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14:44:13

오진 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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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15대 천황
오진 천황
應神天皇
파일:Emperor_Ōjin.jpg
<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출생 201년
사망 310년 2월 15일 (향년 108-109세)
능묘 에가노모후시노오카능 (惠我藻伏崗陵)
재위기간 제15대 천황
270년 1월 1일 ~ 310년 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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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호무타, 호무다(品太, 誉田, 品陀, 凡牟都)
한풍
시호
오진 덴노(應神 天皇, 응신 천황)
화풍
시호
호무타와케노미코토(誉田別尊)
호무타노스메라미코토(誉田天皇)
호무타와케노스메라미코토(誉田別天皇)
이자사와케노미코토(去来紗別尊)
하라노우치니마시마스스메라미코토(胎中天皇)
호무다와케노미코토(品陀和氣命)
오오토모와케노미코토(大鞆和氣命)
호무다노스메라미코토(品太天皇)
호무타와케노미코(凡牟都和希王)
부모 부친 주아이 천황(仲哀天皇)
모친 진구 황후(神功皇后)
배우자 나카쓰히메노미코토(仲姫命)
자녀 닌토쿠 천황(仁徳天皇)
누카타노오오나카쓰히코 황자(額田大中彦皇子)
오오야마모리 황자(大山守皇子)
우지노와키이라츠코 황자(菟道稚郎子皇子)
야타 황녀(矢田皇女)
메토리 황녀(雌鳥皇女)
와타누케후타마타 황자(稚野毛二派皇子)
하야부사와케 황자(隼別皇子)
황거 카루시마토요아키라노미야(軽島豊明宮) }}}}}}}}}
1. 개요2. 생애
2.1. 일본서기 9권 진구 황후(卷第九 氣長足姬尊 神功皇后)2.2. 일본서기 10권 오진 덴노(卷第十 譽田天皇 應神天皇)2.3. 일본서기 11권 닌토쿠 덴노(卷第十一 大鷦鷯天皇 仁德天皇)2.4. 한국사 관련 기록
3. 추측
3.1. 아버지?3.2. 신라와의 공방전?3.3. 실제 재위기간 문제
4. 오진 덴노의 족보5. 기타6.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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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제15대 천황.

일본 최초의 천황이라는 기록도 있으며 제10대 스진 천황과 마찬가지로 시호에 '신'(神)자가 들어간다.

제14대 주아이 천황의 4남으로 어머니는 오키나가타라시히메노미코토(氣長足姬尊), 즉 진구 황후였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어머니 진구 황후가 신라를 정벌하고 돌아온 200년 겨울 12월에 츠쿠시(筑紫)의 가다(蚊田)에서 그를 낳았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사물을 깊이 생각하며 멀리 내다보았고, 하는 행동이 법도에 맞아 성스러운 징표가 있어 203년, 3세 때 황태자가 되었다.

태어날 때 팔 위에 굳은 살이 있었고, 그 모양이 활을 쏠 때 착용하는 팔 보호대와 같았으며, 이는 진구 황후가 용감하게 몸단장을 하고 활 보호대를 했을 때의 모양과 같았다고 했다. 활 보호대는 '호무타'(褒武多)라고 불렀기에 그 이름을 높여 호메타 천황(譽田天皇)으로 불렸다고 한다.[1]

일본서기》 <응신천황> 조에 이런 일화가 있다. 오진 천황이 황태자이던 시절에 코시국(越國)에 가서 츠누가(角鹿)의 케히노오호카미(笥飯大神)를 참배했는데, 이때 신령과 황태자가 서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신령은 '이자사와케노카미'(去來紗別神), 황태자는 '호무타와케노미코토'(譽田別尊)가 되었다. 《일본서기》의 필자는 이 부분을 서술하며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신령의 원래 이름은 '호무타와케노카미'(譽田別神), 황태자의 원래 이름은 '이자사와케노미코토'(去來紗別尊)였을 테지만, 다른 기록이 없으므로 사실 여부를 알 수 없다."

라고 부언했다.

나라~ 헤이안 시대 이래로 세이와 겐지(淸和源氏)를 비롯한 일본의 네임드 무가들로부터 무신(武神)으로 열렬히 숭배를 받았던 하치만 신(八幡神)과 동일시된다. 하치만은 그 전까지는 오이타 지역의 농업의 신이었고, 오진 천황과는 별 관련이 없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2. 생애

2.1. 일본서기 9권 진구 황후(卷第九 氣長足姬尊 神功皇后)

주아이 9년(200) 봄 2월에 타라시 나가츠히코노 스메라미코토가 츠쿠시노 카시이노 미야(筑紫橿日宮)에서 죽었다(崩).

12월 무술삭 신해(14일)에 호무타노 스메라미코토(譽田天皇)를 츠쿠시(筑紫)에서 낳았다. 이에 사람들은 그곳을 우미(宇瀰)[2]라고 부른다.[3]

신공 섭정 원년(201) 겨울 10월 계해삭 갑자(2일)에 군신이 황후를 높여서 황태후라고 칭하였다. 이 해의 간지는 신사(辛巳)이다. 이 해를 바로 섭정 원년으로 하였다.

2년(202) 겨울 11월 정해삭 갑오(8일)에 천황을 카후치노 쿠니(河內國)의 나가노노 미사자키(長野陵)[4]에 장사 지냈다.

3년(203) 봄 정월 병술삭 무자(3일)에 호무타와케 황자(譽田別皇子)를 황태자로 삼았다. 그리고 이와레(磐余)[이를 와카사쿠라노미야(若櫻宮)[5]를 도읍으로 삼았다.

13년(213) 봄 2월의 정사삭 갑자(8일)에 타케우치노 스쿠네에게 태자를 따라가 츠누가(角鹿)의 케히노 오호미카미(笥飯大神)[6]를 참배하도록 명하였다.

계유(17일)에 태자가 츠누가에서 돌아왔다. 이 날에 황태후는 태자를 위하여 대전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황태후가 잔을 들고 태자의 장수를 기원하며 노래하였다.
이 쿠시(神酒)는 내가 만든 술이 아니다. 신주의 수장(司)로 상세(常世)의 나라에 사는 스쿠나미카미(少御神)가 미친 듯이 춤추다가 빚어 천황에게 헌상해온 술이다. 자, 남기지 말고 마셔라.
타케우치노 스쿠네가 태자를 대신하여 답가(答歌)를 읊었다.
이 신주를 빚은 사람은 그 북을 절구처럼 세우고 노래하면서 빚었기 때문인가? 신주의 더할 나위 없는 감미로운 맛이여.

47년(247) 여름 4월에 백제왕은 구저, 미주류, 막고를 보내어 조공하도록 하였다. 그때 신라국의 조사(調使)도 구저와 함께 왔다. 이에 황태후(皇太后)와 태자 호무타와케노 미코토(譽田別尊)는 크게 기뻐하며, “선왕(先王)[7]이 바라고 계셨던 나라 사람이 지금 내조하였다. 천황을 뵙지 못한 것이 참으로 슬픈 일이다.”라고 말하자 군신은 모두 슬퍼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리고는 두 나라의 공물을 검교(檢校)[8]하였다.

이에 신라의 공물은 진귀한 것이 실로 많았지만 백제의 공물은 적고 보잘 것 없었다. 그래서 구저 등에게 “백제의 공물이 신라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라고 물었다. 이에 “신들은 길을 잃어 사비신라(沙比新羅)[9]에 이르렀는데, 신라인이 저희들을 붙잡아 감옥囹圄[10]에 감금하였습니다. 그리고 석 달이 지나자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구저 등은 하늘을 향해 저주를 하였습니다. 신라인은 그 저주를 두려워하여 죽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공물을 빼앗아 자기 나라의 공물로 대신하고, 신라의 천한 물건으로 신의 나라의 공물과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신들에게 ‘만약 이 사건을 누설하면 돌아오는 날에 너희들을 죽이겠다!’고 하였습니다. 구저 등은 두려워서 이를 따랐을 뿐입니다. 그래서 가까스로 천조(天朝)에 올 수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때 황태후와 호무타와케노 미코토는 신라의 사자를 꾸짖고, 천신(天神)에게 “누구를 백제에 파견하여 장차사건의 진위를 검사하도록 할 것이며, 또한 누구를 신라에 보내어 그 죄를 물으면 좋겠습니까?”라고 기도하였다. 이에 천신이 “ 타케우치노 스쿠네에게 그 일을 의논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치쿠마 나가히코(千熊長彦)[11]를 사자로 삼으면 마땅히 원하는 바대로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치쿠마나가히코는 명확히 그 성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일설에는 무자시노쿠니(武藏國)[12]의 사람으로 지금은 누카타베노 츠키노모토노 오비토(額田部槻本首)[13] 등의 시조라고 한다. 『백제기(百濟記)』에는 치쿠마나 나가히코(職麻那那加比跪)라고 하였는데 무릇 이 사람인가?]. 이에 치쿠마 나가히코를 신라에 파견하여 백제의 헌상물을 함부로 바꾼 것을 꾸짖었다.

51년(251) 봄 3월에 백제왕은 다시 구저를 보내 조공하였다. 이에 황태후는 태자와 타케우치노 스쿠네에게 “짐이 친히 교류하는 백제국은 하늘이 내려주신 것이지 인간에 의한 것이 아니다. 완호(玩好)[14] 진물(珍物)은 우리나라에 일찍이 없었던 것인데 해를 거르지 않고 항상 와서 공물로 바치고 있다. 짐은 그 정성을 생각할 때마다 항상 기쁘다. 짐이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두터이 은혜를 베풀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69년(269) 여름 4월 신유삭 정축(17일)에 황태후가 와카사쿠라노 미야(稚櫻宮)에서 죽었다(崩)[이때 나이 100세였다.].

겨울 10월 무오삭 임신(15일)에 사키노 타타나미노 미사자키(狹城盾列陵)에 장사 지냈다. 이날 황태후를 추존하여 오키나가 타라시히메노 미코토(氣長足姬尊)이라고 하였다. 이 해의 간지는 기축(己丑)이다.

2.2. 일본서기 10권 오진 덴노(卷第十 譽田天皇 應神天皇)

호무타노 스메라미코토는 타라시나카츠히코노 스메라미코토(足仲彥天皇)의 넷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오키나가 타라시히메노 미코토(氣長足姬尊)라고 한다.

천황은 황후가 신라를 정토하던 해, 세차(歳次) 경진(庚辰) 겨울 12월에 츠쿠시(筑紫)의 가다(蚊田)[15]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으며, 사물을 깊이 생각하고 멀리 내다 보았다. 또한 하는 행동이 법도에 맞아 성제의 징표가 있었다. 황태후 섭정 3년에 황태자가 되었다[이때 3세였다.[16]].

처음 황태후가 회임하였을 때 천신지기(天神地祇)가 삼한(三韓)을 주었다. 태어났을 때 팔 위에 굳은 살이 있었다. 그 모양이 활을 쏠 때 착용하는 팔 보호대(鞆, 호무타)와 같았다. 이는 황태후가 용감하게 몸단장을 하고[17] 활 보호대를 했을 때의 모양과 같았다[肖는 아에(阿叡)라고 읽는다.]. 그래서 그 이름을 높여서 호무타노 스메라미코토라고 한 것이다.[상고시대 사람들은 활 보호대를 호무타(褒武多)라고 불렀다.

어떤 책(一)에서는 처음 천황이 태자가 된 후 코시노 쿠니(越國)[18]에 가서 츠누가(角鹿)의 게히노 오호카미(笥飯大神)를 참배하였는데, 이때 대신과 태자가 이름을 서로 바꿨다고 한다. 그래서 대신을 이자사와케노 카미(去來紗別神)라고 부르고, 태자를 호무타와케노 미토코(譽田別尊)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면 대신의 원래 이름은 호무타와케노 카미(譽田別神)이고, 태자의 원래 이름은 이자사와케노 미코토(去來紗別尊)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외에 보이는 곳이 없어서 알 수 없다.]

섭정 69년(269) 여름 4월에 황태후가 죽었다(崩)[이때 100세였다.].

오진 원년(270) 봄 정월 정해삭(1일)에 황태자가 즉위했다. 이 해의 간지는 경인(庚寅)이다.

오진 2년(271) 봄 3월 경술삭 임자(3일)에 나카츠히메(仲姬)를 황후로 삼았다.[19] 황후는 아라타 황녀(荒田皇女), 오호사자키노 스메라미코토(大鷦鷯天皇), 네토리 황자(根鳥皇子)를 낳았다.

이에 앞서 천황은 황후의 언니 타카키노 이리비메(高城入姬)를 비(妃)로 삼아 누카타노 오호나카츠히코 황자(額田大中彥皇子), 오호야마모리 황자(大山守皇子), 이자노마와카 황자(去來眞稚皇子), 오호와라 황녀(大原皇女), 고무쿠타 황녀(澇來田皇女)를 낳았다.

또 황후의 동생인 비(妃) 오토히메(弟姬)는 아베 황녀(阿倍皇女), 아와지노 미하라 황녀(淡路御原皇女), 키노우노 황녀(紀之菟野皇女)를 낳았다.

다음 비(妃)인 와니노 오미(和珥臣)의 조상 히후레노 오미(日觸使主)[20]의 딸 미야누시야카히메(宮主宅媛)는 우지노 와키이라츠코 황자(菟道稚郎子皇子)와 야타 황녀(矢田皇女), 메토리 황녀(雌鳥皇女)를 낳았다.

다음 비인 야카히메(宅媛)의 동생 워나베히메(小甂媛)[小甂은 워나베(烏儺謎)라고 읽는다.]은 우지노 와키이라츠메 황녀(菟道稚郎姬皇女)를 낳았다.

다음 비인 카하마타나카츠히코(河派仲彥)[21]의 딸 오토히메(弟媛)[22]는 와카노케후타마타 황자(稚野毛二派皇子)를 낳았다[派는 마타(摩多)라고 읽는다].

다음 비인 사쿠라이노 타베노 무라지 워사히(櫻井田部連男鋤)의 여동생 이토히메(糸媛)는 하야부사 와케 황자(隼總別皇子)를 낳았다.

다음 비인 히무카노 이즈미노 나가히메(日向泉長媛)는 오호하에 황자(大葉枝皇子), 워하에 황자(小葉枝皇子)를 낳았다.

천황의 모든 남녀 자식은 합하여 20명이었다.

네토리 황자는 오호타노 키미(大田君)의 시조이며,[23] 오호야마모리 황자는 히지카타노 키미(土形君)[24]와 하리하라노 키미(榛原君)[25] 두 씨족의 시조이며, 이자노마와카 황자는 후지카와와케(深河別)[26]의 시조이다.

오진 3년(272) 겨울 10월 신미삭 계유(3일)에 동쪽의 에미시(蝦夷)[27]가 모두 조공했다. 그래서 에미시에게 우마야사카노 미치(厩坂道)[28]를 만들도록 하였다.

11월 곳곳의 해인(海人)이 소란스럽고 알 수 없는 말을 하면서(訕哤)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訕哤은 사바메쿠(佐麼賣玖)라고 읽는다.]. 즉시 아즈미노 무라지(阿曇連)의 조상 오호하마노 스쿠네(大濱宿禰)[29]를 파견하여 그 사바메쿠(訕哤)를 평정했다. 그리고 그를 해인의 미코토모치(宰)로 삼았다. 속인의 속담에 ‘좌마아마(佐麼阿摩)’[30]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이 해(272)에 백제 진사왕(辰斯王)이 즉위하여 귀국(貴國)[31] 천황에게 무례하였다.[32] 그래서 키노 츠노 스쿠네(紀角宿禰),[33][34] 하타노 야시로노 스쿠네(羽田矢代宿禰),[35] 이시카와노 스쿠네(石川宿禰),[36] 츠쿠노 스쿠네(木菟宿禰)[37]를 파견하여 그 무례함을 꾸짖었다. 이에 백제국은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였다. 키노 츠노 스쿠네 등은 아화(阿花)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5년(274) 가을 8월 경인삭 임인(13일)에 여러 국에 명하여 해인부(海人部)[38]와 야마모리베(山守部)[39]를 정하였다.

겨울 10월에 이즈노쿠니(伊豆國)[40]에 배를 만들도록 명하였다. 길이가 10장이었다. 배가 완성되자 바다에 뜨는지 시험해보니 곧 가볍게 떠서 달리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그 배를 카라노(枯野)[41]라고 불렀다[배가 가볍게 달리는 것에 연유해 카라노라고 이름 붙였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아마도 카루노(輕野)라고 부른 것을 후세 사람들이 와전한 것일까.].

6년(275) 봄 2월에 천황은 오미노쿠니(近江國)에 행차하여 우지노(菟道野)[42]에 이르러 노래하였다. 치바(千葉)[43]의 카즈노(葛野)[44]를 바라보면 풍요한 마을도 보이고, 나라의 빼어난 것도 보인다.

7년(276) 가을 9월에 고구려, 백제, 임나, 신라인이 함께 내조하였다.[45] 이때 타케우치노 스쿠네에게 명하여 여러 한인(韓人)을 거느리고 연못을 만들도록 하였다.[46] 그리하여 그 연못을 한인지(韓人池)[47]라고 불렀다.

8년(277) 봄 3월에 백제인이 내조하였다[『백제기(百濟記)』에 “ 아화왕(阿花王)이 즉위하여 귀국에게 무례하였다. 그래서 우리의 침미다례 및 현남(峴南),[48] 지침(支侵),[49] 곡나(谷那),[50] 동한(東韓)의 땅을 빼앗았다. 이에 왕자 직지(直支)를 천조(天朝)[51]에 보내 선왕의 우호를 닦도록 하였다.”고 한다.].

9년(278) 여름 4월에 타케우치노 스쿠네를 츠쿠시(筑紫)로 보내서 백성을 감찰하게 했다. 이때 타케우치노 스쿠네의 아우 우마시우치노 스쿠네(甘美內宿禰)[52]가 형을 없애고자 천황에게 “타케우치노 스쿠네는 항상 천하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지금 들으니 츠쿠시에서 은밀히 모의하면서 ‘츠쿠시를 분할하여 삼한을 불러 나를 따르게만 한다면 천하를 얻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라고 참언하였다. 그러자 천황은 즉시 사자를 파견하여 타케우치노 스쿠네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때 타케우치노 스쿠네가 “나는 원래 다른 마음이 없어 충심으로 군을 모셨다. 그런데 이게 무슨 재앙인가. 죄 없이 죽어야 하다니!”라고 한탄하였다.

이때 이키노 아타히(壹伎直)의 조상 오야마네코(眞根子)[53]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생김새가 타케우치노 스쿠네와 비슷하였다. 타케우치노 스쿠네가 죄 없이 헛되이 죽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타케우치노 스쿠네에게 “지금 대신이 충심으로 군을 모시고 흑심이 없다는 것은 천하 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바라옵건데 몰래 도망가서 조정에 가셔서 직접 죄가 없다는 것을 밝히고 난 다음에 죽는다고 해도 늦지 않습니다. 또 사람들이 늘 ‘네 모습이 대신(大臣)과 닮았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제가 대신 죽어 대신(大臣)의 충성심을 밝히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즉시 칼에 엎드려 자살했다.

이때 타케우치노 스쿠네는 홀로 크게 슬퍼하고, 몰래 츠쿠시를 떠나 배를 타고 남해(南海)로 돌아서 키노미나토(紀水門)에 정박하였다. 그리고 겨우 조정에 가서 죄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천황은 즉시 타케우치노 스쿠네와 우마시우치노 스쿠네를 추문하였는데,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고집하였으므로 시비를 가리기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천황이 신기(神祗)에게 탐탕(探湯)[* [54]하도록 명령하였다. 타케우치노 스쿠네와 우마시우치노 스쿠네는 함께 시키노카와(磯城川)[55]의 물가에 가서 탐탕하였다. 이윽고 타케우치노 스쿠네가 이기자, 즉시 검을 잡고 우마시우치노 스쿠네를 때려눕힌 후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천황이 (우마시우치노 스쿠네를) 풀어주고 키노 아타히(紀伊直) 등의 선조에게 (예민으로) 주도록 명하였다.

11년(280) 겨울 10월에 츠루기노이케(劔池),[56] 가루노이케(輕池),[57] 가노카키노 이케(鹿垣池), 우마야사카노 이케(厩坂池)[58]를 만들었다. 이 해에 어떤 사람이 “히무카노 쿠니(日向國)에 한 처녀가 있습니다. 이름이 카미나가히메(髮長媛)라고 하오며, 모로가타노 키미우시 모로위(諸縣君牛諸井)[59]의 딸입니다. 나라에서 가장 아름답습니다.”라고 상주하였다. 천황이 기뻐하여 마음 속으로 찾고자 하였다.

13년(282) 봄 3월에 천황이 모하라노 츠라이(專使)[60]를 보내 카미나가히메(髮長媛)를 불렀다.

가을 9월에 카미나가히메가 히무카(日向)에서 왔다. 그리하여 쿠와츠노 무라(桑津邑)[61]에 살게 하였다. 이때 황자 오호사자키노 미코토(大鷦鷯尊)가 카미나가히메를 보고, 그 용모의 아름다움에 감동하여 연정을 품게 되었다. 천황은 오호사자키노 미코토가 카미나가히메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이들을 결혼시켜 주려고 하였다. 그래서 천황은 후궁주[62]에서 열린 연회 날에 처음으로 카미나가히메를 불러 연회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오호사자키노 미코토를 손짓하여 가까이 부르고, 카미나가히메를 가리키며 노래를 하였다.

자. 나의 임(君)이여, 들에 마늘 캐러 가자. 마늘 캐러 내가 가는 길에 좋은 향기의 귤꽃이 피어 있소. 아랫가지는 사람들이 모두 꺾어갔고, 윗가지는 새가 와서 흩어졌지만, 가운데 가지에 남아 있는 꽃처럼 봉오리가 커지며 환해진 아가씨여. 자 꽃을 피워 빛나도록.

