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7 20:15:48

신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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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호 <colbgcolor=#fff,#1c1d1f>신릉군(信陵君)
(姬)
(魏)
무기(無忌)
아버지 위소왕(魏昭王) 위속(魏遬)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244년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몸을 떨쳐 일어나 조나라를 구원하다2.3. 조나라에서2.4. 진군을 다시 격파하다2.5. 말년
3. 여담4. 미디어믹스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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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국시대 위(魏)나라의 정치가이며 장군. 전국사군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이름은 무기(無忌). 위나라의 왕 안희왕(安僖王)의 이복동생으로 전국시대 명장이었다.

2. 생애

2.1. 초기

사기 신릉군열전에 따르면 신릉군이 위소왕의 막내아들이라고 하니 안희왕과는 꽤 나이차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안희왕이 즉위한 후 신릉(信陵, 지금의 허난성 상추시 닝링현) 지역에 봉(封)해져 신릉군(信陵君)으로 불리게 되었다.

기원전 277년 소왕이 죽고 안희왕이 즉위한 뒤에 진(秦)의 군대는 여러 차례 위나라를 상대로 공세를 퍼부었다. 기원전 273년 백기가 이끄는 진의 군대가 위를 침공하였고, 당시 위의 재상이었던 맹상군이 천거한 망묘(芒卯)가 이끌던 위의 군대는 화양(華陽)에서 크게 패퇴하였다. 이 일로 맹상군은 실각하였고, 신릉군이 위의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1]

신릉군은 성품이 인자하고 겸손하며 선비들을 잘 대해 여러 식객들이 몰려들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삼천 명에 이르는 빈객이 모여들었다고 하며, 그의 세력을 두려워하여 주변 나라들도 10년 동안 위나라를 침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어느날 형인 안희왕과 바둑을 두고 있는데 조(趙)나라 군대가 국경으로 밀려온다는 급보를 받았다. 이에 안희왕은 당황했으나 신릉군은 태연히 바둑을 두며 "침략이 아닌 조왕이 사냥을 나온 것뿐"이라고 답했는데 과연 그 말대로였다. 안희왕이 어찌 그것을 알았는가 물으니 "제 밑에 조왕에 대해 알려주는 이가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이로 인해 안희왕은 동생인 신릉군을 두려워하게 되었다.[2] 사실 이는 왕 입장에선 당연한 것이, 잠재적 왕위 경쟁자가 왕 주변에 눈과 귀를 심어뒀다고 자백한 꼴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신릉군의 결정적 단점인 떨어지는 정치적 감각을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식객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후영(侯嬴)인데, 신릉군은 늙은 성문지기인 후영이 현인이란 말을 듣고 많은 재물을 보냈지만 후영은 그것을 거절하였다. 그러자 신릉군은 각계 각층의 고위인사들을 초청하여 술자리를 마련하고, 몸소 나서 후영을 초빙하기 위해 그를 직접 찾아갔다. 그런데 후영이 냉큼 마차 위 귀빈석에 앉자 친히 말채찍을 잡았고, 백정 친구인 주해(朱亥)와 수다를 떠는데도 싫은 내색 하나 없이 기다렸다. 술자리에 도착했을 때 많은 이들이 후영의 무례함에 어이없어 했지만 후영은 "내가 여기에 오기까지 버릇없이 굴었지만 그것은 모두 신릉군의 덕을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함이었다. 재물을 거절하여 직접 나를 데리러 온 행동, 그리고 주해와 수다를 떠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오랫동안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그 긴 시간동안 떠들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소인이라 욕했겠지만, 백성들은 신릉군을 어진 이라 칭찬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라고 말했고 결국 신릉군의 덕망과 겸손에 탄복하여 그의 식객이 되었다.

후영은 주해도 신릉군에게 추천하였고, 신릉군은 직접 주해에게 찾아가 그에게 뜻이 같이하자 청하였다. 그러나 주해는 답례조차 하지 않았다.

한편 이 시기에도 그의 흑역사가 하나 있는데 범수(전국시대)의 원수인 위제라는 이가 신릉군에게 도움을 구하려고 했다가 신릉군이 망설이다 받아들였는데 그 사이에 위제는 신릉군을 원망하다 자결했다. 위제는 위나라 공자였다고 하니 신릉군의 인척이었을 것이고, 형제일 확률이 높다.

