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9 10:02:41

이제르론 공화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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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르론 공화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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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d,#222> 국가 개괄
국명 이제르론 공화정부
국가 체제 민주공화제(표방)
군정, 과두정, 집단지도체제[1](실질)
국가 원수 공화정부 주석
수도성 이제르론 회랑 알테나 성계
이제르론 요새
수도 이제르론 요새
국가 정보
인구 94만 4087명
공용어 동맹 공용어[2]
군사 이제르론 혁명군
기년법 우주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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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d,#222> 국가
존속기간
서기(A.D.): 3600. 8. 08.~
우주력(SE): 800. 8. 08. ~
신제국력(NRC): 002. 8. 08.~
주요 사건[3] · SE 800. 8. 8. 정부 설립
· SE 801. 2. 12. 제11차 이제르론 공방전
· SE 801. 5. 29. ~ 6. 1. 시바 성역 회전
건국 이전 엘 파실 독립정부
멸망 이후 은하제국 로엔그람 왕조
바라트 성계 자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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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엘 파실 독립정부의 소멸2.2. 정부수립2.3. 제국과의 수호(修好)관계2.4. 대결, 그리고 평화
3. 국가 개괄
3.1. 정치3.2. 영토와 인구3.3. 군사3.4. 외교
4. 주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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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은하영웅전설에 등장하는 정치-군사 세력. 별칭은 8월의 신정부(The New government of August) 또는 8월 정부.[4]

2. 역사

2.1. 엘 파실 독립정부의 소멸

우주력 799년, 엘 파실 자치정부가 자유행성동맹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여기에 양 웬리 원수 모살미수사건으로 하이네센을 탈출한 양 웬리 함대가 합류하면서 엘 파실 독립정부가 탄생했다. 엘 파실 독립정부는 이제르론 요새 은하제국군에서 탈취하면서 제국에 정면도전했고, 결국 회랑 전투에서 양국은 충돌한다. 두 국가의 전쟁은 카이저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의 회담 요구로 일시중단되었으나, 지구교의 테러로 회담장으로 가던 양 웬리 프란체스크 롬스키를 비롯한 독립정부 중진들이 모두 사망하였다. 구심점이 사라진 독립정부는 휘청일 수밖에 없었고, 독립정부와 제국군 모두 양 웬리 없는 양 웬리 함대는 유랑 사병집단으로 전락했으며 늦든 빠르든 내분으로 자멸할 거라고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그러나 엘 파실 혁명군의 주요 멤버들, 즉 자유행성동맹군 ' 양 웬리 함대' 시절부터 양을 보좌해왔던 참모들과 지휘관들은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민주공화주의세력을 결성하게 된다. 모두들 민주주의의 수호와 계승에 관한 양의 이상을 깊이 새긴 '양의 후계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때 양 웬리를 대체할 수 있는 2인자 내지 후계자가 없다는 점이 발목을 잡아, 양 웬리를 대신할 구심점을 확보해야 했다.

결국 양 함대 주요 간부진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후계자를 결정했다. 이들은 프란체스크 롬스키의 뒤를 이을 정치지도자에는 프레데리카 G. 양 부인, 양 웬리의 뒤를 이을 군사지도자에는 율리안 민츠 중위를 선택했다. 프레데리카 그린힐은 롬스키 의사보다 지명도가 높고 공화주의 세력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정치지도자로 낙점되었고 율리안은 양 웬리의 피보호자이자 용병학 제자였다는 점에서 양 웬리의 후광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들어 군사지도자로 낙점되었다.

그러나 율리안은 이 결정에 반대하고 나섰다. 율리안은 자신보다 능력, 실적, 인망이 있는[5] 더스티 아텐보로 중장을 혁명군 사령관으로 추천했으나, 아텐보로는 자신은 흑막으로 남고 싶다며 고사했다. 여기에 프레데리카까지 율리안을 설득하고 나서자, 율리안도 그 결정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6] 반면 프레데리카는 율리안과 달리 순순히 정치지도자 제의를 받아들였지만 그 조건으로 양 함대 간부진들이 자신의 지시를 준수해 줄 것을 요구했고, 대표로 나선 알렉스 카젤느는 이를 수락했다.

