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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카와 하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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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유카와 하루나
湯川遥菜|Haruna Yukawa
파일:캡처_2023_12_02_21_00_23_229.png
출생 1972년 4월 27일
치바현 치바시
사망 2015년 1월 25일 (향년 42세)
시리아
직업 사업가
가족 父 유카와 쇼이치
학력 지바현에 있는 고등학교 졸업
1. 개요2. 피랍3. 반응4. 생사여부5. 인질극
5.1. 밝혀진 행방, 그러나 혼전으로 치닫는 경위5.2. 끝내 최후를 맞이한 유카와5.3. 추가된 인질5.4. 남은 이들의 운명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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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카와 하루나(湯川遥菜, 1972년생)는 치바현 치바시 출신 일본인이며 페이스북이나 블로그에서 PMC Japan Co.Ltd라는 민간군사기업 CEO라고 자칭하고 있었는데, 회사 사장이라는 이름은 거창하지만 사실상 제대로 된 사무실도 갖춰지지 않았다. 사실 이라크- 시리아가 제대로 된 첫 활동지임을 감안하면 그냥 여건이 좋았던 밀덕후에 가깝다.[1] 도쿄 오다이바에 사무실이 한 칸 있다고는 하지만 외신에 따르면 그냥 허름한 상가 건물이었고, 건물주의 말로는 이미 6월에 방을 뺐다고 한다. 사실상 페이퍼 컴퍼니. '시큐리티 컨설턴트'라며 자신을 소개하지만 그는 군대는커녕 자위대와의 인연조차도 없었다.[2][3]

유카와 하루나의 원래 이름은 유카와 마사유키(湯川 正行)이다. 그는 과거 고등학교 졸업 후 자잘한 수입업을 하다가 군용 헬멧 등을 판매하는 가게를 개업했었다. 2호점을 열 정도로 사업도 순조로웠고, 단골 손님이던 여성과 결혼도 했지만 3~4년 뒤에 도산하고 빚을 져서 야반도주를 하며 공원에서 1개월 정도 노숙자 생활을 했다고 한다. 빚은 아버지가 아파트를 처분하여 해결했다고. 2008년에는 자살 시도로 스스로 거세를 하였으며 부인이 말려서 목숨은 건졌지만 고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를 말렸던 부인은 2년 뒤 으로 사망하게 된다.

이런 인생의 굴곡을 거쳐 그는 자신의 전생 중일전쟁 때 활약한 일본군 여자 스파이 카와시마 요시코라고 믿게 되었으며, 이름도 '마사유키' 에서 ' 하루나' 라는 여성스러운 이름으로 고치게 되었다.[4] 그리고 스스로 위험 지역인 시리아로 향해 '자기 찾기 여행'을 하며 '20대 시절처럼 열심히 벌어 몇 년 이내에 은퇴하겠다'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유카와는 2014년 4월 알레포에서 자유 시리아군(FSA)의 전투원에게 일시 구속되어 심문을 받았으나 FSA의 아시아계 멤버와 친해졌다고 한다. 그의 블로그를 써줬단 사람에 의하면 현지의 병원이 부족해서 의약품이나 신발을 일본에서 나르다가 이슬람에 대한 관심이 강해졌다고 한다. 같은 해 6월 그는 두 번째로 일본을 출국하여 4월에 만난 저널리스트 고토 겐지와 함께 이라크로 가서 베테랑 기자의 취재 방법이나 분쟁 지역에서의 활동 방법을 배웠으며, 7월 하순 튀르키예를 경유하여 시리아에 들어갔다.

함께 행동한 저널리스트 고토 겐지는 그가 PMC CEO치고는 매우 온화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런 성격이기에 자유 시리아군에서도 받아들여진 이유의 하나로 꼽고 있다. 그의 블로그 기록에는 과거에 이지메를 경험한 것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감추고 밝은 척을 하며 본심을 감추고 보는 것이 가능해졌으며, 그것이 사업에 크게 활약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트위터에서는 '10년 전 마쿠하리에 있던 모델건 샵 사장님이다'라는 목격담이 나오기도 했다. 게다가 "인생을 바칠 각오도 되어있지만 중동에서는 죽고 싶지 않다" 라는 글도 남기고 "몇 년 내에 이 일로 떼돈을 벌고 나오겠다" 라고도 했지만 정작 중동에서는 PMC CEO라는 자칭이 오히려 그의 명을 재촉했다. 이들이 피해자를 생포했다고 트위터에 발표하자 몇몇 일본인들이 리트윗으로 친절하게 '이 사람 PMC CEO라는데?', '일본 비밀공작원 아님?' 이라며 일러바친 탓에 빼도박도 못하는 상황에 빠져버렸다.