2.2. 몸을 떨쳐 일어나 조나라를 구원하다

장평대전에서 승리한 진(秦)나라가 마침내 조나라 수도 한단을 공격하자, 조나라의 평원군은 처남인 신릉군에게 도움을 청한다. 안희왕은 진비(晉鄙)를 시켜 조나라를 구원하게 했으나 진의 협박[3]에 겁을 먹고 국경에서 진군을 멈췄다. 신릉군이 누차 형인 안희왕을 설득했지만 이미 진나라에 겁을 먹은 그는 설득하는 신릉군에게 '진에게 제왕 칭호만 허락하면 군대를 무를 텐데 아우는 왜 자꾸 싸우자는 거임?' 하고 되려 역정을 내는 판국이었다. 여담으로 헛된 명분을 주고 실익을 챙기겠다는 이 안이한 계책은 세객 노중련에게 조목조목 쳐발린다.

요약하자면 진에게 제의 칭호를 주고 자진해서 신칭을 하게 되면 명분밖에 없는 황제라 해도 황제의 명으로 자결을 명하면 그대로 죽을것이냐? 라고 반문한 것. 거절하면 황제의 명을 어겼으니 죽을것이고 명을 따르면 자결해서 죽을것이니 어떻게 해도 손해라는 것이다.

그리고 조나라가 멸망해봐야 위나라에게 좋을 것도 없다. 조나라가 망하면 조나라 땅은 진나라가 먹게 되는데 그럼 그만큼 진나라만 강해지는 것이고 무엇보다 그나마 당대에 진나라와 싸워 이겨본 나라는 조나라 뿐이었다. 조나라는 기원전 270년(12년 전)에 진나라와 싸워 이긴적이 있는데 위나라는 무려 100년도 더 전에야 이긴 적이 있었다. 이는 위나라가 양혜왕 중엽부터 쇠락한 탓으로 반면에 조나라는 그래도 조혜문왕 시절까지는 전성기였고 이 때의 조왕은 조효성왕이었다. 또한 또다른 강국인 초나라는 진나라에게 털려서 천도한 상태. 즉 당시 진나라의 공격에 그나마 제대로 대응하던 나라는 조나라였다. 근데 그런 조나라가 망한다면 위나라는 어떻게 될까? 실제로 진나라의 통일 전쟁에서 진나라가 어떻게든 무너뜨리고자 첫 시도를 한 나라는 조나라였고[4] 조나라가 아니라 한나라가 먼저 멸망한 것도 4차에 걸친 침공이 실패하자 방향을 틀어 먼저 한나라를 공격한 것으로 그 후 조나라가, 다음으로는 위나라가 망했다. 정말로 조나라와 위나라의 관계는 순망치한이나 다름없었던 셈.

결국 신릉군은 자포자기하여 식객들을 이끌고 닥돌하려고 결심했다. 그리고 좋은 계책이라도 들을까 싶어 후영을 찾았는데, 전 늙어서 못가겠으니 잘 다녀오세요는 반응이 나왔다.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신릉군이 허탈하게 무리를 이끌고 떠났는데 문득 '내가 후영을 얼마나 극진히 대접했는데, 아무런 계책이 없다손쳐도 사지로 가는 나를 뜯어말리지도 않는 건 뭔가 이상하다?'싶자 혼자서 후영을 찾아와 물었다. 그제서야 후영은 웃으며 계책을 알려줬다.

과거 안희왕의 애첩의 아버지가 살해당했는데, 원수를 갚아달라고 왕에게 졸랐으나 3년이나 지나도록 원수를 잡지 못했다. 그런데 그 원수는 다른 일로 신릉군의 사람과 원한과 시비가 붙은 모양인지 신릉군에게 이미 죽임을 당한 일이 과거에 있었다. 까마득한 옛일이고, 정작 신릉군은 그런 듣보잡 도적놈을 기억조차 못하고 있었지만 후영이 그런 과거사를 지금 알려주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 애첩은 신릉군을 일생일대의 은인으로 여기고 있었고, 항상 왕 곁에 있는 그녀에게 병부(兵符)[5]를 훔쳐오라고 부탁한 뒤 신릉군이 직접 위나라 군대를 이끌고 구원을 가게 한 것. 그래서 그녀에게 부탁하자 당연히 수락한다. 결국 계획대로 병부를 훔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당시 위군을 지휘중이었던 진비가 훔쳐간 병부를 보고도 명령을 듣지 않을 수도 있다고 판단, 주해를 데려가 진비가 군을 내주지 않는다면 그를 해치우게 하라고 조언한다.