하지만 이 결정은 최고 간부진들만 내리고 납득했을 뿐, 수많은 장병들은 이 결정에 반발하고 나섰다. 특히 18세의 어린 나이로 혁명군 사령관직에 오른 율리안에 대한 반발이 심했다. 그렇게 요새가 동요에 빠지자, 참모장 무라이 중장은 스스로 오명을 뒤집어쓰며 불평분자 및 동요에 빠진 사람들을 데리고 이제르론을 나가겠다고 율리안에게 선언했다. 무라이가 이탈한다는 사실이 퍼지자, 비관론에 빠진 사람들은 일제히 무라이를 따라 이제르론을 떠나 하이네센으로 돌아갔다.[7] 무라이가 이탈을 선언한 뒤, 독립정부 위원들은 율리안 민츠에게 와서 정부 해산을 통보했다. 엘 파실 독립정부는 우주력 800년 6월 6일, 양 웬리의 장례식과 함께 해산되었다.

2.2. 정부수립

양 웬리가 죽고 독립정부가 해산된 지금, 제국군이 이제르론을 침공한다면 혁명군은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러나 라인하르트는 상중인 군을 치지 않았다. 양 웬리가 죽은 이상 제국군이 본래의 전략으로[8]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제국군은 페잔으로 철군하면서 양 웬리와 인연이 있던 나이트하르트 뮐러 상급대장을 특사로 보내어 양 웬리에 대한 조의를 표했다.

나이트하르트 뮐러가 이제르론 요새에 도착했을 때, 무라이를 따라 100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 및 군인들이 이제르론 요새를 이탈했다. 율리안 민츠는 이들이 이탈하면서 물자 반출도 허가했는데, 발터 폰 쇤코프가 굳이 그럴 필요가 있냐고 반발했지만 율리안은 어차피 필요한 양보다 많이 쌓아놓을 수도 없으니 가져가도 된다고 일축했다. 율리안은 뮐러에게 이탈자들이 무사히 하이네센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제국군이 항로를 확보해줄 것을 부탁했고, 뮐러는 이를 수락했다. 이탈자는 7월 내로 모두 퇴거했고, 양 함대 간부진들은 잔류 인원들을 데리고 정부수립 작업에 집중했다.

정부수립의 첫 작업은 조직의 명칭을 정하는 일이었다. 공화국이라는 명칭은 제국과의 관계에 불이익을 줄 수 있고[9][10] 국가-정부-군의 관계가 지나치게 복잡해진다고 기각되었고 올리비에 포플랭이 이제르론 코뮌(commune)이라는 이름을 제안했으나 혁명사상 코뮌이라는 이름을 붙인 혁명조직은 모조리 도중에 실패했다고 더스티 아텐보로가 반론하면서 기각되었다. 결국 카스퍼 린츠가 제안한 이제르론 공화정부라는 이름이 무난하다는 이유로 결정되었다.[11]

명칭이 결정되자 이제는 실무기관을 만들어야 했다. 주석을 보좌할 부국을 만들기 위해 세 차례의 협의가 필요했고, 총 7개의 부국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 부국 중 군사국은 국장으로 알렉스 카젤느가 임명되었으나, 나머지 부국의 책임자는 미정으로 두었다.

우주력 800년 8월 8일, 양 웬리 사후 63일만에 이제르론 공화정부의 수립이 선포되었다. 정부수립을 선언하는 프레데리카의 연설이 끝나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이제르론 공화정부 만세!", "뒈져라 카이저 라인하르트!"를 외쳤다.

2.3. 제국과의 수호(修好)관계

이렇게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회랑 전투 양 웬리 암살사건에서 다수의 장병과 간부들이 죽고 함정도 다수 파괴되었기에 은하제국과의 전쟁은 자살행위였다. 마침 카이저도 페잔에 돌아가서 내정에 집중하고 있었으므로 당분간 두 세력 간의 충돌은 없었다. 황제를 대리하여 노이에란트를 통치하는 노이에란트 총독부는 제국군 함정,들이 이제르론 회랑으로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면서 동시에 이제르론 회랑을 봉쇄하여, 공화정부를 심리적으로 압박한다는 기간,基幹, 전략을 실행했다.

