 뒤로 물리고 말았다.[12]

이 일이 있기 전까지 이경륭의 백구하 전투 대패로 인해 잔뜩 쫄아있었던 건문제는 철현에게 금패(金幣)를 하사하고 칭찬했으며, 철현이 남경에 입조하자 연회를 베풀면서 그의 말을 무조건 들어주었다. 철현은 산동포정사(山東布政使)가 되었다가 이후에는 병부상서로까지 승진했다.

또한 철현과 함께 공을 세운 성용 역시 역성후(歷城侯)에 봉해졌고, '연나라를 평정하라'는 의미의 평연장군(平燕將軍)에 임명되었다.

4.2.2. 동창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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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년~1401년 당시의 전황

당시 황제군은 정우(定州)에 오걸평안이, 덕주에는 성용이, 창주(滄州)에는 서개(徐凱)가 각각 주둔하며 서로 기각지세의 형세를 이루어 정난군을 압박하고 있었다. 정난군은 그 압박을 분쇄하기 위해서 우선 겨울이 되자 창저우의 서개부터 격파하고, 사로 잡은 뒤,[13] 군수물자를 잔뜩 챙기고 제녕(濟寧)으로 이동했다. 덕주에 주둔하던 성용은 정난군을 막기 위해서 동창(東昌)[14]으로 나아갔다.

성용은 동창성을 황제군의 뒤로 하여 진을 쳤고, 이에 주체는 직접 정난군을 이끌고 황제군의 좌익을 쳤다. 그러나 성용은 부대를 정돈하며 꿈쩍도 하지 않았고, 이후 주체가 황제군의 중앙을 치자, 이때는 고의로 진을 열어 정난군을 깊숙히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이윽고 충분히 정난군이 황제군의 중앙으로 파고들자, 성용은 역으로 재차 공격에 나섰다. 너무 깊숙히 들어온 탓에 여러 겹의 포위망에 둘러 싸인 주체는 위기에 빠졌으나, 때마침 수하 장수인 주능(朱能)이 날랜 기병을 이끌고 구원하여 간신히 포위망을 돌파하는데 성공했다. 주체는 우선 급한대로 관도(館陶)로 몸을 피했다.

하지만 황제군의 공세가 워낙 강하여 정난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특히 주체가 아끼던 백전노장 장옥(張玉) 마저 전사해버리고 말았다. 혼란스러운 전황속에 주체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고, 홀로 분전하다가 결국 창에 찔려 죽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정난군을 동창 전투에서 대파한 성용은 오걸과 평안에게 연락하여 정난군의 퇴로를 막게 했고, 정난군은 다음 해(1401년) 정월이 되어서야 심주(深州)에서 그들을 물리치고 퇴각할 수 있었다. 북평으로 귀환하자 주체 휘하의 많은 장수들이 스스로 죄를 청할 만큼 대패를 당했던 일이었지만, 주체가 가장 슬퍼한 부분은 장옥이 전사한 일이었다.
“승부에 이기고 지는 것은 항상 있는 일이고, 헤아리기 쉽지 않으나, 장옥을 잃은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간난한 때에, 나의 좋은 보신을 잃었도다.”

그러고는 그 강철의 사나이가 눈물을 흘리면서 멈추지를 못했다. 다른 장수들도 모두 따라 울면서 눈물바다가 되어버렸는데, 이후 주체의 수하 중에 담연이나 왕진 등이 전사할 때도 주체가 아까워 했지만, 이때만큼 슬퍼한 적은 없었다.

이 동창 전투의 참패로 정난군은 정예병을 거의 다 잃어버렸고, 성용군의 위세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건문제는 기뻐하며 종묘에 제사를 지냈다. 또한 철현과 성용에게 연달아서 큰 낭패를 본 정난군은 다시는 산동으로 진군하지 못했다.

4.2.3. 협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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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1년 2월~1401년 10월 당시의 전황

비록 동창 전투에서 성용에게 큰 패배를 당하긴 했지만, 주체의 입장에서는 전황의 주도권을 빼앗길 수 없었다. 3월 무렵 정난군은 다시 남하를 시도하여 보정(保定)에 이르렀다. 이에 성용은 협하(夾河)에 진을 치고 정난군을 맞아들였다.

처음에 정난군의 장수들이 경기병을 이끌고 조심스레 성용의 군단을 공격해서 약탈했고, 이에 성용은 1,000여 명의 병사들을 보내 정난군을 추격했는데 정난군이 화살을 쏘아대자 잠시 물러났다. 하지만 진정한 전투는 이제부터 시작되었다.

성용의 황제군은 방패의 열을 맞춰 정난군을 향해 진격했다. 이에 주체는 보병으로 우선 적을 막게 하고, 기병이 그 틈을 타서 돌입하게 했는데, 정난군의 장수 담연(譚淵)이 전황을 오판하여 성용군 진영에 깊숙히 들어가버렸고 결국을 전사했다.

하지만 정난군의 주능(朱能), 장무(張武)가 죽을 힘을 다해 싸우고, 주체가 경기병을 이끌고 합류하자 성용군 내에서도 장득(莊得)과 조기장(皂旗張) 등이 전사했다. 이날의 승부로 전투가 결정되진 않았지만, 성용의 황제군이 조금 유리한 상황이었다.

이날 밤, 주체는 10여 명 정도의 부하들만 거느리고 황제군의 정세를 탐지하기 위해 성용의 군영에 가까이 접근했다. 그런데, 눈치를 채고 보니 이미 적군에게 포위가 되어 있었다. 만약 여기서 주체가 사로잡히거나 죽었다면, 연왕 주체의 카리스마로 유지되는 정난군은 그대로 무너졌을 테고, 역사도 많이 달라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주체는 조심스레 말을 이끌고, 뿔피리를 불면서 적진을 돌파했다. 황제군의 다른 장수들은 화살 한 대 제대로 쏘지 못하고 주체를 보내주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당시 건문제가 내린 조서 때문이었다. 조서에서 건문제는
"짐이 숙부를 죽였다는 책임을 지게 하지 마라."
라는 명령을 내렸기에, 다른 장수들도 감히 천자의 조서를 거스를 수 없어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황제군은 적의 수괴를 포위하고도 화살 한 대 제대로 쏘지 못하고, 보내줄 수 밖에 없었다.

이윽고 날이 밝아 오르자 양군은 다시 전투를 벌였다. 진(辰)시[15]에서부터 미(未)시[16]에 이르기까지 치열하게 싸운 양군은, 너무 지쳐서 잠시 자리에 앉아서 쉬고 이윽고 다시 일어나 싸움을 재개했다.

이때 정난군은 동북쪽에 있었고, 성용의 황제군은 서남쪽에 있었다. 그런데 2차 전이 재개될 무렵, 갑자기 동북쪽에서 바람이 불어와 성용의 부대는 바람을 곧바로 맞으며 싸우는 형세가 되었고, 기세를 탄 정난군은 좌•우 측면에서 마구 공격을 가해 성용의 황제군을 대패시켰다.(협하 전투)

성용은 간신히 덕주로 몸을 피했고, 위세가 등등했던 황제군의 사기도 상당히 꺾이고 말았다. 게다가, 정난군의 장수 이원(李遠)이 현(沛縣)에서 군량과 배를 불태워 식량도 부족하게 되었다.

4.3. 최악의 형세 그러나 역사에 남을 한방 러쉬

협하 전투에서 정난군이 승리를 했지만 전투는 여전히 끊이지 않았다. 잠깐 눈을 돌린 틈을 타 7월부터 9월경에는 황제군의 평안이 연왕 주체의 본거지인 북평을 향해 뒤치기를 시도했고, 10월에는 정난군이 황제군의 방소(房昭) 등이 이끄는 부대를 공격하여 10,000여 명을 참살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주체는 직접 말을 타고 화살과 돌의 위협을 무릅쓰면서 지휘했고, 대승을 여러 번 거두었다. 하지만 전투에서는 이길지는 몰라도 전쟁에서는 여전히 지고 있었다

3년을 그렇게 미친듯이 싸워도 산동에 발이 묶여서 지금 차지하고 있는 지역은 북평, 보정, 영평 3부(府) 연나라 이었던 것이다.

애시당초 아무리 주체가 천재적인 지휘 능력을 보여주고 용맹무쌍하게 싸운다고 하더라도, 당시 건문제의 세력은 그야말로 전 중국 대륙 그 자체였다. 게다가 실제 중국을 지탱하는 강남(중국)의 경제력이 황제군에게는 고스란히 있었고, 정난군이 30만, 50만의 적들을 물리친다고 하더라도, 황제군은 타격을 금세 회복하고 말았다.

더구나 전투의 대부분을 산동에 소진한 탓도 있고 이 마저도 뚫지못해 고민이 있던 상황에 그의 책사인 요광효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하의 목표는 산동 입니까? 아니면 도읍인 남경입니까? 소승은 전하께서 산동에 집착하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전투는 앞서 언급했듯 대부분 산동 지방을 중심으로만 계속 전투가 진행되었고 그에 따른 병력이 계속 손실되는 상황인데 굳이 산동에 목표를 잡는것 보다는 수도인 남경을 일격에 직접 공격하여 함락한다면 모든것이 끝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를 들은 주체는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출병에 앞서 이렇게 외친다.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있는 힘을 다해 싸우는것이 낫다. 이번에 출병하는것은 나의 최후의 결단이다! 가는 일이 있어도 돌아오는 일은 없고 사는 일은 있어도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

1402년 1월 자신의 모든것을 걸고 가용된 모든 병력을 총 동원하여 출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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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난군의 남진 루트

결정이 내린 후에는 그야말로 속전속결이 이루어져, 중앙군과의 전투를 최대한 피하고 수도인 남경을 향해 진격한다.
정난군은 강을 타고 내려와 관도에서 상륙 후 단숨에 동아 -> 동평 -> 패현을 연달아 함락시키고 산동 이남인 서주에 이르자 산동에 주둔중인 명나라 중앙군은 방어를 풀고 정난군을 추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도착한 중앙군 장수 평안이 4만 병력으로 서주에 다다르지만 그곳에는 이미 주체는 없었고 이남인 숙주로 향하고 있었으며 이에 추격을 했지만 추적을 예상한 정난군과 주체는 숙주 인근 비하에 매복하여 평안을 기습공격해 패퇴시켰다.

