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0 17:43:19

민망 황제

완복교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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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우옌 왕조 제2대 황제
민망 황제
明命帝 | Minh Mạng
파일:명명제.gif
출생 1791년 5월 25일
대월 떠이선 왕조 지아딘
(現 베트남 호찌민시)
사망 1841년 1월 20일 (향년 49세)
대월 응우옌 왕조 후에 후에 황궁
(現 베트남 후에시)
능묘 효릉(孝陵)
재위기간 응우옌 왕조 황태자
1815년 ~ 1820년 2월 14일
제2대 황제
1820년 2월 14일 ~ 1841년 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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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AFA00><colcolor=#DD1E1F> 성씨 응우옌(Nguyễn, 阮/완)
푹담(Phúc Đảm, 福膽/복담)
→ 푹끼에우(Phúc Kiểu, 福晈/복교)
부모 부황 세조 고황제
모후 순천고황후
형제자매 13남 18녀 중 4남
배우자 좌천인황후 외
자녀 78남 64녀
종교 유교
묘호 성조(聖祖)
시호 체천창운지효순덕문무명단창술대성후택풍공인황제
(體天昌運至孝純德文武明斷創述大成厚宅豐功仁皇帝)
연호 민망(Minh Mạng, 明命/명명), 1820년 ~ 1841년)
}}}}}}}}} ||

1. 개요2. 생애
2.1. 태자 책봉 논쟁2.2. 즉위 후
2.2.1. 중앙집권 황권 기반을 다지다2.2.2. 피휘 정책과 종실지위 정리2.2.3. 경제2.2.4. 과거제도 개혁2.2.5. 유학 숭배 정책2.2.6. 군사
2.3. 들끓는 반란
2.3.1. 레반코이의 난2.3.2. 참파의 봉기2.3.3. 농반반의 난
2.4. 정복 사업
2.4.1. 라오스 정복2.4.2. 캄보디아 정복과 탄압 정책
2.5. 가톨릭을 금지하다2.6. 보수 정책2.7. 서양 문물2.8. 사망
3. 평가4. 기타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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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제2대 황제. 묘호는 성조(聖祖). 시호는 체천창운지효순덕문무명단창술대성후택풍공인황제(體天昌運至孝純德文武明斷創述大成厚宅豊功仁皇帝). 즉위 전에는 응우옌푹담(Nguyễn Phúc Đảm, 阮福膽, 완복담)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나, 즉위 후에는 이름을 응우옌푹끼에우로 고쳤다. 연호는 명명(明命)이며 연호를 따서 명명제(明命帝)라 부른다.

1838년 국호를 대남(大南)으로 바꾸었다. 남(南)은 이전 리 왕조 시기에도 북방의 중국과 자신들을 빗대 남제(南帝)에서 칭하는 등 유서 깊은 단어이며 베트남을 나타내는 단어라 보면 된다.

라오스, 캄보디아, 참파를 병합하면서 제정 베트남의 최전성기를 누렸고 중앙집권제에 성공하여 왕권을 강화시켰다. 또한 이전에 자롱 황제를 도와준 프랑스와의 외교, 서양의 문물 수용으로 베트남의 근대화가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2. 생애

2.1. 태자 책봉 논쟁

파일:가륭제(세조).jpg 파일:완복경.jpg
아버지 자롱 황제 일찍 죽은 형 응우옌푹까인[1]

응우옌푹담은 자롱 황제의 4남으로 진씨(순천고황후, 陳氏) 소생이다. 당시 가정을 기반으로 한 광남국 탕롱(하노이)을 기반으로 한 북쪽의 떠이선 왕조와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응우옌푹담은 1791년에 태어났다. 세 살때 송씨(승천고황후, 宋氏)에게 양자로 들어가 자랐고 1801년 형 응우옌푹까인이 죽어 태자가 공석이 된 상황에서 1814년 황후 소생의 이복동생과 송황후도 사망하자 태자로 책봉되냐 마느냐에 잠시 논쟁이 생기기도 했다.

신하 레반주옛과 리치(Lý Chí, 黎質, 여질)는 응우옌푹담이 서자라는 이유로 장손 응우옌푹단(Nguyễn Phúc Đán, 阮福旦, 완복단)[2]을 태손으로 세우도록 요청하며 반대했으나 자롱 황제가 응우옌푹담은 송황후의 양자로 들어가 적자로 인정되기에 충분히 태자에 책봉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었다. 응우옌푹담을 사실상 태자로 인정하려 하자 대신 응우옌푹타인(Nguyễn Phúc Thành, 阮福誠, 완복성)은 응우옌푹담의 생모가 살아있기에 축문제사[3]에 모친의 이름을 쓰면 안된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자롱 황제는 버럭 화를 냈다.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제사를 드리는 건데 문제가 있는가? 따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송황후의 아들 신분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며 그를 사실상 원자(元子)로 여겼고 이듬해 정식 태자로 책봉했다.