오호사자키노 미코토가 어가(御歌)를 듣고 천황이 카미나가히메를 내려주려는 것을 알고 크게 기뻐하여 회답하는 노래를 불렀다.

요사미이케(依網池)[63]에 순채(蓴菜)[64]가 퍼져 있는 것을 모르고, 또 川俣江[65]의 마름 줄기가 퍼진 것도 모르고, 내 마음은 완전히 어리석었네.

오호사자키노 미코토가 카미나가히메와 자고 정이 깊어지자 카미나가히메에게 노래를 하였다.

먼 나라(히무카) 고하다(古波囊)[66]의 아가씨가 아름답다고 평판이 높았는데 지금은 함께 자면서 껴안는구나.

또 다시 노래하였다.

먼 나라 고하다의 아가씨여. 나를 거부하지 않고 자 주어 진심으로 사랑을 느끼게 되었구나.

[일설에는 히무카(日向)의 모로가타노 키미우시가 조정에서 근무하다가 나이가 많아 더 이상 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의 딸 카미나가히메를 바쳤다. 처음 하리마에 이르렀을 때 천황은 아와지시마(淡路嶋)에 행차하여 사냥하고 있었다. 이때 천황이 서쪽을 바라보니 수십 마리의 사슴이 바다에 떠서 다가와 이윽고 하리마의 카코노 미나토(鹿子水門)[67]로 들어왔다. 천황이 좌우에 “이는 어떤 사슴인가? 큰 바다에 떠서 많이 오는데.”라고 물었다. 좌우 모두가 기이하게 여겨 즉시 사자를 보내 살펴보도록 하였다. 사자가 가서 보니 모두 사람이었다. 단지 뿔이 붙은 사슴의 가죽을 의복으로 입은 것뿐이었다. “누구인가?” 라고 물으니 “모로가타노 키미우시입니다. 나이가 많아 물러났지만 조정을 잊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딸 카미나가히메를 바칩니다.”라고 말했다. 천황이 기뻐하며 즉시 불러 배에 태우도록 하였다. 그래서 그때 사람들이 도착한 해안을 가리켜 카코노 미나토라고 불렀다. 무릇 뱃사공을 카코라고 부르는 것은 이때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14년(283) 봄 2월에 백제왕이 봉의공녀(縫衣工女)[68]를 바쳤는데 이름이 진모진(眞毛津)[69]이었다. 지금 쿠메노 키누누이(來目衣縫)[70]의 시조이다.

이 해(283_에 궁월군(弓月君)[71]이 백제에서 와서 “신은 저희 나라의 인부(人夫)120현(縣)을 이끌고 귀화하고자 하였으나[72] 신라인이 방해하여 모두 가라국(加羅國)[73]에 머물러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를 보내 궁월군의 인부를 가라에서 불러들이도록 하였으나 3년이 지나도록 소츠히코가 돌아오지 않았다.

15년(284) 가을 8월 임신삭 정묘(6일)에 백제왕이 아직기(阿直伎)[74]를 파견하여 좋은 말 두 마리를 바쳤다. 카루(輕)[75]의 언덕 위의 마구간에서 기르도록 하고 아직기(阿直岐)에게 사육하는 일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말을 사육하는 곳을 우마야사카(廐坂)[76]라고 불렀다. 아직기는 경전[77]도 잘 읽었으므로 태자 우지노 와키이라츠코(菟道稚郞子)의 스승으로 삼았다. 천황이 아직기에게 “너보다 훌륭한 박사가 있느냐?”고 묻자[78] 왕인(王仁)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우수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79] 그래서 카미츠케노노 키미(上毛野君)[80]의 조상인 아라타와케(荒田別), 카무나기와케(巫別)를 백제에 보내 왕인을 불러오도록 하였다. 아직기는 아키치노 후비토(阿直岐史)[81]의 시조이다.

16년(285) 봄 2월에 왕인이 왔다. 태자 우지노 와키이라츠코는 왕인을 스승으로 삼았다. 여러 전적을 배우니 통달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왕인은 후미노 오비토(書首) 씨[82]의 시조이다.

이 해(289)에 백제 아화왕(阿花王)이 죽었다(薨). 천황이 직지왕(直支王)을 불러 “그대는 나라로 돌아가서 왕위를 이으라.”고 말하고 동한(東韓)의 땅을 돌려주면서 보냈다[동한이란 감라성(甘羅城)[83]·고난성(高難城)[84]·이림성(爾林城)[85]이 그것이다.].

8월에 헤구리노 츠쿠노 스쿠네(平群木菟宿禰)[86], 이쿠하노 토다노 스쿠네(的戶田宿禰)[87] 가라(加羅)에 보냈다. 정병을 주며 “소츠히코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다. 분명히 신라가 방해하여 체류하고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빨리 가서 신라를 치고 길을 열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츠쿠노 스쿠네 등이 정예병을 이끌고 나아가 신라의 국경에 이르렀다. 신라왕은 놀라 사죄하였다. 궁월의 인부를 거느리고 소츠히코와 함께 돌아왔다.[88]

19년(288) 겨울 10월 무술삭에 요시노노 미야(吉野宮)[89]로 행차하였다. 이때 쿠스히토(國樔人)[90]가 내조하였다. 감주(醴酒)[91]를 천황에게 헌상하며 노래하였다.

떡갈나무(橿)의 숲에서 절구를 만들어, 그 절구에서 빚은 어주를 맛있게 드소서. 우리의 아버지여.

노래를 마친 뒤 즉시 입을 두드리고 위쪽을 향해 웃었다.[92] 지금도 국소가 토지의 산물을 바치는 날에 노래를 마치는 즉시 입을 두드리고 위쪽을 향해 웃는 것은 아마 상고에서부터 온 것일 것이다. 국소는 사람됨이 심히 순박하며 매일 산의 열매를 따 먹고 살고 개구리를 찐 것을 진미로 즐기는데, 이것을 모미(毛瀰)라고 부른다.[93] 토지는 왕경(京)의 동남쪽에 산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요시노노 카와(吉野河) 상류에 거주한다. 산봉우리는 험준하고 골짜기는 깊고 도로는 좁고 가파르기 때문에, 왕경에서부터 멀지 않지만 내조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러나 이후 자주 찾아와 토지의 산물을 바쳤다. 토지의 산물은 밤과 버섯과 은어 등이었다.

20년(289) 가을 9월에 야마토노 아야노 아타이(倭漢直)[94]의 조상 아치노 오미(阿知使主)[95]와 그의 아들 츠카노 오미(都加使主)[96]가 그들이 이끄는 무리 17현(縣)을 데리고 왔다.[97]

22(291)년 봄 3월 갑신삭 무자(5일)에 천황이 나니와(難波)로 행차하여 오호스미노 미야(大隅宮)에 머물렀다.[98]

정유(14일)에 높은 망대에 올라서 먼 곳을 바라봤다. 이때 비 에히메(兄媛)가 모시고 있었다. 그런데 서쪽을 보면서 크게 한탄하였다[형원은 키비노 오미(吉備臣)의 조상 미토모와케(御友別)[99]의 여동생이다.]. 이에 천황이 에히메에게 “어찌하여 그대는 그와 같이 심히 탄식하는가?”하고 묻자 에히메가 “요즈음 첩이 부모의 정을 그리는 마음이 있어서 서쪽을 보니 저절로 한탄이 나왔습니다. 원컨대 잠시 돌아가서 부모를 살피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천황이 부모를 사랑하는 에히메의 마음이 간절함을 아껴서 “그대가 양친을 보지 못한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다. 돌아가서 부모를 살피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라고 하여 그를 허락하였다. 이에 담로의 미하라(御原)[100]의 바다 사람 88인을 뱃사공으로 삼아 키비로 보냈다.

여름 4월에 에히메(兄媛)가 오호츠(大津)[101]에서 출발하여 갔다. 천황이 높은 망대에서 에히메의 배를 보며 노래하였다.

담로도(淡路嶋)와 아즈키시마(小豆嶋)[102]는 두 섬이 나란히 있구나. 잘 어울리는 섬들이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되어 버렸구나. 누가 멀리 떼어 놓았는가. 키비의 에히메를 매우 사랑했는데…….

가을 9월 신사삭 병술(6일)에 천황은 담로도에서 사냥하였다. 이 섬은 나니와의 서쪽 바다에 있다. 산봉우리와 바위가 어지럽고, 언덕과 골짜기가 이어져 있다. 향기로운 풀은 무성하고 여울 물이 졸졸 흐른다. 또한 큰 사슴과 오리, 기러기가 섬에 많이 있다. 그 때문에 천황은 자주 노닐러 갔다. 천황이 담로에서 키비로 행차하여 아즈키시마에서 노닐었다.

경인(10일)에 다시 히다노(葉田)[葉田은 하다(簸娜)라고 읽는다.]의 아시모리노 미야(葦守宮)로 가서 머물렀다. 이때 미토모와케(御友別)가 찾아와 그의 형제 자손으로 하여금 카시하데(膳夫)로서 (천황) 식사를 위해 봉사하도록 하였다. 천황은 미토모와케가 삼가 공손히 받드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래서 키비노쿠니를 나눠서 그 자손 등에게 주었다.

즉 카하시마노 아가타(川嶋縣)를 나눠서 큰 아들 이나하야와케(稻速別)에게 주었다. 그가 시모츠미치노 오미(下道臣)[103]의 시조다.

다음으로 카미츠미치노 아가타(上道縣)를 둘째 아들 나카츠히코(仲彥)에게 주었다. 그가 카미츠미치노 오미(上道臣)[104]과 카야노 오미(香屋臣)[105]의 시조다.

다음으로 미노노 아가타(三野縣)[106]를 오토히코(弟彥)에게 주었다. 이가 미노노 오미(三野臣)의 시조다.

또 하쿠기노 아가타(波區藝縣)를 미토모와케의 동생 카모와케(鴨別)[107]에게 주었다. 이가 카사노 오미(笠臣)[108]의 시조다.

그리고 소노노 아가타(苑縣)를 그의 형 우라코리와케(浦凝別)에게 주었다. 이가 소노노 오미(苑臣)[109]의 시조다.

다음으로 하토리베(織部)[110]를 에히메(兄媛)에게 하사했다. 이로 인해 그 자손이 아직 키비노 쿠니에 살고 있다. 이것이 그 연유이다.

25년(294)에 백제의 직지왕이 죽었다(薨). 이에 아들 구이신(久爾辛)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이 어려 대왜(大倭)의 목만치(木滿致)가 국정을 잡았다. 아울러 왕모(王母)와 밀통하여 무례한 행위를 많이 저질렀다. 천황은 이를 듣고 소환하였다[『백제기』에서는 “목만치는 목라근자가 신라를 정벌할 때 그 나라 부인을 얻어서 낳은 자식이다. 아버지의 공적으로 임나[111]에서 전횡을 하다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귀국(貴國)과 왕래하였다. 천조(天朝)의 명령을 받아서 우리나라의 정사를 장악하고 권세를 세상에 떨쳤다. 그러나 천조가 그 포악함을 듣고서 소환하였다.”고 한다.].[112]

28년(297) 가을 9월에 고구려왕[高麗王]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표를 올렸다.[113] 그 표에 “고구려왕은 일본국에 교(敎)한다.”라고 적혀 있었다.[114] 이때 태자인 우지노 와키이라츠코가 그 표를 읽고 노하여 고구려의 사신을 꾸짖고 표문이 무례하다고 하며 그 표를 파기해 버렸다.

31년(300) 가을 8월에 여러 신하들에게 “관선(官船) 가운데 카라노(枯野)라고 하는 것은 이즈노쿠니(伊豆國)에서 바친 배인데, 이것이 썩어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관용으로 쓰인 공로를 잊을 수가 없으니 어떻게 하면 그 배의 이름이 끊이지 않고 후세에 전해질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여러 신하들이 명을 받고 담당 관리에게 명령하여 그 배의 목재를 땔감으로 하여 소금을 굽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5백 광주리의 소금을 얻어 여러 나라에 두루 나누어 주고는 배를 만들도록 하였다. 이에 여러 나라에서 한꺼번에 5백 척의 배를 만들어 바쳤다. 그것을 모두 무고수문(武庫水門)에 모아 놓았다.

마침 이때 신라의 조공 사신이 무고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신라정(新羅停)[115]에서 홀연히 불이 나서 모아 놓은 배에까지 번져 많은 배가 불에 탔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인을 책망하였다. 신라왕이 그것을 듣고 크게 놀라서 뛰어난 장인을 바쳤으니, 이들이 이나베(猪名部)[116] 등의 시조이다.

처음 카라노노 후네(枯野船)를 소금 굽는 땔나무로 태운 날, 타다가 남은 재가 있었다. 이에 타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겨서 헌상하였다. 천황은 이를 이상히 여기고 코토(琴)를 만들게 하였는데, 그 소리가 맑아서 멀리까지도 들렸다. 이에 천황이 노래하였다.

카라노의 목재를 소금을 구우려고 불태우고, 타고 남은 것으로 코토(琴)로 만들어 줄을 튕기니, 유라(由良)[117] 해협의 바닷속 바위에 붙어 살고 있는 해초처럼 흐느적거리며 상쾌한 소리가 나는구나.

37년(306) 봄 2월 무오삭(1일)에 아지사주와 도가사주를 오(吳)나라[118]에 보내어 봉공녀(縫工女)를 구하게 하였다. 이에 아지사주 등이 고구려로 건너가 오나라로 가고자 하여 고구려에 도착하였지만, 가는 길을 알 수 없었다. 그리하여 고구려에서 길을 아는 사람을 구하니, 고구려왕이 구례파(久禮波)와 구례지(久禮志)[119] 두 사람을 딸려 보내 안내자로 삼게 하였다.[120] 그래서 오나라에 이를 수 있었다. 오나라 왕은 이에 공녀(工女) 형원(兄媛), 제원(弟媛), 오직(吳織), 혈직(穴織) 등 네 명의 여자를 주었다.[121]

39년(308) 봄 2월에 백제 직지왕은 그 누이 동생 신제도원(新齊都媛)[122]을 보내어 조정을 섬기도록 하였다. 이때 신제도원은 7인의 부녀를 데리고 왔다.[123]

40년(309) 봄 정월 신축삭 무신(8일)에 천황이 오호야마모리노 미코토(大山守命)와 오호사자키노 미코토(大鷦鷯尊)를 불러 “너희들은 자식을 사랑하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매우 사랑합니다.”라고 답하였다. 또 다시 “큰 아들과 작은 아들 중 누구를 더욱 사랑하는가?”라고 묻자 오호야마모리노 미코토는 “큰아들을 제일 사랑합니다.”라고 답하였다. 이에 천황이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

이때 오호사자키노 미코토는 천황의 기색을 미리 살피고 “큰 아들은 많은 세월을 거쳐 이미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불안이 없습니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아직 성인이 못 될지도 모릅니다. 이것 때문에 작은 아들은 매우 가엾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천황이 크게 기뻐하여 “너의 말이 진실로 짐의 마음에 맞다.”고 말했다.

이때 천황은 늘 우지노 와키이라츠코를 황태자로 하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두 황자의 마음을 알고자 이 질문을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오호야마모리노 미코토의 답에 기뻐하지 않았다.

갑자(24일)에 우지노 와키이라츠코를 세워 황태자로 삼았다. 그리고 그 날 오호야마모리노 미코토에게 산천임야를 관장하도록 하였으며, 오호사자키노 미코토에게 태자를 보좌하여 국사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41년(310) 봄 2월 갑오삭 무신(15일)에 천황이 아키라노미야(明宮)[124]에서 죽었다(崩). 이때 나이 110세였다[어떤 책(一云)에는 대우궁(大隅宮)에서 죽었다고 한다.].

이 달에 아지사주 등이 오(吳)에서 츠쿠시로 왔다. 이때 무나카타노 오호카미(胸形大神)[125]가 공녀(工女)들을 원했기 때문에 형원으로 하여금 무나카타노 오호카미를 받들도록 하였다. 이는 즉 지금의 츠쿠시노 쿠니에 있는 미츠카히노 키미(御使君)의 선조이다. 그리고 3명의 여자를 데리고 츠노 쿠니(津國)[126]의 무고(武庫)[127]에 도착했으나, 천황이 이미 죽어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오호사자키노 미코토에게 헌상했다. 이 여인들의 후손은 지금의 쿠레노 키누누히(呉衣縫)와 카야노 키누누히(蚊屋衣縫)이다.[128]

2.3. 일본서기 11권 닌토쿠 덴노(卷第十一 大鷦鷯天皇 仁德天皇)

오호사자키노 스메라미코토는 호무타노 스메라미코토(譽田天皇)의 넷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나카츠히메노 미코토(仲姬命)[129]라 한다. 이호키이리비코 황자(五百城入彦皇子)의 손자이다.[130]

오진 41년 봄 2월에 호무타노 스메라미코토가 죽었다(崩).

이때 태자인[131] 우지노 와키이라츠코(菟道稚郞子)는 오호사자키노 미코토(大鷦鷯尊)에게 양보하며, 제위에 오르지 않았다.

그는 오호사자키노 미코토에게 “무릇 천하의 군주가 되어 만민을 다스리는 자는 위로는 하늘과 같이 덮고 아래로는 땅과 같이 포용해야 합니다. 군주는 백성을 기꺼운 마음을 가지고 부려야 합니다. 백성은 이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천하가 편안합니다. 지금 저는 아우입니다. 또한 배움과 깨우침이 부족합니다. 어찌 감히 황위를 이어 천황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

대왕(大王)[132]은 풍모와 자태가 뛰어납니다. 인자함과 효심이 멀리까지 알려졌으며 연령도 위이십니다. 천하의 임금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무릇(其)[133] 선제(先帝)께서 저를 태자로 세운 것이 재능이 있어서였겠습니까. 다만 저를 어여삐 여겼기 때문입니다.

또한 종묘사직[134]을 받드는 것은 중대한 일입니다. 저는 불초하여 적합하지 않습니다. 무릇 형은 위, 아우는 아래, 성인은 군주, 우인은 신하가 되는 것이 고금의 변치 않는 법도입니다. 아무쪼록 왕께서는 주저하시 마시고 제위에 오르소서. 저는 신하로서 도울 따름입니다.”라고 하였다.

오호사자키노 스메라미코토가 “선제께서 ‘제위는 하루도 비워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미리 밝고 덕이 있는 사람을 택하여 황태자로 삼아 제위를 계승할 복과 백성을 주셨던 것입니다. 또한 태자를 총애한다는 증표를 중시하여 천하에 널리 알리셨습니다. 제가 어리석지만 어찌 선제의 명을 버리고 쉽게 아우 왕의 바람을 따를 것입니까.”라고 대답하였다. 이처럼 굳게 사양하며 서로 양보하였다.[135]

그러나 오호야마모리 황자는 항상 선제가 자기를 버려두고 태자로 삼지 않은 일을 원망하고 있던 차에, 이 일로 원한이 더욱 쌓이게 되었다. 그래서 모의하여 “내가 태자를 죽이고, 제위에 오를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오호사자키노 스메라미코토가 미리 그 모의를 듣고 태자에게 몰래 고하여 군사를 갖추어 지키게 하였다. 그런 까닭에 태자는 군사를 갖추고 대비하였다.[136]

오호야마모리 황자는 군사가 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홀로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한밤중에 출발하였다. 새벽에 우치(菟道)에 이르러 강을 건너려고 하였다. 그때 태자가 삼베옷을 입고 노를 잡고 몰래 사공들 틈에 섞여 오호야마모리 황자를 태우고 건너갔다. 이윽고 강 가운데에 이르러 사공을 꾀어 배를 밟아 전복시켰다. 그러자 오호야마모리 황자가 강에 떨어져 물에 빠졌다. 그는 물에 떠내려 가면서 노래하였다.
토도의 나루에서 능숙하게 노를 젓는 사람이여. 나를 구하러 빨리 와 다오.
그러나 복병이 많아 강기슭에 이르지 못하여, 마침내 물에 빠져 죽었다. 그 시신을 찾게 하였더니 카와라노 와타리(考羅濟)[137]에서 떠올랐다. 태자가 그 시신을 보고 노래하였다.
토도를 건너는 나루터에 서 있는 박달나무여. 마음으로는 베려고 생각했건만, 마음으로는 베려고 생각했건만. 뿌리에서는 그대를 떠올리고 가지에서는 누이를 떠올려. 이쪽 저쪽 모두 가슴이 아파 끝내 베지 못하고 돌아왔구나. 박달나무여.
그리하여 나라노 야마(那羅山)[138]에 (오호야마모리 황자를) 장사 지냈다.

이후 토도에 궁전을 세우고 거기에서 살았으나, 여전히 제위를 오호사자키노 스메라미코토에게 양보하려고 오랫동안 즉위하지 않아 제위를 비워둔 지 이미 3년이 지났다.

그때 해인(海人)들이 생선을 진상품으로 가지고 와 우지노미야(菟道宮)[139]에 바쳤다. 태자가 해인들에게 “나는 천황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곧 돌아가서 나니하(難波)에 진상하도록 하였다. 오호사자키노 스메라미코토 역시 돌려주어 토도에 바치도록 하였다. 그래서 해인들의 바구니가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생선이 썩었다.

또 다시 돌아가 다른 생선을 잡아 바치려 했으나, 이전과 마찬가지로 서로 사양하였다. 그리하여 생선이 또 썩었다. 해인들은 여러 번 왕복하는 일에 지쳐서 생선을 버리고 울었다. 그래서 속담에 “해인인가. 해인도 아닌데 자기 물건 때문에 운다.”고 하는 것은 여기에서 연유한다.

