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8 00:06:55

아방가르드

전위 예술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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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아방가르드가 활용되는 분야4. 무엇이 아방가르드 예술인가?
4.1. 관점에 따른 해석 차이
4.1.1. 후기 구조주의 철학을 따르는 사람들의 입장4.1.2. 현실적인 해석을 따르는 사람들의 입장
4.2. 오늘날의 아방가르드4.3. 한국의 아방가르드4.4. 일본
5. 아방가르드와 관련된 것들
5.1. 예술 분야5.2. 예술가5.3. 아방가르디스트와 관련된 기업
6.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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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위) / avant-garde[1]

전위 예술(前衛藝術). 주로 예술에 있어서 앞서 새로운 것, 혁신을 추구하는 경향, 혹은 그런 인물을 지칭하는 개념.

2. 상세

아방가르드는 원래 프랑스어 avant-garde(영어로는 vanguard)로, 본래 의미는 근대 이전의 회전 전투에서 가장 앞 열을 맡는 부대인 전위대를 뜻하는 군대 용어였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정치나 사회 혁명의 급진파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된다. 19세기 말 예술계에서는 전통과 관습 등 고정 관념의 해체를 목표로 하는 전위적이고 급진적인 예술의 사조를 혁명기의 급진파에 빗대 아방가르드 예술이라고 불렀다. 아방가르드 예술을 '전위' 예술이라고 번역하는 것도 이런 어원에서 나온 것이다.

아방가르드는 구시대의 예술과 사회를 거부하고 단절하려고 한다는 측면에서 비슷한 시기의 모더니즘과 성격이 유사하였기 때문에 20세기 초의 아방가르드는 모더니즘과 동일시된 측면이 있다.

아방가르드 예술은 기존의 정형미, 서사를 부정하는 것에서 시작되므로 아방가르드 그림이나 패션 디자인은 매우 기괴하고 아방가르드 문학, 영화의 경우엔 장면과 장면이 연결이 안 되고 기괴한 영상이 흐르며 스토리가 거의 없다시피 한 경우가 많다. 음악의 경우엔 소음에 가깝기도 한다. 그래서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다. 반면 이러한 것에 기대지 않고도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는 것에 중심을 두므로 감상의 주안점을 이해하는 것이 아닌 느끼는 것에 둬야 한다. 아방가르드 예술계에서는 언어와 정형미 외의 방법으로 사람의 뇌와 감정을 자극하는 수단을 여러 가지로 연구하고 있다. 잘 만들어진 아방가르드 작품은 '뭔가 기괴하고 이해가 안 되는데 멋있다'라는 느낌이 들거나 '그림을 봤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같은 현상을 일으킬 수 있다.[2]

3. 아방가르드가 활용되는 분야

어렵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으나 평소 보던 것과 좀 달라 시선을 끌거나 희한한 감정이 든다면 그것은 아방가르드라고 볼 수 있다. CF 뮤직비디오는 아방가르드가 많이 쓰이는 대표 분야이고 업계 유명 CF 감독이나 뮤직비디오 감독들은 대부분 아방가르드 기법을 연구하고 공부한다.

아방가르드는 주로 영화, 회화, 조소, 음악, 시, 행위 예술, 설치 미술, 광고, 뮤직비디오, 애니메이션 오프닝. 유튜브 단편 영상. 패션, 건축 등 짧게 소비되는 분야에서는 자주 이루어진다. 짧은 작품이라면 어차피 한정된 시간 안에 축약해서 보여주는 특성상 아방가르드 예술이 표방하는 주제가 좀 더 드러나기 쉽고, 아예 이해를 못 하더라도 '그냥 특이하게 만들었나 보다."라고 넘어가기 때문에 거부감이 덜하다. 7080년대 소위 '예술 영화'들이 이런 아방가르드를 따른 경향이 많았는데 영화라는 매체는 짧은 편이라서 어려운 영화, 예술 영화라고 해도 뭐 신기한 거 봤다고 하고 넘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분량이 많고 플롯과 개연성이 중요시되는 드라마, 소설, 장편 TV 애니메이션 등에서는 특히 비판하는 이들이 많다. 이러한 작품은 사람들이 전체를 보고 소비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여기서 너무 왕도적인 형식을 지나치게 틀어버리면 사람들이 시간 낭비 했다.라고 느낄 수가 있다. 이것이 반복되다 보면 시청자들은 아방가르드적 요소라면 아예 학을 떼게 되는 것이다. 연재물의 안 좋은 예로 평가받는 용두사미식 구성이 아방가르드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도 한몫한다. 의도적이냐 아니냐, 연출에 신경 쓰냐 아니냐의 차이는 있겠지만 플롯만을 놓고 봤을 때 그냥 못 만든 혹은 시간에 쫒겨 급전개를 한 창작물과 아방가르드적 연출과 전개를 사용한 것은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냥 급전개나 어이없는 결말 정도로 치부되기 마련이다. 이 경우 감독은 잘나가던 작품을 말아먹은 죽일 놈으로 평가받기 마련이다.

