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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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대군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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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조선 덕종의 왕자
월산대군 | 月山大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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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대군묘 전경 | |||
출생 | 1455년 1월 14일[1] | ||
한성부
서부 황화방
정동
명례궁 (現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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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489년 1월 31일[2] (향년 34세) | ||
한성부
서부 황화방
정동
연경궁 (現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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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산16-35[3] | ||
재위기간 | 조선 월산군 | ||
1460년 4월 3일 ~ 1471년 2월 20일 | |||
조선 월산대군 | |||
1471년 2월 20일 ~ 1489년 1월 3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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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본관 | 전주 이씨 | |
휘 | 정( 婷)[4] | ||
부모 |
부왕
덕종 모후 소혜왕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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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 2남 1녀 중 장남 | ||
배우자 |
승평부대부인
순천 박씨[5] (昇平府大夫人 順天 朴氏, 1455 ~ 15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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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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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유교 ( 성리학) | ||
자 | 자미(子美) | ||
호 | 풍월정(風月亭)[7] | ||
군호 |
월산군(月山君) → 월산대군(月山大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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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효문공(孝文公) |
1. 개요2. 인물상3. 생애4. 사후5.
가계도 및 가족과 후손6.
월산대군 묘와 신도비7.
친동생인 성종과의 우애8.
월산대군의 시(詩)9. 평가10. 월산대군 태실11. 관련 작품12. 관련 사진13.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월산대군(月山大君)은 지위가
태백(泰伯)이나
중옹(仲雍)보다도 존귀하고 연릉계자(延陵季子)나 사어(史魚)보다도 높고 고귀한 뜻을 지녔는데
성묘(成廟)로부터 유난히 깊고 형제간의 우애로운 보살핌을 듬뿍 받았었다. 그리고 주옥같은 시문(詩文)과 필체(筆體)가 강호(江湖)의 풍월(風月) 사이에 고상한 운치가 애연히 넘쳐흘렀는데
아조(我朝)에 물론 훌륭한 종친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월산대군이 가장 으뜸이었다고 할 것이다."
정조 일성록, 정조 22년 8월 29일 경신 기사中
조선 전기의 왕족이자 시인.
세조의 장손이자 추존왕
덕종(의경세자)과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의 장남이며
성종의 친형이다.[8]정조 일성록, 정조 22년 8월 29일 경신 기사中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종학에 들어가서 배웠고 경사자집을 두루 섭렵했으며 성품은 침착 결백하고 술을 즐기며 산수를 좋아했다고 한다.
'월산(月山)'이란 군호와 '풍월정(風月亭)'이라는 호 답게 일생을 자연 속에 파묻혀 부드럽고 율격이 높은 시를 쓰면서 풍류객으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대군이었으며 지극한 효우 정신과 시문학적 소양을 인정받아 효문(孝文)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특히 시와 문장이 명나라에까지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월산대군은 성종에 대한 충성과 우애가 매우 깊었으며 동생에게 부담이 갈만한 교우 관계나 정치적 행동을 극도로 조심해 후대 종친들의 모범으로 받들어지는 인물이다.
전주이씨 월산대군파의 파시조로 묘소와 사당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에 있다.
2. 인물상
의경세자와 세자빈 한씨의 장남이자 세조의 장손으로 태어나 조부의 사랑을 받으며 궁중에서 자랐다. 1460년(세조 6) 7살에 월산군(月山君), 1468년(예종 1) 현록대부(顯祿大夫)에 책록됐다. 1471년(성종 2) 월산대군(月山大君)으로 진봉되었으며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 2등이 가자됐다.하지만 이런 월산대군에게도 최대 아킬레스건이 있었는데, 몸이 심하게 약한 약골에 권력욕도 없었다는 것이다. 당장 아버지 의경세자부터 젊은 나이인 19살 때 요절, 숙부 예종도 20세의 나이로 요절, 예종의 정비 장순왕후도 세자빈 시절 아이를 낳다가 산후병으로 17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그렇게 해서 태어난 예종의 장남 인성대군도 고작 1살 때 죽는 등, 마치 조카를 죽이고 그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세조의 적자 계열 직계후손들은 죄다 일찍 죽었다. 비록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월산대군 본인조차도 결국 훗날 34세에 요절하고 말았으며 동생 성종 또한 월산대군보다 겨우 3년 오래 산 37세에 요절하고 말았다.
그런 분위기라 훙서한 예종의 후계자로 자신보다 건강하고 더 뛰어난 동생을 택한 할머니 정희왕후의 결정을 전혀 원망하지 않고 아버지 의경세자의 적장자이자 봉사손으로서 자신의 삶을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사가(史家)들이 중국의 태백(泰伯)·중옹(仲雍) 형제에 버금간다고 칭송했다. 태백[9]은 주나라 황위 계승 서열의 제일 위에 있었지만 황제 자리를 조카에게 넘기고 오의 제후로서 나라를 떠받쳤다.
그는 서책을 가까이 하고 문장에 뛰어났으며, 교우 관계를 함부로 맺지 않고 합정동 망원정이나 고양 북촌에 별장을 두고 야심없이 풍류를 즐겼다. 동생 성종과도 시와 편지도 자주 주고 받았다.