태자가 “나는 형님의 뜻을 바꿀 수 없음을 알았다. 어찌 오래 살아서 천하에 폐를 끼치겠는가.”라고 말하며 자살하였다.[140] 오호사자키노 스메라미코토는 태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나니와에서 달려 토도궁에 이르렀다. 태자가 죽은 지 3일이 지난 날이었다. 오호사자키노 스메라미코토는 가슴을 치고 울부짖으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였다. 머리를 풀고 시체 앞에 웅크리고 “나의 아우 황자야.”라고 세 번 불렀다.[141]

그랬더니 갑자기 살아나 스스로 일어나 앉았다. 오호사자키노 스메라미코토는 태자에게 “슬프고도 아깝도다. 무엇 때문에 스스로 세상을 버리는가. 만약 선제께서 (네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나에게 무어라 말씀하시겠는가.”라고 하였다. 태자가 형왕에게 “천명입니다. 누가 말릴 수 있겠습니까. 만일 천황이 계신 곳에 가게 되면 형님이 성인(聖人)이며 계속 (제위를) 양보하신 것을 상세히 아뢸 것입니다. 그런데 형님께서는 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먼 길을 급히 달려오셨습니다. 어찌 수고롭지 않으셨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곧 동복누이[142]인 야타 황녀(八田皇女)를 바치며[143] “비록 납채(納采)하시기에 부족합니다만, 삼가 후궁으로 삼아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관에 엎드려 죽었다. 오호사자키노 스메라미코토는 소복(素服)을 입고 슬퍼하며 소리 내어 슬피 울었다. 그리고 우지노야마(菟道山) 위에 장사지냈다.[144]

2.4. 한국사 관련 기록

오진 덴노는 한반도 관련 기록이 대규모로 출연하기 시작하는 첫 번째 대왕이다. 오진 덴노 기록의 절반 이상이 한반도 관련 기록일 정도. 《 일본서기》의 목적인 천황과 유력 씨족의 위엄을 높이기 위하여 곡필, 윤색된 부분이 많이 보인다.

전부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건 아니지만, 대체로 이주갑인상에 충실해 120년 인상된 것이 확인된다. 오진 덴노는 3세기 초부터 4세기 말까지 재위한 인물이지만 진사왕부터 구이신왕까지는 4세기 말부터 5세기에 해당되는 왕이기 때문에 연대상으로 맞지 않으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주갑인상 항목을 참고하기 바란다. 기년 인상부터 각종 왜곡된 서술이 많기는 하지만, 삼국사기가 고려 중기에 써져 남은 자료가 적었던 반면 일본서기는 백제와 고구려가 망한 지 100년도 안 되어 써졌고, 특히 백제계 도래인 사서가 인용한 백제삼서의 기록을 대거 참고한 덕분에 사료의 절대량이 많아 일본서기 연구 결과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없던 새로운 사실도 많이 밝혀졌기 때문에 무조건 무시할 수는 없다.

단, 오진 재위기에 나오는 한반도 관련 기사가 이주갑인상에 맞아 떨어지는 것과 오진 재위 몇 년에 해당 한반도 사건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백제가 2세기 후반~3세기 후반을 기원전 1세기~3세기 후반으로 인상하고, 신라가 2세기 후반~4세기 후반을 기원전 1세기로 인상하는 과정에서 후대 왕의 사건을 선대 왕의 일로 바꿔 기록하거나, 같은 왕이라도 특정한 사건만 시간순을 다소 수정한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운 기록도 종종 발견되는데,[145] 3세기 중후반~6세기 초반을 기원전 7세기까지 인상하고,[146] 가공인물 의혹이 있는 덴노가 16명이나 되는 등[147] 기기 신화는 문헌 오염이 굉장히 심하다.

따라서 이주갑인상된 한반도 관련 기록에 나오는 대왕이 정말로 오진 본인이 그 대상이었는지, 오진 본인이 맞더라도 재위 몇 년에 일어난 일인지 장담할 수 없다. 오진 기사를 보면 한반도 기사든 국내 기사든 주어가 생략된 채 '이러이러한 사건이 있었다' 또는 '천황이 이러이러했다'는 기사만 있기 때문에 후대 대왕의 사건이 오진 기에 삽입되었을 수도 있고, 반대로 선대 대왕의 사건이 오진 대에 삽입되었을 경우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심지어 대왕과 동시대에 병존한 야마토의 다른 '왕'들 중 하나가 섞이는 것도 가능하다. 오진 기의 한반도 관련 기사를 보면 '호무타노 스메라미코토'라고 정확하게 명시된 사건은 단 하나도 없다.
  • 272년 키노 츠노 스쿠네(紀角宿禰), 하타노 야시로노 스쿠네(羽田矢代宿禰), 이시카와노 스쿠네(石川宿禰), 츠쿠노 스쿠네(木菟宿禰)를 백제로 파견하여 아화(阿花)가 진사왕을 죽이고 즉위하는 것을 도왔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392년 11월 진사왕이 구원의 행궁에서 사냥을 벌이다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고 조카 아신왕이 즉위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392년 11월에 일어난 일로 보인다.[148]
  • 276년 9월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인이 왜에 들르자, 대왕은 타케우치노 스쿠네에게 명하여 여러 한인(韓人)을 거느리고 한인지(韓人池)라는 연못을 만들게 했다. 고사기에서는 신라인만 기록되어 있는데, 396년 즈음 신라계 도래인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도래인들이 선행된 건축 기술로 연못을 만든 사건으로 보인다.[149][150]
  • 277년 3월 백제 사신을 만났다. 이 해 아화왕(阿花王)이 침미다례 및 현남(峴南), 지침(支侵), 곡나(谷那), 동한(東韓)의 땅을 빼앗았으며,[151] 왕자 직지(直支)를 왜에 보냈다. 삼국사기 397년 기사에 아신왕이 왕자를 왜에 파견했다는 기사가 있으므로 이주갑인상이 교차검증된다. 광개토대왕릉비 399년 기사에서 " 백잔(百殘)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해 군사를 끌어들였다(百殘違誓與倭和通)"고 서술한 것으로 보아 아화왕이 고구려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왜의 도움을 받고자 전지를 왜에 파견한 것으로 보인다.
    또 아화는 아버지가 부왕 침류왕이 자신이 어릴 때 죽자 숙부 진사왕에게 왕위를 빼앗겨 숙부를 죽이고 왕위를 손에 넣은 전적이 있기 때문에, 후계자의 안전을 위해서 보냈을 수도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전지가 태자가 된 것은 394년 2월인데, 392년 즉위한 아화왕이 394년에 전지를 태자로 책봉한 것으로 보아 392년 당시 전지는 많이 어렸던 걸로 보이며, 태자가 되고 3년 뒤 왜로 파견되었다면 전지가 이때 미성년이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152]
  • 283년 2월 백제왕이 진모진(眞毛津)이라는 이름의 봉의공녀(縫衣工女)(옷을 짜는 여자 기술자)를 주었다.
  • 283년 신라가 가라국(加羅國)을 공격해 가야 일대가 혼란에 빠진 것을 백제를 통해 알게 된 왜가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를 보내 궁월군(弓月君)을 비롯한 많은 가야인들을 왜로 데려오려 하였지만, 소츠히코는 3년이 지나도록 가야에 발이 묶여 왜로 귀국하지 못했다. 403년으로 비정된다.
  • 284년 8월 6일 백제왕이 왜에게 좋은 말 두 마리를 선물로 주었고, 이에 카루(輕)의 언덕 위의 마구간에서 기르도록 하고 아직기(阿直伎)에게 사육하게 하였다. 원문에는 백제왕이 아직기를 파견했다고 하는데, 아직기가 말의 사육을 담당한 것으로 보아 아직기는 백제에서 보낸 사신이 아니라, 반대로 백제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백제왕에게 말을 받아온 것으로 보인다. 아직기는 유학에 능통해서 태자 우지노 와키이라츠코의 스승이 되었고, 대왕이 아직기에게 더 뛰어난 박사가 있냐 묻자 아직기가 왕인(王仁)이 우수하다 대답하였고, 이에 대왕은 아라타와케(荒田別), 카무나기와케(巫別)를 백제에 보내 왕인을 데려오게 했다. 해당 서술을 보아 아직기는 당시 백제에서 왜로 귀화한 지 얼마 안 된 도래인으로 보인다.
    이주갑인상하면 404년이긴 한데, 고사기 오진 단에서는 아지길사阿知吉師(아직기)를 왜에 보낸 백제왕을 조고왕(照古王)이라 기록했으며, 일본서기와 달리 아직기와 왕인의 관계가 언급되지 않는다. 근초고왕의 재위기간은 346~375년이며, 왜가 백제에 사신을 받아들인 건 367년이 처음이라 이주갑인상과 맞지 않다.
    진구 기에서 호무타가 성년이 된 기사가 나온 뒤 실질적으로 처음 나온 기사는[153] 366년 탁순국에 파견된 왜 사신이 백제에 들러 근초고왕과 처음 만나고, 367년 백제와 신라의 사신이 왜에 들른 것이다. 해당 기사 당시 호무타와케노 미코토(오진)는 사신을 접견하고 사신과 대화하는 등 '황태후'의 서술을 배제하면 사실상 왕 노릇을 하고 있었다. 오진 이전 대왕의 사건을 호무타와케노 미코토로 바꾸지 않았다면, 앞서 나온 기사와의 문맥까지 고려할 때 367년 당시 오진은 성년의 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 '태자의 스승'은 보통 태자가 상당히 어릴 때 정하는 경우가 많고, 오진이 태자를 정하기 며칠 전 오호사자키 황자(닌토쿠)가 우지노 와키이라츠코를 "성년이 못 될지도 모른다"고 평한 것으로 보아 우지노 와키이라츠코는 태자가 되었을 당시 미성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정말로 367~375년 사이에 일어났을 가능성을 배제 못한다. 이 경우 이주갑인상에서 30년 인상해 374년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154]
  • 289년 봄 2월 왕인이 왜로 이주하여 태자 우지노 와키이라츠코의 스승이 되었다. 이주갑인상하면 405년, 추가로 30년 인상하면 375년의 일이다.
  • 285년 아화왕이 죽자 왜에 머물던 전지왕이 백제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405년 9월에 아화왕이 사망했으므로 이주갑인상과 맞아떨어진다.
  • 285년 8월, 2년째 카츠라기노 소츠히코가 2년째 반파국에서 돌아오지 못하자 헤구리노 츠쿠노 스쿠네(平群木菟宿禰), 이쿠하노 토다노 스쿠네(的戶田宿禰)가 반파국에 파견되었다. 당시 서술을 보아 신라가 반파국을 계속 공격한 탓에 상황이 혼란스러워 귀국하지 못했고, 츠쿠노 스쿠네 등이 정예병을 이끌고 신라의 국경에 가 시선을 끄는 사이에 소츠히코와 가야인들을 왜로 데려온 것으로 보인다. 405년으로 추정된다.
  • 289년 9월 아치노 오미(阿知使主)와 그의 아들 츠카노 오미(都加使主)가 세력을 이끌고 왜로 귀화하였다. 사서에 따르면 아지사주는 야마토노 아야노 아타이(倭漢直)의 조상이라고 하는데, 야마토노 아야 씨(倭漢氏)는 중국계를 자처했으나 실제로는 백제계 또는 안라국계로 추정된다고 한다. 시기를 감안하면 둘 다 가능성이 있다.
  • 294년 직지왕이 죽고 구이신왕이 즉위하였다. 왕이 어려 목라근자의 아들 목만치가 국정을 잡고 왕모(王母)와 밀통하며 권세를 휘둘렀으나, 이후 몰락하여 왜로 도망쳤다. 목만치는 목라근자의 가야 정복의 영향으로 가야에서 권세를 떨쳤고 왜와도 왕래가 잦은 권신이었으나, 백제 내에서의 권력다툼에 패배해 왜로 도망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구이신왕의 재위기간이 420~427년이라, 이주갑인상한 414년과 6년의 오차가 있다. 송서도 구이신왕의 재위기간을 전지왕의 재위기간으로 오기한 걸 보아 여러모로 복잡한 일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 297년 9월 고려왕(高麗王)이 사신을 보냈는데, 고려왕이 보낸 서신의 표현이 고압적인 것에 분노한 태자 우지노 와키이라츠코가 고구려의 사신에게 화내고 고려왕의 서신을 불태웠다. 이주갑인상하면 417년의 일로 장수왕 재위기인데, 광개토대왕 시기부터 장수왕 대까지 왜는 백제의 용병으로 고용되어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광개토대왕릉비에 따르면 400년과 407년 왜군이 광개토대왕에게 참패하여 많은 장병들이 전사했다고 한다. 따라서 당시 왜는 고구려에게 매우 적대적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삼국사기에 나오는 장수왕의 성격과 당시 정국을 보면 실제로 굉장히 고압적인 내용이 아니었나 추측된다. 해당 기사에는 우지노 와키이라츠코만 나오기 때문에 실제로는 당시 왕이 오진이 아니라 우지노 와키이라츠코였을 수도 있다.
  • 300년 8월 신라 사신들이 무고(武庫)에 들렀다 신라 사신들이 임시로 머물던 곳에 불이 나서 무고에 있던 많은 관선(官船)들이 불타 격침되는 대형사고가 일어났다. 그러자 대왕은 신라에서 이나베(猪名部)의 선조가 되는 뛰어난 장인을 데려왔다. 원문에는 대왕이 신라 사신들에게 항의하자 신라왕이 책임 지고 보냈다고 하는데, 대왕이 배 수리를 위해 신라에게 '요청'을 했을 수도 있고, 정말로 신라 사신들이 잘못해서 불이 나 신라왕이 배상 대신 장인을 보냈을 수도 있다.[155] 하지만 원문에서 '홀연히 불이 났다'고 표현했기 때문에 신라 사신들이 잘못한 것보다 대왕이 요청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420년에 벌어진 일로 추정된다.
  • 308년 2월 백제 직지왕이 여동생 신제도원(新齊都媛)을 보냈다. 이주갑인상한 428년은 비유왕 2년이라서 전지왕 재위기는 오류다. 전지왕 재위기간(405~420)에 일어난 일이 맞다면 408년이나 418년에 일어난 일을 428년으로 오기한 것으로 보인다.

3. 추측

오진 천황을 실존했던 천황이라고도 말하지만, 일부 사학자들은 전설적인 천황으로 여기기도 한다. 오호도 왕(26대 게이타이 천황)과 마찬가지로 고유의 시호를 가지고 있고, 고분의 출토로 실존인물이라고 확인된 제16대 닌토쿠 천황와 달리, 오진 천황은 제10대 스진 천황에서 진무 천황이라는 신화적 존재를 만들어낸 사례의 재탕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닌토쿠 천황>조의 기록의 중복과 혼란 등이 있어, <오진, 닌토쿠 동일인물 설> 등이 있다. 그 연대는 《고사기》 간지붕년(干支崩年)에 따르면, 4세기 후반쯤이 된다. 기기(記紀)에 기록된 오진 천황의 계보는 당시에 권력을 차지했던 자의 계보를 조작하여 만든 것이라고 보아야 타당하다는 설이 있다.

오진 천황의 실존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어, 여러가지 설이 나왔다. 오진 천황의 일본식 시호인 호무다가 8대 이전의 가공의 천황과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 점에 의거해 실존했다는 설, <3왕조 교대설>에 있어서의 정복왕조의 창시자로 보는 설, < 야마타이국의 동천설>에 관련되어 황실의 선조로서 제사지내지고 있는 신으로 보는 설, 진무 천황= 스진 천황과 동일인물이라는 설, 카와치 왕조(河内王朝)의 시조라고 보는 설 등 있다.

또, 일본 밖의 사료와 비교하여, 《송서》, 《양서》에 보이는 왜5왕(倭五王) 중 (讃)에 비정하는 설, 닌토쿠 천황이나 제17대 리추 천황에 비정하는 설 등이 있다.

3.1. 아버지?

《일본서기》나 《고사기》에서는 오진 덴노가 주아이 천황의 유복자라고 서술했지만, 이상하게도 일본 내의 다른 기록에는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도 있다.

8세기의 서적인 《스미요시 대사 신대기》(住吉大社神代記)에서는 진구 황후가 남편 주아이 천황이 붕어한 뒤 스미요시 대신(住吉大神)[156]과 관계하여 오진 천황을 잉태했다고 서술했다.

14세기 《하치만 우사궁 어탁선집》(八幡宇佐宮御託宣集)에서는 진구 황후가 적을 물리치게 해달라고 신령에게 기원하자, 스미요시 대신이 나타나 관계하여 하치만(오진 천황)를 낳았다고 설명했다.

15세기에 저술된 《애낭초》(壒嚢鈔)[157]의 <미롱사>(尾籠事)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오진 덴노가 해신의 아들이라 몸에 꼬리가 달렸기 때문에, 꼬리를 가리고자 옷에 '쇼조쿠쿄'(装束裾)라는 것을 달아 길게 늘어트렸다. 어느 날 오진 천황이 문 밖으로 나가는데 시종이 아직 옷자락이 다 빠져나오지 않았는데도 실수로 문을 닫아버리자, 천황이 "꼬리가 안에 있다."(尾籠也)고 말했기 때문에, 이후 '비로'(尾籠)라는 말이 '무례'를 뜻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화적 이야기들에서 한 가지 공통점이라면, 오진 천황이 바다와 연결이 되어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해신의 아들, 용의 꼬리, 스미요시 대신의 아들. 이러한 표현은 전부 바다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 오진 천황이 해안가 쪽 세력과 연계하여 정권을 탈취하여 왕위에 오른게 아닌가 하고 추측하는 설이 있다.

3.2. 신라와의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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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재위 연간에 왜( 야마토 왕권)가 신라를 특히 자주 공격했다. 287년에는 왜군이 민가에 불을 지르고 신라의 백성 1,000명을 잡아서 도망갔으며, 292년에 사도성, 294년에는 장봉성으로 왜군이 쳐들어왔다. 이에 맞서 당시 신라의 유례 이사금도 왜국으로 원정할지 논의하기도 했다.
즉위 12년(295)에 유례왕은 왜국 원정을 결심하고, 신하들에게 물었다.

"왜인들이 자주 우리의 성읍을 침범하여 백성들이 편하게 살 수 없으니 내 생각엔 백제와 더불어 일시에 바다를 건너 왜국으로 쳐들어가는 것이 어떠한가?"

이에 서불한 홍권(弘權)이 만류했다.

"우리는 수전에 익숙지 못한데 모험을 무름쓰고 바다를 건너 원정하면 예기치 못한 변을 당할까 우려되며, 하물며 백제는 거짓이 많고 항상 우리를 삼키려는 마음이 있으니 백제와 일을 도모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이에 유례왕은 왜국 원정을 그만두었다.

당시 신라가 한성백제와 왜국, 특히 그 중에서도 왜구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다. 훗날 실성 마립간 때도 비슷하게 왜국으로의 예방전쟁을 왕이 제안했지만 그때도 비슷하게 대신의 만류로 그만뒀다.

그런데 고려시대 중반 《 삼국사기》 편찬으로부터 수백년 후 저술된 조선 시대 역사서인 《 동사강목》에서는 조선통신사 김세렴과 이경직이 참고한 일본의 사서 《연대기》(年代記)의 다음 기록을 인용하여 신라의 왜국 침공 기록을 적었다.
일본은 극동에 멀리 떨어져 있고, 사면이 큰 바다로 둘려 있어, 외국의 군사가 들어갈 수가 없다. 다만 그들의 《연대기》(年代記)를 보면, 왜황 응신(應神) 22년에 신라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왔다고 되어 있는데, 명석포(明石浦)는 대판(大阪, 오사카)에서 겨우 100리 떨어져 있다. 적간관(赤間關)의 동쪽에 한 구롱이 있는데, 왜인이 이를 가리켜 "이것이 백마분(白馬墳)인데, 신라 군사가 일본에 깊이 쳐들어오니, 일본이 화친하고 군사를 풀어주기를 청하여 백마를 죽여서 맹세한 뒤에 말을 이곳에다 묻었다." 한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응신(應神) 12년 신해(辛亥, 291)가 바로 유례왕 8년(291)에 해당되니, 이 해와는 조금 차이가 있으나 대개 같은 때의 사건인데, 동사(東史)에는 보이지 않는 것은 글이 빠진 것이다.

즉, 김세렴과 이경직이 참고한 일본의 사서(기록)인 《연대기》(年代記)의 기록에서는 신라 유례왕이 왜국 원정을 나서서 명석포( 아카시시)까지 가 왜국을 공격하고는 화친하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반면 《삼국사기》의 기록은 유례왕이 왜국 원정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만두었다고 하고 있어서 《연대기》[158]의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또한 신라가 침공을 시도한 시기도 295년으로 일본에서 기록한 291년 침공 시점과 약 4년 정도가 다르다. 물론 291년의 침공과 295년의 침공 시도를 별개로 본다면 291년에는 어떤 상황인지 몰라도 실제 침공에 성공했지만 295년의 침공 시도는 여러 문제점들 때문에 결국 포기했다고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관련 기록들이 너무 부족하여 정확한 상황은 파악할 수가 없다.

추가로 에도 막부 초기에 쓰인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159]에도 해당 기록이 똑같이 나온다.
진 원강(元康) 원년(291)[160] 신라병이 일본을 공격하매[여], 깊이 명석포에 들어왔다.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

파일:신라의 왜국 침공.jpg

만약 실제로 신라가 왜국을 침공했다면 신라는 어떻게 왜국( 야마토 왕권)을 공격했을까? 일단 침공 루트는 세 가지 경로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대한해협을 건너 대마도를 지나, 하관(시모노세키)를 거쳐 명석포에 다다르는 방법
두 번째는 주고쿠 지방(규슈 옆에 있는 섬)을 통해 육지에 상륙해서 명석포로 가는 방법
세 번째는 대마도 서남부로 우회해 규슈 남부를 지나 시코쿠 지방의 남부 지역을 지나는 방법이 있었다.