대표적 예로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25~26화는 전형적인 전위 예술적 결말이지만 이것 때문에 감독 안노 히데아키는 욕을 다 들어먹고 결국 줄거리적 완성인 극장판을 출시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이유로 장편 드라마나 장편 소설에서는 아방가르드가 잘 시도되지 않는다. 일본 TV 애니메이션에서는 꾸준히 시도되고 있긴 한데 주로 1쿨(10 ~ 13화)짜리 심야 TV 애니메이션에서 시도되지 장편에서는 잘 시도되지 않는다. [3]

지나치게 현실적인 화풍과 인물 묘사로 욕을 거하게 얻어먹은 악의 꽃 애니메이션화도 비슷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해당 애니의 담당 감독은 기존에 없던 새로운 시도, 혁신적인 '로토스코핑 기법 도입'을 강조하는 등, 자신의 작품이 기존 애니메이션에서 거의 시도되지 않았던 전위 예술적 시도임을 꾸준히 강조했다. 결과는 엄청난 대중들의 악평이었지만.

상업 비디오 게임의 경우 상업성을 헤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거의 시도되지 않지만, 사실 비디오 게임의 첫 등장부터 아방가르드한 게임의 장르 중 하나였다. 이후 비디오 게임의 태동기를 지나 1980년대부터 의미 있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어왔다. 1990년대 메가 CD, 플레이스테이션, 세가 새턴 시대에 게임기 성능이 올라가고 표현의 폭이 넓어지면서 많은 게임 크리에이터가 아방가르드 체험 게임을 개발했다. 대표적인 예로는 LSD, 세가레 이지리 등이 있다. 그러나 게임은 형식을 파괴하면 플레이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게 되고 게임으로서의 재미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게임들은 괴작, 바카게, 똥겜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사장되었다. 그나마 성공한 게임이 유메닛키 정도. 2010년대부터 아방가르드 연출만 차용하고 튜토리얼과 설명을 확실하게 넣는 것이 게임 제작의 기본이 되었다.

4. 무엇이 아방가르드 예술인가?

아방가르드 예술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예술이 인기를 끌게 되는 순간 더 이상 '아방가르드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애초에 예술 사조 자체가 기존과는 다른 혁신, 진부함을 타파한다는 취지이므로 당연하다.

모더니즘 시기에는 모더니스트들이 자신들을 아방가르디스트로 자처하며 위세를 떨쳤으나, 현재 모더니즘 예술은 아방가르드로 분류되기는커녕 그냥 '보편화된 디자인' 취급 받는다. 대표적으로 모더니즘 건축, 모더니즘 인테리어 디자인 등을 들 수 있다.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화려한 색채와 형형색색의 디자인으로 꾸미는 19세기 이전의 전통적인 건축 양식, 내부 공간 디자인 등에 맞선 아방가르드의 대표 주자였지만 지금은 널리고 널린 건축의 기본 형태다.