이후 평안은 후방의 중앙군 장수 하복(何福)과 합류하였지만 급하게 내려오느라 보급 문제와 재정비가 늦어져 버렸고 이를 기회로 주체와 정난군은 기습하였지만 이 전투가 벌어진 제미산(齊眉山)에서 개국공신 서달의 아들인 위국공(魏國公) 서휘조(徐輝祖)[17]가 이끄는 황제군이 정난군을 격파하고 장수 이빈(李斌)을 참살하기 까지한다.(제미산 전투) 이 때문에 정난군이 오히려 피해를 보았으며 심지어 이 싸움에서 주체는 평안이 직접 찌른 창에 맞을 뻔 하기도 했다, 다행히 주위 기병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군사를 수습해 위기를 벗어났지만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주체는 절망에 빠진다.

음력 4월이면 한참 더울 때다. 특히, 북방 사람들은 남방의 습기를 더 어려워했는데, 서휘조, 하복, 평안의 포위가 된 상황이기 때문에 답이 없다고 판단된 정난군의 많은 장수들은 우선 북방으로 돌아가 다시 시기를 엿보자는 의견을 냈다. 물론 이미 내려올 만큼 내려와서 더 이상 돌아갈 길은 없었는데도 말이다.

이때, 정난군에서 장옥과 담연과 더불어 가장 용맹하던 장수인 주능이 칼을 어루만지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한고조는 10번 싸워 9번 졌는데, 끝내 천하를 가졌소. 우리는 거사를 일으키고 연전연승하였는데. 약간 불리하다고 계속 돌아간다면, 결국엔 남을 섬길 것이오!”

그러자 연왕 주체도 주능의 말에 동의하며 라고 일갈했고, 다른 장수들도 결국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정난군의 상황은 어두워 보였는데……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당시 정난군 내에서 실제로 북으로 귀환하자는 이야기가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앞서 보았듯이 연왕 주체 본인의 의지 때문에 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그런데, 뜬금없이 남경의 명나라 조정에는 정난군이 북으로 되돌아갔다는 잘못된 정보가 전해졌다. 건문제는 이 잘못된 정보를 믿고 서휘조의 군단을 회군시켜 버렸다. 이렇게 되자, 남아있는 하복과 평안의 부대는 제미산 인근 영벽(靈璧)에 갇혀 고립되어 버리고 말았다.

고립되어 보급에 어려움이 생기자 하복은 평안과 의논하여 대포 소리를 신호로 하여 주둔하고 있던 영벽(靈璧)에서 동시에 빠져나가려 했지만 하필이면 정난군도 공격 신호를 대포 소리 신호로 잡아버린 상황이라 정난군의 대포 소리를 아군 대포 소리로 오인한 탓에 출발해 버려 정난군의 매서운 공격을 그대로 받아버렸고 그렇게 주체는 하복의 황제군을 격파하고, 평안을 비롯한 37명의 지휘관들을 사로잡아 버렸다. 이렇게 전황의 거대한 흐름은 황제의 잘못된 명령이 나비 효과로 갑작스레 변하고 말았다.(영벽 전투)

정난군은 이렇게 영벽전투에 대승하여 남하 하는데 성공한다. 이에 산동에 있었던 성용은 황급히 전함을 이끌고, 회수 남안을 장악하여 정난군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정난군의 장수인 주능과 구복이 몰래 부대를 이끌고 회수를 건너 성용의 후방을 공격하여 그 부대를 격파했다.(회수 전투) 그 후에 철현의 부대 역시 패배하고 말았다.

이때 정난군의 남진은 그야말로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한번 기세를 잡은 틈에 그대로 밀고 나가 끝을 봐야 했는데, 회수 남안을 장악한 시점부터 다음 목표를 어디로 할지에 대해, 봉양(鳳陽)[18]으로 가자는 의견과 회안(淮安)으로 가자는 의견이 둘 다 나왔지만, 주체는
"봉양의 수비는 완벽하고, 회안은 쌓아놓은 양식이 많으니까 둘 다 힘들다. 차라리 양주(揚州)로 가자."
는 계획을 세웠다.

바로 그 달에 정난군은 양주를 함락시켰다.(양주 전투) 왕례(王禮) 등이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항복해버린 탓이었다. 이 양주는 남경의 바로 코앞이었기 때문에 성용은 어떻게든 군사를 모아 육합(六合)에서 싸웠지만, 또다시 패배하고 말았다.(육합 전투)

이 시점에 이르자 경악한 건문제는 황급하게 대책을 논의하려 했지만 황자징과 제테는 이미 정난군과의 전투에서 여러번 삽질을 했다는 죄로 파면당한 상태라 유일하게 남아 있었던 방효유 계책으로 남경 이남 지방에 조서를 내려 근왕군을 모집해 자신을 도우라고 지시했으며, 연왕 주체의 6촌 누나인 경성군주(慶成郡主)[19]를 보내 협상하게 하였다.

내용은
"여기서 군사를 물려주면 화북의 영토는 모두 연왕 주체에게 할양하겠으니 가족간의 살육은 이제 멈추자."
라고 제안을 했지만, 이게 시간을 끌려는 의도임을 알고 있는 주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제가 군사를 일으킨것은 단지 부황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으로 간신을 죽여 지난날 주공을 본받아 정치를 보좌하면 족합니다. 황상께서 저의 요구를 들어주기를 바랍니다. 만약 나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시 내가 성을 함락 시키는 날 모든 형제 자매들은 즉시 이사를 가서 아버지의 능묘에서 잠시 살기를 바랍니다. 때가 되었을때 여러 사람 놀라게 할까 두렵습니다."

다시 말해 내가 명나라 정치적 실권을 모두 넘겨야 할 것이며 만약 내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가족이고 뭐고 다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6월, 절망적인 상황에서 성용은 포자구(浦子口)라는 곳에서 정난군과 교전하여 승리를 거두었지만,(포자구 전투) 주체의 2남 주고후의 도움으로 주체는 무사할 수 있었고 도독첨사였던 진선(陳瑄)이 휘하의 수군을 이끌고 정난군에 투항해 버렸으며, 성용은 필사적으로 고깃배까지 모아 고자하(高資港)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고자하 전투)

이윽고 진강의 수비대장이었던 동준(童俊) 역시 정난군에 항복했고, 마침내 명의 수도 남경에 이른 정난군은 금천문(金川門)을 공격했다. 이때 서휘조의 동생인 좌도독 서증수(徐增壽)가 내응하려고 했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했는데, 수도의 도독까지 항복하려고 했으니 건문제는 이미 버림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곡왕 주혜와 이경륭 등이 금천문을 열어 정난군을 맞이했고 그렇게 남경은 함락되었다. 그 모습을 본 건문제는 스스로 황궁에 불을 질렀다.

3여 년간의 대규모 내전은 종결되었다. 천하의 주인은 이제 연왕 주체가 되었다.

5. 건문제 충성파 대숙청 - 임오순난( 14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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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효유(方孝孺)
연왕 주체는 뭇 신하들의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제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명나라 제3대 성조 영락제였다. 황제가 된 영락제는 자신을 압박하던 정적 황자징과 제태부터 잡아들였다.

제태는 당시 정난군의 기세를 두려워한 건문제 때문에 해임되었다가 다시 복직되어 수도 남경으로 오고 있던 중이었는데, 남경에 도착하기도 전에 정난군이 승리하자 말을 타고 도망쳤지만, 결국 붙잡혀서 죽었다. 제태의 종형제는 모두 죽었고, 숙부들은 변경으로 귀양을 갔으며, 제태의 아들은 6살이라 죽음은 면하고 공신들에게 지급되었다가, 제4대 인종 홍희제 시절에 사면되었다.

황자징 역시 그 무렵 제태처럼 해임된 처지였지만, 실제로는 비밀리에 군사를 모으라는 지시를 받고 움직이던 중에, 정난군이 최종적으로 승리하자 여기저기를 떠돌며 다시 군사를 일으켜려다가 잡히고 말았다. 원한이 쌓였는지 영락제는 직접 황자징에게 욕설을 퍼부었고, 황자징은 굴복하지 않고 항변했다. 황자징은 기둥에 묶어 놓고 창으로 찔러 죽이는 책형(磔刑)에 처해졌고, 족인들은 모두 참살되었으며, 인척들은 변경의 수자리로 귀양을 떠났다. 유일하게 아들 한 명만이 이름을 전경(田徑)이라 바꾸고 살아남았는데, 훗날 사면령을 받았다.

문제는 건문제의 스승이었던 방효유였다. 영락제의 측근이었던 요광효는
"방효유를 죽이면 천하에 책을 읽는 사람들이 끊어질 것입니다."
라면서 절대로 죽이지 말라고 부탁했고, 영락제 역시 방효유를 등용하려고 하면서, 천하에 내리는 조서를 쓰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방효유는 울면서 거부했고, 영락제는
"선생께서는 자해하지 마시오, 나는 주공을 본받아 성왕(成王)을 보좌하고자 할 뿐이오."
라고 하면서 방효유를 설득했지만, 방효유는 되려 이렇게 물었다.
" 성왕은 어디에 있습니까?"
영락제는 서주시대 초기 주공단(周公旦)이 성왕을 섭정한 이야기처럼, 자신도 천하를 훔치려는 게 아니라 주공 희단처럼 군주를 보좌하는 역할에 머물겠다고 한 소리였지만, 방효유는 "그럼 그 성왕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고 대답한 것이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저기서 말하는 성왕은 바로 건문제였다.