어떤 방법이든 위험하지만, 신라는 셋 중 하나를 선택하여 명석포로 진격해 오사카에서 왜왕의 항복을 받아낸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신라의 왜국 침공이 만약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신라는 당시 야마토 정권의 중심지인 나니와(難波) 근방의 아카시노우라(明石浦)를 공격하기까지 했고, 이 덕분에 한동안 왜구의 침입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서기》 응신(應神) 22년(291) 조에 있는, 갑자기 등장한 어우별[御友別] 세력에게 오진 천황이 6현을 떼어주었다는 기록이 유례 이사금 시절 신라가 일본을 침공했다는 기록과 모종의 연관이 있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다.
엽전(葉田)의 위수궁(葦守宮)에서 머무름 / 어우별(御友別)의 형제, 자손에게 길비국을 나누어 줌

경인(10일)에 다시 엽전(葉田: 하다노)[葉田은 하다(簸娜)라고 읽는다.]의 위수궁(葦守宮: 아시모리노미야)으로 가서 머물렀다. 이때 어우별이 찾아와 그의 형제 자손으로 하여금 선부(膳夫: 카시하데)로서 (천황의) 식사를 위해 봉사하도록 하였다. 천황은 어우별이 삼가 공손히 받드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래서 길비국을 나눠서 그 자손 등에게 주었다. 즉 천도현(川嶋縣: 카하시마노아가타)을 나눠서 큰 아들 도속별(稻速別: 이나하야와케)에게 주었다. 그가 하도신(下道臣: 시모츠미치노오미)의 시조다. 다음으로 상도현(上道縣: 가미츠미치노아가타)을 둘째 아들 중언(仲彥: 나카츠히코)에게 주었다. 그가 상도신(上道臣: 가미츠미치노오미)과 향옥신(香屋臣: 카야노오미)의 시조다. 다음으로 삼야현(三野縣:미노노아가타)을 제언(弟彥:오토히코)에게 주었다. 이가 삼야신(三野臣: 미노노오미)의 시조다. 또 파구예현(波區藝縣: 하쿠기노아가타)을 어우별의 동생 압별(鴨別: 가모와케)에게 주었다. 이가 입신(笠臣: 가사노오미)의 시조다. 그리고 원현(苑縣: 소노노아가타)을 그의 형 포응별(浦凝別: 우라코리와케)에게 주었다. 이가 원신(苑臣: 소노노오미)의 시조다. 다음으로 직부(織部: 하토리베)를 형원(兄媛: 에히메)에게 하사했다. 이로 인해 그 자손이 아직 길비국에 살고 있다. 이것이 그 연유이다.
일본서기》 웅신 22년(291) 9월 10일 원문

3.3. 실제 재위기간 문제

진구 황후의 실존성 여부와 별개로 진구 황후 섭정기-오진 덴노 재위기 기준은 비정상적이다.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섭정 시기는 섭정 대상에 들어가는 그 왕의 재위기간에 포함된다. 중국과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도 예외가 아니라 천황이 상황으로 양위하면 천황 재위기간과 상황 재위기간을 별개로 환산했고, 상황의 인세이도 인세이하는 상황을 기준으로 재위기간을 센 것이 아니라 인세이 대상에 들어가는 천황을 기준으로 재위 기간을 셌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진구 섭정 69년이 오진 재위기에 포함되는 것이 맞다. 주아이 9년 주아이가 사망하고 다음 해 진구 황후가 황태후로 높여져 진구 섭정 원년이 되었으며, 진구 섭정 2년 주아이를 장사 지내고, 진구 섭정 3년 호무타가 황태자가 되었으며, 진구 섭정 69년 황태후가 사망하고, 다음 해부터 오진의 재위기간으로 세는 건 맞지 않다.

'섭정'이라는 단어는 어디까지나 '천황'을 '황태후'가 보좌한다는 개념이다. 진구 황후의 섭정 원년은 호무타가 태어난 다음 해 황후가 황태후로 높여졌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상식적으로 보통 이때, 늦어도 섭정 3년 호무타가 '황태자'가 되었다는 시기에 호무타는 '황태자'가 아니라 '천황'이 되고, '황태후'가 '천황'인 호무타를 섭정했다는 서술이 정상적이다. 그럼에도 호무타는 진구 섭정 기간 내내 '황태자'로 나오며 '천황'의 자리는 공위기가 되어 있고, '황태후'가 '사망한 뒤'에 '황태자'가 '천황'으로 즉위해 그 뒤부터 재위기간으로 센 것이다. 진구 황후의 재위기간과 오진의 재위기간을 별개로 세고자 했다면, 주아이 9년 주아이가 사망하여 다음 해 진구 황후가 어린 아들 대신 천황으로 즉위하였고, 진구 2년 주아이를 장사 지냈으며, 진구 3년 호무타가 황태자가 되었고, 진구 69년 진구 천황이 사망하여 다음 해 황태자가 천황으로 즉위했다고 서술해야 맞다.

당대 일본에 여제 개념이 없던 것도 아니다. 713년 고사기가 편찬되었을 당시 선대 여제로 스이코 덴노, 고교쿠 덴노/사이메이 덴노(동일인물), 지토 덴노가 있었고 여제인 겐메이 덴노 재위기였으며, 720년 일본서기가 완성되었을 당시에는 여제 겐쇼 덴노가 재위하던 당시였다. 거기다 겐메이 덴노와 겐쇼 덴노는 몬무 덴노가 붕어할 당시 쇼무 덴노가 세는나이 7살밖에 안 되어 몬무 덴노 대신 몬무 덴노의 할머니(겐메이)와 고모(겐쇼)가 성년(세는나이 24살)이 될 때까지 대신 즉위한 인물들로, '주아이 사후'에 태어난 호무타 황자 대신 진구 황후가 '진구 천황'으로 즉위한다는 개념을 더더욱 떠올리기 쉬운 상황이었다.

따라서 진구 섭정 69년을 '천황이 없는' 공위기로 표기하는 게 아니라 진구 황후가 '진구 천황'이 되었다고 서술하는 게 여러모로 개연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섭정'이라고 표기해서 혼란을 준 것. 사서 편찬에 관여한 걸로 보이는 백제계 사관들이 여제 개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이런 것일 수도 있지만, 다른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다. 이 문제를 인식했는지 후대 기록에서는 진구 황후를 진구 덴노로도 기술하고 있지만,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는 덴노라는 표현이 일체 나오지 않고 오로지 황태후로만 기록하고 있다.

일본서기 9권에 따르면 진구 섭정 13년(213) 2월, 호무타 황태자가 츠누가(角鹿)의 케히노 오오미카미(笥飯大神)에 참배하였고 타케우치노 스쿠네가 이를 기념하는 사건이 있었다. 9권에 따르면 200년 12월 14일에 호무타가 태어났고, 따라서 세는나이로 14세였다. 반면 10권에서는 진구 3년 세는나이 3살에 황태자가 되어 201년생이기 때문에 세는나이 13살이 된다.

삼국시대 성년이 대체로 세는나이 15~16세였던 반면, 고대 일본에서는 성년 개념이 좀 더 빨라 세는나이 13~14세만 되어도 성년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았다.[161] 따라서 호무타 황태자의 케히노 오호미카미 참배는 성년식 비슷한 개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전근대 동양 사회에서 계승권자가 어려 섭정을 하거나 숙부 등의 친족이 대신 즉위했을 경우 보통은 15~16살, 늦어도 20살 이상이 되면 섭정에서 물러나거나 양위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특히 진구 황후는 '황태후 섭정'이라 표기했기 때문에, 원래라면 늦게 잡아도 진구 섭정 20년 이후에는 호무타 황태자가 정식으로 '오진 천황'으로 즉위하고 황태후는 섭정에서 물러나는 것이 맞다. 그럼에도 '진구 황태후'가 사망할 때까지 '진구 섭정기'로 표기했는데, 이것도 비정상적이다.

호무타 황태자의 츠누가 참배(진구 13년) 이후 진구 섭정기의 기사
  • 진구 섭정 39년(239) 6월 '왜 여왕(倭女王)'이 위에 사신을 보냈다. 실제 원문부터 '왜 여왕'이라 명시하고 있으며, 당당하게 위지(魏志) 명제(明帝) 경초(景初) 3년 기사를 인용했다 명시했고 사신의 이름도 히미코가 보낸 나시메(難斗米)를 그대로 갖다 썼다. 실제 위지에서는 경초 2년(238) 왜 여왕 히미코가 중국에 조공한 사건으로 1년의 오차가 있으나, 원문의 서술도 그렇고 중국 역사에 박식했던 도래인 사관들이 위지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 히미코 조공 기사를 진구 섭정기에 인용하다가 실수한 듯하다.
  • 진구 섭정 40년(240) 위(魏)에서 왜에게 사신을 보냈다. 마찬가지로 위지를 그대로 인용했다고 명시한다. 히미코의 것으로 보인다.
  • 진구 섭정 43년(243) 마찬가지로 위가 왜에게 사신 보낸 기사를 위지에서 인용했다고 명시한다. 히미코의 것으로 보인다.
  • 진구 섭정 46년(246) 3월 1일 시마노 스쿠네(斯摩宿禰)가 탁순국(卓淳國)[162]에 파견되어 탁순왕(卓淳王) 말금한기(末錦旱岐)와 만났다. 시마노 스쿠네는 말금한기에게 백제가 왜와 협력하고 싶다는 말을 들었고, 이에 시마노 스쿠네는 탁순인 과고(過古)가 백제 초고왕(肖古王)의 사신으로 파견될 때 왜인 니하야(爾波移)를 동행시켰다.
    초고왕은 탁순 사신과 왜 사신에게 각각 많은 선물을 준 뒤, 보물 창고로 데려가 각종 보물들을 보여주며 백제에는 이런 진귀한 보물이 많고 사자를 보내 왜와 교류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였다. 니하야는 탁순에 머물던 시마노 스쿠네에게 초고왕의 뜻을 전하였고, 시마노 스쿠네는 탁순에서 왜로 돌아갔다.
    366년은 근초고왕의 재위기간인데, 중국 기록과 일본 기록에서 근초고왕은 일관적으로 '초고왕'으로 불리기 때문에 본명은 초고왕이고 제5대 초고왕과 구별하기 위해 근(近)이 붙은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366년 탁순에 파견된 왜 사신이 탁순 사신과 함께 백제에 갔다 근초고왕과 만나 협력 제안을 받고, 이를 받아들인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 해당 기사는 사건만 늘어놓을 뿐, '황태후'나 '천황' 등의 서술이 일체 등장하지 않아 해당 서술만 보면 당대 일본의 대왕이 누구인지 아예 알 수 없다.
  • 진구 섭정 47년(247) 4월 백제 왕이 구저, 미주류, 막고를 사신으로 보냈는데 신라의 조사(調使)도 구저와 함께 왔다. 이에 황태후와 태자 호무타와케노 미코토(譽田別尊)가 크게 기뻐하며 "선왕(先王)이 두 나라 사신을 만나고 싶어했는데 지금 이루어지니, 천황을 뵙지 못한 것이 참으로 슬픈 일이다."라고 말해 주위가 모두 눈물을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신라보다 백제가 눈에 띄게 양이 적어 황태후와 태자가 백제 사신에게 묻자, 백제 사신은 왜로 가는 도중에 길을 잃어 신라의 사비(沙比) 일대에 들어갔다 신라인에게 걸려 신라인들이 백제 사신들을 잡아 물자를 약탈했다고 대답했다. 이에 황태후와 호무타와케노 미코토는 먼저 신라 사신들에게 항의한 뒤, '타케우치노 스쿠네와 논의하고 치쿠마노 나가히코를 사자로 보내라'는 신탁을 받고 치쿠마노 나가히코가 신라로 가 약탈 사건을 항의하였다.[163]
    이주갑인상해서 367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인다. 이 사건에서는 황태후와 호무타와케노 미코토가 같이 무엇을 했다고 서술되는데, 오진 재위기 기사에서 '호무타와케노 미코토가 ~했다'는 서술 없이 특정 사건만 늘어놓거나 '천황'이라는 명칭만 등장하는 반면 이때는 '호무타와케노 미코토가 ~했다'라고 명확하게 명시되는 것이 특징이다.
  • 진구 섭정 49년(249) 왜에서 아라타와케(荒田別), 카가와케(鹿我別)를 백제에 파견하였고, 근초고왕 탁순국에서 신라와 가야 7개국이 함께 모여 백제 출신의 패권을 형성할 때 참석하였다. 직후 근초고왕은 가야-왜 사이의 교역권을 장악하기 위해 서쪽으로 가 침미다례를 침략해 잔륙해 버리고,[164] 치쿠마노 나가히코 등은 백제의 벽지산(辟支山)에 올라 맹약한 뒤, 고자산(古沙山)에 다시 올라 근초고왕과 맹약을 맺었다. 그리고 치쿠마노 나가히코는 백제의 수도로 가 예우를 받은 뒤 백제 사신 구저와 함께 왜로 갔다. 이후 고고학적으로 수십 년 동안 왜의 상국 노릇을 하는 것이 확인되기 때문에, 왜가 신라와 마찬가지로 백제의 패권 아래로 합류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4세기 후반까지 왜에는 백제계 문화가 전혀 침투하지 못하는 양상을 보이기 때문에, 외교적으로 친하게 지내긴 해도 당시의 교류는 왜 문화에 큰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던 걸로 보인다.[165] 4세기 중후반 고고학 연구와 시기가 일치하기 때문에 이주갑인상해서 369년의 일로 추정된다. 천황과 황태후 운운하는 구절은 일체 없다.
  • 진구 섭정 50년(250) 2월 아라타와케가 귀국하고, 5월 치쿠마노 스쿠네와 백제 사신 구저가 왜로 돌아왔다. 황태후가 매우 기뻐하며 이번에는 무슨 일로 왔냐 묻자 백제 사신 구저는 근초고왕이 이번(백제의 남방 정복)에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앞으로도 왜와 교류하고 싶다 대답하고, 이에 황태후는 받아들였다.[166] 370년 2월과 5월에 일어난 사건으로 여겨진다. 여기서는 황태후만이 언급된다.
  • 진구 섭정 51년(251) 3월 백제가 다시 구저를 보내자 황태후는 태자와 타케우치노 스쿠네에게 백제가 보낸 물건들은 일찍이 왜에 없던 아주 귀중한 물건들인데 백제가 매년마다 보내주니 아주 기쁘다 칭송하며 앞으로도 백제와 잘 지내라고 말했다. 그 외에 시기가 불명이나 치쿠마노 스쿠네가 구저 등과 함께 백제로 갔고, 백제왕 부자와 대화하는 내용이 나온다. 일본서기의 윤색과 달리 실제로는 치쿠마노 스쿠네가 백제왕 부자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예를 표했던 걸로 추정된다. 371년으로 추정된다.
  • 진구 섭정 52년(252) 9월 10일 구저 등이 치쿠마노 스쿠네를 따라와 칠지도(七枝刀) 한 자루와 칠자경(七子鏡) 한 개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귀중한 보물을 주었다. 백제왕이 손자 침류왕에게 앞으로도 왜와 잘 지내라 당부하고, 이후 백제는 매년마다 왜에게 귀중품을 주었다. 372년으로 추정된다. 왜왕이 누구인지 여부는 나오지 않는다.
  • 진구 섭정 55년(255) 초고왕이 죽고 56년(256) 왕자 귀수가 왕이 되었다. 삼국사기에 근초고왕이 375년에 사망했음이 확인되기 때문에 이주갑인상해서 375년이다.[167] 왜왕이 누구인지 여부는 나오지 않는다.
  • 진구 섭정 62년(262) 신라와 국교가 단절되자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를 보내 신라를 공격하게 했다. 백제기에 따르면 신라가 백제에게 반기를 들자 분노한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고자 했고, 이에 왜는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를 파견에 협력하도록 했다.[168] 그런데 소츠히코는 신라의 미인계에 낚여(...) 치라는 신라는 안 치고 오히려 반파국을 공격했고, 반파왕 기본한기(己本旱岐)와 아들 백구지(百久至), 아수지(阿首至), 국사리(國沙利), 이라마주(伊羅麻酒), 이문지(爾汶至) 등은 그 인민을 데리고 백제로 도망쳤다. 반파왕의 누이 기전지(旣殿至)가 백제왕에게 소츠히코의 팀킬을 고하자 분노한 백제왕이 목라근자를 보내 반파국의 사직을 복구하도록 했고,[169] 소츠히코를 죽이려 했지만 소츠히코는 동굴에 숨어가며 간신히 왜로 귀국하였다. 이후에도 소츠히코가 왜에서 잘나가는 것을 보아 이 트롤링은 어찌어찌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382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추정된다.
  • 진구 섭정 64년(264) 백제국 귀수왕이 죽자 침류왕이 즉위하였지만, 65년(265) 백제 침류왕이 죽고 왕자 아화(阿花)가 어린 걸 이용해 숙부 진사가 찬탈하여 왕이 되었다. 백제 왕의 즉위 사건만 거론할 뿐 누가 왜왕이네 운운하는 구절은 일체 없다.
  • 진구 섭정 66년(266) 야마타이국의 여왕 토요가 진(晉)에 조공한 사건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이주갑인상은 아닌데 위의 히미코와 마찬가지로 토요가 한 일이다.
  • 진구 섭정 69년(269) 4월 17일 황태후가 100세에 사망하여 10월 15일 장사 지내고 시호를 바쳤다. 이해가 기축(己丑)년이었다.

진구 황후기 기사를 보면, 진구 13년 15세가 된 호무타의 성년을 기념하는 연회가 열린 뒤, 히미코 기사가 나오고 바로 다음이 진구 46년 왜 사신이 탁순국에 갔다 백제로 가서 근초고왕과 접촉한 사건이고, 바로 다음이 진구 47년 진구 황태후와 황태자 호무타와케노 스메라미코토가 백제 사신과 신라 사신을 접대하다 신라 사신과 마찰을 빚은 사건이고, 이후 태자가 명확히 언급되는 건은 51년 진구 황태후가 태자와 타케우치노 스쿠네에게 앞으로도 백제와 친하게 지내라 당부하는 내용이다. 진구 47년 기사에서 호무타와케노 스메라미코토가 황태자로 나오지만, 백제와 신라 사신을 접대하고 신라 사신에게 항의하는 사건을 황태후와 태자가 행했다는 것과 서술의 맥락을 보면 진구 47년 당시 호무타가 성년으로서 대외 활동이 충분히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진구 13년 기사에서 사실상 바로 다음인 진구 46년 기사와 33년의 차이가 난다. 이주갑인상은 120년만 한 게 아니라 사건에 따라 120-60-30 순으로 따로 인상하기도 했기 때문에 30년을 제외하면 3년 뒤가 된다. 13년에서 46년까지 30년을 삭제할 경우 47년 당시 호무타는 세는나이 17~18세가 되어 고대 한자권 기준으로 충분히 친정이 가능한 나이였다. 370, 371년에 진구 황태후가 백제 사신과 만난 기사와 371년 황태후가 백제와 사이좋게 지내라고 태자와 타케우치노 스쿠네에게 말했다는 기사는 진구 황후를 삭제하면 호무타가 타케우치노 스쿠네에게 백제와의 외교 성과가 만족스럽다고 말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일본서기에서는 오진 15년(284) 8월 6일 아직기(阿直伎)를 태자 우치노 와키이라츠코의 스승으로 삼고, 오진 덴노가 아직기에게 아직기보다 더 뛰어난 박사가 있냐 묻자 아직기가 왕인(王仁)을 추천하여 오진 16년(285) 2월 왕인을 데려와 태자 우치노 와키이라츠코의 스승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런데 고사기에서는 왕인이 근초고왕 재위기(346년 9월~375년 11월)에 이주했다고 전해진다. 285년을 120년 인하하면 405년이 되어 시기가 맞지 않지만, 405년에서 30년 인상하면 375년 2월이 되어 근초고왕 재위기가 된다. 따라서 이를 종합하면 오진 덴노는 실제로 360년대 후반~370년대 중반에 재위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주아이 덴노 진구 황후의 실존성 여부와 별개로, 오진 덴노에게도 친부모는 있었을 것이다. 사서에 따르면 주아이의 근거지는 아나토(穴門)고, 오진은 태어난 장소가 9권과 10권의 기록이 갈리지만 공통적으로 츠쿠시(筑紫)에서 태어났다 기록되어 있다. 진구 황후는 섭정기 때 츠쿠시에서 이와레(磐余)로 천도하였고, 10권에 따르면 오진은 카루시마(軽島)에서 재위하였다. 아나토는 주고쿠의 서쪽 끝으로 규슈 북부와 마주하는 야마구치현 서부 일대, 츠쿠시는 규슈 북부의 후쿠오카현 일대, 이와레는 나라현 사쿠라이시 일대, 카루시마는 대체로 나라현 카시하라시 일대로 비정된다. 진구 황후의 200년(320) 신라 공격 기사와 오진 덴노의 탄생 일화를 보면 오진 덴노의 친부모는 실제로 후쿠오카현 일대가 근거지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주아이 덴노는 야마구치현 출신으로 추정되는데, 야마구치현과 후쿠오카현은 간몬해협 너머라 서로 가깝기 때문에 주아이의 실제 여부와 별개로 주아이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 오진의 친부모의 근거지와 이웃해 있기에 서로 인연이 있었으리라 유추할 수 있다.

오진의 근거지인 카루시마 일대는 제1왕조 시대부터 제3왕조 초기까지 야마토(大倭) 문화권에 속한 제국(諸國)들의 대표를 맡던 오오키미(大王)가 출신지와 상관없이 야마토 호족들의 대표(대왕)가 되면 자리잡던 나라현 일대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된다.[170] 따라서 오진의 친부모는 후쿠오카현 일대 호족 가문 출신이었다 나라현의 카루시마 일대로 이주한 호족이라 추측이 가능하다.