월산대군의 요절 직후 성종의 명으로 풍월정집의 서문을 쓰게 된 성현과 신종호는 월산대군의 품성과 시적 재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10]
문효공(文孝公)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에 임금께서 그가 남긴 시를 모아서 시집을 만들게 하고, 신(臣)으로 하여금 서문을 지어 그 첫머리에 얹게 했다. 신은 생각하건대 진기한 나무를 기르는 사람은 한 치 정도의 뿌리를 얻어가지고 반드시 거기에 흙을 북돋아 주며 물을 뿌려 주며 햇볕으로 따뜻하게 쬐어준다. 그렇게 해야만 살아나서 무성할 수 있으니, 이것은 그 뿌리가 붙어 있는 곳이 얕기 때문에 반드시 인력(人力)으로 이를 보호하고 가꾸어 주어야 된다. 그러나 깊은 산 큰 골짜기 속에서 난 것은 북돋우거나 물을 주거나 볕을 쪼여주지 아니하여도 저절로 가지와 잎이 피어나서 마침내 위로 푸른 구름을 건드리며 그 끝을 볼 수 없을 만큼 자란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그 뿌리가 깊게 박히고 원기가 충실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재주도 이와 마찬가지다. 일반 사람들은 공부를 하는데 부지런히 정신을 쓰며 걱정을 거듭하여 실컷 고생을 해가면서 공부에 힘을 드린다. 그렇게 한 뒤에 문장을 짓게 되는데, 수식을 가하며 기묘하게 되기를 힘써도 그의 기상은 어딘지 천근(淺近)한 병을 면하기가 어렵다. 왕공과 귀인은 그렇지 아니하여 그의 거처하는 지위가 기운을 나게 하여 몸을 기르는 것이 저절로 틀을 크게 한다. 있는 곳이 높으므로 보는 것이 커서 학문에 힘을 들이지 아니하여도 제대로 여유가 생기며, 공부를 힘쓰지 아니하여도 저절로 순수해져서 넉넉히 남는 힘을 갖고 있으므로 그 공부가 성취하기가 쉽다. 그러나 문장의 이름이 곤궁한 사람에게서 많이 나오며 부귀한 사람에게서는 나오지 않는 것은 , 곤궁한 사람만이 홀로 공교하고, 부귀한 사람은 홀로 능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부귀와 번화의 향략에 빠져서 미처 공부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한(漢)이 일어날 적에 하간헌왕(河間獻王)이 덕을 닦고 옛것을 좋아하여 사방에서 학문이 있는 학자를 맞아 들여서 그들과 더불어 학술을 강론했으며, 또한 삼옹(三雍)의 궁(宮)에 대책(對策)을 바쳤고, 동평왕 창(東平王蒼)은 어릴 적부터 경전을 좋아하여 문장을 지은 것이 전중(典重)하고 고상하여 그가 지은 서(書)ㆍ기(記)ㆍ부(賦)ㆍ송(頌)ㆍ가(歌)ㆍ시(詩)가 당시 학자들의 수록한 바가 되었으니, 그들의 문장과 사업은 모두 양한(兩漢)의 으뜸이 되었다. 그러나 이름을 좋아하고 자기를 선전한 결점은 아는 사람들이 이를 비난했다. 공은 왕실의 아들이며 골육의 지친이다. 예의로 몸을 단속하며 행동을 예법에 맞추었고, 복잡하며 사치스러운 것을 버리고 검약한 생활을 하려고 힘썼다. 방문객을 사절하고 조용히 옛 서적을 연구하여 이를 표현하여 짓는데 생각나는 대로 곧 글을 이루었다. 이제 이 시집을 보면 큰 작품은 화평스러우며 작은 시편은 고상하고 건전하여 법칙을 맞추려고 애쓰지 아니했는데도 틀이 저절로 잡혔고, 수식하려 하지 아니했는데도 형식이 꼭 들어 맞았으며, 솜씨를 부리려 하지 않았는데도 문채가 찬란하고, 견제를 가하지 아니하여도 한군데도 군색한 곳이 없다. 그는 맑고 심오하며 온자하여 하나도 부귀한 사람의 태가 없고 깨끗이 세속을 초월한 듯한 감이 있다. 스스로 이치를 분명히 보고 사물의 정수[精]을 본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으랴. 비록 늙은 학자로서 큰 솜씨로 문학계에 이름을 가진 사람이라도 이를 붙잡고 올라 갈 수 없을 정도이니, 저 하간헌왕이 동평왕 같은 무리야 어찌 어깨를 겨누어 비교할 수 있으랴. 세상에 몸이 부귀에 묻혀 있으면서 눈으로 글 한 획도 알지 못하여 머릿속에 들어있는 것이 없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오래 살았다 할지라도 생명은 짧은 것이다. 공은 학문이 풍부했고 문장과 인품이 일대에 이름을 독차지하여 널리 퍼져서 찬란히 빛났으니, 몸은 비록 없어져서도 없어지지 아니한 듯 남아 있으니, 비록 인간의 연령으로는 일찍 죽었다 할지라도 생명으로는 오래 살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위로는 국가의 문화를 장식하고 아래로는 민간의 문학에 이바지했으며, 아(雅)와 송(頌 궁중의 음악)을 지어서 빛나며 명랑히 역사에 남아서 없어지지 아니할 터이니, 뒷사람의 입에 음미 감상되는 것이 어찌 얕다고 할 수 있으랴. * 성현(成俔) |
문효공(文孝公)이 불행히 일찍 세상을 떠나니 우리 전하께서는 특별히 천륜(天倫)의 슬픔을 가지시고 슬픔을 억제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그 극진함을 베풀지 아니하심이 없었다. 평생에 지은 시 약간 편을 갖다가 편집하여 이를 전하게 하시니, 그것은 영원한 세대에까지 밝게 유전하려 하심이다. 지극하시도다. 하늘과 땅은 끝이 없으니, 사람이 그 사이에서 나고 죽고 오래 살고 일찍 죽고 하는 것이 비록 길고 짧고 더디고 속함이 같지 못함은 있으나, 그것을 천지가 끝이 없는 것과 비교하여 본다면 다만 한 순간에 불과한 것이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라 하지만, 하루아침에 별안간 초목금수와 마찬가지로 없어져 버리고 들릴[聞]것이 없다면 어찌 슬프지 아니하겠는가. 이러므로 옛적의 군자는 혹은 덕을 세우고[立德], 혹은 공을 세우며[立功], 혹은 말을 세우[立言]되, 나의 심사(心思)와 재력(才力)의 미치는 바로 인하여 없어지지 아니할 자료를 만들어서, 뒷세상으로 하여금 모두가 그의 이름을 듣고 흠모하며 영원히 감탄하여, 그의 용모를 대하매 그의 음성을 들으며, 서로 더불어 그의 거처하던 자리에서 부앙(俯仰)하면 돌아다니는 듯한 감을 가져서 딴 세상 사람인 줄을 모르게 했다면, 이런 사람은 비록 천지가 끝나고 만세에 이르도록 없어지지 않는다 하여도 가하다. 그런즉 일시의 길고 짧은 것이 족히 문제삼을 것이 못 되며, 이 문효공(文孝公)은 말을 세운[立言] 군자라고 할 수 있도다. 공은 천품이 지극히 높아서 비록 부귀한 가운데서 생장했으나, 호화스러움에 마음이 팔리지 아니하여 풍류와 여색 같은 향락에 대하여는 담박했다. 책 속에 들어 앉아서 도학을 깊이 연구했으며, 문장을 지은 것이 간결하며 고아(古雅)했고, 더욱 시에 대하여 힘을 많이 썼다. 그의 시는 맑으면서도 차지[寒] 아니하며, 담박하면서 메마르지 아니하여, 자연으로 된 옥[天球]으로 손질을 하지 아니하여도 순수한 빛을 가릴 수 없으며, 주현(朱絃)의 소리로 다루지 아니하여도 태고(太古)의 소리가 저절로 있는 것과 같았다. 이를 도연명(陶淵明)ㆍ사조(謝眺)ㆍ한유(韓愈)ㆍ유종원(柳宗元)의 대열에 끼어 놓는다 하더라도 누가 먼저인지 누가 뒤인지를 구별하지 못할 것이다. 비록 그러나 공의 시를 읽고 다만 이것을 음향이나 음률 사이와 말과 글자의 말단적인 것에서 찾아 보고, “나는 공의 시를 다 알았다.” 한다면, 참으로 어찌 공의 시의 취지를 알았다 할 수 있으랴. 대개 3백 편이 비록 징계하고 느끼는 것이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그것이 세상의 교화를 붙들고 백성의 본심을 도탑게 함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니, 시가 없어진 지 오래다. 한(漢)의 가요(歌謠)와 위(魏)의 시(詩)에서 제(齊)ㆍ양(梁)의 옥대(玉臺)와 당(唐)ㆍ송(宋)의 서곤(西崑)과 강호(江湖)가 복잡하게 교대하여 일어났으나, 모두 글자를 가지고 정신을 피로하게 하며 힘을 쏟았으나, 그 의미를 따지면 모두 쓸데없고 부질없는 말뿐이었으니, 시의 도가 극히 곤난한 지경에 빠졌다. 문효공은 왕실의 존귀함으로 임금의 은혜를 가까이 받들어 붓과 벼루로 모시며 시문을 지으셨으니, 비유하건대 규(奎)와 벽(璧)이 서로 빛나는 듯, 훈(壎)과 지(篪)를 교대로 연주함과 같아서 글자 한 자 말 한마디라도 전하의 지극하신 우애를 형용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후일의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깊이 감상한다면 왕성하게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바가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런즉 그것이 세상의 교화와 백서의 윤리에 있어서 어찌 작은 도움만이 되리요. 말의 정(精)한 것이 시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그 시는 또한 족히 세상의 교화를 붙들고 백성의 본심을 도탑게 하게 되니, 곧 공의 세워 놓은 것이 얼마나 많는가.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 또 슬퍼할 것이 무엇이랴. 삼가 서(序) 한다. * 신종호(申從濩) |
월산대군은 새로운 책이나 알려지지 않은 글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비싼 값을 주고서라도 기어이 구입하고야 마는 열성적인 장서가(藏書家)였다.
