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투 코엘류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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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 ||||
41대 |
26대 |
63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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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투 코엘류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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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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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축구 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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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deração Portuguesa de Futebol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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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91c2d><colcolor=#ffffff> 이름 |
움베르투 코엘류 Humberto Coelh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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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움베르투 마누엘 드제주스 코엘류 Humberto Manuel de Jesus Coelh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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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50년 4월 20일 ([age(1950-04-20)]세) | ||||
포르투갈 포르투현 포르투시 세도페이타 | |||||
국적 |
[[포르투갈|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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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키 185cm | ||||
직업 |
축구 선수 (
센터백 / 은퇴) 축구 감독 축구 행정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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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colbgcolor=#b91c2d><colcolor=#ffffff> 선수 |
라말덴세 (1964~1966 / 유스) SL 벤피카 (1966~1968 / 유스) SL 벤피카 (1968~1975) 파리 생제르맹 (1975~1977) 라스베이거스 퀵실버스 (1977) SL 벤피카 (1977~19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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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SC 살게이로스 (1985~1986) SC 브라가 (1986~1987) 포르투갈 대표팀 (1997~2000) 모로코 대표팀 (2000~2002) 대한민국 대표팀 (2003~2004) 알 샤바브 FC (2006) 튀니지 대표팀 (2008~2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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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 |
포르투갈 축구 연맹 (2015~2016 / 이사) 포르투갈 축구 연맹 (2016~ / 부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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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 64경기 6골 ( 포르투갈 / 1968~198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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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로랑스 코엘류 장녀 마리나 코엘류, 차녀 조안나 코엘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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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의 축구인.2003년부터 2004년까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으며 2016년부터는 포르투갈 축구 연맹(FPF) 부회장을 맡고 있다.
유로 2000에서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팀을 4강에 올려놓으며 명성을 얻었다. 이후 모로코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거친 뒤 거스 히딩크의 후임으로 2003년부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지만 오만 쇼크- 몰디브 쇼크로 이어지는 졸전으로 크게 신임을 잃었고 결국 자진사퇴하게 된다. 한국 축구에는 히딩크 이후 첫 암흑기라서 꽤나 뼈아팠지만, 코엘류 본인 입장에서도 이 때의 일로 감독 커리어가 망가지는 바람에 더는 유럽으로 돌아갈 수 없던 터라 양쪽 모두에게 치명적인 손실이었다.
2. 선수 경력
선수 시절 포지션은 중앙 수비수. 홍명보처럼 리베로 역할을 맡으며 공격에도 가담해 포르투갈의 프란츠 베켄바워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리더십도 상당해서 포르투갈의 주장 완장을 차기도 했는데 그의 전임 주장이 바로 에우제비우였다.그러나 선수로서 세계적인 인지도는 떨어졌는데, 이는 그가 국가대표로 활약하던 시기가 포르투갈의 암흑기였기 때문. 1966년 월드컵 반짝 3위 이후 20년 동안 월드컵 본선 무대도 밟아보지 못했고 심지어 당시 8개국(8강) 본선이었던 유로 1980 대회에도 진출 실패하던 시기가 정확히 코엘류가 국가대표로 활약하던 시기와 겹친다.[1]
SL 벤피카 소속으로만 360경기에 출전한 레전드이고, 잠시 파리 생제르맹 FC와 미국 NASL의 라스베가스 퀵실버스 유니폼을 입기도 했다. 여담으로 라스베가스 시절 팀 동료들이 굉장했는데 펠레와 에우제비우였다.[2]
1984년에 SL 벤피카에서 마지막 경기를 치르고 은퇴했다. 프로 통산 424경기 60골, A매치 통산 64경기 6골을 기록했다.