일본서기 8권 주아이 9년(200) 2월 5일 주아이 덴노 사망, 8권 주아이 9년 12월 14일 오진 덴노 탄생, 다음 해(201) 신사년 10월 2일 진구 황후가 황태후로 높여져 섭정 원년이라 하였고, 신공 69년(269) 기축년 4월 17일 진구 황후가 사망하여 그해 10월 15일 장사 지냈고, 10권 진구 사망 다음 해(270) 경인년 1월 1일 오진 덴노 즉위이다. 오진 덴노가 사망했을 당시의 간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닌토쿠 즉위 3년 전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4세기를 기준으로 신사년은 321년, 기축년은 329년, 경인년은 330년/.390년이다. 따라서 간지를 4세기에 맞춰 계산하면
  • 320년 2월 5일 주아이 덴노 사망
  • 320년/321년 12월 14일 오진 덴노 탄생
  • 신사년(321) 10월 2일 진구 황후가 황태후로 높여져 섭정 시작
  • 322년 11월 8일 주아이 덴노 장사 지냄
  • 323년 1월 3일 세는나이 3/4세의 호무타 황태자 책봉, 이와레 천도
  • 기축년(329) 10월 15일 진구 황후 사망
  • 경인년(330/390) 1월 1일 오진 덴노 즉위

367, 370, 371년으로 추정되는 한반도 관련 기사에 나오는 '황태후'가 오진의 친모가 맞을 경우, 오진의 친모는 371년까지 살아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를 종합하면 320/321년에 오진이 태어났고, 323년에 오진이 오진 씨족의 태자가 되고 오진의 친부가 이와레에 천도했으며, 329년에 오진의 친부가 사망하고, 330년에 오진이 9~10세에 즉위했다고 계산할 수 있다. 이 경우 오진이 유년에 즉위한 것이 되어 성년이 될 때까지 모후의 섭정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진구 13년(213) 세는나이 13~14세가 된 호무타 황태자가 츠누가에 참배하고 이를 기념하는 기사가 있기 때문에 332년에 섭정이 끝났을 가능성이 있으며, 오진이 320~321년생이라 간주할 경우 366년 시점에서는 45~46세가 되어 확실히 친정하는 시기가 된다.

닌토쿠는 즉위 당시 기년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계유년에 태어났다 기록되어 있는데, 4세기 계유년은 313년/373년이며 실제 닌토쿠는 4세기 후반에 재위한 것으로 추측되므로 오진과의 일화까지 종합하면 실제로는 373년에 즉위했을 가능성이 높다. 오진이 닌토쿠 즉위 3년 전에 사망한 것이 진실일 경우 오진은 370년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으나(48~50세), 아직기와 왕인 사건이 474, 475년이고 이때 우지노 와키이라츠코가 태자였다면 더 오래 살았을 수도 있다.

오진 40년(309) 1월 8일 우지노 와키이라츠코를 황태자로 삼고 싶어 오호야마모리노 미코토와 오호사자키노 미코토(닌토쿠 덴노)를 불러 "큰아들과 작은 아들 중 누구를 더욱 사랑하느냐"라 물었을 때, 오호야마모리노 미코토는 "큰아들을 더욱 사랑한다" 대답하였고, 오호사자키노 미코토는 "큰아들은 이미 성인이 되었지만 작은아들은 아직 성인이 못 될지도 모른다"라 대답하였고, 이에 24일 우지노 와키이라츠코를 황태자로 삼고 오호야마모리노 미코토는 산천임야를 관장하게 하였으며, 오호사자키노 미코토에게 태자를 보좌하여 국사를 다스리게 하였다. 따라서 당시 우지노 와키이라츠코가 미성년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오진 40년의 기준을 진구 원년(321)으로 잡으면 해당 사건은 370년이 된다.[171]

오진 기사에 나오는 한반도 관련 기록인 392~428년 기사는 오진일 가능성이 떨어진다. 오진이 320년생이 아니더라도 오진의 실제 재위기간은 4세기 중후반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4세기 말~5세기 초 기사는 오진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후대 왕의 기사가 삽입된 것일 수도 있으나, 417년 고구려왕의 협박 서신에 태자 우지노 와키이라츠코가 분노해 불태운 사건이 있었고, 해당 기사에서 천황의 존재는 일체 언급되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는 우지노 와키이라츠코가 아닌가 추측된다. 고구려가 백제군의 용병으로 참전한 왜군과 본격적으로 싸운 건 아신왕 즉위(492년) 이후이기 때문에 480년대 이전은 가능성이 떨어지며, 오진의 나이를 감안하면 417년은 고대인의 평균 연령상 살아있었을 가능성이 떨어진다.

이런 일련의 정황을 보면, 오진 덴노의 실제 치세는 진구 황후 중후기고 오진 덴노의 기사 상당수는 우지노 와키이라츠코의 치세가 섞인 것으로 추측된다. 고사기에서는 오진 덴노가 갑오년에 사망했다고 기록했는데, 4세기 갑오년은 334년과 394년이다. 오진 덴노가 360년대~370년대 재위한 것으로 추정되므로 394년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 경우 320/321년에 태어난 오진 덴노는 73/74세까지 살아 당대 기준으로 장수했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닌 수명이 되며, 330년에 즉위했다면 54년 재위한 것이 된다.

우지노 와키이라츠코가 40년 재위한 것이 사실이라면 우지노 와키이라츠코는 395~435년 재위한 것이 되며, 한반도 이주갑인상 기사는 428년까지 나오기 때문에 적어도 이때까지는 살아있었을 것이다. 369년에 우지노 와키이라츠코가 '어린 나이'로 태자가 된 것이 사실이라면 350년대~360년대 초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측되므로, 우지노 와키이라츠코는 사망 당시 70~80대에 달하는 고령이 된다.[172]

4. 오진 덴노의 족보

일본서기 271년 3월 3일 기사에 따르면 오진 천황은 271년 3월 3일 닌토쿠 덴노의 어머니인 나카츠히메(仲姬)를 새로 들여 황후로 삼았다. 그 이전에는 나카츠히메의 언니 타카키노 이리비메와 나카츠히메의 여동생 오토히메가 있었다고 하며, 다음으로 미야누시야카히메, 워나베히메, 오토히메(弟媛)(와카누케오후타마타 황자의 어머니), 이토히메, 히무카노 이즈미노 나가히메로 8명이다. 271년 3월 3일 기사에 따르면 오진 천황의 모든 남녀 자식은 합하여 20명이었다고 하는데, 해당 기사에서는 나카츠히메가 3명, 타카키노 이리비메 5명, 오토히메(타카키노 이리비메, 나카츠히메 여동생) 3명, 미야누시야카히메 3명, 워나베히메 1명, 오토히메(와카누케오후타마타 황자의 어머니) 1명, 이토히메 1명, 히무카노 이즈미노 나가히메 2명이 나와 총 19명이다.

제1왕조~제2왕조 가계는 제3왕조와 만세일계로 묶기 위해 일본서기, 고사기에서 실제로는 부계 조상이 아님에도 부자지간으로 묶은 정황이 많아 전부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173]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편찬할 당시부터 신찬성씨록에서 보이는 타 씨족의 황별씨족, 신별씨족 자칭이 심했음을 고려하면 꽤 많은 씨족들이 오진 덴노의 자손을 자칭했던 걸로 보이며, 따라서 사서에 기록된 자식들이 어디까지 친아들이 맞는지 불명이다.

닌토쿠 천황이 오진 천황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사서에 나오는 여러 정황을 보면 닌토쿠 덴노는 오진의 친아들이 아니라 나니와 일대의 대호족 가문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174] 일본서기에서 오진 천황이 미야누시야카히메의 아들인 우지노 와키이라츠코 황자를 황태자로 삼은 것과, 닌토쿠 천황이 우지노 와키이라츠코 황자의 동복 동생인 야타 황녀를 황후로 맞아들인 걸 보아 실제로는 미야누시야카히메가 호무타 대왕의 왕후였을 것으로 보인다.[175]

그 외 280년 히무카(日向)의 미녀인 카미나가히메(髪長媛)에 대한 소문을 듣고 282년 삼았는데 동년 오호사자키 황자가 반하자 오호사자키 황자에게 줬으며(...) 271년과 288년에는 에히메라는 부인이 나오는데, 키비(吉備)[176] 호족 출신이다. 288년 기사를 보면 에히메의 가문은 키비에서 굉장히 강력한 호족 가문으로 보인다.

오진 덴노의 기사 상당수가 우지노 와키이라츠코와 섞인 것으로 보이므로, 카미나가히메와 에히메는 우지노 와키이라츠코의 부인일 수도 있다. 일단 카미나가히메가 닌토쿠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오오쿠사카 황자가 갑오년(454) 안코 덴노에게 억울하게 살해당하자 오오쿠사카 황자의 가신이자 나니와의 길사(吉師)였던 히카카(日香蚊) 부자가 충격 받아 자살했다는 일화를 보아 오오쿠사카 황자는 나니와가 근거지였던 닌토쿠의 친아들이 맞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오오쿠사카 황자의 부왕인 닌토쿠가 373년에 즉위, 우지노 와키이라츠코가 380년대~420년대 즉위했다 가정하면 454년에 사망한 오오쿠사카 황자의 나이를 고려할 때[177] 오진보다는 우지노 와키이라츠코가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부인들의 출신지와 후손을 자처한 씨족들과 비교하면 대체로 이렇다.

1. 나카츠히메(仲姬) : 타카키노 이리비메의 여동생이자 오토히메의 언니로, 아라타 황녀(荒田皇女), 오호사자키노 스메라미코토(大鷦鷯天皇), 네토리 황자(根鳥皇子)의 어머니다. 아들인 오호사자키(닌토쿠 덴노)가 나니와(難波)( 오사카시 주오구 일대)의 대왕이며, 오호사자키의 아들 오오쿠사카 황자의 가신이 나니와의 길사였으므로 나니와 호족과 혼인해 오호사자키를 낳았는데 만세일계 편찬 과정에서 오진의 황후로 조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아라타(荒田)는 규슈 남부의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또는 아이치현 나고야시에 속한 지명이다. 아라타 황녀가 가고시마 일대와 모종의 연이 있었을 수도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오호타노 키미(大田君) 씨가 네토리 황자의 후손을 자처했는데, 『신찬성씨록』 카와치河內 황별에서는 키미(君)에서 카바네(姓)를 스쿠네(宿禰)로 바꾼 오호타노 스쿠네(大田宿禰)가 12대 게이코 덴노의 아들인 오호우스 황자(大碓命)의 후손으로 미노국(美濃國)( 기후현)의 안파치군(安八郡) 오타향(大田鄕) 혹은 오노군(大野郡) 오타향에서 우지(氏)가 유래되었다고 기술했다. 안파치군과 오노군 모두 비와호 동쪽 기후현 남부에 위치하고 나고야시에 가까운 지역임을 고려하면 오호우스 황자든 네토리 황자든 어디까지나 자칭으로 보인다. 신찬성씨록(815)만큼 체계화된 건 아니었지만 고사기(713)와 일본서기(720)에서도 황별씨족, 신별씨족 자칭 가문들이 계보 조작을 한 흔적이 여러모로 나타나기 때문에 네토리 황자의 실존성은 보장할 수 없다.

2. 타카키노 이리비메(高城入姬) : 나카츠히메, 오토히메의 언니로 누카타노 오호나카츠히코 황자(額田大中彥皇子), 오호야마모리 황자(大山守皇子), 이자노 마와카 황자(去來眞稚皇子), 오호와라 황녀(大原皇女), 고무쿠타 황녀(澇來田皇女)의 어머니다. 타카키(高城)라는 지명은 일본에서 매우 흔히 쓰이는데, 주로 규슈 남부의 미야자키현 일대에서 많이 쓰였다.[178] 오진 덴노가 후쿠오카현에서 태어난 것과, 미야자키현 출신인 히무카노 카미나가히메의 일화와 조카인 아라타 황녀의 이름을 보면 정말로 미야자키현 출신일 수도 있다. 타카키노 이리비메-나카츠히메-오토히메는 실제 자매가 맞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며, 타카키노 이리비메가 오진 덴노의 부인인지 아닌지 불확실하나 부인이 아닐 경우 아들 누카타노 오호나카츠히코의 이름을 보아 누카타 일대 호족의 부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누카타노 오호나카츠히코는 일본서기에서 후손을 자칭한 씨족이 확인되지 않는데, 누카타(額田)는 현 오사카부 히가시오사카시에 속한 지역으로 오진의 근거지인 나라현 사쿠라이시 또는 카시하라시 일대와 명백히 괴리되어 있고, 오히려 현 오사카시 주오구 일대가 근거지인 오호사자키와 더 가깝다. 누카타 일대의 호족으로 추정되며 실존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다.

오호야마모리 황자는 오진 덴노의 사후 우지노 와키이라츠코와 대왕위 자리를 두고 경쟁하다 우지노 와키이라츠코에게 죽었다고 전해진다. 히지카타노 키미(土形君)와 하리하라노 키미(榛原君) 씨족이 오호야마모리 황자의 후손을 자칭했지만 둘 다 현 시즈오카현인 도토미국(遠江國)의 토착 호족임을 고려하면 자칭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신찬성씨록에서 고구려 도래인인 이리수의미(伊利須意彌)[179]의 후손 헤기노 아소미(日置朝臣) 또한 오호야마모리 황자의 후손을 자칭했다. 고사기에서는 幣岐君도 오호야마모리 황자의 후손을 자칭했는데, 신찬성씨록에서 헤기 씨와 동족이라 기록된 것으로 보아 실제로는 이들도 이리수의미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별로 좋게 행적이 써진 인물이 아님에도 많은 씨족이 자칭한 것이 특징인데, 실존 가능성이 떨어지는 편이다.

이자노 마와카 황자는 히다국(飛驒國) 荒城郡 후카카와深河(현재 기후현 吉城郡 古川町)의 토착 호족인 후카카와와케(深河別) 씨족이 후손을 자칭했다. 이자는 이자가와(去來川)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자가와는 일종의 관용어에 가깝다. 나라시의 이사카와(率川)가 이자가와라도 불렸는데, 나라시 일대의 호족이거나 실존하지 않았던 인물로 추정된다.

오호와라(大原)는 교토시 우경구(右京區) 일대의 지명으로, 오호와라 지역과 모종의 인연이 있었을 수 있다.

3. 오토히메(弟姬) : 타카키노 이리비메와 나카츠히메의 여동생. 아베 황녀(阿倍皇女), 아와지노 미하라 황녀(淡路御原皇女), 기노 우노 황녀(紀之菟野皇女)의 어머니다. 기록에 딸밖에 없으나, 타카키노 이리비메-나카츠히메-오토히메 세 자매 중에서 오진 덴노의 실제 부인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아베 황녀의 아베(阿倍)는 오사카시 아베노구와 관련된 이름으로 추정된다.

아와지(淡路)는 효고현 남부 아와지시, 미하라(御原)는 후쿠오카현 미하라군(御原郡)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기(紀)는 현 와카야마현 미에현 남부의 기이국(紀伊國)을, 우노(菟野)는 카와치국(河內國) 更荒郡 鸕鷀野邑의 지명에서 유래된 현 오사카부 다이토시 이코마 산(生駒山) 일대이다.

4. 미야누시야카히메(宮主宅媛) : 우지노 와키이라츠코 황자(菟道稚郎子皇子)와 야타 황녀(矢田皇女), 메토리 황녀(雌鳥皇女)의 어머니다. 일본서기에서는 와니노 오미(和珥臣)의 조상 히후레노 오미(日觸使主)의 딸이라 전해지는데, 『고사기』에는 丸邇之比布禮能意富美로 나오며 오미(使主) 도래계들이 주로 쓰던 카바네(姓)다. 신찬성씨록의 와니베(和邇部)에 따르면 와니(和邇)라고도 했으며 야마토국(大和國) 소에카미군(添上郡)(현 나라현 텐리시) 와니(和珥)가 본거지고 야마토국의 와니노 오미(和邇臣), 카스가노 오미(春日臣), 오노노 아소미(小野朝臣)과 동계라고 한다. 고쇼 덴노의 후손을 자칭했지만 당연히 자칭이고, 백제 또는 신라 도래인 설이 꾸준히 제기되는 씨족이다. 아들인 우지노 와키이라츠코와 조카 우지노 와키이라츠메의 이름과 게이타이 덴노와의 관계 등을 보아 우지(宇治)와 관련된 인물로 보이는데, 신찬성씨록의 오노노 아소미가 야마시로국(山城國) (愛宕郡) 오노향(小野鄕) 혹은 우지군(宇治郡) 오노향(小野鄕)에서 유래되었다는 기록을 보아 이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오진 기와 닌토쿠 기의 기록을 종합하면 오진 덴노의 왕후가 확실시되는 인물이다.

우지노 와키이라츠코는 사서의 기록을 종합하면 실제 오진 덴노의 아들이자 후계자가 맞는 것으로 보인다. 우지의 이름을 보아 우지 일대와 강한 인연이 있던 인물로 추정된다. 야타(矢田)는 오사카시 히가시스미요시구에 속한 지역으로 일본서기에서 닌토쿠의 자식 없는 왕후였다고 하는데, 닌토쿠의 왕후가 맞을 수도 있고 야타 일대의 호족에게 시집 갔을 수도 있다. 메토리는 암탉이라는 뜻이라 지명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5. 야카히메(宅媛)의 동생 워나베히메(小甂媛)[小甂은 워나베(烏儺謎)라고 읽는다.]는 우지노 와키이라츠메 황녀(菟道稚郎姬皇女)의 어머니다. 야카히메의 여동생이 맞는 것으로 추정되며, 언니처럼 실제로 오진 덴노의 부인이었거나 우지 일대 호족의 부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우지노 와키이라츠메는 우지와의 연관성이 강조되기 때문에 우지 일대와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6. 오토히메(弟媛) : 와카노 케후타마타 황자(稚野毛二派皇子)[派는 마타(摩多)라고 읽는다]의 어머니다. 가하마타 나카츠히코(河派仲彥)의 딸이라고 하는데, 『고사기』에서는 咋俣長日子王의 딸 오키나가 마와카 나카츠히메(息長眞若中比賣)로 나온다. 게이타이 덴노의 5대조모라 하는데 부자연스러운 점이 많아서 실제로는 아닌 것으로 추측된다. 그와 별개로 카와마타(河派/咋俣)는 히가시오사카시의 지명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카와마타 호족 출신이었던 오토히메라는 부인이 실제로 있었고 후세에 게이타이 덴노와 오진 덴노를 일계로 합치면서 오키나가 마와카 나카츠히메와 동일시된 게 아닌가 추정된다. 아니면 '오토弟히메'라는 이름의 특성을 고려하면 이토히메 또는 히무카노 이즈미노 나가히메의 여동생일 수도 있다.

7. 이토히메(糸媛) : 사쿠라이노 타베노 무라지 워사히(櫻井田部連男鋤)의 여동생으로 하야부사 와케 황자(隼總別皇子)의 어머니다. 사쿠라이노 타베노 무라지는 櫻井屯倉(현재 히가시오사카시 六萬寺町 혹은 돈다바야시(富田林市) 喜志의 전부(田部)를 통솔하는 우두머리기 때문에 히가시오사카시 호족 출신으로 추정된다.

8. 히무카노 이즈미노 나가히메(日向泉長媛) : 오호하에 황자(大葉枝皇子), 워하에 황자(小葉枝皇子)의 어머니로 자세한 것은 불명이나 히무카(日向)은 규슈 남부 미야자키현 일대, 이즈미(泉)은 오사카부 남서부의 이즈미국(和泉國)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기록이 부실해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4.1. 게이타이 덴노와의 관계

신찬성씨록을 보면 알겠지만 게이타이 덴노 이전 덴노의 후손을 자처한 황별씨족은 대부분이 자칭인 경우가 많고 사실인 경우가 매우 드물다. 따라서 미야누시야카히메의 아들인 우지노 와키이라츠코를 제외한 나머지는 마냥 신용할 수 없다. 오진의 족보가 우지노 와키이라츠코의 족보와 섞였을 수도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오미국(近江國) 토착 호족 출신이었던 게이타이 덴노의 5대조가 오진 덴노가 맞을 가능성은 많이 떨어진다. 오미 일대는 5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문화적으로 뒤처지는 동쪽 변방이었고, 5세기 중반부터 야마토(大倭)의 영역이 관동으로 넓어지며 관동과 키나이(관서)의 중개지로서의 가치가 오른 점, 한반도 도래인들이 오미 일대로 대거 진출하며 개척한 영향이 컸고, 일본서기와 고사기에서 게이타이의 5대조모의 호칭도 갈리는 점을 고려하면 가능성이 떨어진다. 고사기 명칭인 오키나와 마와카 나카츠히메의 오키나가(息長)가 오미 일대에 속하고, 게이타이 부인 중에서도 오키나가 출신이 있음을 고려하면 무관하지는 않겠지만 오진보다는 오미국의 토착 호족, 더 정확히는 게이타이가 태어난 미오노三尾野( 시가현 타카시마시) 지방의 호족과 혼인했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다만 게이타이가 오진 덴노와 간접적인 연이 있던 건 사실로 보인다. 오진 6년(275) 2월 기사에서 천황이 야마시로국(山城國) 우지군(宇治郡) 우지(宇治) 부근( 교토부 우지시)에 가 카즈노葛野( 교토시 우경구右京區와 서경구西京區)를 내려다보며 노래하는 기사가 있는데, 이때 우지를 오미국의 우지노(菟道野)라 표기하고 있다. 즉 미야누시야카히메의 아들인 우지노 와키이라츠코와, 미야누시야카히메의 여동생 워나베히메의 딸 우지노 와키이라츠메의 우지(菟道)는 우지(宇治)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미야누시야카히메-워나베히메 자매의 친정인 와니 씨족은 주로 나라현 텐리시 와니 일대를 중심으로 4~5세기 굉장히 권세 있는 대호족이었으며, 9세기로 접어들면 기나이 전체는 물론이고 오와리, 미노 등지에도 퍼져 살 정도로 규모가 컸다. 이중 오노노 오미(아소미)처럼 야마시로국 愛宕郡 또는 우지군에서 기원한 일족도 와니 씨에 편입되어 있었는데, 게이타이가 태어난 미오노는 우지시에서 북상한 다음 비와호의 서쪽 만을 따라 올라가면 타카시마시가 나와서 우지와 상당히 가까운 편이라 우지 호족 가문이 게이타이의 출신인 미오노 호족 가문과 가까운 사이였을 가능성이 높다.