2.2. 즉위 후

파일:명명제.jpg

응우옌푹담은 아버지 자롱 황제가 1820년 죽자 이어서 즉위했고, 이름을 응우옌푹끼에우로 개명했다. 그는 자롱 황제 때 설치된 서원을 폐지하고 문서방(文書房)[4]으로 바꾸었으며 청나라의 제도를 참고해 관직을 새로이 정하는 개혁정치를 펼친다.

2.2.1. 중앙집권 황권 기반을 다지다

우선 관직 1품부터 9품까지 각각 정(), 종()으로 구분했고 문서방을 내각으로 삼아 각 순무의 3, 4품 관원을 불러 국가업무를 담당하게 했다.

그리고 가정성(嘉定城)의 총진(總鎭)을 폐지하고 의 행정제도를 참고해 전국의 27개 (鎮)을 30개 =1(府)로 통폐합하고 그 성 이하에 부와 (縣), (州), 총(總)을 두었다. 자롱 황제 땐 군인들이 지역의 군사와 백성을 관리해 조정의 명령을 거부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민망 황제는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고 중앙집권화를 강화하였다.

또한 성으로 바꾼 후엔 순무, 포정사, 안찰사, 영병관(領兵官)의 관직을 마련해 조정에서 파견하여 임명시켰다. 순무는 성 내의 정치, 교육을 담당하였고, 포정사는 조세, 정전(토지배분), 징병을 담당하고 조정의 명령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안찰사는 영병관을 비롯해 군대를 담당했다.

그리고 중요한 성에 대신 총독에 임명시켜 순무의 자격으로 시찰과 경계를 호위하게 했다. 소수민족에 대해선 토지를 개척해 귀류하게끔 했고 현지의 추장을 지주로 임명해 그들을 안정시켰다.

송나라 추밀원, 청나라 군기처를 참조해 기밀원을 설립했다. 기밀원은 4품 이상의 대신을 파견했고 그 대신들은 임금의 특명을 이행한다는 자격을 표시하기 위해 금패를 착용하게 했다. 그 산하 관료로는 원외랑, 주사, 사무, 편수가 있는데 각 부에서 선발했다.

민망 황제는 백성의 삶에도 관심을 기울여 하노이(당시에는 북성) 곳곳에서 빈부격차와 도박, 낭비를 방지하기 위해 배무선(裴茂先)의 건의를 받아들여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쳤고 또한 부정부패한 관료를 처벌했다. 이후 십조성훈(十條聖訓)을 반포했고 북성 각지에 지금의 복지관과 비슷한 기관을 설립해 홀아비와 장애인을 데려와 그곳에서 살게 했다.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 청나라부터 양렴 제도(養廉制度)를 수용해 관료들의 봉급제를 명확히 정했다.
  • 1품 ~ 3품 - 1년에 두번
  • 4품 ~ 7품 - 각 4계절이 끝나갈 때 쯤 한번씩.
  • 8~9품 이하는 한달에 한 번 봉급을 받는다.

2.2.2. 피휘 정책과 종실지위 정리

황실 계보를 정리해 열성옥보(列聖玉譜)를 편찬한 후 이후엔 20자를 정해 후대의 군주들에게 이 법칙에 따라 휘를 짓게 하였고 2자 명칭을 소자(小子)로 바꾸었다.
暶時昇昊明 昪昭晄晙晪
智暄暕晅㬏 晊晢曣曦㫟

동시에 민망 황제는 제계시(帝系詩)와 번계시(藩系詩)를 지어 직계 후손의 명명법(제계), 형제의 자손이 쓸 이름의 명명법(번계)를 제정했다.
綿洪膺寶永 保貴定隆長 賢能堪繼述 世瑞國嘉昌 - 帝系詩
면면히 넓혀온 나라 보배로운 영원함을 품고 귀함을 지키니 커게 번성함이 정해졌도다. 현명하고 유능한 (인재는) 선제(先帝)가 남긴 뜻과 사업을 이음을 견디니 누리는 상서롭고 나라는 기쁘게 번창한다.