3. 지도자 경력
포르투갈 대표팀 감독 시절[3] | 대한민국 대표팀 감독 시절 |
3.1. 포르투갈 대표팀 이전
은퇴 후 SC 브라가와 살게이도스의 감독을 맡았으나 딱히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고, 이후 포르투갈 축구 연맹에서 행정가로 활동했다.3.2. 포르투갈 대표팀
1997년 안토니오 올리베이라가 FC 포르투로 떠나며 대표팀 감독직을 사임하자 포르투갈 축구 연맹에서 행정가로 활동하던 코엘류는 포르투갈 감독을 맡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지도자로서는 이력이 일천하다는 비판이 있었으나 루이스 피구와 후이 코스타를 필두로 한 이른바 골든 제너레이션의 개인 능력을 극대화하는 전술로 팀을 착실하게 만들어 나갔다.1998년 프랑스 월드컵 유럽 예선에서는 독일에게 지지 않는 저력을 보여줬으나 우크라이나에게 발목이 잡히며 승점 1점 차이로 본선 진출 실패의 고배를 마셨다. 유로 2000 예선에서는 루마니아에게 1패를 당하며 조 2위로 밀리긴 했으나 다른 조의 2위 팀 중 성적이 가장 좋아 본선에 직행했다. 기존의 루이스 피구, 후이 코스타, 주앙 핀투 등에 더하여 세르지우 콘세이상, 아벨 사비에르, 파울레타 등이 팀의 주축으로 기용되면서 전 포지션에 구멍이 없는 팀이 완성되었다. 누누 고메스, 베투 등 젊은 자원들이 발탁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UEFA 유로 2000 본선에서는 독일, 잉글랜드, 루마니아와 A조에 배정받게 되었다. 당시 중론은 전통의 강호 두 팀과 다크호스 두 팀이 한 조에 묶여 죽음의 조라고 부르면서도 당시만 해도 유럽축구의 변방으로 취급받던 포르투갈이 통과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평이 많았다.[4]
그러나 이러한 평가가 무색하게 포르투갈은 첫 경기부터 A조 최강으로 꼽히던 잉글랜드에 3-2 역전승을 거둔다. 전반 초반 데이비드 베컴의 크로스를 받은 폴 스콜스와 스티브 맥마나만에게 두 골을 연달아 내주며 역시 포르투갈은 안되나 싶었지만, 루이스 피구가 벼락같은 중거리슛을 성공시키며 분위기를 반전시켰고, 주앙 핀투와 누누 고메스가 각각 동점골과 역전골을 넣으며 명승부를 마무리지었다. 이 경기는 명승부답게 환상골이 속출한 경기로 유명한데, 피구의 중거리슛은 잉글랜드 골키퍼 데이비드 시먼이 꼼짝못하고 공만 쳐다본, 유로 2000 포르투갈 하면 항상 자료화면으로 나오는 그 유명한 골이다. 수비수 발에 맞고 굴절이 됐네 안됐네로 아직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주앙 핀투의 골은 수비를 끌어낸 피구가 우측에 빠져 있던 루이 코스타에게 준 공을 루이 코스타가 정확한 크로스를 올렸고, 이 공을 주앙 핀투가 니어 포스트 방향으로 다이빙 헤딩을 하며 파포스트에 공을 맞추며 득점한, 극한의 헤더 테크닉을 선보인 골이었다. 누누 고메스의 마무리골 역시 루이 코스타의 30미터짜리 전진 패스가 만들어낸 작품.
2차전 상대는 예선에서 일격을 당한 바 있던 루마니아였는데 0-0 팽팽한 균형이 계속되던 중 후반전 교체 투입된 코스티냐[5]가 후반 49분에 아무도 기대치 않았던 골을 넣으며 극적으로 1-0 승리. 이미 2승으로 조 1위[6] 8강 진출이 확정되었으니 마지막 독일전은 주전들을 대거 쉬게 하고 대부분의 백업 멤버들을 선발로 내세웠는데 세르지우 콘세이상의 해트트릭을 앞세워 3-0 완승을 거두며 독일을 영혼까지 털어 버렸다. 진짜 무서운 건 8강전을 대비해 주전골키퍼 바이아를 비롯해 피구, 후이 코스타 등 주전을 빼고 경기한 결과가 저거라는 거다. 이렇게 포르투갈은 3전 전승으로 8강에 진출한다.[7]
8강전에서 누누 고메스의 멀티골로 터키를 가볍게 2-0으로 제압하고 준결승에서 프랑스를 만나게 되는데, 고메스와 티에리 앙리가 한 골씩을 주고받은 상태에서 연장전 후반 말미에 사비에르가 페널티킥을 허용하고[8] 지네딘 지단이 깔끔하게 성공, 이게 골든골이 되면서 포르투갈의 이변은 준결승에서 마무리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포르투갈에게 패해 탈락한 팀들 중 아예 월드컵 본선에도 오르지 못한 루마니아를 제외한 나머지 팀들은 모두 2년 후 월드컵에서 선전했는데[9] 정작 포르투갈은 이 대회에서 자신을 꺾고 우승을 차지한 프랑스와 함께 졸전 끝에 조별 리그에서 탈락하면서 운명이 엇갈렸다는 것이다.