주해는 "지금껏 답례를 하지 않았던 것은 그런 사소한 예의 몇번으로 신릉군의 큰 배려에 답하기에는 부족하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말로 목숨을 다해 그 은혜를 갚을 때다." 라고 말하고 신릉군과 동행한다. 예상대로 끝내 진비가 명령에 대한 의심을 풀지 않자[6] 주해는 소매 속에 숨겨둔 40근의 철퇴로 진비를 때려죽인다. 한마디로 위나라 신릉군은 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위왕을 속이고 위나라 장군을 죽였다. 그런데 진비는 나름대로 능력이 있는 장수였고 그를 따르는 추종자도 많았다. 그래서 진비를 죽인 일로 인해 진비의 유족과 추종자들은 신릉군을 증오하게 되고 이는 신릉군 죽음에 영향을 준다.

참고로 후영은 신릉군을 전송하며 말하기를 “신은 늙어서 종군하지 못합니다. 날짜를 계산하여 공께서 진비의 군중에 이르는 날 북쪽을 향해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겠습니다.” 했고 과연 그 날 후영이 자결했다고 한다.

2.3. 조나라에서

결국 신릉군은 정예병 8만을 이끌고 진나라 군대를 쳐서 조나라를 구원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지은 죄가 있는지라 감히 위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10년 세월을 조나라에서 보내게 된다. 이 때 신릉군은 모공과 설공이라는 왠 듣보잡들을 만나려고 초빙했지만, 이들이 응하지 않고 숨어살자 수소문해서 거처를 알아내고 평민으로 변장해서 의기투합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평원군은 자기랑 동급인 인물이 듣보잡들이랑 놀려고 저러자 그것이 부끄러워 부인(신릉군의 동생)에게 네 오빠 정신이 나간 것이 아니냐고했다. 이것을 그대로 오빠에게 전하자 신릉군은 정색하면서 쯧쯧, 나랑 동급이라는 인간이 참다운 선비로 위나라에까지 이름이 알려진 인재를 몰라보고 듣보잡이라 욕하냐? 난 이제 저 인간이랑 안 놀려니 떠나련다.했다.[7] 이에 식겁한 평원군은 바로 신릉군을 찾아가 사과했고, 이 일화를 알게 된 평원군의 식객 절반 이상이 평원군을 떠나 신릉군의 식객이 되었다고 한다.

이 조나라 망명 시절 약간의 흑역사가 있었으니 이른바 봉작사건. 군주의 명을 어기는 것을 개의치 않고 군대를 이끌고 구원해준 신릉군은 조나라에서 거의 특급스타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의 일이지 진의 침입이 그치고 나니 신릉군은 붕뜬 위치가 되어버린다.[8] 할일없이 밥만 축내며 지냈는데, 조왕과 평원군은 신릉군의 눈치를 보아 '그래도 국가적 은인인데 4개의 읍을 신릉군에게 주어 작은 제후로라도 행세할 수 있게 해주자' 며 봉작건을 추진했다. 이 소식을 듣고 식객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던 신릉군은 마땅히 받아도 될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를 들은 식객 중 한명이 조나라에서는 영웅이 맞지만 조국인 위에서는 장군을 죽이고 군사를 탈취한 역적이지 않냐고 면박을 주었다. 이에 신릉군도 잠시 놓았던 정신줄을 다잡고 식객에게 사과하였다.