추상주의 미술 또한 이런 형태의 한 예시다. 1970년대 이후로 추상 미술은 진부함 소리를 듣게 되면서 비중이 다시 줄어들고 '형상의 귀환'이 일어났다. 오늘날의 경우 아방가르드를 자처하는 예술가들은 많을지 모르나, 으레 이런 사조에 많이 붙는 평가가 바로 전위 예술(前衛藝術)답지 않게 진부하다는 것이다. '기존 예술에 저항하는 예술'인 아방가르드가 지나치게 빨리 미술관에 걸리고, 평론가들의 찬사를 받는 '기존 예술'이 돼버려서 본질을 상실해 버리는 일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우리가 흔히 '예술'이라 생각하는 것들을 다음과 같이 가상의 4개 기준으로 나눠보자.
  1. 전통적, 보수적 예술
  2. 상업화, 자본화된 예술.
  3. 새로운 시대에 맞는 예술을 하길 추구했던 예술. 우리가 흔히 아는 모더니즘 예술.
  4. 1번의 시대착오성, 2번의 천민 자본주의 속성, 3번의 폐쇄성과 기성세력화됨을 비판하는 예술.(아방가르드 예술)

오늘날 21세기 초의 기준으로 보면, 1번 예술은 우리가 흔히 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렘브란트의 그림, 2번 예술은 우리가 흔히 일상에서 보는 디자인 용품들이나 아파트 같은 모더니즘 건축, 3번은 마네나 피카소 같은 모더니즘 화가들의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고전을 제외하고 '예술'이라 부르는 건 3번과 4번 영역인데, 대개의 경우 시간이 지나면 3번과 4번도 1번이나 2번 취급을 받는다.

20세기 초반만 해도 피카소 같은 인물은 4번의 위치에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3번의 위치에 있고, 한창 2번의 위치에서 상품으로 팔려나가고 있기도 하며, 어쩌면 한참 뒤에는 1번의 위치로 갈지도 모른다. 피카소의 우는 여인과 유사한 작품을 그렸다고 해서 참신하다고 여기는 평론가는 별로 없을 것이다. 나온 지 거의 100년이 다 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즉, 다시 말해 아방가르드 예술 중에는 제도권(1, 2, 3번 예술)으로 흡수된 경우가 적지 않다. 한 예로 MTV의 뮤직비디오 스타일은 1930년대 아방가르드 추상 애니메이션을 상업적(2번 예술)으로 변형시킨 것이다. 마이클 잭슨의 초기 뮤직비디오인 Thriller 뮤비도 처음 나왔을 때는 '혁신'이자 '아방가르드'였으나, 지금은 고전 중의 고전 연출로 취급받는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2번에 있는 예술인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이, 이후에는 3번이나 1번으로 갈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중 극히 일부는 이건 옛날에는 아방가르드 예술(4번 예술)이었다 여겨질지도 모르고.

사실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파블로 피카소대표적인 전위 예술가 중 한 명이다. 하지만 오늘날 기준으로는 전위 예술가가 아니다. 사실 전위라는 말 자체 뜻이 그렇 듯, 누구보다 빠르게 앞서나가 새로운 것을 선보일 때만 전위라고 불릴 수 있다. 모두가 전진하다 보면 결국 '전위'는 '대중성'을 띠게 되고 상업화된 전위 예술은 늘상 보는 것이 되어 더 이상 '새롭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더 이상 아방가르드라 부르기 어려워진다.

이것이 아방가르드의 딜레마다. 사실 생물학적으로 생각해 봐도 당연한 게, 인간은 뭐든 시간이 지나면 질리게 되어있다. 때문에 아방가르드는 딱히 고정된 특정 예술 사조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아방가르드 정신이 '발전'되고 '계승'된다고 주장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과거의 전위적 예술가들의 유전자를 받았거나 그들의 예술적 을 접하지 않았어도, 얼마든지 후대에 전위적인 예술가나 예술 작업이 '등장'할 수 있다. 오늘날 예술은 이전 예술을 '계승'하고 '발전'하는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보다, '영향'을 주고받고 '변화'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옳다. 오늘날 예술가들에게 이전 예술은 참고의 대상일 뿐 빠지면 안 될 필수 요소 같은 게 아니다.

4.1. 관점에 따른 해석 차이

일단 위의 서술은 개괄적으로 뭉뚱그린 설명이다. 영원히 전위적인 예술을 하는 예술가는 사실상 없다는 걸 유념하자. 시간이 지나면 아무리 전위적인 예술이라도 익숙하게 받아들여지고 그 새로움을 추구하는 활력이 약해지게 된다. 당연한 실제 역사에서는 저렇게 1, 2, 3, 4단계가 딱 나뉘어 돌아가지 않는다. 저런 분류도 어디까지나 개인의 의견일 뿐이다. 일례로 누군가는 아직도 피카소가 전위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4] 때문에 '아방가르드란 무엇인가?', '아방가르드란 무엇이었나?', '아방가르드는 앞으로도 나올 것인가?', '앞으로 나오는 아방가르드'적인' 예술도 아방가르드라고 부를 수 있는가?', '애초에 아방가르드 담론 자체가 의미가 있는 담론인가?' 등과 같은 세부적인 문제에 대해선 입장 차이가 존재한다. 그냥 예술계 각자의 의견 차이라고 받아들이고 넘어가자.