2. 피랍

자유 시리아군에게 심문을 받고 계속 시리아에서 머물다가 일본으로 귀국 후 다시 시리아로 입국한다.

그 후 그는 2014년 8월에 시리아 알레포에서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 지하디스트들에게 생포당했다. 생포 당시의 심문 비디오를 보면 이미 심하게 얻어맞은 상태로 머리에서 피가 흘러 나오는 상태다. 자신은 사진사이자 의사라고 대답했다. 또한 그의 페이스북 계정과 개인 블로그도 현재까지도 자료들이 남아있는 상태이나 피랍 당하고 난 이후에는 더 이상 갱신 되는 정보가 없다.

이 정도만 보면 테러리스트 집단에 의한 단순한 민간인 납치로 보이지만...

3. 반응

이슬람 국가 측은 이후 트위터로 " 일본인 스파이 유카와 하루나는 뜻에 따라 처형되었다" 고 발표했다. 이 주장에 대한 반응은 물론 "무슨 KKK단에 흑인 스파이로 잠입시키는 소리냐?"와 같은 반응이 주류다.[5] 대체 어느 나라의 막장 정보국이 척 봐도 외국인인 사람을 정보원으로 실질적 적국에 투입시킬까?

대중들의 반응은 싸늘했는데 공개적으로 그를 매도하는 것은 물론 그의 아버지도 엮여서 그가 저지른 ' 민폐'에 대해 대국민 사과까지 해야 한 데다가 납세자들은 "저 놈을 구하는데 돈을 낭비하지 말라"며 일본 정부를 비판하기에 이르기까지 했다. 고토 겐지가 대중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낸 것과는 정반대의 경우이다. 일본 내에서 넷우익들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국 인터넷에서는 자민당 각료인 극우파 정치인과 인증샷을 찍거나 페이스북과 블로그 등에서 고노 담화 수정, 야스쿠니 참배 공식화, 안중근 기념관 철거 등의 망언에 찬동하고 다닌 것이 알려져서 극우파 넷우익으로 찍히기도 했다.

4. 생사여부

지하디스트들이 그를 심문할 때 사용한 BGM이 하필이면 처형용 BGM[6]이었고, 목을 베었다는 영상이 뜨고 그것을 봤다는 증언도 속출하는데 마이니치에서는 FSA 발표를 인용해 살아있다고 하는 등 일단 당장은 생사 불분명이다.

이후 트위터에서 활동하는 지하디스트가 주장하기로는 참수를 했다고 하는데 증거가 나오지 않고 있고, 생존설이 나왔다가 일본 정부 측에서는 TF를 꾸려 대응한다고 했으나 이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IS 트위터에 유치원 선생으로 잘 살고 있다는 사진이 올라왔다는 이야기가 한국 한정으로 퍼져있는데 누군가 꾸며낸 헛소문이다. 일본 언론에서도 어떠한 언급도 없고, 그 아이를 목마를 태운 채 찍은 사진조차 납치 이전에 찍은 사진이기 때문이다.

5. 인질극

5.1. 밝혀진 행방, 그러나 혼전으로 치닫는 경위

[이미지 펼치기・접기]
파일:external/pbs.twimg.com/B7xhgv7CQAAIgx5.jpg
인질극으로 공개한 영상 中[7]

2015년 1월 20일, IS가 일본인 둘을 인질로 억류하고 72시간 내에 2억 달러를 내놓으라는 협박 영상을 공개했는데 여기에서 그의 행방이 분명해졌다. 유카와 하루나는 고토 겐지[8]와 함께 이미 참살된 서방 기자들과 같이 오렌지색 가운을 입고 꿇려 앉은 채 영상에 등장했다.[9]

유카와가 잡히기 직전까지 동행했던 외국인의 말에 의하면 전투가 벌어지는 극히 위험한 상태에서 "사진을 찍어야 한다"며 차에서 사진기를 가져가 전장에 뛰어들었다가 탱크에 둘러싸여 사로잡혔다고 한다. 자동차에는 총까지 있었기에 빼도박도 못했다고. IS와 연계되어 있는 일본의 이슬람학 교수 나카타 고에 의하면, 유카와 하루나는 생포된 지 1달 후인 9월에 IS의 재판에 넘겨졌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 대다수는 '가지 말라는데 간 게 잘못. 자기 책임.' 이란 반응을 보이고 있으며, 트위터에 합성 사진을 도배하면서 조롱 중이라고 한다. ISIS 합성 대축제(※ 선정적인 사진 주의). 일본 정부에서도 "테러에 굴하여 활동 자금을 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IS측에선 반응이 영 시큰둥하자 "일본 국민은 동포에 대한 자비심이 없다"고 지적질을 했다.