신찬성씨록 항목에도 나오지만 일본 고대의 씨족 개념은 실제 혈연관계보다는 정치적 의도를 강하게 반영하고 있어 당대의 씨족은 시조로부터 비롯된 직무의 세습을 바탕으로 결합했다. 한국 족보와 같은 부계제는 일본 고대 사회에서 통하지 않아 씨족 수장의 지위가 반드시 아버지에서 아들로 전해지지 않았으며 방계 친족 혹은 사위까지 포함하는 넓은 범위에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인척지간인 다른 씨족들과 합쳐서 새로운 씨족을 창설하거나 규모를 키우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와니 씨가 도래인 설이 제기되는 가문인 것과 일찍부터 여러 지역에 나뉘어 분포한 걸 고려하면 와니 씨도 여러 씨족들을 합쳐서 성장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 과정에서 오노노 아소미처럼 우지 일대 호족이 와니 씨에 합류하면서 연이 생긴 걸로 추정된다.

우지노 와키이라츠코는 아버지 오진의 근거지인 사쿠라이시 또는 카시하라시와 꽤 떨어진 우지를 호칭으로 가질 정도로 우지와 연이 강했던 것으로 보이고, 이후 다른 가문으로 보이는 리추 덴노, 세이네이 덴노가 이와레(사쿠라이시)를 근거지로 한 것과 일계로 묶은 일본서기 족보에서조차 오진의 직계가 이후 대왕들과 타시라카 황녀에게 이어졌다는 구체적인 기술이 전혀 없는 걸 보아 우지노 와키이라츠코 이후 일족이 영락해서 우지로 근거지를 옮겼을 수도 있다. 또 우지노 와키이라츠코의 여동생들은 우지와 관련된 호칭이 없는 반면 이종사촌인 우지노 와키이라츠메는 우지와의 인연이 강조되는 호칭을 갖고 있다. 우지노 와키이라츠메는 실제로 우지 일대 호족의 부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오진의 5대손이라 기록된 게이타이의 생년은 일본서기에서 452년생(531년 79세 사망), 고사기에서 488년생(527년 39세 사망)으로 나뉘는데 모계로 5대조를 세면 5대조모가 350년대/380년대생(고사기)가 된다. 게이타이가 고사기의 기록대로 39세에 죽었다면 527/531년에 사망했을 때 5대조는 580년대~590년대생이 되는데, 우지노 와키이라츠코는 570년에 어렸다 가정해도 580년에는 성인이었을 가능성이 높기에 충분히 자식을 가질 수 있다.

게이타이가 사서대로 오진의 부계 5대손이 아니라도 만세일계 족보를 편찬할 때 굳이 오진을 선택했다면 오진과 아무 상관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고, 게이타이가 오진의 모계 후손이 맞다면 우지노 와키이라츠코 또는 우지노 와키이라츠메의 후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만세일계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모계 후손이 부계 후손으로 둔갑된 사례로 보인다. 오진 6년 2월 기사를 보아 우지노 와키이라츠코의 자손과 우지노 와키이라츠메의 자손간에 혼맥이 있었고 둘 다의 후손이었을 수도 있다.

5. 기타

사서에서 백제와의 관련성이 주로 강조되는 기록과 달리, 오진 덴노의 실제 활동 시기로 추정되는 4세기 중후반은 긴키 일대에서 가야, 신라계 영향만이 두드러지고 백제계 영향력이 그다지 나타나지 않는다. 사서에서 나타나는 여러 정황과 진구 황후가 신라 왕자라는 아메노히보코의 후손이라는 전설을 감안했을 때 오진 덴노의 일족은 실제로는 신라와 관련이 깊은 일족 출신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서에서 나타나는 모습을 보면 백제와 외교적으로 친하게 지내는 것과 별개로 오진 덴노의 일족이 내심 신라에게 더 관심이 많은 듯한 정황이 있고, 아메노히보코는 일본서기에 따르면 스이닌 덴노기에 나타나는데 스이닌 덴노는 실제 활동 기간이 3세기 후반~4세기 초반으로 추정되며 아메노히보코와 동일인물설이 제기되는 파사의 형인 일성 이사금 또는 그 아버지 또한 파사 이사금의 고고학적 활동 기간이 4세기 초중반으로 유력시되어 실제 고고학적 활동 기간이 거의 겹치는 것이 확인된다. 일본서기의 기록대로 오진 덴노의 어머니가 아메노히보코의 일족이라면 오진 덴노의 어머니는 신라 박씨 왕조의 후손일 수도 있다.

오진 덴노의 일족은 석우로의 죽음과 관련된 일족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석우로는 왜 사신을 모욕했다 왜 장군 우도주군을 필두로 한 왜의 습격을 당했고, 이에 책임을 지고자 왜군을 찾아가 농담한 것 가지고 왜 성질이냐고 역으로 어그로를 끌어(...) 분노한 왜군에게 불타 죽었고, 이에 우로의 처 명원부인이 누이의 남편의 도움을 받아 왜 사신을 죽여 복수하고 전쟁까지 가는 사건이 있었다. 우도주군은 타케우치노 스쿠네와 동일인물로 유력시되고, 타케우치노 스쿠네의 후손을 자칭한 일족들은 신라 도래인이거나(하타 씨족) 신라 도래인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소가 씨) 등 오진 덴노와 타케우치노 스쿠네의 일족이 신라 도래인과 관련된 일족이라는 정황이 많다.

4세기 중후반~5세기 초반 삼국사기 기사에 나오는 '백제와 손잡고 신라를 공격하는 왜'가 이주갑인상 시기를 고려하면 오진 덴노-우지노 와키이라츠코 일족일 가능성이 높다. 4세기 후반~5세기 중반 나니와(難波) 일대의 호족인 닌토쿠 덴노 일족은 신라와 대체로 우호적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반면, 오진 덴노-우지노 와키이라츠코 일족은 신라와 교류한 기록도 꽤 있지만 신라, 고구려와 적대적인 관계가 더 강조되는 편이다.

흘해 이사금의 기록에 따르면 흘해 3년과 35년 왜에서 혼담을 요청해 3년에는 아찬 급리(急利)의 딸을 시집보냈고, 35년 흘해의 딸을 직접 요구하자 흘해는 자기 딸은 시집 갔다는 핑계로 거부한 적이 있는데 흘해는 320년생으로 유력시되며 사서에서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다'고 명시한 만큼 흘해의 실제 재위기간은 4세기 중후반으로 오진 덴노의 추정 재위기와 거의 겹친다. 신라에게 혼담을 요청한 왜 세력은 오진 덴노의 일족이었을 수도 있다.

다만 당시 왜는 가야처럼 내부에서 여러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고, 3년에 혼담을 요청한 왜 세력과 35년에 혼담을 요청한 왜 세력은 서로 다른 세력일 수도 있다. 신라가 모든 왜 호족과 사이가 나빴던 것도 아니고 몇몇 호족들과는 친하게 지냈다는 정황이 있다. 흘해가 35년 왜의 직접적인 혼담 요청을 거부한 것을 고려하면 35년만 오진 덴노 일족의 요청이었을 수도 있고, 35년의 혼담도 오진 덴노와 가까운 사이이긴 해도 오진 덴노 본인은 아닐 수도 있다. 물론 오진 덴노 본인이 35년에 요구한 것이 맞을 수도 있다. 오진 덴노가 요구한 것이 맞다면 흘해가 320~330년대 즉위한 것으로 추정됨을 고려하면 370년대까지 제법 어렸던 것으로 추정되는 우지노 와키이라츠코는 아니고, 다른 장성한 아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오진 덴노가 신라 도래인 일족이라면 왜 신라와 그리 사이가 나쁘냐 싶을 수도 있지만, 사실 역사적으로 본국과 해외 이민자 집단의 후손이 사이가 나쁜 사례는 결코 드물지 않으며, 오히려 본국의 차별적인 시선 때문에 독립을 주도한 사례도 꽤 된다. 영국계 미국인들이 전쟁으로 영국에게 독립해 미국을 세웠고 20세기 초반까지 영국과 사이가 나빴던 것과 스페인 식민제국 당시 중남미 스페인계 이민자 집단이 스페인 본국 출신과의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고 전쟁으로 독립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미국은 독립 이후에도 미영전쟁이 일어나 워싱턴 D.C가 영국군에게 불타기도 했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기록을 합쳐 보면 우로가 모욕한 왜왕은 오진 덴노의 부왕(父王)으로 유력시되는데, 일본서기 367년 신라 사신이 왔을 때 오진 덴노와 그 어머니, 신하들이 선왕(先王)이 그리도 바라던 일이 이루어졌다고 감동한 것을 보아 오진 덴노의 아버지는 신라 도래인임에도 본국에서 차별적인 시선을 받는 것에 큰 불만이 있었고 대우 개선을 줄기차게 요구하던 인물이 아닌가 추정된다. 흘해 35년 혼담 요청이 오진 덴노가 맞다면 360년대 초까지 오진 덴노의 일족은 신라와 지속적인 전쟁을 벌이는 등으로 갈등을 빚으면서도 관계 개선에 관심이 있었고, 결국 신라의 대우에 참다 못해 366년 백제와 우호관계를 맺고 나서야 신라가 적대관계와 별개로 대우 개선을 받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도 여기서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4세기 후반~6세기 초반 친백제 성향으로 외교 노선을 굳혀 신라를 공격하는 왜 호족들에 대한 견제책으로 몇몇 신라-가야계 도래인 호족 집단과 우호관계를 맺어 밀어준 정황이 있다.

6. 가계

  • 황후皇后: 나카츠히메노 미코토(仲姫命)
    • 딸: 아라타 황녀(荒田皇女)
    • 4남: 닌토쿠 천황(仁德天皇, 257~399)
    • 아들: 네토리 황자(根鳥皇子) - 여동생인 아와지노미하라 황녀의 남편
  • 비妃: 타카키노 이리비메(高城入姫) - 나카츠히메노 미코토의 언니
    • 아들: 누카타노 오호나카츠히코 황자(額田大中彦皇子)
    • 아들: 오호야마모리 황자(大山守皇子, ?~310?)
    • 아들: 이자노마와카 황자(去来真稚皇子)
    • 딸: 오호와라 황녀(大原皇女) - 오토히메노 미코토의 소생이라고도 함
    • 딸: 고무쿠타 황녀(澇来田皇女)
  • 비妃: 오토히메노 미코토(弟日賣命) - 나카츠히메노 미코토와 다카키노 이리히메의 여동생
    • 딸: 아헤 황녀(阿倍皇女)
    • 딸: 아와지노 미하라 황녀(淡路御原皇女) - 오빠인 네토리 황자의 왕비
    • 딸: 키노우노 황녀(紀之菟野皇女)
    • 딸: 시게하라 황녀(滋原皇女)
    • 딸: 미노노 이라츠메(三野郎女)
  • 왕비王妃: 미야누시야카히메(宮主宅媛)
    • 아들: 우지노 와키이라츠코 황자(菟道稚郎子皇子, ?~312) - 오진 천황의 황태자
    • 딸: 야타 황녀(矢田皇女) - 제16대 닌토쿠 덴노의 황후
    • 딸: 메토리 황녀(雌鳥皇女)
  • 왕비王妃: 워나베히메(小甂媛) - 미야누시야카히메의 여동생
    • 딸: 우지노 와키이라츠히메 황녀(菟道稚郎女皇女) - 제16대 닌토쿠 덴노의 왕비
  • 왕비王妃: 오키나가 마와카 나카츠히메(息長真若中比賣)(고사기)/오토히메(弟媛)(일본서기)
    • 아들: 와카누케오후타마타 황자(稚野毛二派皇子) - 제26대 게이타이 덴노의 고조부
  • 왕비王妃: 이토히메(糸媛)
    • 아들: 하야부사와케 황자(隼総別皇子)
  • 왕비王妃: 히무카노 이즈미노 나가히메(日向泉長媛)
    • 아들: 오호하에 황자(大葉枝皇子)
    • 아들: 워하에 황자(小葉枝皇子)
    • 딸: 하타비노 와카이라츠메(幡日之若郎女) - 제17대 리추 천황의 황후[180]
  • 비妃: 카구로히메(迦具漏比賣)
    • 딸: 카와라타노 이라츠메(川原田郎女)
    • 딸: 타마노 이라츠메(玉郎女)
    • 아들: 가타지 왕(迦多遅王)
  • 비妃: 카츠라기노 노이로메(葛城野伊呂賣)
  • 비妃: 에히메(兄媛)