이 물음에 영락제도 당황해서
"불에 타서 죽었소."
고 대답했고, 방효유가
"그럼 왜 성왕의 자손을 세우지 않는 겁니까?"
하고 묻자 영락제는
"장성한 사람이 군주에 있어야 하오."
고 말했다. 하지만 방효유가
"그럼 왜 성왕의 동생을 세우지 않습니까?"
라고 묻자, 영락제도
"이건 내 집안 일이다!"
라고 성질을 내며 붓과 종이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방효유는
"난 못합니다."
라며 그것들을 내던져 버렸고, 결국 빡친 영락제는 방효유를 잡아다 책형으로 죽여버렸다. 죽기 직전에 방효유는 최후의 절명시를 남겼다.
"하늘이 난리를 내렸도다! 누가 그 이유를 아는가, 간신이 계책을 얻어 나라를 도모하고 꾀를 쓴다. 충신은 발분(發憤)하여 피눈물이 흘러 내리는데, 이렇게 임금이 죽었으니, 문득 어디서 구하겠는가. 오오, 슬프도다! 거의 내 허물이 아니겠는가!"
이때, 방효유가
연나라 도적이 제위를 찬탈했다.
(燕賊簒位)
라는 글을 써 영락제를 대단히 노하게 만들어 가족과 친척 등의 9족에 친구나 스승, 제자를 포함한 10족이 몰살되었다는 이야기가 대단히 유명한데, 방효유를 처형한 것까지는 역사적인 사실이지만 가족 몰살은 《명사》 <방효유전>과 《명실록》, 《작중지》(酌中志) 등 명나라 관련 사료에서는 연관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20][21] 현대에서는 부정하는 시선도 있다. 일단 청나라 초기, 장가화(張嘉和)가 쓴 《황명통기직해》(皇明通紀直解)라는 사찬사서에 이 이야기가 나온다고 한다.

제남에서 정난군을 저지했던 젊은 명장 철현은 심문장에 끌려오자, 되려 심문장을 등지며 앉아 버렸고, 그 재주를 아까워한 영락제가
"다시 생각해 보라."
고 부탁했지만 결국 말을 듣지 않았다. 당시 철현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영락제의 인정과 의리 없음을 큰 소리로 비난했다. 이에 격노한 영락제는 철현의 코와 귀를 잘라 내게 하여 불에 구운 뒤, 철현의 입에 밀어 넣어 먹게 했다. 그리고 맛이 어떠냐고 물었다. 철현은 의기양양하게 얼굴을 들고 대답했다.
"충신의 고기가 맛이 없을 리가 있나!"
결국 건문제에게 충성을 다한 철현은 책형을 당해 죽어버렸다. 죽었을 때의 나이가 고작 37세였다.

태조 홍무제 주원장의 대규모 공신 숙청에서 살아남고, 연왕 주체와 처음 맞붙었으나 패배한 경병문은 이경륭과 달리 투항하지 않고, 도성 남경이 함락된 후 사로잡혀 처형을 당했다.

수차례 정난군을 격파했던 성용은 남경이 함락되자 병사들을 이끌고 항복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여기저기서 탄핵을 받자 자살해버렸다.

주체를 죽이기 직전까지 몰아붙였던 평안은, 그 재주를 아까워했던 주체에 의해 목숨을 건져, 주체가 황제로 즉위한 뒤 북평 도지휘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7년 뒤인 1409년, 상주문에서 평안의 이름을 발견한 영락제가
"평안이 아직 살아있었는가"
라 주위에 물었으며, 이를 전해들은 평안은 자살했다.

개국공신인 이문충의 아들인 이경륭은 남경의 성문을 열고 정난군에 항복했지만 명나라 건국에 있어 어마어마한 공을 세운 최고 공신인 서달의 아들, 서휘조는 영락제가 직접 설득했음에도 불구하고,[22]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영락제는 화가 나서 그를 투옥시켰는데, 옥중에서 공술서를 쓸 때 서휘조는 단 한마디만 남겼다.
"아버지에게 개국의 공이 있으니, 공신의 자손은 죽음을 면한다."

명나라 말기의 사상가이자 중국 사상계의 이단아인 이탁오(李卓吾)는, 이 문장에는 동정을 구하겠다는 의지는 전혀 없고, 영락제를 추대하는 말도 없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영락제는 서휘조를 죽이지 않았는데, 서휘조가 영락제의 황후인 서씨의 동생이라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서휘조는 사형은 면하고 가택연금되어 작위를 박탈당한 뒤[23] 몇 년뒤에 죽었다.[24]

가장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것은 건문제의 최후였다. 불타버린 성 내에서 효민양황후 마씨의 시신은 발견되었지만, 황제의 시신은 전혀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완전히 타버렸을 수도 있지만, 보통은 유해라도 남는 법인데 그런 것도 없었다. 때문에 혹자는 건문제가 지하 땅굴로 도망쳤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제6대 영종 정통제 시절에는 스스로 건문제라고 주장하는 괴인들도 나타났다.

참고로 건문제와 효민양황후 마씨 사이에서는 두 아들이 있었다. 당시 6살이었던 장남 화간태자 주문규(朱文奎)는 아버지 건문제와 함께 실종되었고[25] 1살이었던 차남 윤회왕 주문규(朱文圭)는 목숨은 건졌으나, 이후 56년 동안 유폐되었다.[26] 그는 1457년 그의 7촌 조카인 천순제에 의해 풀려났으나, 갓난아기 때부터 평생을 유폐당해서 그런지 바깥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유의 몸이 된지 얼마 안되어 죽었다.

6.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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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제(明成祖)
정난군은 개전했을 당시는 물론, 개전한지 3년이 지난 시점에도 세력이 협소했으며, 이에 비해 황제군은 전 중국 대륙을 아우르는 엄청난 물량을 가지고 있었다. 양쪽의 세력으로 따지자면 서로 비교조차 되지 않는 수준이었지만, 결국 최후의 승자는 정난군이었다.

이에 대해 능력이 뛰어난 개국공신들을 숙청한 주원장에게 근본적인 책임을 묻기도 하지만, 황제군에도 철현이나 성용 같은 유능한 장수들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태조 홍무제가 번왕들의 부하들만 골라서 살려둔 것도 아니고, 숙청의 영향은 중앙이나 번왕이나 매한가지였으니 말이다. 결국 가장 큰 책임은 건문제에게 있었다.

건문제 때문에 황제군은 결정적인 승리의 기회를 놓쳤다. 경병문의 경우 대패를 하긴 했지만, 수비를 하며 적을 저지하고 있었는데 조급한 건문제 때문에 교체가 되었다. 경병문 대신 부임한 이경륭은 싸우기만 하면 패배하는 희대의 졸장이었다.[27] 막판에는 성문을 열면서 자신을 처형시키려는 황자징의 주청을 거부한 건문제의 은혜에 완전히 엿을 먹이고 만다.

게다가, 삭번정책을 취하며 주체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갔지만, 정작 숨통을 끊어야할 결정적인 순간에 혈육의 정을 이유로 주저하고 '숙부를 죽이게 하지 말아라.' 라는 조서를 내려, 주체를 죽일 절호의 찬스를 놓친 일화는 얼마나 현실 감각이 없는지 알 수 있다. 반란을 일으킨 그 시점에서 주체는 그냥 반역자일 뿐이다. 역사적으로도 이런 경우는 처형을 하든 몰아뭍여 전사하게 만드는 것이 반역에 가장 확실한 대책이었다. 정 직접 죽이고 싶지 않았더라면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세력을 몰살시키고 나서 철저한 감시 속에서 유폐를 시키든가 해야 했다.

또 건문제는 판단력이 나빠서인지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정난의 변 이전에 벌어진 삭번정책에서부터 정난의 변 마지막까지 제태와 황자징의 의견이 엇갈릴 때마다 항상 나쁜 선택지만 고르기까지 했다. 당장 삭번정책을 실행할 때 주체부터 건드렸다면 영락제가 정난의 변의 주체가 되는 일은 없거나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심지어 건문제에게는 개국공신이었던 경병문이 있었고, 외척이자 공신이었던 곽영이 있었으며, 서달의 아들 서휘조가 있었다. 개국공신, 공신 겸 외척, 최고 개국공신의 아들이자 군부의 핵심 인사를 남겨준 것이다. 주원장이 대규모 숙청을 하면서도 아주 세심하게 인선을 골랐다는 방증이다. 이들은 숙청에서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북원과의 싸움으로 숱한 경험을 쌓은 숙장이자 상장이었다. 실제로 서휘조는 철현, 성용과 더불어 영락제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가기까지 했다. 결국 건문제 곁에 문신들 밖에 없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다. 건문제의 나이가 열살짜리 꼬마도 아니고, 그 주원장에게서 제왕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성인이었음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오히려 건문제는 중앙에 남겨 전략을 짜고 중요한 조언을 해줄 수 있었던 경병문을 굳이 일선에 보내버리는데 이는 4성 장군에게 사단장을 맡기는 꼴이었다. 그리고 그가 격파 당하자 졸장이었던 이경륭만 신임하는 추태를 보이기까지 했으니 도저히 주원장의 숙청을 탓할 수가 없는 것이다.

반면 연왕 주체의 경우, 정난의 변 내내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압도적인 세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수차례 승리를 거두면서 전황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주체 본인의 군사적 능력이 가장 큰 이유였다. 만일 그런 점이 없었다면 전쟁이 벌어지자마자 경병문이나 이경륭에게 대패했을 테고, 건문제가 말아먹는 기회조차 받아먹지 못했을 것이다.

정난의 변 당시, 주체가 보인 가장 큰 장점은 한두 번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부분이 아니라 절망적인 상황에서 카리스마로 부대를 이끌고 유지하며 버티는 점이었다. 직접 병사들과 함께 전쟁터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던 주체로 인해 정난군은 압도적인 전력차에도 불구하고 이탈하는 사람 조차 없을 정도로 똘똘 뭉칠 수 있었다. 한 번 기회를 포착하자 그대로 물고 늘어지며 황제군을 핀치에 몰아넣어 승리했던 결단력 역시 칭찬할만 한 점이다.

7.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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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鄭和)

정난의 변 승리 이후, 지도부가 교체되면서 명나라의 정책 역시 급변하게 되었다.