23일, 한 IS 대원이 자신의 트위터 계정으로 일본인 2명이 처형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트위터리안은 일본의 선택에 의해 참살되었으며 비디오는 곧 공개될 것이라고 하였다. 24일에는 IS와 가까운 시리아의 반체제 인사를 자칭하는 자가 두 일본인이 아직 살아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진위가 파악되지 않은 정보들이 난립하고 있어 혼란이 가중되고 있고, 일본 정부조차도 협박 영상이 공개된 이후 이들의 생사 여부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5.2. 끝내 최후를 맞이한 유카와

결국 25일, 유카와 하루나는 결국 참살당했고 고토 겐지가 죽은 유카와의 사진을 들고 찍은 사진과 함께 녹음된 음성이 유튜브 등의 웹에 올라왔다. IS는 고토의 음성을 통해 다시 석방 조건을 내걸었는데, 이번에는 돈이 아닌 2005년 요르단 암만에서 폭탄 테러를 저지르려다 실패한 뒤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10년 째 복역 중인 여성 자살 폭탄 테러리스트 알 리샤위[10]와의 맞교환으로 수정되었다. 여러 언론들은 애초에 돈이 아닌 인질 교환이 목표였던 것으로 추정했다.[11]

하지만 결국 인질 교환은 목적이 아니라 선전의 수단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IS는 요르단 조종사인 무아트 알 카사스베도 인질로 잡고 있었는데, 알 리샤위는 요르단에 수감되어 있었으니 사실 일본 정부 측에서는 '돈' 이외에는 협상카드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유력 가문인 카사스베의 친인척들이 정부에게 IS의 요구를 들어주라며 호소하고 시위까지 벌였기에 카사스베가 살아 있었다면 알 리샤위와 교환됐을 가능성이 있었다. 요르단에선 진지하게 협상하려고 IS에게 카사스베가 살아있다는 증거를 요구했으나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다가 갑자기 화형 영상을 공개해버리는 바람에 즉시 알 리샤위의 사형이 집행됐다. 즉, 애초부터 협상할 의지가 없었던 것이다. 알고보니 카사스베를 한달 전쯤에 이미 죽여놓고서 그런 요구를 했기에 사실상 인질 교환이나 돈이 목적도 아니고 IS 선전이 목적이었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형호 유괴 살인 사건처럼 미리 인질을 죽여놓고 그런 짓을 한 것이다.

일본 정부에게 요구했던 금액인 2억 달러부터가 일본 정부가 IS 격퇴에 지출한 2억 달러를 겨냥한 상징적인 액수였으니 진지하게 돈을 받으려는 의도보다는 IS에 개입하지 말라는 경고용 선전일 가능성이 컸다. 실제 바로 죽였다면 뉴스에 한번 짧게 보도되고 끝났겠지만, 협상 코스프레로 일본에서 연일 대서특필하며 크게 다뤘고 일본 내부에 2억을 주네 마네, IS 격퇴에 합류하네 마네 등 갑론을박이 벌어지게 만들어 분열시켰기에 충분히 소기의 목적은 거두긴 했었다. 즉 협상이 아니라 선전과 국제연합 전선의 분열이 목적이었다면 애초 인질들의 운명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단 뜻이다. 이렇게 줄듯말듯 밀당으로 인질이 전세계 언론에 연일 보도되게 만들어 각인시킨 뒤 끔찍하게 살해하는 엔딩으로 마무리 한다면 전세계 사람들에게 트라우마를 안길 수 있는데, 당시 IS는 선전 영상도 영화처럼 공들여 제작하고 편집하는 것으로 알려졌기에 인질들의 목숨을 가지고 철저히 선전에 이용했다.