3.3. 모로코 대표팀
유로 2000에서의 호성적에도 포르투갈 대표팀은 코엘류와의 계약을 연장하지 않았고, 이후 모로코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았다. 그러나 2002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세네갈에게 골득실차로 밀려 탈락하자 경질되었다.3.4. 대한민국 대표팀
자세한 내용은 코엘류호 문서 참고하십시오.3.5. 이후 ~ 현재
2010년 모습 1 | 2010년대 모습 2 | 2016년 모습 |
한국 대표팀에서의 경질 이후 자국으로 돌아가서 해설자로 활동하다가 잠시 알 샤바브, 튀니지에서 감독을 맡았다. 알 샤바브 감독인 2006년에는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 울산 현대와 만나 이천수
이어서 튀니지 감독을 맡아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본선 진출을 노려 나이지리아에 지지 않으며 승점에서 2점이나 앞서며 월드컵 진출이 유력했으나, 예선 마지막 경기인 모잠비크 원정에서 후반 38분 실점하여 예상치 못한 패배를 당하며 나이지리아에 승점 1점 차이로 밀려 탈락해서 감독 자리에서 물러났다.
한국과 튀니지 등지에서의 실패로 감독 생활은 완전히 접은 것으로 보이며, 대신 행정가로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2015년부터 2016년까지 포르투갈 축구 연맹 이사로 활동하다가 2016년부터 포르투갈 축구 연맹(FPF) 부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감독보다 행정가로 재직한 기간이 더 길다.
UEFA 유로 2016 결승전에서 시상식 때도 모습을 비췄다. #
이후 페페가 은퇴하자 대표팀 은퇴식에서 페페에게 기념 유니폼을 지급했다.
4. 기록
4.1. 선수
4.1.1. 대회 기록
- SL 벤피카 (1968~1975, 1977~1984)
4.1.2. 개인 수상
- 포르투갈 올해의 축구 선수: 1974
4.2. 감독
4.2.1. 대회 기록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2003~2004)
-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2003
5. 이야깃거리
- 한국 감독 시절 갓 20세였던 딸의 미모가 화제가 된 바 있다. 한일전 때 서울월드컵경기장 관중석에서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응원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는데, 이 때문에 한 때 국내 한정 코엘류의 호칭이 장인어른이었다.
- 선임 당시 통역 문제로 대한축구협회가 골머리를 앓았다. 원래는 영어를 잘한다는 정보가 있어서 그냥 별 문제없을 거라 했는데, 생각보다 영어 실력이 떨어진 것.[10] 그래서 브라질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는 포르투갈어 통역관을 섭외했으나 코엘류가 직접 통역관 후보들과 면담한 후 프랑스어 통역관이 기용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코엘류는 프랑스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했다.[11]
- 오만 쇼크가 벌어진 이후 공항에 토마토와 날계란 던지러 가자고 선동한 네티즌이 있었다. 그런데 이 네티즌은 스포츠조선 측의 기자였고, '축구협, 성난 네티즌들 '집단행동' 예고에 긴장'이라는 제하의 조작 기사까지 작성했다. 해당 기자는 기사를 일부러 조작한 게 아니라고 변명했지만, 당시에도 악랄한 기레기들의 수작을 잘아는 네티즌들은 이를 믿지 않았고, 해당 기자는 결국 해고되었다. #
- 대한민국과는 안 좋게 헤어졌음에도, 대한민국에 대한 감정은 좋은 듯하다. 인터뷰 참조
- 코엘류호 당시 그의 지도를 받았던 이천수는 그를 전술적으로 가장 뛰어난 감독이며 그가 오래 있었다면 대한민국 축구가 더 건강해졌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호평한 바 있다. 또한 코엘류 자체가 원체 성격이 다정다감하고 인종과 국적이 다른 대한민국 선수들을 상대로도 감싸주는 모습을 많이 보여서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 반면 조광래는 코엘류를 미친 듯이 깠다.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조광래 항목 참고.
6. 둘러보기
UEFA 유로 2000 참가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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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후 코엘류가 국대를 은퇴한 1983년 이후 포르투갈은 유로 1984 4강에 진출한다.