우선 제국의 수도가 북경으로 옮겨진 것이 가장 큰 변화였다. 이유야 당연히 영락제 본인의 본거지로 세력을 옮기는 편이 그에게 더 나았기 때문이다. 또한, 적극적인 대외원정을 자주 했던 영락제의 입장에서는 공세적인 입장을 취하기에도 북경이 남경보다 훨씬 나은 곳이었다. 다만 영락제의 공•과 중에 명백한 과에 속하는 선택이었는데, 최전방에 가까이 수도를 두는 것 자체가 위험천만한 행동이었고, 제11대 세종 가정제때, 몽골 튀메드부의 알탄 칸 등이 세력을 떨치면서 수도 북경이 무방비로 노출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1550년 경술의 변)

또한 학자 출신의 측근들을 지니고 있었던 건문제에 비하여, 무인들을 측근으로 지니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본인 자체가 천상 무인이었던[28] 영락제가 제3대 황제로 즉위하게 되면서, 명나라는 중화제국의 기풍이었던 주원장의 시대와는 달리 적극적인 세계제국의 형세를 취하게 되었다.

영락제는 직접 100,000명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홍무제나 건문제라면 하지 않았을 막북으로의 원정을 5차에 걸쳐 감행했고, 환관 정화 휘하의 대함대는 유럽에서 대항해시대의 물결이 퍼져나가기 100여 년전, 남중국해와 인도양을 넘어 아프리카의 동부 해안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비록 이후부터는 다시 본래대로의 모습으로 귀환하게 되었지만, 비록 단발성의 이벤트에 가깝다고 해도 그 위상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그러나 부정적인 면을 보자면, 환관들을 철저하게 억제한 태조 주원장의 기조는 혜종 건문제 주윤문의 시절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영락제 주체가 정변을 일으켜 집권하게 되면서 뿌리채 흔들리게 되었다. 정변으로 즉위한 탓에 사대부들과 척을 진 영락제는 환관들에게 큰 권한을 주면서 많은 의존을 했고, 이 때문에 명나라는 이후 악랄한 환관들이 판을 치게 되었다.

또한, 학자들 출신의 측근들로 구성된 건문제가 엄청난 비용을 들이는 대외원정에 매달리지 않았을 점을 고려하면, 영락제 시절보다 명나라는 국가재정에 드는 부담 등은 훨씬 덜 했을 것이다. 정화의 함대는 제5대 선종 선덕제 시절에도 떠난 적이 있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실제로 몽골 원정 등은 엄청난 물자 소비에 비해 실질적인 이득이 적었다.

이 문제는 영락제 본인의 군사적인 능력을 떠난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었는데, 몽골의 아룩타이(Aruqtai)나 오이라트 마흐무드(Mahmud)같은 적들은 영락제가 대군을 이끌고 오면 '그냥 도망쳐버렸다.' 근거지를 여러 군데 가지고 있는 유목민족들은 아무리 영락제가 대군을 이끌고 온다 해도 그냥 도망쳐버리면 그만이었던 것이다.[29]

결국 영락제는 대군을 이끌고 초원으로 진격했다가, 적을 쫓아버린 후 보급이 떨어지면 귀환하는 일을 반복했다. 이로 인해 단기간의 평화는 얻을 수 있었어도, 최종적인 승리는 요원한 일이었다. 중화제국이 유목민족의 위협을 완전히 뿌리채 없애버릴 수 있을 정도로 고도화된 시기는 영락제의 시기에서도 수백년은 뒤인 청나라 제6대 고종 건륭제의 시대나 되어서 가능한 일이었다.[30]

어찌되었건 전혀 다른 개성을 지닌 인물들이 자리를 맞바꿈으로써, 대명이라는 거대제국의 미래 역시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정난의 변은 당대 동아시아 세계를 뒤흔든 일대 대사건임은 분명하다.

8. 여담

8.1. 전한 초기 오초 7국의 난과의 비교

흥미로운 점은 이 내전이 황자징과 제태 등이 생각했던 오초7국의 난 명나라 버전이었다는 것이다. 경제 유계의 자리에 건문제 주윤문이, 조조의 자리에 황자징이, 주아부가 제태, 양왕 유무의 자리에 경병문, 이경륭, 철현, 성용 등이, 반란을 일으킨 오왕 유비 등 7왕의 자리에 연왕 주체가, 주구 등의 자리에 주체 휘하의 부하들이 있었다고 보면 된다.[31]

하지만 오초 7국의 난은 황자징의 말대로 유씨 제후국들도 강하지 않은건 아니었으나 그 제후국들이 하나도 아니고 7개나 들고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패망한 반면 정난의 변은 비록 연왕 주체가 이끈다지만 연나라 하나만이 들고 일어났다. 체급상으로 보면 오초 7국의 난보다 더 불리했지만 정난의 변은 성공했다. 황자징이 말한 것과는 반대로 된 것이다.

물론 황자징이 그렇게 말했던 것도 이해가 되는 면이 있다. 실제로 정난군은 물량의 황제군을 상대로 전술적 승리를 여러차례 거두었지만 때로는 패배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전략적인 승리는 크지 않았다. 그래서 사실 건문제가 정난군이 북쪽으로 돌아갔다는 오보에 당하지만 않았어도 정난군은 말라죽어가다가 패망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정난군의 성공은 그 운빨만은 아니다. 애초 오초 7국의 난도 조왕 유수가 10개월을 버틴 것만 제외하면 대부분 3개월 내에 정리되었지만 정난의 변은 영벽에 주둔중인 하북군을 격파하기 전에도 이미 1402년까지 4년이나 끌었다. 그 사이에 산둥까지 휘젓고 다닌건 덤이었다. 즉 제후국 일곱이나 덤볐던 것보다도 훨씬 오래 버텼다.

이러한 배경에는 우선 양군의 군재 차이에서 볼 수 있다. 오초 7국의 난 당시 주동자인 오왕 유비는 장수들의 계책은 모두 거부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이렇다할 대책도 못 내놓았고 하는 전투마다 죽을 쒔다.[32] 반면 한 경제 유계는 경제 자신이 군재가 뛰어나지는 않지만 주아부 등 좋은 인재들을 적재적소에서 활약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럼 건문제와 연왕 주체는 어떤가? 건문제의 문제점은 군재가 없는 것은 물론 사람도 못 썼다.는 것이다. 황제군에도 경병문, 철현, 성용처럼 잘 싸운 이들이 없는건 아니었지만 정작 이들은 성용을 빼면 전체적인 판도를 뒤집을 수 있을 정도의 지위에 있지 못했다.[33] 정작 이경륭같은 졸장을 신임하여 문제를 더 키운건 덤이었다. 반대로 연왕 주체는 그 자신도 군재에 뛰어났지만 부하들도 잘 썼다. 그래서 황제군은 격파되는 족족 다시 물량전으로 나와 정난군을 괴롭혔지만 반대로 정난군도 기본 실력이 되기에 물량 공세에 압살당하지 않고 4년이나 버티며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애초 빠르게 압살당했다면 그 운빨도 못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앞서 말했듯 한 경제 유계는 사람을 적제적소에 쓸 줄 알았지만 오왕 유비는 부하들은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그나마 주구의 의견을 받아들여 하비를 손에 넣었지만 그 전에 이미 패배하여 물러나 그 결과물을 제대로 못 써먹었다. 건문제는 어떠한가? 그를 도와줘야 했을 황자징과 제태는 사사건건 의견이 갈려 건문제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안 그래도 판단력이 나쁜 와중에 거기서 매번 나쁜 선택지만 골랐으며 황자징은 이경륭 같은걸 천거했고, 또 건문제는 그런 이경륭을 중용했다. 반대로 정난군은 연왕 주체 아래로 장수들이 제대로 단결해 있었다.

지도자의 기량도 차이가 났다. 내내 얼빵한 모습만 보인 건문제와는 달리 한 경제 유계는 그렇지 않았으며 오히려 전한을 발전시킨 명군이었다.[34] 오왕 유비와 주체의 경우에도 유비는 자기 제후국을 잘 이끌 정도의 재능은 있었지만 군재가 모자랐던 반면 주체는 군 지휘관으로서의 능력도 좋았고, 황제가 된 이후 명나라의 발전기를 이끌 정도로 특별히 모자란 능력은 없었다.

결국 이러한 여러 자질의 차이로 인해 물량으로 따지면 중앙정부 측이 충분하고도 남았으나 오초 7국의 난은 진압되고, 정난의 변은 성공했다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게 되었다.

8.2. 당시 주변국 사정

역사적으로 중국의 내란은 풍요로운 중원을 호시탐탐 노리는 이민족에게는 중원 진출이라는 좋은 기회였지만 4년 여의 짧지 않은 내전이 국제전으로 이어지지 않고, 내란으로 마무리되었다. 당시 주변국의 사정을 들여다보면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조선의 경우, 정난의 변이 벌어진 1399년은 1차 왕자의 난 직후로 제2대 정종 즉위 원년이었으며, 개성으로 수도를 천도했고 그 다음해 1400년은 회안대군 박포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이후 그 여파로 태종 이방원이 즉위하는 국초 격변의 시기였다. 정난의 변이 마무리되는 1402년은 조사의가 태조 이성계의 밀명을 받고 조사의의 난을 일으키는 혼돈의 카오스 그 자체였기 때문에 중국의 내전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일본의 경우 아시카가 요시미쓰 무로마치 막부의 제3대 쇼군으로 재위하던 시기로 남북조시대를 종식시키고, 막부의 전성기를 앞두고 있었던 시기였지만 중국과 거리가 너무 멀었던데다가 요시미쓰가 친중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이라 명나라와의 무력대결보단 명나라와 교역하고, 황제에게 인정받는 것을 더 중요시했다.

베트남(대월) 쩐 왕조 호 왕조가 교체되는 혼란기였고, 남쪽의 참파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던 시기였다. 오히려 정난의 변이 마무리되고 성조 영락제에게 호 왕조가 정복되는 신세가 된다.

티베트는 원나라 이후 통일된 독립국가가 세워지는 중으로써 중국에 개입할만한 국력이 없었다.