2.4. 진군을 다시 격파하다

조나라를 구하고 머무는 동안 진은 계속 강대해진다. 하지만 사실상 위와 관계를 끊은 신릉군은 조나라 밖으로 나가기 어려웠고 진나라의 성장을 지켜보기만 한다. 이후 진 소양왕이 죽고 여불위가 진나라 승상이 되며 장양왕(莊襄王)[9]이 즉위하면서 동주를 멸망시키고, 위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이에 안희왕은 부랴부랴 동생 신릉군을 데려와 진군을 막으려 했다. 안희왕과 위나라에 감정이 좋지 않았던 신릉군은 위나라로 돌아가지 않으려 했으나 모공과 설공의 설득[10]에 정신이 번쩍 들었고, 위나라 상장군 겸 합종군 총사령관을 맡아 제후들의 지원군을 이끌어[11] 진나라 명장 몽오를 상대로 하외에서 대승을 거두고 함곡관까지 쫓아내버리는 기염을 토해낸다.

2.5. 말년

그 뒤 진나라에서 위나라 병권을 쥔 명장 신릉군을 쫓아내기 위해 정치공작을 벌인다. 황금 만냥을 들여 뇌물을 지원해 여러 예전에 살해당한 진비의 식객들을 이용하는 등 여러가지로 모함했고, 안희왕은 군사적 재능 등 여러 부분이 뛰어났고 다른 국가들에도 대협으로 인정받는 동생 신릉군이 자리를 뺏을까봐 늘 불안해했다. 결국 안희왕은 신릉군의 위나라 상장군 직위를 파직하고 병권을 빼앗는다. 그리고 직위와 병권을 뺏겨 상심한 신릉군은 주색잡기에 빠져 4년 뒤 병사했다. 사기열전에 의하면 사인은 술 중독. 아이러니하게도 신릉군을 해임한 안희왕도 신릉군이 죽던 해에 같이 죽는다.

이후 위나라는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신릉군 사후 18년만에 멸망했다.

신당서에 보면 당나라 때에 재상을 여러 명 배출했던 경조 왕씨가 그의 자손이라고 한다. 본래 위씨지만 위나라에게 버림받고 그 성씨는 신물이 나서 왕씨로 바꾸었다고 전한다.

3. 여담

전한 고조 유방이 이 신릉군을 그렇게 좋아했다고 한다. 신릉군이 죽은 뒤 나라도 멸망하고 묘지가 황폐해지자 따로 명령을 내려 돌보게 했다.

일본의 역사 소설가 시바 료타로는 유방이 유달리 신릉군을 좋아했던 이유가 다른 전국사군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계산적인 면보다 협객의 면모가 강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하였다. 아닌 게 아니라 식객을 긁어 모아서 평원군을 구하러 간다든지 그 뒤에 처벌을 감수하고라도 진비를 죽이고 병권을 얻은 것 등을 보면 그럴듯한 추측이다. 확실히 유방도 협객으로 시작했으니 말이다.

위 추측 외에 그냥 단순하게 신릉군 이야기를 가장 많이 접했기에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도 있다. 유방의 고향인 풍읍은 춘추시대 송(宋)의 땅으로 유방이 태어날 무렵에 초(楚)의 땅이 되었지만, 위치에서 알 수 있듯이 초의 중심 지역보다는 위(魏)의 국경 지역과 훨씬 가까운 지역이었다. 거기에 유방의 동생의 후손인 전한의 학자 유향의 말과 그를 인용한 한서의 기록에서는 유방의 선조는 위가 대량으로 천도할 기원전 4세기 중반 무렵 진(秦)에서 위나라로 포로로 끌려 갔다가, 이후 신릉군과 동시대의 사람인 유방의 아버지 대에 이르러서야 풍읍에 정착한 것으로 전하고 있는데, 집안의 출신 내력을 감안하면 유방은 다른 나라의 인물보다도 위의 인물, 신릉군의 일화를 많이 들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무엇보다 평민이었던 젊은 시절부터 신릉군의 식객이었던 장이를 찾아가 교분이 있었다고 하니, 신릉군에 대한 일화를 다른 전국 사공자들보다 많이 접했을 것은 거의 확실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혹은 앞서 설명한 유방 집안의 출신을 생각하면, 어쩌면 유방이 고향 풍읍에서 장이가 있었다던 외황(外黃)까지 굳이 그를 찾아간 이유는 그가 신릉군의 식객이었기 때문이었을 수 있다. 창천항로로 유명한 킹곤타의 만화 달인전에서는 아예 소년 시절 유방이 제후군을 이끄는 신릉군 밑에서 잠깐 종군한 것으로 그려진다. 그 과정에서 장이와 인연을 맺게되고, 신릉군을 엄청나게 존경하게 되는 모습을 보인다.