돌림이름을 쓴 후에는 자신이 정한 부수가 들어간 한자로 이름을 지어야 했다. 하지만 만약 황제로 즉위한다면 위 이름으로 개명해야 했다.
綿+宀,洪+亻,膺+礻,寶+山,永+玉,保+阜,貴+亻,定+言,隆+才,長+禾,賢+貝,能+力,堪+才,繼+言,述+心,世+玉,瑞+石,國+火,嘉+禾,昌+小。
  • (즉위 전 이름) 티에우찌(소치) 황제(阮福綿宗), 뜨득(사덕) 황제(阮福洪任)

동년 종인부를 설립해 황실 내의 모든 정무를 보도록 했다. 응우옌 왕조의 방계 종친이 많자 일부 신하의 건의로 조조 황제와 예종을 조상으로 하는 먼 방계 황족의 성을 빼 종친의 지위를 없앴다. 이 종인부는 성조의 아들 소치시기 피휘문제로 존인부(尊人府)로 개명된다. 또한 종실도 존실(尊室)로 개명되었다.

1839년 성조는 아들 티에우찌 황제(즉위하기 전이라 장경공)의 건의로 황조종보(皇朝宗報)를 편찬해 응우옌 왕조 광남국을 계승한 것을 기록했다.

2.2.3. 경제

파일:명명통보.jpg
민망 황제의 비룡전(飛龍錢). 1833년에 주조되었다

민망 황제 시기 경제는 자롱 황제 때와 큰 차이는 없다. 다만 자롱 황제 땐 가정성에 재결권, 임명권 등을 다시 회수해 황제가 직접 체결하게 했다.

1836년 민망 황제는 가정성의 토지를 측량, 징수했고 자신의 연호를 딴 명명통보(明命通宝)를 주조하였다. 명명통보는 뒷면에 사서오경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한편 자롱 황제 때부터 생산해 온 백연전(白铅錢)[6]을 널리 보급했는데 무겁고 가치가 낮아 유통이 어려웠고 당시 환율로 따지면 백연전 3개가 약 1000전에 불과했다. 민망 황제는 백연전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铅钱之用,富户既不敢私藏,而邻国来商者又不敢带回。此钱流通非但利于民,亦利于国,乃自然只利也」。
백연전의 유용성은 부자들이 숨길 엄두를 못 내며[7], 외국의 상인들이 경제에 침투할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한다.( 독점)
유통은 백성과 나라에 자연히 이롭게 될 것이다.

백연전은 중국의 오대십국시대 마초(馬楚)의 연철전(铅铁钱)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2.2.4. 과거제도 개혁

자롱 황제 제위 당시 과거제도는 향시(鄕試, 1차 시험)만 보았는데 민망 황제는 향시를 본 자가 다시 시험을 치르는 회시(會試) 제도를 만들었다. 그리고 원래 6년에 한 번 있던 과거 시험을 3년에 한번으로 고쳤다. 그리고 부방(副榜)을 두어 향시에 합격해도 제한 인원수 안에 들지 못해 등용되지 못한 자를 위해 국자감에서 일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민망 황제는 한편으로 과거제도는 학업의 획일화로 모든 분야의 연구 발전을 진부하게 만들어 국가 발전에 해를 끼친다고 생각했고, 이를 해결하려 했으나 이미 사회에 뿌리내린 과거제도를 급작스럽게 바꾸면 사회에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고 판단해 점진적으로 과거제를 고쳐나가기로 했다.

2.2.5. 유학 숭배 정책

민망 황제 본인도 학문을 가까이 했고 많은 독서를 했으며 시, 유학(학문), 공자, 맹자를 숭상했다. 시집 두 권을 작성했고 그의 아들 일부도 시를 가까이 했다.

민망 황제는 유학의 보급에 신경썼고 치세 동안 여러 마을에서 봄, 가을마다 공자를 위한 제사를 거행했다. 국사관을 만들어 국사를 편찬했고 장려했으며 그의 치세동안 판타인잔, 레꽝딘(Lê Quang Định, 黎光定, 여광정), 판후에쩌우(Phan Huệ Châu, 潘輝注, 반휘주), 꿍반히(Cung Văn Hỉ, 龔文曦, 공문휘), 호앙껑따이(Hoàng Công Tài, 黃公才, 황공재), 응우옌딘찐(Nguyễn Đình Chính, 阮廷正, 완정정), 응오반티에우(Ngô Văn Tiêu, 武文鑣, 무문표)를 비롯한 유학 가문 출신 명재상들이 등장했다.

민망 황제의 유학 숭배 정책으로 베트남 유학은 16세기 후반 후여조 유학의 황금시대에 이어 다시금 번성했다. 유학 교육도 중시하여 어린이가 서당을 다닐 때 사서오경을 가르치게 했고 주자의 소자집주(小学集注)를 대량인쇄하여 널리 보급했다.