[2]
이 시절 월드클래스급 선수들에게 미국은 외도 또는 유람격으로 한두시즌쯤 다녀오는 것이 유행이었다. 코엘류가
미국에서 활약했던 시절 NASL 올스타 2진에 선발됐었는데, 1진 멤버가
펠레,
프란츠 베켄바워,
고든 뱅크스,
조지 베스트였으니 말 다한거다.
[3]
코엘류는 선수 시절부터 콧수염을 길렀다.
[4]
물론 2000년 시점에도 피구와 루이 코스타, 주앙 핀투 등은 월드클래스 선수들로 분류되었기에 당시 포르투갈의 공격력만큼은 세계적 수준이라는 평을 들었다. 하지만 지명도가 부족했던 선수들의 수준은 베일 속에 가려져 있었기에 당시 포르투갈은 A조 내에서는 잉글랜드, 독일 다음의 3순위 전력으로 평가받는 편이었다.
[5]
2006 월드컵 네덜란드와의 혈전에서 퇴장당하는 그 선수 맞다. 사실 후이 코스타를 빼고 홀딩 미드필더인 코스티냐를 넣은 교체 자체가 승점 1점만 챙기자는 의도가 강했다.
[6]
잉글랜드를 이겼기 때문에 승자승 우위로 1위 확정이었다.
[7]
여담으로 독일은 이렇게 광탈하면서 녹슨 전차군단이라는 멸칭을 얻고, 에리히 리벡이 물러나고 대신 루디 푈러가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절치부심한 결과 2002 월드컵에서 준우승까지 기록한다. 참고로 이 때 같은 시각 잉글랜드도 루마니아에게 패하면서 숙적 둘이 같이 손잡고 광탈했다.
[8]
이 판정이 당시에도 엄청난 논란이었고 지금까지도 뒷얘기가 많다. 사비에르가 공으로 손을 쳐냈다기보다 공이 손에 와서 맞은 쪽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지단의 골로 경기가 끝난 후에도 포르투갈 선수들은 심판들을 둘러싸고 거세게 항의했고, 이 과정에서
누누 고메스와
파울루 벤투가 심판을 심하게 모욕했다는 이유로 5개월 출장 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피구는 지단이 페널티킥을 차기 전부터 이미 분노하며 유니폼을 벗고 피치를 빠져나가기도 했다.[12] 그리고 이 페널티킥을 지시한 주심이 바로 2년전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하석주를 퇴장시킨
오스트리아 출신의 심판 귄터 벤쾨다.
[9]
콘세이상에게 해트트릭을 허용하는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독일은 녹슨 전차라는 비웃음 속에서도 꾸역꾸역 승리를 챙기며 월드컵 결승까지 올랐고, 역시 8강에서 누누 고메스에게 멀티골을 내주며 패한 터키는 비록 대진운이 다소 따랐다고는 하나 월드컵 3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잉글랜드 역시 비록 아르헨티나전에서 마이클 오언의 헐리웃 액션 논란이 있기는 했지만 대회 최악의 죽음의 조로 평가받던 F조를 뚫고 8강까지 올랐다.
[10]
애초에
포르투갈어는 언어학적으로 영어와 제법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에 작심하고 배우면 다른 언어 사용자들보다 쉽게 익힐 수 있지만, 생각보다 포르투갈어 화자들의 영어 구사율은 높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선수 생활 후반기인 1977년에 현
MLS의 전신 격인
NASL 소속 라스베가스 퀵실버스에서 잠시 동안 선수 생활을 한 적이 있다. 잠깐 있었던 터라 영어를 굳이 해야 하는 환경이 아니었다 보니, 배울 필요성을 못 느낀 듯하다. 2018년에 대한민국의 감독을 맡게 된
파울루 벤투는 공식 석상에서 영어를 이용한다.
[11]
문서 초반의 선수 경력을 보면 알 수 있듯, 주로 모국인
포르투갈에서 선수 생활의 대부분을 보냈고 인접 국가인
프랑스에 3년 간 있었다. 지도자 생활은 주로 포르투갈에서 했으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기 전에는
모로코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는데
모로코는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였고 현재까지도
프랑스어가 많이 통용되는 국가이다.
[12]
이는 '동료 바이아 키퍼를 믿지 못한 행동이다'라며 피구 안티들에게 꽤나 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