유방이 제위에 오르고 난 뒤에 전국을 돌다가 신릉군의 묘지에 들렀다거나, 옛 사람을 이야기할때 이 신릉군 이야기가 그렇게 많이 나올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사서에 전할 정도. 실제로 이한이 지은 도덕적 양식에 대해 집필한 서적인 몽구에서는 유방이 국토를 둘러보는 중에 "아 이 근처에 신릉군의 무덤이 있었지!"하면서 일정을 바꿔서 그리로 향했다는 이야기를 전할 정도. 사마천은 다른 사군자들의 열전을 '맹상군열전', '평원군열전', '춘신군열전'이라고 제목을 붙였지만 신릉군의 열전만은 '위공자열전(魏公子列傳)'이라고 붙였다.[12] 공자들 중에서 신릉군만이 깊은 산과 계곡에 사는 사람을 만나고 신분이 낮고 천한 사람들과 사귐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은 것이 일리가 있고 그의 명성이 천하 제후들의 으뜸인 것도 결코 헛소문만은 아니었다고 평가했다. 이는 지혜롭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이치도 모르고 장평대전으로 나라 망하게 할 뻔했다고 비판한 평원군, 빈객을 대접하기 좋아했다고 했지만 맹상군의 고향인 설에 난폭하고 사나운 젊은이들이 많다고 돌려서 비판한 맹상군, 지혜롭지만 마지막에는 결단력이 모자랐다고 평가한 춘신군과는 다른 평이다.

여담으로 신릉군의 무덤은 수백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농부가 밭을 가는 밭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조선 중기의 문신 신흠이 이런 시조를 지었다.
술 먹고 노는 일을 나도 왼 줄 알건마는
신릉군 무덤 위에 밭 가는 줄 못 보신가
백 년이 역초초하니 아니 놀고 어찌하리

신릉군의 문객중에는 초한쟁패기에 활약한 장이가 있는데, 신릉군의 문객이었다면 초한쟁패기에는 70~80대이다.

병법에도 능하였는지 식객들이 진상한 병법서들을 종합해 위공자병법이라 이름지어 냈다. 삼국지 10에서 통솔력 수치를 3 올려주는 아이템으로 등장하기도 했는데 삼국지 11에서는 삭제됐지만, 삼국지 12에서 다시 부활.

4. 미디어믹스

2001, 2018년 드라마 심진기에서는 위나라의 권력자로 등장한다. 2018년 작품에선 조나라, 한나라와 내통하여 형의 아들인 태자를 암살했다. 충신 용양군을 모함하여 실각시키고 섭정에 올라 조정을 장악했다. 위왕이 태자암살의 진실을 알고 신릉군을 불러 꾸짖었으나 신릉군은 '무능한 태자는 죽는 것이 낫다'라고 말하며 정당화했고 위왕이 친위대를 부르자 친위대들은 위왕이 아니라 신릉군의 말에 복종했다.

2012년 중국 드라마 호부전기에서는 남자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애인을 형에게 빼앗긴다.

2015년 중국 드라마 미월전 69화에 보면 신릉군이 진나라에 사자로 가서 미월과 대면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춘신군과 마찬가지로 훨씬 후대의 사람이라 드라마에 나오는 내용은 가상의 설정이다.

4.1. 삼국지 시리즈

파일:external/san.nobuwiki.org/1058.jpg
삼국지 12, 13, 14
삼국지 12 파워업키드에서 고대무장에서 등장했다. 능력치는 통솔력 89/무력 69/지력 85/정치력 86으로 전체적으로 쓸 만하고 전법이 조조의 고유 전법인 위무지강이다. 위무지강을 가지고 있는 무장은 조조와 위무기뿐. 그런데 위무지강은 글자 그대로 읽으면 '위나라 무력의 강함'을 뜻하고 신릉군 역시 위나라의 공자이긴 하지만, 사실은 '위나라 무제의 강함'을 뜻하는 것으로 조조 개인을 뜻하는 것이지, '위나라 무력의 강함'을 뜻하는 게 아니라서 신릉군이 가지고 있기는 맞지 않다. 일러스트에서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호부(병부)인데, 위에 언급된 호부를 탈취한 일화를 나타낸 것.