지은 시 중 일부는 국조시산(國朝詩刪), 동문선(東文選), 여지승람(輿地勝覽), 대동시림(大東詩林) 등에 백여 편의 시가 실려 있다. 또한 시들 중 일부는 중국의 전우산열조시집(錢虞山列朝詩集)[11]에도 수록됐다. 서화(書畫)에도 조예가 깊어 성종은 손수 그린 사군자를 보여주고 차운(次韻)[12]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리고 성종은 월산대군이 세상을 떠나자 형이 생전에 지었던 시를 한데 모아서 풍월정집(風月亭集)을 간행하게 했는데, 이 시집은 조선 중기 이후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시강원의 교재였으며 근대에 와서는 한학자들의 필독 시집이라고 한다.
1488년(성종 19) 월산대군이 죽고 성종이 화공에게 형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명했는데,
"내가 살펴보건대 형은 산천의 간기(間氣)를 받고 꽃다운 자질이 있어 풍의(風儀)가 빼어나게 수려하고 지조가 우뚝하게 출중하니 진실로 군자다운 사람이다. 형의 용모는 성정(性情)에 근본 했으니 엄숙한 모습은 옥처럼 빛나고 철인처럼 사색하여 순수한 자태가 핍진하고 운무가 활짝 갠 듯하며 빛나는 별을 보는 듯하다. 옥호의 가을 이슬 같고 난초처럼 빛나서 맑고 밝아 볼만하네."
라고 했다. 성종이 월산대군의 용모를 묘사한 시를 남겼는데 다음과 같다.雪作精神玉作容(설작정신옥작용)
흰 눈이 맑은 정신이 됐고 옥이 얼굴이 됐네
玲瓏庭院弄薰風(영롱정원롱훈풍)
영롱한 정원이 훈훈한 바람과 노닐며[弄]
肯隨桃李媚眷色(긍수도리미권색)
복숭아 자두 색깔따라 아름답게[媚] 물들었네
暗許氷霜老化公(암허빙상로화공)
보이지 않는 혹시[許] 얼음과 서리가 공을 늙게 했는가
흰 눈이 맑은 정신이 됐고 옥이 얼굴이 됐네
玲瓏庭院弄薰風(영롱정원롱훈풍)
영롱한 정원이 훈훈한 바람과 노닐며[弄]
肯隨桃李媚眷色(긍수도리미권색)
복숭아 자두 색깔따라 아름답게[媚] 물들었네
暗許氷霜老化公(암허빙상로화공)
보이지 않는 혹시[許] 얼음과 서리가 공을 늙게 했는가
월산대군의 시에는 백발, 흰머리 관련 구절이 많은데, 나이 30세가 넘어가면서 새치가 생기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증조부 세종도 33세부터 새치가 있었다고 한다.
월산대군 관련 문화재는 오랜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불구하고 묘역, 신도비, 사당, 요여, 태실 등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소실되지 않고 대부분 보존되어 있으며, 상태도 매우 양호한 편이다. 심지어 2007년에는 1489년(성종20) 편찬된 풍월정집 원본이 발견되기도 했다. 중앙일보-'풍월정집' 실물 나왔다
3. 생애
1454년(단종 2) 12월18일에 수양대군의 장남 도원군과 군부인 한씨[16]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월산대군이 태어난 이듬해 아버지 도원군이 세자(의경세자)로 책봉됐고, 4년 후 동생 자을산군도 태어난다. 그러나 곧 부친 의경세자가 세상을 떠난다. 세자가 죽으면 적장자인 세손이 대통을 잇는 게 순리이지만 숙부가 세자로 책봉되었다.
이에 대해 혹자는 세조가 조카의 어린 나이를 명분삼아 계유정난을 일으켰기 때문에 세손이 같은 일을 당할까봐 걱정해서 한 행동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한명회와 신숙주를 비롯한 훈구공신들이 정사를 마음대로 하기 위해 정통성이 약한 차남(해양대군)을 밀었다고 하는 자들도 있다. 다만 당대는 물론이고 후대에도 이에 대해 정통성을 문제삼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당시 세조는 국정을 확실하게 장악한 상태였고, 신하들도 세조에게 반감을 가지지 않았던 데다가, 세조는 이전부터 의경세자를 매우 총애했고 월산대군을 비롯한 그의 가족들도 마찬가지로 매우 아낀 편이어서, 뒷말이 많이 나오지 않은 편이다.[17]
1468년에 예종이 즉위할 당시 월산대군의 나이는 15세였다. 그러나 예종이 불과 재위 1년 2개월 만에 갑자기 승하하자 후계 문제를 두고 논란이 발생했다. 예종에게도 적자가 있었으나, 그는 겨우 4살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라면 월산대군이 해양대군 때와 같은 논리(나이가 어리니 왕위에 오르기엔 부적합)를 주장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세조도 죽고 세조의 적자들도 모두 죽은 상태에서 왕위는 당시 최강의 권신 한명회 등의 입김을 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한명회의 사위인 동생 자을산군이 왕위에 오른다. 월산대군 역시 정공신에 3번이나 오른 훈구공신 중의 공신 박중선의 사위였지만, 한명회에 비할 바는 못됐고 몸이 약한 탓도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18]
혹자 할머니는 계유정난 당시 남편 수양대군에게 갑옷을 손수 입히면서 거사를 도운 여장부였는데, 15살이 넘은 월산대군이 왕이 되면 자신의 수렴청정 기간이 짧아질테니 대신 자을산군을 미는 동기가 됐다고 보기도 한다. 당시 13세에 불과했던 자을산군을 지목을 자신의 수렴청정 기간을 늘리려 했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 그러나 수렴청정 기간동안 정희왕후가 보여준 행보를 보면 수렴청정에 대한 욕심 때문이라 볼 순 없다. 다만 수렴청정 그 자체에 집착했다기보다는 사가에서 들어올 새 왕이 군주 수업을 받으며 성장할 시간을 벌기 위한 고려는 있을 수 있다. 반면 후일 무시무시한 인수대비가 되는 수빈 한씨는 아직 시어머니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을뿐더러,[19] 멀쩡한 장남 대신 차남인 자을산군을 택해야만 하는 동기는 상대적으로 옅었다.
한명회는 자신의 셋째딸이 예종의 정실이었기때문에 일찍이 상당부원군[20]의 지위에 올랐지만 그 딸이 인성대군을 낳고 산후병으로 일찍 사망했고, 외손자인 인성대군 역시 3세의 어린 나이에 요절하면서 왕실과 끈이 떨어졌기에 막내 사위인 자을산군을 밀어야 할 동기가 있었다.