이 무렵 율리안 민츠가 내세운 전략은 ' 기다리기'였다. 제국의 민중들은 500년 동안 제정 체제 밑에서 지냈으며, 그 때문에 통치와 지배에 익숙하고 정치란 남이 해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언젠가는 로엔그람 왕조도 몰락과 퇴보를 겪을 것이며, 그때야말로 민주공화정이 나설 때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때로는 급격하게 변하는 것을 안 율리안은 단기적인 변화에도 대응할 방법도 구상해야 했다.

그런데 우주력 800년, 노이에란트 총독 오스카 폰 로이엔탈 원수가 우르바시 사건을 계기로 반란을 일으킨다. 로이엔탈 원수는 무라이를 이제르론 요새에 보내 자신을 도와 은하제국군이 회랑을 통과하는 걸 막아준다면 구 동맹령의 지배권을 내어주겠다는 제안과 더불어 그들이 증오하는 욥 트뤼니히트의 신병을 인도하겠다고 제안했지만 로이엔탈이 실패하리라 판단한 율리안 민츠는 그 제안을 거절하고 에르네스트 메크링거가 지휘하는 제국함대가 이제르론 회랑을 통과하는 걸 묵인하였다.

결국 오스카 폰 로이엔탈은 실패하였고, 노이에란트 전역 당시 제국에 협조해준 것 때문인지 한동안 양국은 충돌을 일으키지 않았다.

2.4. 대결, 그리고 평화

이제르론 공화정부와 제국과의 수호관계는 불과 2달만에 끝이 났다. 우주력 801년 하이네센에서 대폭동이 일어나고, 페잔 항로국의 데이터가 삭제되는 등 구 동맹령에 혼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프리츠 요제프 비텐펠트 상급대장을 중심으로 한 제국군 내 강경파들이 이제르론의 공화주의 세력을 쳐서 훗날의 우환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 동맹령의 반제국 세력은 이제르론 공화정부가 자신들을 방관하는 게 아니냐고 의혹을 제기했으며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 공화정부 내에서도 주전론이 득세했고, 마침내 이제르론 공화정부는 제국군과 싸우기로 결정했다.

우주력 801년 2월 이제르론 혁명군과 은하제국군 마침내 교전했고 그 결과는 제국군이 4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패퇴한 혁명군의 승리였다. 이 승리는 '카이저의 정강이를 걷어차 줬다'고 구 동맹령에 선전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카이저 라인하르트는 직접 노이에란트의 혼란을 진정시키려 하이네센으로 친정하려 했으나 건강 문제로 무산되었고, 대신 전권을 위임받은 군무상서 파울 폰 오베르슈타인 원수가 하이네센으로 왔다.

하이네센으로 온 오베르슈타인은 먼저 자유행성동맹의 유명인사들을 모조리 체포하여 라그풀 형무소에 수감하고 이제르론 공화정부 간부들에게 항복을 강요했다. 이제르론 공화정부 간부들은 고심 끝에 제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영관급 및 일부 장성급 장교를 제외한 주요 간부들이 하이네센으로 출두하려고 했다. 그러나 공화정부가 의논하는 사이 누군가의 계략으로 사상범들을 수감한 라그풀 형무소에 폭동이 일어나면서 무수한 사상자가 발생했고, 공화정부 간부들은 제국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이제르론 요새로 돌아갔다. 라인하르트는 뜻밖의 사태에 분노했고 오베르슈타인을 질책한 뒤 나이트하르트 뮐러 상급대장을 협상 대표로 임명하여 공화정부와 협상에 나섰다.