==# 천황 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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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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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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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렉산더 보빈 교수는 이 이름을 한국어족에 속한 어휘(팔+묻-+-악)로 풀이하기도 했다. 진구 황후 항목 참조. [2] 현재 福岡縣 粕屋郡 宇美町이다. [3] 그런데 10권 오진 덴노 총서에서는 츠쿠시의 가다(蚊田)에서 태어났다고 서술되어 있다. [4] 『고사기』 주아이 덴노단에는 카와치(河內) 惠賀의 長江에 있다고 했고, 『연히식(延喜式)』 諸陵帳에는 惠我長野西陵으로 나온다. 현재 오사카부 藤井寺市 藤井寺 4丁目의 岡ミサンザイ古墳으로 비정되고 있다. 전체 길이가 242m, 전방부 높이 16m의 전방후원분이며, 古市古墳群 내에 있다. [5] 진구 황후 섭정 69년조에는 稚櫻宮으로 나온다. 현재 나라현 櫻井市 谷若櫻町의 若櫻神社이다. [6] 현재 후쿠이현 敦賀市 曙町에 위치한 氣比神宮의 祭神이다. [7] 실제 원문이 이렇다. [8] 공물의 목록과 실물의 수가 맞는지 점검하는 일을 의미한다. [9] 사히沙比 지역을 영역화한 신라라는 의미이다. 사히는 『일본서기』 205년 3월 7일조 ‘사히노우미鉏海’의 ‘사히鉏’와 음이 통하며 삽량歃良(현재 경남 양산) 지역을 가리킨다. 삽량 즉 양산은 신라의 가야 진출 거점이었고, 고대 일본과 신라가 자주 접촉하던 지역이었다. [10] 원문은 囹圄이다. 『예기』 月令 仲春의 「令有司省囹圄」의 疏에 「囹牢也. 圄止也, 出入止所以. 皆罪人舍所也」라고 나온다. [11] 『일본서기』에 의하면 247년에서 251년에 걸쳐 백제와 왜의 교섭 활동에서 주요 인물로 활약하며, 249년에는 백제의 벽지산辟支山, 고사산古沙山 맹서에 입회하는 왜 측의 사자로 나온다. 『일본서기』 편찬자는 분주에서 치쿠마 나가히코를 카바네를 알 수 없는 사람이라 하였으나, ‘一云’을 인용하여 치쿠마 나가히코가 무사시 사람으로 누카타베노 츠키노모토노 오비토 등의 시조라고 전하고 있다. 『백제기』에서 말하는 치쿠마나 나가히코라는 인물과 같은 인물로 추정되기도 하지만, 명확히 알 수 없는 인물이다. 『역일본기(釋日本紀)』 비훈秘訓에서 치쿠마나 나가히코의 직職의 상고음이 ‘치쿠(千)’이며, 比跪는 ‘히코(彦)’로 읽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백제기』의 치쿠마나 나가히코와 『일본서기』의 치쿠마 나가히코는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이에 대해서 『일본서기』 편찬자가 『백제기』의 치쿠마나 나가히코라는 인명을 일본식으로 고쳐 치쿠마 나가히코라는 이름을 지은 것이라는 견해와, 『일본서기』 편찬자에게는 『백제기』와는 별로도 치쿠마 나가히코라는 인명 자료가 있었으며 『백제기』에는 치쿠마나 나가히코, 일본에는 치쿠마 나가히코로 각각 전해지고 있던 것이 『일본서기』 편찬자에 의해 서로 연결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12] 현재의 도쿄도 사이타마현 가나가와현 동부 지역의 옛 국명이다. [13] 누카타베 씨는 누카타베(왕궁 운영 담당)를 관장한 반조伴造씨족이다. 『 신찬성씨록』 좌경신별下에 의하면 天津彦根命의 자손이라고 한다. 이마에 田자형의 털이 나있는 말을 인교 덴노에게 바친 것을 계기로 누카타베 씨를 사성받았다고 전한다. 1984년 시마네현 松江市 岡田山 1호분에서 출토된 銀象嵌 철검의 명문에 ‘各田阝臣(額田部臣)’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츠키노모토 씨에 관해서는 『일본서기』 686년 6월조에 槻本村主인 勝麻呂에게 連 카바네를 주었다는 기사가 보인다. 『속일본후기』에서는 오미(近江)에 거주하던 槻本連良 棟 등이 후한 헌제의 자손임을 자칭해서, 이를 근거로 도래계 씨족으로 보기도 한다. [14] 진귀한 노리갯감(玩具)이다. [15] 『和名類聚抄』의 치쿠고노 쿠니(筑後國) 御井郡 賀駄(현재 후쿠오카현 小郡市 平方 부근) 혹은 치쿠젠노 쿠니(筑前國) 怡土郡長野村 蚊田(현재 후쿠오카현 系島郡 前原町 長野), 粕屋郡 宇美町(진구 황후 섭정전기 우미(宇瀰) 참조)으로 보기도 한다. [16] 9권 진구 황후 기록대로 주아이 9년(200) 12월 14일에 태어났다면 신공 섭정 3년(203) 당시 세는나이로 4살이 되어야 한다. 해당 기록대로라면 오진 덴노는 201년생이 된다. [17] 진구 황후가 남장을 한 모습이다. [18] 호쿠리쿠도(北陸道)의 동북 지역으로 현재 니가타현 지역이다. [19] 고사기古事記』에는 中日賣命으로 나온다. 品陀眞若王의 딸로 어머니는 金田屋野姫命이다. 오진 천황과의 사이에서 닌토쿠 천황을 낳았다. [20] 고사기古事記』에는 丸邇之比布禮能意富美로 나온다. 使主는 카바네(姓)의 하나로 도래계에게 많다. [21] 『고사기古事記』에는 咋俣長日子王으로 나온다. [22] 『고사기古事記』에는 오키나가 마와카 나카츠히메(息長眞若中比賣)로 나온다. [23]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카와치 황별(河內皇別)에 오호타노 스쿠네(大田宿禰)가 大碓命의 후손으로 나온다. [24] 『和名類聚抄』에 보이는 遠江國 城飼郡 土形 比知加多(현재 静岡縣 城東郡) 지역의 토착 세력이다. [25] 『和名類聚抄』에 보이는 遠江國 榛原郡 榛原 波以八良(현재 静岡縣 榛原郡) 지역의 토착 세력이다. [26] 『和名類聚抄』에 보이는 飛驒國 荒城郡 深河(현재 岐阜縣 吉城郡 古川町)의 토착 세력이다. [27] 일본 고대 도호쿠 지방에서 홋카이도에 걸친 지역의 주민을 야마토 조정 측에서 부른 호칭. 『 송서』 별전 왜국조(倭國條) 왜왕 무(武)의 상표문에 보이는 모인(毛人)과 같다. 율령 국가의 화이 사상의 영향 아래 이들이 일반 왜인과 문화적으로 다른 부분이 의도적으로 강조되었다. 또한 이들은 수렵을 생업으로 하며 농경을 하지 않는 야만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정복·동화되어야 한다고 정당화되기도 하였다. 『 일본서기』에는 진무 즉위 전기 10월에 처음 나오지만 이는 일반적으로 7세기 후반 동북 경영 이후의 사실이 소급되어 기록되었다고 보고 있다. [28] 현재 나라 현(奈良縣) 橿原市 大輕町 下ッ道이다. 오진 덴노 15년 8월조에 의하면 백제 왕이 보낸 阿直伎가 良馬 두 마리를 輕의 언덕 위의 마구간에서 사육했다고 하는데, 이곳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우마야사카노 미치 부근에는 오진 덴노의 輕島豐明宮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고, 조메이 덴노 대에는 厩坂宮이 조영되기도 했다. [29] 오호하마(大濱)는 이름이며 스쿠네(宿禰)는 카바네(姓)가 아니라 경칭이다. [30] 알 수 없는 말로 와글와글 떠들면서 시끄럽게 구는 해인(海人)이라는 의미이다. [31] 귀국(貴國)은 『 일본서기』 편찬자가 윤색한 말로 보기도 하고, 『백제기』에서 왜를 귀국이라고 적은 것에 주목하여 귀국을 2인칭적 호칭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한편 귀국은 상대국을 부르는 존칭이 아니라 비천한 나라에 대한 존귀한 나라라는 의미, 즉 번국(蕃國)에 대한 귀국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귀국은 번국 관념이 나타나는 7세기 말 이후 일본에서 쓰인 말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32] 삼국사기에 따르면 진사왕의 재위기간은 385~392년이다. [33] 키노 츠쿠노 스쿠네紀角宿禰(木角宿禰) 이하 네 명 모두 타케우치노 스쿠네(建內宿禰)의 자식이다. 『 고사기 고겐 단(孝元段)에 「此建內宿禰之子. 幷九[男七女二]. 波多八代宿禰者[波多臣…長谷部之君之朝也]. (중략) 次蘇賀石河宿禰者[蘇我臣…岸田臣等之朝也]. 次平群都久宿禰者[平群臣…馬御樴連等祖也]. 次木角宿禰者[木臣…坂本臣之朝]. 」라고 나온다. 키노 츠쿠노 스쿠네는 키 씨(紀氏)의 조상으로 전승상의 인물이다. [34] 키 씨(紀氏)의 카바네(姓)는 오미(臣)로 덴무 덴노 13년(684)에 아손(朝臣)을 받았다. 『 신찬성씨록』 좌경황별(左京皇別)에는 「紀朝臣石川朝臣同祖. 建內宿禰男紀角宿禰之後也. 」라고 기록되어 있다. 본거지는 와카야마 현 紀ノ川 일대이고, 야마토의 平郡 지방까지 그 세력이 미쳤다. 키 씨는 紀ノ川 북부 일대에서 나는 질 좋은 목재 덕분에 일찍부터 수군을 보유한 군사 씨족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본거지를 중심으로 나타나는 한반도계 유적·유물의 분포는 키 씨와 한반도 세력들과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말해준다. 『일본서기』에는 5~6세기 紀小弓宿禰, 紀生磐宿禰 등 키 씨의 주요 인물들의 활동이 자주 보이는데 모두 한반도(특히 가야)와 관련하여 활약하고 있다. [35] 『고사기』 고겐 단에 나오는 波多八代宿禰를 말하며 波多臣 등의 조상이다. 『고사기』에서 波多八代宿禰는 建內宿禰(武內宿禰)의 장자이고 波多臣, 林臣, 波美臣 등의 조상이라고 나온다. 『신찬성씨록』 좌경황별의 「八多朝臣. 石川朝臣同祖. 武內宿禰命之後也. 」라는 기록을 통해서 소가씨(蘇我氏)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36] 『고사기』 고겐 단의 蘇賀石河宿禰를 말하며 소가노노 오미(蘇我臣) 등의 조상이다. 『고사기』에서 蘇我石河宿禰는 建內宿禰의 자식이고, 蘇我臣·川辺臣·田中臣 등의 조상으로 나온다. 소가 씨는 6세기에서 7세기 중엽에 걸쳐 야마토 왕권 최대의 정치 세력을 형성한 씨족으로 야마토(大和)와 카와치(河內)를 근거지로 한 것으로 보인다. [37] 『고사기』에 平群都久宿禰로 나오며 平群臣 등의 조상이다. 『일본서기』 닌토쿠 덴노 원년 춘정월조에 의하면 츠쿠노 스쿠네가 태어날 때 집에 굴뚝새(鷦鷯)가 날아들었다고 한다. 같은 날 닌토쿠도 태어났는데 황궁에 부엉이(木菟)가 날아들었다. 이것을 길조로 여긴 오진과 타케우치노 스쿠네가 새의 이름을 따서 자식의 이름을 짓되, 날아든 새의 이름을 교환하여 각자 자식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닌토쿠는 오호사자키 황자(大鷦鷯皇子)라 하였으며 타케우치노 스쿠네의 자식은 츠쿠노 스쿠네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전승이 있다. 츠쿠노 스쿠네의 실존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이와 같은 전승이 남게 된 시기는 일반적으로 타케우치노 스쿠네 계보에 平群氏가 포함되는 시기, 즉 스이코 덴노조로 보고 있다. [38] 해산물을 채집·공납하는 부민 집단이다. [39] 山部의 하부조직으로 특정 산림을 지키는 부민이다. [40] 율령제 하에서 개편된 국명이다. 도카이도(東海道)에 위치했으며, 현재 시즈오카현의 伊豆半島에 해당한다. [41] 『和名類聚抄』에 보이는 이즈노쿠니 田方郡 狩野(현재 시즈오카현 田方郡) 지역명을 배 이름으로 한 듯하다. [42] 『和名類聚抄』에 보이는 야마시로노쿠니(山城國) 우지 군(宇治郡) 우지(宇治) 부근(현재 도쿄부 우지 시(宇治市)이다. [43] 카즈노의 침사(枕詞)이다. [44] 현재 교토시 右京區와 西京區 일대이다. [45] 『고사기』에서는 「亦新羅人參渡來. 」라고 하여 오진 덴노 대에 신라인만 건너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46] 한인은 『일본서기』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에서 도래한 사람들을 말하며 『고사기』에서도 막연히 한반도를 가리킬 때 ‘韓’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47] 현재 나라현 磯城郡 田原本町에 있는 唐古池로 추정되고 있다. 『고사기』 오진 덴노 단에는 建內宿禰命이 도래한 신라인을 이끌고 ‘백제지(百濟池)’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사기』에서 신라인이 만든 연못을 왜 백제지라고 표현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48] 『삼국사기』 지리지 4의 甘勿阿(현 전북 함열(咸悅) 지역)에 비정된다. [49] 삼국지』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마한조(馬韓條)의 아임(兒林)과 같다고 보아 현재 충남 예산군 대흥면의 옛 이름인 임성(任城)에 비정하는 견해와 지침국(支侵國), 즉 현재 충남 홍성군 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50] 곡나(谷那)는 황해도 곡산군( 임진강이나 예성강의 상류 지역)으로 보거나 전남 곡성, 또는 충주 지역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51] 왜국을 가리킨다. 『일본서기』 편찬 단계에서 윤색된 표현이다. [52] 『고사기』 고겐 덴노 단에는 山代內臣의 조상으로 나온다. 산대는 『和名類聚抄』에 의하면 야마시로노 누키(山城國) 綴喜郡 有智鄕에 있던 지역으로 현재 교토부 하치만 시(八幡市) 內里 부근이다. [53] 壹伎直은 『신찬성씨록』 우경신별(右京神別)에 天兒屋根命의 11대손인 雷大臣의 후예로 나온다. 壹岐縣主와 壹岐島造가 그 후예이다. 오야마네코에 대해서는 현재 壹岐神社(福岡市 西區 下山門), 織幡神社(福岡県 宗像市 鐘崎), 伏尺神社(佐賀県 武雄市 若木町), 眞根子神社(福岡市 西區 姪浜) 등에 관련 전승이 전해지고 있다. [54] 죄인의 손을 열탕에 넣어 봄으로써 데이거나 그렇지 않는 것을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고대 재판의 한 종류이다. 『일본서기』 인교 덴노 4년 9월조에도 탐탕 기사가 보이며, 게이타이 덴노 24년 9월조에서는 誓湯이라고도 한다. [55] 현재 나라현 사쿠라이시 初瀨川의 옛 명칭이다. [56] 현재 나라현 橿原市 石川町에 있는 劔池이다. 『일본서기』 조메이 덴노 7년 7월조와 교고쿠 덴노 3년 6월조에도 보인다. [57] 輕은 현재 나라현 橿原市 大輕町 부근의 옛 명칭인데, 輕池의 구체적인 장소는 알 수 없다. [58] 우마야사카노 이케의 구체적인 장소는 알 수 없다. [59] 『和名類聚抄』에 보이는 日向國諸縣(현재 미야자키현 남서부 지역)의 수장층으로 여겨진다. [60] 어떤 일만 특별히 다루는 사자. [61] 『和名類聚抄』에 보이는 셋츠노쿠니(攝津國) 豐島郡 桑津(현재 효고현 이타미 시(伊丹市) 東桑津과 西桑津)을 가리킨다. [62] 황후와 비가 거주하는 건물을 가리킨다. [63] 『和名類聚抄』에 보이는 河內國 丹比郡 依羅를 가리킨다. 현재 오사카시 住吉區 庭井町과 大和川의 제방 사이에 依網池址碑가 세워져 있다. [64] 수련과의 여러해살이 물풀 [65] 『和名類聚抄』에 보이는 카와치노쿠니(河內國) 若江郡 天俣를 가리킨다. 현재 히가시오사카 시(東大阪市) 天俣이다. [66] 히무카 내의 지명으로 추정된다. [67] 현재 효고현 加古川市와 高砂市의 加古川 하구로 비정된다. [68] 옷을 짜는 여자 기술자. [69] 여기에서만 나오는 인물로 백제 대성팔족의 하나인 진씨(眞氏)로 추정된다. [70] 『和名類聚抄』에 「大和國高市郡久米」라고 나오며, 來目(久米)은 현재 나라현 橿原市 久米町 지역이다. 『 신찬성씨록』 이즈미노 쿠니(和泉國) 제번조(諸蕃條)에 「衣縫. 出自百濟國神露命也. 」라는 기록이 보이지만, 이즈미노 쿠니의 키누누이와 야마토노 쿠니(大和國)의 來目지역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71] 하타씨(秦氏)의 선조이다. 『일본서기』 오진 덴노 16년 8월조에도 하타 씨의 도왜 전승이 보인다. 『고사기』 오진 단에는 「秦造之祖 韓直之祖 (중략) 參渡來也. 」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타 씨는 『 신찬성씨록』 좌경제번상(左京諸蕃上)에 의하면 진시황제(秦始皇帝)의 후예를 칭하고 있지만, 실제는 신라 방면( 울진)에서 건너간 도래인 집단으로 보고 있다. 하타 씨는 山背國의 葛野, 紀伊郡을 중심으로 오미국(近江國) 愛智와 太上郡을 비롯해 미노(美濃), 에치젠(越前), 셋츠(攝津), 하리마국(播磨國) 등 전국 각지에 퍼져 있었다. 특히 농지 개발과 양잠, 광산 개발 그리고 주조 및 목공 기술이 뛰어났다고 한다. 따라서 관련 자료도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지만, 특히 교토부 남부의 야마시로(山城) 지역과 큐슈 북부 지역의 宇佐 지역에 많은 관련 자료가 남아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하타 씨는 일본 열도에 정착한 후 재지의 호족이 되거나 야마토 정권의 창고 등의 실무를 담당하는 하급 관인이 되어 활동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카바네는 초기에는 造였다가 덴무 덴노 12년(683)에는 連, 이어서 同15년에는 忌村 카바네를 하사받았다. [72] 120현 운운은 하타 씨가 일본 열도에 정착하여 다수 부민(部民)을 거느리게 된 이후 만들어진 전승으로 추정된다. 『신찬성씨록』 좌경제번상(左京諸蕃上)에는 127현(縣)으로 기록되어 있다. [73] 『일본서기』에서 가라(加羅)라는 용어는 가야제국(加耶諸國)을 가리키는 경우와 대가야(大加耶)를 가리키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는 어느 쪽을 가리키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74] 『고사기』 오진 덴노 단에는 阿知吉師로 나온다. 그런데 『고사기』에서는 아지길사를 왜국에 보낸 백제왕을 조고왕(照古王)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서기』에서는 아직기의 천거에 의해 왕인을 초빙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고사기』에서는 아직기와 왕인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한편 『일본서기』 오진 덴노 20년 추9월조에 등장하는 아지사주(阿知使主)와 아직기를 동일인물로 보기도 한다. [75] 현재 나라현 橿原市 大輕町 부근이다. [76] 輕의 坂 위에 있는 마구간을 가리킨다. 우마야사카의 위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대체로 백제에 의해 4세기 중후반에 왜국에 승마 풍습이 전해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馬冑 등으로 말을 무장하는 것은 5세기 후반까지 내려간다. [77] 경서와 전적(典籍)이라는 의미로 유교 관련 서적을 말한다. [78] 고대 일본의 박사는 율령제 하에서 음양료(陰陽寮)나 대학료(大學寮) 등의 부서에 소속되어 학문과 교육에 종사하는 관인을 말한다. 이외에도 대학이나 교육과는 무관한 전문기술자(瓦博士 등)를 박사로 호칭하기도 하였다. 본조에서는 막연히 학자라는 의미가 강하다. 『일본서기』에서는 게이타이, 긴메이 기 등에 백제가 ‘오경박사(五經博士)’, ‘역박사(曆博士)’, ‘역박사(易博士)’ 등을 파견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것은 6세기 백제에 박사 제도가 성립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양서(梁書)』권54 열전 백제조(百濟條)에서 백제가 534년과 541년 두 차례에 걸쳐 양(梁)나라에 모시 박사(毛詩博士)를 청하는 기사가 참고된다. [79] 『고사기』 오진 단에서는 和邇吉師로 나오며, 윤어(論語)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왜에 건너가 文首氏(西文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왕인의 도래에 대해서는 『일본서기』에 의하면 아직기의 추전을 받아 왕인이 건너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전승은 원래는 별도로 되어 있던 것이 후대에 같은 백제계라는 동족적 의식에 의해 결합된 것으로 추정된다. 도래 시기는 『고사기』의 경우 근초고왕의 시대로 전하고 있지만, 『일본서기』에서는 오진 15년에 기록되어 있다. 이주갑인상하면 전지왕 원년(405)에 해당된다. 한편 일본의 고승이었던 行基의 墓誌에는 「本出於百濟王子王爾之後」라 하여 행기를 왕이(王爾), 즉 왕인의 후예라고 기록하고 있다. 행기의 묘지명에 의하면 왕인의 후예 씨족들은 적어도 8세기 중엽까지는 그들의 선조의 본관을 백제로 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왕인의 실재에 대해서 다른 인명과의 유사성, 전래 서적의 편찬 시기, 박사라는 용어가 유행한 시기 등을 근거로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견해도 있다. [80] 下毛野氏와 함께 오진 덴노의 황자인 豐城入彦命의 후예를 자칭하는 황별씨족으로, 684년 아손(朝臣) 카바네를 사성받은 당대 유력 씨족이었다. 『신찬성씨록』 좌경황별조에 의하면 카미츠케노노 키미 씨는 『일본서기』 유랴쿠 9년 7월조에 보이는 田邊史伯孫의 후손이라고 하는데, 이는 원래 카와치 지방에 있던 田邊史가 아즈마(東)국의 카미츠케노(上毛野) 지방(현재 군마현 지역)으로 이동하여 카미츠케노노 키미 씨가 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田邊史는 카와치 지방의 백제계 도래인 집단으로, 『일본서기』 유랴쿠 9년 7월조에 의하면 왕인의 후예 씨족인 書首(西文)氏와 혼인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81] 『고사기』 오진 단에는 阿直史로 나온다. 683년 10월에 連姓을 받고, 834년 9월 阿直史福吉 등 3인이 淸根宿禰로 개성되었다. 『신찬성씨록』 우경제번하(石京諸番下)에 「安勅連. 百濟國魯王後也. 」라고 되어 있다. 安勅은 阿直과 음이 통한다. 노왕(魯王)에 대해서는 비유왕의 오기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정확히 알 수 없다. 후비토(史)는 야마토 정권에서 문서 기록을 담당했던 씨족에게 주는 카바네로 주로 도래계 씨족이 사성받았다. 후비토 카바네는 대체로 6세기 중반에서 후반에 걸쳐 성립된 것으로 여겨지며, 후비토 카바네를 가진 도래계 씨족으로는 왕진이(王辰爾)의 후예 씨족인 船史, 白猪史, 津史가 유명하다. [82] 文首는 왕인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씨족이다. 『일본서기』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의 도래 전승을 갖고 있는 대표적인 도래계 씨족으로 동족으로 馬史, 櫻野首, 高志史 등이 있다. 西文氏는 카와치국(河內國) 古市郡(현재 오사카부 羽曳野市)을 중심으로 야마토 정권에서 문서 행정을 담당했던 문필 씨족이었다. 西文氏는 카바네가 首로 문필 담당의 史 집단 위에 있었던 존재였다. 683년 9월에는 連, 同14년 6월에 忌寸 카바네를 받았다. 791년 4월에는 그 일부가 스쿠네(宿禰)로 개성되었다. 『일본서기』 572년 5월조에서는 西文氏와 東漢氏를 가리켜 ‘東西諸史’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일본서기』 791년 4월조에는 西文氏의 후예인 文忌寸最弟가 자신의 조상인 왕인의 출자를 중국 한무제의 후예라고 자칭하며 천황에게 스쿠네(宿禰)의 카바네를 받기를 청하는 기사가 있어, 8세기 후반부터 중국 황제 후예 씨족임을 자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찬성씨록』 좌경제번상(左京諸番上)에도 「文宿禰. 出自漢高皇帝之後鸞王也」라고 같은 기록이 보인다. [83] 현재 충북 진천 지역(『삼국사기』 지리지 今勿奴郡)에 있었다는 견해가 있다. [84] 현재 충북 괴산 지역(『삼국사기』 지리지 仍斤內郡)에 있었다는 견해가 있다. [85] 『일본서기』 오진 8년 춘3월조에 인용된 『백제기』의 支侵과 같은 것으로 보아 현 전북 임실군으로 비정하거나, 전북 김제군 이성利城(현재 전북 김제시 靑蝦面), 경기도 임진(臨津)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한편 마한의 아림국(兒林國)과 이림의 상관 관계를 인정하여 이림을 충남 서천(『삼국사기』 지리지 舌林郡)으로 보거나 충남 예산 대흥(임존성)으로 보는 견해 등도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서 이림이라는 지명은 겐조 3년(487) 시세조와 긴메이 11년(550) 4월조에도 보인다. 여기서 이림은 백제 가야, 그리고 고구려의 이해관계 속에서 주로 등장하기 때문에 현재 충북 음성(『삼국사기』 지리지 仍忽縣)이나 괴산 일대로 비정하거나 충북 청원의 미호천 일대로 보기도 한다. [86] 『고사기』에서 建內宿禰( 타케우치노 스쿠네)의 아들인 平群都久宿禰로 나오며 平群氏의 조상이다. 『고사기』 리추 단에 의하면 스미노에나카 황자(住吉仲皇子)의 모반 사건 때 리추 덴노를 구출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平群氏는 카바네가 오미(臣)였으나 684년 아손(朝臣) 카바네를 사성받는다. 『일본서기』에서는 平群木菟宿禰 이후 5세기 중후반 유랴쿠 조부터 닌켄 조에 걸쳐 대신을 배출하고 있다. 그러나 平群氏의 고분으로 추정되는 平群谷 고분군의 축조 연대는 6세기 중엽 이후이다. 『일본서기』에서도 스이코 조 전후에 平群氏 일족은 소가 씨와 함께 物部氏討伐軍에 참가하거나 정신라군(征新羅軍)의 장군으로 등장하는 등 소가 씨 밑에서 군사적으로 활약하고 있다. 