또한 1839년 민망 황제는 제후왕 자격으로 당시 청나라 황제였던 도광제에게 청하여 강희자전을 자국인이 배울 수 있게 허락받았고 서당의 수업, 정부 공문서, 과거 시험에는 한자만 사용하고 쯔놈은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민망 황제는 한자를 채택했음에도 중어문학은 탄압하는 모순적인 태도를 취했는데, 이는 중어문학들이 당대 사회의 어두운 면을 묘사했기 때문이다. 불편한 진실을 감추는 그의 태도는 마치 후대의 베트남을 보여주는 듯 했다.

2.2.6. 군사

治國必有武備
나라를 다스림에는 무조건 군비가 있다. - 명명(明命)

민망 황제 시기의 병종은 보병, 수병, 상병(象兵)[8], 기병, 포병 5 종류로 나뉘었다.

보병은 경병(京兵)과 기병(奇兵)으로 나뉘었다. 경병은 경성을 수비하는 병사로 편제상으로는 영(營), 위(衛), 대(隊) 3개의 계급으로 나누었으며 이 중, 위는 두 개의 신공포, 이백 여개의 소총과 깃발을 사용했다. 경병은 경성을 지키지만 비상시엔 외부로 출병할 수 있었으며 기병은 다시 기(奇)와 대로 나뉘었다.

상병의 편제는 대대로 매 대에 40마리의 코끼리를 지급했으며 황제는 상병이 움직일 때 몇 명의 수의사를 파견했다.

수병은 도합 15위, 3대대로 나뉘며 민망 황제는 해안 방어를 중시했기에 수군을 자주 훈련시켰으며 포대를 자주 점검했다.

민망 황제 본인은 위의 말처럼 군사력을 매우 중요시 했지만 실제 조정에선 무(武)를 경시했고 현지의 관리들 역시 군사 훈련에 대해선 무관심했다. 당시 군대는 병사의 부족과 노후한 군사시설 등 문제가 많았고 민망 황제는 이를 인지했음에도 고치지 못했다. 군사력의 약화는 완조의 쇠퇴를 불렀으며, 더 나아가 손자 대에 외세의 침략으로 황실이 멸망 직전까지 가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2.3. 들끓는 반란

응우옌 왕조는 1802년 떠이선 왕조를 무너뜨리고 전역을 통일했지만 북성 일대에는 후 레 왕조의 지지파가 많이 남아 있었다. 여기에 관료들의 부정부패까지 겹쳐 민심이 흉흉해졌고 1822년 북성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나 통제력이 먹히지 않게 되었다. 민망 황제의 치세 동안 북쪽 지방엔 무려 254차례 농민봉기가 일어났고 그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은 판바퐁(Phan Bá Phong, 潘伯鑅, 반백횡), 여유량(黎維良), 농반반(Nông Văn Vân, 農文雲, 농문운)이 주도한 반란들이다.

남쪽의 가정성에서는 레반코이(Lê Văn Khôi, 黎文𠐤, 여문회)가 반란을 일으켰고 이 반란에는 시암군과 프랑스 선교사들이 개입했다. 이 봉기들은 완조에 심한 타격을 입혔으며 사실상 국가가 통제되지 않을 정도였다.

2.3.1. 레반코이의 난

파일:조셉의 처형 장면.jpg
응우옌 왕조의 관료들에게 처형당하는 조제프 선교사

민망 황제는 1831년 개혁을 시행해 총진을 폐지하고 총독, 포정사, 안찰사, 청나라를 본떠 만든 중앙집권제를 추진하여 성(省) 등을 나누었다. 이후 레반주옛[9]의 가정총진을 폐지한 후 번안성(藩安省)으로 이름을 바꿔 바익쑤언위엔(Bạch Xuân Nguyên, 白春元, 백춘원)을 포정사로 파견했고 그곳을 다시 국가 관할로 돌리려고 했다. 그리고 레반주옛의 죄를 물어 그의 무덤을 파헤쳤다.

레반주옛의 양자 레반코이는 양부의 부관참시와 중앙집권 정책에 반발하여 결국 난을 일으켰다. 레반코이 세력은 포정사 바익쑤언위엔과 그 가족들을 붙잡아 처형했다. 번안총독 응우옌반꾸이(Nguyễn Văn Quý, 阮文桂, 완문계)가 군대를 거느리고 난을 진압하려 했으나 패배, 피살당했다 레반코이는 스스로 대원수를 칭했으며 채공조(蔡公朝)를 출병시켜 가정의 성 6개를 점령했다.

레반코이는 더 나아가 프랑스의 선교사 조제프 마르샹(Joseph Marchand)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며 응우옌푹까인[10]의 아들 응우옌푹미드엉(Nguyễn Phúc Mỹ Đường, 阮福美堂, 완복미당)을 황제로 옹립할 것을 계획했으며[11] 베트남의 국교를 가톨릭으로 만들겠다고 하였다.