티무르 제국 티무르의 재위시기로 당시 세계 최강국 중 하나였고, 실제로 티무르 스스로도 몽골 대제국의 부활을 위해 중국 대륙을 정복할 생각이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티무르는 중동 원정을 벌이며 메소포타미아 흑양 왕조, 아나톨리아 반도의 오스만 제국, 이집트 맘루크 왕조를 정복하는데 여념이 없었고 1404년에야 원정을 마무리하고 사마르칸트에 귀환했지만 이때는 이미 정난의 변이 마무리된 시점이었다. 이후 대중국 원정을 준비하고 침공을 개시했지만 티무르가 급사했다.

몽골 몽골 초원으로 돌아간 이후, 부족간에 분열되어 내전을 일삼아[35] 중국의 내부 사정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다. 이후 영락제가 벌인 대대적인 침공을 당했다.

만주 여진족 역시 부족간의 통일이 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이름이 남은 동맹가첩목아 이만주도 정난의 변 이후 그 이름이 등장한다. 다만 이후 이만주의 행적을 보면 만일 이 시기에 그가 활약했다면 이만주의 요동 공략 시도는 변수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8.3. 조선의 반응

조선 역시 국내외적 측면에서 이 사안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국외적으로는 후술되어있듯 요동정벌이 가장 큰 화두였고, 국내적으로는 개국 초기의 계승 전쟁이랄 수 있는 정난의 변과 비슷한 왕자의 난이 직전에 벌어졌다.[36] 허나 조선이 수도 내의 기습 쿠데타 수준에 그친 반면, 명나라는 대륙답게(?) 사실상 국가간 전면전이라 할 만큼 넓은 지역에서 내전이 펼쳐졌다.

8.3.1. 정도전의 명 내전 예측과 요동정벌 시도

공민왕 최영에 이어 제3차 요동정벌을 단행하려 한 정도전은 일찍부터 명나라의 정세를 살피고, 홍무제 주원장 사후 명나라의 정치역학관계를 나름 계산하고 있었다. 정도전은 주원장이 죽은 후 뒤를 이어 황제가 되는 손자와 다른 황숙들간에 내전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누가 황제가 될지는 몰라도 명나라의 내전이 오래갈 것이며 이는 위화도 회군때와는 달리 조선에게 훨씬 유리한 상황이 되기 때문에[37] 조선은 이때 쉽게 요동을 접수할 수 있을 거라 계산했다. 그리고 실제로 연왕 주체 조카를 상대하기 위해 요동을 거의 비우다시피하고 자신의 모든 사병들을 내전에 투입했다.

물론 누구나 다 알듯이 정도전은 주원장이 죽은 그 해에 요동정벌을 시행하기 직전 1차 왕자의 난 때 피살되었다. 이 때문에 많은 역사학도들이 정도전이 옳았다느니 이방원이 사대주의 매국노였다느니 하는 떡밥을 뿌리며 온갖 키배를 뜨곤 한다. 실제 태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이어 정도전의 요동 정벌 왕자의 난으로 저지된 후, 조선은 더 이상 요동 지역 점령을 꿈꾸지 않게 된다. 이에 정도전의 요동정벌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정난의 변이라는 좋은 기회를 왜 활용하지 못했느냐고 하며 태종 이방원을 비난하고, 반대측은 백성을 들먹이며 최영의 요동 정벌을 반대한 세력이, 그때와 정황이 달라졌다고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주장한다. 또 일시적으로 요동을 정벌하더라도 그 후 중원을 차지한 최후의 승자가 요동을 그냥 내버려둘리 만무하며 최악의 경우 명나라가 조선 본토를 침공해왔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이에 정도전 남은 일파를 지지하는 측은 이들이 요동정벌을 구상하게 된건 명과 잘 지내려 하는데도 지나친 의심증으로 어그로를 끈 홍무제 주원장의 태도 때문이며[38], 가능성 역시 주체가 결국 내전에서 승리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먼저 전제로 깔아놓고 내린 결론일 뿐으로 만약 정난의 변 당시 조선이 연왕의 뒤통수를 갈기는 식으로 양측의 전력을 엇비슷하게 유지시키는 쪽으로 지속적으로 중원의 정세에 깊숙히 개입했다면 명나라의 내전은 훨씬 더 오래 갔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중국 대륙의 판도 역시 조선의 개입으로 여러 변수가 더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즉, 경우에 따라서는 조선의 개입으로 중원이 '북명'과 '남명'으로 영구 분단되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또 다른 가능성을 말하자면 조선이 명나라 건문제의 편을 확고히 들어 요동을 받는 댓가로 연왕측의 후방을 공격하여 연왕 세력들을 건문제의 명나라와 함께 협공으로 완전히 멸망시키거나 혹은 건문제와 내전중인 연왕측과 강화를 맺어 결론적으로 중원 세력으로부터 요동을 완전히 할양받는 그런 시나리오들도 예상해 볼 수 있다.
각도에서 군적(軍籍)을 올렸다. 이보다 먼저 남은(南誾)·박위(朴葳)·진을서(陳乙瑞) 등 8명의 절제사(節制使)를 보내어 왜구(倭寇)를 방비하게 하였는데, 왜구가 물러가매, 남은은 경상도에서, 박위는 양광도 에서, 진을서는 전라도에서 군사를 점고(點考)하여 명부(名簿)를 만들게 하고, 그 나머지 여러 도(道)에는 안렴사로 하여금 군사를 점고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군적(軍籍)을 만들어 올리게 되니, 경기 좌•우도와 양광도·경상도·전라도·서해도(西海道)·교주도(交州道)·강릉도(江陵道) 등 8도에 마병(馬兵)·보병(步兵)과 기선군(騎船軍)이 합계 208,000여 명이고, 자제들과 향리(鄕吏)·역리(驛吏)와 여러 유역자(有役者)가 100,500여 명이었다.
- 각도에서 군사를 점고하여 군적을 올리다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5월 26일 경오 3번째 기사 (1393년)

일단 병력 규모부터 본다면 태조 이성계 시절 조선군의 총규모가 장부상으로는 200,000여 명이었다고 《태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병력 규모로 봤을 때 확실히 조선 입장에서는 요동정벌이 아예 불가능하지만은 않아보이는 상황이기는 했다. 물론 조선군의 입장에서는 정난의 변으로 명군이 서로 연왕측과 건문제측으로 나뉘어 내전을 벌이는 통에 요동에 추가적인 명군의 지원이 더 없을거라는 점도 그 자체로 크게 유리한 부분이었으며 거기다 당시 조선측에는 한 가지 유리한 점이 더 있었는데 정난의 변 당시의 명군은 홍무제 주원장의 대규모 숙청으로 명나라의 건국에 크게 기여했던 남옥(藍玉) 같은 우수한 명장들이 대거 제거[39]당하여 군 지휘부의 기량이 크게 저하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40]

여기에 과거 인기를 끌었던 KBS의 모 사극에 나오는 정도전 조준의 대화를 들먹이며 정도전의 요동정벌이 이루어졌다면 조선은 병자호란의 참화와 삼전도의 굴욕을 겪지 않았을 거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 #
比燕兵漸逼,帝命遼東總兵官楊文將所部十萬與鉉合,絕燕後。文師至直沽,為燕將宋貴等所敗,無一至濟南者

연왕이 경사(남경)에 점차 육박해오자, 황제가 요동총병관(遼東總兵官) 양문(楊文)에게 명하여 거느린 부(部) 100,000명을 거느리고 철현을 합쳐, 연의 후방을 끊게 하였다. 양문의 군대가 직고(直沽)에 이르러, 연의 장수인 송귀(宋貴)에게 패배하여, 단 한사람도 제남에 이르지 못했다.
- 《명사》 <철현전>
建文三年,燕兵掠大名。王聞齊、黃已竄,上書請罷盛庸、吳傑、平安兵。孝孺建議曰:「燕兵久頓大名,天暑雨,當不戰自疲。急令遼東諸將入山海關攻永平;真定諸將渡盧溝搗北平,彼必歸救。我以大兵躡其後,可成擒也。今其奏事適至,宜且與報書,往返逾月,使其將士心懈。我謀定勢合,進而蹴之,不難矣。」

건문 3년, 연의 군대가 대명(大名)을 약탈하였다. 연왕은 제태와 황자징이 이미 내쳐진 것을 알고, 글을 올려 성용과 오걸, 평안의 군대를 파해달라고 청했다. 방효유가 건의하길 "연의 군대는 오래동안 대명에서 머무르고 있는데, 날이 무덥고 장마까지 지고 있으니, 응당 싸우지도 못하고 절로 질병에 시달릴 겁니다. 급히 요동의 여러 장수들에게 영을 내려 산해관을 들어와 영평(永平)을 공격하게 하고, 진정(真定)의 여러 장수들은 노구(盧溝)를 건너 북평을 치게 한다면, 저들은 필히 돌아가 구원할 것입니다. 우리가 대군으로 그 후방을 짓밟으면, 가히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지금 연왕의 주청하는 자가 마침 왔으니, 의당 또한 그에게 답서를 주어, 왔다가 도로 돌아가게 하여 달을 넘기면, 그 장수와 군사들의 마음은 풀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모의를 확정하고 세력을 합쳐서, 진군하여 뒤쫓으면 어렵지 않습니다"라 했다.
- 《명사》 <방효유전>

다만 위의 사료를 참고하면 내전 중인 상황에서도 요동 지역에 명나라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이 요동 정벌을 한다고 해도 빈집털이 수준은 아닌 요동에 있는 명나라 주둔군과 싸워 이겨야 요동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위에도 나와있듯이 요동군이 건문제의 명령을 받들어 연나라의 후방을 치려다가 패하기도 한걸 보면 평상시보단 수월하게 요동을 점령했을 가능성은 높긴 했다. 왜냐하면 연왕에게 패배하면서 줄어든 병력과 연왕측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당시 요동군의 모든 신경은 연왕측을 경계 감시하는데에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습적인 조선군의 요동군 후방 공격은 분명 조선군에게는 굉장히 유리한 부분이라 볼 수 있다. 다만 요동군이 연왕군과 조선군에 모두 시달리는 형국이 되면 그래도 자국인 연왕측에 투항할 가능성도 존재하므로 오늘날 와서 보면 모든게 미궁의 영역이긴 하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요동을 공략해 조선령으로 인정받는데 성공했을 지라도 원래 역사처럼 훗날 임진왜란으로 여진족 견제에 소홀해져 부족 통합에 성공한 누르하치(또는 다른 부족장이든)에게 도로 빼앗겼을 가능성이 높긴 하다.