4.1.1. 후기 구조주의 철학을 따르는 사람들의 입장

가령 포스트모더니즘 중 후기 구조주의(또는 탈구조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위의 설명을 듣고 이렇게 반론할 수 있다.[5]
아방가르드는 모더니즘 특유의 예술, 문화 사조로서, 단순히 시대에서의 반항적, 저항적 예술 성향을 나타내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환원될 수 없다. 만약 이 용어로 환원된다면, 르네상스는 '고대'로,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로 싸그리 묶여야 할 것이다. 르네상스의 특징은 다각적 사물 분석에 있다. 문화, 예술, 철학, 종교 등 인간의 거의 모든 사상 분야에서 새로운 관점들을 고민하고 파악한 그 시도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 시대의 구조주의적 현상에서 벗어난 탈구조주의(다소 부적절해도 대략 개관하면 그렇다는 것이다.)의 형성에 그 가치가 있다. 이것이 단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순차적 명명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사조는 매번 같은 자리만 돌고 있을 뿐 전혀 발전이 없는 것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위의 설명은 납득할 수 없는 의견이다.

아방가르드의 정신은 포스트모더니즘에서도 계승되고 있고, 그 용어의 사용이나 표현 방식이 변화되었을 뿐이다. 현대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로 볼 수 있는가 하는 논의는 있을 수 있지만, 아방가르드가 사라졌는가 하는 논의에 있어서는 르네상스가 끝난 것이 아니라 변화되고 발전되어 계승되었다고 하는 것이 더 옳듯, 이 역시 현대에서도 계승, 발전 중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전위 예술의 경우 현대에는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를 더 이상 즐겨 사용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는 탈구조화의 포스트모더니즘과의 연계성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주체는 이데올로기 거대 담론, 지식인이 아니라 '개인' 이다. 이런 이해에서 아방가르드는 예술의 행위를 제한하는 역효과를 내게 된다. 실제로 예술계에서 아방가르드의 범주를 놓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쉽게 말해, "너도 아방가르드고 나도 아방가르드면 쟤도 아방가르드 아니냐? 도대체 아방가르드가 뭐냐?"라는 식으로 분란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식으로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한 움직임이었던 아방가르드가 세속화되고 헤게모니가 된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독특한 특색이라고 한다면 바로 해체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이 해체주의의 세례를 받은 현대의 예술가들은 자신들을 어딘가의 구조 속에 포함시키기를 거부한다. 그래서 아방가르드의 정신은 계승될지라도, 그것만의 특색 있는 '구조' 와 '틀'은 모두 버리고 자신만의 색으로 저항과 반항을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현대의 아방가르드다.

전통, 보수적 예술가는 현대에서도 여전히 등장하고 있으며, 세속화되지 않은 예술가들도 많다(그것이 자의든 실력이 부족한 타의든). 시간순으로 예술의 가치가 나눠지고 평가된다는 것은 정말로 단순하며 단편적 예술 이해다.

요약하면, 아방가르드는 단순히 반항적, 저항적 예술 성향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현대의 아방가르드는 자신만의 색으로 저항과 반항을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6]