민망 황제는 츠엉민장(Trương Minh Giảng, 張明講, 장명강) 등을 출병시켜 레반코이를 토벌하려고 했다. 설상가상으로 부하 채공조가 배신하여 레반코이는 자신의 근거지인 번안성에서도 불리한 싸움을 진행해야 했다. 결국 시암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라마 3세의 수륙군이 베트남 관군을 공격하자 츠엉민장은 시암군을 격파하고 캄보디아 일대의 왕 안찬 2세(安贊二世)를 납치하여 시암에 대항했고 보살성(菩薩城) 일대를 점령한다. 오래지 않아 시암군을 격파하고 반군의 기세가 떨어지는 중 레반코이가 1834년 병으로 죽고 그의 8살 난 아들 레반꾸(Lê Văn Cù, 黎文鴝, 여문구)가 뒤를 이었으나 반군의 근거지인 번안성이 함락되어 난은 진압되었다. 레반꾸를 비롯한 반란의 주동자들은 능지형으로 처형당했고 조정의 친 가톨릭 인사들과 선교사들도 처형당했다. 그리고 시암이 반군을 지원했다는 점 때문에 두 나라의 관계는 파탄나게 된다.

2.3.2. 참파의 봉기

레반코이가 난을 일으킨 후 순성(順城)[12]에서도 참족이 독립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순성 정권은 참족의 자치구역으로 응우옌 왕조가 점성왕 작위를 책봉하여 그곳을 다스리게 했는데 완조는 1832년 레반코이 사망 후 순성 정권에도 개토귀류(改土歸流)[13] 정책을 집행한다. 참파왕(제후) 응우옌반타인(Nguyễn Văn Thanh, 阮文承, 완문승)[14]이 순성을 귀속을 청한 걸 구실로 순성의 제도를 폐지하고 순성의 이름을 평순진(平順鎮)으로 바꾸었다.

이 시기부터 참파 왕국은 멸망했고 완조는 그들의 문화를 탄압하여 완전환 동화를 유도한다. 황제가 임명한 조정의 관리들은 그들의 풍습을 존중하지 않고 참족의 불만은 나날이 커져갔다. 1832년 이슬람 교단의 지도자가 참파의 독립을 호소하였으나 좌절되고 참파의 베트남화 정책은 무슬림들에게 도마뱀, 돼지고기를 먹이는 등 과격해져 갔다.

한편 완조의 관군이 레반코이 세력과 대치하는 도중 순성에선 응우옌반타인과 그의 부왕(副王)[15] 응우옌반위엔(Nguyễn Văn Nguyên, 阮文元, 완문원)이 1834년 완조를 ' 강도'라 부르며 봉기를 일으켰다. 이 봉기에는 라글라이족, 격하족(格贺族), 사정족(斯丁族) 등도 합세한 대규모 봉기였다. 부안(富安), 경화(慶和), 평순(平順) 3성 일대에서 일어난 반란은 배공훤(裴公諠), 레득치엔(Lê Đức Chiến, 黎德漸, 여덕점)이 토벌에 나섰으며 난에 합세한 참족과 기타 민족을 학살했다. 이 반란은 1835년 응우옌반타인과 응우옌반위엔이 조정으로 끌려가 능지처참을 당하는 걸로 진압되었고 동시에 정왕과 부왕이 사형당함으로써 참파도 완전히 멸망했다.

2.3.3. 농반반의 난

레반코이가 난을 일으키자 그의 사위였던 농반반도 1833년 보악주(保樂州)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농반반은 보악주(고평) 따이족(岱依族) 지주였는데 반란을 일으켜 성을 함락하고 스스로를 절제상장군(節制上將軍)이라 칭한 뒤 원륭통보(元隆通寶)까지 주조하였다. 농반반 세력은 북성을 공격했고 응우옌께헤(Nguyễn Kế Hề, 阮克和, 완극화)란 자의 세력도 합세했다.

민망 황제는 레반득(Lê Văn Đức, 黎文德, 여문덕), 완공저(阮公著) 등을 보내 반란을 진압하게 했으나 농반반이 양산(諒山)을 에워싸는건 매우 빨랐기 때문에 타꽝꺼(Tạ Quảng Cư, 謝光巨, 사광거)까지 파견했다. 농반반은 망인(芒人) 등을 끌여들어 밀림에서 관군과 게릴라전을 벌였고 관군의 피해는 커져갔다. 타꽝꺼는 양산을 포기하고 고평만 다시 수복했으며 레반득과 완공저가 보악주를 공격하자 농반반은 머리를 밀고 청나라로 도망갔으며 사위 반꽝똥(Vân Quảng Tông, 雲光總, 윤광총). 사촌 동생 농반타익(Nông Văn Thạch, 農文仕, 농문사), 농반썩(Nông Văn Sóc, 農文碩, 농문석)은 도망간 농반반 대신 관군에게 저항하여 세력을 유지했다. 농반반이 중국으로 도망갔다는 사실을 안 관군은 철수했고 관군이 물러나자 농문운은 보악주로 돌아왔다.