8.3.2. 무인정사 이후 조선의 움직임

단적으로 말해서 조선은 상대적으로 인접한 북평의 정변을 요동의 도주자들로부터 알게 되었고, 연왕 주체가 이길 것으로 보며 중립적인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변으로 조선 조정의 정통성이 훼손되는 일은 없었다. 시기적으로 정종 1년 ~ 태종 2년 이었던만큼 사신 교환은 빈번했으며, 육로를 통해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사신이 내전에 의해서 오고가지 못하진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연왕 주체의 정변에 대한 첫 번째 기사는 정종 1년(1399년) 음력 3월 1일 기사에 처음 나타난다. 정변이 일어나기 직전의 일이었다.
군인 한 사람이 요동(遼東)에서 도망쳐 왔는데, 본국 사람이었다. 동녕위(東寧衛)에 소속된 사람인데, 요동의 역사가 번다하므로 도망쳐 돌아온 것이었다. 말하기를, “연왕(燕王)이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홍무제)에게 제사지내려고 군사를 거느린채 경사(京師, 난징)에 갔는데, 새 황제(皇帝, 건문제)가 단기(單騎)로 성에 들어오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연왕(燕王)이 곧 돌아와서 군사를 일으켜 황제 곁의 악한 사람을 모조리 추방하겠다고 위명(爲名, 명령)하고 있습니다.”고 했다.

다음 해(1400년) 음력 5월 17일에는 이런 기사가 있다. 《촬요》(撮要)에서 《 삼국지》의 조비 손권의 거짓 항복을 받으려 하자 유엽이 훼이크라며 말리던 부분을 논하다가 현실정치로 넘어가는 부분이다.
전백영이 말하기를,“지금 연왕(燕王)이 군사를 일으켜 중국이 어지러워졌는데, 설혹 정료위(定遼衛, 요동 지역)가 우리에게 항복하기를 구하면 허락하시겠습니까? 아니하시겠습니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정히 깊이 생각하여야 할 문제다. 그러나, 받지 않는 것이 가장 낫다.”하였다. 지경연사(知經筵事)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위주(魏主, 조비)의 잘못은 오직 유엽의 간하는 것을 따르지 않고 거짓 항복하는 것을 허락한 데 있었을 뿐입니다. 정료위(定遼衛)의 항복을 받는 것은 크게 불가한 것이 있습니다. 만일 연왕(燕王)이 난(亂)을 평정하고 천하를 차지하면 반드시 우리에게 문죄(問罪)할 것이니, 그때에는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성상의 말씀이 심히 의리에 합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경의 말이 옳다."

이를 보아 당시 조선에서는 연왕 주체가 우세하다고 전황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음력 9월 19일 이런 기사가 이어진다.
정료위(定遼衛) 사람 12명이 도망하여 왔는데, 그 사람들이 말하였다.“왕실(王室)이 크게 어지러워져서, 연왕(燕王)이 승승 장구(乘勝長驅)합니다.”

다음 해(1401년), 태종 이방원이 즉위한다. 이 과정에서도 8월 12일 흥미로운 기사가 있는데, 남경의 건문제에게 일부러 나쁜 군마를 조송한 관료를 보호했다는 내용이다.
사윤(司尹) 공부(孔俯)로 서장관(書狀官)을 삼았다. 처음에 (공)부가 진헌마(進獻馬)를 의주(義州)에서 점검(點檢)하는데, 풍해도(豊海道, 황해도) 사람이 나쁜 말(駑馬)로 좋은 말을 바꾸려고 하였다. 부가 남는 값(餘價)을 이롭게 여기어 이를 허락하였었다. 황제(건문제)가 연왕(燕王)과 싸워 이기지 못하고 싸우던 군사들이 쫓겨 달아났는데, 보병이 앞서고 기병이 뒤떨어졌으니, 헌마(憲馬)가 용렬하고 나빴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지휘(指揮)에게 명하여 나쁜 말 60여 필을 골라 돌려보내었는데, 모두 부가 바꾼 것들이었다. 헌사(憲司)에서 부의 반인(伴人)을 가두고, 아전(吏)을 보내어 부의 집을 지키고 그 죄를 묻고자 하니, 임금이 부의 죄를 벗기려고 서장관을 삼아서 보내었다.

그 해 12월 9일, 몇 개월 전인 6월 25일에 보냈던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이서(李舒)[41]·총제(摠制) 안원(安瑗) 등이 명나라의 서울(남경)에서 돌아왔다. 건문제 조정은 태종 1년 6월 12일 태종의 조선 국왕직을 승인(고명, 인장)했으며, 이에 조선 조정은 한 발 더 나아가 빠른 시일 내에 정통성을 인정받으려고 했다.
“명나라의 예제(禮制)를 예부(禮部)에 청하였더니, ‘중국의 예제는 번국(藩國)에서 행할 수 없다.’ 하였고, 면복(冕服)을 청하였더니, ‘주문(奏聞)하면 만들어 보내겠다.’ 하였고, 관제를 고치기를 청하였더니, ‘주문하면 허락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신(臣)이 경사(京師)에 있으면서 황제가 친히 군사를 점검하는 것을 보았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장차 연왕(燕王)을 치려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전황이 연왕 주체에게 유리하다는 대목이 없는 유일한 부분이란 점에서 이 기사는 의미가 있다. (면복은 태종 2년 2월 2일에 내려온다.)

다음해(1402년) 3월 6일, 정삭 하례(새해 인사)로 9월 28일에 보냈던 하성절사(賀聖節使)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최유경(崔有慶)이 돌아왔다.
“연병(燕兵)의 기세(氣勢)가 강하여, 이기는 기세를 타서 먼 곳까지 달려와 싸우는데, 황제(건문제)의 군대(帝兵, 제병)가 비록 많다 하더라도 기세가 약하여 싸우면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4월 10일, 즉위 축하 사절로 1년 간을 머무른 사신 축맹헌과 사은사 노숭이 길이 막혀 요동에 이르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들은 5월 20일 다시 떠났다.[42] 한편 6월 1일에는 중국의 정변에 따라 서북면(평안도)에 5개 성을 쌓는 것을 논의했다.

결국 그해 9월 28일, 3개월 10일 전 정변이 연왕 주체의 승리로 끝났음이 보고되었다.
통사(通事) 강방우(康邦祐)가 요동으로부터 평양에 이르렀는데, 서북면 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가 방우(邦祐)의 말을 비보(飛報)하기를, “6월 13일에 연왕(燕王)이 전승(戰勝)하여, 건문 황제(建文皇帝)가 봉천전(奉天殿)에 불을 지르게 하고, 자기는 대궐 가운데서 목 매달아 죽었으며, 후비(后妃)·궁녀(宮女) 40인이 스스로 죽었고, 이달 17일에 연왕이 황제의 위(位)에 올랐는데, 도찰원 첨도어사(都察院僉都御史) 유사길(兪士吉)과 홍려시 소경(鴻臚寺少卿) 왕태(汪泰)와 내사(內史) 온전(溫全)·양영(楊寧) 등을 보내어, 이들이 조서(詔書)를 가지고 이미 금월 16일에 강을 건너왔고, 역사(力士) 두 사람과 본국 환자(宦者) 세 사람이 따라옵니다.”하였다. 임금이 일찍이 박석명(朴錫命)에게 말하기를,“꿈에 중국 사신이 이르렀는데, 내가 사람을 시켜 성지(聖旨)를 전사(傳寫)하게 하여 보았으니, 중원(中原)에 반드시 기이한 일이 있을 것이다.”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과연 들어맞았다.

당시 요동은 동녕위 천호 임팔라실리가 10,000여 명을 일으켜 배반을 하는 등(1402년 4월 5일 기사), 큰 혼란을 겪고 있었다. 임팔라실리는 조선에 건너와 살겠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했으며, 이들은 4월 중순경에 받아들여져 4,224명이 전국에 분산 배치되었으나, 논의 끝에 결국 그 해 말 압송되었다(12월 23일 기사).

한편 정변이 끝난 후(1403년 1월 13일 기사), 영락제는 요동 천호 왕득명을 조선에 보내 동녕위의 이탈자들을 보고 돌아오라는 칙을 내린다.
“황제는 동녕위(東寧衛)의 도망하여 흩어진 관원(官員)과 군민(軍民) 등에게 칙유(勅諭)한다.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동녕위를 개설(開設)하여 호생(好生)의 덕(德)으로 편안하게 길렀으나 너희들이 매양 늦게 왔고, 건문(建文) 연간에 너희들을 내버려 두지 않았으나 매양 임의로 흩어져 달아나매 어찌할 수 없었다. 지금은 천하가 태평하여졌고, 내가 태조 황제의 법도를 좇아서 너희들을 편안하게 기르니, 모두 돌아와서 동녕위 안에 거주하여, 벼슬하던 사람은 벼슬하고, 군인노릇 하던 사람은 군인노릇 하고, 백성은 백성노릇 하여, 사냥하고 농사지어 생업에 종사하되 편할 대로 하고, 두려워하고 놀래고 의심하지 말라. 만일 끝내 고집하고 흩어져 도망하여 돌아오지 않으면, 오랜 뒤에 뉘우쳐도 때는 늦을 것이다. 그러므로 칙유(勅諭)한다.”