어쨌든 여러 이유로 자을산군이 어린 나이에 왕에 올라 성종이 된다. 정통성 확보를 위해 우선 선대왕 예종의 양자로 입적했다. 왕실 용어로 입승대통이라 하는 이 절차는 성종이 예종의 장남이 되는 동시에, 친부인 의경세자 역시 왕으로 추존해야 하는 절차를 동시에 요구한다.
월산대군 역시 이제 덕종으로 추존되는 아버지의 적장자이자 봉사손으로서 명분을 받들어야 하는 상황이었고, 몸이 약하며 정치적 야심이 없었던 그로서도 더할 나위 없는 것이었다.
자성대왕대비(慈聖大王大妃)와 한명회 등 훈구대신들은 추존왕 덕종의 제사를 받들 월산대군을 좌리공신 2등에 책록했다. 좌리공신은 성종 옹립에 논공행상을 한 것으로 엄청난 부는 물론 역모만 아니면 죄를 받지 않는 유죄(宥罪) 조항 등 신분을 보장받는 동시에 자신이 이제 동생의 신하가 된다는 뜻이었다.
자성대왕대비는 예종의 적장자인 제안대군을 세종의 7남 평원대군의 양자로 입적시켜 혹시 모를 후환을 없앴다. 멀쩡한 친아들을 남한테 보내고 양자를 맏상주로 하는 무리수였다. 할머니 자성대왕대비는 이렇게까지 해서 성종의 정통성을 확보해주고, 왕실의 분란도 미연에 막고자 했다.
월산대군은 현실을 덤덤하게 받아들여 일절 불평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철저한 자기 관리로 일생을 보내면서 왕권에 부담을 주지 않았다. 가노(家奴)들에게조차 배경을 믿고 행패를 부려 빌미를 주지 않게 철저히 단속했다. 35년의 짧은 삶이긴 했지만 술과 풍류를 좋아하여 왕실의 모임에도 자주 참석했음에도 그 흔한 술김에 말실수 한 번 하지 않았다. 풍월정과 고양 별장 그리고 망원정 등에서 시를 짓고 책을 읽으며 자연 속에 파묻혔다. 성종은 월산대군을 더욱 자주 만나고 특별히 대하며 위로했으며 성종의 아들인 연산군, 중종 때까지도 월산대군의 피붙이에게는 더 아끼고 신경을 써줬다.
한때는 한양을 벗어나서 낚시도 하고 여행을 하면서 풍류를 즐기는 일도 있었지만 나이가 들며 몸이 아파 점차 흥미를 잃게 되었다.
1488년(성종 19) 가을에 접어들면서 와병했다. 9월부터 친모 인수대비도 몸이 아파 장남 월산대군 집으로 피접을 왔는데 월산대군도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인수대비의 병구완을 하다가 결국 와병했다.
두어달을 앓다 12월 중순 위독해졌고 사저인 연경궁에서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12월21일 3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489년(성종 20) 3월2일 친동생인 성종은 극진한 예를 갖춰 형의 별장이 있었던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신원1리 견달산 정좌에 안장했다.
4. 사후
사후에 봉상시에서 시호를 공간(恭簡)으로 의논했지만 성종이 특별히 효문(孝文)으로 직접 지어서 내렸다. 덕을 지키고 간사하지 아니한 것이 효(孝)이고, 시행함이 이치에 맞는 것이 문(文)이다.승평부대부인 박씨는 불심이 깊어 죽은 남편을 위해 흥복사라는 원찰을 창건하고 명복을 비는 불사를 행하다가 유생들과 척을 졌고 온갖 중상모략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성종은 형수와 어린 유복자를 감싸고 보호했다. 재산은 거의 지켰지만 현재 합정동에 터만 남은 망원정은 훗날 연산군에게 뺏긴다.
당시 유생들은 승평부대부인 박씨를 두고 상소를 올리면서 벌을 주라고 했는데 승평부대부인이 조카 연산군과 통정했다는 스캔들까지 뿌렸다. 심지어 실록에 적히길 연산군이 박씨와 통정하고 자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월산대군 무덤에 쇠기둥을 박았다는 황당한 얘기까지 적었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63권에 기록된 내용이나 사실일 가능성은 없다. 당시 박씨의 나이는 51살이었다.
야사에는 인수대비가 중종반정 직전 큰며느리 승평부대부인 박씨에게 자결을 명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21] 결국 박씨 부인의 남동생 박원종이 분을 품고 중종반정을 일으켰다.
조강(朝講)에 나아갔다. 영사(領事) 정광필(鄭光弼)이 아뢰기를, "성종조(成宗朝)의 일로 보면 월산대군(月山大君)을 대우하신 것이 제군(諸君)에게 보다 특별히 달랐으니, 임금과 신하 사이도 엄경(嚴敬)을 한결같이 할 수 없는데 더구나 형제 사이이겠습니까?" |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기사관(記事官) 허흡(許洽)이 아뢰기를, "성종대왕(成宗大王)께서는 월산대군(月山大君)과 가인(家人)의 예(禮)를 행하여 친애(親愛)와 돈독이 심상한 데서 나왔으니, 이것으로 보면 조종(祖宗)의 효도하고 우애하는 가법(家法)은 진실로 대순(大舜)이나 주공(周公)에 양보하지 않을 것입니다." |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했다. 도제조(都提調)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월산대군(月山大君)도 바로 선릉(先陵)의 동기로서 우애(友愛)의 독실함과 풍류(風流)의 아름다움이 오히려 후세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
월산대군은 종친의 모범이 되어 후세에도 칭송됐다.
조카 연산군은 월산대군이 국가에 공로가 있으므로 다른 대군에 비할 수 없으니 나뭇갓(나무를 베지 못하는 땅)을 도로 주라고 말하기도 했으며, 신하들로 하여금 월산대군 부인 승평부부인 박씨를 항상 부대부인으로 높여 부르게 했다. 백모와 덕풍군에게 많은 물품을 하사했고 후대했다.