카사스베 화형 후 연합군 측의 조종사들이 작전 참여에 소극적이 되었다는 기사들이 보도되었으며 유카와와 고토 겐지의 참혹한 시신을 보고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세계인들이 많았다. 특히 고토 겐지에게 유카와의 시신 사진을 들게 하고 사진을 찍은 것이 너무 사이코패스 적인지라 충격을 받았다는 의견들이 많았는데, 당시 IS의 '미치광이 전략'은 일정부분 효과를 거뒀다.

한편 한국에서는 유카와의 아버지 인터뷰 내용이 다소 놀랍다는 반응이 있었다. 일본인 인질 아버지 "가슴이 아프다... 폐 끼쳐서 죄송".

5.3. 추가된 인질

27일, IS는 또 고토 겐지의 음성을 통해 24시간 내에 알 리샤위를 석방하지 않으면 고토 겐지와 함께 작년 12월에 라카에서 추락, 생포된 요르단 공군 F-16 파일럿 무아트 알 카사스베 중위까지 세트로 참수하겠다고 최후통첩을 가했다. 처음에는 시한을 정하지 않아 인질극이 장기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으나 27일 오후 늦게 갑작스럽게 이와 같은 영상이 유튜브에 오르면서 이제는 시간과 싸울 여유조차 없어졌다.

요르단 정부는 계속된 일본 정부의 협력 요청에도 지금까지 침묵을 지켜왔으나 자국 파일럿까지 희생대에 오르자 국내에서도 협상에 응하라는 거센 압력을 받고 있고, 미국에선 "테러와의 협상은 없다"면서 인질 맞교환을 반대하고 있어[12] 가장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특히 알 리샤위가 석방되어도 알 카사스베 중위가 고토 겐지와 함께 자유의 몸이 된다는 보장은 없는데, IS가 고토 겐지 이전에 알 카사스베 중위를 먼저 죽이겠다고 협박해 와서 요르단 입장에서는 결정을 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일단 두 인질을 모두 석방하는 것을 기본 조건으로 IS와 물 밑 접촉을 벌이고 있는데, 알 리샤위 및 또 다른 테러리스트 사형수와 2대 2 교환하는 방안이 대두되고 있다. #

반면 일본 정부의 경우 요르단 정부의 결단만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지만 이 인질극의 결말이 어떻게 나든 간에 일본의 헌법 개정과 보통국가화 및 재무장을 추진하는 아베 신조 정권에는 오히려 엄청난 호재로 작용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13]

27일의 영상이 공개된지 24시간 째가 되는 28일 오후, 요르단은 고토를 배제하고 자국 조종사와 알 리샤위의 맞교환을 제시했다. 두 인질의 동시 석방 가능성이 낮아지자 새로운 제안을 협상 테이블에 올린 셈으로,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에 불과한 고토 겐지보다는 라카 폭격 임무를 수행하다가 붙잡힌 알 카사스베 중위의 목숨이 더 위험하며, 또 파일럿을 먼저 구하라는 자국민의 여론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요르단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다시 IS 측으로 넘어가게 되면서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 만한 여지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28일, 알 카사스베 중위에게 석방이란 없으며 참수만이 있을 뿐이라고 비난하는 IS측의 동영상이 올라왔다. 자신들을 죽이러 온 사람이라며 석방이 절대 없을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요르단 측에서는 생사를 확인할 길을 물색하고 있으며, 중위의 석방을 보장하기 전에 석방은 없다고 대응하였다.

29일, IS는 다시 한 번 고토를 통해 일몰까지 그와 알 리샤위를 교환하기 위해 터키 국경 부근 특정 지역으로 데려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오지 않으면 알 카사스베 중위를 바로 살해하겠다고 덧붙였다. #[14] 이에 따라 요르단은 완전히 막다른 길에 놓여버린 꼴이 되었다. 일본 인질을 위해 자국이 가진 최고의 對 IS 협상 카드를 내어주자니 국내 여론이 반발할 것이고, 또 풀려난 테러리스트가 미래에 다시 테러를 일으켜서 수십, 수백 명을 살상할 지 모를 일이다. 거기다가 어쨌든 중위는 반드시 죽여버릴 거라고 하는 영상까지 누출된 마당에 테러리스트를 풀어준다고 해도 자국 파일럿의 생명은 보장할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풀어주지 않는다면 자국 파일럿의 생명이 위험하게 되는 것은 물론 인질을 구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구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올 것이고, 일본과의 관계 역시 틀어질 수도 있다.