4.1.2. 현실적인 해석을 따르는 사람들의 입장

반면 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당연히 있다. 한 작성자가 써놓은 글을 보자.
위의 글에서 주장한 내용은 잘 읽어보면 개요에서 한 이야기와 별반 다를 게 없다. 결국 이전 예술가들이 세속화되고 식상해지면, 이후 예술가들은 다시 새로운 걸 시도한다는 이야기를 좀 다르게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르네상스도 포스트모더니즘도 언젠가는 고대의 일이 된다. 새로운 관점들을 고민하고 파악한 시도가 굳이 르네상스나 포스트모더니즘에만 있던 일은 아니다. 애초에 중세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그 시절에도 나름 학자들은 새로운 관점에서 고민했다. 그 대상이 신에 대한 해석에 머물러서 그렇지. 게다가 이렇게 따지면 탈구조주의라고 하면서 도리어 포스트모더니스트 스스로 그 '탈구조화해야 한다는 믿음'을 '구조화'하진 않았는지도 역으로 따져봐야 한다. 이런 식의 오류를 범하는 사람들은 전형적인 선형적 발전론을 믿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거시적인 의미에서는 비슷한 양상이 반복될 수 있지만, 세부적인 모습에서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한 예로 공황은 계속 주기적으로 반복되어 왔지만, 당연히 시대에 따라 세부적인 사건 면에서는 다르다. 그리고 그런 거시적인 양상 반복을 보고 발전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각 시대에는 그 시대 나름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른 순차적 망명' 같은 식의 용어를 사용해 비판하는 것은 현상을 이론화, 일반화해서 파악하는 데서 벌어지는 오류다.

아방가르드의 정신이 딱 정해져 있고, 그게 유전자마냥 전수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상식적으로 과거의 전위적 행위들을 후대 사람들이 다 경험하고 그것을 그대로 따르는가? 그렇지 않다. 아방가르드 같은 움직임은 계승이나 발전 같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그냥 변화하고 발생하는 것일 뿐이다. 예를 들어 요즘의 일렉트로니카 음악을 이전 음악의 계승으로 보는 사람은 없지 않는가? 예술가들은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만들고 인정받을 뿐이다. 도리어 이렇게 계승, 발전 운운하는 것 자체가 소위 이전 '이데올로기', '거대 담론'의 반복일 뿐이다.

그러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한번 벌어진 사건은 변하지 않고 흔적으로 남는다. 그중 일부는 인간에 의해 기록되고 역사에 남는다.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만들고 인정받을 뿐이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 중에서도 누군가는 인정받고 되레 주류가 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저 반론의 주장대로면 유명한 예술가들은 나오지 않아야 한다. 말 그대로 가치 기준이 해체되어 탈구조화되어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유명한 예술가는 나온다는 점에서 이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알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탈구조화나 해체로 이해하는 사람은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의 주장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은 다원화된 기준을 주장한 것이지 아예 가치 기준이 소멸해 버렸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기준 없음'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기준이 다양함'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7]

사실 일반인들 입장에서는 위의 포스트모더니즘을 따른 설명보다 개요의 설명을 더 쉽게 받아들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방가르드를 "특이한 시도를 했던 예술가" 정도로 이해한다고 봐도 사실상 무방하다. 그리고 실제로도 상당수 아방가르드는 당시에는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것을 시도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해해도 무방하다.

4.2. 오늘날의 아방가르드

사실 오늘날에는 아방가르드라고 자처하는 일 자체를 피하는 경우가 많다. 모더니즘 시기에 유행한 명칭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방가르드'적인' 예술이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위의 입장들도 모두 세부 내용에서는 다른 견해를 보이긴 하지만, 아방가르드적인 예술이 계속 등장할 거라는 데에는 의견을 같이한다.

세계화, 정보화된 오늘날 시대에는 전위 예술이 등장할 가능성이 높아지기도 했지만, 동시에 위협받고 있기도 하다. 오늘날 예술은 과거와는 달리 단일한 기준이란 게 없어졌다. 과거에는 얼마나 사실적으로 그리느냐( 리얼리즘)를 기준으로 따졌다면, 오늘날에는 그런 단일한 평가 기준이 없어졌다. 단지 '다양한 것을 시도한다'는 원칙만이 있을 뿐이다. 때문에 아방가르드적인 작업이 나올 가능성도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뭐든지 상업화되는 경제 구조는 이런 아방가르드적 작업을 방해하는 요소다. 다양한게 만들어져도 결국 잘 팔리는 것만 소비되고, 엄청나게 빨리 식상해지는 사회라면 사실 아방가르드적인 작업을 하기가 어렵다. 특히 저작권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이런 경향이 더 심해졌다. 요즘 예술가들이 작업하기 힘들어하는 이유기도 하다.