훗날 광해군 때는 광해군의 친형 임해군이 몰래 사병을 기르며 반역을 도모했다가 들통나자, 거의 모든 신하들이 임해군을 사사하라고 간언하는 일이 있었다. 이때 광해군도 임해군이 월산대군 같았으면 얼마나 좋았겠냐고 말했었다고.[22] 결국 임해군은 폐서인이 되어 강화도에 유배됐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문스러운 사인으로 죽는다.[23]
영조(英祖)는 월산대군 후손들이 왕계에서 멀어지면서 점점 가난해지고 묘역 관리도 허술하자 승지를 보내서 월산대군 묘소에 치제를 명했는데 이어 하교하기를,
"일찍이 내훈에서 옛날에 돌보아 사랑하여 주었음을 알고 있었는데 이제 들으니 그 후손이 호서에 유락하여 살고 있다 하니, 어찌 돈목하는 도리라 하겠는가? 봉사손은 등용하고 호조로 하여금 공가를 후히 주게 하여 대군의 사우를 묘 아래에 세우게 하라." 했고 국가에서 비용을 지원하여 월산대군 사당을 중수 했는데 영조가 친히 석광사(錫光祠)라는 편액을 내렸으며, 당시 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던 월산대군의 외손인 부교리 홍재가 말하기를 "대군은 성종의 형으로 지극한 덕과 티없는 문장은 대중이 따를 바가 아니며 우리 성종의 우애는 백왕에 지나시었으며 총애로 대우하심이 융슝하여 보통에 지나셨다 합니다."하니 영조가 말하기를 "그러하다 내 어제하신 내훈을 보니 인혜 왕대비께서 또한 지극히 사랑하시어 친자와 다름이 없었다 했으며 선왕께서 매양 그 어짐을 감탄하심을 내가 익히 들었으며 인수 왕대비와 인혜 왕대비께서 대군을 두고 서로 내 아들이라고 하셨다니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알 수가 있다." 했는데 홍재가 이어 아뢰기를 "대군 화상찬을 성종께서 친히 지으시고 손수 써서 주시니 어제 어필을 판에 새겨 단 것을 신이 어렸을때 외가에서 보았는데 종가에서 시골로 이사하면서 구판을 서울에 사는 자손집에 보관시켰다 하며 대군의 문집이 두 권이 있는데 태반은 어제 작품을 받들어 실었으며 신이 부복하여 보니 열성조 어제 중에 성조 어제가 또 태반이 대군과 수창한 작품이며 어제 대군 화상찬도 그 안에 실린 것을 보았사온데 이는 당시 우애 독실한 증거입니다." 했다. |
"월산대군(月山大君)은 지위가 태백(泰伯)이나 중옹(仲雍)보다도 존귀하고 연릉계자(延陵季子)나 사어(史魚)보다도 높고 고귀한 뜻을 지녔는데 성묘(成廟)로부터 유난히 깊고 형제간의 우애로운 보살핌을 듬뿍 받았었다. 그리고 주옥같은 시문(詩文)과 필체(筆體)가 강호(江湖)의 풍월(風月) 사이에 고상한 운치가 애연히 넘쳐흘렀는데 아조(我朝)에 물론 훌륭한 종친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월산대군이 가장 으뜸이었다고 할 것이다. 우리 성조(聖祖)께서 높이 예우하고 총애하여 우애하신 성대함이 지금까지 사람들의 이목에 생생하다. 더구나 열조에서 군졸(軍卒)을 배치하여 수호하고 내려주신 물품도 성대했다. 그런데 이제 이처럼 쓸쓸하게 되었으니 몹시 서글프고 한탄스럽다. 해도(該道)로 하여금 보조하여 수리하게 하라. 또 월산 대군의 봉사손 이헌규(李憲圭)를 해당 조(曹)로 하여금 초사(初仕)에 등용하도록 하고, 대군의 무덤에는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라. 대군이 살던 집은 강가의 교외에 있었는데, 자손들이 외지로 유리하여 낙향했기 때문에 어느 때 전매(轉賣)했는지 모르겠으나 ‘풍월정’이란 편액(扁額)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성종조[宣陵朝] 때에 대군에게 베푼 지극한 우애에 대하여 지금도 전송(傳誦)되고 있다. 그런데 대군의 자손이 하사(下賜) 받은 집을 대대로 지킬 수 없게 된다면, 어찌 흠이 되는 일이 아니겠느냐? 호조에서 즉시 값을 치르고 돌려주도록 하라 했다. 그리고 월산대군 사당에 승지를 보내 제사를 올리도록 하고, 종가집이 빈한하니 본도로 하여금 먹을 것을 대주도록 하라. 이것이 바로 선왕께서 형제간에 우애하시던 성덕을 본받는 길인 것이다." 라고 전교하며 월산대군을 예우했다. |
월산대군 묘소에 치제한 글
振振公子
인후(仁厚)한 대군(大君)이여
若麟之定
기린의 이마와 같도다
園林鐘鼓
원림에 종고가 울렸음이여
際時熾盛
치성한 시대를 만났네
戩穀其終
끝까지 최선을 다했음이여
爲我貴宗
우리의 귀종이 되었네
虔揭有祠
위패를 모실 사당을 지었으니
捐出大農
큰 비용을 연출했네
肅予以過
엄숙히 내가 들러서
拜陵前夕
능묘에 참배하는 전날 저녁에
醑旨爇馨
맛있는 술 향기롭게 갖추어 올리니
冥冥者格
영령이여 임하소서
振振公子
인후(仁厚)한 대군(大君)이여
若麟之定
기린의 이마와 같도다
園林鐘鼓
원림에 종고가 울렸음이여
際時熾盛
치성한 시대를 만났네
戩穀其終
끝까지 최선을 다했음이여
爲我貴宗
우리의 귀종이 되었네
虔揭有祠
위패를 모실 사당을 지었으니
捐出大農
큰 비용을 연출했네
肅予以過
엄숙히 내가 들러서
拜陵前夕
능묘에 참배하는 전날 저녁에
醑旨爇馨
맛있는 술 향기롭게 갖추어 올리니
冥冥者格
영령이여 임하소서
월산대군 이정의 묘소에 치제한 글
在周泰伯
주 나라에 태백이 있고
在漢東海
한 나라에 동해왕(東海王)이 있었으니
鐘鼎江湖
왕실로서 자연 속에 노니는 때에
風月無際
풍월이 다함이 없었네
煌煌寶章
임금의 아름다운 글을
紫袖絲聯
소매에 넣어 뒀다 자주 보내셨고
芳樹金樽
향기로운 나무와 금으로 만든 술 그릇에
盛跡猶傳
성대한 자취가 오히려 전해지네
河淸舊甲
드물게 돌아오는 구갑을 맞아
陵柏有霜
능묘의 송백에 서리가 내리는데
瞻望玄兆
대군의 무덤을 바라보니
高峯之陽
높은 봉우리의 양지쪽이로다
先后之思
선후의 생각이
我公于最
우리 공에게 가장 간절하니
窈窕秋原
그윽한 가을 언덕에
牲酒是賚
희생과 술을 드리네
순조(純祖),
고종(高宗)때에도 조정에서 신하를 보내 왕을 대신하여 제사를 올리기도 했을 정도로 우대를 했다.在周泰伯
주 나라에 태백이 있고
在漢東海
한 나라에 동해왕(東海王)이 있었으니
鐘鼎江湖
왕실로서 자연 속에 노니는 때에
風月無際
풍월이 다함이 없었네
煌煌寶章
임금의 아름다운 글을
紫袖絲聯
소매에 넣어 뒀다 자주 보내셨고
芳樹金樽
향기로운 나무와 금으로 만든 술 그릇에
盛跡猶傳
성대한 자취가 오히려 전해지네
河淸舊甲
드물게 돌아오는 구갑을 맞아
陵柏有霜
능묘의 송백에 서리가 내리는데
瞻望玄兆
대군의 무덤을 바라보니
高峯之陽
높은 봉우리의 양지쪽이로다
先后之思
선후의 생각이
我公于最
우리 공에게 가장 간절하니
窈窕秋原
그윽한 가을 언덕에
牲酒是賚
희생과 술을 드리네
|
월산대군 저택에 덕수궁이 들어섰다는 내용의 만화 |
5. 가계도 및 가족과 후손
자세한 내용은 월산대군/가족과 후손 문서 참고하십시오.- 조부 : 세조(世祖, 1417 ~ 1468)
- 조모 :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 尹氏, 1418 ~ 1483)
- 숙부 : 예종(睿宗, 1450 ~ 1469)
- 숙모 :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 1445 ~ 1461)
- 사촌 : 인성대군(仁城大君, 1461~1463)
- 숙모 : 안순왕후 한씨(安順王后 韓氏, 1445 ~ 1498)
- 부 : 덕종(德宗, 1438 ~ 1457)
- 외조부 : 좌의정 영경연사 서원부원군 양절공 한확(左議政 領經筵事 西原府院君 襄節公 韓確, 1400~1456)
- 외조모 : 남양부부인 남양 홍씨(南陽府夫人 南陽 洪氏)
- 장인 : 박중선(朴仲善)
- 장모 : 양천 허씨(陽川 許氏) - 행호군 허균(行護軍 許稛)의 딸
6. 월산대군 묘와 신도비
자세한 내용은 월산대군/묘 문서 참고하십시오.7. 친동생인 성종과의 우애