이때 태종은 "이것은 우리 나라에 이르는 글(조서)이 아니고, 또 칙유(勅諭)는 개독(開讀, 꺼내어 직접 읽는)하는 예(禮)가 없다." 라면서 4배는 하고 고두는 하지 않았다. 개겼네 또 사례는 면복을 벗고나서 했다. 이때문에 왕득명 등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이후 동녕위의 군사들, 즉 만산군(漫散軍)은 차츰 돌아오게 되는데, 1403년 3월 기사에 따르면 그 인구가 군민 13,641명에 남녀가속 10,920명에 달했으며, 1405년 3월 기사에서도 아직 5,000명 가까이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기사가 있다. 다만 이들은 중국인이 아니고, 대부분이 고려 혹은 여진 출신이었다(태종 6년 5월 23일 기사). 태종 8년까지도 여전히 1,000여 명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기사로 보아, 조선은 속속 이들을 송환했지만 돌아가지 않는 이들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은 원정을 즐기는 영락제 시대에 들면서 조공 품목이 더 늘어나는 등 큰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그만큼의 댓가도 있었으니, 영락제는 다음해(태종 3년, 1403년) 바로 조선 옥새와 곤룡포를 내려주는 등 조선 조정의 정통성을 완전하게 인정했다.[43] 흥미롭게도 삶의 궤적이 비슷했던 태종 이방원과 성조 영락제 주체는 2년의 시차를 두고 죽었다. (태종은 1422년 음력 6월, 영락제는 1424년 음력 8월, 세종대왕의 치세였다.) 그리고 조공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명나라는 태종대부터 조선의 조공 횟수를 1년에 3회라는 파격적인 수준으로 늘려주었다. 황제국은 제후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으면 그보다 더 많은 회사를 내려야 하는데, 이 조공무역으로 보는 이득이 대단해서 주변국들은 늘려보려고 안달이었고, 명나라도 이후 조선에 횟수를 좀 줄이자고 했지만 조선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8.3.3. 만약 조선-명나라의 결혼동맹을 하였다면?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태조 이성계와 홍무제 주원장이 서로 사돈을 맺을뻔한 적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잘 안 알려져있지만 실제로 양국간에 있었던 혼담으로 1396년 6월~1397년 4월까지 진지하게 조선 명나라 양측에서 논의되었던 사안이라고 한다. 만약 성사되었다면 이방석의 세자빈이 명나라 황녀 주씨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실록의 기록을 보면 홍무제 주원장이 먼저 사돈관계를 맺자고 주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태조실록》 9권, 태조 5년 6월 13일 기해 1번째 기사 명나라 황제가 혼사를 맺자고 했다는 것을 종묘에 고유했다.

허나 결국 혼인은 무산되는데, 조선과 명나라 양측에서 진지하게 혼담이 오가며 서로 잘 풀리는 듯 싶더니 뜬금없이 1397년 4월 주원장이 조선에서 보내온 물건에 흠이 있다는니 짐의 성의에 거짓으로 응답한다는니 어쩌니 하며 혼인 얘긴 없던 일로 하자는 공문을 보낸다.
"본부(本部)에서 흠봉(欽奉)한 성지(聖旨)에, ‘중국 주변에 인접한 사이(四夷)가 멀고 가까운 것이 같지 않는데, 오직 조선(朝鮮)이 동쪽 변경에 가까이 있어 다른 곳과 비교하면 심히 절근(切近)하다. 전자에 왕씨(王氏)가 정사를 게을리하여 망하고 이씨(李氏)가 새로 일어났는데, 자주 변경에서 흔단(釁端)을 내므로 짐(朕)이 두세 번 말하였으나, 마침내 그치게 하지 못하였다. 오래되면 병화가 생길까 염려하여 실은 서로 혼인을 하여 두 나라의 생민을 편안히 하고자 했고, 이런 생각을 가진 지 여러 해가 되었다. 그러므로 29년 6월에 다만 행인(行人)으로 이 뜻을 통하게 하였는데, 사자(使者)가 돌아오매, 왕이 나와 영접하였다는 말을 듣고, 짐(朕)이 장차 반드시 혼인의 일이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하였다. 30년 봄에 조선에서도 이 일을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안장 갖춘 말까지 바치어 성의를 표하였는데, 다음날 안장 갖춘 말을 조사하여 보니, 기구와 짐승에 모두 흠이 있었다. 물건에 대해 용심한 것을 보니 처음 사귀는 데에도 오히려 이렇거늘, 오래되면 반드시 그렇지 못할 것이다. 군자(君子)의 좋은 벗이라는 것은 각각 하늘의 한쪽에 있어 모이고자 해 모일 수 없더라도, 반드시 천리(千里)에 정신으로 사귀어 뜻을 통하게 하는데, 지금 조선은 짐이 성의로 보냈는데도, 그쪽에서는 거짓으로 응하니, 천리라 하지만 정신으로 사귀고 뜻으로 통할 수 있겠는가? 일은 처음에 잘 판단하지 못하면 뒤에 반드시 뉘우치는 법이다. 조선과 혼인하는 일은 두 번 의논하기가 어려우니, 너희 예부(禮部)는 조선에 이문(移文)하여 인친(姻親)의 의논은 파하고, 행인(行人)을 잘 대접하되, 돌아가서라도 변경의 흔단을 내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 설장수 등이 남경에서 돌아오다. 인친 의논을 파한다며 흔단을 내지 말라는 자문

이에 대해선 여러 가정들이 있지만, 결과적으로 혼담이 완전히 끝장나버리자 조선에서는 거의 직후인 1397년 6월부터 제3차 요동정벌 논의가 본격화되어서 조준이 반대하니까 남은이 조준은 셈은 잘 세도 큰일을 도모할 수 없다며 디스한다거나 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1397년 9월에 심씨를 공식적으로 세자 이방석의 현빈으로 삼으면서 관련 논의들은 완전히 끝이 나게 되었다.

실제로 저 국혼이 성사되었다고 하더라도 역사는 큰 차이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설령 1397년에 혼인이 성사되었다고 하더라도 주원장이 1398년에 붕어한 직후 1차 왕자의 난이 터져서 사대부들에게 능력이 폭넓게 검증된 태종이 집권했을 가능성이 높고, 명나라도 곧이어 정난의 변이 터지는 등 정국이 불안한 상황에서 조선에 개입하기는 영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9. 현대 대중매체

정난의 변이 비중있게 다뤄진 매체로는 정화를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 <정화하서양>(국내명: <정화의 대항해>)이 대표적이다. 정화는 이 시기엔 정씨 성을 하사받기 전이라 '마화'라고 불리는데, 주고치와 주고후 형제를 수도 남경에서 구해오고, 함께 입궁한 남경의 환관들로부터 궁중 정보를 캐내는 등의 맹활약을 펼친다. 진심으로 사랑함에도 환관이기에 이뤄질 수 없는 첫사랑, 아니 의남매 연심[44]을 북평 포정사 호성에게 빼앗겨 연심이 임신까지 하게 되는 시련을 겪지만 연심의 아이를 자신의 혈육처럼 키우며 훗날의 대항해에도 동반한다.

허나 여기서의 진 주인공은 마화가 아닌 연왕 주체이다. 50대 중반의 적지 않은 나이에도 30대 주체의 아직 덜 단련된 간웅의 면모부터 시작해 숱한 액션씬과 강렬한 리더십을 선보이는 공훈배우 당국강의 연기력이 대폭발하며 극을 휘어잡는다. 한편 건문제 주윤문은 10대 중후반의 어린 모습이 묘사되는데, 심성이 모질지 못하고 우유부단하여 군주로서는 결함이 있었다는 역사적 고증에 걸맞은 모습으로 나온다. 번왕들을 숙청하며 상왕 주백이 분신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숙부들에게 이렇게까지 해야겠냐며 황제 못해먹겠다고 울음을 터뜨리자 방효유와 제태에게 꾸지람을 들을 정도이다. 그와중에 방효유와 제태 등 황제파 중신들이 온갖 사안에 대해 덤앤더머급으로 손발이 안 맞는 철저한 고증(...)까지 빼놓지 않았다. 역사가 여러모로 권악징선(...)의 흐름이라 시청자 입장에서는 삼촌 잘못 만나서 고생하는 건문제가 안쓰럽기만 한데도 연왕 주체의 카리스마로 극이 원활하게 이어진다. 여기서는 태조 홍무제 주원장이 국난을 대비하여 미리 탈출구와 변장을 위한 승복을 마련해놓은 덕에 건문제가 자결 대신 먼 곳으로 도망치고, 건문제를 공식적으로는 사망했다고 선언하나 뒤로는 천하를 샅샅이 뒤져 주윤문을 찾아내기 위한 영락제 주체의 지시로 정화의 대항해가 시작되는 것으로 설정했다.