우주력 801년 5월 말, '신세기호'라는 이름의 난민선이 구동맹령에서 탈출하여 이제르론 공화정부로 가다가 제국군에게 발각되었다. 곧 신세기호를 두고 제국군과 이제르론군간의 전투가 벌어졌고, 이 사실이 보고되자 카이저 라인하르트는 직접 대군을 이끌고 친정하기로 결정했다. 우주력 801년 5월 말에서 6월 초까지 벌어진 시바 성역 회전에서 율리안 민츠는 제국군의 방해를 뚫고 카이저 라인하르트까지 가는 데 성공했고, 카이저 라인하르트는 그를 높이 사 전투 중지를 명령했다.

이후 하이네센을 비롯한 바라트 성계에 내정자치권을 부여하는 대신 이제르론 요새를 제국에 반환하는 것을 논제로 양국은 토의했으나, 안타깝게도 그 결실을 보지 못하고 카이저 라인하르트는 지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양측은 라인하르트 사후에도 약속을 준수하겠다고 다짐했다. 이후 역사는 알려져 있지 않다.

3. 국가 개괄

3.1. 정치

표방한 이념은 민주공화주의. 과거 은하연방, 자유행성동맹, 엘 파실 독립정부로부터 물려받은 이념이다.

하지만 실상은 군사정부이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대표적으로 주석을 비롯한 주요 직위는 전부 군인들이 차지했다. 엘 파실 독립정부만 해도 롬스키 주석을 비롯한 정부인사들은 죄다 민간인이었지만, 이제르론 공화정부는 주석인 프레데리카 그린힐을 비롯하여 거의 전부가 군인이었고 투표가 아닌 엘 파실 혁명군 최고 간부들만의 회의로 결정된 사안이었다.[12] 거기에다 군사국장에 군인이 취임함으로써 문민통제가 이뤄지지 않았다. 사실상 프레데리카와 율리안을 중심으로 한 집단지도체제로 운영되었다.[13]

왜 이런 체제가 되었냐면 엘 파실 독립정부가 해체되면서 남은 정치인들과 민간인들은 정부를 해산하고 죄다 이제르론 요새를 떠나버렸고, 남은 사람들 중에서는 군인 민간인보다 훨씬 많았으며, 양 웬리의 명성을 기반으로 한 세력인 만큼 그와 함께 싸운 사람들이 집권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민간정부를 구성하고 싶어도 앉혀놓을 민간 정치가 또는 관료도 없고 그렇다고 외부에서 모셔올 수도 없으니 문민정부는 물 건너 갔다.[14] 당장 정부는 구성하고 봐야 하니 군사정권이 되어버린 것이었으며 당초 공직이라곤 한 번도 맡아본 적이 없으며 군 경력에서도 당시 소령에 양 웬리의 부관이었던게 전부인 프레데리카 그린힐이 정부 주석인 것만 봐도 얼마나 이들이 정부는 구성해야 하는데 마땅한 인재가 없었는지 알 수 있다. 당사자들조차 이 행동이 후세의 비판을 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양 웬리의 후광 없이는 구심점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을 정치지도자와 군 지도자로 옹립했다.[15]

어찌되었건 이 결정에 대해 후세 역사가들 중 일부는 "양 웬리 일당의 기적은 늘 소수로 다수에게 승리했다는 것이 아니라 양이 죽은 뒤 권력쟁탈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라고 칭송했으나, 다른 역사가들은 "그저 변경 유형객에 불과한 양 웬리 일당이 고아와 미망인에게 가시면류관을 떠넘긴 것에 불과하다."이라고 조롱했다. 그리고 그들의 결정에 의해 탄생한 이제르론 공화정부는 일부 역사가들에게 "고아와 미망인의 연합정권"이라는 비웃음을 받았다.

프리데리카의 제안으로 양 웬리 알레 하이네센의 초상을 나란히 걸었는데, 영웅숭배를 우려하여 총회의장, 중앙위원회, 주석집무실, 혁명군 사령부 4곳에만 걸었다.[16]

국가원수는 주석으로, 초대 주석은 양 웬리의 부관이자 배우자였던 프레데리카 그린힐 양이다. 그리고 주석을 보좌할 부국,部局,을 설치했는데, 자유행성동맹 초기 제도를 참고하여 세 차례 협의하여 관방, 외교정보, 군사, 재정경제, 공부, 법무, 내정국을 설치했다. 이 중 공부국,工部局,은 은하제국의 공부성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요새 내 비군사적 인프라와 에너지를 관리하게 했다. 그러나 군사국을 제외한 나머지 부서는 국장조차 제대로 없을 정도로 정부 조직도 매우 허술했다.