삼국지 13에서도 당연히 등장한다. 능력치는 전작과 같은데 중신특성이 없다. 아이템이나 관직으로 90대를 커버 할 수 있으니 90대를 찍어줘서 군사/군무/내정 어느 중신쪽이든 굴려서 활용 가능하게 만들 수는 있다. 전법은 "전작의 위무지강에 맞지 않는다"라는 항의적으로 들렸는지 제작사 쪽에서는 결사지휘로 바꾸었다. 특기는 상업3 / 훈련9 / 순찰6 / 인덕5 / 위풍5 / 연전8 / 공성8 / 귀모3.

4.2. 달인전

킹곤타의 만화 달인전에서는 무력으로 특화된 협객이자 무인으로 등장한다. 기본적으로 무력이 아주 뛰어난 무인이지만 동시에 식객을 다루는 능력도 뛰어나다. 초의 재상인 춘신군, 조의 재상인 평원군과 달리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군사를 부리는 편이지만 왕족이다보니 중반부부터는 모습을 잘 드러내지 못한다.

처음 등장할때는 자면서 여자들과 어울리는 잠꼬대를 하는 모습으로 등장해 호색한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잠을 워낙 자주 자기때문에 옆에있던 식객인 채요가 틈만나면 깨우거나 눈을 억지로 붙잡고 뜨게 하는 등 허당스러운 면모도 보인다. 맹상군의 소개장을 들고온 붉은 삼협을 처음 만나는데, 맹상군의 소개장에 거창한 무언가가 쓰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인사말 정도만 쓰여있었기에 처음에는 나름 지켜는보지만 크게 신경쓰지는 않는다. 허나 당시에 정신적인 존재감이 있던 주를 개무시하는 무명의 발언이나 이후 어떻게든 군을 이끌고 나와 낙양에 몰려온 진을 몰아치는 붉은 삼협의 모습을 보며 그들을 본격적으로 주시하게 되고 그들을 전폭 지지하게 된다. 특히 자신을 암살하러 온 경골을 붉은 삼협이 도와준 덕분에 몰아내게 되고 이후 장단이 장자의 손자라는 말까지 듣고난 뒤에는 허풍 뿐이던 이들을 진짜 전국을 뒤흔들 사내들로 만들어보자며 채요를 통해 수련을 도와준다. 자신은 진에 맞설 군을 양성하기 위해 위로 돌아가고 이후 만남을 약조한다.

위에 들어간 이후에는 여러 사건들이 일어남에도 왕족이라는 이유를 비롯해 여러 정치적인 요소들 때문에 제대로 나서지 못한다. 그러다 끝내 장평에서 40만이 생매장 당했다는 소문에 넋을 잃고 허탈해하다가, 장단의 촌철살인에 자신이 할 일을 깨닫고 조를 위해 몸을 일으키기로 한다. 조를 구출하러 출격하며[13] 다시금 전선에 참여하고, 천지를 진동시키는 호령과 단순해보이지만 강력한 무력으로 조를 구원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위의 장군 진비를 죽이고 군사를 빼앗아 조로 향한것 때문에 위로 돌아갈수 없다며 조에 오랫동안 머문다. 그렇게 허송세월을 보내던 와중 위가 진에 의해 위기에 처하고, 진 소양왕이 죽고 매부 평원군이 마지막 불꽃을 맡기자 무언가 깨달은 듯 위로 돌아간다. 진을 죽을때까지 공격하겠다며 위왕에게 군사를 부탁하나 거절당하고 감옥에 갇히나, 진이 연달은 왕의 죽음으로 흔들리자 반진의 맹주로 지명받아 위를 대표해 군사를 이끌게 된다. 이때 몽오, 왕기 등에게 천하의 힘을 받은 무인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그 위엄을 보인다. 일찍 죽은 맹상군, 군사적 능력은 없던 평원군과 특기가 설법인 춘신군에 비해 전형적인 무인 타입이라 활약하는 모습이 꽤 많다. 한 고조 유방이 신릉군을 매우 좋아했었다는 것을 반영해서인지 유방이 어린 나이에 신릉군의 군사에 종군하여 신릉군에게 감동받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14]

중원 최후의 영웅, 하늘의 무를 받은자 라고 불리며 엄청난 포스를 내뿜고 진을 함곡관까지 밀어붙이지만 군사인 채요, 장군 조관, 9대 도척 현수 등을 잃고 몽오에게 막혀 끝내 함곡관을 뚫지 못한다. 몽오의 이마를 찌르는 공격을 해내지만 몽오를 베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진의 공성을 바라보게 된다.