자세한 내용은 월산대군/성종과의 우애 문서 참고하십시오.8. 월산대군의 시(詩)
자세한 내용은 월산대군/시 문서 참고하십시오.9. 평가
월산대군은 대중들 사이에서 본인보다는 덕수궁의 본래 주인, 성종의 형으로, 그리고 조카인 연산군이 큰어머니를 범했다는 소문으로 부인이 더 알려진 인물이다. 왜냐하면 살아생전 월산대군은 사고도 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살았기 때문이다. 그가 등장하는 각종 사극 작품들 속에도 주인공이 아닌 대부분 어머니인 인수대비나 동생인 성종에게 가려져 그저 왕위에 관심 없는 소심하고 병약한 인물로 그려지곤 하는데 이는 전혀 사실과 다르다고 볼 수 있다.하지만 각종 역사서나 조선왕조실록 속에서의 월산대군에 대한 기록은 꽤 많이 등장하며, 대부분 긍정적인 내용이 많았고 악평은 전혀 없었다. 그의 졸기나 신도비명 그리고 실록 속 사관의 평가에 있어서도 호평 일색이며, 현대의 역사 학자들도 월산대군을 대부분 호의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는 세조의 장손, 덕종( 의경세자)의 장남으로 조선에서 장자승계의 원칙에 따라 왕위 계승에 있어 정통성이 가장 강력했으나 어리다는 이유로 숙부인 예종에게 또 한명회의 사위가 아니라는 이유로 친동생인 성종에게 2번씩이나 왕위를 빼앗긴 비운의 왕자였다. 월산대군은 요절한 아버지 덕종(의경세자)을 대신하여 할아버지 세조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을 뿐 아니라 그의 시가 중국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잘산군(성종)보다도 더 학문에 깊이가 있고 능통했다. 또 시호 효문(孝文)대로 왕가의 필수 덕목이라고 할 부모에 대한 효성과 형제에 대한 우애도 지극했으며 인품 역시 훌륭해 마땅히 보위를 이을 적임자로 여겨져서 차기 왕으로 손색이 없었다.
예종이 즉위한지 1년 3개월만에 승하하고 후계자를 정할 때 원자인 제안대군이 4세로 너무 어리기 때문에 왕이 될 수가 없다면 16세로 가장 연장자에 세조의 장손인 월산대군이 왕이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잘산군(성종)의 장인이였던 한명회 등 훈구 대신들과 정치적 결탁을 한 정희왕후 윤씨는 월산대군의 몸이 병약하다는 이유로 대신 친동생인 잘산군(성종)을 후계자로 내세웠는데, 왕후에 의해 다음 왕이 지명되는 조선왕조 최초의 선례가 된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 월산대군이 병약하다고 기록한 흔적은 전혀 없다. 그는 35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 당시에는 평균 수명이 40세 정도로 단명했다 보기에는 어려우며, 월산대군이 안타깝게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은 어머니 인수대비가 병이 났을 때 마침 본인도 병에 걸린 상태였었다. 월산대군은 자신의 병은 전혀 돌보지 않으면서 밤낮으로 침식을 잊고 어머니의 간병에만 열중하여, 이 과정에서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 되었다고 한다.
유년시절 세조가 어린 월산대군을 애지중지하여 궁중에 두고 직접 기르면서 사어서수(射御書數)[25]를 친히 가르치기도 하고 월산군(月山君)이라는 군호도 세조가 직접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또 장손의 혼인 때에는 종친과 재추들에게 명하여 모두 시복 차림으로 위요했으며 세조 본인도 사복시 담 밑에 비루[26]를 만들어서 이를 구경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월산대군과 사냥도 함께 가고 말이라든지 물품들도 하사하면서 월산대군을 각별하게 아꼈고 총애했다.
정희왕후 윤씨는 어째서 예종의 적자였던 제안대군과 세조의 장손 월산대군을 왕위 계승자에서 배제하고자 했을까? 그것은 맏아들 의경세자가 2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을 때 원손 월산군이 아닌 세조의 차남 해양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던 것과 똑같은 이유로 나이 어린 단종을 죽이고 왕권을 찬탈했던 한 사람으로서, 또다시 그와 같은 상황이 재현되는 것을 막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반론]
강변되는 명분과는 다르게 특별한 흠결이 없었던 세조의 장손 월산대군과 예종의 적자였던 제안대군을 제치고 덕종( 의경세자)의 차남인 잘산군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성종의 장인이었고 당대의 권세가였던 한명회의 수완이 발휘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대체적이고 일반적인 여론이었다. 이에 월산대군은 당시 권력을 분점하고 있던 정희왕후 윤씨와 한명회의 이해관계에 따라 친동생 잘산군(성종)에게 왕위를 빼앗기는 비운을 맞게 된다.
사실상 왕위 계승권을 성종에게 빼앗긴 월산대군은 자신의 존재로 인해 정통성 문제가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아, 현실을 떠나서 자연을 벗삼아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예종이 승하하고 친동생 잘산군(성종)이 즉위하던 날 월산대군은 그 길로 한양을 떠나서 전라도 깊은 산 속에 들어가 은둔하기도 했었다. 이후에 돌아와 집안에 풍월정이라는 정자를 짓고서 서적을 쌓아둔 채 시문을 읊으면서 풍류적인 생활을 한다. 친동생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혹시 모를 역모에 휘말릴까 봐 가급적이면 사람을 만나는 것을 자제하고 혼자 조용히 살았는데, 성종 역시 월산대군의 처지와 마음을 이해하고 늘 안타깝게 여겨 항상 형을 챙기면서 배려하고 위안해 주었다.
그는 왕의 형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처신할 수 없었고, 자연 속에 은둔하며 조용히 사는 삶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적장자 왕위 계승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왕의 형이 존재함은 비상식적인 처사였다. 더군다나 월산대군은 학문이 풍부했었으며 인품이나 능력에 있어서 전혀 흠결이 없었고 오히려 뛰어난 사람이었다.
왕에게 다른 왕자들이란 아무리 피를 나눈 형제라 해도 잠재적인 경쟁자일 수밖에 없다. 절대 권력인 왕의 자리는 단 하나 뿐이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형제를 희생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대체적으로 왕위 계승에 탈락한 왕자들은 추후 왕권에 위협이 되기 때문에,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역모에 몰려서 죽음을 당할 확률이 높았다. 현 집권 세력들이 결코 살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왕권에 위협이 되는 월산대군은 반역의 누명을 쓰고 제거되는 것이 권력의 비정한 수순일 것이다. 그러나 형 월산대군도 동생인 성종도 자신들이 취해야 할 바를 잘 알고 있었고, 이를 잘 지켜 나갔다.