이러기도 저러기도 어려운 상황에 요르단은 자국 파일럿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다며 일몰이 지나서도 IS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

5.4. 남은 이들의 운명

결국 한국 시간 2월 1일 새벽경에 고토 겐지를 참살하는 동영상이 공개되었다. # ' 일본 정부에게 보내는 메시지' 라는 제목의 동영상에서 앞서 서방 기자들의 참수 영상에 여러 번 등장한 바가 있는 영국계 IS 대원 지하디 존(Jihadi John)이 '당신들은 이슬람 국가와 칼리프의 권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기지 못할 전쟁에 참여하는 당신들의 결정 때문에 이 칼은 겐지 뿐만 아니라 당신 국민들을 향한다'고 말한 뒤 고토를 참수하고 그 시신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IS에 의해 발표된 서방 인질들의 참수 영상과 같은 형식이다. 다만 지금까지 발표된 영상들이 조작이라는 주장을 의식한 듯 영상의 뒷배경이 바뀌었다.[15] 한편 고토 겐지의 어머니는 "같은 일본인을 돕기 위해 시리아에 간 아들의 선량함과 용기를 알아주기 바란다"는 인터뷰를 했으며, 고토 겐지의 형인 고토 준이치는 "매우 안타깝다"면서도 동생의 석방을 위해 노력한 일본 정부에 감사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

IS가 고토보다 먼저 죽이겠다던 알 카사스베 중위의 경우 피살 시 요르단 정부가 자국이 잡고 있는 모든 포로들을 처형하겠다고 협박해서 # 그런지 고토 겐지와는 함께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2월 3일(현지 시간) 알 카사스베 중위가 분살 당하는 모습이 담긴 영상이 공개되었다. #[16] 요르단 측의 주장에 따르면 이미 지난달 3일 살해됐다고 한다.[17] 철창에 가둔 채 몸에 불을 질러 살해하는 그야말로 끔찍한 방식으로 살해했다. 버락 후세인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야만적인 행위"라고 비난했고, 요르단은 당연하게도 "무고한 자를 희생시켜 모든 요르단인을 위협한 행위이며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복수의 칼을 갈고 있으며, 2월 4일에는 IS가 석방을 요구했던 알 리샤위 등 IS 대원 2명에게 사형을 집행했다고 밝혔다. 이후에도 요르단 정부는 알 카에다, IS와 연계된 테러리스트 5명을 추가로 처형하였다.

그러나 IS 대원 처형으로는 성난 민심이 사그라들지 않을 것을 안 압둘라 2세는 "무자비한 전쟁이 될 것"이라는 강한 발언을 하며 IS로의 공습을 명령하였고, 비교적 미적지근했던 중동 국가들 사이에서도 이슬람의 교리를 배반한 화형을 둘러싸고[18] IS에 대한 적대감을 형성시키게 되었다.

그리고 유카와 하루나와 고토 겐지를 참살한 IS 간부 지하디 존도 결국 미군 MQ-9 무인기의 공격으로 폭살당했다. IS도 그로부터 몇 년 후 완전히 멸망한다.