이후 1834년 완조의 관군이 보락주를 포위하자 농반반과 그 일가는 청나라로 다시 도망갔지만 도주한 일이 있었던 후로 응우옌 왕조가 청나라에게 농반반의 도주를 다 말했기에 농반반 일가는 다시 응우옌 왕조로 압송되었다. 농반반은 숲속으로 숨었지만 범문전(范文典)은 그가 숨은 숲 전체를 태워버렸고 그 일가가 처형되면서 난은 진압되었다.

2.4. 정복 사업

2.4.1. 라오스 정복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Vientiane%2C_Chao_Anouvong_Park_%286031888461%29.jpg
아누웡(세타티랏 5세)의 동상

1826년 시암의 통치에 비엔티안 왕국의 아누웡[16]을 비롯한 라오스인(추장을 비롯한 부족)들이 독립을 위해 난을 일으켰으나 시암왕 라마 3세가 보낸 보딘데차에게 패배하자 아누웡이 베트남의 민망 황제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민망 황제는 바로 판반투이(Phan Văn Thúy, 潘文璻, 반문취)를 비롯한 대군을 지원해 그들을 구원하고 아누웡을 예안으로 맞이한다.

이후 아누윙이 점령당한 비엔티안의 수도 만상 수복을 꾀하자 민망 황제는 이번에도 지원군을 보냈는데 저번과 다르게 중립적인 태도로 일관하다 아누웡이 패배했고 그가 지원을 다시 요청했다. 민망 황제는 그 지원을 거절했고 단순 순찰만 적당히 하다가 아누웡은 씨앙쿠앙 왕국[17]의 소내[18]의 배신으로 붙잡힌 후 시암으로 보내져 처형당한다.

이후 시암이 다시 라오스를 공격하자 라오스의 각 부족들은 다시 베트남에 구원을 요청한다. 베트남의 장수 범문전(范文典)과 리당다인(Lý Đăng Doanh, 黎登瀛, 여등영)이 세 갈래로 나눠 라오스에 진군하자 보딘데차는 더이상 싸우지 않겠다는 뜻을 보인 뒤 철수했다. 이후 민망 황제는 씨앙쿠앙의 소내를 진녕방어사(鎮寧防禦使)로 책봉했고 쩐닝 부(phủ Trấn Ninh, 鎭寧府) 등 6부(府)를 설치하여 간접 통치를 하였다. 이후 소내가 조공을 상납하지 않았다는 죄를 물어 그를 처형시킨 뒤 완조의 신하 타꽝꺼를 보내 그곳을 통치하게 했다.

2.4.2. 캄보디아 정복과 탄압 정책

캄보디아는 이미 시암과 광남국의 이중 속국인 상태였다. 1834년 민망 황제는 레반코이의 반란을 틈타 캄보디아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츠엉민장을 보내 캄보디아를 공격한다. 츠엉민장은 그곳에서 캄보디아 내정에 간섭했고 군대를 주둔하였다.

같은 해 앙 찬 2세가 병사하자 그의 딸이자 꼭두각시 여왕 앙 메이(អង្គម៉ី)를 세워 캄보디아를 쩐떠이 성(Trấn Tây thành, 鎭西城), 프놈펜은 쩐떠이 부(鎭西府)로 삼아 베트남의 한 지역으로 완전 병합하고, 캄보디아의 모든 문물을 베트남식으로 고쳐(개토귀류) 완전히 동화시키려고 하였다.

완조는 중화를 자부하며 이전부터 캄보디아, 시암을 미개한 오랑캐로 여겨왔기에 자신들의 문화가 뛰어나다 생각해 베트남의 문화를 강요하였다. 크메르족에게 한자를 쓰게 하고 한자 이름으로 바꾸게 하였으며 군대를 베트남식으로 편제하고 군관의 대부분은 베트남인이 맡게 하였다. 만약 전쟁이 나면 크메르인들을 앞에 세워 고기방패로 쓰고 총기를 가진 베트남군이 뒤에서 사격하는 방식이였다.