그렇지만 여전히 진은 어수선한 상황이었고 얼마 안가 장양왕까지 사망했다는 소문이 들려오며 각국에서 수많은 친서들이 오자 신릉군 일행은 다시 마음을 다잡아 진을 공격할 의사를 펼친다. 허나 이상하게도 각종 병법과 병서, 친서 등은 오면서 정작 싸움에 필요한 공성용 병기는 오지 않는다. 게다가 한의 왕은 신릉군의 승리를 축하한다며 대충 이쯤에서 만족한다는 의미의 서한을 보내고, 조의 왕은 똑같이 축하하며 방난을 장군으로 삼겠다고 귀국을 요청한다. 춘신군은 초는 이제 국력을 보존하겠다고 빠지겠다는 초의 왕의 의견을 대신 전하며 사과를 표한다. 한, 초, 조 모두가 빠지게 된데다 원래부터 제는 그다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연합군은 말 그대로 해산될 위기에 처한다.

한의 친서 내용을 듣고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안 신릉군에게 조를 구원하러 가기 위해 죽였던 진비의 동생이 후임 사령관으로 등장해 귀국을 명한다. 왕명을 들은 신릉군은 드디어 진을 박살낼 기회가 왔는데 자신의 시간과 불꽃은 여기까지 임을 직감하고 한탄한다.[15] 하지만 동시에 이것이 자신이 저지른, 진비를 죽인 인과의 결과이자 막을 수 없는 흐름임을 깨닫고 붉은 삼협과 장이, 방난과 항연 그리고 유방에게 천하와 뒤를 맡긴다는 말을 남기고 자신은 물러남을 택한다.

연합군 해산 이후 한동안 등장하지 않다가, 조의 염파가 왕명에 따라 위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붉은 삼협이 상황을 중재시키기 위해 신릉군을 만나야한다며 간접 언급된다. 하지만 역사처럼 면회를 거절하고 진과의 전쟁에 출격 명령에도 병을 핑계로 나서지 않는다는 얘기로 면회를 거절당한다. 이 말을 전하는 장이조차 신릉군을 만나보지 못하는지 주색에 빠진거냐는 무명의 질문에 아마 그럴것이다 라며 말을 흐린다. 신릉군이 모든것을 포기한듯한 모습에 붉은 삼협은 면회를 포기한다. 직후 위로의 침공을 명령한 조왕이 죽고 새로 즉위한 조왕이 염파를 경질하자, 염파는 위에 망명한다. 이 소식을 들은 위왕은 오히려 신릉군을 왕으로 추대하기 위한 것 아니냐며 염파를 만나지 않고, 염파와 붉은 삼협은 실망하며 돌아가다 성장한 유방을 만나게 된다.

유방은 신릉군이 자신을 아꼈던 것을 언급하며 신릉군의 병문안을 왔다고 전하지만 거절당하고, 직후 장이에게서 신릉군의 사망을 전해 듣게 된다. 신릉군이 죽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위왕도 사망한다.