6. 관련 문서



[1] 후술된 사업 경력이나 과거 그를 잠시라도 알았다는 일본 사람들의 SNS 반응을 보면 오래된 밀덕후일 가능성은 농후하다. [2] 사실 아주 없는 건 아닌데 그나마도 복무를 한 게 아니라 자위대 각료와 투샷으로 신문에 나온 게 전부다. [3] 사실 실존하는 민간 군사기업의 경우 어떤 방식이든 군대를 그것도 엘리트로 나온 사람을 선호하기 마련이다. 회계, 변호사와 같은 완전히 동떨어진 업무가 아닌 이상 실전 경험이 많은 사람을 고용하는 게 교육비의 지출을 막을수 있기 때문. 사실은 회계, 사무, 행정업무라고 하더라도 사무 경험이 있는 장교나 부사관 출신이 당연히 선호된다. 자위대는 군대가 아니라지만 국제적으로 실질적인(de facto) 군대로 간주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진짜 용병을 할 거였으면 최소한 자위대 보통과, 야전특과(포병), 기갑과 등 전투병과라도 나오거나 후지교도대, 레인저, SOG 같은 방향도 존재하기는 한다. 물론 유카와의 PMC가 사실상 설정놀음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건 큰 의미없는 사족이긴 하지만. [4] 사실 '유카'라는 일본인 여성 가수가 있고(사토 유카) '하루나' 역시 일본인 여성 이름이다보니 유카'와' 하루나 두 여성이 인질로 잡힌 건가란 착각을 줄 수도 있다. [5] 요즘은 노선을 흑인에서 히스패닉과 아시아계로 확대한데다 흑인도 아시아인도 히스패닉도 들어갈 수 있지만 말이다. [6] 지하드 송이라고 대량 학살과 처형 동영상들에 꼭 삽입하는 곡이다. [7] 중앙의 복면을 쓴 남자( 지하디 존)가 칼을 들고 있고 살벌한 분위기였지만, 인질 공개와 협박 내용을 공개할 뿐 이때 참살하지는 않았다. 참고로 왼쪽의 마른 사람이 겐지, 오른쪽의 뚱뚱한 사람이 하루나이다. [8] 고토 겐지는 위의 이야기에 등장한 바로 그 사람이다. 잠시 일본에 귀국했다가 유카와가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를 구하겠다고 다시 시리아로 출국해서 제 발로 IS의 수도 라카로 향했다고 한다. 고토는 출국하기 전에 자기에게 무슨 일이 벌어져도 모든 것은 자기 책임이라는 짤막한 영상을 남겼다. 영상 보기. [9] IS가 대접은 잘해줬는지 면도와 이발도 깨끗하게 되었고 잡혔을 때보다 살도 쪘다. 후술할 내용과 종합해보면 처음엔 유카와를 이용하려 했다가 고토 겐지가 더 적합하다고 판단해서 참살한 듯하다. 아이러니하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고토가 유카와 하루나 사건을 해결해보겠다고 자처한 것이 오히려 유카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물론 이 인질극을 더 복잡하고 해결하기 어렵게 만들어버렸다고 볼 수도 있다. 이슬람국가의 막장성을 생각했을 때 사실 혼자서 구하러 가겠다는 것은 처음부터 현실성이 없는 상황이었고, 이런 점을 감안해서 그냥 조국에 남아있었다면 자기 자신은 무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10] 당시 남편과 함께 몸에 폭탄 조끼를 두르고 자살 테러를 시도했으나, 남편만 폭사하고 자신은 폭탄이 불발되어 체포되었다. 당시 이들의 호텔 테러 공격으로 60명이 사망했다. [11] 요구한 2억 달러부터가 일본 정부가 IS 격퇴에 지출한 2억 달러를 겨냥한 상징적인 액수이다. 실제로 받으려고 했다기보단 정치적인 협박이었던 셈이다. [12] 하지만 미국도 2009년 탈레반에 포로가 되었던 미 육군 병장 버그달을 2014년에 관타나모 수용소 죄수와 맞교환한 전적이 있다. [13] 결과론적으로 넷 우익이었던 유카와 하루나가 자기 목숨을 바쳐 일본의 재무장에 도움을 준 셈이다. 물론 G7 선진국들의 강력한 요구에 응하는 게 재무장이고 전폭적으로 지지를 받는 상황이라 이러든 저러든 재무장은 했겠지만. [14] IS 입장에선 파일럿을 풀어주면 다시 전투기를 타고 자기들을 폭격하러 올 것이 뻔한 데다가 인질 생활 도중에 자신들에게 치명적인 정보를 알게 되었을 만약의 경우도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맞교환 정도로 쉽게 풀어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15] 고토 겐지가 죽기 직전에 눈을 깜빡거려서 모스 부호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너무 짧은 시간이었기에 메세지를 담는 것이 상식적으로 어려웠고, 해당 영상은 IS의 편집을 거친 것이기 때문에 특별한 이미지를 포함하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대다수. [16] '신자들의 가슴을 치유하며' 라는 제목의 영상에서 초반부에 알 카사스베 중위의 인터뷰 내용을 싣고, 공습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사진들을 보여주고, 알 카사스베 중위가 화형 당하기 전 도열한 IS 전사들을 배경으로 폐허를 걷는 듯한 영화적인 연출을 보여주는데, 이는 IS의 방송 선전술이 새로운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준다. [17] 해당 영상의 퀼리티를 보건대 그 편집에 들인 시간과 정성을 추정해 보면 요르단의 주장이 타당하다. 다시 말하면 IS가 이미 죽은 사람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는 이야기다. [18] 이슬람 교리에서는 유일신 알라만이 사후 세계에서 죄인을 불로 심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