[1] 이 지도에는 황하가 산동 이남으로 흘러 회하와 합류하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것은 지도를 잘못 그린 것이 아니라 명•청대의 황하 유로에 따라 지도를 그린 것이다. 다만 이 지도에서는 명대부터 현대에 걸친 해안선 변화는 반영하지 않고, 현대의 해안선을 그렸다. 정난의 변 전개 과정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사용된 아래의 지도들은 명대의 해안선을 기준으로 해안선을 표현하고 있다. [2] 실제 지휘 130,000명 [3] '정난의 변'이라는 명칭이 일본에서 온 것이라는 오해도 있는데, 당장에 현무문의 변, 정강의 변이나 토목의 변 같은 명칭을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중국에서도 '~의 변'이라는 명칭은 자주 쓰이며, 한국사에도 조선시대의 '작서의 변'이나 '홍수의 변', 그리고 제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 경우에도 '무인지변'으로 쓰인 것처럼 정치적인 변고를 일컫는 표현으로 자주 쓰였다. [4] 1313~ ? , 14세기 중국의 대학자였다. [5] 차남인 서안의 진(秦)왕 주상, 3남인 태원의 진(晉)왕 주강의 반발을 염려하기도 했다. [6] 아무래도 주체는 후에 영락제가 되다 보니, 사료를 남기는 입장이라 위와 같은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의심이 있다. 또, 아예 영락제가 사실은 마황후의 아들이 아니라 고려 출신 공녀인 공비의 아들이라는 설도 보인다. [7] 아버지인 의문태자가 병에 걸렸을 때, 자신의 몸이 허약해질 정도로 아버지를 돌보느라 조부인 주원장이 걱정한 일도 있었다. [8] 보면 알겠지만 이후로도 황자징과 제태의 의견은 계속 엇갈렸고, 건문제는 주로 황자징의 의견을 따랐는데 문제는 그나마도 전부 따르지 않아 끝내 전부 나쁜 결과로 이어졌다. [9] 이경륭은 명나라 개국공신 이문충(李文忠 태조 주원장의 누나인 조국공주 주씨의 아들)의 아들이자 태조 주원장의 생질(남자가 볼때 누나나 여동생의 아들)로 부친의 작위인 조국공을 세습했다. 연왕 주체에게는 5촌 조카였고, 건문제 주윤문과는 6촌 재종형제간이었다. [10] 이때 주체는 잠깐 길을 잃기도 했으나, 직접 말에서 내린 후, 땅에 엎드려 강의 흐름 등을 살펴보면서 길을 찾았다. [11] 이 주고후는 나중에 형인 인종 홍희제 사후 반란을 일으켜 조카인 선종 선덕제 주첨기에게 살해당했다. 더도 덜도 말고 딱 자기 아버지 주체가 한 짓을 따라하려다가 망한 셈이었다. [12] 《명사》 <철현전>에서는 20만 대군이 덕주를 함락하자 주체가 두려워서 물러났다고 나오는데, 《명사》 <성용전>에서는 철현과 성용이 그냥 공격해서 주체의 포위를 풀어버리고 기세를 타 덕주까지 함락했다고 나온다. [13] 이때 항복한 병사 3,000여 명을 그냥 묻어버렸다. [14] 현재 중국 산동성 요성(聊城)이다. [15] 오전 7시부터 9시 [16] 오후 1시부터 3시 [17] 연왕 주체의 왕비가 서달의 딸이었다. 즉 서휘조는 주체의 처남이었다. [18] 이 곳은 주체의 아버지인 홍무제의 출생지다. [19] 주초일의 장남 주오일의 손녀다. 태조 주원장 시기에는 '경양공주'에 봉해졌으나 건문 연간(건문 4년)에 '경성군주'로 격하되었다. 연왕 주체는 주초일의 차남 주세진(주오사)의 손자였으므로 이 둘은 6촌이었다. [20] 《명사》는 후대인 청나라에서 작성한 사서이다. 아무리 역적이라지만 직계가 아니면 손대지 않는 게 불문율이었고, 직계도 성인 남자만 사형되었으며, 나머지는 노비였다. 그런데 대놓고 반역을 모의한 것도 아니고 황제의 심기를 거스른 죄로 일족이 몰살당한 흑역사가 있었다면 명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청나라에서 당연히 놓칠 리 없다. [21] 당장에 성조 영락제의 아들인 인종 홍희제가 방효유의 사촌동생이었던 방효복을 사면했다.[《明史》(卷141):“仁宗即位,諭禮部:「建文諸臣,已蒙顯戮。家屬籍在官者,悉宥為民,還其田土。其外親戍邊者,留一人戍所,餘放還。」萬曆十三年三月,釋坐孝孺謫戍者後裔,浙江、江西、福建、四川、廣東凡千三百餘人。而孝孺絕無後,惟克勤弟克家有子曰孝復。”] [22] 서휘조의 누이가 영락제의 황후 서씨였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영락제의 처남이었다. [23] 그러나 영락제의 장인이자 개국공신인 서달의 제사는 계속 지내야 했으므로 서휘조의 아들에게 작위는 계속 이어졌다. [24] 아이러니하게도 서휘조의 동생인 서증수(徐增壽)는 위에서 나온 것처럼 영락제에게 내응하려고 했다가 발각된 뒤에 모반 음모를 자백하라는 건문제의 명령을 거부하다가 사형에 처해졌다. 형제의 서로 다른 운명이 참 얄궂다. [25] 건문제처럼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다. 어머니 마황후처럼 시체가 완전히 불에 탔거나, 건문제가 데리고 탈출했다는 설이 있다. [26] 영락제 입장에서는 정통성을 위해서였다. 갓난아기까지 죽였다가는 그가 매우 잔혹하다는 이미지가 남을 수 있고, 이를 반란 세력들이 이용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27] 웃기게도 이경륭의 아버지 이문충은 서달 등과 함께 주원장을 도와 중원을 탈환한 명장이었다. [28] 《북정록》(北征錄)이라는 책에서는 영락제의 이런 언급이 나온다. "학자들은 종이에 있는 것만 볼 줄 안다. 이것은 자신의 눈으로 본 것과 비교할 게 못 된다." [29] 다만 이러한 공격으로 인하여 초원으로 쫓긴 북원 정권은 매우 빠르게 붕괴되면서 정통성을 가진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의 직계들이 권력을 잃게 되었고, 각 지역별 부족들이 자립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고나서야 중국은 초원에 대하여 우위권을 잡았다.(원나라 시기 동안 몽골족들은 춥고 살기 불편한 초원에서 중원으로 내려왔으며, 원나라가 초원으로 내쫓겼음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인원들은 한족에 동화하거나, 중국에 가까운 장성 인근지역에 거주했다. 향후 초원에서 몽골이 다시 부흥한다면 이들이 중국으로 가는 향로와 보급이 될 가능성은 아주 컸고, 실제로 오이라트의 에센 타이시 토목의 변을 일으켰을 때도 이렇게 진행되었다.) 사실상 영종 정통제의 뻘짓만 아니었다면 명나라는 초원에 대한 일정 부분의 통제권(몽골인 다수가 장성과 인접해서 거주)을 유지할 가능성도 있었다. [30] 그래도 피터 퍼듀 같은 사람들은, 명나라에서 유일하게 공세지향적인 황제가 영락제였고, 이후 명나라의 군주들은 유목세계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방법도 없었지만, 그럴 의지도 없는 양반들이었다고 그럭저럭 영락제의 편을 들어주었다. [31] 단순히 지위만 그런 것이 아니라 동성 제후국 견제를 내세웠던 조조와 삭번정책을 내세운 황자징 및 제태의 행적이 비슷하고, 이에 어느 정도 동조한 것이 경제와 건문제가 같으며 반발한 것도 오왕 유비 등 7왕과 연왕 주체가 같다. [32] 그렇다고 이 사람이 전투 경력이 없는 것도, 마냥 무능한 인간도 아니다. 초한전쟁 당시 고조 유방을 따라다니며 전투를 치렀고, 오왕으로 있을 적에는 구리 동전을 주조하여 오나라의 재정을 풍족하게 만들었다. 즉 능력이 없는건 아닌데 군재쪽에서 매우 아쉬웠던 인물이었다. [33] 그래도 이들이 잘 싸운 덕분에 정난군도 단기결전으로 황제군을 격파하진 못했다. [34] 반대로 한 경제가 명군이었기에 중앙이 발전하면서 역으로 지방의 제후들은 힘이 빠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35] 당시 몽골은 북원까지 망한 후 조리그투 칸을 시작으로 하여 대칸이 몇년에 한번씩 교체되는 대형 혼란기였다. 당장에 정난의 변이 일어나던 해 니굴세그치 칸이 재위 6년만에 죽고 토코칸 칸이 즉위하는데 그도 정난의 변이 끝나는 해에 요절하고 말았다. [36] 야심 많은 숙부가 정난을 기치로 내걸고 장손인 큰 조카의 자리를 찬탈했으며 명나라에는 제태와 황자징, 방효유, 조선에는 김종서, 사육신 생육신이 있었다는 점에서는 계유정난과도 비슷한 점이 있다. [37] 우왕 때 최영이 요동정벌을 주장할 당시 명나라는 이미 중원을 평정했고, 북원과의 싸움은 한마디로 국경분쟁이었으나 정난의 변은 말 그대로 중원 전체가 헬게이트화되는 내전이었다. [38] 당시 <표전문 사건>에 관련해 명나라에 파견된 조선 사신 김약항 등이 죽임을 당했는데(참수설과 귀양 병사설이 있다), 타국의 사신을 함부로 죽인다는건 사실상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행위이다. [39] 남옥(藍玉)만 하여도 남옥의 옥(藍玉案)으로 주원장 손에 죽었는데 이때 연루되어 죽은 자가 모두 15,000명이었을 정도로 그 숙청의 규모가 매우 컸고, 남옥이 무장 출신이었던 탓에 군부에서의 숙청도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40] 당시 명나라에서 높은 지위에 있었던 장군인 남옥, 서달, 상우춘 등은 다들 주원장의 라이벌이었던 진우량(陳友諒) 또는 원나라의 몽골군을 격파한 명장들이었고, 그 외의 풍승, 목영, 탕화, 장옥 등을 보면 능력이 결코 부족하지 않은 장수들이었는데 주원장의 대규모 숙청의 영향과 기타 이유 등으로 3차 요동정벌 시기에 이들은 대부분 사망한 상태였다. [41] 보낼 때의 관직은 문하우정승, 즉 고려 시대의 관직이 남아 있었다. [42] 후에 사재소감 임군례가 베이징을 방문해 축맹헌을 만나고 왔다는 기사(1411년 6월)에 따르면 이들은 정부가 바뀌었으나 숙청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43] 거꾸로 말하면 그 이전까지는 고려 옥새를 썼다. [44] 연왕비 서씨의 시녀로, 마화와 연심이 모두 일을 열심히 하고 충성스럽기 때문에 이들이 어려서부터 꽁냥꽁냥하는 것을 연왕 주체 부부도 눈감아주고 있었다.


[《明史》(卷141):“仁宗即位,諭禮部:「建文諸臣,已蒙顯戮。家屬籍在官者,悉宥為民,還其田土。其外親戍邊者,留一人戍所,餘放還。」萬曆十三年三月,釋坐孝孺謫戍者後裔,浙江、江西、福建、四川、廣東凡千三百餘人。而孝孺絕無後,惟克勤弟克家有子曰孝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