3.2. 영토와 인구

영토는 오직 알테나 성역의 이제르론 요새 뿐으로 엘 파실 성계와 이제르론 요새 사이의 공역을 해방회랑으로 가지고 있던 엘 파실 독립정부에 비해서 크게 쪼그라들었다.[17]

그에 걸맞게 인구도 적어서 겨우 94만 4,087명이었으며, 성비 또한 맞지 않아 남성 612,906명, 여성 331,181명으로 극단적인 남초였다. 이는 당연하겠지만 소속된 인물들의 상당수가 군인이었기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었다. 이제르론 혁명군의 병력이 약 67만 명으로 추정됨을 감안하면[18] 민간인은 남녀 합쳐 약 27만 명으로 추산된다.

3.3.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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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외교

제국은 엘 파실 독립정부와 마찬가지로 이제르론 공화정부를 대등한 상대로 인정하지 않고 언젠가 토벌해야 할 반란군으로 보았다. 로이엔탈은 아예 회랑을 봉쇄해서 공화정부를 고사시키려 하기도 했다. 반면 공화정부에서는 상황이 바뀔 때까지 기다리는 걸 지침으로 삼았기에 제국에 대해 무조건적인 강경론을 따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카이저는 양 웬리 없는 양 웬리 함대에 흥미를 잃었고, 상중인 군을 치는 걸 원치 않았기에 그저 페잔에서 내정에 몰두했다. 그리고 노이에란트 전역에서 공화정부가 제국의 진압작전에 협조해준 덕에 나름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우주력 801년 노이에란트의 시민들이 봉기를 일으키면서 둘의 협력관계는 깨지고, 구 동맹 시민들의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던 공화정부가 선공에 나서면서 양국은 전쟁에 돌입했다.

제국 내에서는 힐데가르트 폰 로엔그람 등이 무력 토벌 대신 협상을 주장했고, 오베르슈타인은 아예 구 동맹령 명사들을 인질로 잡고 공화정부를 강제로 협상 테이블에 끌어내려 했다. 하지만 카이저의 선택은 전쟁이었고, 시바 성역 회전에서 양국은 전투에 돌입했다. 전투에서 용전분투하여 카이저 앞까지 당도한 율리안을 보고 라인하르트는 마음을 바꾸어 상호 공존을 택하게 된다.

구 동맹의 공화주의 세력과는 우호관계를 맺고 있었다. 누구보다 반제국 투쟁에 앞장선 이들이 이제르론 공화정부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노이에란트 전역에서 은하제국의 편에 서면서 공화주의 세력은 이제르론은 단지 자신의 안전만 추구하며 반제국 투쟁이 어찌되든 알 바 아니냐고 생각하는 것 아닌가라고 의혹을 제기했고, 이제르론은 이들의 의심에서 벗어나고 자신들의 기치를 분명히 하기 위해 제국과 싸워 이겼다. 그러자 구 동맹 시민들 너나할 것 없이 기뻐했으며 자유와 민주주의, 양 웬리를 찬양했다.