4.3. 한국의 아방가르드

심각한 검열이 유독 훼방을 놓던 것이 아방가르드 예술이었다. 이들은 아방가르드 작품을 '개연성이 없고 배울 것이 없다'라는 이유로 검열하였고 수많은 아방가르드 계열 예술 작품들이 한국엔 수입조차 되지 못했다. 아방가르드는 영상, 상황, 상징의 계산적인 조합으로 감정을 자극하는 기법으로 완성되므로 특정 장면을 검열하거나 지워버리면 전혀 다른 감상이 나오게 되고 작품이 원래 가진 가치가 크게 훼손된다. 예로 아방가르드에서는 상징으로 누드나 혈액을 소재로 많이 쓰는데 누드가 음란하다, 혈액이 폭력적이다라고 그 장면을 삭제해 버리면 작품이 훼손된다는 것이다. 전위 예술가, 행위 예술가들은 언론에선 그저 기행을 하는 사람으로 보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8][9] 국어 교과서에선 아방가르드 문학 작품을 작위적인 하나의 해석만 이끌어내 주입식으로 가르치는 경우가 다발했다. 정답이 없는 아방가르드 작품을 수능 시험에 내놓고는 정답을 맞추라고 하는 코미디 같은 상황은 오늘날까지도 벌어지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서 한국에 사는 사람이 아방가르드를 접할 기회는 상실되었다. 1990년대 출생자들까지도 대부분 아방가르드가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러다 보니 전위 예술 작품에 개연성 핍진성에 근거한 해석을 들이밀고 "개연성이 없으니 졸작", "이해하기 힘드니 망작"이라고 하는 평론을 하는 사람도 매우 많은 것이 현실이다. 데이비드 린치 같은 사람들도 한국에선 욕을 먹을 정도이니 더 할 말이 없을 지경.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람들이 아방가르드 연출을 시도하면 "예술병에 걸렸다."라고 비하하는 경우도 다반사이다. 평론가 이동진은 "아방가르드 영화에 별점을 높게 주면 꼭 항의가 온다."라고 고충을 토로하기도 했다. 나무위키에도 이러한 비판이 매우 많다. 그런 걸 해체하려고 하는 사람들한테 그런 걸 왜 안 하냐고 하는 것부터가 잘못된 비판이다. 아방가르드 예술 작품을 두고 이 작품엔 뭔가 숨겨진 서사가 있을 것이라며 집요하게 파고 연구하는 사람들도 한국에서 유독 많이 보이는 경우다. 아방가르드는 순간적으로 느끼는 것에 중점을 두는 표현법이므로, 몇몇 순간적인 장면의 이해를 돕고자 간단한 해석을 하는 정도면 몰라도 너무 집요하게 맥락을 해석하는 건 사실 예술가가 의도한 제대로 된 감상법이 아니다.

한국에서 배출된 유명한 전위 예술가로는 이상, 백남준, 앙드레 김, 문정규, 이건용 등이 있다. 이런 사람들 대부분이 외국에서 먼저 인정받았다. 회화나 디자인 쪽에선 오랜 노력으로 전위 예술이 자리를 잡았으나 영화 쪽에선 1990년대에 검열이 완화되면서 아방가르드 작품이 종종 나왔으나 흥행에서 크게 실패하며 명맥이 끊어졌다. 장선우 김기덕이 이쪽에선 인정을 받은 감독이었는데[10] 그마저도 장선우는 장르적 성취 이전에 영화를 크게 말아먹어 영화계를 떠났고 김기덕은 사망해서 더 이상 제작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아방가르드 영화는 죽었다고 봐도 된다. 이명세 감독도 스폰서를 못 받아서 작품 활동을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라 한국에서 아방가르드를 추구하는 영상 연출가들은 대부분 영화를 포기하고 뮤직비디오를 만들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현실 때문에 다른 나라 같으면 영화나 전위 예술을 하고 있을 인재들이 뮤직비디오를 만들고 있어 한국의 뮤직비디오 연출은 세계적으로도 품질이 높은 편이다. 그리고 유튜브 시대가 열리자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으며 K-POP의 인기를 주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의외로 만화 쪽에서는 아방가르드 기법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한국 만화계의 주류로 자리 잡은 병맛도 일종의 아방가르드라 볼 수 있다. 아방가르드는 특이한 방법으로 특정한 감정을 이끌어내는 표현법의 일종이며 이렇게 예술 이외의 오락적인 방향으로도 충분히 사용될 수 있다. 또한 리듬 게임 BGA에서도 아방가르드를 많이 시도하고 있는데, 곡과의 매치가 좋을 경우에는 인기곡으로 부상하는 등 좋은 평을 받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DJ이자 작곡가인 Aiobahn과 거의 모든 곡에 BGA를 집어넣어 인기를 끈 EZ2AC 시리즈, DJMAX 시리즈가 있다.