『일본서기』 587년 物部大連守屋의 모반을 토벌하여 스슌 덴노 즉위에 공을 세운 장군으로 등장하는 平群神手는 平群木菟宿禰와 유사한 성격을 가진 인물이다. 따라서 平群木菟宿禰는 平群神手를 과거에 투영한 가상의 인물일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87] 이쿠하노 토다노 스쿠네의 가야 파견 기사는 『일본서기』에 보이는 的氏에 관한 최초의 기사인 동시에 的氏의 시조 전승에 해당된다. 『일본서기』 닌토쿠 덴노 12년 8월조에는 的臣의 조상인 盾人宿禰가 고구려에서 헌상한 철 과녁을 관통시켜서 的戶田宿禰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는 전승이 있다. 的氏는 『고사기』 고겐 단에는 葛城長江曾都毘古의 후손으로, 『신찬성씨록』 야마시로국 황별조(山城國皇別條)에 의하면 타케우치노 스쿠네의 자식인 카츠라기노 소츠히코의 후손으로 나온다. 동족으로 카츠라기 씨(葛城氏), 平群氏, 소가 씨(蘇我氏), 코세 씨(許勢氏) 등이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的氏는 任那日本府와 관련하여 河內直과 함께 가야에서 활동하는 등 카와치 지역에 본거지를 두고 왜국과 한반도 제국(諸國)과의 외교 교섭에서 활약하였다. [88] 405년 4월 왜군이 신라를 침공하자 실성 마립간이 친정해 왜군을 궤멸시켰다는 기사가 있으나, 8월 왜군이 반파국에 가 소츠히코와 도래인들을 데리고 왜로 귀국했다는 기사와 차이가 있어 별개의 사건으로 보인다. [89] 현재 나라현 요시노 군(吉野郡) 요시노 정(吉野町)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90] 현재 나라현 요시노 지방(吉野地方)에 있었던 토착민으로 국주인(國栖人)이라고도 한다. [91] 『영집해(令集解)』 직운령(職員令) 조주사조(造酒司條)의 「醴, 甜酒」라는 기록이 참고된다. 첨주, 즉 감주는 백(粨)을 거르지 않은 술로 농주(農酒)라고도 한다. [92] 웃음으로써 복을 부르거나 재앙을 떨쳐버리는 행위를 의미한다. [93] 모미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국소의 방언이다. [94] 야마토국(大和國) 지역을 본거지로 하는 씨족으로 東漢氏라고도 한다. 東漢氏는 5세기 말에서 6세기에 걸쳐 카와치에 본거를 둔 西漢氏와 비교하여 주로 야마토국 高市郡 檜前鄕(현재 나라현 明日香村)을 중심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東漢氏 혹은 야마토노 아야 씨라고 불렸다. 西文氏와 함께 소가 씨 휘하에서 정치, 군사, 재정, 각종 기술 등 다방면에 걸쳐 활약한 대표적인 도래계 씨족이다. 『일본서기』에는 20여 씨에 이르는 야마토노 아야 씨 지파가 보이고 있다. 東漢氏의 원래 카바네는 直이었으며, 682년 連 카바네를 사성받았다. 同14년 8성의 제4위 성인 忌寸 카바네를 사성받았다. 『속일본기』 785년 6월조의 동한씨의 有力枝族인 사카노우에 씨(坂上氏) 출신 苅田麻呂의 상표문에 의하면 東漢氏는 후한 황제의 후예를 자처하였으나, 실제로는 백제계 또는 안라국계로 추정된다. [95] 5세기 전반 한반도에서 무리를 이끌고 건너간 인물로, 아지왕(阿智王)이라고도 한다. [96] 아지사주의 아들로 『일본서기』에는 이후 유랴쿠 덴노가 사망할 때 오오토모노 무로야(大伴室屋)와 함께 호시카와 황자(星川皇子)의 난을 진압하여 세이네이 덴노를 즉위시킨 인물로 나오기도 한다. [97] 많은 무리를 이끌고 왔다는 의미이다. 『일본서기』 오진 14년 궁월군이 데리고 온 집단을 120현으로 표현한 것과 유사한 예이다. [98] 현재 오사카시 東淀川區 일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본서기』 안칸 덴노 2년 9월조에 소를 나니와와 대우도에 방목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99]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우경(右京) 황별씨족을 자처한 가문이다. [100] 『和名類聚抄』에 보이는 淡路國 三原郡이다. 현재 효고현 三原郡에 해당한다. [101] 나니와(難波)의 항구 [102] 현재 카가와 현(香川縣) 小豆郡 小豆島 [103] 『和名類聚抄』에 보이는 빗추노 쿠니(備中國) 下道郡 下道로, 현재 오카야마현 總社市 서쪽과 吉備郡 眞備町 지역의 수장층이다. 684년 11월에 아손(朝臣)으로 사성되었다. [104] 『유랴쿠』 유랴쿠 7년 시세조와 세이네이 즉위전기에 상도신의 반역 사건이 실려있을 정도로 5세기 후반까지 키비 지역에서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씨족이다. 『속일본기』 757년 7월에 아손(朝臣)을 사성받고, 그 후 吉備國造가 되었다. [105] 『和名類聚抄』에 보이는 빗추노 쿠니(備中國) 賀夜郡(현재 오카야마현 上房郡과 吉備郡, 總社市 동부 지역)의 씨족이다. [106] 『和名類聚抄』에 보이는 비젠노 쿠니(備前國) 御野郡 御野지역으로 현재 오카야마시 북쪽이다. 미노노 오미(三野臣)는 이 지역 출신 씨족이다. [107] 현재 후쿠이현 小浜市 若狭彦神社와 오카야마현 吉備中央町에 있는 鴨神社에 관련 전승이 전해지고 있다. 『선대구사본기(先代舊事本紀)』 국조본기(國造本紀)에 의하면 笠臣國造는 카모와케노 미코토鴨別命의 세손인 笠三枚臣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고대 笠臣國의 영역은 현재 笠岡市 전체와 오카야마현 西部~廣島縣 東部 일대였다. [108]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고레이 덴노의 황자인 와카타케히코노 미코토(稚武彦命)의 후예 씨족을 자처한 가문이다. 카사노 오미는 684년 11월 아손(朝臣)으로 사성되었다. [109] 『속일본기』 및 『만엽집』에는 薗臣으로 나온다. [110] 원래 기직(機織)을 담당한 품부(品部)를 일컫지만 후에 그 지역 혹은 토지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111]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任那)’는 가야 지역 전체 경우와 특정 지역을 가리키는 경우가 있다. 한국 사료에서는 임나가라(任那加羅), 임나가량(任那加良)이 보이는데, 가야 지역 전체를 ‘임나(任那)’로 적은 경우는 없다. [112] 삼국사기에 따르면 구이신왕의 재위기간은 420~427년으로, 이주갑인상과14년의 오차가 있다. 『송서(宋書)』 열전 백제국조(百濟國條)에는 구이신왕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고 전지왕이 425년 사망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전지왕-구이신왕-비유왕 시기 삼국 간에 오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13] 417년 당시 고구려 왕은 장수왕이었다. [114] 교(敎)는 「 광개토대왕릉비」에도 종종 보이는 표현으로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명령이다. [115] 신라 사신이 임시로 머물던 곳이라는 의미로 특정 지역명 혹은 건물명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116] 목공 기술을 가진 도래인 집단을 일컫는다. 위 기사에 의하면 신라에서 건너간 목공들은 아마도 猪名川(현재 효고현 尼崎市 북동부) 주변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이나베라고 부명이 붙었을 것이다. 『신찬성씨록』의 셋츠노 쿠니 제번(攝津國諸蕃)에는 저명부에 백제인들도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 [117] 『연희식(延喜式)』 신명장에 보이는 淡路國 津名郡 由良溱神社가 있었던 곳이다. 현재 효고현 洲本市 由良町에 해당된다. 유라라는 지명은 근처 해협에서 조류가 흘러갈 때 코토(琴)를 탈 때 나는 소리와 마찬가지로 ‘유라’라고 소리가 난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118] 여기서 오(吳)는 중국 남조를 가리킨다. 『일본서기』 오진 37년의 『일본서기』 기년은 306년이지만 백제 왕력 기사를 참고하여 120년 내리면 426년이 된다. 이 시기 중국은 남조 송문제(宋文帝)의 원가 3년에 해당한다. 『송서』 왜국전에서는 왜왕 찬(讚)이 사마조달(司馬曹達) 등을 보내 표와 방물을 바쳤다고 적고 있지만, 『일본서기』에는 이와 관련된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119] 여기서만 나오는 인물들이다. [120] 왜가 중국 남조로 가기 위해 고구려를 경유했다는 것, 고구려왕의 지원을 받아 오나라에 다녀왔다는 설정은 경로로 보나 왜와 고구려의 관계로 보나 어색하다. 남조를 가는 데는 백제를 경유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당시 왜는 고구려와 우호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121] 『일본서기』 오진 41년 2월조에 그 후일담이 나오며, 同 유랴쿠 14년 정월조와 내용이 비슷하다. 『일본서기』의 오나라 공녀 도래 기사는 아지사주와 도가사주의 후예인 야마토노 아야 씨의 씨족 전승을 바탕으로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기사들은 5세기 야마토노 아야 씨가 도래계 이주민을 거느리는 유력한 씨족으로 성장했음을 말해준다. 야마토노 아야 씨는 훗날 중국 후한 황제의 후예라고 자칭하게 된다. 단 위 기사에 등장하는 네 명의 여자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122] 전지왕의 누이라는 기록만 보이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없다. 『일본서기』 유랴쿠 2년 7월조에도 천황이 백제에 여랑(女郞)을 요구하여 개로왕이 適稽女郞을 보냈다는 유사한 기록이 있어 新齊都媛과 適稽女郞을 같은 인물로 보기도 한다. [123] 428년은 비유왕 2년이다. 일본서기에는 비유왕의 재위기가 삭제되어 있다. 오진 25년(294/414) 전지왕이 죽고 구이신왕이 즉위했다 기록했으면서 39년에 전지왕 운운하는 시점에서 오류. 정말 전지왕 재위기간(405~420)에 일어난 일이 맞다면 408년이나 418년에 일어난 일을 428년으로 오기한 것으로 보인다. [124] 『속일본기』 등의 자료에는 豐明宮으로 나오기도 하며, 輕島에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輕島의 소재지는 輕자에 주목해서 현재 나라현 橿原市 大輕 부근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125] 현재 후쿠이현 宗像市에 있는 宗像大社 祭神의 총칭이다. 宗像大社는 宗像神社의 총본사로서 宗像三女神(田心姫神, 湍津姫神, 市杵島姫神)을 제사 지내고 있다. 宗像神社는 주로 瀬戸内海와 近畿地方 연안에 많이 있는데,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신사이다. [126] 셋츠노 쿠니(攝津國)를 가리킨다. 현재 오사카부 북서부와 효고현 남동부의 옛 국명으로 다섯 키나이(畿內) 가운데 하나이다. 고대에는 카와치노 쿠니(河內國)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難波津의 중요성이 높아짐에 따라 독립되었다. 특히 나니와 지역에는 닌토쿠 에 難波高津宮, 645년에는 難波長柄豐碕宮, 744년에는 나니와노 미야(難波宮)가 조영되기도 했다. [127] 현재 효고현 南部의 武庫川 유역 [128] 쿠레노 키누누히와 카야노 키누누히는 여기에서만 등장한다. [129] 『고사기』 오진 덴노 단에는 나카츠히코노 미코토(中日賣命)라 적고 있다. [130] 『일본서기』 景行天皇 4년 2월조에서는 게이코 덴노의 둘째 황자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고사기』에서는 오호키노 이리비코노 미코토(五百木之入日子命)-品陀直若王-高木入日賣命-中日賣命-弟日賣命’이라 적고 있으므로 나카츠히메노 미코토仲姬命(나카츠히코노 미코토中日賣命)의 조부로 기록되어 있다. [131] 『일본서기』 오진 40년 정월조에는 오진 덴노가 우지노 와키이라츠코를 태자로 삼고, 오호사자키노 미코토에게 태자를 보좌하게 하였다고 적혀 있다. 『고사기』 오진 덴노 단에도 거의 같은 내용의 설화가 전해지지만, 오호사자키노 미코토(大雀命)를 태자로 기록하고 있다. [132] 『일본서기』에서는 이 기사에서 처음 보인다. 이후 인교 덴노, 겐조 덴노, 게이타이 덴노 대에 대왕호 사용례가 보인다. 천황호 성립 이전에는 대외적으로는 倭王, 倭國王, 王 등으로 불렸다. 금석문의 용례로는 「江田船山古墳出土太刀銘」에 명기된 「治天下獲□□齒大王世」가 있다. [133] ‘其’자의 사용은 11권부터 13권에 걸쳐 나타나는 문장상의 특징이다. [134] 종묘는 천자의 조상을 모신 곳, ‘사직’은 토지와 오곡의 신을 일컫는다. 고대의 천자와 제후는 궁전의 왼쪽에 종묘를, 오른쪽에 사직을 받들어 모셨다. [135] 장자 상속과 현자(賢者)가 제위에 올라야 한다는 중국적인 유교 사상에 기초한 사상이 더해져 만들어진 설화이다. [136] 오호야마모리 황자의 반역에 관한 설화는 『고사기』 오진 덴노 단에도 거의 유사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137] 율령제의 야마시로 국(山城國) 綴喜郡 河原村(현재 교토부 綴喜郡 田邊町 河原)에 비정된다. [138] 나라시 北郊 奈良坂 부근의 구릉을 말한다. 『능묘요람(陵墓要覽)』에서는 「大山守命, 那羅山墓, 奈良縣奈良市法蓮町字境目谷.」이라고 기재하였다. [139] 우지노미야는 『詞林采葉抄』 제1에 인용된 『山城國風土記』 逸文에서는 「謂宇治(우지)者, 輕島豐明宮御宇天皇之子, 宇治若郞子, 造桐原日桁宮, 以爲宮室, 因御名號宇治.」라고 적고 있다. [140] 『고사기』 응신천황단에는 「宇遲能和紀郞子者, 早崩.」이라 적혀 있을 뿐, 자살에 관한 내용이나 소생담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자살담은 제위를 피해 자살했다는 중국 은사담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141] 머리를 풀고 유해에 걸터앉아 죽은 사람의 이름을 세 번 부르는 행위는 혼을 부르는 행위로 중국이나 한국, 인도 등에서 널리 행해진 주술이다. [142] 오진 덴노의 비인 미야누시야카히메가 낳은 아이가 우지노 와키이라츠코, 야타 황녀, 메토리 황녀이므로 동복누이라 한 것이다. [143] 닌토쿠 2년 12월 정월조와 同30년조에는 천황이 야타 황녀를 비로 삼으려 하자, 황후 이하노히메가 반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이하노히메가 죽은 뒤인 닌토쿠 38년 정월에 황후가 되었다고 기재되어 있다. [144] 『연희식(延喜式)』 제릉식(諸陵寮式) 우지 묘(宇治墓)의 주(註)에는 「菟道稚郞皇子. 在山城國宇治郡. 兆域東西十二町. 南北十二町. 守戶三烟.」이라고 적혀 있다. 『陵墓要覽』에서는 「京都府宇治市菟道丸山.」이라 적고 있다. [145] 4세기 후반까지 박씨-석씨-김씨 왕조가 동시대에 존재했음이 밝혀진 신라로 가면 일본서기 이주갑인상을 더 신용해야 할 정도다. [146] 제10대 스진부터 간주해도 3세기 중후반을 기원전 1세기 재위로 해서 혁거세, 온조왕보다도 100년이나 기년 인상이 심하다. [147] 제1대 진무~제9대 가이카, 제12대 게이코~제14대 주아이, 제22대 세이네이, 제25대 부레쓰가 특히 그러며, 제23대 겐조와 제24대 닌켄은 실존성은 덜 의심받는 편인데 유랴쿠와 게이타이 사이에 대왕으로 재위한 게 아니라 유랴쿠와 동시대에 왕으로 병존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 [148] 여담으로 학계에서는 아신(阿莘)은 아화(阿華)/아휘(阿暉)( 진서)를 오기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아화(阿花)라는 호칭도 오기가 아닌 걸로 보인다. 따라서 '아신왕'이 아니라 '아화왕'이라 부르는 것이 더 맞다. [149] 5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백제계 도래인보다 진한-신라계 도래인과 가야계 도래인 집단의 위상이 야마토에서 더 높았고, 5세기 중반부터 백제계가 추월한다. [150] 신라-왜가 국가간에 사이가 나쁜 것과 신라계 도래인의 야마토 내에서의 규모 및 입지의 여부는 별개의 사안이다. 3~4세기 신라를 침공한 왜군 장수 중에서는 신라계 도래인으로 추정되는 인물도 많으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주민의 후손이 본국과 사이가 나쁜 경우는 의외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151] 289년 기사에 따르면 동한의 땅은 감라성(甘羅城)·고난성(高難城)·이림성(爾林城)이다. [152] 전지가 왜로 파견되고 8년 뒤(405) 아화왕이 죽자 부여설례가 임시 섭정인 부여훈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자 전지가 해씨(解氏)의 도움을 받아 귀국해 설례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아 즉위하는데, 이런 즉위 과정이 아화왕과 유사함을 고려하면 405년 당시까지도 전지왕은 나이가 많지 않았고, 397년 당시 전지가 미성년이었을 가능성을 실어준다. [153] 그 사이에는 히미코가 위(魏)에 조공한 삼국지 기사를 인용한 것밖에 없다. [154] 모든 사건에 이주갑인상이 정확히 적용된 것은 아니다. 닌토쿠 기에는 1갑자(60년)만 인하된 것으로 보이는 기사가 있으며, 1갑자 또는 2갑자에서 추가로 30년 인상한 것으로 보이는 사건도 몇몇 있다. [155] 배는 고대에나 현대에나 굉장히 비쌌다. 신라 사신들의 잘못으로 불탄 게 맞다면 책임져야 하는 일이 맞다. [156] 우와쓰쓰노오(表筒男命)・나카쓰쓰노오(中筒男命)・소코쓰쓰노오(底筒男命) 세 신령을 가리키는데 항해를 보호한다고 한다. 세 신을 가리키는 말이라 스미요시 3신(住吉三神)으로 쓰기도 한다. 《 일본서기》 <신대기> 상의 일서(5-6)에서 이자나기 이자나미를 만나러 저승에 다녀온 후 여울에 몸을 씻을 때 '스미요시 3신'이 나왔다고 설명한다. 또한 《일본서기》의 <진구기>(神功紀)에서는 진구 황후에게 신라를 정벌하라고 신령들이 계시를 내릴 때, 진구 황후가 “이런 가르침을 내리시는 신들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고 묻자 다른 신들의 이름과 함께 언급된다. 이후 진구 황후가 정벌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도 신들을 모시라는 신탁을 내렸다. [157] 1446년에 저술된 백과사전의 일종이다. 제목은 '먼지(壒) 같은 잡다한 이야기를 주머니(嚢)처럼 담은 문집(鈔)'이란 뜻이다. [158] 임진왜란 이후 제2차 조선통신사 오윤경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갔던 이경직이 확인한 일본의 역사 기록이다. 1617년 에도 막부(幕府) 관리의 소개로 《일본연대기》(日本年代記) 기록을 보고 현장답사까지 확인한 후에 자신의 저서인《부상록》(扶桑錄)에 해당 기록을 인용했다. [159] 겐로쿠(元禄) 원년(1688), 에도시대 국학자 마쓰시타 겐린(松下見林)이 쓴 역사 연구서로 상권 3책, 중권 8책, 하권 4책이다. 30년간에 걸쳐 중국, 한국의 서적 126종 중에서 일본에 관계되는 기사를 뽑아, 의문 제기와 비판 등을 더하여 편찬했다. 이 책은 당시 조선에도 들어와 한치윤이 편찬한 《해동역사》 권41 <통일본시말>(通日本始末) 편에 내용 일부가 인용되었다. [160] 여기서 원강(元康) 연호는 중국 서진 혜제가 사용한 연호로, 신라 유례왕 8년, 일본 응신 22년에 해당한다. [161] 한국에서도 이런 개념이 없는 건 아니라서 조선 숙종은 세는나이 14살에 즉위했지만 바로 친정에 들어갔다. [162] 한국 사서에는 나오지 않는 가야 소국 중 하나. 소국이라 자체적인 기록이 고려 중기까지 남지 못해 한국사에 잊힌 나라로 여겨진다. [163] 여기에 대해 신라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당시 신라가 왜를 엄청나게 멸시하던 걸 고려하면 긍정적인 대답은 못 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164] 침미다례는 단일 국가가 아니라 영산강 일대를 중심으로 한 마한 제국(諸國)이다.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해남 신월리 세력이 이때 소멸당했고, 나머지는 백제의 간접 지배를 받다 6세기 초중반에 직접 지배로 전환된다. 백제가 3세기 후반~4세기 초반 기존 마한 수장국인 목지국을 하극상하고 새로운 수장국으로 떠오른 뒤 마한 전역을 직접 지배로 전환하려 하자 영산강 일대 마한 소국들이 백제를 수장국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근초고왕이 해남 신월리 세력을 소멸시키자 백제의 간접 지배를 받아들이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165] 왜에 백제계 문화가 본격적으로 침투되는 시기는 5세기 중반 부여곤지가 왜에 파견되어 교토 개척을 주도한 뒤의 일이다. [166] 이때 백제가 다사성(多沙城)을 정복해 왜와의 왕래역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529년 3월조에 백제가 가야의 다사진(多沙津)을 정복했다는 기록이 있고 학계에서는 6세기 초중반에 영남 해안 지대를 직접 지배로 전환시키기 때문에 6세기 초중반의 사건이 4세기 중후반으로 소급 기록된 것으로 여겨진다. [167] 근구수왕이 376년에 즉위했다 나와 375년 11월에 즉위한 삼국사기의 기술과 차이가 있는데, 일본서기에서는 왕이 사망하고 다음 해부터 다음 왕의 원년으로 셌고, 삼국사기에서는 왕이 사망하고 다음 왕이 즉위한 그 해를 원년으로 삼아서 해석이 엇갈린 것으로 추정된다. [168] 내물 마립간 기록에 따르면 360년대~370년대에는 백제의 눈치를 봐서 왜의 공격도 참았지만, 370년대 후반 고구려와 가까워지고 전진(前秦)에 사신을 보내는 등 독자적인 외교 행동을 보였고 373년 독산성 성주와 300명이 신라로 귀순하자 백제가 돌려달라 요청했지만 내물이 백제왕을 역으로 비웃는 답장을 보내기도 했다.(단 383년이 10년 인상되었을 수도 있다) [169] 원문에서는 야마토(大倭) 천황이라 나오지만 실제 정황을 보면 백제 근구수왕으로 추정된다. [170] 게이타이 왕조 성립 전까지 대왕이 된 이후에도 나라현에 도읍하지 않은 인물은 나니와難波(현 나라시 주오구)를 고수하던 닌토쿠 덴노뿐이다. 닌토쿠 덴노는 스진~부레쓰까지 이어지는 야마토 대왕들 중에서 유독 이질성이 강한 편이다. [171] 오진 덴노가 320/321년생일 경우 당시 49/50세가 되는데, 다른 아들과 달리 우지노 와키이라츠코가 어리다는 평을 들었다면 우지노 와키이라츠코는 늦게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우지노 와키이라츠코가 어른이 못 될지도 모른다는 닌토쿠의 말은 후계자가 어릴 때 왕이 사망하면 후계자의 안위를 보장할 수 없다는 뜻으로 보인다. [172] 우지노 와키이라츠코가 더 이전에 사망하고 우지노 와키이라츠코의 아들에게 이어졌다 가정해도 417년 기사가 우지노 와키이라츠코가 맞다면 이 시점에서 50대 후반~60대가 되어 당시 기준으로 적은 나이가 아니다. [173] 고대 국가가 막 형성되었을 당시 여러 왕계가 번갈아서 즉위하다 하나의 왕계로 고정된 뒤, 후대 사서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왕계로 조작한 사례는 동서를 가리지 않고 차고 넘친다. 각종 역사왜곡을 자행한 일본서기, 고사기로 가면 말할 것도 없다. [174] 스진-스이닌 부자, 리추-한제이 형제, 인교-안코&유랴쿠 부자만 실제 부자-형제지간이고, 나머지는 전부 다른 지역을 기반으로 한 다른 가문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겐조-닌켄은 대왕 가능성에 논란이 있는 거지 실존한 걸로 여겨지나, 이들이 친형제가 맞는지의 여부는 별개다. [175] 우지노 와키이라츠코가 늦게 태어났다는 정황이 있기에 미야누시야카히메는 오진이 늦게 왕후로 삼은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176] 주고쿠 오카야마현 히로시마현 동부로 7세기 말 비젠(備前), 빗추(備中), 빈고(備後)로 분리되었으며, 8세기 비젠에게서 미마사카(美作)가 추가로 분리되었다. [177] 454년 당시 오오쿠사카 황자는 중병을 앓으며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말한다. 따라서 당시 기준 고령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178] 그 외에는 후쿠시마현, 니가타현, 와카야마현, 시마네현, 가고시마현에서 '타카기'라는 지명이 사용되었다. [179] 고구려 말기 최고 권력자 가문인 연(淵)씨를 일본에서는 '이리'씨라 불렀다. 대표적으로 연개소문을 '이리카스미'라 불렀다. 고구려계 도래인들 중에서 왕성(王姓) 다음으로 많이 언급되는 성으로 그 위세를 엿볼 수 있다. [180] 일본서기 271년 3월 3일자에는 히무카노 이즈미노 나가히메의 자식으로 두 아들만 언급되며, 400년 7월 4일자에는 리추 덴노의 황후 하타비 황녀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거기다 고사기에는 하타비 황녀가 리추 덴노의 비라는 기록이 없으며, 405년 1월 6일 쿠사카노 하타비 황녀를 황후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유랴쿠 덴노의 황후 쿠사카노 하타비 황녀와 이름이 완전히 동일하기 때문에 오기의 가능성이 적지 않다.