묘사를 보면 신릉군이 비록 직접 나서진 않았지만 그를 만나기 위해 온 붉은 삼협 덕분에 염파가 망명을 결정하게 되고, 또 유방 일행을 만나게 되었기에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역할을 다 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유방이 찾아온 직후에 사망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애초에 신릉군이 그 전에 사망했다면 붉은 삼협이 위로 올 일도 없었고 그랬다면 염파와 유방을 만나지도 못했을테니까.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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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부분은 맹상군이 실각했다기보단 맹상군의 세력이 실각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맹상군은 이보다 이른 기원전 279년에 사망했기 때문. [2] 사기열전에는 나랏일을 맡기려 하지 않았다고 하기도 하는데 훗날 신릉군을 몰락시킨게 안희왕임을 감안하면 이 때의 여파가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3] 조나라를 도우려는 국가에게는 백기나 진의 군대를 보내겠다고 협박한다. 그만큼 당시 진의 위세는 다른 6국을 압도했다. [4] 물론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위나라, 한나라는 약한 편이고 초나라는 당장에 무너뜨리기엔 땅이 너무 넓었다. [5] 옛날 군대를 동원할 때 사용한 신표. 평상시 왕과 지휘관이 반쪽씩 나눠서 보관하다가 동원령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맞춰본다. 범 모양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아서 호부(虎符)라고도 한다. [6] 진비 입장에서는 그도 그럴것이, 얼마 전까진 왕명으로 절대 조의 국경을 넘어가지말고 그냥 관망하라 엄명을 내려놓곤, 며칠 되지도 않아 왕의 이복동생이 달랑 시종 몇 명 대동해와서는 수만대군의 지휘권을 넘겨달라는데...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7] 당장 맹상군만 해도 닭 울음소리 내는 식객과 개 흉내 내는 식객과 사기꾼 식객덕에 목숨을 구했다. [8] 전국시대는 걸출한 인물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다른나라 출신이어도 재상으로 임명되어 국정을 맡기는 일이 흔했는데 신릉군이 활약한 당시 전국시대 후반기에는 그러한 성향이 옅어져 가고 자국 출신 재상을 쓰려는 분위기로 변화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복형제인 위왕을 속이고 온 신릉군을 대뜸 조나라 관직에 임명하면 위와 조의 관계면에서도 좋은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래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어느정도 대우는 당연히 받았겠지만 10년을 조나라에 머물면 조나라 입장에서도 좀 곤란하긴 했을 것이다. [9] 시황제의 아버지. 오랜 세월 조나라에서 인질 생활을 했다. 자세한 내용은 여불위와 장양왕 항목 참조. [10] 모공, 설공 曰 : 지금 공께서 조나라에서 대접받는건 오로지 위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진나라가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종묘를 불태워버려도 이렇게 지내실 수 있을 것 같습니까? [11] 당시 신릉군은 조나라를 넘어 나머지 제후국에서도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공자이자 대협으로 칭송받으며 전국구 스타였다. 그래서 신릉군이 합종군 총사령관을 맡아만 준다면 연, 제, 초 등의 다른나라들은 기꺼이 군사를 내어 주었다. 도움을 받은 조나라야 더 말할것도 없었고. [12] 그나마 그의 직위를 따서 별칭으로 신릉군열전이라 부르기도 하나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는 위공자열전이다. 이렇게 위공자라 붙인 만큼 다른 이들과는 달리 신릉군을 그냥 '공자'라 칭한다. [13] 이 과정에서 위가 진과의 관계를 염려해 보여주기 식으로 보낸 군사 10만을 이끌던 진비를 죽이게 된다. 신릉군 본인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으나 그의 식객이 진비를 죽인다. [14] 평원군이 죽기 직전 본 꿈에서 신릉군이 진의 도읍을 태워버리는 모습을 보이긴 했는데, 실제로는 진 멸망 훨씬 전에 죽었다보니 실제로 신릉군이 진을 불태웠다기 보다는 평원군이 신릉군에게 준 생명의 불꽃이, 이어져서 신릉군의 밑에서 싸운 유방에게 전해져 끝내 진을 멸망시켰다는 것을 표현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15] 이는 진에 있었던 이사의 계책으로, 진비의 유족과 관련자들을 뇌물로 섭외해 계속해서 위왕에게 신릉군이 야심을 가지고 왕이 될 것이라며 소문을 퍼트리게 했다. 어찌되었든 위왕과 신릉군은 형제 관계이기에 이러한 책에 대해 여불위는 인륜을 건드리는 책이라며 혐오하지만 진시황은 아주 만족하며 즉시 그러한 계책을 전국 모두에 뿌리라며 명한다. 추가적으로 이때 이사는 염파를 실각시킬 방법도 있다며 진시황에게 진언한다. 그래서인지 얼마안가 염파 역시 애매한 위치에 처하다가 결국 조를 떠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