4. 주요 인물


[1] 회의를 보면 율리안이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는게 아니라 율리안 포함 양 함대 출신 주요인물들이 다 함께 이끌어간다. [2] 사실상 미래 영어 [3] 공화정부 연호인 우주력 (SE)으로 표기함. [4] 설립이 우주력 800년(신제국력 2년) 8월 8일. 이런 별명이 붙여진 건 똑같이 8월에 설립된 엘 파실 독립정부와 구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5] 율리안은 나이도 어리고 계급도 낮으며, 쌓은 전공은 전부 개인의 무용담 수준인 반면 아텐보로는 20대에 이미 장성급이었을 뿐만 아니라 양 함대 시절부터 함대지휘관을 맡아 무수한 전공을 세웠고, 만일 동맹이 멸망하지 않았다면 양 다음으로 30대에 원수를 달았을 것이란 평가도 받았다. [6] 이 사실을 두고 한 역사가는 양 웬리 함대의 기적은 늘 소수로 다수에게 승리했다는 점이 아니라 양 웬리가 죽은 후 권력투쟁이 발생하지 않았던 점이라고 칭찬했으나, 다른 역사가는 양 웬리 함대 간부들은 그저 미망인과 고아에게 가시면류관을 떠넘긴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7] 애당초 무라이가 이탈한 이유도 이것이다. 이탈할 가능성이 있는 이들을 제 발로 나가게 하기 위해서 누구보다도 이탈할 가능성이 없는 자신이 나간 것이었다. [8] 이제르론 회랑의 양쪽 출구를 봉쇄하여 요새를 고립시키는 것. [9] 특히 제국은 겨울장미원의 칙령 을 통해 '인류사회를 정당히 통치할 정치체제는 오로지 은하제국뿐이다.' 라고 선포해놓은 상태였다. 비텐펠트 같은 인물들이 이제르론 공화군을 '반란군' 이라고 부르는 이유 역시도 이러한 원인에서 온 것이다. 따지고 보면 골덴바움 왕조-자유행성동맹의 관계가 로엔그람 왕조-엘 파실 혁명정부, 이제르론 공화정부의 관계에서도 재탕된 것이다. [10] 그리고 당초에 양 함대는 엘 파실 독립정부 시절부터 군사활동을 통해 자치권을 얻어낸다는 대전략을 세운지라 굳이 독립국 선언을 할 이유도 없었다. [11] 린츠는 양이 생전에 번지르르한 것을 싫어했다며 단순하게 이제르론 공화정부라는 이름을 제안했다. [12] 하다못해 이 결정은 모든 휘하의 장병들이 다 받아들인 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수뇌부는 이들을 설득해야했고, 그럼에도 상당수의 이탈자가 발생했다. [13] 기실, 정부 체제가 제대로 세워져 있다면 이들의 비중도 있어야 하겠지만 이제르론 공화정부는 주석인 프레데리카 그린힐을 제외하면 정부 인사들은 언급도 등장도 안 한다. 즉 정부 조직은 껍데기고 실제는 양 함대라는 이름의 군벌조직인 것이다. 실제로 이제르론 공화정부측에서 회의하는 자리를 보면 육전지휘관인 쇤코프 같이 정부조직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도 껴 있고 정작 정부 조직의 구성원은 프레데리카 그린힐(주석), 알렉스 카젤느(군사국장) 정도를 빼면 보이지도 언급되지도 않는다. [14] 심지어 문민정부를 세워도 정부 각료를 다 채울 수 있을만큼의 숫자가 충족되는지도 알 수 없고 설사 어찌저찌 정부 조직에 전부 문민으로 채워도 군대가 세운 문민정부라는 점에서 그 한계는 명확하다. 형식상으론 문민정부지만 실상은 군대에 의해 '추대'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15] OVA에서 율리안과 아텐보로가 대화할 때 "어쩔 수 없이 군사조직의 형태를 유지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16] 허나 명백히 국부의 위상을 가진 알레 하이네센과 '나란히' 양 웬리의 초상화가 놓였다는 것은 그만큼 이제르론 공화정부가 알라 하이네센으로 대표되는 '민주주의'의 기치를 지녔음과 동시에 양 웬리로 대표되는 이제르론 공화정부를 결속시켜주는 원동력이 중요했음을 보여준다. 스스로도 민주주의를 내걸지만 그 실체는 과두정 정권임을 인정한 셈이었다. [17] 사실 회랑 전투 직전 이미 엘 파실 독립정부는 엘 파실 성계의 무저항선언을 해 사실상 엘 파실을 포기한 상태였다. [18] 시바 성역 회전에 참여한 567,200명 + 이제르론에 남은 잔류부대 약 10만 명이었다. [19] 명목상으로는 이 사람들도 공화정부 수립 당시 이탈했지만, 하이네센에서 활동하면서 꾸준히 외부의 정보를 요새로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