또한 의복을 강제하고 머리를 기르도록 했으며 캄보디아인들이 신봉하는 불교를 탄압하여 승려들에게 불교의 절을 훼손케 했고 1840년 여문덕을 파견해 징세, 토지, 무역에 관여하였다. 베트남인들은 캄보디아인들의 땅을 빼앗았으며 이같은 행위는 캄보디아인들의 불만이 쌓여 반월봉기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2.5. 가톨릭을 금지하다

1825년 프랑스인 선교사 로제롯(Rogerot)이 다낭에 도착해 각지에 선교하는 일이 있었다. 민망 황제는 서양의 선교에 부정적이었기에 가톨릭 탄압 정책을 실시했다.
西方之道為左道,迷惑人心,敗壞風俗,故應嚴禁之,以使吾民信奉正道。
서양의 도는 사람을 미혹시키고, 풍속을 해치는 것이므로 이를 엄금하여 우리 백성을 올바른 길로 이끌도록 하라.

이후 민망 황제는 전국 각지의 선교사들을 순화로 불러 가둔 다음, 프랑스 서적을 번역하여 선교활동을 막게 했고, 동년 가톨릭 신자들에게 가톨릭을 버리고 선교사를 신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한 1833년 레반코이가 가톨릭 신자와 합세하고 장손 응우옌푹미드엉을 황제로 옹립하려 했다는 사실이 그의 불안감을 자극했으며, 이런 불안감으로 그의 가톨릭 탄압은 더욱 강화되었다. 1900년 공개된 교황 레오 13세의 주장에 따르면, 민망 황제의 치세 중 베트남에서 가톨릭 순교자 명단에 오른 사람들은 다 처형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가혹한 탄압은 민망 황제와 손자 사덕제가 가장 심했다. 민망의 가혹한 탄압으로 민망 황제는 서양에선 폭군으로 자주 등장하고, 동양의 네로라고 불렸을 정도였다. 조선에서도 비슷한 시기인 순조 헌종 치세에 가톨릭 박해[19]가 대규모로 이루어졌음을 생각하면, 이 역시 한국사와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다.

2.6. 보수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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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바티스트 쉐뇨(Jean-Baptiste Chaigneau), 응우옌반탕(Nguyễn Văn Thắng, 阮文勝, 완문승)의 초상화[20]

일찍이 민망의 부친 자롱 황제도 자신을 지원한 프랑스의 선교를 허용하였으나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고 자롱 황제가 장손이 아닌 민망을 태자로 책봉한 이유도 민망 즉위 전 서양에게 경계심과 의구심을 갖던 것에 주목하여 반불 성향인 그에게 황위를 넘긴 것이였다. 무엇보다 자롱 황제는 죽기 전 유럽, 프랑스에게 어떠한 호의도 베풀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1821년 장바티스트 쉐뇨가 프랑스 국왕 루이 18세의 국서를 가지고 베트남으로 돌아와 민망 황제와 통상에 관해 회담을 나누었고 민망 황제도 통상 조약 체결 의사를 밝혔다. 조약에는 프랑스인은 베트남 법률을 준수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그러나 1824년 쉐뇨가 신분 문제로 함장에게 민망 황제를 접견하는걸 거부당하고 프랑스로 돌아가자 민망 황제는 프랑스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고 이후에도 프랑스 함대가 통상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다. 또한 프랑스와의 국교를 중단하고 미국의 대통령 앤드루 잭슨의 국교 요청도 거부한다.

2.7. 서양 문물

다만 민망 황제는 서양 문물의 도입에는 긍정적이었는데, 가톨릭 탄압 정책은 상술했듯 선교사를 순화로 불러 프랑스 서적을 번역하게 했고 1834년 산업혁명이 일어난 걸 알고 수화기제(水火記濟) 공장을 설립하여 베트남 역사상 처음으로 증기기관차를 제조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민망 황제 치세에 베트남에서 자본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

또한 천연두를 예방하기 위해 프랑스 출신의 의사 장 마리 데스피오(Jean Marie Despiau)를 불러 황실의 종친이 백신을 접종하게 했고 민망 황제는 이러한 정책으로 당시 서양의 발전을 이해하고자 했다.

2.8. 사망

민망 황제는 보수적 성향을 지녔음에도 급변하는 세계 정세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네덜란드가 청나라의 광둥을 침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청나라가 곧 쇠퇴할 것을 예측했다. 청나라하고 조공관계는 유지하였으나 얼마 안가 제1차 아편전쟁이 발발했고 청나라가 졌다는 사실에 민망 황제는 영국이 자신들마저 침략할 것을 걱정한다. 민망 황제는 곧바로 베트남 사절단을 프랑스에 파견해 영국에 대항하기 위한 프랑스와 외교관계를 맺고 서방 세력과 의논하기를 원했다. 프랑스 수도에 도착한 사절단은 루이필리프에게 면담을 청했으나 서방세력들은 '베트남은 이교도 약소국' 이란 이미지를 갖고 있었기에 그들은 면담은커녕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채 귀국한다.