4.4. 일본

정통 아방가르드를 추구하는 비주얼리스트들은 대체로 리듬 게임 BGA 같은 비주류 문화에서 활동하는 것이 현실이다.

다만 음악 쪽으로 가면 일본 아방가르드 음악 / 익스페리멘탈 음악 신의 위상은 세계 최고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음악가들이 많다. 프리 재즈, 노이즈 등의 분야에서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신을 이끌어오고 있는 메르츠보우, 케이지 하이노, 이쿠에 모리, 료지 이케다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일본 애니메이션은 1990년대 히트한 신세기 에반게리온 소녀혁명 우테나의 영향으로 지속적으로 아방가르드를 시도하고 있다.

5. 아방가르드와 관련된 것들

사실상 위의 의견들보다 더 중요한 부분. 의견보다 중요한 건 실제 사례다. 아방가르드는 보고 듣고 느끼는 것에 중점을 두므로 백날 해석을 보느니 직접 접하는 게 가장 확실하다.

5.1. 예술 분야

5.2. 예술가

5.3. 아방가르디스트와 관련된 기업

6. 참고 자료

페터 뷔르거, '아방가르드의 이론'
에릭 홉스봄, 아방가르드의 쇠퇴와 몰락
노명우, 아방가르드
마이클 오프레이, 아방가르드 영화


[1] 영어로는 ' vanguard(advance guard)'이다. [2] 기괴하다고 해서 아방가르드라는 것은 아니다. 기괴한 것만 보여주고 공포감만 준다면 그것은 호러라고 하지 아방가르드로 분류하지 않는다. 다른 감정도 이끌어내야 아방가르드 예술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3] 아이러니하게도 위에서 말한 욕먹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이런 작품이 일본 애니업계에서 꾸준히 나오게 된 원인이다. 에반게리온을 보고 자란 창작자들이 이러한 작품으로 에반게리온처럼 성공하는 것을 동경하기 때문이다. [4] 일반인들 입장에서는 그렇다. 물론 상당수 현대 미술 종사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5] 이전에 삭제된 의견을 다시 복구한 것이다. 보다 정합한 문장으로 수정하였음. [6] 저항이 아방가르드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 부분이 모순되어 있다. [7] 일단 앞서 익명의 작성자가 써놓은 위의 글은 모순되는 주장을 담고 있다. 앞서의 글에서 "아방가르드는 단순히 반항적, 저항적 예술 성향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놓고, 뒤에서 "현대의 아방가르드는 자신만의 색으로 저항과 반항을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해놨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따르는 작성자 스스로도 아방가르드에 저항과 반항 요소가 중요함을 인정하고 있는 것. 게다가 위의 개요에서는 '인간의 사조는 매번 같은 자리만 돌고 있을 뿐 전혀 발전이 없는 것', '시간순으로 예술의 가치가 나눠지고 평가되는 것'이라는 식으로 아방가르드를 주장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같은 '양상'이 또 나타나는 것과 완전히 똑같고 식상한 현상이 반복되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다. [8] 대표적으로 앙드레 김은 세계 예술계에서 인정을 받는 디자이너지만 대한민국 매스 미디어 및 예능 등에서는 기행하는 이상한 사람처럼 보도되거나 희화화된 바 있다. [9] 만화 영심이에도 아방가르드 예술을 조롱하고 희화화하는 에피소드가 있기도 했다. 영심이 애니메이션 7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공식) [10] 김기덕도 정통 아방가르드 작가라 보긴 힘들다. 김기덕도 한국 관객들의 요구 때문에 서사를 포함한 작품을 많이 만들고 연출만 아방가르드식으로 했다. [11] 샤프트 재직 시절 한정. 샤프트를 퇴사한 이후에는 사용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