하지만 월산대군은 왕권에 있어서 친동생인 성종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적장자였으나 두 형제의 우애는 매우 돈독하여 성종의 보호속에서 예우를 받으며 살았다. 이는 성종이 천성적으로 효우[28]스러움을 타고난 인물이기도 했지만 형인 월산대군이 정치적으로 엮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종친으로서 주어지는 관직도 맡지 않았고 스스로 가택연금을 선택하여 사람도 함부로 만나지 않았으며 집안의 사람들에게도 철저히 입단속을 시켜서 구설수가 전혀 나오지 않게 하여 자기관리를 매우 철저히 했기에 가능한 일이였다.
홀어머니인 인수대비와 친동생인 성종을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했던 월산대군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혼자 술이나 마시면서 시를 짓고 독서하면서 낚시도 하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여행이나 하는, 즉 풍류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29] 이러한 형의 처지를 이해하고 가슴 아프게 여긴 성종은 평생 형인 월산대군에게 미안해했고 존경하면서 각별하게 예우했다. 이러한 동생의 애틋한 마음에 월산대군도 감사했고 그 누가 이간질을 시도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월산대군과 성종의 우애는 매우 깊었다. 친동생이자 왕이였던 성종이 아낌없는 사랑과 우애를 보여줄 정도로 덕행이나 인품이 매우 훌륭한 인물이였다.
예를 들어 오늘날에 비유하자면 장차 대기업을 물려받을 흠결이 전혀 없고 능력이 매우 뛰어난 장남이 주변 사람들의 술수로 후계자가 되지 못하고 대신 삼촌이나 동생이 그 자리를 물러 받는다고 한다면, 그 누가 월산대군처럼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혹여나 동생이 부담스러워 하거나 피해를 입을까봐 사람도 함부로 안 만나고 혼자서 술 마시면서 시나 쓰며 독서하고 여행이나 다닐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또 이런 상황에 그런 장남을 경계하지 않을 동생은 얼마나 있을까? 대부분 형제간에 반목하면서 소송을 해서라도 자기 권리를 찾고자 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월산대군은 왕권을 두고서 권력투쟁보다는 양보라는 선택을 하게 되는데, 어머니와 동생에 대한 깊은 사랑 때문에 필연적으로 피를 부를 수밖에 없는 권력투쟁을 피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는 효성도 지극해서 날이 추우나 더우나 매일 아침 입궐하여 할머니인 자성대왕대비(정희왕후), 어머니인 인수대비(소혜왕후), 숙모인 인혜대비( 안순왕후)에게 문안 인사를 드렸으며 삼대비전(三大妃殿)이 함께 온양온천으로 행차할 때 월산대군이 친히 호종하기도 했다. 성종 19년에 인수대비의 병이 심해지자 자신의 병을 숨기면서까지 침식도 잊고 밤낮으로 정성껏 어머니의 병간호를 지극 정성으로 하다가 도리어 자신의 병이 도져서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또한 성종이 친동생이긴 했으나 임금이기에 월산대군은 군신 간의 의리에 따라 신하로서 법도를 지키면서 충성을 다했다. 조선은 계급사회였는데 왕의 형이라는 최고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늘 신하들이나 아랫사람에게 자신을 낮추면서 공손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했는데 그 겸손한 덕이 이와 같았다. 그리고 신하들은 길에서 왕자를 만나면 말에서 내려 공수하고 서서 그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었는데 월산대군은 이 법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하여 성종에게 파해달라고 아뢰었으나, 형의 품위와 위상을 지켜주고 싶었던 성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하지만 월산대군은 사전에 자신의 행차를 신하들에게 알려 피해 가게 함으로서 왕의 형이라는 지위를 내세우지 않았고, 이 같은 행실로 인해 세상 사람들은 그 겸양하는 미덕을 칭찬했다고 한다. 신도비명을 보면 월산대군이 세상을 떠나자 궁궐 사람들과 신하들 그리고 심지어 거리의 백성들까지 애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을 정도이다.
월산대군은 주어진 명예와 부에 안주하고 있기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굴레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럴수록 더욱 조심하고 또 자제하려 애를 썼다. 정치 문제 등의 국정에 전혀 간여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거의 매일같이 벌어졌던 연회석에서 단 한 번도 자세가 흐트러지거나 주정을 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왕실이나 종친과 관련된 송사에서도 원칙과 명분에 충실했다. 그러면서도 최대한 온건하게 일을 처리해 종종 약자의 입장인 민간의 편을 들기까지 했다.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부인이나 가까운 친척 그리고 집안의 종까지 엄하게 단속해 구설수에 오른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의 처신에 세상 여론은 대단히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월산대군이 직접 몸으로 감당해야 했던 실제 삶이란 사람들이 편하게 생각하는 우아한 모습과는 한참 거리가 먼 것이었다. 술자리에서 술을 마셔도 기생질은커녕 그 흔한 주정 한 번 할 수 없었고 여유 있는 사대부라면 너 나 할 것 없이 즐기는 사냥이나 온천 가는 것조차도 간관의 힐난을 꺼려 궁중행사 이외에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엉뚱한 모함에 휘말릴까 사람들과의 교분도 가급적 자제했으니 그의 시작품이 당대에 높은 평가를 받았음에도 실제 교유관계에 있었던 사람이라고는 친동생 성종과 종친으로 당숙이었던 부림군 이식, 문인 조신 정도로 다섯 손가락을 다 채우기도 어려웠다고 전한다. 말이 왕공 귀인이었지 세상과 단절되어 지내야 하는 유폐 생활과 별반 차이 없었다. 일상생활의 사소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극단적인 자기 절제력을 발휘해야 했던 그의 삶은 속으로는 골병이 들어가면서도 남들 앞에서는 품위를 연출해야 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적장자로 태어나서 2번씩이나 왕위를 빼앗기고 풍류와 시문 뒤에서 은둔하듯 소박하게 한평생 살다간 월산대군은 귀하기는 왕의 아들이고, 높기로는 왕의 형으로 신분은 높았지만 마음은 외롭고 궁핍할 수 밖에 없었으니 시인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대비인 어머니와 임금인 동생을 등에 업고 얼마든지 권세를 누리고 이권에 개입할 수 있었던 당시 실세였지만 그는 비록 사내대장부로서 세상의 중심에 서지 못하고 한가하더라도 떳떳한 삶을 선택했다. 마치 살얼음판과도 같았던 미묘한 처지 속에서도 세인들의 구설수에 오르내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월산대군은 비록 왕이 되지는 못했지만 오늘날에 조선시대의 유명한 시인으로 명성이 길이 남았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추강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우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매라
시조가 그의 대표 작품이며 교과서에도 실려있다고 한다. 월산대군의 무욕적인 삶과 부드럽고 율격이 높은 시문은 조선 성종시대 문치(文治) 주의를 더욱 풍요롭게 했다.낚시 드리우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매라
10. 월산대군 태실
서울특별시의 기념물 | ||||
29호 | ← | 30호 | → | 31호 |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 | 월산대군 이정 태실 | 인왕산 수성동 계곡 |
서울특별시의 기념물 제34호 | |
월산대군 이정 태실 月山大君 李婷 胎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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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colbgcolor=#fff,#191919> 서울특별시 서초구 우면동 291-1 |
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조선시대 |
수량 / 면적 | 태비 1基, 석함 1基, 토지 287㎡ |
지정연도 | 2010년 3월 25일 |
시대 | 1462년 ( 세조 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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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대군 태실과 태항아리 |
서울특별시 서초구 우면동에 월산대군의 태실이 있다. 현재는 석함만 남아있고 태항아리와 지석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그래도 현재 서울에서 원래 자리에 남아있는 유일한 태실이란 점에서 유물적 가치가 있다. 그래서 2010년 3월 25일에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0호로 지정받았다.