민망 황제는 1841년 1월 20일 기운이 쇠해 향년 50세로 사망하였다. 여러 신하들을 불러 태자를 보좌할 것을 청했고 효릉(孝陵)에 매장되었다.

3. 평가

사실상 제정 베트남의 마지막 명군으로 이후 베트남은 프랑스의 본격적인 침입으로 공식적인 사직만 유지한 채 허수아비 황제들이 세워졌다가 제정이 폐지되고 만다. 민망 황제의 치세는 응우옌 왕조, 그리고 제정 베트남의 최전성기였으며 서양의 문물을 수용했다는 점에서 베트남의 근대화를 시도했다는 증거가 된다. 또한 법률제도 개혁을 진행해 국가의 기강을 확립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보수적인 태도와 가톨릭 신도들을 처형하여 서방과 관계를 중단함과 동시에 베트남을 외교적 고립에 빠트린 암군이란 평, 소수민족 강제 동화 정책으로 반발을 불러온 폭군이란 평이 공존한다. 이 보수 정책은 후대의 소치제, 사덕제 까지 이어지고 둘의 가혹한 가톨릭 탄압 정책은 (프랑스의 억지 침략 명분도 있지만) 결국 왕조가 멸망에 가까워지는 비극적인 결말을 낳았다.

4. 기타

  • 응우옌 왕조의 실록인 『대남식록(大南寔錄)』에 기록된 반 가톨릭 정책과 관련해 재밌는 일화가 하나 있는데, 민망 황제와 신하들이 성경 노아의 방주 바벨탑이 나오는 대목을 읽고 황당무계한 헛소리로 간주했다고 한다.
  • 슬하 아들이 78명, 딸이 64명으로 총 142명에 달하는 엄청난 수의 자식을 낳았다. 그 때문인지 베트남에서는 정력의 상징으로 유명하다. 이 황제 연호에서 따온 민망주도 있을 정도다.[21]이름 그대로 민망하다
  • 1471년 이후 명맥만 유지하던 참파국을 1832년에 완전히 병합한 황제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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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롱 황제 카이딘 황제 바오다이 황제
응우옌푹까
(영예태자)
응우옌푹
(민망 황제)
응우옌푹빈투이
(바오다이 황제)
응우옌푹바오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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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阮福景(완복경, Nguyễn Phúc Cảnh, 1780 ~ 1801). 자롱 황제의 장남으로 7살의 나이에 프랑스로 건너가 동맹을 체결했다. [2] 이후 응우옌푹미드엉(Nguyễn Phúc Mỹ Đường, 阮福美堂, 완복미당)으로 개명했다. [3] 태자 책봉 등을 선조들에게 알리는 의식. [4] 정부의 공문서, 황제의 조칙을 담당하는 공간이다. [5] 晄과 晃은 통자이다. [6] 아연으로 만들어졌다. [7] 인플레이션 방지. [8] 코끼리로 이루어진 부대. [9] 1763? ~ 1832년. 자롱 황제를 도와 응우옌 왕조를 재건한 공신이다. 그러나 후계 문제에서 장손의 계승을 주장한데다 민망 황제의 쇄국정치에 따른 입장차이로 갈등하다 처형되었고, 이후 선교사 옹호의 죄로 무덤이 파헤쳐졌다. [10] 자롱 황제의 장남이자 민망 황제의 형이다. 태자였으나 요절했다. [11] 이 시기 푹미드엉은 근친상간 혐의로 체포되어 있었다. [12] 대월의 괴뢰가 된 제후국 형태의 참파. [13] 그 땅의 원주민 지도자를 해임하고 조정의 관리를 보내 중앙집권화를 꾀하는 정책. [14] 재위 1829 ~ 1832. [15] 정왕(正王)인 응우옌반타인을 도와 순성을 나눠 통치하는 작위이다. 서열상으론 정왕이 부왕보다 높다. 로마의 정제, 부제와 비슷함. [16] 세타티랏 5세(พระเจ้าไชยเชษฐาธิราชที่ 5, 재위 1805 ~ 1829). [17] 비엔티안-베트남의 이중 속국. [18] 昭內. 재위 1803 ~ 1829. [19]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20] 장바티스트 쉐뇨는 이전 자롱 황제가 떠이선 왕조에 항전할때 해전에서 공을 세웠으며 베트남 여성과 혼인했고 베트남식 이름을 얻었다. [21] 출처: 최병욱 교수 저 베트남 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