11. 관련 작품
《인수대비》의 월산대군 |
《왕을 참하라》의 월산대군 |
12. 관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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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대군 치제문과 치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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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대군 초상화 찬문(성종 어제어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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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월산사지 월산대군 명 암막새 |
13. 관련 문서
[1]
음력
단종 2년
12월 18일
[2]
음력
성종 19년
12월 21일
[3]
월산대군의 묘와 신도비는 1986년 6월 경기도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1호다.
[4]
당대에는
벽자였지만 이제는 중화권에서 여성 이름에 흔하게 쓴다.
[5]
1455년(세조 1년)에 태어났으며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평양군 박중선의 장녀이자 중종반정 1등 공신 박원종의 큰누님이며 성종의 형수로 연산군과 중종의 큰어머니이기도 하고 중종의 계비인 장경왕후 윤씨의 이모다. 월산대군이 요절하자 묘 근처에 원찰인 흥복사를 창건하고 불사를 자주 일으켜 남편의 명복을 빌면서 지내다가 1506년(연산군 12년)에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6]
1485년(성종 16년)에 월산대군의 측실인 부호군 김량신의 딸 원주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파원부원군 윤여필의 장녀이자
윤임의 누나인 현부인 파평 윤씨와 혼인하여 슬하에 파림군, 계림군, 전성부정 등 3남을 두었으나 1506년(연산군 12년)에 22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최종 품계는 정2품 승헌대부(承憲大夫)에 이르렀고 시호는 소도(昭悼)이다. 세 아들에 의해서 월산대군의 혈통은 계속 이어져 현재에 이른다.
[7]
호의 유래는 월산대군의 사저에 정자가 있었는데 친동생인 성종이 와서 보고 너무 마음에 들어서 풍월정(風月亭)이라는 이름을 친히 지어주었다고 한다.
[8]
연산군과
중종의 큰아버지이기도 하고 박중선의 맏사위이자
장경왕후 윤씨의 이모부이며
박원종의 매형이다.
[9]
오태백:
해주 오씨의 도시조이기도 하다.
[10]
월산대군의 시호는 효문(孝文)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처음의 시호는 문효(文孝)였다. 그래서 성현과 신종호는 서문에서 월산대군을 문효공이라고 불렀다.
[11]
청나라의 학자 전겸익이 엮은 역대 왕조 별 시집으로 우산은 그의 호이다.
[12]
남의 시에 화답하면서 운자를 그 차례대로 두며 시를 짓는 일.
[弄]
:희롱할 롱이나 여기선 문맥상 노닐다라는 뜻이 돼야 하며 노닐다라는 뜻으로 쓰인 예가 있다.
[媚]
:아첨할 미이나 여기선 아름답다라는 뜻이며 칭찬한다는 뜻도 된다.
[許]
:허락할 허이나 부사로서 혹시란 뜻 역시 가지고 있다.
[16]
당대 최고의 권신
한확의 딸로 든든한 집안 배경을 가졌다.
[17]
그리고 일단 전자는 큰 의미가 없는데 예종과 월산대군의 나이차는 겨우 5살이었다. 숙질관계였지만 정작 나이차는 형제관계밖에 나지 않은 것. 그러다 보니 예종이 세자가 될 때도 예종, 월산대군의 나이는 겨우 8살과 3살이었다.
[18]
실제로 월산대군은 34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그의 건강 문제가 빈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왕이 되지 못한 실제 역사의 월산대군도 34세에 요절했는데, 만약 월산대군이 본래의 원칙에 따라 의경세자의 적장자로서 왕이 되었다면 엄청난 직무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더욱 젊은 나이에 요절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사실 동생인 성종도 37세에 요절했으니 형에 비해 그리 오래 살지도 못했다.
[19]
정희왕후가 엄청난 여걸이네 어쩌네 하는 얘기가 있었지만 그런 건 의미없다. 정희왕후가 그녀의 '시어머니'라는 것만으로도 조선에서는 충분히 찍어누를 권위가 된다. 물론 조선 역사상
인목왕후나
장렬왕후처럼 지위를 살리지 못한 이들도 있었지만 이들의 경우 전자는 정치력이 시망이고 후자는 왕실 내에서 공기 취급을 받았다. 인목왕후는 세상물정을 너무 몰라 여러 실책들을 저질렀고 장렬왕후는 아예 인조 시절부터 제대로 된 왕비로 대우받지 못했던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나마도 진짜로
의붓 손자며느리에게까지 무시당하며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 건 장렬왕후이며 인목왕후는 본인과 친정의 실책에다
광해군의 지나친 의심병까지 겹치면서, 남편
선조의 사후 광해군과 대립이 심해지다가
계축옥사로 친정도 멸문되고
아들도 빼앗긴 뒤 서궁에 유폐되어 목숨조차 장담하지 못하게 되면서 대비로서 권위를 내세울 겨를조차 없었다.
[20]
국구, 왕의 장인이란 뜻이다.
[21]
시기적으로 불가능하다. 인수대비는 중종반정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504년 4월에 사망했고, 승평부대부인은 그 2년 후인 1506년 7월에 죽었다. 그리고 1506년 9월 2일에 중종반정이 일어난다.
[22]
사실 임해군은 월산대군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월산대군에겐 수치일 정도로, 온갖 만행을 저지른 조선 역사상 최악의 망나니 왕자였다.
[23]
임해군의 사인에 대해서는 당시 유배소를 지키던 이정표란 관리가 독살했다고 보고됐으나,
인조반정 이후 재조사를 통해 광해군의 심복
이이첨이 자객을 보내 살해했다고 재정의했다고 한다.
[24]
광해군 때부터
고종이 황위에서 퇴위하기 전까지는 '경운궁'이라고 불렸다.
[25]
(사)활쏘기, (어)말을 타거나 부림, (서)글을 읽고 씀, (수)산수
[26]
매우 높은 곳에 세운 누각
[반론]
예종과 월산대군이 숙질관계지만 그런 논리를 내세우기에는 나이차이가 너무 적다. 나이 차이는 겨우 5살로 예종이 세자가 될 당시 둘 다 십대도 못 된 꼬꼬마였다.
[28]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를 통틀어 이르는 말
[29]
사례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현재의 경우
김정일의 아들들이 김정일 사후 분쟁을 거치며 김정은이 왕위(?)를 계승하고 경쟁자였던 김정남은
물리적으로 제거되고 그나마 충돌이 없던 김정철은 게임 폐인으로 살고 있다고 한다. 즉 후계자(김정은)에게 대든 자(김정남)는 제거대상, 대들지 않아도 계속 대들 생각이 없음을 보여줘야(김정철) 안전할 수 있다는 것.
[30]
사망 당시 67세. 당시로선 장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